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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벌귀족

last modified: 2018-04-18 01:19:19 Contributors

Contents

1.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이후 형성된 중국의 지배 계층인 門閥貴族
1.1. 개요
1.2. 주요 문벌귀족
1.2.1. 산동사성집단
1.2.2. 관중대성집단
1.2.3. 강남귀족
1.2.4. 산서대성집단
2. 고려 전기의 지배층인 文閥貴族(혹은 門閥貴族)
2.1. 개요
2.2. 흥성했던 배경
2.3. 권력 기반
2.4. 몰락
2.5. 유명한 문벌귀족

1.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이후 형성된 중국의 지배 계층인 門閥貴族

1.1. 개요

중국사에서 위진남북조 시기의 문벌귀족은 후한 시기에 지방을 거점으로 하여 세력을 갖춘 호족 세력이 삼국시대 위나라가 들어서면서 구품관인법으로 주요 관직을 공식적으로 독점하게 되면서, 정치적 실권과 경제력을 모두 갖추고 폐쇄적인 신분 집단으로 변화하면서 형성되었다.

다른 기득권 집단과의 차이는 국가가 망해도 세력을 그대로 유지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벌귀족중에서 역사가 오래된 집안은 한나라부터 고위관료직에 오른 기록이 있을 수준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가문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해서 최전성기가 지나가 버린 당나라 시기에도 황제도 벼락출세한 한미한 가문이라는 소리를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문벌귀족의 격을 따지는 씨족지를 편성할 때마다 항상 당 황제들은 아니 왜 황실이 최고 등급 가문이 아닌 건데? 하고 따지고 들면서 억지를 부려야만 최고 가문 자리로 끼워넣어 줄 정도.훗날 주원장은 직접 가시몽둥이를 휘두르며 신하들을 계도합니다.

문벌귀족이 가장 세가 강했던 시기는 위진남북조시대이며 과거제가 시행된 , 시대에도 위세가 계속되었으나, 당 말기 혼란으로 중앙 귀족들의 기반이 날아가면서 일단은 쇠퇴하게 된다.

다만 쇠퇴하면서도 과거제도에 적응한 집안은 옛 권리를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북송시대까지도 관료가문으로 살아남아 귀족으로서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이런 집안들은 관료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주류를 형성하였다. 북송사마광서진의 황족이었던 하내 사마씨의 후손이었고, 명나라 때의 양명은 태원 왕씨 집안의 자손이었다.

1.2. 주요 문벌귀족

일단 당나라 기준시점에서 크게 네 집단으로 구분된다.

1.2.1. 산동사성집단

북위 시대까지의 문벌귀족의 핵심집단. 통칭 산동귀족, 또는 하북귀족. 가장 순수한 한족 문화 전통을 대표한다고 자처하였다. 이중에서도 최고 가문인 청하 최씨(清河崔氏), 범양 노씨(范陽盧氏), 형양 정씨(滎陽鄭氏), 태원 왕씨(太原王氏)를 가리켜 사성(四姓)이라 불렀는데 나중엔 전체를 일컫는 대명사가 된다. 이들은 자기들끼리만 결혼했고 외부 귀족가문과 결혼할 때는 막대한 '빙재(聘財)' 를 받았다고 한다. 이들의 명망은 최고 수준이고 배타성도 높아서 흠좀무하게도 당 황실도 이들보다 격이 낮은 벼락출세자 가문으로 여겼다. 이들은 5대 10국 시절까지도 사회적으로 우대를 받았으나, 후손들의 유학 실력이 형편없음이 드러나면서 그 후광도 빛이 바랐고, 과거제가 확대 실시되면서 서서히 묻혀갔다.

1.2.2. 관중대성집단

통칭 관롱귀족이라 불리는 집단. 우문태에 의한 서위 건국부터 대두되었다. 특히 우문태와 동향 가문인 무천진 출신 가문들이 8주국 12대장군을 독점하면서 관롱귀족의 핵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서위, 북주, 수, 당의 정치적 중추 세력이였고, 특히 군권을 장악하여 무력과 정치력을 한데 아울렀지만 측천무후의 등장으로 인해 약화되었다. 배타성도 낮은 편이여서 한족 국가가 아닌 국가의 왕족, 귀족과도 통혼하고 문화를 받아들이는 호한융합적 성격을 띄었다. 황실, 당 황실도 이쪽에 속한다. 신귀족이라 불린다.

1.2.3. 강남귀족

강남 지역의 귀족으로 오호십육국시대에 남쪽으로 내려간 피란민에서 시작된 집단. 그만큼 배타성은 가장 강했다. 원래는 산동사성집단이 강남귀족안에 있었으며, 남조의 실권을 움켜쥐고 좌지우지할 정도로 강력했으나, 양나라 말기의 후경의 난을 겪고, 통일이 수나라에 의해 이루어지면서 대타격을 연이어 받은 탓에 정치군사적 힘은 약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개발된 강남의 부를 독점하였기에 가장 부유한 귀족 집단이였다.

1.2.4. 산서대성집단

당나라 건국시 그 기반이 되었던 산서 일대의 귀족들. 명망이나 권세는 위의 세 집단에 못했다. 관중대성집단에 흡수되어 관롱귀족 안에 포함되었다. 이민족간 혼혈이 가장 심했다.

2. 고려 전기의 지배층인 文閥貴族(혹은 門閥貴族)

2.1. 개요

과거 시험을 통해 권력을 보장받던 조선양반과는 달리 부와 권력을 합법적으로 세습하였기 때문에 '귀족'이라고 부르며, 그 중에서도 5품 이상[1]의 귀족들을 말한다. 특히 왕과 결혼할 수 있는 가문들은 몇몇으로 제한되어 있었는데, 이들을 재상지종이라고 해서 특히 강력한 권력을 누렸다.

2.2. 흥성했던 배경

고려는 기본적으로 빠른 기간내에 통일을 한 대가로 왕권이 약하고 지방의 호족이 강성했던 왕건이 군사력과 결혼정책으로 통합한 호족연합국가로 봐도 될 정도였다. 그러기에 혜종, 정종 시기에 혼란이 발생했고 광종 시기 호족들을 나름 억압/숙청을 한다 했지만 경종이 즉위하면서 과거로 새로 들어온 호족+기존 중앙정치에서 활동하던 호족들이 중앙의 관직과 결혼을 통해 하나가 되어 생긴 것이 문벌 귀족[2]이다.

광종의 치세가 끝나고 경종이 즉위가 시작된 후 다시 권력을 되찾은 그들은 성종 시기 최승로의 5조 정적평, 시무 28조같은 전대왕들의 비판 및 그들 중심 체제를 정당화, 수단화시키는 정책들을 내놓으면서 정권을 틀어쥔다. 이들은 목종, 현종대의 혼란과 여요전쟁에도 굴하지 않고굴할 수가 없지 나라에 관료가 자기들 밖엔 없는데권력을 지켜나가 덕종~정종 이후[3]문종부터는 고려의 일부 시기를 빼고는 무신정권이 일어날 때까지[4] 모두 확고해진 문벌귀족이 왕권보다 강력히 득세하던 시대였다.[5]

이들은 조정 관료 뿐 아니라 군사지휘권[6]을 쥐고 나라를 다스렸다. 동북9성으로 유명한 윤관도 문관 시험을 통해 등용된 사람이다.

광종 이후의 왕들은 평가가 대단히 어려운데, 왜냐하면 워낙 문벌이 강해서 왕들이 자의적으로 뭘 했는지 알아내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종 이후에는 사실상 왕과 귀족의 연합정치라고 봐야 할 정도의 상황이 되며, 국왕들은 나름대로 왕권 강화 시도를 해보지만 결국 실패한 경우가 많다. 경종대에 전시과 제도가 실시되면서 토지 수조권을 지급받게 되면서 경제적 기반이 마련되었고, 성종 시절 관제가 정비되면서 음서제를 비롯 여러 혜택들이 늘어나 이후 신라 6두품 출신이나 경기 인근 호족 등에서 학문을 익힌 자들이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외의 지방 향리나 향,소,부곡 출신들도 과거에 합격할 수는 있었으나 귀족과 좌주-문생 관계를 맺거나 혼맥에 끼지 못하면 요직에 오르기 힘들었다. 또한 음서 출신으로 5품 이상 고위직에 올라 음서를 통해 지위를 세습하는 사람들도 조선에 비해 많았다. 또한 시험관인 귀족이 자신의 지인을 뽑기 쉬웠고, 좌주가 사학 출신인 경우 자신들의 제자들에게 유리하였기에 과거도 귀족들에게 장악되어 갔다. 개경 사학들은 주로 귀족 자제들이 다녔고, 이러면서 국자감이 쇠퇴하여 문종이나 숙종, 예종 등의 국왕들은 국자감 중흥에 힘써 이를 억제하려 하였다. 예종대 한안인이나 인종대 묘청, 정지상 등이 향리 출신으로 국왕의 친위 세력이 되었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귀족 세력에 밀려 살해되거나 숙청당하였고, 인종대 김부식, 윤언이 등을 중심으로 귀족 정치는 지속되었다.

반면에 아무 것도 안하고 상대적으로 좋은 환경 속에서 문벌귀족인 재상들이 국정을 운영하는 것을 구경만 하다 끝난 왕들도 몇몇 있는데, 역사를 기록한 이들이 결국 문벌 귀족들이 속한 계층의 후계라 이들에 대한 평가가 괜찮게 나온다. 그 이유는 일단 역사를 기록한 이들도 문신이고, 왕과 귀족의 공치라는 것은 조선시대 초기 사대부들과 사림들의 이상에 가깝다. 애초에 문벌귀족과 고려 후기 사대부은 중간에 무신정권과 권문세족이라는 절대 양립할 수 없는 세력들이 끼어있기 때문에 오히려 상당히 연결고리가 강하다. 문벌귀족들이 유학을 강조한 것도 그렇다. 시무 28조를 써서 올렸던 최승로라든지.

2.3. 권력 기반

문벌귀족은 음서를 통해 권력을, 공음전을 통해 경제력을 세습하면서 성장하였고, 앞서 언급한 재상지종들은 왕족과 인척 관계를 맺으면서 그 특권을 공고히 했다. 특히 '이자겸의 난'으로 유명한 이자겸의 가문인 경원 이씨(인주 이씨)는 고려 문종 대부터 꾸준히 집안의 딸들을 왕비로 들이며 성장한 대표적인 가문이다. 당장 문종의 비 3명, 순종의 비 1명, 선종의 비 3명, 예종의 비 1명, 인종의 비 2명이 경원 이씨 가문에서 나왔다. 11대 문종부터 17대 인종까지 8명의 왕 중에서 경원 이씨 집안 딸과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14대 현종과 15대 숙종 2명뿐이다. 그게 아니라도 대다수의 가문들은 혼맥으로 이어져 있어서, 6촌 이내 결혼 금지령까지 나왔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이자겸의 난 이후 문벌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묘청 등의 서경파를 중심으로 서경 천도 운동이 벌어졌다. 문벌귀족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기득권을 지키고자 당연히 서경으로의 천도를 반대했고, 처음에는 서경파의 손을 들어주던 인종이 마지막에는 결국 서경으로의 천도 계획을 취소하였다. 이에 서경파가 반발하며 벌어진 것이 '서경 천도 운동'이다. 그러나 이 난은 결국 문벌귀족의 대장이나 다름 없었던 경주 김씨 김부식에게 진압되며, 문벌귀족의 위치는 공고화되는 듯 했다.

2.4. 몰락

시스템상 하극상이 일어나기 힘든 구조인데다, 세습성과 진입 허들이 높다는 점으로 인해 아무리 늘어나는 것을 통제하려 해도 늘어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고 또 땅을 주는 제도의 특성상 나중에는 지급할 토지가 부족해 군인전의 몰수와 문/무관 간에 토지 지급량 차별화등 무신들의 토지등을 빼앗기도 했으며 이런 상황속에서 국가의 토지는 점점 줄어들어 세수가 줄어들고 군대는 약해지고 중앙정부의 영향력은 약해지면서 전국의 토지와 경제력은 점점 문벌 귀족 가문들 손에 들어갔으며 문벌이 아닌 족벌과 지역대립이 심화되었으며 또한 그들간에도 더 많은 권력과 토지를 차지하기 위해 대립했다. 그 과정에서 문벌귀족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등장했지만 별 성과를 내지 못하고 문벌 귀족들에게 진압당한다.
거기에 숭문경무 정책으로 차별당하고 있는 판에 국자감 내의 강예제[7]를 폐지하는 등 계속되던 천대에 결국 분노가 폭발한 의종 때 무신들의 난으로 인하여 상당수가 끔살되었다. 이 때 문벌귀족들은 대타격을 입은데다가 무신들이 재산을 빼앗는 바람에 경제력도 크게 상실하였다. 하지만 몇몇 문벌귀족 가문들은 무신정권 이후에도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다가 권문세족으로 다시 부활한다. 최충헌의 우봉 최씨 집안의 경우 외척이었던 장흥 임씨를 비롯한 여러 문벌가문과 혼인을 맺고 통교하면서 이들의 지지를 얻어 정국을 운영했으며 살아남은 귀족들은 특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후 원 간섭기의 '재상지종' 가문들에도 다수가 전래의 문벌 가문들이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조선 이후로도 명문가로서 세력을 유지했다. E.와그너 등의 미국 학자들은 이런 것을 들면서 조선의 사대부 계층이 고려의 양반 귀족들과 단절적이라는 한국 사학계의 기존 학설을 논박하기도 했다.

참고로 문벌귀족 입장에서는 엄청난 사태인 무신 집권 시대를 연 보현원의 난의 시발점이 된 사건 중 하나는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정중부수염을 그슬른 것이었다. 어찌보면 자신들이 스스로 화를 자초한 셈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누가 그 때 그것을 예상했을까.

2.5. 유명한 문벌귀족

해당 가문에 이름이 거론된 사람은 역사서에도 언급된 유명인이다.
  • 강릉 김씨 : 김인존
  • 경원 이씨[8] : 이자연, 이자겸
  • 경주 김씨 : 김부식, 김돈중
  • 경주 최씨 : 최언위, 최승로, 최항
  • 공암 허씨[9]: 허원, 허재
  • 광양 김씨 : 김황원
  • 남평 문씨 : 문다성, 문극겸
  • 수주 최씨(현재 수원 최씨): 최누백, 최사위
  • 안산 김씨 : 김은부[10]
  • 정안 임씨(현재는 장흥 임씨 또는 관산 임씨): 임이, 임득이
  • 철원 최씨(현재 동주 최씨): 최준옹
  • 청주 이씨 : 이공승
  • 파평 윤씨 : 윤관, 윤언이, 윤인첨[11][12]
  • 평산 박씨 : 박인량, 박경인
  • 해주 최씨 : 최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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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일설에서는 2품 이상이라고 규정했으나 그렇게 따지면 너무 범위가 줄어드는 문제가 있다. 실제 관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단계라는 설도 있다(즉 1급집단, 2급집단…).
  • [2] 사족이지만 이들의 한자표기는 文閥貴族다. 門閥貴族이라 하는데도 있지만 공식적 표기는 文閥貴族이다. 이전 신라시대의 골품제와 비교하면 음서제도 등을 통해 가문 대대로 벼슬을 할 수 있었으므로. 어쨌든 이들은 원칙상 과거를 통해 올라오기도 가능은 했으므로 확실히 '6두품 보다는' 발전한 체제이다.
  • [3] 정종은 확실하지 않기에 나중에 혹시 아는 위키러가 있으면 채워주시기 바랍니다
  • [4] 숙종에서 예종에 이르는 시기는 고려사에서 광종 집권시기와 더불어서 보기 드물게 왕권이 강하던 시기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빼야한다.
  • [5] 우리가 기억하는 문벌귀족이 활개치는 시대는 정확히 말하면 문종부터다.
  • [6] 이것은 이전에도 있던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실무는 무관들이 했다. 애시당초 어느정도 군사적 능력이 되는 문신을 지휘관으로 임명하긴 했지만 실전부대는 이들이 지휘했기 때문에 여요전쟁에서의 그 승리들이 온 것이다.총사령관인 강감찬같은 이들의 역할은 대전략, 즉 목표를 제시하며 자신들이 필요하다 싶은 영역에서 나서는 것이었다.
  • [7] 무학재로 학생들에게 무술을 가르치는 무신 교육기관으로 봐도 무방하다.
  • [8] 고려 시대 때 경원이 인주로 지명이 바뀌어서 인주 이씨로도 불렀다.
  • [9] 현재 양천 허씨
  • [10] 자기 딸들을 왕들에게 여럿 시집 보내서 왕실을 장악했으며, 훗날 그의 아내의 조카인 경원 이씨의 이자연이 이를 그대로 벤치마킹한다. 그리고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겸은…. 말을 맙시다
  • [11] 이들은 다른 가문들과 달리 자주적 정신을 지향했다.
  • [12] 조동일, '한국문학통사1', 지식산업사, 2005, p391-3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