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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권

last modified: 2015-06-03 10:19:32 Contributors


Contents

1. 기원
2. 성립에서 소멸까지
3. 집권 순서 및 기간
4. 특징
5. 무신정권기의 반란
6. 평가
6.1. 고려와 조선
6.2. 일제강점기
6.3. 군사정권
6.4. 민족주의
7. 미디어


고려 중기에 문신들에 비해 차별대우를 받아 불만이 쌓여 있던 무신들이 무신정변을를 일으켜서 정권을 차지한 시기로, 한국 역사상 가장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때.

여담으로 현대에는 무신정권이라고 하지만, 고려시대에는 무(武)를 피휘해서[1] 당대에는 '호신(虎臣)'이다.

1. 기원

사실 고려에서 무신이 권력을 잡은 때가 그 전에도 있었다. 강조, 김훈과 최질 등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사례는 있었지만 일시적이었다. 당장 김훈과 최질도 둘 모두 상장군으로서 거란()의 2차 침공 직후, 무신의 영업전을 빼앗은 문신 황보 유의·장연우 등을 잡아 유배 보내고 현종을 위협, 정권을 잡았다. 하지만 몇달 뒤 술자리(정확히는 현종과 서경 유수 왕가도의 책략)에서 싱겁게 토벌했을 만큼 일시적인 권력만 잡았다.

강조는 본래 그 출신이 골수 무인은 아니었던 듯하지만, 후대 무신정권의 프리퀼이라 볼 만큼 집권 양상이 비슷하기는 했다. 하지만 여요전쟁 당시 싸우러 나갔다가 포로로 잡힌 뒤, 전향을 거부하고 처형을 겪어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그리고 무신집권자들은 대선배가 객기부리다가 맞은 최후를 보고 교훈을 얻었는지 외적이 쳐들어와도 철저히 몸을 사렸다.(...)

하지만 이런 일의 반복은 고려왕조가 전 시대의 신라보다도 더 쿠데타에 취약한 체계였다란 뜻이다. 당장 신라에서 났던 정변은 같은 진골 귀족을 빼면 후삼국시대 이전까지 성공한 예가 없었다. 그것도 천민 출신이 무력적 소양을 바탕으로 일인지하 만인지상까지 오른 사례는 고려가 독보적이다. 신라가 얼마나 철저한 골품제 사회였는지 엿볼 만한 대목이기도 하다.

기본적인 무신정권의 성립 원인은 고려의 문치주의 때문이다. 애초에 강조를 빼면 3차례의 무신란 모두 무신에의 차별 대우가 원인이었다.

고려의 무신 차별은 조직적이었다. 예종 때와 멸망 직전인 공양왕 때를 빼면 무과를 한 적이 없었고, 무관들도 명목상으로는 정 1품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조선과 달리[2] 고려라면 무관들은 정3품 상장군이 끝이었다. 강감찬, 윤관 등도 문관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치성에도 고려의 군 통제는 사실상 없었다. 이런 취약성은 고려를 위기의 순간마다 무신에게 무너지게 했다. 최후의 순간에도 최영이성계가 권력을 틀어쥐고, 끝내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왕에 올랐으니.(...)

그런데 이런 문치주의의 원조였던 중국송나라와 이후 한반도의 왕조인 조선은 딱히 고려처럼 중앙정부에서 무신들의 난횡이 없었으니, 문치주의 자체보다는 고려의 운용에 문제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일단 조선은 양반이라는 용어에서 볼 수 있듯이 무반이 낮기는 하지만 그래도 같은 지배계급에 포함시켜주었고 무반직은 고려와 같은 정3품이 끝이었지만 승진이 필요한 무반에게 문반작위[3]를 줌으로서 품계를 올려줌으로 문반에 합류시켰다. 이러한 무반대우는 3대중 한명이라도 관료가 되야 인정받는 양반계급의 유지를 위해서 어려운 문과보다 무과를 시험보는 경향으로 나타나기 까지 하였으며 송나라는 고려와는 달리 문벌귀족이 뿌리박힌 체계는 아니었고, 무신들의 품계는 깎았지만 대신 돈은 많이 줬다. 그 밖에도 무관에게는 야전지휘 권한 정도만 주고 총지휘는 문관 출신에게 맡기며, 승진이나 전출을 명분삼아 무관들을 자주 이 보직 저 보직으로 옮기면서 사병화를 막는 등 대비를 철저하게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병권과 군사적 수준이 지나치게 약화해 금나라몽골 제국[4]의 침입에 멸망했으니 역사의 모순이다.

2. 성립에서 소멸까지

성립되기까지 간단한 패러디 만화 : 정체성을 깨달은 정중부

일단 무신정권은 기존의 무인들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는 것과는 좀 다르다. 당장 일개 무인이 권력을 잠시 잡는 일시적인 사례로 끝나지 않고 무신들끼리 돌려먹기를 하면서 왕권과 조정은 완전히 허수아비였다. 세습하는 최씨 정권까지 가면 독재로 변질하면서 거의 준막부체제인데, 외척이냐 무신이냐만 다르지 사실 조선 말기 세도정치와 비슷하다.

그래서 1170년(의종 24년) 6월 보현원의 무신정변을 시작으로, 1270년(원종 11년) 5월 임유무의 숙청을 끝으로 한다. 딱 100년.

무신정권의 정권 교체는 기본적으로 쿠데타반란으로 일어났고, 사회에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했다. 때문에 무신정권은 고려 말기 신분제의 근간을 뒤흔든 결정타 가운데 하나였는데, 무신정권 뒤의 고려는 무신정권 전의 고려와는 나라 이름과 왕족만 같지 사실상 다른 나라라고 봐야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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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정중부의 기간이 긴데, 그 까닭은 이고나 이의방의 시대에도 정중부가 어느 만큼 권력을 잡았으며, 무신정변 당시 무신의 실질적인 리더였고, 합의로 정중부가 얼굴마담식으로 집권해서였다. 따라서 정중부의 집권기간 속에 이고나 이의방의 집권기간이 들어간다.

집권순서대로 (이고),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과 이후의 최씨 정권이 흔히 무신정권으로 손꼽힌다. 이들의 기록은 고려사에서 경대승만 열전, 나머지는 반역열전에 있다. 임연과 임유무는 함께 하나의 열전으로 수록했고, 사실상 못 집권한 이고는 별도의 열전이 없다.

그 뒤에도 삼별초 출신의 김준, 임연, 임유무가 정권을 잡았으나 원종을 등에 업고 이들을 견제한다. 끝내 임유무가 개경 환도에 반대하다가 처형받고 다시 개경으로 돌아오면서 고려는 무신정권에서 벗어나지만 그 때부터는 원 간섭기라 안습.

잔당들이 삼별초의 난으로 저항하지만 제주도의 저항을 끝으로 모조리 전멸하면서, 무신정권은 완벽하게 사라졌지만, 이들 세력 일부가 오키나와로 탈출했다는 설이 나왔다. 이 시기에 오키나와에 갑자기 거성이 나오는 등 발달한 건축기술이 등장하였으며 최근 오키나와 유적지에서 대규모로 고려기와가 쏟아진다고 한다. 다만 삼별초 세력이 아니라 조선 건국 이후에 옮겨간 유민이라는 설도 있다. 시기는 못 확정하지만 12~14세기 사이에 한반도에서 오키나와로 대규모 유민이 건너갔음은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기.관련기사

3. 집권 순서 및 기간

집권자 기간 기타
이름 1170~1196
(26년)
무신정권 전기
이고
(6개월)
1170.6~1171.1 사실 세력이 강했지만 서로 견제하던 시기라서 집권이라 보기에는 어렵다.
무신 강경파로 문신을 모조리 죽이려고 했지만 정중부 등이 말려 무산.
정권 장악을 시도하다가 이의방이 제거.
이의방
(4년)
1171.1~1174.12 딸을 태자비로 삼음. 조위총의 난을 토벌하러 갔다
실패하여 돌아오던 중 정균이 제거.
정중부
(5년)
1174.12~1179.9 문하시중에 올랐지만 실권은 아들 정균, 사위 송유인이 휘두름.
하지만 경대승의 쿠데타로 몰살.
경대승
(4년)
1179.9~1183.7 자신의 경호를 맡기러 도방을 만듦.
이후 병사. 야사에 따르면 정중부의 꿈을 꿨다고.
이의민
(13년)
1183.7~1196.4 "족보에 따르면" 안남국 왕자의 후손. 하지만 그 집안 족보 자체가 기록이 엉터리라서 떡밥.
실상은 천민 출신으로 의종을 직접 살해함.
도방을 폐지했고, 경주를 기반으로 "신라 부흥" 및 황제 즉위를 계획했다는 설도 있음.
최충헌 형제가 살해.
이름 1196~1258
(62년)
최씨 정권
최충헌
(최난)
(23년)
1196.4~1219.9 도방을 재설치하고, 교정도감을 세움.
최충헌 이후 임유무까지 무신정권의 권력자들은 모두 교정별감을 맡았다.
네 임금(신종, 희종, 강종, 고종)을 세우고 두 임금(명종, 희종)을 몰아냄.
최우
(최이)
(30년)
1219.9~1249.11 정방을 자택에 설치.
그 밖에도 서방, 야별초(이후 삼별초로 바뀜)와 마별초 설치.
몽골이 침입하자 강화도 천도를 주도함.
최항
(8년)
1249.11~1257.4 상복을 이틀 만에 벗고 아버지의 첩과 간통한 패륜아.
대몽항쟁 중 귀주성 전투에서 필사적으로 버틴 김경손을 처형.
최의
(1년)
1257.4~1258.3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
아버지의 가신이던 김준, 임연이 살해함.
이름 1258~1270
(12년)
무신정권 후기(말기)
김준
(김인준)
(10년)
1258.3~1268.12. 대몽항전을 주장하지만 원종의 즉위로 실패. 이후 임연이 살해.
임연
(임승주)
(1년
2개월)
1268.12~1270.2 원종을 폐위 시키고 안경공 창(영종)을 잠시 세우는 등
권력 유지에 노력. 의 세력을 두려워하다가 등창으로 사망.
임유무
(3개월)
1270.2~1270.5 임연의 아들. 실권은 외조부 이응렬, 임연의 심복 송군비가 휘두름.
끝까지 개경 환도에 반대하다가 살해를 겪음.

보면 알겠지만 최씨 정권이 절반을 훨씬 넘게 차지한다. 고려판 세도정치. 간략화하면 (혼란) - 이의민 - 최충헌 - 최우 - 최항 - 김준인데, 이들의 집권기간이 84년이다.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도 인상적이지만...

4. 특징

원래 무신정권의 초기라면 일인이 모든 것을 쥐고 흔드는 독재체제가 아니었다. 당장 이고를 중심으로 한 삼두시기 - 이의방 - 정중부까지는 그나마 균형을 유지했는데, 이는 무신들의 합좌기관인 중방의 권한이 무신정변으로 엄청나게 커졌기 때문이다. 뒷날 이고가 죽으면서 삼두 균형이 깨져도 중방의 권한이 이의방과 정중부를 적절하게 견제하면서 나름 균형을 지켰다.

하지만 경대승이 이를 무시하고 중방을 무력화시키면서 무신정권 집정자에 건 최고의 견제세력이 사라졌고, 이의민을 거쳐 최충헌 대에 이르러선 세습까지 한다.

덕분에 전반적으로 사회와 국가기강은 막장이었다. 원래 시초부터 문신을 배제한 상태에서 내정경험이 없던 무신들이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하니 당연했으며, 나중에 갈수록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사병을 대규모로 육성할 필요가 나타나 선량한 사람이라도 부정축재에 열을 올려서였다.[5]

가끔 이의민, 김준이란 천민 출신 권력가의 존재나 만적, 망이 망소이의 난, 김사미 효심의 난 등의 민중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설도 있지만, 그래봐야 천민 출신 권력가들도 일 못하긴 마찬가지였으며 민중반란은 사회에 변혁을 못 일으킨 채 속속 진압을 겪었다.천민이 상민을 수탈하는 긍정적인 무신정권

더욱이 최씨 정권이 들어선 뒤로는 몽골의 침략에 고통 받는 백성은 나몰라라 하고 강화도에 가서 권력 유지나 애썼다.[6] 또한 무신정권과 뒤이은 원 간섭기로 나타난 권문세족은 고려 말까지 기득권 세력으로 해악을 끼쳤다.

고려 말기 공양왕정몽주마저 죽고 더 방법이 안 보이자 이성계에게 군신의 동맹을 맺자고 요청하여, 무신정권을 재현해서라도 왕조를 지키려는 의지를 보였지만 쓸모없었다.궁극의 무신정권기는 바로 이성계의 신군부 집권기

이성계가 무신집권자들과 다른 점은, 우선 무신집권자들은 군부의 주요 장군이었으나 이성계와 같이 처음부터 호족으로서 자신이 독점적으로 부릴 강력한 지방 권력자의 지위까지는 없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중앙 군부의 장군으로서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할 뿐이었다. (최충헌은 이 점을 염려했는지 집권한 뒤에 고향 진주에 어느 만큼 기반을 만들었다.)

군사력도 사실 고려 후기의 권문세족들보다 무신정권기 무신들은 조금 초라했다. 어느 정도 사병은 있었지만, 경대승의 도방에서 보듯이 초창기에는 100여명 남짓이었고, 이의민이 경대승을 두려워했다는 기록을 보면 다른 인물들도 경대승보다 그리 숫적으로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씨 무신 정권의 전성기에도 정점이었던 최씨 무신 정권의 사병은 천명 정도일 뿐이었다. 이들은 그 이상으로 고려의 중앙 병력을 움직일 수 있었지만, 고려 말기의 이성계처럼 실전에서 사병으로만 2000명(...)를 이끌고 오는 무지막지한 짓은 기록에 없다. 사실 이성계도 여진족과의 연계, 북방 지역의 정예라는 특수성을 빼면 이 무렵에 특별히 세력이 압도적으로 세지는 않았으니, 당시 비슷한 수준의 군사력을 갖춘 장군은 상당수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7] 끝내 국가를 들어엎었던 무신 집권자들도, 그 정점에 달한 전성기 최씨 가문 정도를 빼면 고려말기 권문세족보다 세도가 강성했을지 의문이다. 권문세족의 권력은 나름의 명분과 더불어 원나라라는 막강한 배경을 등에 업었던 반면, 무신정권기의 무신 세력은 이런 뒷배 없이 자신들끼리 이룬 세력임도 생각해야겠지만.

또한 국가의 수호자로서 정당성을 거둘 만큼 외적을 격퇴해 화려한 '군공'과 정도전 같은 유능한 문신들이 있던 이성계와 달리, 순전히 군공이 없고 무식한 무신들만 나왔으니 통치능력이나 국가에의 비전이 없었고, 권력만 잡았지 그 이상으로 나가지 못했다.[8]

5. 무신정권기의 반란

무신정권기에는 무신들이 집권한 뒤 문신들의 무신들에 건 반발, 노예의 신분 상승, 집권자들의 백성 수탈, 몽골군의 침입 등 여러 혼란이 겹치면서 이에 따른 반란, 민란 등이 많았다.무인시대를 보면 거저 외울 만했다.[9]

  • 1172년 철주민란, 창주민란, 성주민란
  • 1173년 김보당의 난
  • 1174년 제1차 개경승도의 난, 조위총의 난
  • 1175년 석령사의 난
  • 1176년 망이 · 망소이의 난, 손청의 난
  • 1177년 김순부 · 김숭의 난(제1차 의주적의 난)
  • 1182년 관성민란, 부성민란, 죽동의 난
  • 1187년 조원정의 난
  • 1190년 동경민란
  • 1193년 김사미 · 효심의 난
  • 1198년 만적의 난
  • 1199년 명주민란, 김준거 · 김준광의 난, 금초의 난
  • 1200년 정방의의 난, 금주 잡족의 난
  • 1202년 이비 · 패좌의 난
  • 1217년 최광수의 난
  • 1218년 이장대의 난
  • 1219년 한순 · 다지의 난(제2차 의주적의 난)
  • 1200년 밀성 관노의 난(밀성 관노 투속 사건), 진주민란, 광명 · 계발의 난
  • 1217년 제2차 개경승도의 난
  • 1231년 충주 노군의 난
  • 1232년 이통의 난
  • 1237년 이연년 형제의 난(백적의 난)
  • 1257년 안열(安悅)의 난
  • 1270년 삼별초의 난
  • 1271년 숭겸의 난

6. 평가

6.1. 고려와 조선

무신정권 붕괴 뒤 즉위한 왕들은 무장들의 권력 장악을 극도로 견제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공민왕이 공을 세운 무장들은 일단 의심하고 보는 등 무장세력을 아주 경계했다.

조선 건국 이후 지방세력의 군권장악을 경계했었고 사병혁파 등의 여러 조치를 한 까닭도 사실 무신정권의 악몽 탓이기도 했다. 게다가 조선초기의 그 많은 왕자의 난이나 반란 사건의 악몽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당연히 고려 무신정권과 그 수장들에게 조선시대의 시각은 결코 좋지 않았다. 고려사의 "반역 열전"을 수놓는 무신들의 이름을 보자...

6.2. 일제강점기

일제 강점기의 일본도 조선의 당파싸움이나 정치의 막장성을 홍보하는 식민사관 도구로서 강조해서 무신정권을 다뤘으며, 고려 초기의 문벌 귀족 시대를 후지와라와 같은 헤이안 시대, 고려의 무신정권을 일본사 내부의 막부체제에 비교해 봉건정치를 하려다 말았고, 다시 고대국가로 조선이 후퇴하였다며 봉건주의 결여론을 주장하여 식민사관의 정체성론을 근거하는 왜곡의 도구로 삼으려 했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메이지 유신은 막부체제 타도 이후였다. 그리고 같은 무신정권이라도, 나름 정치체계로 안정적으로 다스린 에도 막부와, 사실상 국가 막장 테크를 탄 고려 무신정권은 내용 자체가 아예 다르다. 일본의 막부 체계는 무사 귀족이나 사무라이 계급의 지위와 역할이 커지고, 기존의 귀족적 율령제가 이에 못 대응하다 보니 거기에 수반하여 발전했다.

기존의 율령 체계가 바뀐 사회에 대응할 수 없어 '쇼군'이 통치하는 '막부'를 중심으로 무사 집단이 모인 새로운 '정권'이 나타났고, 이 정권은 율령제를 잔존시킨 덴노의 조정과 병립하면서 현실 통치를 맡았다. 쇼군의 막부가 주도하는 독자적인 통치 구조는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이런 장기간의 통치경험이 있어서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에 비해서 에도 막부의 통치 체계는 훨씬 정교했다.

문제는 정작 이 당시 일본에서는 막부의 몇몇 쇼군을 아예 역적으로 볼 정도로 천황을 절대시하는 봉건적 관점에서 부정적인 평가가 대세였다는 것이다. 자기들은 스스로 막부를 부정적으로 보면서 무신정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 몰락을 비판적으로 보는 것은 조선사를 깍아내리려고 자기 자신의 평가기준마저 박살내는 모순을 일으킨 셈이다.

무신정권이 중세 막부와 동일시 된다면, 조선왕조는 막부 정권을 박살내고 정상적인 왕도 통치가 회복되는 겐무 신정과 동일시 해야 하며, 당시 일본에서 겐무 신정은 매우 긍정적으로 해석되었다. 그런데 헤이안 시대로의 회귀라는 엉뚱한 평가를 내렸으니, 일본사에 대한 평가와 조선사에 대한 평가에서 일관된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 자기모순을 일으킨 셈이다.

6.3. 군사정권

5.16 쿠데타 이후 군부독재자들 역시 자신들의 집권을 합리화하러 무신정권을 손대서 포장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10월 유신의 정당성을 설파한 모 교수는 아예 무신 정권이 지속됐다면 고려가 일본의 막부체제와 같은 체제를 더 일찍 시작해서 결과적으로 일본보다 발전과 서구화가 빨라졌으리라는 주장도 했었다. 정확하게는 3선 개헌 이후부터 고려 무신정권을, 심지어 초중고 교과서에서도 그걸 강조해 배우게 했다. 하지만 세조에 비해 별다른 치적이 없는 무신정권을 띄우기는 힘들었기에 대신 삼별초를 띄웠다. 여기에 더해서 대몽항쟁기의 무신정권의 역할을 강조했는데, 사실 군사독재기와 일제 강점기를 빼고는 대몽항쟁의 주체는 민중이나 왕실로서 국한했고 무신정권의 기여는 아주 부정적으로 다룬 편이다.

6.4. 민족주의

국민정부 이후에는 국가기조에서 자주성 측면의 강조가 더해지고 민족사관이 주축인 학계의 거동으로 인해 원종의 개경환도 이후 진도와 제주도로 거점을 옮긴 배중손과 김통정의 '삼별초'는 90년대 칭해진 '삼별초의 난'에서 '삼별초의 대몽항쟁' 이라 하여 원간섭기에 대한 민족적 저항(!?)으로 더 윤색되었다. 비슷한 경우로 90년대 '묘청의 난'이라고 기술되던 묘청의 반란이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이라 하여 재평가 된 것도 마찬가지다, 이에 있어서 묘청의 경우는 천도권유와 이것이 좌절되자 벌인 반란을 따로 분리해 전자를 '서경천도운동' 후자를 '묘청의 난' 이라고 분리하여 평가하는 것으로 노선이 다시 정리되었으나 삼별초에 관련하여서는 여전히 그것을 '항쟁'으로 정의하고 있는게 대세이다. 다른 이유가 있는게 아니라 이것이 어째서냐 하면, 강화천도를 당시 무신정권 하에서도 절대다수가 반대했는데 오로지 추진된게 최우의 독단이었기 때문으로 삼별초가 최씨정권의 도구이니 둘을 따로 떼어놓고 해석하지 않는 이유로 그렇다. 즉, 대몽항쟁을 추진한게 최씨정권이니까 삼별초가 대몽항쟁을 했다고 해도 별로 차이가 없다는 것, 이 지점에서 이 대몽항쟁은 몽고를 상대로 싸웠다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이지 별다른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는 않다.

7. 미디어

이 시기의 시작부터 최충헌 집권기까지를 다룬 드라마들로는 KBS무인시대가 있으며, MBC무신은 최충헌부터 김준까지를 다룬다. 주인공인 무신들을 죄다 초창기엔 순수했다가 권력에 중독되어 타락하였다는 식으로 독재자가 된 영웅으로서 극적 미화를 한 부분이 있지만 결국 권력자들의 타락과 몰락을 다뤘기에 어느 정도 참작의 여지가 있는 무인시대와 달리, 무신은 아예 최씨정권과 무신정권을 극도로 미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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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고려 2대왕 혜종의 휘가 왕무(王武)이기 때문이다.
  • [2] 다만 품계의 명칭이나 직위 등을 보면 고위 무관이 문관으로 편입했다라 봐야 한다. 오위도총관처럼.
  • [3] 이런 문반 작위에 관한 일화로 이순신장군이 정유재란기 파직직전의 작위는 정2품 정헌대부였지만 삼도수군통제사 복귀후 선조가 정3품 절충장군으로 품계를 낮추는 바람에 전쟁의 공으로 자신보다 높은 작위를 가진 부하들로 인하여 지휘에 어려움을 격었으며 명량해전 직전에 배설은 탈영하기 까지 한다.
  • [4] 이 당시의 몽골은 제국도 아니었다.
  • [5] 중방의 부정부패는 별로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사실 무신정권 이전 시기의 문벌귀족들 또한 철저하게 부패해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경대승의 중방 무력화가 무신정권의 집단지도체제의 이행을 가로막았다는데서 발생하는데 집단지도체제의 불안정성을 생각한다면 무신정권의 빠른 종결까지도 가능한 상황을 경대승이 가로 막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6] 이전에도 비슷했다.
  • [7] 심지어 이 당시에는 크게 세력이 대단할 리가 없는 문신인 조반염흥방의 노비에게 받은 수모를 복수하려고 '수십 기'의 병사를 움직였다는 기록도 있다.
  • [8] 경대승 또한 무신정변 이전으로의 복귀 말고는 별다른 정치적 비전이 없었다. 그러나 이는 당시 무신정변으로 옹립된 명종에게 심한 불쾌감과 분노를 불러 일으킨다.
  • [9] 최충헌이 죽은 1219년 이전의 반란 한정. 무인시대는 최충헌이 죽으면서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