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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

last modified: 2015-12-21 17:28:28 Contributors

Contents

1. 식물
2. 전통 신발의 한 종류

1. 식물


쌍떡잎식물 아욱목 아욱과 한해살이풀의 총칭.

이것이 씨앗을 맺을 때 생기는 털을 이용해 솜을 만든다. 씨앗으로는 기름을 짜는데, 면실유라고 한다. 시중에 파는 식용유 중에 있으며 참치캔을 채우고 있는 기름이 바로 이것이다. 덜 익은 열매는 먹을 수 있고 달큰한 맛이 난다. 다만 특유의 섬유질이 입 속에 많이 남기 때문에 식감은 좋지 않은 편. 그래도 단 걸 찾기 힘들던 5~70년대 태생 어른들은 이런 걸로 군것질을 하곤 했다.

처음으로 목화를 재배한 곳은 고대 인도 인더스 문명으로 추측된다.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이것을 가지고 온 것으로 유명한데 최근 백제시대의 면직물이 출토되면서 목화 도입의 원조를 내놓아야할 판. 다만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목화는 온난하고 건조한 기후 인도의 고원지대가 원산지인 만큼 장마와 사계절이 뚜렷한 한반도의 기후와는 잘 맞지 않아 극소수만 재배에 성공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여지며 이런 희소성으로 인해 그 용도 또한 높은 신분들의 사치품이나 의례용으로 사용되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당장 면직물 유물이 출토된 곳을 보면 절터란 걸 확인할 수 있다. 왕실이나 귀족의 원찰이었다면 의례용으로 사용되었을 확률이 상당히 높아지는 것.

그러므로 동북아시아 기후에 맞게 개량된 퍼진 중국제 종자를 들여와 서민계층에 대중화 시킨 것은 여전히 문익점의 공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위인전에 나오는 것처럼 붓뚜껑에 숨겨서 목숨걸고 가져온 것은 아니다. 문익점의 목화와 관련해서 3대 구라가 있는데, '중국의 강남으로 3년간 유배', '붓뚜껑', 그리고 '목화는 수출금지품목'이 그것이다. 이 이야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후손들이 점점 부풀린 케이스. [1] 다만 도입 후 재배에 실패할 뻔 했던 걸 널리 퍼트린 공로는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공로 덕분인지 조선시대에는 공신으로 꼽혔다. [2]

여담이지만 비단을 중국이 독점하기 위해 누에의 밀반출을 금한적이 있는데, 비잔티움 제국의 사신이 위의 일화처럼 지팡이 같은 곳에 숨겨서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가 누에 재배에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목화씨 밀반입 일화의 모티브가 되었을거라 추측할 수 있다.

목화의 전래가 기존의 삼베옷보다 백성을 따뜻하게 해준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화로 만드는 무명천은 비쌌고, 조선시대에는 이 무명천으로 화폐를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삼베옷과 무명옷은 큰 차이의 보온효과가 있으므로(질감과 보온성은 만져만봐도 차이가 심하다.) 100년만에 전국으로 면화가 보급된 속도에 비추어 보면 백성들에게 널리 보급된 것으로 보인다. 평민들이 여러벌을 가지는 수준은 아닌 겨울나기 옷 한두벌 수준.

하지만 화학솜 및 수입 목화와의 경쟁에 밀려 오늘날 국산 목화는 산업용 수준으론 거의 생산되지 않는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국내 목화 농업은 조선 시대 때 일본에 수출까지 했었을 정도[3]로 기반이 있었고, 개화기 때 수입 목화가 들어오면서 한 번 타격을 받았으나 전쟁물자 확보를 위한 남면북양 정책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인 일제강점기까지는 계속 성장해 나갔다. 그러나 6.25 전쟁 크리로 당시 섬유 공업이 가장 발달해 있던 수도권이 초토화되고, 이후 미국의 원조로 대량의 미국산 원면이 들어오면서 사실상 목화 농업은 끝났다. 다만 목화 재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고, 유기농 목화솜을 찾는 수요 때문에 소량으로 목화를 재배하는 농가들이 남아 있다.

혹시라도 자기 집에 옛날 어머님이 혼수품으로 가져오신 진짜 국산 목화솜 이불 같은 게 있다면 다시 구하기 힘든 물건이니 간수 잘 할 것. 목화 솜은 오래 되면 뭉치기 때문에 80년대만 해도 동네마다 이것을 얇게 떠서 풀어 주는 솜틀집이 있었다. 여기서 솜을 조금씩 빼돌리는 게 뉴스에 나오던 시절, 이런 이불을 덮던 분들은 화학솜은 덮는 느낌이 안나서 싫어 하는 분들도 계시다. 현대에는 재래시장에서 몇 곳이 잔존하는 형태. 이런 솜틀집에서 솜을 푼다고 손님들이 맡긴 이불에서 진짜 솜을 빼고 더러운 쓰레기 솜을 넣는 행위가 시사프로에 나오기도 했다.

조선영조가 왕비를 뽑는 시험을 했는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모두 장미, 모란 같은 꽃을 언급할 때 정순왕후백성을 따뜻하게 하는 목화꽃이 가장 아름답다고 대답해서 왕비로 채택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미국 남북전쟁의 원인이 된 흑인노예 해방과도 관련된 작물. 당시 남부의 농장주들은 돈이 되는 목화농사를 짓고 있었지만, 이 목화농사가 돈은 되지만 노동력을 너무나도 많이 요구하기에 학을 떼고 있었다. 특히나 목화에서 씨를 뽑아내는 과정이 너무 힘들고 비용이 많이 들어서 "이렇게 힘들게 목화 농사를 짓느니 차라리 노예를 해방시켜버릴까?" 하는 논의가 남부에서 더 활발했을 정도. 그런데 앨리 휘트먼이라는 발명가가 1793년에 지극히 실용적인 면기를 발명하면서 목화를 수확만 하면 쉽게 솜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고, 때마침 한창 산업혁명을 진행하던 영국 덕분에 목화의 수요가 넘쳐나고 있었기에 남부의 농사꾼들은 목화 재배 면적을 대대적으로 늘려버렸다. 동시에 값싼 노동력의 수요도 폭증하면서 남부에서 벌어지던 노예 해방에 대한 논의는 쑥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기술의 발전이 도리어 사회적 퇴보를 불러올 수 있는 사례의 하나.[4]야! 신난다~
이로 인해서 미국 목화가 나오기전 최고급 이집트산 면화는 줄줄이 폭락크리... 남북전쟁 동안 북군이 남군 돈줄을 끊기 위해 해상봉쇄를 하면서 잠시 부활할 수 있었지만, 남북전쟁이 끝나자 원상복귀 되었다. 현재는 겨우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정도라고 한다.[5]

흑인노예 문제뿐만 아니라 아동학대 문제도 심각했다. 조면기가 나오면서 의류 공장의 수도 늘어났고 옷을 만드는 기계 또한 많아졌는데, 이것이 고장날때마다 수리하고 조율하는 일을 하는건 기계 속에 들어가 실시간으로 고칠 수 있는 작은 아이들이었다. 공장법으로 제약하기 전만 해도 9살짜리 아이가 8시간 넘게 일하는게 일상이었고(심지어 노동법으로도 아이들이 일하는걸 막지는 못했다. 일하는 시간만 줄였지...) 팔다리가 기계에 잘리는 일도 있었다.

지금은 GMO(유전자 조작 식물)의 비중이 상당히 높은 식물로 유명하다. 면만 이용한다면 유전자 조작이라도 걱정될게 없지만 목화씨를 짜서 만든 기름인 면실유도 식용으로 쓴다는게 문제.

여담이지만 인도에서는 중국산 목화씨를 싸게 사서 심었더니 전부 짜가 씨앗이어서 그해 농사를 망친 농민이 수두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역시 대륙의 기상.

소련은 국가별 분업화를 강조해 중앙아시아에는 오직 목화 농사만 시키도록 만들었는데, 무작정 목화농사를 짓기 위해 강물을 다 끌어오다가 강줄기가 말라 세계에서 4번째로 큰 호수였던 아랄해는 죽음의 사막이 되어버렸고 중앙아시아 각국은 1991년 독립 이후 제대로 된 다른 산업기반이 없어서 지금까지도 피해를 보고 있다.

2. 전통 신발의 한 종류


조선시대 중후기에 왕과 문무관리들이 관복을 입을 때 신던 신발.영의정 패션의 Must have it item shoes 밑바닥을 나무로 만들었으며, 겉을 가죽(주로 사슴 가죽)으로 싸서 장화처럼 만들었다.
현재 사극에서 쓰이는 것은 인조가죽 재질이며, 낡으면 흘러내려 루즈삭스 같은 모양새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보조출연자의 필수품. 하지만 전통방식은 밑바닥이 평평한데다 골이 파지지 않아 요즘 사람들이 신고 다니기 힘들어 사극에서 쓰는 물건들은 대개 현대의 신발처럼 밑창이 두툼하고 굽이 있고 골이 파진 형태다. 이거 갖고 고증 안 맞춘다고 하는 사람들 있는데, 배우들 발건강을 생각해서라도[6] 현대화된 목화가 낫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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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여기에 관해선 여러 설이 있는데, 일단 강남으로 유배를 갔다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기정사실로 취급되는것을 알 수 있다. 문익점 사후 불과 4년뒤 태종1년에 권근의 발언을 보면, '故간의대부 문익점이 처음 강남으로 들어가 목면 종자 수매를 가져왔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강남은 당시 원나라 세력의 외곽에 위치한 유배지. 사신으로 원나라 황제 만나러 간 사람이 관광하려는 것도 아니고 왜 할일없이 외곽에 있었는지 생각해보자) 세종, 세조실록에서도 이 이야기는 많이 인용되고 있다. 부정설은 보통 고려사에 근거하고 있는데, 고려사는 조선개국에 비협조적이었던 인사들에 대해 부정적인 서술을 하고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 [2] 사실 문익점은 고위직에 집안 빵빵한, 흔히 말하는 권문세족 출신이기 때문에 목화 같은거 신경 안 써도 그냥 먹고사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그 당시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여 보급에 노력을 기울였고, 남명 조식은 그 정신을 높게 평가하여 '삼우당문공묘사기'를 짓기도 하였다.
  • [3] 일본 면화는 한 때 전적으로 조선에서의 수입량에 의존했으나 무로마치 막부 말기에 미카와에서 재배에 성공하여 점점 수입 물량을 줄였다
  • [4] 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조면기를 발명한 엘리 휘트니와 피니어스 밀러는 남부농장주들이 특허권 따위 없애고 이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기계를 표절하기 위해낸 소송에 패배하면서 망했다
  • [5] 그러나 지금도 서구에서는 면섬유 중에 이집트 면(Egyptian Cotten)을 최상품으로 친다. 섬유가 길어서 흡습성이 좋고 질기면서도 부드럽기 때문에 고급 침구류나 고급 셔츠에 쓰인다. 역시 ELS 품종인 페루 원산의 피마 면(Pima cotten)을 미국에서 Supima라고 하여 상표화했지만 이집트 면을 더 쳐주는 분위기다. 다만 이집트에서 생산된 면은 전부 이집트 면이라고 불러버리기 때문에, ELS(extra long staple)인지 확인해야 한다.
  • [6] 특히 몸 쓸 일이 많은 스턴트맨들의 경우는 더 하다. 짚신의 경우에도 속에 신발을 신고 버선을 덧신은 다음 다시 짚신을 신을 정도다.
  • [7] CG로 하면 안 되냐는 의견도 있긴 한데, 어차피 신발은 시청자들의 시선이 잘 가지 않는 부분이기 때문에 괜한데 돈과 시간을 들일 이유가 없다. 그래서 양덕들이 판치는 서양의 경우도 신발은 적당한 선에서 넘어가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