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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흐메트 2세

last modified: 2015-04-04 18:16:10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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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화가 틸레 벨리니가 1479년에 그린 초상화

II. Mehmet (Fatih sultan ikinci Mehmet han)

1432년 3월 30일 ~ 1481년 5월 3일

재위 : 1444년 ~ 1446년, 복위 1451년 ~ 1481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결코 사랑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인기에도 연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지닌 지성, 에너지, 단호함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그가 한 번 하겠다고 마음먹은 일을 포기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과업은 콘스탄티노플 정복이었다.
-스티븐 런치만

2200년에 달하는 로마 제국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


현대 터키어로 메흐메트(Mehmet) 2세. 오스만 터키어로는 메흐메드(محمد). 아랍어로는 무함마드(محمد)가 된다. 영어권의 영향을 받은 이름인 메메드 2세로도 불린다.

오스만 제국의 제7대 술탄이자 로마 제국의 황제[1]. 제국 최대의 정복군주[2]이며 '정복자(파티흐 = Fatih)'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또한 오스만 역사상 최초로 카이사르칼리프의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몇몇 투르크계 귀족 가문들이 운영하던 왕국 '오스만 투르크' 를 다문화, 다민족 전제군주국 '오스만 제국' 으로 발전시킨 인물이다.

라트 2세가 좋아하지 않던 하렘 후궁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며, 그 때문에 처음에는 부황은 그로 하여금 제위를 잇게 할 생각이 없었다. 5세 때 아마시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아버지 곁을 떠나게 되면서 사실상 버린 자식 취급이었으나 형들이 모두 죽어 제위계승자가 된 이후부터 부랴부랴 제왕 교육을 받게 되었다. 가정교사로는 무라트 2세의 절친한 친구인 할릴 파샤가 임명되었고, 무라트 2세는 아들에게 할릴을 스승님[3][4]으로 부르게 하였다.

참고로 오스만 제국 초기에는 술탄 계승권자들을 지방의 총독으로 보내는 전통이 있었다. 자세히 설명을 하자면, 이런 식으로 지방의 총독으로 내려간 황자들은 각자의 지방에서 힘을 쌓아서 자신들의 아버지 즉, 술탄이 사망하면 서로 내전을 벌여서[5] 가장 먼저 수도에 입성하는 쪽이 후임 술탄이 되는 것이다. 이건 무슨 센고쿠 시대식 방식이냐 이 전통은 당시에는 거의 없어졌으나 술탄 사후 아들들 간의 제위분쟁은 여전히 존재했다.

아버지 라트 2세가 돌연히 은둔생활에 들어가는 바람에[6] 12살 나이로 1444년부터 1446년까지 2년간 임시로 술탄의 자리에 오른 경험이 있다. 당시 메흐메트 2세는 야노슈 후냐디가 이끄는 헝가리를 위시한 기독교 연합세력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메흐메트 2세는 갑자기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자!라는 개드립을 날렸다. 이때부터 콘스탄티노플 덕후의 기질을 보였다 군대는 이에 반발했고, 군사반란을 막기 위해 할릴 파샤는 공개적으로 무라트 2세의 복귀를 간청해야 했다. 쿨타임 돼서 메흐메트 2세는 무라트 2세가 돌아온 뒤 술탄직에서 물러났다가 1451년 무라트 2세가 사망하면서 다시 술탄의 자리에 올랐다.

여기서 무라트 2세의 복귀를 청하기 위해 주옥같은 명언을 적은 편지를 보냈으니...[7]
"당신이 술탄이시거든 돌아와 당신의 군대를 이끌어 주소서.
만약 내가 술탄이거든 내가 지금 당신에게 명령하노니 돌아와 나의 군대를 이끄시오"

그의 가장 유명한 업적이라면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며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을 멸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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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군사박물관 소재 콘스탄티노플 점령 기록화.

통칭 3중 성벽으로 유명했던 콘스탄티노플 성의 공략을 위해 전통적인 방식 외에도 최초로 '우르반의 대포'로 알려진 거포를 비롯한 화기를 통한 공성전에, 산에 통나무를 깐 다음 기름을 칠해 미끄럽게 만들고 사람들이 끌어 육지를 통해 함대를 각만으로 옮겨 양방향 공격을 가하는 과감무쌍한 전법을 동원[8], 동시에 후덜덜한 물량을 아낌없이 퍼붓는 오스만 제국 특유의 전법을 동원하여 콘스탄티노플 정도의 대도시를 불과 7주 만에 공략하는 위업을 세우게 된다. 영광의 7주 전쟁.
근데 10배가 넘는 병력에다가 거포까지 동원했잖아

이 공방전에서 비잔티움이 서방 의용군을 포함하여 7천 명을 동원했지만, 오스만은 최소 8만에서 최대 30만-그리스인들의 기록-을 동원했다. 실제로는 10~15만 정도로 보는 것이 맞을 듯.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함께 메흐메트 2세는 이곳을 수도로 삼은 뒤[9], 자신을 카이사르(황제)와 로마계승자라 칭하였다[10]. 이를 위해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 약탈을 엄격히 통제하고[11], 기존에 존재하던 성당 등의 시설물을 성원(모스크)으로 개조[12]하는 동시에 기존 주민들 중 엘리트들의 신앙의 자유를 제한적으로 허용하여 반항을 무마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여, 자신이 무너뜨린 콘스탄티노플을 새로운 대제국의 수도로 다시 재건하는 원대한 작업을 개시하게 된다[13].

그 뒤 계속된 발칸반도의 비잔티움 제후국 정벌로 오스만의 세력은 현재의 세르비아와 보스니아를 합병하여 발칸 반도 서부 깊숙이에 미쳤고 드라큘라 공작으로 유명한 왈라키아 공작 블라드 가시공과 중세 헝가리 최후의 명군인 마티아슈 1세 등의 저항도 있었지만 결국 1460년에 왈라키아를 제후국으로 복속시켰다.

후임 술탄인 셀림 1세(재위 1512~1520), 술레이만 1세(재위 1520~1566) 때엔 제국의 영역이 헝가리 전역과 포란드 남부, 그리고 알제리와 예멘 및 아제르바이잔에까지 이르지만,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패배함으로서 유럽지역에 대한 정복은 사실상 중단되었다.[14] 그러나 메흐메트 2세 때에는 상관없는 일이다. 계속 넓어졌으니까.

그 외에도 콘스탄티노플 점령 이전에 흑해 연안의 제노바 식민지를 평정하며 흑해를 오스만의 세력권으로 만들고 오스만 제국과 마찬가지로 룸 술탄국에서 떨어져나온 여러 투르크계 공국들을 마지막 하나까지 멸하고 그 과정에서 카라만 공국과 동맹을 맺고 있던 백양 왕조의 군대를 사실상 궤멸시켜 배후지를 안정시켰다[15]. 또 크림 반도몽골계 왕조인 크림 칸국을 굴복시켜(1476) 이후의 제후국으로 만들어, 연공을 받는 대신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이후 크림 칸국의 기병대는 몽골의 피를 이어받은 만큼 대단한 활약을 보이며 오스만 제국의 각종 군사 원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대가 되기에 이르렀으며, 이 관계는 이후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으로 관계가 단절될 때까지 이어진다[16]. 사족으로, 오스만 제국의 황제위가 끊어졌을 때 이을 자격이 있는 것은 크림 칸국의 칸이었다. 가까운 친척이라 그랬다나.

다른 민족에 비해 동방정교회 신자들과 정교문화에 대해 많은 우대를 해줬던 메흐메트 2세는 일반적인 이슬람 군주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문화에 대해 관용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어 이탈리아의 많은 예술가들을 우대하고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도 하였다.[17] 예전에 비잔티움 황제가 하던 총대주교 임명은 자기가 하고 십자가 휘장도 직접 줬다! 그러나 후대의 술탄들은 기독교도를 존중할 이유가 없었고, 기독교도들에 대한 유화정책은 3대만에 폐지되었다. 여하간 대인배.

메흐메트 2세는 26세의 청년으로, 건장하고, 키는 중간보다 크며, 무기에 정통하고, 덕망이 있어 보이기보다는 무섭다. 거의 웃는 일이 없으며, 매우 신중하고, 대단히 너그러우며, 계획을 고집스럽게 추진하고, 일을 할 때는 용감하다. 또한 그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만큼이나 열렬히 명성을 추구한다. 그는 매일 '안코나의 치리아코'라고 불리는 친구와 또 다른 이탈리아인에게 로마와 다른 역사적인 저작들을 읽게끔 했다...그는 투르크어, 그리스어, 슬라브어 등 3개 국어를 한다...그는 아주 많은 수고를 들여서 이탈리아 지도를 익혔고...교황과 황제의 의자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 그리고 유럽에는 얼마나 많은 나라들이 있는지 공부했다. 그는 국가와 주가 그려진 유럽 지도를 가지고 있었다. 지배하려는 욕구로 가득 찬 메흐메트는 세계 지도와 군사 문제들에 특히 큰 관심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공부했다. 그는 기민하게 상황을 탐구하는 사람이었다. 우리 기독교도들이 다루어야 하는 건 그런 사람이다. 오늘날 그는 말한다. 시대가 변했다고. 그리고 그는 이전 시대에 서구인들이 동방으로 진출했듯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출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말한다. 세상에는 반드시 하나의 제국, 하나의 신앙, 하나의 군주만 존재해야 한다고. - 베네치아 공화국 외교관 지아코모 드 랑구시의 보고서에서.[18]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호쾌한 무인으로서의 성향이 강했던 선제 무라트 2세와는 정반대로 어느쪽으로나 조금 복잡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듯, 군사와 외교 정책에 있어서도 신의를 지키는 경우는 그 자신에게 이로울 때 뿐이었으며,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성품이었다고 한다. 사적으로도 방종과 검소의 극단을 달렸다고 하는데, 남색가로 유명한 것도 그 중 하나. 때이른 죽음도 통치로 인한 과로 외에도 그런 극단적인 생활 태도 때문이라는 견해가 많다.

게다가 사람 목숨을 파리 취급하는 사람이었던지라, 베네치아와 휴전한 뒤 베네치아의 저명한 화가 벨리니를 초청하였는데[19] 세례자 요한의 참수 일화를 소재로 한 그의 그림을 보고 다 좋은데 목을 잘린 모습이 사실과 다르다면서[20] 그 자리에서 노예를 하나 불러오더니 그의 목을 싹둑(…) 베어 화가의 그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 후 질려버린(…) 벨리니가 베네치아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메흐메트 2세는 아쉬워하면서 황금 사슬과 제국의 귀족 작위를 선사했다고.

하지만 그런 개인적인 면모와는 관계없이, 당시까지 그저 강력한 군대를 기반으로 한 지역형 국가에 불과했던 오스만 제국을 동지중해 전체의 패권국으로 발돋움하게 한 기틀을 마련한 명군으로서 쉴레이만 1세와 함께 제국의 술탄들 중 가장 유명한 군주이기도 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군사적 업적들 외에도 정복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한 각종 법률을 마련해 운영하도록 했고, 오스만 제국 건국 이래로의 투르크계 귀족가문[21] 대신 데브시르메 제도로 징집된 자들을 재상으로 임명함으로써 전제군주체제를 확립했다. 한편 1470년 이후 베네치아 영토에 대한 공세를 시작해 에게 해에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세력을 몰아냈다. 그 결과 오스만제국의 패권은 동지중해까지 확장된다. 베네치아가 이에 대항해 오스만 동부의 강국인 페르시아를 끌어들이자 1473년 친히 페르시아를 공격, 대패시키고 동부 방면의 패권을 확립했다. 또 1479년 알바니아 정복을 완료했으며, 이듬해에는 이탈리아에까지 군대를 보내기도 했다. 그가 10년 만 더 살았어도 자칫하면 로마가 공격당했을지도 모른다. 흠좀무. 1481년 아시아로 건너가 이집트 원정을 꾀했다고 했는데 너무 무리를 해서였는지 그 해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상기한 기록만 보면 정복전이 승리 일색이지만, 실패한 것도 있다. 1480년 이탈리아 공격과 병행한 로도스 섬 공략은 부하 장수를 보내 실행했는데, 강력한 저항에 막혀 실패했고, 1456년에는 헝가리의 명장 야노슈 후냐디에게 대패하여 라이벌 헝가리가 차지한 베오그라드를 점령하는 데도 실패했다. 알바니아 공략도 10년 이상이나 계속된 알바니아인들의 유격전에 골치를 앓다가 지도자 스칸데르베그[22]가 사망한 뒤에야 겨우 손에 넣었다.

그가 죽자 제위 계승 전쟁에 들어갈 위기에 빠진 오스만 군대는 대부분 제국 영토로 철수했고, 유럽인-특히 이탈리아인들은 성당의 종을 울리고 축제를 열면서 기뻐했다고[23] 한다. 얼마나 메흐메트 2세가 유럽인들에게 공포의 존재로 군림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흠좀무.

젊은 시절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년 생, 20대~30대 추정)가 메흐메트 2세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콘스탄티노플로 갔다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 특유의 질질 늘어지는 제작기간에 질려 도중에 취소하고 돌려보냈다는 설화가 있다. 뭐,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미디어로는 2012년작 터키 영화 '페티 1453(Fetih 1453)'이 국내에 알려져 있다. 콘스탄티노플 정복전을 영화화 한것으로, 영화 자체는 수작이지만 메흐메트 2세를 300레오니다스처럼 묘사하고, 콘스탄티노스 11세를 찌질이 폭군으로 왜곡하여 비판을 받았다.[24][25]

양성애 성향이 있었다. 부왕이 술탄에 복귀한 이후 마니사라는 지방에서 머물렀는데 그 곳의 소년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남색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Ang?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후 동로마 제국의 재상이었던 노타리스의 막내 아들이 미소년이라는 말을 듣고[26] 아들을 하렘에 바치라고 명했는데 노타리스가 이를 거부하자 노타리스와 그의 두 아들을 참수해 버렸다.(...) 가질수 없다면 차라리 죽여버리는게 낫다는건가?[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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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실제로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은 러시아 차르와 더불어 비잔틴 정복 이후 자신들이 그 자리를 계승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는 제3의 로마 항목 참고.
  • [2] 다만 지명도 면에서는 '최대' 라고 할 만 하지만, 영토를 확장한 정도를 보면 최대라는 평가는 셀림 1세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정략론의 1권 19장에서 '사실 그(셀림 1세)는 조부(메흐메트 2세)의 명성을 능가할 만한 인물인 것 같다' 라고 평했다.
  • [3] 극존칭. 명문가 출신인 할릴 파샤는 보잘 것 없는 후궁의 자식이었던 메흐메트를 대놓고 경멸했으나,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입지가 강화된 메흐메트 2세에게 처형당했다.
  • [4] 참고로 할릴 파샤는 투르크계 귀족 출신으로, 메메드는 할릴을 처형하여 귀족 출신들의 세력을 억누르고 그 후임 재상으로 예니체리 출신인 자가노스 파샤를 앉힘으로써 예니체리를 이용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예니체리가 어떻게 재상이 되지? 하는 분들은, 해당 항목의 '모집' 부분 참고.
  • [5] 이상해보일지도 모르지만 유목민들에게 드문 방식은 아니다.
  • [6] 당시 무라트 2세는 이전까지 동맹관계였던 비잔티움 제국의 내정간섭에 맞서 전쟁을 치뤘고, 세르비아를 비롯한 주변국들이 그를 위험시하여 전쟁을 일으켜, 여기서 패전하자 정치적인 입장을 재고하고자 퇴위한 것으로 보인다.
  • [7] 신하들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긴 망하기 직전인데 뭐라도 해야지
  • [8]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라는 속담이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가 된 격. 실제로도 사공이 많았다 하며, 이 에피소드에 충격을 받아 쓰인 소설도 있다.
  • [9]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자마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로 개명했다고 알고 있지만 오스만 왕조가 멸망하는 1923년까지 수도의 정식명칭 중의 하나는 '콘스탄티노플(터키어로 콘스탄티니예)'이었으며 '이스탄불'만이 쓰이게 된 것은 터키의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에 의해서였다.
  • [10] 이때 내건 명분은 크게 두 가지인데, 자신이 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도시를 수도로 하는 제국을 통치하고 있다는 것과 선대 술탄인 르한과 비잔틴 황녀가 결혼한 일이 있다는 것(즉, 비잔틴 황실과 오스만 황실은 서로 남남이 아니라는 것).
  • [11] 금지한 게 아니라 통제된 약탈(…). 살인은 많이 일어나지 않았고다만 금각만까지가 피로 물들었을 뿐(...) 금전적 갈취와 노예화, 강간 등은 메흐메트2세가 허락한 사흘동안 엄청나게 자행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노예는 약 5만 명 정도이고, 하나님이 보호해줄거라 생각해 성당으로 피난간 사람도 엄청 많았지만 오스만 병사들에게는 그저 먹을게 한곳으로 몰린것 뿐...수녀나 아이라도 강간을 피할수는 없었다 한다.
  • [12] 현재 이스탄불의 대표적 문화재인 성 소피아 대성당도 이때 성원으로 개조된 곳이다.
  • [13] 참고로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수도는 부르사(Bursa)와 에디르네(Edirne) 두 군데였다. 이는 콘스탄티노플 정복 전까지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콘스탄티노플이라 쓰고 비잔틴 제국 영토라고 읽는 지방 때문에 유럽과 아나톨리아로 양분될 수밖에 없어서, 어느 한쪽에만 수도를 두었다간 통치가 어려웠기 때문. 따라서 아나톨리아 반도의 중심 도시이자 수도는 부르사, 유럽 지역의 중심이자 수도는 에디르네라는 식으로 운영해야 했고, 메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여기에 있다. 실제로 에디르네를 새로운 수도로 삼은 무라트 1세와 그 아들인 예지트 1세는 에디르네보다 부르사 많이 머물렀으며, 에디르네가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메드 1세 때부터다.
  • [14] 엄밀히는 옳지 않다. '유럽'에 속하는 그리스의 크레타 섬이 1669년 정복되었기 때문. 그러나 대규모 정복활동이 중단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 [15] 1473년의 오틀루크벨리 전투(attle of Otlukbeli). 실제로 이후 오스만 제국이 동쪽 국경을 걱정하게 되는 것은 1501년에 백양 왕조의 뒤를 이어 파비 제국이 들어선 다음의 일이다.
  • [16]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을 원했던 러시아는 처음 한동안은 발트 해를 주목했으나 이후 흑해로 눈을 돌렸고, 결국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1774년의 퀴취크 카이나르카 조약으로 크림 칸국의 독립을 인정하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후 독립국일 터인 크림 칸국의 내정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했고, 비록 독립은 시켜주었으나 여전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은 이에 항의. 결국 2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이 벌어졌으나, 이번에도 오스만 제국이 패배했다. 결국 오스만은 크림 칸국의 영토는 러시아 영토임을 인정해야 했고, 러시아는 즉시 크림 칸국을 멸하고 그 땅을 '타우리다 주(州)' 라는 이름으로 합병했다.
  • [17] 정교도에 대한 우대는 콘스탄티노플이 빠르게 수도로서 기능하길 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 [18] '부의 도시 베네치아'(로저 크롤리 저, 다른세상 출판사, 2012)에서 인용.
  • [19] 그런데 초청받은 그가 한 일 중에는 술탄의 개인 공간에 춘화(…)를 그리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 [20] 목이 잘리면 그 충격으로 신경과 혈관이 수축되는데 문제의 그림에서는 그것이 그대로 축 쳐져 있었다나.
  • [21] 이 귀족 가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메메드가 '스승님' 으로 불러야 했던 할릴 파샤의 가문인 찬다를르 가문(Çandarlı family). 1364년에 처음으로 재상을 배출한 이래 할릴이 처형당하는 1453년까지 네 명의 재상을 배출했고, 그들의 임기를 모두 더하면 64년에 이른다. 오스만 제국이 창건된 때부터 헤아려도 대략 150년 가운데 60년을 이 가문이 해먹은 셈으로, 학자들 가운데에는 찬다를르 가문의 재산이 오스만 황가의 것보다도 더 많았으리라 보는 경우도 있다.
  • [22] 이전 버전에는 '게릴라 부대의 지도자' 정도로 언급되었지만, 이 인물은 수많은 지방 귀족들이 할거하여 역사상 단 한번도 한데 모인 적이 없던 알바니아를 수십년 동안이나마 '레즈헤 동맹' 이라는 깃발 아래 모으는 데 성공한 사람이다. 오늘날 알바니아에서는 알바니아 국가의 정체성 그 자체로 추앙받고 있으며, 군사적 재능도 뛰어나 수천 명으로 수만 명의 오스만 제국군을 여러 번 잡아먹었다.
  • [23] 교황도, 로마에 머물고 있던 각국 사절들을 빠짐없이 초대하여 사흘동안 먹고 마셨다고
  • [24] 심지어 이 영화에서는 오스만군이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해서 한 약탈이나 학살하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고 오스만군을 해방자로 묘사하는 등 왜곡이 있다. 또한 우르반에 대한 것도 비잔틴 제국도 우르반을 포섭할려고 했으나 자금 지불을 못해서 우르반이 가격을 더 부르는 오스만으로 간 것으로 영화처럼 노타리스가 비잔틴 병사들을 보내서 체포할려고 했다거나 우르반이 거절한 것은 아니다. 단지 비잔틴 제국 국고로써는 감당이 안됐을 뿐. 그런데 우르반에 대한 잘못된 묘사는 딱히 이 영화만 그런 건 아닌지라.
  • [25] 이밖에 해군으로서 콘스탄티노플 방어에 적극 협력했던 베네치아군의 모습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거나, 일개 시파히 부대장에 불과했던 울루바티 하산(Ulubatlı Hasan)이 메메드의 절친으로 나온다거나, 오래전부터 시망 직전이라 강렬한 위기감을 느끼거나 절망해야 하는 비잔틴 황제와 신하들이 지나치게 여유를 부린다거나(아예 '형편없는 투르크놈들ㅋㅋㅋ' 하며 연회까지 열 정도) 하는 등 고증오류가 많다. 우르반의 수양딸 정도로 등장하는 여주인공은 아예 가공인물인 주제에 쓸데없이 비중이 높다. 그냥 킬링타임용으로 볼 정도며, 학습용이라면 스티븐 런치만 경의 1453년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을 참조하라. 시오노 나나미의 책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군데군데에 되도 않는 왜곡이 있어서 그냥 보지 않는 편을 추천.
  • [26] 당시 이 소년의 나이는 14살이었다. 참고로 프란체스라는 인물의 딸과 아들이 유명한 미소녀와 미소년이었다고 하는데, 둘 다 하렘에 끌려갔다. 딸은 어릴때 죽었고, 소년은 술탄의 욕망을 거부했다가 살해당한다. 빼도박도 못할 쇼타콘로리콘.
  • [27] 다만 노타라스의 처형에 관해서는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한참 전에 딸과 누이를 베네치아로 피신 보냈다는 것이 빌미가 되었다거나, 정복자로 입성한 메흐메트 앞에 국고에서 빼내 온 금은보화를 받쳐들고 나타났는데 '그런 게 있었으면 방위비로 썼어야지. 너 같은 놈을 두고 반역자라고 하는 거임.' 이라는 이유로 처형되었다고도 한다.
  • [28] 참고로 메메드가 양성애자라는 것은 두카스나 라오니코스 찰코콘딜레스 등 그리스측 역사가들의 기록에 보이는데, 현대 터키의 역사가인 할릴 이날칙(Halil İnalcık)은 동시대 오스만 제국의 기록 어디를 살펴보아도 황제가 남자를 가까이했다는 기록은 없다는 이유로 그리스 측의 기록은 사실무근이라고 강력히 주장한 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