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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

last modified: 2017-09-06 17:36:14 Contributors

明治維新

Contents

1. 개요
2. 한국에 미친 영향
3. 일본과 조선의 운명을 가른 차이점
4. 관련 항목
4.1. 시대적 사건
4.2. 조직
4.3. 인물


1. 개요

19세기 말 일본에도 막부가 서양의 개항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쿠로후네 사건으로 조약을 체결하자, 이에 반발한 막부 타도 세력과 왕정 복고 세력에 의해 막부가 무너지고(1867년의 대정봉환) 덴노 중심의 근대 국가로 전환된 대개혁을 말한다. 대개 개시 시기는 메이지 연호가 시작된 1868년으로 본다.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를 완전히 뒤바꿔 놓은 사건.

한국에선 한자음 그대로 명치유신(明治維新)으로도 통하며, 일본에선 그냥 유신이라 부르기도 한다. 일본어로는 '메이지 이신(めいじいしん)'이라고 발음하며 영어권에서는 Meiji Restoration이라고 쓴다.

전국시대와 더불어 일본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시기라 각종 매체에서 많이 다루는 소재. 일본에서는 소설 료마가 간다의 영향으로 사카모토 료마가 독보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또한 신센구미라는 최강의 아이돌 집단 덕분에 동인계에서 사랑을 받는다.[1]

유신 3걸(사이고 타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로 대표되는 신흥 지식인 세력에 의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은 해외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여러모로 이와쿠라 토모미가 최강의 흑막. 물론 그 배후에는 요시다 쇼인이 있었고, 그의 제자들이 막부를 타도하고 개국을 추진하게 되니 가장 큰 공로자는 요시다 쇼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2]

분명히 당초 목표는 왕양이를 하면서 막부를 타도하고 덴노를 중심으로 쇄국을 진행하자는 것이었는데, 왜일까 도중에 방향이 바뀌더니 막부를 타도한 다음에는 개국을 해버린다는 괴이한 결론이 나와버렸다.

다만 이렇게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정변을 주도한 것은 사쓰마와 조슈 두 번인데, 사쓰마는 번 소속의 무사가 사소한 무례를 이유로 영국 상인을 살해한 것이 계기가 되어 1863년에 사쓰에이 전쟁을 벌였는데 여기서 참패한 뒤 현실을 자각했다. 또한 조슈 역시 사쓰마를 배신자로 몰면서 막부와의 대결에 치중. 존왕양이를 추구하고 1864년에는 아예 시모노세키를 항해하는 양선에 발포하기까지 했으나 얼마 후 열강의 보복으로 국력의 격차를 실감하고 개국만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전면 개항을 한 것 역시 이 때의 경험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일본도 막부 체제 하에서 어느 정도 서양화가 이뤄졌지만 화혼양재라는 명목 하에 그다지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에 일본은 서양에 이와쿠라 토모미, 이토 히로부미 등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하여 외국을 직접 견학하고 많은 걸 배워 왔는데 이들이 내린 결론은 전면 개방 외에는 답이 없다는 것이었고, 결국 일본은 폐번치현, 신분제 폐지, 국민개병제 등 전면적인 서양화에 착수하게 되었는데 이 판단이 맞았다. 여전히 구 체제 하에서 개방을 추진했던 중국은 반식민지 종속국으로, 조선은 아예 식민지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에서도 구 세력의 저항은 있었다. 단발령과 도검소지금지령에 항거한 무사들은 특권 계급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뭉쳤고, 이들이 일으킨 반란이 바로 서남전쟁이다.

2. 한국에 미친 영향

이 때 국서(서계)의 발신자가 쇼군에서 덴노(천황)로 바뀌게 되었는데, 이미 청나라아편전쟁으로 서양 열강에 캐관광당하고 개항한 이후였기 때문에 근대적 외교 관례에 맞춰 조약을 체결하여 별 문제가 안 되었지만, 아직 통상수교를 거부하고 있던 흥선대원군 집권기의 조선에선 조선이 준 도서(圖書)가 아닌 이번에 새로 만든 도장을 사용한 점과 천황, 황조 등 청나라가 사용할 수 있는 황칙의 용어를 쓴 것에 심히 불쾌해 하며 국서(서계)의 접수 자체를 거부해버렸다. 1868년에 일어난 이 사건은 국서 거부 사건(서계 거부 사건)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이후 일본은 다시 조약을 맺자고 제의했지만 흥선대원군은 또 거부했다.[3]

1872년엔 이 때문에 소요 사태까지 일어나는 바람에 정식으로 국교가 단절되기까지 했으며 이미 조선 통신사로 표상되는 근세 조-일 관계가 막장화된 시점이었던지라 이에 격노한 일본 내에서 정한론이 힘을 얻게 되었다. 이후 조선에선 흥선대원군이, 일본에선 정한론 강경파가 실각하면서 두 나라 모두 여러 차례 협상을 시도했지만 계속 결렬되다가 운요호 사건이 일어났고, 그 이후 조선은 멸망으로 치닫게 된다. 물론 일본 내에서도 정한론은 찬반이 나뉘었지만 강경파와 온건파의 차이일 뿐 '언젠가' 조선을 침략해야겠다는 생각은 다르지 않았던 듯하다. 아니, 이미 에도 막부 말기에 정한론이 대두되기 시작했음이 그 증거다.

10월 유신은 메이지 유신의 '유신'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3. 일본과 조선의 운명을 가른 차이점

21세기의 기준에서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구 체제를 완전히 엎었거나 최고 권력자가 단호하게 결단을 내렸느냐, 그렇지 않았느냐가 운명을 갈랐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일본의 경우 메이지 유신이 가능했던 건 막부를 전복함으로써 어설픈 개방으로 서양의 침략을 부추겨 나라를 망국으로 몰고 가는 것을 하급 무사와 관료가 중심이 된 사쓰마, 조슈 등 소위 네 개번의 실력자들이 저지하는 데 성공한 뒤 아예 구체제 자체를 갈아 엎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바꾸지 않은 것은 일왕. 즉 덴노뿐이었지만 신격화만 시키고 실권은 다 빼앗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완벽한 서양화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를 막을 사람은 없었다. 당장 보수로 알려진 사이고 다카모리만 해도 개방 자체는 동의하되 좀 더 천천히 하는 한편, 사무라이 주도 체제를 유지하자는 입장이었을 정도다. 조선 내에서 가장 개혁적인 인사들조차 동도서기론을 내세운 것과는 대조적이다.

반면 조선의 경우는 일본의 막부에 해당하는 세도정치 가문으로 대표되는 기득권 세력이 건재했으며, 이들은 차라리 막부는 양반이다 싶을 정도로 답이 없었다. 물론 안동 김씨가 조선에서 천주교에 우호적인 집단이었던 점, 김조순 본인이 고증학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점 등으로 볼 때 어느 정도 차이는 존재했지만 대체로 외부에서의 통상 요구를 정중히 거절하여 돌려보내는 것이 국가 정책이었다. 그나마 김옥균 등 일부만이 다소 깨어 있었다지만 이들은 독자적으로 개혁을 하는 게 아니라 일본을 끌어들여 개혁을 하고자 한 점에서 한계가 명백했고, 이외 개혁을 외치던 고종명성황후 민씨는 매국노라고까지 하는 건 지나치다 해도 나라를 망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한 위인들이었다. 그나마 고종이 병인양요신미양요의 승리로 잠시 조선의 이미지가 개선된 점을 이용. 흥선대원군 실각 직후 일본식 개항을 전격 결정하고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문물을 받아들여 전면 근대화에 나서 1870~1880년대 아직 일본이 내부적으로 이거 저거 정비하던 시기를 이용했다면 그나마 최악은 피했을 거라는 평가도 존재하지만 결국 고종은 그 기간을 헛되이 낭비했고, 그 결과가 일제 식민지였던 것이다. 결국 대한제국 시기에 이르러서야 그나마 근대화를 추진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이미 늦었다.

또한 단기적인 배경을 떠나 보다 구조적인 측면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가령, 일본은 난학 등을 통해 서양과 직접 교류를 해온 편이었다. 일반적으로 막부가 서양화를 거부하고 4번이 개방했다는 인상이 짙지만 실상 막부 역시 서양화를 꾸준히 추진했다. 단지 중국의 중체서용. 조선의 동도서기와 동의어인 화혼양재가 기준이었을 뿐이다. 반면, 조선은 서양과의 교류를 직접 못하고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하는 양상이 더 짙었다. 그리고 에도 이래로 경제력 역시 조선보다 더 괜찮았다. 가령 기후적인 관점에서[4] 조선은 일본보다 농사 짓기가 어려웠으며 이는 경신대기근 등의 사태로 증명된다[5]. 또한 나라 경제에서 정부가 차지하는 비중 역시 언급되는데 중국이나 조선은 당시까지만 해도 대표적인 작은 정부 국가였다. 반면, 일본은 당시 정부가 국민들의 조세를 뜯어가는 비율이 유럽을 넘어 세계적인 비율을 자랑했다. 일각에서는 일본 정부가 이 재정을 사회간접자본이나 군대 양성 등에 효율적으로 사용하면서 근대화를 이룩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4. 관련 항목

4.1. 시대적 사건

4.2.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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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신센구미의 인기 역시 소설 료마가 간다의 저자인 시바 료타로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 [2] SBS 그것이 알고싶다 931회 "조슈번의 후예들 - 왜 안중근을 죽이는가" 편(2014년 3월 15일 방송) 참고.
  • [3] 여기엔 이전까지 조선과 일본 사이에 낀 쓰시마 섬이 국서(서계)를 위조해 적당히 두 나라가 서로 거슬리지 않도록 명칭 등을 바꿔 보냈던 탓도 있다. 다만 메이지 유신 이후 국서(서계)를 보낼 때 발신자가 바뀌었다는 내용은 적었기에 이 사실이 큰 영향을 줬다고 보기는 어렵고, 일본은 변화에 따른 절차나 형식 변경 등을 조선과 합의해야 했는데(이는 외교 관례다.) 하지 않고 바뀐 걸 받아들이라고만 하고 조선은 조선대로 타협하려고 하지 않은 게 더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 [4] 일본의 경우 특이하게도 연교차가 크면서도 강수량이 고른 기후라 농사짓기 수월한 편인건 사실이다. 대신 그 습도 때문에 한여름에는 답이 없다(...). 강수량이 한철에 집중되어 있어 가뭄이나 홍수 걱정을 해야 하는 중국, 한반도, 남유럽이나 강수량이 고르긴 하나 연교차가 지나치게 작고 석회질 토양이 대부분이라 땅이 쉽게 척박해지는 서유럽, 북유럽과는 다른 조건인 셈.
  • [5] 물론 일본도 텐메이 대기근 등 타격이 없진 않았지만 6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희생자 수에 큰 차이가 없는 등. 조선에 비해서는 피해가 적은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