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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last modified: 2016-07-23 17:27:31 Contributors

대만주제국
大滿洲帝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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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문장
상태 일본제국괴뢰국
존속기간 1931년 ~ 1945년
표어 五族協和的王道樂土
(5족협화의 왕도낙토)
국가 만주국 건국가
위치 만주
수도 신징(新京)
정치체제 입헌군주제
국가원수 황제
언어 중국어,일본어,러시아어
주요사건 1932년 건국
1945년 황제 퇴위->멸망
통화
성립 이전 중화민국(국민정부)
멸망 이후 중화민국

Contents

1. 개요
2. 연혁
2.1. 수립
2.2. 실상
2.3. 멸망
3. 기타
4. 국가(...)
5. 유사 사례
6. 참고


1. 개요

만주국은 일본에게 몹시 큰 존재감을 지닌 곳이었다.
자신들이 잘만 하면 '왕도낙토'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며 일본은 그곳에 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역시 현지의 일본인들은 거들먹거리기만 했을 뿐, 그 결과 돌아온 것은 인과응보였다.
열심이었을지 몰라도 그것은 틀렸던 것이다.
단순한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는 놓치기 마련인,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 같은 미묘한 것을 그리고 싶었다.”
- 야스히코 요시카즈평화헌법 개정을 반대하며 2007년 2월 11일자 도쿄 신문에 기고한 글.
1932년일본이 중국 동북지방(만주)에 세운 괴뢰국. 일본바지사장

2. 연혁

2.1. 수립

일본 관동군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동북 3성인 랴오닝성(遼寧省: 요녕성), 지린성(吉林省: 길림성),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흑룡강성)과 내몽골 자치구(內蒙古自治區)를 침략한 뒤, 1932년 3월 1일 만주국 성립을 선언하면서 청나라가 망하고 폐위됐던 황제선통제 아이신기오로 푸이(愛新覺羅 溥儀: 애신각라 부의)를 집정(執政, 최고 통치자)에 앉혔으며, 수도는 신징(新京: 신경, 지금의 지린성 창춘(장춘)), 연호를 대동(大同)이라 하였다. 지금도 창춘에 당시 만주국 황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일본은 같은 해 9월 일만의정서(日滿議政書)에 조인하고 만주국을 정식으로 승인하였으며, 이어서 엘살바도르, 독일, 이탈리아, 바티칸 시국, 불가리아, 스페인, 헝가리, 폴란드 등의 일부 국가가 승인하였다. 하지만 당연히국제 연맹의 승인은 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곧 만주국(그리고 배후의 관동군)은 러허 작전(熱河作戰: 하 작전)으로 러허성(熱河省) 청더(承德)를 점령했다.

만주국의 국토는 앞서 말한 동북 3성과 러허성(내몽골 자치구에는 "몽강자치연합정부"를 세움. 이 역시 일본의 괴뢰국)에 이르렀으며, 인구는 3000만 명이 되었다. 그리고 1934년 3월 제정이 수립되었고, 집정 푸이가 정식으로 황제에 즉위하면서 연호를 강덕(康德)으로 고쳤다.

인구적으로는 1908년 만주의 인구는 1,583만명이었지만, 만주국 건국 이전인 1931년 4,300만명이 되어 있었다. 1941년 인구는 5,000만명으로 증가했다.

2.2. 실상

만주국은 일본인, 조선인(1934년 기준 인구의 2.2%), 만주족, 몽골족, 한족(1934년 기준 인구의 95.5%)의 오족협화와 왕도낙토를 표방하였고 만주국에 사는 사람들을 뭉뚱그려 "만주인", 그리고 만주에서 쓰이는 중국어를 "만주어"라고 불렀다. 하지만 정치적 실권은 일본인 관동군사령관이 쥐고 있었고, 황제 푸이를 비롯한 총리 및 각부 대신들은 장식품에 불과했다. 한 예로 전체 인구의 1.9%에 불과한 일본인이 고위 관료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였다. 특히 중요 정책을 결정하는 총무처와 10만에 달하는 만주국 경찰의 고위층은 대부분 일본인이 하였다.

또 경제면에서도 일본 회사인 남만주철도, 소위 만철(滿鐵)이 전 철도는 물론이고 사회 인프라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이외에도 미츠비시, 미토모, 닛산 등의 재벌들이 진출하여 만주국의 경제권을 독점하였다. 그렇지만 조선과 다르게, 총독부나 일본 관청이 없어 간접적 지배는 표방할수 있었지만 직접 통치는 않았다.

특히 만주국에는 국적법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는데, 일본인들이 만주국 국적 같은 것을 취득하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여러 민족들과 다양한 출신의 난립으로 인해 '만주국인'을 규정하려는 시도는 계속 난항을 겪었다. 입법 시도도 여러 번 있었지만 모두 무위로 돌아갔고 결국 만주국이 멸망하는 그 날까지 만주국은 국적 요건을 규정하지 못하였다. 만주국이라는 체계는 껍데기일 뿐이고,사실상 관동군의 통치하에 놓여있었다.다만 관동군 부대가 주둔할때, 만주국 정부에 주둔 비용을 지불하였다.

만주국 내에서도 오족협화는 일본인이 주인이 되고 조선, 만주, 몽골, 중국인들을 하인으로 부리는 정도의 이미지였다고 한다.학교에서 급식을 줄 때에도 일본인 다음 조선인, 그 다음 중국인 순서로 메뉴가 달랐다고 한다. 이는 군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만주군관학교의 경우, 일본인인 일계(日系) 후보생과 조선,중국인인 만계(滿系) 후보생에게 차등적인 급식을 내놓았다. 일계 후보생은 쌀밥, 만계 후보생은 수수/기장밥. 차등 급식의 이유가 걸작인데, 일본인은 거친 잡곡을 소화하기 힘들어서. 만주군에 복무한 이들의 증언에 나오는, 자대에 배치받자마자 국민당군 부대로 탈영해버린 중국인 장교와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동맹의 군사분맹에서 활약한 조선인 장교의 비화가 괜한 것이 아니다. 후자의 대표적 인물이 바로 박승환(대한제국 장교로 군대해산에 분격해 자결한 인물과는 동명이인).[1] 다만 만계 후보생들의 항의에 결국 일계 후보생과 같은 급식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간 만주국 출신 일본인 학생들이 인력거를 끄는 본토의 일본인을 보며 충격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거기다 일본 내에서는 만주국 경내를 관광버스로 돌면서 노천 시장의 '더럽고 비참한 만주인'들을 구경하는 코스가 큰 인기를 끌었다.

그래도 국토 개발이 한창인 신생 국가라는 이미지와 풍부한 천연자원 탓에 당시에는 많은 조선인과 일본인들이 만주국으로 건너가 일확천금과 출세를 노리곤 했다. 기록에 따르면 만주국으로 건너간 조선인은 일본인보다 수가 많은 68만여 명에 달했다. 이른바 동양의 서부. 이 이미지를 확장한게 만주 웨스턴이다. 예를 들자면 놈놈놈. 하지만 실제론 만주로 건너간 조선인의 대다수는 조선 내 처지와 별 다를 바 없었다. 만주국 관료들 중 조선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중국인이나 만주인들보다 훨씬 적었다. 이 시대를 다루는 경향 문학[2]을 보면 조선 내에서보다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해 만주로 이주했건만 현지 지주들에게 착취당하는 조선인 소작농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염두에 둘 것은 이주한 조선인의 일부는 일본제국의 2등신민이란 지위를 십분 활용했다는 점이다. 당대 통념상 1등은 두 말 할 것 없이 일본인, 2등은 국적상 일본인인 조선인, 그 다음이 만주인(만주족+한족). 민족상 일본인도, 만주인도 아닌 점을 악용해 관동군과 만주군 부대의 브로커 혹은 밀수업자, 포주 노릇에 종사한 조선인도 상당하다. 오죽하면 당대 중국인들이 일본인을 '첫 번째 나쁜 놈(一鬼子, 본래 일본인의 멸칭인 日鬼子의 패러디)', 조선인을 '두 번째 나쁜 놈(二鬼子)'라고 했을까. 맨주먹으로 만주에 정착한 빈농들만이 있던 것은 아니다. 한중수교 이후 만주 일대의 조선족들을 취재한 소설가 조정래는 조선족들이 1945년 8월 15일을 ''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 때 난리라고 호칭함을 증언한 바 있다. 당시 취재 내용을 바탕으로 저술한 소설 아리랑은 일본이 항복하자 조선인 마을부터 습격하는 중국인들의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훗날 중국 공산당이 만주 일대에 우세를 점하자 공산군에 조선족이 적극 가담하여 국민당군과 싸운 것도, 이런 혐의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의도가 없지 않다.

대공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일본은 만주의 풍부한 자원과 토지를 이용해 위기를 탈출하려고 했다. 이에 따라 쇼와의 요괴라 불리던 기시 노부스케[3]를 선두로 일본 상공관료들이 그대로 만주국의 경제관료가 되었다. '만주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 중앙의 관료가 주도하는 조직적인 공업건설, 도로와 철도 개통을 이루었다. 또한 많은 일본 농민을 만주로 이주시켜서 농지를 개척하였다.

특히 북한의 선군정치을 능가했던 제국주의 일본의 군 우월주의 분위기에 따라, 군인을 지망하는 많은 조선인들이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 지원하기도 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왜 안 갔느냐는 질문이 가능한데, 안 간게 아니라 못 간거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는 일본에서도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조선인은 왕공족 내지 조선귀족 작위가 있을 정도의 고위층이거나, 정말 엘리트거나 한 극소수만 가능했다. 한동안 조선인의 입교를 받아주지 않기도 했고... 일본군 장교로 알려진 박정희도 엄밀히 말해 만주군 장교였다.[4]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한 뒤, 성적우수자 자격으로 일본 육사에 지금의 학사 편입 비슷하게 입교한 것.[5] 만주군 출신자 따위를 무적의 황군일본군에 복무시키지 않았다. 졸업과 동시에 현역임관이 아닌 예비역으로 편입되어, 만주군에 복귀시켰다.

의외겠지만 만주가 아닌 일본 본토에 거주하는 일본인이면서,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한 인원도 상당하다. 점수가 아슬아슬하게 모자라거나 유력자제들 혹은 전사상자 유족들에게 치여 육사 입시에 떨어진 경우, 일본군은 아니긴 해도 어쨌든 군대에 장교로 갈 수 있으니 만주로 가라는 제안에 울며 겨자먹기로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했다고 한다.

2.3. 멸망

1945년 8월 9일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와 동시에 실시된 만주 작전으로 관동군은 일거에 괴멸해버렸다. 이미 관동군의 정예는 남방전선으로 빠져나간 속 빈 강정이었다.물론 정예라고 해서 별 거 있던 건 아니다 소련군의 진격으로 혼란에 빠진 뒤, 그대로 푸이가 체포되고 만주국도 무너졌다. 개전 7일만의 멸망(...). 이후 만주지역에는 소련군의 군정이 실시되다가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이 인계받았고, 다시 국공내전을 거쳐 1949년에 최종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에 편입되었다.[6]

만주국 함락과 함께 거주 일본인들은 먼저 냅다 튀어버린 관동군에게 버림받고 소련군의 무차별 공격과 약탈, 강간으로 큰 피해를 입었는데, 포화 속에서 살아남아 천신만고 끝에 귀국해서도 멸시와 고초를 겪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탓인지 만주국 태생 일본인들 중에는 공산당이나 좌파운동에 뛰어든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 곳 출신 유명인으로는 성우 故 토미야마 케이, '내일의 죠'로 유명한 만화가 치바 테츠야, '천재 바카본'시리즈의 만화가 아카츠카 후지오, 공포 만화로 유명한 히노 히데시, 맛의 달인으로 유명한 카리야 테츠, 지휘자 자와 세이지, 전자전대 덴지맨의 주제가를 부른 애니송 가수 나리타 켄등이 있다. 지금도 옛 만주국에서 호사를 누리다가 비참하게 쫓겨났다가 50여 년만에 만주를 구경하던 노인들은 좋았던 그 시절을 회상하며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해외에 체류하다가 식민지가 독립하면서 일본으로 돌아온 사람들을 히키아게샤라고 한다.

만주국 정부의 최후는 한 국가의 멸망치고는 다소 흥미롭다. 소련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하자 황제 푸이도 피난길에 올랐는데, 피난길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8월 18일 압록강 유역의 다리쯔(大栗子)에서 간단한 회의를 소집해서 만주국 정부를 공식적으로 해산했다. 만주국을 청의 후신이라고 볼 경우 국조가 창건한 나라를 후손이 공식적으로 해체한 몇 안 되는 경우 중 하나다. 당장 한중일 역사에도 후손이 다른 나라에게 선양하고 잘 사는 경우까지는 있었지만 후손이 선양이 아닌 해산 선언을 한 것은 만주국의 사례가 유일하다.

3. 기타

만주국이 있던 시절을 살았던 인물들(예를 들면 박정희김일성)이 '만주어'에 능통했다고 알려져 있는 경우가 있는데, 표준중국어를 익혔던 게 와전됐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면 만주국은 공용어 중에 하나인 표준중국어(한어 또는 중문)을 한어/중문이나 중국어라고 쓰기 싫어했고, 중화민국에서 독립한 나라임을 행세해야 하니까 명칭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만어', 즉 '만주어'라고 불렀다. 우리가 아는, 만주족의 언어 진짜 '만주어'는? 그냥 무시해버렸다. 그 때도 이미 소수 언어가 된 상태였기 때문. 아무튼 그래서 만주 일대에 있었던 조선인들이 표준중국어를 배워서 쓴 것을 당시 만주국에서 쓰던 표현대로 '만(주)어에 능통했다'라고 표현해서 와전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푸이의 일생을 다룬 영화 마지막 황제를 보면 만주국의 모습을 조금은 알 수 있다. 또한 국내에서 <만주의 아침이슬>(…)인가 하는 제목의 해적판으로 출판된 적이 있던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만화 무지갯빛 트로츠키무라카미 모토카용(만화) 또한 만주국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좋은 자료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태엽 감는 새>도 만주국의 최후가 소설의 중요한 화두로 등장한다.

일부 정신나간 사람들이 만주국은 독립국이었다는 논리도 펴는데미...미쳤나?, 가볍게 무시해주자. 이제는 국제적으로 국가라고 홀로 뻥쳤던 괴뢰집단이라 여기고 심지어 황제였던 푸이 본인조차도 깨끗하게 인정한 사실이다. 심지어 당대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조차 만주국 건립에 참여한 일본인 동료가 발을 빼려 하자 "괴뢰국을 만들어 놓고 도망치는 건 비겁하지 않은가?" 하고 힐난했다고 한다. 이미 당사자들도 만주국을 괴뢰국으로 인정했다는 증거. 여기에 대해서는 <키메라 만주국의 초상>이라는 책 289쪽을 참고할 것. 만주국에 비교적 양심적이고 객관적인 일본인의 저서이다.

만주국이 망한지 5년이나 넘게 지난 1950년대 초반에 만주에서 정치적 사건이 하나 발생하는데, 이것이 가오강(高崗)-라오수스(饒漱石) 반당동맹 사건이다. 중국 공산당사에서는 둥베이 지구의 공산당 최고책임자로 임명된 가오강과 라오수스가 실은 1940년대부터 은밀하게 반당행위를 해왔고, 이를 적발했으나 두 사람 모두 자살했다고 발표한다. 이 사건은 소련이 중국의 변경지역에서 친소적인 위성국을 만들려는 시도와 연결시키는 음모론으로도 해석한다. 즉, 소련이 외몽골과 만주 및 신장 지역에 중국 본토와 분리되는 친소위성국을 만들려고 했다는 것으로 실제로 1945년부터 1947년까지 신장지역에는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이 있었다. 한국전쟁 이전엔 간도를 포함한 둥베이 3성의 상당한 지역을 북한에게 넘겨주려는 시도도 있었고.

도쿄에는 2004년, 만주국 부활을 주장하는 중국인과 일본인들이 모여 만든 만주국 임시정부도 있다. 사이트 주소도 있다! 대만,미국,브라질,이탈리아등의 해외에 지부까지 있는듯. 물론 임의단체일 뿐이고 공식적인 능력은 없다. 작위나 여권도 파는듯하다(...) 황제라는 사람도 자주 바뀐다. 물론 혼자 쇼하는 수준이라 중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존재조차 모르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중국 해커들이 사이트를 박살내서 복구할 엄두도 못내고 있다.

<기동전사 건담 SEED>에 나오는 오브 연합 수장국은 이 국가를 모티브로 만들었다는 추측이 있다.

4. 국가(...)

이게 아니고(...)

1933년 제정되어 1942년까지 사용된 두 번째 국가.

국가의 성립 과정이 개판이었던 만큼 국가 지정도 마찬가지로 병크의 연속이었다. 원래 만주국 건국 선언과 거의 동시에 초대 국무총리였던 정샤오쉬(정효서)의 가사에 당시 일본 양악계의 거물이었던 야마다 코사쿠가 곡을 붙인 것이 첫 번째 국가였는데, 국가 제정의 속내는 사실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만주국 선수단을 파견할 때 쓰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올림픽 위원회도 없는 나라에서 파견한 선수단을 받아줄 국제올림픽위원회가 아니었으므로 이 계획은 망했고, 국가 자체도 잦은 변박과 특색 없는 가락 등 음악적인 문제와 지나치게 유교적이고 현학적인 가사로 보급에 실패했다.

결국 이듬해인 1933년에 두 번째 국가가 제정되었는데, 이 국가도 마찬가지로 정샤오쉬가 작사하고 '만주국 문교부선'이라는 애매한 이름의 작곡 주체가 표기되어 있었다. 하지만 실제 작곡은 당시 다롄에 머물고 있던 일본 음악인들인 타카츠 사토시와 소노야마 민페이, 무라오카 라쿠도가 맡았다. 이 국가는 첫 번째 국가와 달리 십팔사략에 나오는 유명한 에피소드인 소무(蘇武)의 이야기를 가사로 한 중국 민요의 가락을 소재로 해, 만주국 국민들의 다수를 차지하던 한족과 만주족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하지만 이 국가도 첫 번째 국가와 마찬가지로 유교적인 색채의 가사가 문제가 되었는데, 중일전쟁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식민지와 괴뢰 정권에 자신들의 국가신토 이념을 강제로 주입하던 일본 측이 이것을 결코 좋게 봤을 리 없었다. 결국 건국 10주년을 앞둔 1941년 10월에 정샤오쉬의 후임으로 제2대 국무총리가 된 장징휘(장경혜)를 회장으로 한 국가제정위원회가 발족했고, 여기서 가사와 곡을 심사해 새로운 국가를 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장징휘는 명목상의 회장이었을 뿐이었고, 위원회의 실제 운영과 감독은 총무청 홍보처장이었던 일본인 관료 무토 토미오가 담당했다. 특히 첫 두 국가들이 모두 중국어 가사를 기반으로 한 것에 비해, 이번에는 일본어 가사를 먼저 쓰고 나중에 그것을 중국어로 번역했다. 그 결과 일본서기의 천손강림을 강조한 가사와, 거기에 첫 번째 국가의 작곡가였던 야마다 코사쿠가 창가 풍의 곡을 입힌 니뽄삘 일본색 충만한 새 국가가 완성되었다.듣기

불과 10년 사이에 두 번씩이나 국가를 갈아치웠기 때문인지, 만주국 정부에서는 50명의 성악가들로 '국가봉창단'을 조직해 전국에 가창 지도를 보내고 신징방송국에도 시도때도 없이 국가를 방송하도록 해 청자들에게 세뇌주입시키는 등 보급에 상당히 신경을 썼다. 그 결과 첫 두 국가보다는 좀 더 자주 불려지게 되었지만, 실제 국가 행사에서는 오히려 기미가요가 더 많이 쓰였다.

5. 유사 사례

  • 몽강자치연합정부 - 지금의 내몽골 자치구에 세워졌던 일본의 괴뢰국으로, 몽골판 만주국이다.
  • 비시 프랑스 - 이 경우는 괴뢰국이지만 프랑스인들 스스로 명목상의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의 측면도 있었다. 일본이 설계부터 완성까지 도맡은 만주국과는 좀 다르다. 그러고보니 무솔리니살로 공화국(이탈리아 사회공화국)도..
  • 베트남국 - 프랑스 통치하의 응우옌 왕조로, 왕도(王都) 후에 주변을 다스리는 희미한 존재에 불과했다. 이후 1945년 3월부터 반 년간 일본의 괴뢰국인 "베트남 제국"을 선포하기도 한다.

그 외에는 괴뢰 국가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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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박승환은 북한지역에 연고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인민군의 창설요원으로 활동하지만, 여운형 암살 이후 인민군 파괴 공작에 나선 남조선 간첩으로 몰려 모진 고문 끝에 옥사했다. 훗날 만주군 출신으로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박승환의 미망인을 소개받자 부동자세를 취하며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 [2] 대표적으로 최서해의 탈출기
  • [3] 만주 경제개발의 중심이었고, 도조 히데키 내각에선 상공장관이었다. 동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 용의자였으나, 기소는 되지 않고 출소했다. 이후 자민당 창당을 주도했고 수상이 되었다.
  • [4] 만주국 육군 보병 제8단에서 복무. 8단 단장 당제영 상교의 부관장교로 종전을 맞았다.
  • [5] 박정희의 사관학교 성적은 만주군관학교 수석졸업, 일본육군사관학교 3등 졸업.
  • [6] 만주지역의 마적떼와 만주군의 잔당들은 알아서 국민당군과 공산군으로 제각기 갈아탔다. 한동안 국민당군이 주둔했으나, 소련은 그들이 점령한 북한 지역에 공산군의 피난처를 제공했다. 훗날 조선족으로 분류될 이들이 공산군에 보충된 건 덤.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순조롭게 중국공산당은 만주를 냠냠. 이와 연관된 시대사는 간도 항목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