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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

last modified: 2019-04-14 14:21:32 Contributors



"잭슨 이전에는 프랭크 시나트라와 엘비스, 비틀즈가 있었지만 잭슨 이후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커트 코베인도, 머라이어 캐리도, 셀린 디온도, 비욘세도, 마돈나도 잭슨의 위상을 대신할 수 없었다."
뉴스위크.

"잭슨은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즈에 비견될 정도의 항상 센세이션을 일으켜온 팝스타였다."
AP.

"팝 음악의 세계에는 마이클 잭슨과 그외 모두가 있다. 전 세계적인 돌풍을 일으킨 이 사람의 인기는 1960년대 비틀즈를 연상시킨다. 마이클 잭슨은 대중문화 그 자체이지. 단순한 팝 뮤직이 아니다. 이런 가수는 한 시대에 한명 나올까 하는 가수이다. 그는 인종 간의 경계를 무너뜨렸으며 흑인 음악을 백인 관객들에게 가져왔다. 그리고 빈민가에서 탈출할 수 있으며, 에너지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뉴욕타임즈. 1984년 1월 14일.

"신은 인간에게 즐거움을 나누어주고자 잭슨을 보냈지만, 심심해서 너무 일찍 그를 데려가셨다."
ㅡ사망직후 한 타블로이드지.



역사상 가장 성공한 엔터테이너를 포함하여 39개의 기네스북 기록을 가지고 있는 남자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에 이어 전 세계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

인종간의 음악적 장벽을 부수고,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연 대중음악계의 신화적 인물

인종을 뛰어넘은 전세계인들의 친구였던 남자

단지 문화계에 한정되지 않고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전설

팝의 황제[1]
The King of Pop Greatest Ever


Michael Joseph Jackson
마이클 조세프 잭슨

본명의 이니셜인 MJ, 혹은 미들네임까지 포함한 MJJ,[2] 또는 마작마잭이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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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삶과 음악
1.1. 1958-1978 : 유년기
1.2. 1979-1981 : Off The Wall
1.3. 1982-1985 : Thriller
1.4. 1986-1990 : Bad
1.5. 1991-1994 : Dangerous
1.6. 1995-2000 : HIStory
1.7. 2001-2009 : Invincible 그리고 마지막
2. 죽음
2.1. 2009.06.25
2.2. 사후
3. 평가/성과
3.1. 음악적 분석과 영향력
3.2. 재능
3.3. 세계적 인기
3.4. 뮤직비디오
3.5. 프로듀서와의 관계
3.6. 음악적 성향
4. 사생활과 뒷이야기
4.1. 어린 시절
4.2. 가족 관계
4.3. 백반증과 외모
4.4. 부와 재정 상황
4.5. 타 연예인/가수와의 관계
4.6. 성격
4.7. 그 외
4.8. 여담
4.9. 어록
5. 디스코그래피
5.1. 음반
5.2. 싱글
5.2.1. 빌보드 1위
5.2.2. 빌보드 2위
5.2.3. 빌보드 3위~10위
5.2.4. 빌보드 11위~20위
5.3. 마이클 잭슨과 관련된 창작물 콘텐츠
6. 바깥 고리

1. 삶과 음악

1.1. 1958-1978 : 유년기

1958년 8월 29일 인디애나 주 게리 시에서 철강기술자이자 기타리스트였던 조지프 잭슨과 클라리넷 연주가였던 캐서린 잭슨의 9남매 중 7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의 형제는 모린(레비라고 주로 불림), 재키, 티토, 저메인, 라토야, 말런, 마이클, 랜디, 자넷까지 9명이었다.[3]

그의 집안은 11명의 식구들이 겨우 연명하고 살 정도로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으나 아버지 조지프 잭슨은 고된 노동을 끝내고 돌아오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고 점차 음악을 하는 것이 가풍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그의 아버지 조지프는 보컬에 재능이 있었던 마이클을 재키, 말런, 저메인, 티토와 함께 잭슨 파이브(The Jackson 5)라는 그룹으로 편성시켰다. 5살 때부터 형제들과 음악 활동을 하며 커리어를 쌓은 그는 1969년 MOTOWN에서 'I Want You Back' 으로 메인보컬로 첫 데뷔[4]를 하며 빌보드 차트 HOT SINGLE에서 no.1을 기록한다. 유명 음악 매체들은 메인 보컬을 맡은 잭슨에게 뛰어난 재능을 가진 신동이라며 극찬하였다.

잭슨 형제들은 모타운을 떠나게 되는데 그 원인은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잭슨 형제들은 모타운의 사운드가 마음에 들지 않아 우리 노래들은 우리가 쓰고 우리가 제작하고 싶다고 주장하였는데 모타운은 "너희들은 곡을 만들지 못해. 작곡가와 프로듀서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한다" 라며 창작 활동을 방해하였다. 이후 잭슨은 매우 분개하여 모타운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결국 모타운을 떠나 [5] 1975년 Epic(현재의 Sony)과 계약을 하고 솔로로 데뷔하였다.


'ABC', 'The Love You Save', 'I'll Be There', 'Never Can Say Good Bye' 등 메가 히트를 친 싱글과 함께 1972년 영화 (BEN)의 동명 OST인 'BEN[6]' 으로 13살의 나이에 빌보드 싱글차트 1위를 차지하기도 한다. 유년기 시절 솔로로 총 4개의 음반을 냈는데 다 합하여 추정 판매량은 1200만장 이상인 것으로 보고 있다.

1978년에는 영화 활동을 시작했는데 마법사라는 영화에서 허수아비 역을 맡았다. 그러던 중 거기서 퀸시 존스를 만났다. 잭슨은 자신의 성인 데뷔를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 퀸시에게 전화를 했고 그들은 뜻이 맞아 마침내 함께 하기로 결정한다. 퀸시는 훗날 처음 잭슨을 만났을 때 "그는 지나치게 내향적이고 수줍어 하는 사람, 그가 대성공을 할 수 있을 지 확신할 수 없었다" 고 회고했다. 그러나 Off The Wall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잭슨의 재능을 보게 되었고 "그는 아티스트로서 모든 것을 갖추었다. 나는 프로젝트를 이끌고 나가는 데 익숙한 훈련교관인데 사실 마이클에게는 나같은 역할이 그닥 필요하지 않다. 그는 두 곡의 리드 보컬 부분과 세 곡의 백 보컬 부분을 단 하루 만에 해냈다. 잭슨은 열심히 작업에 임했다. 대부분의 가수들은 이용료가 비싼 스튜디오에서 모든 것 (작사/작곡 등)을 해결하려 하였는데 그것들은 나를 미치게 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같은 프로듀서들이 잭슨을 원했던 이유이다. 그는 준비된 상태였으며 단 한 번의 세션에서 아주 많은 것을 마무리 하였다. 내게 충격을 줄 만큼 감동적이었다." 고 회고했다.[7]

1.2. 1979-1981 : Off The Wall

1979년 잭슨의 첫 성인 데뷔 음반인 Off the wall이 발매된다. 세계적으로 추정 판매량은 현재까지 2000만장으로 보고있으며 빌보드 음반 차트에서 최고 3위를 기록했다. 잭슨이 작사/작곡/프로듀스한 'Don't Stop 'til You Get Enough' 이 빌보드 1위에 올랐다. 또한 'Rock with You' 라는 곡도 빌보드 1위에 올랐으며 10곡 중 4곡이 빌보드 TOP 10안에 드는 등 대성공을 이루게 된다. 총 10개의 곡 중 잭슨이 작사/작곡/프로듀스 한 것은 총 3곡이었다. 1979년 음악계에서 가장 권위높은 시상식으로 평가받는 그래미 어워드에서는 최우수 남자 R&B 보컬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그래미 어워드 수상에도 불구하고 잭슨은 무척이나 낙담을 했다고 자서전에 서술하였는데, 엄청나게 많이 팔린 음반에다 평론가들에게도 찬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한 개의 상을 얻었다는 점에서 동업자로부터 무시당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나중에 안 사실에 의하면 업계에서도 그래미의 잭슨에 대한 대우에 놀랐다고 한다.

이 음반에서 가장 히트 친 싱글은 'Don't Stop 'Til You Get Enough' 인데 잭슨은 어느날 부엌에서 서성거리다 전염성이 강한 이 싱글의 멜로디가 떠올랐다고 한다. 그는 퀸시에게 그 노래를 들려줬고, 퀸시는 그 곡에 가사를 붙이고 잘만 다듬으면 엄청난 히트곡이 될 거라고 자신했다고 한다. 잭슨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는 일화

《Off the Wall》의 특징은 잭슨의 감미로운 미성 목소리와 당시 유행했던 디스코가 두드러진다.《Off the Wall》은 많은 평론가들에게 호평과 인정을 받았다. 롤링 스톤은 명확한 디스코와 세련된 R&B로 구성됐다며 칭찬했으며 2003년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500개의 음반 중 68위를 차지했고 평론 매체 'Robert Christgau'는 A를 'Melody Maker','Yahoo! Music','Sounds','Smash Hits','Blender' 등의 평론 매체에서는 (favorable) 를 줬다 2008년에는 《Off the Wall》의 뛰어난 음악성을 인정받아 그래미 어워드 음반 부문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된다. 1980년에는 음반 도매 수익의 37%를 가져갔는데, 당시 음악 업계에서 가장 높은 로열티였다.



1980년의 젊은 마이클 잭슨. 이 청년은 향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팝 가수가 된다. 오프 더 월에 수록된Rock With You를 열창하는 잭슨의 라이브 동영상이다. 매우 즐겁게 노래하는 잭슨을 볼 수 있다...

1.3. 1982-1985 : Thriller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이 일어난다. 《Thriller》 가 등장한 것이다. 총 9곡에서 잭슨은 4개의 곡을 작사/작곡/프로듀스 했다. 잭슨이 작사/작곡/프로듀스한 Billie jean 은 7주 동안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Beat it 은 3주 동안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했다. 9개의 곡중 7개의 곡이 빌보드 TOP 10위에 안착하며 음반 차트에서 37주간 1위를 차지하는 괴물적인 상업성을 보여줬다. 미국 내에서는 2009년 기준으로 2900만장이 팔린 것으로 미국 내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음반으로 기록되며 최소 확정치 5000만. 추정치는 6500만장의 판매고를 올린 것으로 보고 있다.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음반으로 2006년 기네스북에 1억 400만장 판매한 것으로 등재됐는데 이는 뻥튀기 된 수치로 기네스북에서도 최근에는 6500만장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는지 정정하였다.가장 많이 팔린 음반으로 등재된 Thriller 기네스북 6500만장의 추정치가 아니어도 그는 확정치 즉, 인증량으로만 봐도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음반이다. 1984년 그래미 어워드에서는 총 12개 부문의 노미네이트 되어 8개의 상을 휩쓸었는데 이는 최다 부문 노미네이트와 최다 수상이라는 신기록을 세웠다. 《National Association of Recording Merchandisers》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반 3위를 차지하였고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국립 음반 기록소에 등재됐다. 2008년에는 그래미 어워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다.

대성공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이 음반의 영향력은 그야 말로 엄청났는데, 70년대 후반 등장한 카세터 테이프 레코더 등의 이유로 음반업계는 장기간 불황이었고 레코드 가게는 계속해서 망해갔다. 그런데 잭슨의 음반만큼은 엄청나게 팔려나갔다. 그의 《Thriller》는 이러한 음반업계의 불황을 막는데 엄청난 기여를 했다. 사람들이 잭슨의 음반을 사기 위해 가게로 몰리고 다른 가수들의 음반까지 사간 것이었다. 얼마나 대단했냐면 레코드 판매 최호황인 78년의 총 판매수입이 41억 달러였는데 잭슨은 3천만장 이상을 팔아치우며 78년 한 해의 모든 레코드의 판매수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입을 거둔 것이다.# A&M 레코드 사장 길 프리슨은 당시 "전체 음반산업은 잭슨의 성공으로 한 몫을 봤다" 고 말하였다.


1984년 5월 경향신문 설문조사에서 우리나라 초-중학교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연예인 4위로까지 뽑히기도 하였다.
잭슨의 인기는 그야 말로 상상을 초월했다. 예나 지금이나 빌보드에서 아무리 1위를 한다고 한들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말고는 1위가 누구인 지 그 가수가 누구인 지를 잘 모른다. 그러나, 잭슨은 달랐다. 마이클 잭슨의 1위란 전 세계인들에게서 엄청난 관심을 받은 것이다.

《Thriller》는 80년대 팝의 세계를 열었고, 영국 중심의 음악을 미국으로 그리고 흑인을 다시 음악의 주류로 올려놨다고 타임은 평가했다. 잭슨은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단순한 팝 음악이 아니었다. 대중문화 그 자체였다.

1981년 8월에는 MTV가 개국했다. 그런데 MTV의 영향력을 행사하던 밥 피트먼은 방송의 구성을 로큰롤에만 제한했고, 로큰롤은 백인 음악으로 결국 대부분의 흑인 아티스트들이 배제되는 상황이 초래된다. MTV 개국 직후 초창기 방영된 뮤직비디오 750개 중 흑인 아티스트들의 노래는 40개도 되지 않는다. 또한 약간의 흑인 성향의 음악만 방영됐을 뿐. 전형적인 흑인들의 스타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잭슨의 'Beat it' 뮤직비디오 감독은 이러한 MTV에 대해 "엄병한 인종주의자" 라고 비난하였는데 MTV에 대한 흑인들의 비판적 의견을 잘 요약하고 있다. CBS가 잭슨의 빌리 진 뮤직비디오를 MTV에 제공했을 때도 즉시 거절당했다. 그러자 CBS는 'Beat it' 뮤직비디오 영상을 제공하며 방영하지 않을 경우 다른 모든 뮤직비디오를 빼버릴 것이라고 위협했다. 결국 뮤직비디오가 방영된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 MTV가 송출하는 뮤직비디오의 대다수 가수들이 CBS 소속이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CBS가 빼버린다면 MTV도 망하는 것. 잭슨이 대단한 이유 중 하나를 엿볼 수 있다. CBS가 직접 나서 MTV를 압박할 정도이니 아이러니 하게도 잭슨의 뮤직비디오를 방영하기 거부했던 MTV의 인기를 끌어올려줬던 것은 잭슨이었던 것이다.그의 중독성 있는 멜로디와 그 누구도 시도해 보지 않은 14분 짜리 뮤직비디오 스릴러는 MTV 등을 통해 송출됐으며, MTV 개국 직후 그룹 버글스는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인다' 며 구호를 내걸었는데, 마이클 잭슨이 라디오 스타를 죽이는 주인공이 됐다. 더이상 가수들은 예전처럼 노래만 할 수 없었다. 이제 그들은 대중들 앞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매력을 어필해야 했다. 임진모가 설명하길 그 이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수의 얼굴도 모른 채 노래를 들었다. 그러나 잭슨이 등장하고 부터는 대세는 듣는 음악이 아닌 보는 음악. 가수들은 이제 음악을 청각이 아닌 시각으로 승화할 줄 알아야 하고 그것이 곧 가수들의 생존과 직결됐다. 뮤직비디오는 강력한 가수들의 홍보 수단이 됐고, 'Thriller' 뮤직비디오는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현재 미국 국회 산하 Library of Congress National Registry에 보관된 유일한 뮤직 비디오이기도 하다.

잭슨의 영향력은 MTV에서만 통한 것이 아니다. 1984년 1월 14일자 뉴욕타임즈의 기사를 보면 그는 MTV 말고도 많은 라디오들과 방송국들의 인종차별적 프로그램 정책을 돌파해냈다. 《Thriller》는 젊은 백인 청취자들의 취향에 맞추는 록 비디오 방송국들과 흑인 청취자들에게 어필하는 어반 댄스 음악 방송국에서도 틀어졌는데 《Thriller》전에는 매우 소수의 뮤지션들만이 이 미묘한 인종간의 경계를 넘을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한 일은 케이블 텔레비젼에도 일어났는데 흑인 가수들이 거의 나오지 않는 데서도 잭슨의 영상들은 계속해서 송출되는 것이다. 흑인 가수들의 음악을 거의 안 튼다고 봐도 될 정도였던 Album Oriented Rock 계열의 라디오 방송국들에서도 잭슨의 노래와 영상은 송출됐다. 잭슨은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 냈다. 인종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대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 마이클 잭슨은 스키니 진 페도라 썬글라스 장갑과 재킷 팔찌 암밴드 한쪽을 자른 티셔츠 등 다양한 패션을 유행시켰는데, 이 영향력은 어떤 톱스타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이였다.#

언론에서는 잭슨을 비틀즈 다음으로 가장 대단한 엘비스 프레슬리 이후로 가장 강력한 싱글현상이라고 평가했고 잭슨의 대중적인 현상을 보고는 1960년대 비틀즈의 대중적 인기를 설명하는 비틀매니아에 빗대어 설명하기도 했다. TIME은 잭슨을 비틀즈와 엘비스 프레슬리 이후의 최대 가수라고 평가했다. 그는 성인 시절 단 2개의 음반으로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평가받는 비틀즈와 엘비스 프레슬리에 버금가는 세계 최대의 가수 반열에 오르게 된다.

1983년 Billie jean 싱글 발매 2개월 이후 모타운 25주년 기념 공연에선 잭슨이 빌리 진을 춤으로 선보이며 문워크를 최초로 보여줬는데 그의 퍼포먼스에 많은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반응했고 그는 이제 엄청난 댄서로도 부각된다. 그의 춤을 따라하는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 물론 한국에도 무척이나 많았다. 미국인들이 지난 50년간 다시 보고 싶은 순간으로 7위로 뽑기도 했다.전설의 모타운 25주년 기념 빌리 진 공연 미국 역사상 가장 성공했다고 평가 받는 댄서 프레드 아스테어는 당시 모타운 25주년 기념 공연에서 춤을 추는 잭슨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아 직접 잭슨에게 전화를 걸어 칭찬을 하였으며 마침내 내 자리를 물려줄 사람이 생겼다고 기뻐했다고 한다.11월에는 펩시와 CF광고 계약을 체결하는데 500만 달러로 업계의 기록을 갱신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그의 영향력은 대단했는데 소련은 잭슨을 사악한 미국 자본주의의 천박한 괴물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Beat it을 공연하는 마이클 잭슨. 요즘 사람들은 이 당시 잭슨이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남자 였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을까.

1984년에는 백악관에서 여는 반 마약 캠페인 운동에 참가한 대가로 백악관에 초청받는다. 당시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까지 인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유명 흑인 가수인 것이다. 레이건은 당시 잭슨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린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이해 1월 27일 펩시의 CF 광고 촬영을 위한 리허설 도중 불꽃이 떨어져 잭슨은 2도 이상의 화상을 당하게 되는데 잭슨의 몸에 잠재되있던 백반증은 화상을 입으면 급격하게 악화된다. 상황은 나빠졌고 그의 피부색이 변하는 계기가 된다. 또 형제들과 함께한 공연으로는 마지막으로 'Victory Tour'가 열린다. 총 55회 공연했고 노래의 전부를 잭슨이 불렀다. 스릴러의 수록된 빌리 진과 비트 잇도 불렀는데 84년 공연이다 보니 남아있는 동영상이 캐나다 토론토의 공연 동영상 밖에 없다. 보고 싶으면 캐나다 토론토 빅토리 투어 풀 영상 그리고 1984년 빌리 진1984년 비트 잇 모두 라이브로 불르며 립싱크는 하지 않았다. 목소리를 비교해서 들어보면 배드 투어와 데인져러스 투어로 갈수록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댄스의 안무도 아직은 체계를 갖추지는 않은 시기이다.

1985년에는 'We are the world' 라는 프로젝트가 열린다. 잭슨과 라이어넬 리치가 작사/작곡했다. 오랜 기아로 죽어나가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하여 당시 미국 내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슈퍼스타들이 모여 노래를 불렀다. 진위 여부는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았지만 작사/작곡하는 장면을 목격한 잭슨의 친누나 라토야에 의하면 노래의 99%는 마이클이 만들었고 단 두 소절만이 라이어넬 리치가 만들었다고 한다. 'We are the world' 는 현재까지 1460만장 이상이 팔리며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싱글 5위를 기록했다. we are the world를 녹음하고 있는 잭슨

1.4. 1986-1990 : Bad

1986년 타블로이드 언론들은 잭슨이 노화를 늦추기 위해 고압 산소 체임버에 자고 있다며 산소 체임버에 누워 있는 잭슨의 모습을 찍은 사진과 함께 대대적으로 보도 한다. 이는 미국 주요 언론들의 헤드라인을 장악했으며 다른 국가들로도 빠르게 소문이 퍼져나간다. 그러나 이 보도는 사실이 아니었다. 단지 잭슨이 화상 치료를 위한 산소 체임버에 누워 이것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한 것이 유출되어 빠르게 퍼져나간 거다. 또한 잭슨이 침팬지를 키우기 위해 구매한 것도 언론들에게는 기이한 행동으로 비춰졌으며 점점 사람들은 잭슨을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후 잭슨에게는 Wacko Jacko (미친 잭슨/괴짜 잭슨)라는 별명이 생겼고 타블로이드 언론들은 잭슨을 Jackson이 아닌 Jacko로 잭슨이 죽고나서인 지금까지도 쭉 그렇게 칭하고 있다. 타블로이드 언론들은 지금도 끊임없이 잭슨의 명예를 훼손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얻기 위해 잭슨에 대한 근거없는 소문을 담은 기사를 퍼트리고 있다. 잭슨은 Wacko Jacko라는 말을 무척이나 싫어했으며 자신을 Jackson이라 불러달라고 호소했다.

또 잭슨의 피부색은 전형적인 흑인의 피부에서 하얗게 변해갔는데 이는 광범위한 관심을 받았다. 백반증 때문이었지만 사람들은 잭슨이 백인이 되기 위해 성형 수술을 한다는 비난을 했고 잭슨은 큰 이미지 타격을 입게 된다. 이런 일들로 사람들은 잭슨을 역사상 최대의 가수로 인정하면서도 그의 사생활이 기이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당시 타임은 잭슨이 미국 내에서 음악적인 평가를 받지 못 하고 있다고 쓸 정도.

이로 인해 미국 내에서는 인기가 좀 떨어지고 말았다. 인기가 떨어진 것일 뿐이지. 그에 대한 관심은 여전했지만 말이다. 이 일은 잭슨에 대한 인기의 중심이 미국이 아닌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아시아로 움직이는 계기가 된다.

1987년 잭슨의 성인 3집 《Bad》가 발매된다. 11곡중 5곡이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는데 이는 하나의 음반에서 가장 많은 빌보드 1위 곡이 나온 것이다. 역시나 잭슨은 또 다시 신기록을 달성했다. 총 11곡중 9곡을 잭슨이 작사/작곡/프로듀스 했다. 퀸시 존스에서 영향을 많이 벗어났으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thriller' 보다는 판매량이 낮지만 확정치는 2200만장 현재까지 3200만장 이상이 팔린 것으로 추정된다. 확정치와 추정치가 많이 차이나는 이유는 50-90년대 초반까지의 인증 집계 시스템 결함과 타 국가들의 반영을 제대로 하지 못 했기 때문. 잭슨의 음반 뿐만 아니라 당시의 많은 음반들이 인증량보다 더 많은 음반을 팔았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로 인해 세계에서 10번째로 많이 팔린 음반으로 기록됐다.# 한편 이러한 엄청난 성공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래미에서는 총 6개 부문의 노미네이트 되어 최우수 단편 뮤직비디오 상 밖에 수상하지 못 했다. 나머지 1개는 번외 시상식에서 엔지니어들이 받는 최우수 엔지니어 녹음상이었다. 당시 시상식에서 잭슨 표정을 보면 알겠지만 무척이나 실망한 표정을 확인할 수 있다.정말 표정이 안 좋다... 비록 수상 실적은 좋지 못 했지만 그래미 중간에 여는 축하 공연은 정말 훌륭하게 해냈다 !! 맨 인 더 미러 초반은 립싱크 후반부는 라이브로 진행된다 평론가들에게는 좋은 반응을 얻었다. 5점 만점 중 올 뮤직 가이드에서는 4.5점을 《큐 매거진》에서는 만점을 받았으며 롤링 스톤에서는 4점을 줬다.뉴욕타임즈에서는 'favorable'로 평가받았다. 뉴욕 데일리 뉴스는 1등급 작업이라고 평가했고, USA투데이는 스릴러 이후로 사람들을 춤추게 하는 최고의 패키지라고 평했다.

1987년 일본을 시작으로 잭슨의 첫 솔로 투어인 'Bad tour'가 열린다. 총 123회 공연 440만명 관중을 동원하는 큰 성공을 이뤘고 영국에서 가장 많은 인원을 수용하는 웸블리 구장에서 7회 연속 매진으로 50만 4천명의 관객들을 불러와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신기록의 사나이. 80년대 투어 수입 2위 솔로가수의 투어로는 1위를 기록했다. 또한 잭슨의 노래와 춤에 열광한 나머지 관객들이 기절까지 하는 사태가 발생해서 안전상의 문제도 일어났다. 배드 투어도 남아있는 동영상이 별로 없는데 2013년 Bad 발매 25주년 기념으로 나온 《Bad 25》에 영국 웸블리 라이브 공연이 수록됐다. 1988년 빌리 진 그리고 아주 좋은 화질로 남아있는 1988년 Another Part Of Me 공연도 꼭 보자. 또 1988년 Human Nature도 압권. The Way You Make Me Feel도 보자 참고로 배드 투어 당시는 노래의 대부분을 라이브로 진행했다. 전반기는 전부 라이브. 후반부는 스무스 크리미널 등의 곡이 추가되면서 일부는 립싱크로 대처됐다.


배드 투어때의 마이클 잭슨.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비한 존재였다.

1988년에는 자본주의 국가 연예인으로는 최초로 소련의 TV CF 광고에 출연하였다. 또 첫 자서전 'Moon Walk' 를 출판하였는데 뉴욕타임즈 베스트 셀러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문 워커' 라는 잭슨이 출연한 단편 영화가 발표된다. 비디오로 출시됐고 빌보드 뮤직비디오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다. 3월에는 네버랜드를 건설짓기 시작했다. 1989년에는 잭슨의 가장 친한 친구인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그를 King of pop rock soul 이라 불렀는데 이는 곧 대중화 되어 잭슨의 별명이 King of pop 이 되는 계기가 된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인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는 잭슨을 백악관으로 초청하여 시대의 아티스트 상을 수여하기도 한다. 참조 80년대는 그야 말로 잭슨의 시대라고 볼 수 있는데 단 2개의 정규 음반으로 그는 80년대 가장 많은 음반 판매량을 올린 가수였다. 《Bad》의 대성공은 그의 입지를 공고하게 했으며 팝의 황제라는 칭호의 정당성을 얻게 된다.

1.5. 1991-1994 : Dangerous

1991년 그의 4번째 음반 《Dangerous》가 발매된다. 잭슨을 프로듀스 해 왔던 퀸시 존스와 헤어지고 테디 라일리와 손을 잡았는데 뉴 잭 스윙의 장르가 처음으로 도입됐고 이전 음반들과는 달리 사운드가 많이 변화했다. 현재까지 약 3천만장이 팔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전작인《Bad》보다 판매량은 감소했지만 역시나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음반 16위에 랭크되며 충공깽한 대중성을 보여줬다. 14개의 곡중 11개의 곡을 잭슨이 작사/작곡/프로듀스 했으며 그가 만든 Black or White 는 빌보드 차트에서 7주간 1위를 차지한다.대다수 평론가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5점 만점에서 올 뮤직 가이드는 3.5점을 큐 매거진은 4점을 롤링 스톤과 《Virgin Encyclopedia》4점을 줬다. Robert Christgau는 Off the wall 이후 가장 일관성 있는 음반이라며 A-를 줬고 롤링 스톤은 Bad 보다 훨씬 선명하다고 평가했다. 《Dangerous》는 다시 한번 잭슨 붐을 일으켰다. 기사. 1993년 우리나라 조사에서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으로 뽑히기도 했다.


Dangerous 앨범 활동 당시 마이클 잭슨. 진행된 백반증으로 달라진 메이크업 때문에 여성스러워진 얼굴이 눈에 띈다.

1992년부터는 'Dangerous tour' 가 열린다. 이 투어는 소련과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의 붕괴로 동구권에서도 진행될 수 있었으며 당시 러시아의 라디오 PD인 블라디미르 이바넨코는 CNN에 나와 이렇게 말하였다.

"공연은 서너 시간 늦어졌습니다. 야외 공연이었는데 그날 저녁 하필이면 모스크바에 비가 거세게 쏟아졌거든요. 빗줄기가 너무 강해 스태프들이 공연을 하는 내내 물을 쓸어내야 했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에게는 그날 공연이 정말 특별했습니다. 마이클 잭슨이 러시아에 왔다는 사실에 다들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열광했어요. 공연의 질과 사운드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의 공연은 굉장했어요. 이제까지 보아온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미국은 다른 별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이클 잭슨은 그 별의 제왕이었죠. 그는 열광적인 미국 생활의 표상 그 자체였습니다.."
Chas Newkey-Burden, 《Michael Jackson: Legend: 1958–2009》.


데인저러스 투어 'jam' 공연 선글라스를 벗는 마이클 잭슨. 실제 성격은 무척이나 수줍어하고 소심하다고 하지만 무대 위로 오르면 다르다. 황제로 변모하게 된다.

마이클 잭슨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미국 그 자체였고 미국을 대표했다. 그의 동구권 국가 공연은 서방이 몇십년간 못 했던 일을 잭슨 혼자서 해냈다고 평가 받을 정도로 서구권과 동구권의 만남을 상징했다. 투어는 후반기에 중단됐지만 350만명의 관객들을 불러왔다. 데인저러스 투어도 남아있는 동영상이 별로 없는데 1992년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한 공연이 2005년 발매됐다. 잭슨의 팬들이라면 꼭 봐야할 영상으로 잭슨의 댄스와 노래 뭐 하나 욕할 거 없이 아주 잘 찍어냈다. 위에서 보여준 빌리 진과 비교해보면 알겠지만 1992년 빌리 진은 그야 말로 환상의 춤을 보여 준다. 춤의 정교함의 정점은 데인저러스 투어때 찍은 것으로 보인다. 1992년 비트 잇도 꼭 보자. 초반부 잭슨의 패기는 그야 말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놀라게 한다. 왜 그가 사람들을 사로잡았는 지 알 수 있는 부분. 또한 오프닝 1992년 jam도 백미. 일명 토스트 기법이라 불리는 갑자기 튀어나와 2분간 가만히 서있다 선글라스를 벗고 춤을 추는데, 왜 그가 황제로 불리는 지 알 수 있다. 힐 더 월드는 투어 후반부로 잭슨의 웃는 얼굴이 정말 아릅답게 느껴진다. 투어의 종료를 알리는 맨 인더 미러 로켓 것 까지 하나 하나 ...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왜 그가 천재인지 알 수 있는 부분. 90년대 초반에 이런 것들을 할 생각을 하다니 혁신가 라고 부를 만 하다. 또 주목할 점은 HBO라는 미국의 케이블 채널에서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공연의 판권을 사서 1992년 방영한 적이 있는데 무려 시청률이 21.4%로 미국 케이블 TV 역사상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기사

아건 데인저러스 투어 때 일본 공연.엄청난 일본 팬들의 함성 소리를 들을 수 있다.

1993년 1월 31일 그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스포츠인 미식축구 결승전 하프타임에 나와 공연을 선보였다. 당시 미식축구협회는 시청률 하락으로 고민을 했는데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1993년 하프타임에 마이클 잭슨이 등장한다.전설의 슈퍼볼 공연 1993년이라는 시대의 기술적 한계와 야외 경기장이라 특별한 장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잭슨은 자신만의 댄스로 사람들을 완벽하게 사로잡았다. 정말 놀라운 것이다. 그는 1990년대 초반 아무 것도 없던 시절 스스로 모든 것을 해냈고 창의적인 안무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하프타임쇼의 시청률은 1992년보다 8.6% 높아졌으며 이후 하프타임때는 그해를 대표하는 가수들이 나와 공연을 하는 문화가 생겼다. 또한 이 해 잭슨의 2번째 자서전인 'dancing the dream' 이 출판된다.

자선 재단 'Heal The World Foundation' 을 설립하였는데 목적은 불우 아동 등을 돕기 위해서 였다.전쟁으로 인해 난리가 난 사라예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46톤이나 되는 물자들을 수송하기도 하였으며 'Dangerous tour' 의 수익을 모두 기부하였고 슈퍼볼로 인해 얻은 이익도 재단에게 기부하였다.

1993년 2월 10일에는 오프라 윈프리쇼에 나와 인터뷰를 했는데 9천만명이 시청하며 무려 시청률이 47.9%로 미국 역사상 가장 시청률 높았던 TV 프로그램 8위를 기록했다.# 시청률 순위를 보면 알겠지만 유일하게 잭슨의 인터뷰만 드라마스포츠 결승전이 아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높은 토크쇼 시청률을 기록한 것이다. 이런 높은 시청률을 기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잭슨은 전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했으며 그런 유명한 사람이 막상 TV에 나와 인터뷰를 잘 하지 않았다 ... 사람들은 잭슨에 대해 궁금해 했고 얼마 전 있었던 환상적인 슈퍼볼 하프타임 공연도 영향을 줬다.

오프라 윈프리쇼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오프라가 잭슨에게 동정이냐고 물어본다 ... (....) 왜 이런 질문이 나왔냐면 당시 잭슨이 상당히 여자같은 목소리를 가졌고 여자같은 앳 된 얼굴 그리고 여자들과 스캔들이 별로 없었다는 점에서 고자 혹은 동성애자가 아니냐는 루머가 상당했기 때문. 그의 성경험 유무에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했다 ...

35세의 나이에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연소 살아있는 전설상을 수상한다.#

1993년 여름. 최절정의 인기를 구사하던 잭슨 인생에서 최악의 사건이 터지게 된다. 마이클 잭슨이 성추행을 했다며 이반 챈들러가 기자회견을 연 것인데 이들의 연은 19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2년 잭슨은 도로 한복판에서 차가 고장이 나 어쩔 줄 몰라 하였는데 우연히 잭슨이 차 고장으로 인해 쩔쩔매는 모습을 본 근처 카센터의 직원은 그것을 사장 데이비 슈워츠에게 알렸다. 데이비 슈워츠는 훗날 잭슨이 자신을 성추행 했다며 주장한 조단 챈들러의 의붓 아버지이자 조단 챈들러의 친어머니인 준과 재혼한 사람이다. 슈워츠는 당시 아내 준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조단 챈들러는 열렬한 잭슨의 팬이였다.조단은 잭슨이 펩시 CF 광고를 촬영하던 도중 화상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자 편지를 써서 빠른 쾌유를 빌기도 하였다. 이를 이용하면 다시 사이가 좋아지지 않을까 잭슨에게 접근했고, 잭슨에게 차를 렌트해주는 조건으로 자기 아들과 놀아달라고 부탁하였다. 잭슨은 OK를 했고 조단과 그리고 조단의 어머니인 준 그리고 조단의 동생인 릴리까지 네버랜드를 포함하여 호텔 등에서 함께 놀았다. 이들의 사이는 급격하게 좋아졌는데 한 타블로이드 언론에서 이런 사실을 알고 마이클 잭슨의 새 가족이라는 특종을 보도하기 까지 하였다. 한편 이혼한 남편 이반 챈들러는 이러한 잭슨과 소년의 우정에 질투를 느끼게 되고 잭슨을 직접 대면하기 까지 한다. 이반 챈들러는 잭슨을 대면하고 나고선 그에 대한 악감정이 풀렸고 이반과 잭슨의 사이 또한 가깝게 된다. 잭슨은 이반을 최고의 아버지라고 칭찬까지 하기도 하였으며 이반의 경우는 잭슨에게 아예 우리 집 옆에 집을 지어 조단과 가까이 지내는 게 어떠냐고 제의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의 사이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한 건 조단이 잭슨과 함께 있고 싶다고 학교 친구들과 놀지도 않으며 잭슨에게만 함께 있으려 한 시점부터이다. 이반의 재정 상황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반은 치과 의사였지만 이혼으로 인해 위자료 6억원을 주며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야망 때문에 거액이 필요했던 시점이다. 이반은 준에게 조단의 양육비를 줘야 하지만 이반은 그것을 줄 능력이 없는 상태였다.

이반 챈들러는 당시 악덕 변호사로 유명한 베리 로스에게 찾아가 의뢰한 뒤 베리 로스 측은 잭슨에게 찾아가 2000만 달러의 합의를 제시했다. 당시 그들이 증거로 내세운 것은 조단의 녹음이었는데 참고로 조단은 처음에는 잭슨을 열렬히 좋아했으며 따랐으며 성추행을 당했다고 한 적이 없다. 이는 잭슨의 사립 탐정이었던 앤서니 펠리카노에 조사에서도 추가 확인된다. 그러나, 이반이 한 정신과 의사에게 조단을 데려가고 마취 전문의가 있어야만 투입할 수 있는 최면 진정제를 투입한 뒤부터는 조단의 말이 바뀌기 시작했다. 잭슨과 자신이 성관계를 나눴다는 것. 문제는 이때 사용된 최면 진정제는 'AMYTAL SODIUM'은 상당한 부작용으로 인해 비판이 심각하다는 점이다. 이 약을 투여하게 되면 의식이 몽롱해지고 상대방의 말에 거역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또한 이 약을 사용하여 거짓 기억을 심어주는 것이 얼마나 쉬운 지 미국 워싱턴 대학 등에서 실험이 진행되고 입증이 되기도 하였다.

참고로 이때는 언론에 보도가 되지 않았으며, 이반 측과 잭슨 측 두 사이만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상태였다. 잭슨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상태였고 이반 측은 2000만 달러를 제시했지만 잭슨 측은 결코 안 된다며 35만 달러를 제시했고 결국 둘은 합의를 이루지 못 하게 된다. 1993년 7월 2일 조단의 의붓 아버지인 데이비 슈워츠는 도대체 이반이 왜 이러는 지 이해를 할 수 없게 되자 전화를 시도했고 그 녹음본이 공개됐는데 당시 이반은 데이비 슈워츠에게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얻을 것이고 마이클 잭슨은 영원히 파괴될 것이다" 말하였다.

이후 이반은 잭슨을 민사소송 하였고, 아동복지국은 자체적으로 형사 수사에 착수하게 된다. 네버랜드가 압수수색 되자 언론에서는 이러한 사건을 처음 알게됐고 잭슨을 향해 끊임없는 비난을 쏟았다. 준은 형사 조사에서 잭슨은 성추행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말하였다. 잭슨은 자신은 결코 죄가 없다며 결백을 호소했고 무죄 추정의 원칙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극심한 스트레스와 진통제 중독 그리고 변호사들이 잭슨이 결백하더라고 하더라도 백인 중상류층 보수 지역인 산타바바라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며 끊임없이 합의를 권유하기도 하였으며 결국 2000만 달러에 합의를 하게 된다. 일부는 합의를 유죄를 인정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 합의안에서는 잭슨이 성추행 혐의를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명시됐다. 말 그대로 합의일 뿐이다. 민사 소송 문제는 해결됐지만, 형사 수사 부분이 남았는데 증거 부족으로 인해 불기소 처분됐다. 더 자세한 내용을 보고 싶다면 이쪽으로 상당히 길다.

잭슨은 큰 타격을 입게 됐다. 평화의 전도사 이미지는 사라지게 되고 많은 팬들이 등을 돌렸으며 펩시 콜라는 잭슨의 스폰서 활동을 종료했으며 싱글 발매도 취소되었다. 또한, 잭슨 개인에게도 엄청난 고통의 시작이었다. 불면증에 시달렸고 진통제와 약물에 의존하게 된다.

잭슨을 고소한 이반 챈들러는 잭슨이 죽은 지 5개월 후인 2009년 11월 17일 권총으로 자살을 하며 생을 끝마쳤다. 또한, LA DCFS (로스엔젤레스 행정부) 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바에 따르면 93년 챈들러 사건 당시 개별적으로 조사에 착수했지만 잭슨의 혐의를 찾을 수 없었다고 결론을 내린 사실이 밝혀졌다.

1994년 5월 잭슨은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결혼한다. 리사는 미국의 전설적 가수인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이다. 이 둘의 결혼은 엄청난 관심을 모았다. 흔히 현대 음악가 3명을 언급할 때 비틀즈엘비스 프레슬리 그리고 마이클 잭슨이 언급되는데 그런 엘비스의 딸이 마이클 잭슨과 결혼한다니.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일각에서는 잭슨이 이미지 회복을 위해 리사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지만 이 둘은 결코 그렇지 않다며 둘은 정말 사랑을 하고 있다고 반박했고 같이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기도 하며 시상식에도 동행하였다. 참고로 리사 마리 프레슬리가 당시 미국에서 어떤 존재였냐면, 엘비스는 50년대 히트를 쳤지만 그 후 내놓는 음반이 히트를 친 게 있긴 하지만 대다수가 실패했고 말년에는 약물 중독으로 인해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하였다. 많은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엘비스를 버린 것이 아니냐는 후회를 하게 됐고 그의 딸 리사의 슬픈 눈망울은 미국인들의 심금을 자극했다.

1.6. 1995-2000 : HIStory

많은 사람들은 잭슨이 재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냐는 궁금을 품었다.

1995년 잭슨의 첫 더블 음반이자 5번째 정규 음반인 HIStory가 발매된다. Disc 1에는 그의 히트곡들이 Disc 2에는 그의 신곡이 수록돼 있다. 수록곡 'You are not alone'은 빌보드 데뷔 첫 주만에 1위라는 일명 핫샷이라는 신기록을 세워 기네스북에 등재된다. 음반 판매량은 2000만장 이상이며 그래미 어워드에서 1개의 상을 수상하고 올해의 음반에 지명되기도 했다. 평론가들에게는 대체로 평균적인 수준이라는 반응을 얻었다. 5점 만점 중에서 올 뮤직 가이드와 큐 매거진은 3점을 롤링 스톤에게는 4점을 Robert Christgau 에게는 2점을 받았다. The Daily Collegian 와 Michigan Chronicle 에서는 favorable 을 New York Daily News는 Mixed라는 평가를 내놓았다. 재기로는 만족스러운 성적인 셈이다.

한편, HIStory 음반은 큰 논쟁을 불러왔다. 유태인 비하 논란,우상화 논란에 휩싸인 것. 'They Don't Care About Us'의 가사 중 'Jew'는 유태인을 비하하는 용어로 미국 내에서는 사용이 자제되어 왔는데 뉴욕타임즈가 잭슨의 노래에 인종차별적 요소가 들어있다는 단독 보도를 한 뒤 이틀 뒤 잭슨 측은 사회 정치적 문제를 고발하기 위해 선택한 용어이며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사과했다. 우상화 논란은 이 동영상을 보면 알 것이다. 이에 대해 잭슨은 ABC와의 인터뷰에서 주목을 받기 위해 선택한 전략이라 말했다.

8월 17일에는 팬들과 라인으로 채팅을 했다.!! 인터넷 공급자 AOL을 통해 1시간 동안 팬들과 온라인에서 만남을 가졌는데 현재는 보편화 됐지만 당시로만 보면 꽤나 센세이션 한 일.채팅 번역

또한,MTV 어워드에서 축하 공연을 했는데 Dangerous 공연이 압권 이것도 잭슨의 팬이라면 꼭 보자.

이해 12월에는 리허설도중 실신하여 병원에 입원하게 되는데 의사들이 15분만 늦었어도 죽었을 거라고 한다 (...)


1996년 1월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이혼한다. 리사 마리 프레슬리는 2003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마이클 잭슨과 리사 마리 프레슬리. 잭슨은 리사를 리사는 잭슨을 무척이나 사랑했다고 한다.

"난 사람들이 당신(마이클 잭슨)이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보게 된다면 나(당시 마이클 잭슨과의 결혼으로 리사 마리에게 대중들은 비난을 쏟았다)에게 미쳤다고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당신은 그냥 보통사람들처럼 앉아서 술마시고 욕도 하고 굉장히 재밌고 거친 소리도 하는 그런 사람인데 말이다. 그리고 당신은 항상 고음으로 말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매우 이상하다. 그(잭슨)가 자신이 진짜 어떤 사람인지 사람들에게 보여준 적이 거의 없는 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런 생각(잭슨에 대한 편견)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한동안 부부 생활은 원만했다. 그러나 갑자기 상황은 나빠지고 끔찍해져 버렸다. 난 정말 그와 사랑에 빠졌었다. 난 정말 그에게 푹 빠졌었고 난 꿈을 꾸고 있었다. 내가 그를 구원하고 우리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낭만적인 생각이 내 머릿 속에 있었다."
ㅡLisa Marie Presley, 《Rolling Stone 2003 Interview》.

리사는 정말 잭슨과 사랑을 했었고 그의 진실이 뭔지를 알고 있었다. 그가 다른 사람과 달리 특이하지도 않으며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기이한 이미지로 비춰지는 잭슨을 옹호했다. 리사는 1995년 잭슨과 함께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도 잭슨은 결코 성추행 같은 것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라며 적극적으로 잭슨을 방어했다. 또한 둘은 육체적 사랑을 하기도 할 만큼 서로에게 열정적이었지만 얼마 안 가 성격 차이로 인한 불화를 겪어 이혼을 하게 된다. 이혼을 했지만 사이가 쭉 나쁜 것은 아니다. 이혼 후에도 식사를 했고 잭슨의 월드 투어를 관람하기도 한다. 잭슨은 1993년의 사건으로 큰 고통을 앓았고 심적으로도 피폐해진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나 성공적인 투어가 열리고 아이를 낳아 가정을 꾸려 점차 안정화 됐고 리사는 그런 잭슨을 보며 다행스러웠다고 한다. 11월에는 데비 로우라는 여자와 재혼한다. 데비 로우는 1980년대 초반부터 마이클 잭슨과 아는 사이였다. 잭슨은 백반증으로 인해 피부과를 방문했는데 당시 잭슨을 돌 본 간호사가 데비이다. 데비는 잭슨의 열렬한 팬이었고 잭슨에게 싸인을 받기도 했으며 자주 통화를 하며 둘은 가까워 졌다. 리사 마리 프레슬리도 데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1996년 9월에는 'HIstory Tour'가 열린다. 5개 대륙 35개국에서 총 82회 공연으로 450만명의 관객들을 부른다. 관객 수치로 판단하면 잭슨의 월드 투어 중에서는 가장 성공적이었다. 한편, 이 투어 때는 성대 결절로 인해 ... 노래의 대다수가 립싱크로 진행됐다. 이로 인해 잭슨이 립싱커라는 오명을 쓰게 된다. 하지만 투어의 규모와 화려함은 잭슨의 역대 투어와 비교해 봐도 가장 컸다. 1997년 히스토리 투어 Earth Song 무려 탱크까지 나온다 돈이 얼마나 들었을 지 생각해 보면 정말 엄청나다. 이 외에 스무스 크리미널 공연초반부 Scream/They Don't Care About Us/In The Closet 97년 빌리 진도 보면 좋다.

우리나라에서도 공연을 했는데, 마이클 잭슨 공연 반대 대책위가 꾸려지고 잭슨 내한 공연 반대 운동이 매우 격렬하게 펼쳐졌다. (....) 한편, 잭슨은 1993년 데인저러스 투어 당시에도 우리나라에 오려고 한 적이 있는데 당시 김영삼 정부는 근검절약 분위기에 맞지 않다고 거절한 바 있다. 이번에도 좌절되는 가 싶더니 겨우 겨우 공연이 성사됐다. 그런데 청소년들은 못 보게 했고 19금 이상 처리 .. 거기에다 언론들도 잭슨에게 부정적인 보도를 많이 했고 내한 반대 운동은 계속됐다. 덕분에 표 판매의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됐다. 당시 기사를 보면 매진에는 실패했고 관객의 70-80%를 채우는데 성공했다.[8]공연이 끝나고 태원예능의 사장님인 정광택씨가 당시 겪은 일을 바탕으로 '마이클 잭슨이 어쨌다구요?' 라는 책을 쓴 바 있다. 현재는 절판되어 사지는 못 하고 도서관에서 빌려볼 수 있다. 정광택씨는 책 뒷면에서 이렇게 꼬집었다. "정부가 허가한 공연의 표도 못 팔게 한 나라가 이 지구상 어디에 있습니까?"

1997년 2월에는 그의 첫번 째 자녀. 마이클 조셉 잭슨 주니어가 태어난다. 리믹스 음반 Blood on the Dance Floor: HIStory in the Mix를 발매한다. 200만장 이상이 팔린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음반에 수록된 Blood on the Dance Floor 는 미국 빌보드 핫 100에서는 42위에 그쳤지만 영국 등에서는 1위를 유럽에서는 벨기에(11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선 10위 안에 드는 히트를 쳤다. 미국과 유럽 간 차트의 괴리가 발생한 이유는 잭슨이 Wacko Jackco 와 성추행 논란 그리고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이혼으로 미국 본토에서 큰 이미지 피해를 입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런 차트의 괴리 현상은 이 음반만 그런 것이 아니다.《HIStory》때부터 서서히 이런 현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Earth Song' 'They Don't Care About Us' 'Stranger in Moscow' 가 대표적. 미국에서 잭슨에게 관심이 없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기는 《Thriller》에 비해 많이 낮아졌다... 오히려 영국이 잭슨의 본국이라고 해도 속을 정도로 영국에선 인기가 여전했지만 말이다. 참고로 생각해 볼 점은 잭슨에게 온갖 추악한 비난을 한 언론은 미국 뿐이 아니라 영국도 대표적이다. 특히 그 중심이 더 선인데 정작 영국에선 잭슨을 향한 인기가 식지 않았다는 점은 생각해볼 만한 점.

1998년 잭슨의 두번 째 자녀. 패리스 마이클 캐서린 잭슨이 태어난다.

1999년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이라는 공연이 한국 서울과 독일 뮌헨에서 열렸다. 잭슨의 생전 마지막 해외투어이다. 당시 SBS가 생중계를 해줬는데 최고 시청률이 무려 42.3% 한국에서도 잭슨을 향한 관심은 매우 뜨거웠다.당시 공연의 풀 영상이다. 화질이 좋지 않다 10월 8일에는 '데비 로우'와 이혼을 한다.

1.7. 2001-2009 : Invincible 그리고 마지막

공교롭게도 9.11 테러가 발생하기 며칠 전 잭슨의 30주년 기념 공연이 테러가 발생한 뉴욕에서 열렸다. 2001년 빌리 진 형제들이 1984년 'Victory Tour'이후 다시 모여 펼친 공연이다.

그의 6번째 음반 'invincible' 이 2001년 발매된다. 잭슨의 정규음반에서는 가장 좋지 못한 소리를 들었는데 최종 인증 (2002년 기준) 된 미국내 판매량이 200만장밖에 되지 않으며, 영국 30만장 독일 30만장 프랑스 10만장 등으로 좋지 못 한 기록을 냈다. 확정치는 최소 500만장이다. 전작 히스토리가 2000만장 이상을 팔아치운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좋지 못 한 기록인데 빌보드 음반 차트에는 1위에 올랐지만 처음으로 잭슨의 음반 중 빌보드 1위가 한 곡도 나오지 않았다. 이 음반이 실패한 이유는 당시가 9.11 테러로 상업성이 크게 침체된 분위기였고 여타 잭슨의 음반과는 다르게 발라드가 상당히 많으며 유일한 댄스곡들도 비트 쪼개기는 대단했지만 프로듀서 로드니 저킨스의 전형적인 사운드라 참신한 맛을 주지 못 하였다.

2002년에는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그의 3번 째 자녀인 프린스 마이클 잭슨 2세가 태어난다. 어머니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2003년 마틴 바시르가 제작한 Living With Michael Jackson 라는 프로그램에서 대리모에게 자신의 정자를 주입해 낳은 것이라고 인정했다. 11월 20일 잭슨은 독일 베를린호텔에서 아기를 보고 싶다며 환호하는 팬들을 향해 창가에서 프린스 마이클 잭슨 2세를 보여줬는데 이는 매우 아찔한 모습으로 위험하게 비춰졌다. 잭슨이 갓난 아기를 창가에서 흔드는 모습처럼 말이다. 언론에서는 이런 잭슨을 향해 엄청난 비난을 퍼부었다. 잭슨은 이에 대해 끔찍한 실수였다며 인정했고 팬들이 아기를 보고 싶어하길래 손으로 꽉 잡고 보여준 것이라며 결코 흔든 게 아니라고 해명했다. 같은 해 Dangerous 공연도 열었는데 한번 보자. 이때 나이 잭슨의 나이는 44살 다른 댄서들이라면 은퇴하고도 한참 지날 시기인데 잭슨은 여전히 좋은 테크닉을 보여줬다. 그러나 공연을 보면 후반부에 잭슨이 잠깐 라이브로 부르는데 숨차는 소리가 들린다 (...) 거기에 끝나갈 때 쯤 안무가 틀렸다. 잭슨도 세월은 피할 수 없었나 보다.

2003년 2월 'Living With Michael Jackson'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된다. 영국의 기자 마틴 바시르가 240일동안 마이클 잭슨을 동행하며 찍은 것인데 엄청난 관심과 논란을 불러왔다. 2003년 2월 3일 영국에서 ITV 방송국이 최초로 방영했는데 1400만 가구 시청자 수는 3800만명으로 무려 시청률53.9%였다. 네덜란드에서는 20.4% 미국에서는 18.7% 이스라엘에서는 28.4% 일본에서도 25%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 시기면 잭슨은 안 좋은 일이 많아 한참 음악적 전성기가 지났던 시기인데 그의 존재 자체는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관심거리 였던 것. 이 방송의 내용은 처음에는 잭슨의 유년 시절 아버지로부터의 학대로 시작되며 잭슨이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나무에 올라가고 아이들과 노는 모습 순으로 나온다. 이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잭슨은 큰 배신감을 느꼈다며 분노했는데, 자신의 행동과 행위를 악의적으로 편집하여 왜곡했다고 주장한 것. 방송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사람들이 잭슨에게 느낀 이미지인 기이함을 쐐기를 박은 꼴이 돼 버렸다. 잭슨이 심하게 사치를 부리는 부분과 아이들을 좋아하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였고, 그가 나무에 올라탄 것은 그동안 자신들이 보았던 팝의 황제와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큰 충격이었던 것. 큰 문제는 후반부에 잭슨과 함께 지내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였는데 잭슨은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게 왜 문제냐고 기자에게 말하였다. 아이들과 침대에서 같이 자는 게 왜 문제인가? 그걸 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했는데, 동양적 관점에서 보면 잭슨의 행동은 별로 이상하지 않지만 아동과의 성에 민감한 서양권에서는 매우 이상한 모습으로 비춰졌었다. 잭슨은 훼손된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The Michael Jackson Interview : The Footage You Were Never Meant To See' 이라는 반박 비디오를 제작하여 FOX를 통해 방영하였다. 'Living With Michael Jackson'은 온스타일이 2009년 마이클 잭슨의 잔인한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도 방영하였다.

잭슨이 죽고 나서 그의 아내였던 리사 마리 프레슬리는 2010년 오프라 윈프리쇼에서 자신도 그 다큐를 봤지만 그것은 왜곡된 것이라며 실제 잭슨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다. 그것이 잭슨의 다가 아니라고 잭슨을 방어했다. 마틴 바시르의 'Living With Michael Jackson' 은 240일 동안 촬영한 결과물이다. 우리들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아예 사고를 치지도 않으며 전혀 이상한 행동을 안 하는 사람들인가? 그렇지 않다. 잭슨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와 같았고 단지 이상한 행동만이 집중적으로 다큐멘터리에 비춰졌을 뿐이다. 잭슨의 팬들이라면 한번 쯤 그 동영상을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10월 27일에는 9.11 테러를 추모하기 위해 잭슨이 주도하여 미국에서 잘 나가는 가수들을 모아 노래를 만들고 자선 공연을 열기도 하였다. 수익금은 모두 자선 단체로 갔다. 발매된 싱글은 'What More Can I Give'로 영어 버전과 스페인어 버전 2개로 나누어저 있다.

11월 18일에는 잭슨의 히트곡을 모은 'Number ones' 음반이 발매된다. 현재까지 전 세계에서 1300만장 이상 팔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1월 20일에는 'One more chance' 라는 잭슨의 새 싱글이 발매된다. 뮤직비디오를 보면 잭슨의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는데 당시 경찰의 수사로 인해 뮤직비디오가 제대로 완성되지 못 했다. 미국 빌보드 차트에서는 83위지만 영국 차트에선 5위를 기록하는 등 유럽 내에서는 썩 나쁘지 않은 성적을 냈다.


2005년의 마이클 잭슨. 환하게 웃고 있지만 심적으로 고생했던 시기라 그런지 약간 수척하다.

2004년 11월 17일에는 잭슨의 히트곡을 모아놓은 4장의 CD와 1장의 DVD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공연)로 구성된 베스트 음반 박스 세트가 'The Ultimate Collection' 발매된다. 또한 잭슨의 미공개곡까지 수록되었다.

2005넌 발코니 사건과 마틴 바시르의 방송이 송출된 상황에서 성추행 사건이 다시 터지게 됐다. 잭슨은 기소를 당하게 되는데 당시 아동복지국은 사건의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소년 개르빗 아르비조를 조사했지만 잭슨이 성추행을 했다는 증언을 못 얻자 혐의없음으로 검찰에게 의견을 보냈다. (참고로 개르빗 아르비조는 암에 걸린 소년이었다. 부모의 이혼과 불화로 치료 받을 형편이 못 되자 여러 헐리우드 스타들에게 SOS를 쳤고 그것을 본 잭슨이 나서 직접 도와준 것이다..)그러나 검찰은 이를 무시하고 잭슨을 기소하였고 결국 재판을 받게 된다. 잭슨은 만장일치로 무죄 판결을 받는다. 무죄 판결을 얻은 주 요인은 증거가 없으며 증인들의 증언이 이상하며 잭슨을 고소한 사람들이 과거 동일수법의 사기 전과가 있었음이 거론됐다. 또한 아르비조의 가족들은 리스 터커라는 배우에게 접촉하여 1만 4천 달러 정도의 상당한 물건을 뜯어냈는데 터커는 잭슨에게 그들 가족은 매우 위험한 사람들이니 조심하라고 주의를 할 정도였다.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대중들은 그의 무죄를 신뢰하지 못 했으며 가장 바보스러운 미국인으로 몇년 간 뽑히는 전성기와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명예가 추락하고 말았다. 2009년 11월 공개된 FBI파일을 보면 FBI에서도 이 사건에 조사를 참여했는데 잭슨의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찾지 못 했다고 결론을 지었다. 또한, 재판 이후 개르빗 아르비조의 어머니 자넷 아르비조는 공문서 위조 혐의로 기소당하여 벌금을 낸다.. 7월 19일에는 잭슨의 히트곡을 모아놓은 2장의 CD로 구성된 'The Essential Michael Jackson' 이 발매된다. 현재까지 600만장 이상 팔린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잭슨은 무죄 판결 이후 바레인으로 휴식차 여행을 떠났고 2006년 영국 월드 뮤직 어워드에서 상을 받기 위하여 모습을 드러낸다.

2006년 6월 5일 일본의 SMAPXSMAP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번역OK 동영상 11월 14일에는 잭슨의 히트 싱글 20곡을 모아놓은 박스세트 'Visionary: The Video Singles' 이 발매된다. 2008년에는 'Thriller 25주년' 음반이 그리고 'King of Pop' 이라는 히트곡을 모아놓은 베스트 음반도 발매된다. 참고로 당시 미국에서는 'King of Pop' 음반이 발매되지 않았는데 미국의 잭슨 팬들이 소니가 지금까지 너무 많은 수의 베스트 음반을 남발하고 있으며 빌리 진 등의 트랙들을 마음대로 수정하였다고 불매 운동을 펼치는 등 강렬한 항의 운동을 하자 미국 시장에서는 발매를 하지 않았다.

많은 루머 속에 잭슨은 2009년 3월 8일 영국에서 복귀 선언을 한다. 이번이 마지막 공연일 것이며 팬들이 원하는 노래를 부를 것이라고 했다. 총 50회의 공연이며 75만개의 티켓은 5시간 만에 매진됐다. 오랜 공백기와 루머 속에서도 잭슨을 향한 사람들의 관심은 줄지 않은 것이다.

2. 죽음

2.1. 2009.06.25

2009년 6월 25일 자택에서 숨을 제대로 못 쉬는 상태로 발견되어 로스앤젤레스의 현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그날 심장마비로 인해 향년 50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잭슨이 죽은 다음 날. 중국 신문들의 1면. 잭슨은 단 한번도 중국에서 공연을 연 적이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뜨거운 반응이라니..

그의 죽음은 80년대의 사망선고 라고 할 정도로 그와 시대를 함께한 많은 사람들을 슬픔에 빠지게 했다. 대중문화의 그 자체로 존재했으면서 그리고 때로는 안 좋은 모습을 비쳤고 사람들은 그를 욕하고 돌아섰지만, 막상 그가 없어지자 허무함을 느낀 것. 이거와 그리고 이것은 잭슨의 죽음 소식이 들리고 그와 시대를 함께한 사람들이 적은 글들로 사람들의 감정을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다.

마이클 잭슨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보도되고 언론에서는 잭슨의 죽음에 대해 근거없는 추측을 했다. 타블로이드지의 주사바늘,자살,슈퍼 박테리아,피부암,성형 후유증 보도 등이 이어졌지만 부검 결과 마이클 잭슨은 사망 당시 50세 미국인의 건강에 비춰봤을 때 건강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잭슨의 사망 소식이 보도되고 뉴스 웹사이트는 사용자 폭주로 빠르게 과부하에 걸리게 됐다. 잭슨의 사망 소식을 최초 보도한 TMZ와 뉴욕타임즈는 서버 폭파 현상을 겪었으며, 구글은 마이클 잭슨 검색어 량이 수백만씩 폭등하자 DDoS 공격으로 간주하고 30분동안 마이클 잭슨 관련 검색을 차단하기도 하였다. '글로벌 랭귀지 모니터' 조사에 의하면 마이클 잭슨의 사망 소식은 21세기 인터넷에서 역대 2번째로 많이 다루어진 소식으로 조사됐다.

2009년 6월 25일은 한국에서 2번째 공연을 가진 지 딱 10년이 되던 날이었다.[9] 마이클이 한국에서 첫 공연한 건 1996년 10월 14일이다.

유감인 것은 그는 2009년 07월 13일에 런던에서 컴백 콘서트 This is it 시리즈를 준비중이었다는 것이다. 복귀를 한 달 앞둔 사망. 결국 20세기 제일의 팝의 황제는 그렇게 허무하게 지고 말았던 것이다.[10] 일각에서는 모차르트, 엘비스 프레슬리 등과 비교하며 천재는 요절한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다며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의 사망 후 CNN을 비롯한 몇몇 해외의 유명 언론들이 정규 뉴스를 중단하고 긴급 속보 체제에 돌입하였으며 전세계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애도를 표하면서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엔터테이너' 이라는 타이틀이 과장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더불어 사망 소식 이후 음반 매출 순위 1~5위까지 잭슨이 석권 중(10위권 중에서 당시 최고였던 블랙 아이드 피스, 레이디 가가의 음반 2개를 제외하면 전부 잭슨의 음반이였다). 타임즈에서는 특집판도 나왔다.

팝의 황제로 놀라운 명성과 영예를 누렸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던 사람. 여러가지 구설수가 있었지만 아까운 사람이 죽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의 춤과 음악은 영원히 남으리라.

그리고 사망 이후 그의 인격적인 측면이 지인과 자녀들을 통해 증언되고 과거에 있었던 몇몇 추문들의 진실들이 밝혀지며 본국인 미국에서도 영웅적인 이미지를 많이 회복했다. 놀라운 것은 그의 사후 유튜브에 그의 공연 영상들이 마구 업데이트되어 잭슨에 대한 미국 10대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그의 10대 팬층도 상당히 증가했다는 것이다.

팝의 황제답게 이 모든것이 쇼이며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라는 팬들의 극성적인 말들이 나오기도 했으며 그 덕분에 한동안 영문판 위키백과에서는 죽었다 안 죽었다 가지고 수정전쟁이 발생하기까지 했다(...) 관련 기사.

미 현지 시각으로 2009년 7월 7일 마이클 잭슨 추모식이 열렸고 약 3만 명이 그 자리에 참여했다. 가수 한 명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이러한 행사가 열릴 정도라는 것은 그가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알려주는 또 하나의 증거. 미국 내에서 실시간 중계됐는데 총 시청자 수는 3110만명으로 로널드 레이건과 웨일스 공작부인 다이애나 다음으로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영결식이 됐다. 9월 13일에는 마돈나가 'VMA'에서 추도사를 읽었다. 다음은 전문.

"마이클 잭슨은 존재했던 위대한 천재 중 한 명이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여덞살의 나이로, 마치 모든 걸 겪어본 어른이 당신의 심금을 울리는 듯하게 만들었다. 그가 춤을 췄을땐 프레드 아스테어의 위상을 보는 듯했고 무하마드 알리의 펀치같이 강했다.. 그의 음악은 설명이 불가능한 마술과도 같았고 단지 춤을 추게 만든 것뿐이 아니라 당신의 꿈을 향해, 당신이 되고 싶은 무엇이든지 할수 있다고 믿게 만들었다. 그건 영웅들이 할수 있는 것이고 마이클 잭슨은 영웅이었다. 남자 여자 할것없이 모두 그를 사랑했고 모두들 그처럼 춤추고 싶어했다. 별세계의 사람같아 보였지만 그 역시 인간이였다. 다른 대부분의 연예인들처럼, 그는 수줍음이 있었고 불안감이 그를 괴롭혔다. 내가 그의 절친한 친구였다고 할 순 없지만 1991년 그와 좀더 가까워지려고 노력했었다. 그를 저녁식사에 초대했고, "내가 살게. 내가 운전할 거야. 너랑 나랑 둘만. 그가 동의했고 보디가드 없이 내 집에 왔었다. 내 차로 레스토랑까지 운전했다. 밖은 어두웠는데 그는 여전히 선글래스를 쓰고 있었다. 이렇게 말했다. " 마이클, 내가 리무진한테 말하고 있는 거 같아. 니 눈좀 보게 선글래스 벗어줄 수 없어?" 그가 창밖으로 선글래스를 벗어 던지더니 날 보고 윙크를 하며 웃어주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젠 나 잘 보여? 좀 나아?" 그때 난 그가 상처받기 쉽다는 것과 그의 매력또한 느낄수 있었다. 그 후, 우리는 내 집으로 돌아가 쇼파에 앉아 그저 아이들처럼 영화를 봤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도중, 어느샌가 그가 내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그가 원하는건 연애 상대보단 친구인것 같았고, 그럴수 있다는 게 기뻤다. 그순간만큼은 수퍼스타가 아닌 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몇 번의 데이트를 더 했고, 어떤 이유들로 멀어졌다. 마녀사냥이 시작됐을때, 마이클에 관한 안 좋은 이야기들이 줄지어 등장했었다. 그의 고통을 느낄수 있었고, 온 세상이 등을 돌린 기분이 어떤건지 알수 있었다. 사람들이 죽이지 못해 안달할 때, 당신의 목소리는 절대 전해지지 않는것 같을 때, 스스로를 변론하기도 어찌하지도 못하는 기분이 어떤지 알고있다. 처음 마이클의 사망소식을 들었을 때, 런던에서 공연을 며칠 앞두고 있었다. 일주일 후 마이클이 같은 장소에서 공연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때 난 오직 이 생각 밖에 할수 없었다. "내가 그를 모른 체했구나.우리 모두 그를 모른 체했다. 한때 온 세상을 열광하게 만들던, 이 훌륭한 이를 우리 모두가 어느사이 곤경에 빠져버리게 놔둔 것이다. 그가 그의 가족을 만들고, 그의 업적을 다시 세우려고 하는 동안, 우리 모두는 속단해 버렸던 것이다. 우리 대부분이 그에게 등을 돌렸다. 애써 그를 기억하려고, 인터넷으로 오래전 그가 TV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영상들을 보았다. 그리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정말 유니크하고, 유일하고, 보기 드문 사람이야. 그리고 다시는 그같은 사람은 나타나지 않을거야. 그는 황제였어. 그 또한 사람이였고 우리도 마찬가지 이다. 그리고 우리는 때로, 누군가의 소중함을 깨닫기 전에 잃는다. 내 연설을 긍정적으로 끝마치고 싶고, 이 얘길 하고 싶다. 내 9살 그리고 4살난 아들들이 마이클 잭슨에 푹 빠져있다는 걸. 그리고 그건 마치 전혀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이 마이클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그 아이들이 그의 삶을 이어가는것 같다. 지금 마이클이 어디에 있건, 웃고 있길 빈다. 그렇다. 마이클 잭슨도 사람이였지만 그는 황제였다. 왕이여 영원하라."
마돈나 2009년 VMA 연설.

그의 생일인 2009년 8월 29일에는 뉴욕, 베이징, 도쿄, 서울, 파리, 런던, 베를린, 상파울루 등등 전 세계에서 그를 추모하기 위한 'Beat it' 플래시몹이 벌어졌으며 2014년인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고 앞으로도 계속 진행 예정이다.

2009년 7월 11일, LA 경찰에서 타살설을 제기했고 15일에 잭슨의 사망을 살인으로 결론지었다. 의도적인 살해는 아닐지언정 치료과정 중 과다한 약물투여로 인한 과실치사라는 듯.

2011년 9월 28일부터 미국에서 잭슨의 주치의이자 천하의 개쌍놈인 콘래드 머레이(Conrad Murray)에 대한 공판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잭슨의 사망 직후의 사진이 공개되어 논란이 일고 있다. 머리는 공판에서 잭슨이 자의에 의하여 불면증 치료제인 프로포폴을 주입했다고 주장했다. 사진과 함께 사망 전의 음성 녹음파일도 공개되었다. # 그 결과 2011년 11월 29일 콘래드 머리는 과실치사 최대형인 4년형을 받게 되었다. 교도소가 꽉 차서 빨리 보낼까봐 캘리포니아 교도소로 보내겠다고 할 만큼 엄중한 처리를 받았다.

'사람들이 이 쇼를 떠날 때, 사람들이 내 쇼를 떠날 때 나는 사람들이 '내 생애에 본 적이 없는 최고의 쇼였어' 라고 말하기를 바란다' 는 내용이 담겨있었다고 한다. 언론에서도 '약물에 취한 듯한 목소리' 라고 말하며 잠정적으로 그의 약물 남용설을 미는 눈치다. 공개된 육성이 술에 취한 듯 느릿느릿하고 알아들을 수 없기는 하지만 약물을 복용하고 말을 했다는 증거로 쓰이기에는 다소 문제의 소지가 있다. 물론 50세가 넘은 노장의 댄스 가수에게 간만에 컴백이 심적 부담으로 작용하기는 했겠지만 '모르핀(Morphine)' 이라는 곡에서 약물에 대한 위험성을 시사하는 곡을 부르기도 했고 프레디 머큐리와 듀엣 당시에 약물을 권유받았지만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었다. 주치의 머리의 주장에 많은 팬들이 분개하고 있는 상황. 슬프게도 육성 속 고인의 꿈이 실현되지 않았지만 마지막 공연에 대한 고인의 열정을 잠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결국 2011년 11월 7일 # 과실치사(involuntary manslaughter) 유죄 판결이 떴다!! 머리는 보석금 없이 바로 구금되었고 재판소 밖의 팬들은 환호를 질렀다.

2.2. 사후

사망 직전 준비 중이던 런던 투어의 리허설 영상과 인터뷰 영상이 포함된 다큐멘터리 영화 'This is it' 이 2009년 10월 29일 전 세계에서 동시 개봉되었다. #

2009년 10월 12일 신곡 'This is it' 의 음원이 공개되었다. 또한 영화 'This is it' 은 개봉하지도 않은 상황인데도 갖은 기록을 세웠다. 11월 8일 신보인 Breaking News 의 동명의 타이틀곡이 공개되었다. 잭슨이 완성하지 못한 노래를 $ony에서 완성시킨 것. 미국의 팬들은 빌보드 TOP 200 데뷔 1위를 기대하고 있는 눈치다.[11] 결국 이번에도 발매하자마자 1위를 찍어버린 위용을 자랑했다. 역시 로큰롤은 엘비스 프레슬리를 이길 수 없고 록은 비틀즈를 이길 수 없으며 팝은 잭슨을 이길 수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증명.

2010년 12월에는 사후 잭슨의 신음반 'MICHAEL'이 나온다. 빌보드 음반 차트 3위를 찍었으며 총 판매량은 130만장 이상을 기록했다.

원더 페스티벌 2010에서 마이클 잭슨 스릴러 버전의 'figma' 가 공개.[12] 발매일은 2011년 10월 29일이지만 3일 앞서 플라잉 겟에 성공한 유저가 스레를 세워 인증샷을 올렸으나... 퀄리티가 망했어요. #

그리고 2014년 반다이 S.H. 피규어아츠로 smooth criminal 버전 마이클 잭슨 발매가 결정되었다.# 일본이미테이션 예능인 마이코 료가 축사를 남기기도 하는 등 홍보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발매일은 2014년 9월. 피그마를 월등히 앞서는 얼굴 조형이 돋보인다.


2011년 4월에는 마이클 잭슨을 타이틀로 한 게임 Michael Jackson The Experience가 출시되었다. 발매 기종은 XBOX360 키넥트, PS3, Wii, DS, PSP. XBOX와 PS3로 발매되기 전에 먼저 발매한 Wii, DS, PSP버전의 게임 판매고사 300만 장을 넘었다고 한다. 이 중 PSP 버전이 국내 PSN을 통해 가장 먼저 정식 발매되었고 이후 XBOX360 버전과 PS3 버전이 국내에 발매될 예정이었으나 PS3 버전은 발매가 취소되고 XBOX360 버전만 정식 발매되었다. 8일에 예약판매를 시작한 '컬렉터스 에디션' 과 '마이클 에디션' 중 '컬렉터스 에디션' 은 예약 당일 12시를 넘기지 못하고 매진되었다.

게임은 무난하게 잘 만들어졌으나 일반인들이 마이클 잭슨의 춤을 그대로 따라하기에는 당연히 무리인지라(...)[13] 적절히 난이도를 하락시켰다. 하지만 그래도 난이도가 높은 편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반응. 게임 내 메뉴에는 MJ School이라 하여 잭슨의 백댄서들이 시범을 보이는 튜토리얼 메뉴가 있으며 구분 동작 하나하나 자세히 가르쳐주므로 쉽게 배울 수 있... 을 것 같지만 동작 자체가 꽤 난이도 있는 게 많아서 여전히 어렵다(...)

2013년 6월 마이클 잭슨의 딸인 패리스 잭슨이 자살을 기도한 것이 드러나 충격을 줬다.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지만 유산 싸움으로 인한 스트레스 및 여러 고달픔이 크다고 한다. 기사.

2014년 잭슨의 두번째 사후음반. 'XSCAPE' 가 발매된다. 2015년 1월 기준으로 총 판매량은 150만장 이상이며 빌보드 음반 차트에서 2위를 기록했다. 또한, 발매와 동시에 49개국 아이튠즈에서 음반 차트 1위에 올랐다. 싱글 'Love Never Felt So Good' 은 빌보드 차트 10위에 오르며 50년대에 걸쳐 빌보드 TOP 10에 진입한 유일한 가수가 됐다.

2014년 5월 18일(현지시간) 미국에서 열린 빌보드 뮤직 어워드 2014에 홀로그램으로 등장해 Slave to the Rhythm를 공연했다. 기사.

마이클 잭슨의 네버랜드가 콜로니 캐피털에 의해 매각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마이클 잭슨의 유산 관리원은 이같은 소식에 매우 낙담스럽고 슬프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마이클 잭슨은 2008년 콜로니 캐피털과 네버랜드 합작투자를 위해 계약을 체결하였는데 콜로니 캐피털이 투자를 하면 할수록 콜로니 캐피털이 소유하는 지분은 늘어난 것이었다. 지난 6년 동안 콜로니는 네버랜드의 500억 이상을 투자한 것으로 추정되며 네버랜드를 매각할 수 있는 권리 또한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마이클 잭슨의 사후 소득이 1억 달러 이상이라는 뉴스가 보도됐다.기사. 이는 생존 가수들보다 훨 높은 것으로 그의 인기와 상업성이 죽어서도 끝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YouGov'라는 유명 여론조사 업체에서 미국인에게 마이클 잭슨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결과는 응답자의 61%가 잭슨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며 응답했으며 32%는 비호감을 표시했다. 이는 11년 전인 2003년 갤럽의 여론조사인 호감 18% 비호감 65%와는 상반되는 결과.

타블로이드 언론들의 거짓 보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잭슨에 대한 비난 기사로 잭슨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 CNN에서는 타블로이드 언론의 보도를 직접 반박하기도 했다. 주의하자. 타블로이드 언론들은 또한 가상의 익명의 관계자가 그랬다는 식의 보도도 자주 하는데 결코 보지도 믿지도 말 자. 참고로 잭슨의 명예를 훼손하는 언론은 타블로이드 뿐이 아니라, 미국 유명 언론사이자 보수 성향으로 유명한 폭스 뉴스도 함께 하고 있다. 폭스 뉴스는 타블로이드 언론들의 보도를 그대로 받아 적고 있어서 해외 잭슨 팬들에게는 아주 증오의 대상이다. 마이클 잭슨 유산 관리원은 타블로이드 언론들의 보도에 속지 말고 팬들이 MJ의 유산을 지켜나가기 위해 함께 가자고 성명을 발표했다.

3. 평가/성과

3.1. 음악적 분석과 영향력


1988년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은 마이클 잭슨

보는 음악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보는 음악이란 뮤직비디오와 무대 위에서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댄스를 예로 들 수 있는데 마이클 잭슨 이전에는 무대 위에서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극소수 였으며 잭슨처럼 체계적이며 정교한 안무를 소유한 가수도 없었다. 그러나, 잭슨은 달랐다. 그는 뛰어난 노래와 함께 최고의 댄서로 평가받는 프레드 아스테어에게 극찬을 받는 댄스를 선보이며 문워크를 사람들에게 선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더이상 듣는 거에만 만족하지 않게 됐고 잭슨처럼 자신들에게 어필하는 가수들을 원하게 됐다. 지금 현대 가수들에게서 볼 수 있는 무대에서 춤과 파격적인 뮤직비디오의 시작은 80년대 잭슨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 한다.신문과 놀자!‘보는 음악’ 뮤직비디오 시대를 열다 잭슨의 공연은 항상 새로운 시도들로 가득했으며, 투어 공연에는 처음으로 뮤지컬 개념을 도입했으며, ≪Off The Wall≫은 모타운의 훵크 사운드를 하드록 기타로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증명했고 ≪Thriller≫와 ≪Bad≫는 MTV가 팝시장의 주류 매체가 되도록 기여했으며 한국의 댄스 가요는 빚을 지고 있다고 한다.

댄스의 대중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1974년 'Soul Train'에서 J5의 일원으로 출연해 로봇춤을 유행시켰으며, 당시 뒷골목에서 흑인들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브레이킹 댄스를 공중파에서 최초로 선보여 전국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그의 'Thriller'와 'Beat it'은 뮤직비디오에서 최초의 집단군무를 선보였고 이는 후대 그룹들의 댄스 교과서 같은 역할을 했다. 뛰어난 노래에 몸을 맞춰 추는 그의 모습은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으며 잭슨의 춤을 본 많은 사람들이 춤을 추기 위해 댄서에 도전했고 2009년 개봉된 마이클 잭슨의 This is it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당시 오디션에 응시한 세계적인 최고의 댄서들이 잭슨이 자기들의 우상이라며 그를 보고 춤을 시작했다고 한 입을 모아 말한다. 잭슨 사후 댄서들은 잭슨에게 큰 영향을 받았으며 춤의 아버지를 잃었다고 애도를 표했다.#

음악계의 흑백 장벽을 허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방송국들의 인종차별 정책을 돌파해냈고 잭슨의 성공으로 흑인 뮤지션들의 음악계 진출에 활로가 생기는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성과는 흑인을 포함한 유색 인종들에게 자신감과 긍지를 부여했다. 생각해 보자. 흑인들이 억압받던 시대에 비틀즈엘비스 프레슬리에 맞먹는 혹은 그 이상의 인기와 센세이션을 전 세계적으로 몰고오는 잭슨에게 어떤 감정을 느낄지. 흑인 뮤지션들이 언론 매체에서 받는 대접은 형편없었는데 그의 어머니 캐서린 잭슨의 자서전에 이러한 일화가 나온다. 79년 'Off the Wall' 음반이 70년대 흑인 뮤지션의 음반 중 가장 많이 팔린 음반으로 상업적인 성공을 했음에도 그는 잡지 표지조차 장식하지 못했는데 '흑인이 메인 모델이 되면 잡지가 팔리지 않는다' 라는 업계의 불문율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를 내내 마음에 두고 있었던 잭슨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Thriller' 로 대성공을 거두고 당당히 타임지의 표지 모델을 장식했다. 그 공로로 1993년에 유색인 지위향상협회(NACCP Image Award)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매직 존슨은 잭슨이 흑인을 위해 많은 길을 열어줬다고 했으며, 틴 루터 킹 2세의 아들 3세는 자신이 해야할 일을 훌륭히 해낸 최고의 엔터테이너라고 추모했다.

팝 레코딩의 교과서,팝 사운드의 새 기준을 제시했다 고 평가를 받는다. 음악/음향 평론가가 쓴 잭슨 리뷰 바로 가기를 보면 알겠지만 잭슨의 음반 사운드는 현대음악의 기준으로 불려도 될 만큼 충실하며 스테레오 효과를 극한까지 올린 팝 레코딩의 교과서라고 평가한다. 유명 음악평론가 임진모씨는 잭슨의 사운드는 너무 뛰어나 옛날 스튜디오 엔지니어 책상에는 항상 잭슨의 음반이 꽂혀있었다고 한다. 또 이렇게 덧붙였다. "잭슨의 음악을 들으면 녹음과 음향 수준에 놀라지 않을 수 밖에 없다. 그야 말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마이클 잭슨은 대단히 민감한 귀를 가진 듯 하다. 앉아서 만족할 수 있는 사운드가 나올 때까지 계속 '다시'를 외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될 만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기가 막히며, 엔지니어들이라며 잭슨의 음악은 반드시들어봐야 한다. 그는 그토록 훌륭하고 경이로운 음악으로 세계를 지배했다" 또한 "비트 감각이 없으면 댄스음악을 소화하기 어렵다. 타고난 비트감각을 소유하고 있었고 소리에 대한 민감성이 사상 최고라고 할 정도로 사운드에 완벽성을 추구한 가수였다" 고 평가했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Bad' 와 'Dangerous' 는 최우수 엔지니어 녹음상을 수상했다. 잭슨이 자신의 자서전 'Moonwalk' 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Bad' 음반을 작업하던 도중 퀸시와의 의견 마찰이 있었는데, 잭슨은 퀸시에게 음악은 항상 변하는 것이라며 최신식 사운드를 주장했다고 한다. 그토록 잭슨의 음반이 사운드 면에서 극찬을 받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법.

한상철 팝 칼럼니스트[14]는 “가장 거대한 임팩트(impact)를 가진 지구상 가장 완벽한 팝 뮤지션”이라고 평가하였으며 팝 DJ 김광한 씨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로큰롤의 제왕이라면 마이클 잭슨은 장르를 초월한 황제이다" 라고 평가하였다. 뉴욕 록 라디오 방송국 WNEW-FM의 피디인 찰리 캔달씨는“그가 굉장한 목소리와 다양한 스타일을 가졌으며, 귀신같이 춤을 잘 춘다는 걸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는 모든 연령대와 모든 종류의 팝 청취자들에게 어필하죠. 이런 가수는 한 시대에 한 명 나올까 하는 가수죠.”라고 평가하였으며 <빌리지 보이스>는“지금까지 스스로 작사, 작곡, 프로듀싱, 어레인지먼트, 의상, 스타일, 안무, 퍼포먼스, 영상, 자신의 이미지 로고 등을 직접 소화해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고독하겠지만 팝은 천재를 만난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음악 전문 유명 매체 VH1에서는 잭슨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100위에서 비틀즈,롤링스톤즈,밥 딜런,레드제플린과 같은 반열로 선정했다. 이들 5명은 순위를 나누지 않았다. 그 외에도 NME에서 독자 대상 조사에서 최고의 뮤지션 1위로 뽑히기도 했다. 한편, 롤링 스톤에서는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에 35위로 뽑혔는데 비틀즈의 존 레논은 38위이고 폴 매카트니는 아예 순위에 없다. 남자 솔로 아티스트로는 최고로 평가받고 있다는 것.

잭슨은 활동하던 동안 뮤직비디오 예술 형태의 변형, 현대 팝 음악의 길을 닦아 놓는 등의 성과로 미디어에서 흔히 팝의 황제(King Of Pop) 로 불리며《데일리 텔레그래프》의 작가 톰 유틀리는 2003년 잭슨을 "극도로 중요한 인물", "천재"라고 묘사했다. 잭슨의 음악과 인도주의적인 공헌은 신세대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쳐 그 누구와도 "비할 데 없는" 수준이라고 평가했다.《Thriller》와 같은 음악과 뮤직비디오, 당시 비교적 새로운 채널이었던 MTV의 대중적 인식을 높였고, 직원의 다양한 인종 조성, 채널의 중심을 록에서 팝 음악과 알앤비로 이동시키며 형태를 마련했다. 잭슨의 작품은 수 많은 힙합, 록, 팝, 알앤비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BET에서는 "간단하게 말해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예인" 또한 "뮤직비디오의 대변혁을 일으켰고 세계에 문워크같은 춤을 가져다줬다. 잭슨의 사운드, 스타일, 움직임, 유산은 장르를 불문하고 모든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줬다"고 말했다. 《올뮤직》의 스티브 휴이는 잭슨을 "바로 알 수 있는 목소리, 깜짝 놀랄만한 댄스, 굉장한 음악적 다재다능, 순전한 스타로서의 무게감 등 차트를 지배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가진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힘이다"라고 묘사했다.

마이클 잭슨은 1980년 더 잭슨스의 멤버로서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올랐고, 1984년에는 솔로 경력으로 올랐다. 잭슨은 경력 동안 월드 뮤직 어워드의 베스트 셀링 팝 남자 아티스트 오브 더 밀레니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의 아티스트 오브 더 센트리 어워드, 밤비상의 팝 아티스트 오브 더 밀레니엄 어워드를 포함해 수 많은 영예와 상을 받았다. 또 가수들에게는 최고의 영예라 할 수 있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두 번 입성했는데, 1997년에는 잭슨 파이브의 멤버로서 2001년에는 솔로 경력으로 올랐다. 이 외에 1999년 보컬 그룹 명예의 전당(잭슨 파이브의 멤버로), 2002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잭슨은 13번의 그래미 어워드 (뿐만 아니라 그래미 레전드상과 그래미 평생 공로상도 수상) 수상, 26번의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세기의 아티스트"와 "1980년대 아티스트" 포함) 수상하였는데 이는 그 어떤 남성 음악가보다도 많은 기록이다. 또한 세계적으로 3억-4억장으로 추정되는 음반 판매량으로 비틀즈와 엘비스 프레슬리 다음으로 역사상 가장 많은 음반을 판 음악가 중 한 명이 되었다.

마이클 잭슨이 13번이나 빌보드 핫 100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은 남성 솔로 아티스트로는 엘비스 프레슬리 다음으로 두번 째로 많은 수치이며, 전체로 파악할 경우에는 1위 비틀즈 2위 머라이어 캐리 3위 엘비스 프레슬리에 이어 4위이다.

천재 흑인 뮤지션이라는 특수성과 상징성, 그리고 평화주의자 성향 때문에 수많은 정치, 종교계 인사들과 친분이 있었다. 일개 팝스타라고 할 수 없을 만큼 그 인맥이 후덜덜하며 전 국가적으로 국빈 대접을 받았는데 故 넬슨 만델라 남아공 전 대통령과 故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브루나이 국왕 등과 친분이 있다. 이외에도 다른 국가로 갈 때는 대통령급 국빈 대접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故 김대중 전 대통령[15]과 친분이 있어서 총재 시절의 김 대통령과도 내한 때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으며 대통령 취임식 때 참석하기도 했다. 때문에 청와대에 견학을 가면 청와대를 방문한 유명 인사들 영상 사이에 잭슨이 올라있다. 그리고 내한 당시 명동성당에 방문하여 故김수환 추기경과도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에서는 생전 잭슨에게 별다른 호의를 보이지 않았음에도 평화주의자였던 잭슨은 한국의 통일평화에 많은 기원을 했고 남북한이 통일되면 꼭 다시 와서 공연을 하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안타깝게도 실현되지 못했다.

3.2. 재능

가수로서 댄서(이자 안무가)로서, 그리고 작곡가로서 모든 면에서 놀라운 재능과 노력을 겸비한 사람이다. 음악과 공연에서 철두철미한 완벽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댄스 가수로서의 모습만 보고 작사/작곡가로서의 재능을 과소평가하는 면이 있는데 그건 정말 큰 오산이다. 2002년에는 가수로서 최고의 영예라 할 수 있는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사람이 잭슨이다. 그의 빌보드 1위 13개의 곡 중 7개는 잭슨이 단독으로 작사/작곡한 것이며 공동까지 포함하면 총 9곡을 잭슨이 작사/작곡 한 것이다. 1986년 히트 싱글인 We are the World 도 잭슨과 라이어넬 리치가 작사/작곡했다. 잭슨의 발표 음반 트랙 중 대다수가 잭슨이 작사/작곡한 것인데 사람들은 그의 댄서로의 면모만 보고 이를 과소 평가한다. 이 때문에 잭슨도 무척 실망스럽다고 자서전 'Moonwalk'에서 밝혔을 정도 (...) 상당히 많은 곡을 만들었으며 지금까지 나온 사후 음반과 앞으로 나올 사후 음반을 생각하면 더 더 엄청난 곡을 작사/작곡했음이 확인될 것이다.

다음은 미국 유명 프로듀서인 Dark child의 인터뷰.

"Q:지금까지 프로듀스해 온 아티스트 중에서 특히 인상 깊은 사람이 있습니까?

A: 마이클 잭슨이죠. 그의 신보를 프로듀스 했습니다.
마이클은 자신의 원하는 음을 확실하게 알고 있고, 또한 그것을 정확하게 전해줍니다.
마이클은 아주 실천적이어서 믹싱을 할 때에도 항상 함께하고, 세밀한 레벨 조정 등의 작업에도 함께 합니다.
항상 스튜디오에 있습니다.
보컬 녹음에도 완벽주의여서 트랙의 사운드 퀄리티에도 상당히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좋은 음이 되는가 하는 방법론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어서, 예를 들면 펀치가
부족한 음이 있는 경우에 어떤 이펙트 처리가 필요한지를 금방 압니다.
EQ의 주파수 포인트까지요. 그런 의미에서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아티스트는 우리에게 맡겨 버리고 한번 노래 부르고 나면 다시는 스튜디오에 오지 않습니다.
믹싱은 소리만 좋으면 아무래도 좋다는 식이지만, 마이클은 몇시에라도 매일 반드시 스튜디오에 와 있었습니다.
한번은 마이클의 곡의 믹싱을 하고 있었는 데, 그 날 10시부터 작업을 시작하게 되서,
마이클은 "믹스를 들을 수 있는 건 몇 시쯤이 될까요?" 라고 물어보길래,
난 "아마 새벽 3시정도일 것 같은데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이클은 놀랍게도 새벽 3시 정각에 스튜디오에 나타나 "자, 들어봅시다" 라고 하더군요.
그는 음악에 대해서 정말 진지합니다.
그래서 그의 앨범은 항상 시대를 앞서가고, 다른 아티스트들의 앨범보다도 더 좋은 소리를 내는 것일 겁니다.
진정으로 자신이 내고 싶은 새로운 사운드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기에 가능한 거죠.

Q:마이클 잭슨이 그렇게까지 음의 세부를 이해하고 있다니 놀랐습니다.

A: 그렇죠. 우리들도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서 진지하게 작업을 하지 않으면
그가 원하는 음에 따라갈 수가 없어요. 어중간한 자세로는 어림도 없죠.
마이클이 원하는 바로 그 음이 아니면 OK되질 않습니다. 그게 그의 방식입니다.
믹스에 관해서도 항상 완벽함이 요구됐습니다.
상당한 큰 공부가 되었죠."'''

ㅡDark child, 《Sound & Recording Magagine 2. 2002 Interview : Shin Murayama》.


비트박스 실력도 뛰어난데 93년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보여준 'Who is it' 을 노래와 비트박스를 동시에 보여주는 실로 놀라운 경지를 보여주었다. 이 비트박스 장면의 영향으로 'Dangerous' 의 트랙 리스트의 일부였던 'Who is it' 이 싱글로 발매되기도 했다. 또한 모 방송에서 자신의 프로듀싱 과정을 설명해주는 과정에서 Tabloid Junkie 비트박스를 선보인 적도 있었는데 관심 있는 분들은 관련 영상을 찾아보자.

댄스에 있어서도 세계 최고의 실력이며 펑크의 제왕 제임스 브라운과 영화배우이자 춤꾼으로 유명한 프레드 어스테어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유년 시절에 열렬한 팬이었으며 그의 스텝을 연구했다고 한다. 이것이 그의 완벽주의적 성향과 결부되면서 어린 시절부터 꽤나 춤의 달인이었다고도 하며 그와 함께 작업했던 다이애나 로스는 그가 춤을 배우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댄서들이 따라갈 수 없다며 불평했다는 회상을 하기도 했다. MTV를 통해 전 세계를 강타했던 'Thriller' 뮤직비디오의 안무도 직접 했다(마이클 피터스와 공동 안무).

또한 그의 트레이드 마크로 유명한 문워크는 그가 직접 개발한 것은 아니다. 이미 문워크의 전신이라 볼 수 있는 동작은 존재했지만 그닥 유행하지 않았고 잭슨은 엄청난 연습 끝에 그것을 대중들에게 완벽하고 진화된 모습으로 선보였다.1983년 모타운 25주년 기념 행사 때 'Billie Jean' 공연에서 처음으로 선보여서 전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이 공연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 500개의 순위 중 202위를 차지했다. 문워크의 뜻은 마치 을 걷는 듯 유연하게 미끄러진다며 붙어진 이름[16]으로 초반에는 그저 미끄러지듯 뒤로 걷는 동작이었지만 87년 'Bad' 음반 때 이후로 몇 가지 변형 동작이 추가되었고 조금 더 복잡해졌다.

Smooth Criminal의 안무로 유명한 Lean 동작(30도 가량 비스듬히 기울어졌다가 다시 올라오는 동작)을 무대에서 보이기 위한 장치를 고안해서 특허를 받기도 했다(다른 스텝들과 공동 특허). 이 Lean 댄스는 특수 신발과 무대 고정장치를 사용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댄서 개인도 몸이 똑바로 기울어졌다가 다시 올라오는 과정에서 지구력과 추진력이 필요하기에 한때 아킬레스건이 남보다 2배는 길다느니(...) 재미있는 루머들이 난무했다. 장우혁이 2006년에 'Mr. 잭슨' 이라는 곡을 내면서 오마주한 적이 있다.

스텝에 있어서는 가히 기예와 같은 실력을 발휘한다. 발끝으로 서는 동작은 마이클 잭슨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모습. 그의 '빌리 진' 퍼포먼스는 83년 초연 이후 다른 스텝과 동작이 추가되었는데 1992년 루마니아 공연 때를 보면 거의 발이 무대에서 날아다닌다. 문워크야 지금은 웬만한 댄서들이야 다 하는 동작이지만 원조는 원조인지라 잭슨 같은 유연함, 스피드, 능수능란한 테크닉을 재연하는 것은 힘들다. 발 동작이 매우 빠르고 가벼운데 'Black or White' 뮤직비디오 뒷 부분을 보면 뛰어난 스텝을 감상할 수 있다. 이렇게 현란한 스텝을 밟으면서도 온 비트가 정확하며 정지된 동작에서도 팽팽한 긴장감을 보여 대중의 호응을 유도해내는 것이 특징인데 어느 평론가는 잭슨은 춤의 본질이 움직임이 아니라 멈춤에 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라고 평했다.

참고로 마이클 잭슨을 대표하는 의상 중 하나인 검은색 바지-하얀 양말-검은색 구두는 마이클 잭슨의 안무를 보고 무대 기획자가 공연을 직접 보러 온 관객들에게 마이클 잭슨의 현란한 스텝을 멀찌감치서 조금이라도 잘보이게 하기 위해서 제안했다고 한다. 비록 꽤나 촌스럽고 격식에 안 맞는 조합이 될 것임에도 마이클 잭슨은 흔쾌히 허락했다. 현재는 섹시함의 대명사


스핀 실력도 수준급인데 그의 팬이 편집한 스핀 짜집기 영상만 봐도 무지 어지럽다(...) 여기에서 포인트는 스핀을 실컷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바로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는 것. 응용도 있는데 뱅글뱅글 돌다가 순식간에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는 동작이다.[18]

잭슨은 사람들이 흔히 3,2,1을 카운트 하며 춤을 시작하는데 이는 실수라고 지적한다. 댄스는 마음에서 우르러 나와야 하며 혼연일체가 되야 한다고 지적했다. 1993년 오프라 윈프리쇼에서 오프라는 잭슨에게 왜 사타구니늘 잡고 춤을 추느냐고 물었는데 그는 의도한 행위는 아니며 춤을 추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라며 자신은 리듬의 노예라고 말하였다.

그의 댄스 실력은 당대에나 지금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이라 봐도 무방하다. 미국 무용수 명예의 전당에도 등재됐으며, 세계 최고의 댄서라 평가받는 프레드 아스테어가 잭슨의 춤에 감격을 하며 전화를 걸어 칭찬까지 하였는데 뭔 더 말이 필요한 가.[19]

3.3. 세계적 인기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이라고 불러도 절대 과언이 아니다.
20세기 미국의 영웅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기사 대한민국에서는 1984년 신문 기사를 보면 "한창 인기가 절정이던 조용필의 이름은 몰라도 마이클 잭슨의 이름을 모르는 젊은이는 없다던가. 국민학교 어린이까지도 그의 노래에 열광한다"고 보도했으며 또한, 국민학교 어린이 2000명을 대상으로 한 세계적으로 존경하는 인물 조사에서 링컨,레이건,에디슨에 이어 4위로 뽑히기도 했다. 전라남도 다도해라는 먼 시골에서도 섬사람들이 청바지 차림을 하고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부른다고 할 정도. 북한의 최고 권력자인 김정은도 유학 시절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즐겨 들었다고 한다.북한은 자신들의 체제 선전용 동영상에다 잭슨과 라이어넬 리치가 작사/작곡한 'We Are the World'의 음을 무단으로 도용하기도 했다. 잭슨 열풍은 옆 국가인 일본도 마찬가지 였다. 일본에서는 잭슨이 '태풍 마이클' 로 불렸다고 한다. 아프리카에 까지도 잭슨의 이름이 알려져 인종차별을 해소하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아프리카의 흑인 빈민촌 소년인 제이콥은 제 2의 마이클 잭슨이 되기 위해 춤을 따라 하고 있다니 아프리카의 빈민촌에도 그의 이름은 유명한 것이다.기사.

잭슨은 공산주의 국가들에게는 엄청난 골칫거리였다. 1988년 서독베를린 Bad Tour를 앞두고 동독의 비밀경찰인 슈타지가 바짝 긴장했었다는 비밀문서가 공개됐다. 당시 독일은 분단국가로 베를린 장벽을 사이에 두고 자유진영인 서독과 공산진영인 동독으로 나뉘었는데 슈타지는 장벽 인근에서 열릴 잭슨의 공연으로 인한 사회 혼란을 우려했다. 잭슨의 공연을 보기 위해 동독 청년들이 장벽 쪽으로 몰려가면 수습하기 힘든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판단이다. 슈타지는 고민 끝에 대형 스크린으로 잭슨의 공연을 중계하여 동독 청년들이 장벽 쪽으로 몰려가는 것을 막는 계획을 세웠으나 정작 공연이 열리는 날 이 계획은 시행되지 않았다. 결국 청년들은 잭슨의 노래를 듣기 위해 장벽으로 몰려 동독의 경찰들은 이를 막기 위해 진입하는 등 유혈사태가 일어났다고 한다. 독일의 통일 현장을 경험했던 탈북자 김영일 씨에 의하면 당시 동독의 한 중학생이 서독에 마이클 잭슨이 공연을 하러 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서독이 동독보다 잘 산다는 글을 썼는데 이게 슈타지에 적발되기도 했다. 잭슨은 공산주의 체제를 위협한 인물이기도 한 것이다. 소련의 경우는 엄청난 인기를 몰고 오는 마이클 잭슨을 악마라며 강력히 비난했다. 한편 러시아에 대항하여 러시아로부터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체첸의 지도자 'Salman Raduyev' 은 체첸 사람들에게 'Michael Jackson' 으로 불렸다. 체첸인들은 그가 마이클 잭슨의 노래인 'Heal the World'의 독립투사 버전이라고 믿었다.멕시코에서는 마이클 잭슨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하여 멕시코시티 광장으로 1만 4천명이 집결하여 잭슨의 노래에 맞춰 춤을 선보였는데 이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플래쉬몹으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됐다.

3.4. 뮤직비디오

당시 MTV에서조차 백인 뮤지션의 음악만 틀어주다가 흑인 뮤지션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잭슨의 뮤직비디오를 방송해주었다. 이로 인해 음악계에 만연하던 흑백 장벽을 허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마이클 잭슨의 댄스와 뮤직비디오는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를 받고 있으며 20세기 후반 대중음악이 비주얼을 추구하는 양상으로 변하게 된다.

마이클 잭슨 특유의 뮤직비디오는 'Thriller' 때 처음 시작했다. 걸작 호러영화 '런던의 미국 늑대인간' 을 보고 흥미를 느낀 잭슨은 감독 존 랜디스를 불러와서 자기 뮤직 비디오에서도 당신이 만든 영화에서 등장하는 것과 같은 변신 장면을 넣고 싶다고 부탁을 했다. 거기서 랜디스가 자신의 미적 욕심을 좀 부려서 '아예 뮤직비디오를 할리우드 황금기 시절에 영화 중간 중간에 넣던 단편 영화들처럼 좀 더 길게, 내용을 넣어서 찍자' 는 제안을 했다. 그 결과 1982년에 만들어진 'Thriller' 뮤직비디오는 그의 역작 중 하나로 꼽힌다. 1999년 MTV에서 주관한 20세기 100대 뮤직비디오 중에서 1위로 뽑히기도 했다.

여기에 제대로 재미를 본 잭슨은 이후에도 수많은 뛰어난 뮤직비디오를 내놓으며 80년대에 초반에는 작은 방송국에 불과했던 MTV의 위상을 크게 끌어올리는 데에도 일조했다. 또한 당시 신기술이었던 몰핑 기법을 뮤직비디오에 적용했는데 'Black or White', 'Remember the time', 'Scream[20]' 참조 등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외에도 특수 분장, 다양한 시각적 효과를 뮤직비디오에 실험적으로 적용했고 대다수가 뮤직비디오 어워드에서 상을 수상했다. 뮤직비디오의 퀄리티나 길이 등을 봐도 단편 영화나 다름없기 때문에 잭슨은 자신의 뮤직비디오를 'Short film' 이라고 부른다. 그의 뮤직비디오에는 종종 유명인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88년 'Bad' 음반에 수록된 'Liberian Girl' 에서는 그의 유명인 친구들이 총 출동한다.

97년 제작된 'Ghosts' 는 세계에서 가장 긴 뮤직비디오라고 알려져 있다. 여기서 잭슨이 1인 2역의 역할을 한다. 또한 39살의 나이에도 매우 민첩한 댄스 실력을 선보인다. 아쉽게도 음반 발매 당시 소니와의 관계는 바닥을 기고 있었기에 제대로 된 홍보는 되지 않았고, Ghosts 곡 자체도 VCD와 VCD를 포함한 호화 패키지가 한정으로 발매되고는 그 이상의 홍보는 없었다. 굉장히 레어한 아이템. 후에 출시된 뮤직비디오 컬렉션인 VISION 에서도 5분 남짓의 Short Version 만 실렸다.

본인이 뮤직비디오 제작 과정에 직접 참여하고 의견을 내놓는데 거의 자신이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한다. 자신의 대부분의 작품을 마음에 들어하는 편이지만 여러 가지 어른의 사정으로 삭제된 'Bad'[21], 'The way you make me feel' 의 초반 장면과 본인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재촬영했다는 'who is it', 솔로 1집 때 혼자 나와서 조용히 노래 부르는 장면만 나오는 'She's out of my life', 본인이 제작에 참여하지 않고 Sony가 전면 제작한 'Cry' 등의 뮤직비디오는 싫어한다고 한다.

3.5. 프로듀서와의 관계

유명한 가수이자 프로듀서인 퀸시 존스와 함께 일했으나 'Dangerous' 음반 제작부터 존스로부터 독립하여 당시 대표적인 뉴잭스윙 아티스트였던 테디 라일리[22]를 비롯하여 많은 젊은 프로듀서를 고용, 뛰어난 퀄리티의 음반들을 제작해나갔다. 이러한 퀸시 존스와의 결별은 루머를 양산하기도 했지만 'Bad' 음반 제작 당시 잭슨과 음악적인 방향에 대해서 의견이 많이 달라서 결별하였다고 한 뒤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우리는 지난 10년 동안 함께 작업을 해왔다. 이제 마이클, 그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나갈 때다. 마이클 잭슨도 내 말에 동감했다.

퀸시 존스와 결별하고 테디 라일리와 발매한 'Dangerous' 음반은 프로듀서들 사이에서 가장 구성이 좋은 음반으로 추대받고 있으며 1990년대 초의 음반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프로듀싱의 절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 뉴잭스윙 등 실로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했던 음반이었다. 특히 수록곡 'Give in to me' 는 건즈 앤 로지스의 기타리스트 슬래시와 함께 작업하였고 거의 완벽한 록 스타일의 곡이다. 뮤직비디오에서도 록스타로 출연한다. 국내에서도 마니아들에게 인기가 매우 좋은 음반이다. 당시 1991년 11월에 발매됐음에도 불구하고 그 해 가장 많이 팔린 음반으로 선정되는 기록을 세웠다.

그 이후로 잭슨과 라일리는 2001년 'Invincible' 음반까지 계속 작업하는 등 굳건한 신뢰 관계를 보였다. 다만 2001년의 메인 프로듀서는 로드니 저킨스였는데 이 사람은 라일리 밑에서 스튜디오 작업을 하던 라일리의 제자뻘 되는 신예 프로듀서였다. 이래도 저래도 라일리의 음악적 성향은 'Invincible' 에서도 지속됐다.

3.6. 음악적 성향

음악 장르는 가장 대중적인 이지만 힙합이나 R&B, 아티스트들과도 친분을 쌓으며[23] 그 분야의 음악을 활용하는 등의 센스도 보인다. 특히 모타운으로 대표되는 흑인 팝 뮤직, 7, 80년대의 메탈 음악[24] 등등 정말 다양한 음악을 시도했고 또 그 분야의 아티스트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때문에 팝 싱어로만 규정짓기에는 애매하므로 보통은 크로스 오버 뮤지션이라고 일컬어진다. 폴 매카트니와 함께 만든 곡들도 있다. 또한 자주 돌아다니는 떡밥 중 하나로 프레디 머큐리와의 듀엣곡이 있는데 실제로 작업을 함께 했었으나 머큐리가 사망하면서 끝내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인터넷에서 데모 음원으로 많이 돌아다니고 있으며 그 중의 한 곡은 믹 재거와 함께 했던 'State Of Shock' 라는 곡이다.

자기 음반에 다른 뮤지션들과의 듀엣 곡을 적어도 한 곡 이상 반드시 넣는다. 패티 오스틴, 폴 매카트니, 여동생 자넷 잭슨, 시다 가렛, 스티비 원더, 모나코의 스테퍼니 공주[25], 크리스 터커[26]와 같은 사람들이 대다수 참여했다. 대중들의 시선을 주목받기 위해서는 메인 타이틀곡을 듀엣곡으로 장식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판단했다고 전해진다.

뮤지션 윤상은 잭슨의 음반들을 언급하며 '사실상 대중음악에서 존재하는 모든 장르를 완벽하게 사용하여 통일성 있는 음반범을 만들었다' 라며 음악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꼭 세심하게 들어볼 것을 추천했다. 특히 존스와 합작한 솔로 초기 음반 3장은 모두 달콤한 알앤비, 퓨전 재즈에서부터 메탈 기타까지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지며 미치도록 프로그레시브하면서도 빌보드를 혼자 잡수는 대중성을 확보했다. 한국에서는 댄스 가수로만 알려져 있지만 (그리고 실제로 그 분야에서 가장 위대한 재능을 보인 건 사실이지만) 그저 팝 댄스 뮤지션으로 취급하기 힘든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 적어도 'Thriller' 음반이라도 전체를 들어보자.

4. 사생활과 뒷이야기

4.1.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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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마이클 잭슨이 직접 그린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 이 그림을 봐도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슬픈 추억을 엿볼 수 있다. 'HIStory' 음반에 실림.

'너무 일찍 데뷔해서 내 유년 시절은 없다고 생각한다' 며 어린 나이에 데뷔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한 것을 보면 그로 말미암아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른 유년기를 보내야 했던 것이 상당한 트라우마가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잭슨 가는 형제가 9명이나 되었던 가난한 가정이었으므로 그의 아버지는 음악적 재능이 있었던 자식들을 밴드로 구성하여 공연을 다니게 했는데 아이들을 스트립 댄서들이 공연하는 성인 클럽에서 노래하게 하는 등 지금으로 봐서는 아동학대 수준으로 자식들을 굴렸다. 이러한 생활로 인해서 마이클 잭슨은 어린 시절에 공연을 다니면서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며 그들의 평범한 일상을 동경했다고 한다.[27]

정규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는데 초등학교는 몇 년 다녔으나 잦은 공연 활동과 팬들의 교실 난입(...) 등으로 학교 생활이 불가능했고 개인 교사에게 따로 지도를 받아서 정규 교육 코스를 마쳤다.

그가 아동 성범죄자로 의심받은 이유 중 하나는 이 트라우마로 인해 아이들을 자신의 집에 초청하여 아이들과 노는 것을 좋아했고 아이들을 자기 침대에서 재우는 것을 개의치 않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자기 집에 놀러온 애들에게 자기 침대를 양보하고 자신은 바닥에서 잠을 잤다고 하는데 거기에 그 어떤 성적인 의미나 행동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면모가 2003년 방영된 《마이클 잭슨과의 삶(Living With Michael Jackson)》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아동에 대한 이상한 취향을 가진 사람처럼 묘사가 되어 곤혹을 치렀다. 천하의 개쌍놈들[28] 하지만 자신의 트라우마를 아동에 대한 각별한 애정으로 승화했으며 'Heal the world' 재단을 설립하는 등 아동보호에 앞장서기도 했다. 'Childhood' 와 'Heal the World' 등의 노래와 그가 그린 그림들에서도 그런 트라우마가 엿보이기도 한다.

평범한 어린 시절에 대한 동경 때문인지 스스로 '제 인생은 내 안에서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찾아가는 과정이에요' 라고 얘기했을 정도로 생전에 장난감을 사모으거나 집을 놀이동산처럼 꾸며놓고 즐기는 등 키덜트적인 면모도 보였다.[29] 잭슨이 2005년에 아동 성추행 혐의로 소송을 벌이고 있을 때[30] 절친인 코미디 배우 크리스 터커가 코미디쇼에 나와 80% 이상을 잭슨 이야기만 한 적이 있었는데[31]러시 아워 2》에 나와서 잭슨 춤을 흉내내고 잭슨 집에 불려가서 하루종일 산더미 같이 쌓아둔 피터 팬 동화책만 읽었다고 하며 그런 마이클 잭슨이 아이들을 나쁜 짓을 했을 리 없을거라면서 그를 옹호했다.

실제로 잭슨 형제들이 음악 연습을 할 때 잭슨 형제들의 아버지 조 잭슨은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한다는 이유로 벨트채찍처럼 휘두르고 구두 신은 발로 차는 등 온갖 학대를 하였다. 또한 아이들이 밤에 창문을 열고 나가지 못하게 밤중에 무서운 가면을 쓰고 어린 마이클 잭슨의 방에 들어왔는데 그 공포에 대한 기억이 큰 충격이 되어 10대 시절 마이클 잭슨이 악몽에 시달리는 원인이 되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 조 잭슨은 자신의 기타를 건드렸다는 이유만으로도 애들을 두들겨 패는 등 집안에서 공포의 대상이었고 심지어 어린 시절 마이클 잭슨은 아버지의 얼굴만 봐도 부들부들 떨면서 기절하거나 구토 증세를 보이는 등 아버지를 심하게 무서워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생전 아버지와는 사이가 나빴으며 유언장에서도 아버지 언급을 전혀 안했고 유산 분배에서도 어머니 캐서린과 자신의 세 자녀들에게만 유산을 상속, 아버지는 제외시켰다. 자녀들의 양육권 문제에서도 어머니만 언급되었고 심지어 자신이 사망한 후 자신의 자녀들을 아버지가 자신처럼 스타로 만들려고 할지도 모른다며 싫어했다는 루머까지 있다.

마이클 잭슨 본인은 인터뷰에서 이야기하기 꺼렸지만 그가 를 성인이 되어서 성형하게 된 것은 어린시절 아버지로부터 코가 못생겼다는 말을 하도 들어서 코에 대한 콤플렉스가 매우 심했기 때문이다.

많은 팬들이 그의 아버지의 행동을 비난하고 있지만 사실 잭슨 남매들의 가수로서의 트레이닝은 다 이 사람 손에서 이뤄진 것이기에 그 공헌도는 무시 못한다. 마이클 잭슨도 인정했듯이 아버지 조 잭슨은 그 자신에게 미스터리한 존재였을 뿐 부동산 투자니 뭐니 어린이 스타들이 돈 때문에 겪는 일들을 하나도 겪지도 않고 음악만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버지 덕분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조 잭슨은 자식들이 번 돈을 착복하지도 않았고 그대로 자식들에게 투자했다. 그러나 그 아버지로 인해 잭슨 남매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고 마이클 잭슨은 성장하고 나서도 애정 결핍에 자기애가 부족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9남매 전부 성인이 된 후 전부 폭력적이고 고압적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독립했다. 마이클 잭슨은 후에 여러 인터뷰에서 아버지와의 관계는 다소 좋아졌고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래도 여전히 껄끄러웠는지 끝내 앙금을 풀지 못한 채로 눈을 감았다.

지금도 몇몇 찌질이들이 '마이클 잭슨은 어린 시절 이야기로 동정 마케팅이나 한다' 며 비난을 하지만 사실 잭슨 본인이 직접 나서서 어린 시절 얘기를 공식적으로 방송에서 한 건 두 번밖에 없다. 나머지는 자서전에서 몇 번 언급한 것이나 'Childhood' 같은 자전적인 곡에서 드러낸 것이다. 대부분 언론과 팬들이 그 부분에 과도한 관심을 표했던 것인데 정작 본인은 남들이 어린 시절에 대한 어두운 얘기를 물어오면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그다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여담으로 2010년 조 잭슨은 마이클 잭슨 사망 관련 인터뷰에서 자신의 기업을 자랑스럽게 홍보했다고 하는데 결국 아내가 아들의 죽음을 홍보로 이용하는(...) 남편의 행동에 이혼을 요구하였고 결국 부부의 60년 부부 생활은 종지부를 찍었다.[32]

4.2. 가족 관계

총 3명의 자식을 낳았다. 마이클 조셉 잭슨 주니어, 패리스 마이클 캐서린 잭슨, 프린스 마이클 잭슨 2세. 이 중 마이클 조셉 잭슨 주니어는 아버지 처럼 백반증에 걸린 사실이 확인되어 친부 논란을 종결하게 된다.

형제들과 문제가 많았는데 친형 저메인 잭슨이 1991년 발표한 음반 'You Said'에 수록된 곡 'Word To Badd'는 마이클 잭슨의 변화하는 외모를 비난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큰 충격과 논쟁을 불러 왔다. 친누나 라토야 잭슨은 플레이보이 잡지에 나오기 위하여 잭슨의 스릴러 분장을 한 뒤 누드 사진을 찍었는데 이는 큰 파장을 몰고왔으며 잭슨이 1993년 아동 성추행 혐의로 힘들어 할 때 거짓 증언을 함으로 잭슨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라토야는 50만 달러를 제시하면 성추행 사건의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겠다는 발언도 하였다. 당시 이 거짓 증언으로 잭슨은 엄청난 분노를 토로했다고 'The Life of an Icon' 에서 그의 측근이 말하였다. 후 라토야 잭슨은 자신의 남편이었던 '잭 고든'의 협박으로 인해 자신은 노예같은 삶을 살았으며 어쩔 수 없이 누드 사진을 찍었고 돈을 얻기 위해 거짓 증언을 했다며 뉘우쳤다. 잭슨의 팬들에게 잭슨의 형제는 이러한 일들 때문에 크게 비난당하고 있다.

마이클과 형제들끼리의 문제는 마이클이 죽고나서도 이어지고 있다. 바로 마이클 잭슨의 엄청난 유산과 마이클 잭슨의 이름으로 발생하는 향후 수입 때문이다. 2002년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유서 내용은 잭슨의 형제자매들에게 있어서 큰 충격과 같았다. 유서에는 자신들에게 지급하는 돈이 없기 때문. 형제들은 잭슨의 유산을 담당하는 변호사를 비난하며 유서가 조작됐으니 유산집행 변호사가 퇴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이런 분쟁은 미국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됐고 잭슨의 명예가 가족들로 인해 더렵혀지고 있는 것이다.

4.3. 백반증과 외모


1980년대 중반 사진. 이미 백반증이 상당히 진행되고 있던 때였다.

잭슨의 안면백화에 대해서는 말이 많은데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 차례의 박피 수술을 통해 피부가 점점 하얗게 되었다거나 성형수술의 후유증이라고 알고 있지만[33] 사실 피부에서 멜라닌이 점점 사라지는 백반증이란 병에 걸렸을 뿐이다. 사진 참고. 원래 마이클 잭슨에게는 백반증 유전자가 있었고[34] 자극을 받으면 증상이 심해지는 백반증의 특성상 80년대 중반 펩시 CF 촬영 중 입은 화상 이후에 특히 심해졌다. 그런데 그 백반증이란 피부 표면 전체의 멜라닌이 서서히 옅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탈색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피부가 표범처럼 얼룩덜룩해진다. 또한 80년대 중반까지는 결핵성 피부 질환인 루푸스를 앓고 있었다. 특히 두피에 2도 화상을 입은 후에 산소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피부색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는데 흰 피부 부위가 넓었던 잭슨은 짙은 화이트 메이크업으로 변색 부위를 가리고 다녔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일반적인 메이크업으로 커버가 가능했는데 변색 부위가 넓어져 가면서 보통 파운데이션으로도 커버가 거의 불가능한 지경까지 갔다고 한다. 가장 밝은 샤넬 파운데이션으로도 커버가 안 되어서 마이클 잭슨의 메이크업 담당자 카렌 페이가 다른 연예인의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까지 파운데이션을 빌리러 갔었다는 후문이 있다. 그래서 실제로 그를 본 사람들은 화면에서 본 것 이상으로 백납 같이 하얗다고 전한다.

백반증에 걸리면 피부가 상당히 약해지기 때문에 항상 햇빛을 가리고 다녀야 한다. 그 때문에 피부가 옅어진 이후 마이클 잭슨의 필수품(?)은 양산과 모자(중절모), 장갑[35], 선글라스였다.[36] 덧붙이자면 백반증은 유전될 확률이 상당히 높다. 백반증 유전자는 아버지 쪽에서 온 듯하며 실제로 잭슨의 형인 티토 잭슨이나 말런 잭슨도 백반증 증상이 있다고 한다. 말런의 경우는 등에 백반증이 심하다고. 잭슨의 백반증 병력은 93년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처음 밝혀졌는데, 이로 인해서 그 당시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백반증이라는 병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알려진 후에도 찌라시 언론의 낚시질로 잭슨의 피부 표백설은 대중들에게 떠돌게 되었는데 사후 LA 검시청에 의해 실제로 백반증(vitiligo)를 앓고 있었다고 밝혀지며 피부 표백설은 완전히 해명됐다. 또한 잭슨의 성형 전 본래 외모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흑인과는 달리 아프리카계(그의 고조부가 흑인 노예 출신이다)+아메리칸 원주민계(아버지 혈통)+히스패닉(마이클 잭슨의 어머니) 계통이 섞인 외모이고 형제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피부가 구릿빛이 아닌 사람들도 있다. 누나인 라토야 잭슨만 봐도 백인이 살짝 태닝한 듯한 피부색이다. 티토 잭슨의 아들들인 3T 역시 마찬가지. 참고로 백반증은 흑인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인종에게도 올 수 있다. 피부가 검은 흑인에게 유독 두드러질 뿐이다. 흑인이 얼굴 부위에 백반증을 앓게 될 경우에는 큰 정신적인 고통을 경험하며 대부분은 검게 변한 부위를 짙은 파운데이션으로 가리거나 흰 부위에 맞게 다른 피부를 밝은 파운데이션으로 가리기도 한다. 한때 잭슨 사후에도 피부색 변화에 대해 말이 많자 한 방송에 백반증을 앓고 있는 저널리스트 리 토마스가 출연하여 자신의 민낯을 공개하고 백반증 환자들의 고충을 고백하면서 마이클 잭슨을 옹호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마이클 잭슨의 장남인 프린스 역시 백반증 증세가 유전된 듯하다.[37]

또한 마른 몸매의 소유자였다. 키가 178cm인데 몸무게가 고작 50kg밖에 안 나갔다. 본래는 채식주의자[38]이자 소식(少食)주의자였다. 어머니인 캐서린 잭슨의 자서전에 의하면 사람이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다면 난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음식을 잘 먹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는 다이애나 로스가 억지로 음식을 먹이려고 노력도 했다고 한다. Dangerous 투어 당시에는 체력 증진을 위해 적절한 닭고기 섭취와 헬스를 병행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오미 캠벨과 함께 한 'In the Closet' 뮤직비디오에서는 하악하악한(...) 팔 근육을 만들기도 했다.[39]

성형은 79년 영화 《위즈》 촬영 당시 무대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처음으로 수술을 했다고 전해지지만 # 최근 그의 모친 캐서린 잭슨의 인터뷰에 의하면 첫번째 코 수술은 자의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잭슨은 자서전에서 두 번의 코 성형과 턱에 홈을 파는 성형 사실을 인정했다[40][41]. 마이클 잭슨의 외모 변화는 86년부터 이뤄졌는데 거의 유러피안처럼 변한 얼굴로 87년에 'BAD' 로 컴백했을 때 그야말로 충공깽이었는지 당시 전세계적으로 격렬한 논쟁거리였다고 한다. 정보 교류가 빈번한 지금도 마이클 잭슨의 성형은 논쟁이 되곤 하는데 인터넷도 활성화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그때 서서히 나타난 백반증 증상 때문에 피부까지 옅어져 백인이 되고 싶어서 피부 표백과 성형을 했다는 등의 카더라 통신이 엄청나게 돌았다. 하지만 피부에 대해서는 이미 한 물 간 떡밥이고 성형의 경우는 본인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세 군데이다. 사후에 부검 결과 눈썹과 이마라인, 입술에 문신이 되어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는데 생전에도 얼굴 몇 군데에 문신을 해서 이미지에 변화를 준 것으로 보인다. 눈썹하고 이마라인 문신이야 흔한 미용 문신이고 입술은 아마도 백반증 때문에 한 것으로 추정된다. 백반증이 입술에 번지면 입술이 하얗게 된다. 사람들이 놀랐다고 말할 때 하얀 게 아니라 물감 칠한 것처럼 하얗다. 비주얼 변화에는 체중 감량이 큰 요인이었는데 91년 'Dangerous' 활동 시기의 체중은 48kg(...)이었다고 한다.

또한, 머리가 전형적인 흑인의 곱슬머리에서 직모로 변하는데, 이는 펩시 광고 화상 사건 이후에 두피가 손상 되어 가발로 대체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 있다.

40대에 들어 그의 성형 부작용에 대해서 말이 엄청나게 많았었는데 사실 장기간에 걸친 SONY와의 불화, 2년 동안 이어진 성추행 소송으로 스트레스가 심했기 때문에 거식증 증세로 인한 체중 급감으로 성형한 얼굴이 더 안 좋게 부각된 측면이 강하다. 다만 어린 시절에 아버지로부터 들은 코에 대한 비하, 여드름만 나도 밖에 나가질 않았다는 인터뷰 내용으로 고려해봤을 때 유년 시절 육체적, 정신적 학대를 경험하며 생성된 자기애가 부족한 심리가 외모 콤플렉스로 발전했을거라는 것이 중론이다. 다만 생전에 성형한 외모와 관련해서 워낙 과도하게 비난받은 바가 있고 본인도 성형이나 피부색에 대해 집요하게 물어보는 언론에 상처를 많이 받았는지 외모 관련 이야기만 나오면 완강하게 대답을 거부하기도 했다. 이미 잭슨이 고인이 된 지금에 와서는 외모 비하를 했다간 고인드립이라는 이유로 가루가 되도록 까일 수 있으니 주의하자.

아이러니한 것은 생전에 그렇게 역변한 마이클 잭슨의 외모를 좋아하는 사람도 꽤 많았다. 팬이 아닌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변화이기는 하나 백인인지 흑인인지 구별할 수 없는 모호한 인종적 특성과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중성적인 외모와 하이톤의 육성, 마른 몸매와 멋진 퍼포먼스 실력 때문에 생전에 게이 팬(...)[42]도 많았고 보호 본능이 느껴지는 가녀린 외모를 좋아하는 여성들도 많았다. 이렇듯 마이클 잭슨의 일평생 가장 많은 논란이 되었던 외모가 팬들을 끌어모은 요소 중 하나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4.4. 부와 재정 상황

잭슨은 자신의 인생 동안 7억 5천만 달러를 벌어들인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4억 달러를 더 벌여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잭슨의 순자산에 대한 추정은 긍정적인 3억 5천만 달러에서 부채로 인한 마이너스 2억 8500만 달러까지 그 범위가 다양하다..

총 3번의 추정 보도가 있는데 첫번 째는 2002년 Forensic accountant in 2005 recalling Jackson's 2002 balance sheet under oath 의 추정. 잭슨이 자산 1억 3000만 달러, 빚은 4억 1500만 달러로 -2억 8500만 달러의 순 자산을 가지고 있다고 추정했다. 2003년 브스는 자산 5억 5000만 달러 빚은 2억 달러로 순 자산을 3억 5000만 달러로 추정했으며 2007년에는 CBS가 자산 5억 6760만 달러 빚은 3억 3100만 달러로 순 자산을 2억 3600만 달러로 추정했다.

미국 국세청은 2014년 2월 잭슨의 재산을 한국 돈으로 기준시 무려 1조 2500억원 이상으로 추정하여 잭슨의 유가족들에게 7200억의 세금을 낼 것을 명령했다. 엄청난 세금폭탄...

잭슨이 사망 당시 3억 달러의 빚을 냈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진실은 충분히 다 갚고도 남는다는 것.

4.5. 타 연예인/가수와의 관계

프린스라이벌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가 80년대 당시 나온 것은 맞지만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다르고 후대에 와서 가공됐을 뿐이다. 이야기는 198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잭슨은 음악 뿐이 아니라 영화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정작 잭슨이 찍은 영화는 성적이 좋지 못 했다... 그러나, 프린스는 영화 배우로서 나름 좋은 활약을 거뒀고 잭슨은 프린스가 나오는 영화를 보고 배드 음반의 타이틀 'Bad'를 그와 같이 듀엣으로 부르고 배드의 상업적 성공을 위한 마케팅으로 프린스를 이용해 보겠다는 계획을 한다. 잭슨 측이 의도하여 먼저 그의 매니저인 프랭크 딜레오가 언론에게 잭슨과 프린스가 라이벌이라는 거짓 이야기를 흘렸고, 마이클의 대변인들은 프린스에게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프린스의 친구들은 여기에 속아 마이클을 비난하는 (...) 잭슨이 의도한 라이벌 관계가 형성된 거다. 잭슨과 프린스는 듀엣에 대해 논의하였지만 프린스는 열성적으로 반응하지 않았고 결국 무산된다. 이 둘의 관계는 사실 여기서 끝난다고 무방하다. 라이벌이라고 부르기에는 인증량을 기준으로 80년대 2개의 음반으로 7천만장 이상을 올린 잭슨에 비해 프린스는 9개의 음반으로 3900만장 밖에 올리지 못 했다. 그외의 인기나 시상식에서 수상도 모두 잭슨이 압도하여 서로 이기기 위해 싸운다는 의미에서 라이벌은 틀린 것이다. 프린스와 마이클 잭슨이 라이벌이라고 나온 말은 1987년인데 87년이면 1년 뒤 조지 마이클이 대히트를 쳐서 차라리 잭슨의 당시 라이벌이라고 부를 거면 조지 마이클이라고 하는 게 적절하지. 프린스는 잭슨과 뚜렷한 인연도 없고 스타일도 다른데 라이벌이라는 말이 계속 전해지는 건 왜곡된 정보가 계속해서 재생산 되는 것이다.

생전 유명했던 절친으로는 엘리자베스 테일러맥컬리 컬킨, 스티비 원더, 다이애나 로스 등이 있다. 엘리자베스를 위한 노래 'Liberian girl' 를 만들기도 했고 네버랜드에서 결혼식을 열게 해주기도 했다. 맥컬리 컬킨은 'Black or White'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고 네버랜드에서 함께 지내기도 했다. 다이빙대 위에서 춤추다가 밀어서 물에 빠뜨린 적도 있다 게다가 성추문 사건으로 힘들어할 때도 언제나 지지해주던 친구였다. 사실 둘 다 어떤 면에서는 동병상련을 겪었던 인물들이다. 어린 시절에 이미 유명세를 탔던 것도 그렇고. 잭슨이 죽은 이후 잭슨의 딸인 패리스 잭슨의 대부가 되었다.

다이애나 로스는 마이클의 첫사랑이었다고 한다. 모타운 시절부터 알고 지냈고 어렸던 마이클 잭슨에게 그림을 가르쳐 주는 등 멘토로도 지냈다. 다이애나 로스 결혼 후엔 대놓고 시상식에서 굳은 표정을 짓기도 했다. 눈치보는 듯한 리즈 여사 유언장에서도 자신의 어머니 다음 후견인을 그녀로 지목했을 정도라고. 은근히 연상녀와 접점이 많다

비틀즈의 전 멤버 폴 매카트니와는 'say say say' 로 듀엣을 하여 빌보드 6주 1위, 'Thriller' 음반의 'The Girl is mine' 으로 빌보드 2위에 올려놓으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잭슨이 비틀즈 판권의 50%를 사들이면서 사이가 서먹해졌다. 당시 매카트니는 저작권의 개념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판권을 사들이는 것이 훗날 굉장한 수입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친했던 잭슨에게 저작권 판권을 통해 앞으로 얻을 이득을 설명해 줬다. 잭슨은 이에 대해 상당한 호기심을 갖게 됐고 70년대 다른 가수들의 히트곡들의 판권을 몇 개 사게 됐다. 이후 비틀즈의 판권이 있는 ATV가 판매되자 폴 매카트니를 포함한 부동산 부자들 그리고 잭슨 또한 경쟁에 참여했는데 당시 폴 매카트니는 오노 요코에게 천만 달러를 각자 내서 2000만 달러에 사자고 제안했으나 요코는 굳이 살 이유가 없다며 거절하였다. 잭슨은 경쟁 끝에 4750만 달러에 판권을 사들였는데 이에 대해 요코는 잭슨같이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 비틀즈 판권을 산 것은 다행이라고 인터뷰하기도 하였다. 매카트니는 이에 대해 분개해 하며 자신의 곡들이 싸구려 CF CM송으로 쓰이는 건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매카트니도 따지고 보면 다른 가수들의 판권을 샀고 CF CM송으로 쓴 적이 있다... 90년대 초반 저작권 문제로 붉혀져 고소까지 갈 뻔 했는데 당시 잭슨은 자신의 변호사에게 "고소를 할 거면 하라고 하세요. 폴은 이미 5억 달러 이상의 자산이 있었으면서 자신의 노래에 4750만 달러의 노래를 투자하지도 못 했어요. 전 정정당당하게 낙찰 경쟁에서 이겼습니다 " 이 문제와는 별도로 매카트니는 잭슨 사망 당시 '그와 어울리며 함께 작업했던 것은 영광이었다[43]' 라며 조의를 표했다.

머라이어 캐리는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 의 일원일 정도로 그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지만 비즈니스로는 좀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잭슨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아티스트였음에도 전통적으로 미국 언론에서 받는 대접은 박했는데 그럼에도 싱글 판매량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80년대의 싱글 차트 성적이 좋았다. 그런데 90년대에 들어 빌보드 싱글 차트 집계 성적 산출 방식이 판매량보다 라디오 방송 횟수에 중점을 두는 방식으로 변했는데 91년 'Dangerous' 프로모션 당시 Sony EMG 사장이었던 토미 모톨라가 신인이었던 캐리와 결혼을 하고 그녀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하면서(특히 많은 의혹을 받는 페이 올라) 마이클 잭슨의 싱글 판매량이 압도적으로 높았음에도 1위를 찍었던 'Black or White' 를 제외하고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1위를 올리지 못 하였다. 잭슨 사후에도 종종 잭슨의 팬들과 캐리의 팬들이 으르렁대는 이유가 이것. 다만 잭슨은 그것만 제외하면 캐리에게 악감정을 가질 이유가 없었고 그것이 그녀의 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실제로 머라이어가 모톨라와 안 좋게 이혼하고 잭슨 앞에서 엉엉 울었을 때 그가 토닥이며 위로해줬다는 일화도 있다. 대인배...

마돈나가 유일하게 정복하지 못한 남자. 동갑내기인데다 둘의 별명도 엮기 좋은 KING, Queen이고 Prince는? 90년대 초에 둘이 엮이는 일이 많았고 1991년 아카데미 시상식장에 둘이 나란히 연인 느낌을 내며 입장한 적이 있었다. # 다만 아카데미 시상식에 함께 입장한 이후 열린 오스카 파티에서 함께 식사를 하다 벌어진 성격 차이 때문에 그렇게까지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고 한다. 유혹을 하거나 키스를 하려 다가가면 어린애처럼 킥킥대며 웃는 통에 아무 일도 없이 끝났다고. 마돈나도 자신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정복하지 못한 남자가 마이클 잭슨이라고 자서전에 썼다. 마이클 사후 열린 MTV 비디오 뮤직 어워즈에서 과거 일을 언급하며 '지금 어디에선가 미소 짓고 있길 바란다' 며 그를 추모했다. 한편 90년대에 아이큐 점프에서 연재되던 만화 달숙이에서는 마돈나와 마치 부부인 것처럼 등장한 바 있다(...)

에미넴과의 악연(?)도 있는데 에미넴이 잭슨을 디스하는 'Just lose it' 이라는 곡을 내놓자 인터뷰에서 불쾌하다는 심정을 내비치고는 해당 곡의 판권을 모조리 사들이는 바람에신의 한 수 에미넴이 이 곡을 부를 때마다 잭슨에게 돈을 지불해야 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었다. 결국 에미넴은 스티비 원더에게도 비판을 들었을 뿐더러 그의 팬들에게도 세계구급으로 까이는 바람에 천하의 에미넴이 사과를 하는 일이 발생했다.

스티비 원더는 만일 자신의 눈이 보여져 볼 수 있게 된다면 두 가지를 보고싶다고 했는데 첫째가 자신의 딸의 얼굴이며 두번째가 마이클 잭슨의 춤이었다고 했다.

4.6. 성격

무대에서 보여주는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과는 달리 실제로는 섬세하고 매우 소심한 내성적인 사람이다. 레이건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초청된 마이클 잭슨의 실제 모습을 보고 너무 수줍어하는 사람이라 깜짝 놀랐다고 할 정도. 다큐멘터리에서도 문워크를 보여달라고 하면 부끄럽다고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퀸시 존스는 잭슨을 처음 봤을 때 자신감이 없어하는 잭슨의 모습을 보고 걱정을 했었다고 하며 심지어 노래를 부를 때는 불을 다 끄고 뒤로 돌아 부를 정도로 수줍음을 많이 탔다고 한다. 하지만 지인들과는 장난치는 것도 좋아했으며 동생 자넷 잭슨이 말하길 자주 웃을 정도로 웃음이 많았다고 한다.

남말 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아서 다른 지인이 자기 앞에서 전 부인이었던 리사 마리 프레슬리를 욕하면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고 전해진다. 매체에서 공공연하게 다른 연예인을 씹어서 어그로를 끌기도 하는 그쪽 연예계에서도 꽤 신사적인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엄청나게 까칠한 성격으로 유명한 톱 모델 나오미 캠벨마저 인정한 사람. 그래서 에미넴이 자기를 욕하고 다니던 시절에 뛰어난 아티스트는 다른 아티스트를 욕하지 않는다 며 불쾌해 했다.
그의 대인배스러운 성격을 볼 수 있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 2006년 월드 뮤직 어워드 당시 잭슨이 머물고 있던 숙소 바깥에서 팬들이 진을 치고 앉아 추위에 떨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피자 배달원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우르르 와서 천 명 가까운 팬들에게 피자를 나누어주며 마이클 잭슨이 전부 계산을 한 거라고 하자 팬들이 환호성을 내며 마이클 잭슨에게 감사했다고 한다. 부럽다 대신 잭슨이 탄산음료를 마시지 않아서 팬들에게도 콜라 대신 생수와 커피를 배달해줬다고 한다. #

사적으로는 무척 외로움을 많이 탔다고 한다.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썼다는 곡 'Stranger in Moscow' 는 자신이 머무는 호텔 밖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지만 정작 자신은 크나큰 외로움을 느꼈으며 그때의 마음을 회상하며 쓴 곡이 이 곡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젊은 나이에 너무 큰 성공을 거뒀기 때문에 주변에 비즈니스로 맺어진 사람들이 많았고 여자를 만나면 섹스광이라고 대서특필되고 남자를 만나면 동성애자라고 보도되는 통에 거의 혼자 다녔다고 한다. 안습. 그 때문에 진정한 친구가 적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외로움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집 밖을 뛰쳐나가 모르는 남자를 붙잡고 '저와 친구가 되어주세요' 라고 했는데 그 남자는 '마이클 잭슨이다!' 하고 소리를 질렀고 주변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잭슨은 '이걸 원한 게 아닌데' 라며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하지만 90년대에는 자신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여기고 접근하는 사람들을 질리도록 대하면서 환멸을 느꼈는지 그런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고 선을 긋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쇼 비즈니스 관련된 쪽으로는 영리했으며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자신의 무대에 열광하고 흥분하는지 명확하게 캐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오랜 연예계 생활로 인해 주변에 예스맨들이 넘쳐났고 이들을 한 번 좋아하면 덮어놓고 믿는 어리숙한 면이 있어서 이로 인해 만만치 않게 금전적, 정신적 피해를 자주 봤다. 대표적인 경우가 2001년 최규선 게이트의 장본인이었던 최규선과 유리겔라 같은 사기꾼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 마이클 잭슨의 이러한 어수룩한 면모는 황색 언론의 집중 표적이 되어 오랜 세월 집요한 공격을 받기도 했다. 순수하게 음악만을 사랑했던 예술인에 대한 잔인한 인격 모독이었던 셈이다.

4.7. 그 외


  • 음악적인 능력뿐만 아니라 그림도 잘 그리기로 유명하다. 음반 내 소책자를 보면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도 수록하기도 했다. 내한 당시에 머물렀던 숙소 선반에도 본인이 직접 그린 그림과 사인을 새겨두고 갔다. 호텔에서는 기념으로 그대로 둔 모양이다. 여러 모로 예술적인 면에서는 천재.

  • 동물도 매우 좋아했는데 어머니 캐서린 잭슨의 자서전에는 저녁 식사 중 마이클이 부스러기를 집어 셔츠 주머니에 넣었는데 뭐하냐고 묻자 가 마이클의 셔츠에서 얼굴을 내밀었다고. 그런데 그는 살인쥐가 마을을 조지는 'BEN' 의 주제가를 불렀다(...) 그래도 본인은 쥐가 관련됐다고 좋아했던 듯. 그리고 침팬지 버블스를 상당히 좋아했는데 1983년부터 그를 키운 뒤로 뮤직비디오, 쇼 프로그램 등에도 출연했다. 그런데 찌라시 언론들은 마이클이 버블스에게 집안 청소를 시킨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는 등의 루머를 뱉어냈고 아이들에게 위험할 정도로 덩치가 커져 결국 헤어졌다.

  • 무대 위에서의 돌발상황 대처력과 순발력이 무척 좋았다. 1996년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린 마이클 잭슨의 내한 콘서트 2차공연 도중 잭슨이 무대 중앙 9m 높이의 리프트에 올려진 순간 국내관객 김모 군(19)이 갑자기 관람석에서 리프트 계단을 타고 올라가 잭슨을 껴안는 해프닝이 일어났었다. 잭슨은 놀라는 기색 하나 없이 침착하게 공연을 계속했고 관객들은 그게 무대 연출의 일부인 줄 알고 열광했다. 이 일로 경호상의 책임을 놓고 대한경호협회와 콘서트를 진행한 백호기획은 상대방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실랑이를 벌였으나 정작 잭슨은 '우리도 도저히 생각해낼 수 없었던 기막힌 쇼였다' 며 김모군에게 감사를 표했다. king of 대인배! 당시 상황이 담긴 영상을 보면 갑자기 일어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잭슨이 상당히 유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김모군이 리프트에서 떨어지지 않게 꼭 붙잡은 채로 노래를 한다.해프닝 영상.웬지 자연 스러워서 연출이라고 착각할만 하다

  • 내한 당시에 신라호텔에서 대접받은 비빔밥을 극찬했다. 다만 매운 것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먹었던 비빔밥은 고추장 대신 간장을 넣었다. 당시 해당 호텔에서 마이클 잭슨 비빔밥이 팔리기도 했다. 아래는 당시 보도된 신문이다. 이외에도 한 팬이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비빔밥을 사랑한다며 말을 한 동영상도 있다.


  • 그가 약을 했다는 몇몇 가지 증거들 중 하나로 최근 공개된 마이클 잭슨의 절친 중 하나인 마술사 유리겔라에 대한 다큐에서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약을 하는 장면을 보았다는 발언을 했다. 그러나 유리겔라 항목에서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사람은 이미 흑역사가 되어버린 사기꾼이다. 전세계를 순회하면서 자기 쇼의 성공을 위해 잭슨과 친구인 척 이름을 팔고 다녔다가 사기인 게 들통이 나고 잭슨의 뒤통수를 골라 치는 거짓말만 치고 다녀서 크게 비난받은 적이 있었다. 잭슨에게 약을 하지 말라고 본인이 얘기했다던데 이 사람은 관심이 떨어질 법하면 매번 잭슨이 약물을 했다고 사방팔방 떠들고 다녀서 욕을 먹었다. Dangerous 월드 투어 때 남미에서 갑작스레 투어를 중단할 수 없었던 이유로 진통제 과다 복용이라고 하고 있으며 History 월드 투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25곡 정도의 트랙의 1회 공연을 기획하고 있었는데 진통제 등의 약물을 복용하면서 탈진해서 취소됐다는 문헌이 있는데 겉보기와는 달리 잭슨의 건강이 썩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000년대 후반에는 루푸스 합병증으로 구강 내부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고 80년대 중반에 화상 사고를 당한 후 치료 과정에서 기존에 있던 두피를 팽창시키는 방식으로 상처를 막았다고 한다. 마이클 잭슨이 오랫동안 장발을 고수했던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이 수술의 후유증이 꽤 심각했는지 90년대 이후에도 오랫동안 진통제를 복용했다고 하며 93년 성추행 사건 이후로 불면증이 극심해져 약물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한때 해외 커뮤니티에서는 잭슨의 건강 문제를 거론하는 팬들은 사이트에서 무조건 강퇴를 당하는 일이 있었을 정도로 잭슨의 건강 문제는 언급이 금기시되어 있었다.

  • 한때 여호와의 증인 신도이기도 했다. 70년대까지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로서 양복을 입고 집집마다 가스펠을 전파하러 다니기도 했다고 하는데(...) 1982년 'Thriller' 뮤직비디오 촬영 과정에서 여호와의 증인 내부에서 마찰이 심해서 탈퇴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44] 내한 공연 당시에 개신교 단체에서 병크를 저질렀던 가장 큰 명분. 다만 잭슨 가 사람들 전부가 여호와의 증인은 아니다.[45] 잭슨의 9남매들은 전부 다양한 종교를 믿고 있다. 어떤 개신교 교회에서는 팝을 악마의 음악으로 싸잡아 말하면서 마이클 잭슨을 '마이클이라는 이름은 천사장 미카엘을 사칭한 것이다' 고 말하는 병크도 저질렀다. 마이클 잭슨 본인은 집안 영향 때문에 신도였지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한 후에 종교적인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딱히 믿음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각종 인터뷰에서 '당신에게 신의 축복을' 이라는 말과 기도하는 손 모양을 자주 하고 'Dangerous' 음반의 'Dangerous' 와 'Heal the world'[46] 에서 성경의 말을 인용한 것을 보면 여호와의 증인과 잭슨의 영적 가치관이 달랐던 것이지 정작 그 자체는 영적인 사람이라고 그가 스스로 밝혔다(2005년(?)의 인터뷰에서).

  • 생전에 영화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특히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E.T》를 좋아했었고 감독과도 친분이 있었다. 1978년에는 시드니 루멧이 연출하고, 퀸시 존스가 음악 감독을 맡은 '오즈의 마법사 뉴욕, 흑인 버전'인 뮤지컬 영화 《위즈 The Wiz》에서 다이애나 로스와 출연해서 허수아비 역할로 주연을 맡기도 했지만 흥행과 비평 면에서 동시에 실패하면서 흑역사로 남았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연기에 대한 열정이 있었는지 비록 'Bad' 음반 홍보 차원에서 쓰이긴 했지만 1988년에 본인이 제작에 참여한 《문워커》에서도 주연을 맡아서 연기하기도 했다. 훗날 이 영화는 게임으로도 만들어졌다. 에드거 앨런 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에 캐스팅되었다는 기사가 뜨기도 했지만 실제로 영화가 제작 단계에 있었는지는 확인 불가. 그 이후로 《맨 인 블랙 2》에 요원 M으로 깜짝출연하기도 했다.

  • 2001년 리마스터링 버전이 나오기 전에 발매되었던 국내판 오리지널 'Bad' 음반에서 강제 개명당했다(...). Michael Jackson을 Michael Jacksoon이라고 적어두었던 것. 다만 이것은 잭슨 본인도 신기하게 생각했는지 내한 당시 레코드점에서 이것을 구입했다고 한다.

  •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잭슨은 애니메이션로봇 완구를 굉장히 좋아했다고 한다. 700만 불이 들어간 'Scream' 뮤직비디오 초반부에 일본 애니메이션 아키라, 바벨 2세, 그리고 붉은 광탄 질리온의 장면을 삽입할 정도로 특히 일본 애니메이션에 많은 애착을 가졌다. 일본 공연 때 백화점 하나를 빌려서 오오 능덕 장난감, 로봇 완구들을 산더미 같이 쇼핑한 것은 유명한 일화. 그때 산 장난감 중에 백수왕 고라이온도 포함돼있었다고.

  • 노래에 유독 여자 이름이 많이 나온다. 'Billie Jean' 의 빌리 진, 'Dirty Diana' 의 다이애나, 'Smooth Criminal' 의 애니, 'Little Susie' 와 'Blood on the dance floor' 에 나오는 수지, 거의 애드리브처럼 쓰는 데비 등등. 일각에서는 사귀던 여자들이 아니냐는 말이 있었는데 본인은 별 뜻 없다고 해명했다. 그저 이 노래에 이름이 거론된 여자들은 좋아했다.

  • 1992년 루마니아 공연 당시 부쿠레슈티의 인민궁전 발코니에서 자신을 보기 위해 모여든 관객들에게 'hello, budapest!' 라고 인사하는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다(모두들 알겠지만 부다페스트헝가리의 수도다). 헝가리하고 루마니아는 이웃나라고 도시 이름도 비슷하다 보니 저지른 실수인 듯. 사실 상당한 실례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실수였지만 크게 문제시되지 않고 넘어갔다. 루마니아인들 입장에서는 맨날 차우셰스쿠가 서있던 자리에 마이클 잭슨이 서있으니 구경만 해도 기분이 상쾌해져서 굳이 시비 걸 기분이 안 든 걸지도 모른다

4.8. 여담

  • 대한민국에서는 2009년 연말 공중파 가요대전에서 아이돌 댄스 그룹 멤버들을 모아 놓고 마이클 잭슨을 추모하는 이벤트를 벌였다. 그런데 문제는 마이클 잭슨은 죽지 않았다. 지금 한국에서 그의 전설이 되살아난다! 같은 병맛스러운 자막을 달아놓고는 마이클 잭슨에 비해 절대적으로 낮은 퀄리티의 쇼를 보여서[47] 보는 이로 하여금 딥빡침 분노를 선사케 했다. 심지어 슈퍼쥬니어는 Beat it의 싸우는 듯한 군무 도중 닭싸움을 하는 만행을 저지르는데, 댄스가수로써 마이클 잭슨을 추모하는 공연에서 어떻게 그런 경악할만한 짓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천하의 개쌍놈들 박진영은 'This is for you, Michael' 이라고 말했다가 또 욕 먹었다. 이때의 영상은 유튜브에 올라가 세계구급으로 까였다. 일명 마이클 잭슨 능욕이라고 불린다. 고인드립의 절정.[48]

  • 마이클 잭슨이 사망하던 주에 당시 인기프로그램이였던 개그 콘서트의 분장실의 강선생님에서는 마이클 잭슨 분장을 하고 강유미가 출연하여 논란이 되었는데, 한국에서는 얼마나 마이클 잭슨이 희화화 되어있었는지 알만한 대목이다. 추후 개그콘서트 팀은 마이클 잭슨 사망이 발표되기 이틀전에 녹화를 하여 벌어진 사려깊지 못한 행동이라고 사과를 했다.


  • 2009년 6월 28일 카림 가르시아는 홈런을 친 후 팀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마이클 잭슨을 애도하였다.

  • 무한도전 2009년 6월 27일 방송분에서는 프로그램 말미에 잭슨의 'Billie Jean' 퍼포먼스를 내보내 시청자들은 김태호 PD에게 호평을 보냈다.

  • 2010년 1월 30일 연예가중계에서 할리우드 추남추녀 TOP 7을 소개했는데 2위에 마이클 잭슨을 올리며 고인드립에 가까운 짓을 했다. 아동 성추행죄는 이미 무죄로 판결됐는데 아동 성폭행범이라고 언급했다(성추행과 폭행은 다른 것이다). 이것도 세계구급으로 까이자 개깜놀한 연예가중계가 애매하게 사과했다. 사실 한국은 이전부터 잭슨의 루머를 사실인 양 게재하는 보도 문제가 심각했는데 이전에 SBS 모 프로그램에서도 잭슨의 피부색 변화를 '백인이 되고 싶어서 박피를 했다' 고 내보냈으나 당시에는 이미지가 추락했던 시기라 아무도 항변하지 않았다. 99년에 잭슨이 내한한 이유가 분단 국가인 한국의 통일과 평화를 기원한다는 이유였는데 그가 생전에 한국에 호의를 보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국 연예 언론의 태도는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는 행위다[49] 병크 풍년

  • 허경영 민주공화당 총재는 잭슨의 유고 며칠 전까지 여주교도소에서 복역했는데 그때 '마이클 잭슨의 영혼이 죽기 3일 전 온몸에 못이 박힌 채 순교자의 모습으로 나를 찾아왔다' 고 인터뷰했다. # 또한 2010년 12월 22일에는 그가 이루지 못한 세계평화를 이루기 위해 '허경영 - Best T7' 을 발매했다. #

  • 슈퍼스타 K2에서 2010년 10월 1일 팝송 미션으로 마이클 잭슨의 곡을 가지고 겨루는 미션을 선보였는데 결과는 슈스케 2 시청자들에게 레전드 무대 중 하나로 손꼽히는 존박의 'Man in the Mirror' 를 제외하고는 평타이거나 혹은 그 이하. 전체적으로 무리수였다는 평과 함께 마이클 잭슨의 위엄을 더 돋보이게 하였다는 평이 많았다. 괜히 마이클 잭슨이 '팝의 제왕' 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은 것이 아니다.

  • 잭슨은 생전 故앙드레 김의 옷을 꽤나 좋아했고 전속 디자이너를 부탁한 적도 있었으나 故 앙드레 김은 '나는 대한민국의 전속 디자이너로 한 개인의 전속 디자이너가 되고 싶지 않다' 며 거절했고 대신 멋진 옷 몇 벌을 지어 보내주었다. 앙드레 김 디자인 특유의 용 문양이 그려져 있는 실크 정장이나 단정한 흰색 정장이었는데 마이클 잭슨의 취향과도 잘 맞았으며 실제로도 잘 어울렸다는 평. 모음



생전 런던에서 열린 'This is it' 콘서트 발표 기자회견 때 입었던 옷이 故앙드레 김의 작품이다.

  • 마이클 잭슨은 사후에도 끊임 없이 루머에 시달려야 했다. 잭슨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영국의 한 사이트에 올라온 동영상이 루머를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그 영상의 내용인 즉슨 마이클 잭슨의 시신이 있다고 추정되는 장례식 앰뷸런스 차량의 뒤쪽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잭슨이 경호원 한 명의 보호를 받으며 내린 후 뒷문으로 빠르게 빠져나가는 내용이었다. 해당 영상을 올린 사람은 자신이 찍은 영상은 사실이며, 어떠한 조작도 없음을 밝혔다. 한 편, 그 영상은 조작된 것이라며 반박하는 영상도 뒤이어 올라왔고 한 때 논쟁거리가 되었다. 마이클 잭슨이 This is it 공연을 위해 세계적으로 죽은 척 연기를 하고 있다는 주장과 터무니 없는 황당무개한 소리라는 주장이 엇갈렸다. 엘비스 프레슬리?

  • 현재 웹상에서 잭슨의 부검 사진이라고 주장하는 사진이 떠돌고 있는데 타블로이드지에 올랐던 부검 추정 사진이다.

4.9. 어록

인터뷰를 자주 사양했으나 몇몇 인터뷰와 자서전에서 꽤 진지하고 심오한(...) 어록을 많이 남겼다. 어록을 살펴보면 열정적이다 못해 순수하며 꽤 감상적인 사람임을 알 수 있다.

  • 춤출 때 생각하는 것은 가장 큰 실수다. 춤은 느끼는 것이다.
  • 내가 바라는 것은 아이들을 위한 평화와 사랑이다.
  • 난 무적이다. 날 다치게 할 수도 없고 날 끌어내려도 다시 일어난다('Invincible' 음반 수록곡 'Unbreakable' 의 가사).
  • 나는 나이 드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내가 나이 드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나의 팬들뿐이다.
  • 나는 일생 동안 다른 아티스트를 공격한 적이 없다. 위대한 아티스트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에미넴이 자신을 조롱한 사건에 대해).
  • 남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을 믿지 않는다. 너무 의심이 많다. 스스로 자기를 의심하면 최선을 다할 수 없다. 스스로 믿지 못한다면 누가 믿어 주겠는가? 작업에 들어가면 나는 내 자신을 100% 믿는다. 나의 혼을 그 작업에 불어넣는다. 그러다가 죽어도 상관없다. 그것이 나다.
  • 나에게 있어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어깨에 드리워진 짐을 가벼워지게 돕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 와코 재코(Wacko Jacko)란 말이 대체 뭔가. 타블로이드가 만든 말 아닌가? 나도 가슴과 감정이 있는 사람이다. 당신들이 이런 말을 쓸 때 나는 그걸 듣고 느낀다. 좋지 않다. 쓰지 말아 달라. 난 괴짜가 아니다.
  • 만약 당신이 세계를 좀더 멋진 터전으로 꾸미고 싶은 생각이라면 먼저 당신 스스로를 잘 보고 자신부터 개선시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거울 속에 비친 당신부터 시작해야 한다. 당신부터 먼저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그의 곡 'Man In The Mirror' 의 가사가 이러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 인간은 접하고 싶어한다. 또 그 진실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고 싶어한다. 설령 절망이든 기쁨이든 자기가 느끼거나 경험한 것을 살리는 일이 그 인생에 의미를 가져다 주고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의 모습이다. 이와 같은 계몽의 순간을 위해 나는 계속 생존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 무대 위에 오르면 육안으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굉장한 기분이 들지만 그만큼 엄청난 고통도 함께 따라온다. 정말 엄청난 고통이다.
  •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진실을 알 것이다. 내 인생의 첫째는 아이들이고 내가 결코 아이들을 해치지 않았다는 것을.
  • 사람들은 내가 어딜 가든 나를 45살의 꼬마라고 불렀다.
  • 왜 당신의 침대를 함께 쓰지 못하는가? 누군가와 침대를 나누는 것은 사랑의 표현 중 하나다. 사랑하는 이에게 '원하면 내 침대를 같이 쓰자. 여기서 자. 난 바닥에서 잘 테니까' 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항상 내 친구들에게 내 침대를 내주었다. 이렇게 성품이 순수하니, 언론의 타깃이 되지 않는 게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 난 매주 리사(전 부인이자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와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같은 행성에서 왔으니까. 우주바다 속 변덕스러운 예외라고 부르는 곳. 이름을 뭐라고 못 짓겠네. 태양계를 넘어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 불법으로 유통시키고 다운로드를 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기보다는 이 문제에 있어서는 아티스트의 책임이 크다. 나는 지금껏 한평생 음악을 하면서 성인 솔로로써 낸 음반이 고작 6개밖에 안 된다. 왜 그런 것 같은가? 완벽한 음반을 만들기 위해 한 음반을 만들 때마다 5~6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많은 아티스트들이 한두 곡의 히트곡을 빼고는 나머지 공간을 시시껄렁한 곡들로 채워넣는다. 하지만 나는 항상 한 음반의 모든 곡들이 최고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음반을 만들란 말이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적어도 사람들이 차를 몰고 레코드점에 가서 음반을 골라들고 지갑을 열어 계산을 하는 수고를 생각하라. 그리고 그 수고를 감수할 가치가 있는 음반을 만들어라.

    (그럼 당신의 음악이 불법으로 유포되는것은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사람들이 그렇게라도 나의 음악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말이다.(2003년 저널리스트와의 인터뷰 중.)[50]

5. 디스코그래피

5.2. 싱글

5.2.1. 빌보드 1위

  • Ben (1972)
  • Don't Stop 'til You Get Enough (1979)
  • Rock with You (1979)
  • Billie Jean (1983)
  • Beat It (1983)
  • Say Say Say (Duet with Paul McCartney) (1983)
  • I Just Can't Stop Loving You (Duet with Siedah Garrett) (1987)
  • Bad (1987)
  • The Way You Make Me Feel (1987)
  • Man in the Mirror (1988)
  • Dirty Diana (1988)
  • Black or White (1991)
  • You Are Not Alone (1995)

5.2.2. 빌보드 2위

  • Rockin' Robin (1972)
  • The Girl Is Mine (Duet with Paul McCartney) (1982)

5.2.3. 빌보드 3위~10위

  • Got to Be There (1971)
  • Off the Wall (1980)
  • She's Out of My Life (1980)
  • Wanna Be Startin' Somethin' (1983)
  • Human Nature (1983)
  • P.Y.T. (Pretty Young Thing) (1983)
  • Thriller (1984)
  • Smooth Criminal (1988)
  • Remember the Time (1992)
  • In the Closet (1992)
  • Will You Be There (1993)
  • Scream (Duet with Janet Jackson) (1995)
  • You Rock My World (2001)
  • Love Never Felt So Good (2014)[51]

5.2.4. 빌보드 11위~20위

  • I Wanna Be Where You Are (1972)
  • Another Part of Me (1988)
  • Who Is It (1992)
  • Butterflies (2002)

5.3. 마이클 잭슨과 관련된 창작물 콘텐츠

  • 만화 아기공룡 둘리마이콜은 마이클 잭슨의 패러디다.
  • 미국의 패러디 제왕인 위어드 알 얀코빅은 80년대에 'Beat it' 을 패러디한 'Eat it', 'Bad' 를 패러디한 'Fat' 을 음반으로 내놓기도 했다. 뮤직비디오도 상당히 재미있는데 잭슨도 기발하다며 좋아했다고 한다.
  • 영화 문워커, 캡틴 E.O에 주연을 맡았다.



  •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의 시즌3 1화인 <Stark raving dad>에서 목소리 출연을 하기도 했다! [52] 다만 어른의 사정으로 크레딧에 본인 이름은 올리지 못했고 John Jay Smith라는 가명으로 나왔다. 또한 리사를 위해 만든 노래 및 흥얼거리는 파트는 본인이 아닌 킵 레넌이라는 대역을 썼다. 다른 에피소드에서 좋아하는 캐릭터인 바트를 위해 노래 'Do the bartman' 도 만들어서 불러줬는데 이 역시 소니와의 계약 문제로 대역을 써서 불렀다. 본인이 직접 부른 Happy birthday Lisa. EBS에서 심슨을 더빙해서 방영했을때 시즌 3부터 시작했으므로 EBS 더빙판 중에선 최초의 에피소드인 셈인데 더빙판에서 마이클 잭슨 역할을 담당한 성우가 누구인지는 추가바람. 일단 해당 에피소드의 EBS판 제목은 '쓸쓸한 리사의 생일'이다.[53]
  • 세가의 게임 스페이스 채널5와 그 후속작 스페이스 채널5 파트2에는 잭슨을 모델로 한 캐릭터 '스페이스 마이클' 이 나온다. 이 캐릭터의 성우는 마이클 잭슨 본인. 프로듀서가 개발 중인 게임을 보여주자 본인이 먼저 참여할 의욕을 보였다고 한다.[54]
  • 영화 《맨 인 블랙 2》에 요원 M으로 깜짝출연하기도 했다. 1편을 보고 반해서 2편에 에이전트로 출연 요청을 했는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카메오로 출연.
  • 달숙이에서도 유명 인사 카메오 중 한명으로 나왔다. 어째서인지 마돈나와 부부 관계라 작중에서는 통칭 마씨 부부라 불린다(...) 이 만화가 그렇듯 멀쩡한 캐릭터라고 보기는 다소 힘들다. 그래도 유명인사 계열 출연진 중에 어느 정도의 비중은 있었다.
  • 영화 《무서운 영화》에 패러디한 인물이 등장했다. 다만 한창 성추행 소송 문제로 이미지가 안 좋았던 때라 풍자의 대상으로 나왔다. 그것도 3편, 4편 두 번(...)[55]
  • 영화 《러시 아워》의 주연 배우인 크리스 터커는 실제로 마이클 잭슨의 열렬한 팬인데 2편에서는 클럽에서 엉성하게 'Don't stop til' you get enough' 를 부르는 사람을 보고 분노하여 무대에 난입해서 마이크를 뺏고 노래를 부른다. 그때 대사가 '저 명곡을 망친단 말이야!' 이 사람은 영화에서 흑인의 위대함을 논할 때 잭슨 드립을 자주 친다.
  • 2001년 삼성 노트북 센스의 광고에 마이클 잭슨을 패러디한 가수가 김정화와 함께 춤을 춘다.
  •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엔 그의 춤을 추는 챔피언이 세 명 있다. 탈론은 'Billie Jean' 의 문워크, 워윅브랜드는 'Thriller' 의 춤을 춘다.
  • 게임 소닉 더 헤지호그 3의 BGM에 마이클 잭슨이 참여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사후에 프로듀서 브래드 벅서가 사실을 확정지었다. 엔딩 크레딧과 아이스 캡 존, 일부 효과음이 잭슨이 참여한 부분이다.
  • 게임 스타크래프트 2해병히드라는 채팅창에 /춤을 입력하면 마이클 잭슨의 춤을 춘다.
  •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나이트 엘프 남성 캐릭터는 /춤을 입력하면 마이클 잭슨의 춤을 춘다.
  • 게임 클로저스의 캐릭터인 제이는 /춤을 입력하면 Billie Jean의 안무를 구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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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사실 팝의 제왕이 올바른 표현이다. King of Pop이기 때문. 다만 국내 한정으로는 제왕보다는 황제가 조금 더 임팩트 넘치기에 보통 황제라고 불린다. 그의 절친인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붙여준 별명이다. 그런데 본인도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아니면 프로모션을 담당하는 기획사에서 의도적으로 그랬던건지 자기 공연에서 'King of POP' 이라는 플래그를 걸기도 했다.
  • [2] 여담으로, 마이클 제프리 조던(Michael Jeffrey Jordan)과 이니셜이 완전히 동일하다.
  • [3] 케네디 가문이 정치계에서 이름을 날렸다면 잭슨 가문은 음악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할 정도로 온 가족들이 음악계에서 활동했다. 티토 잭슨의 세 아들인 3T도 그룹활동을 하는 등 그의 집안은 지금도 음악계에 종사하고 있다.
  • [4] 사실 그 전에 지방의 작은 레코드사 스릴타운과 계약을 한 사실도 있지만 보통 첫 데뷔를 MOTOWN 시절로 보고 있다.
  • [5] 저메인 잭슨은 MOTOWN의 사장 베리 고디의 딸과 결혼했기에 나오지 않았다.
  • [6] 잭슨 파이브가 아닌 마이클의 솔로곡. 아름다운 발라드와는 달리 정작 영화는 살인 쥐떼가 마을 사람들을 조지는 내용이다.
  • [7] 출처. Taraborelli, J.Randy, 《Michael Jackson – The Magic, the Madness, the Whole Story》
  • [8] 잭슨이 공연을 한 잠실주경기장은 5만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엄청나게 넓은 곳이다. 여기를 매진시킬 수 있는 솔로 가수는 사실 조용필밖에 없다고 할 정도. 외국 가수 중 유일하게 레이디 가가는 잠실주경기장 공연을 매진시키는 것에 성공하였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가가도 잭슨과 똑같이 내한 반대 운동을 겪었지만 오히려 그게 홍보가 됐다. 잭슨은 일본 문화도 개방 안 된 90년대 말의 폐쇄적 시대 분위기 속에서 공연을 열었지만 가가 시대에는 개방적인 분위기였던 점이 큰 차이점
  • [9] 웃기게도 한국에서 이 공연을 가질 당시 하필 6.25에 날짜를 맞춘다고 반대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평소에 성조기를 흔들며 미국을 찬양하던 군복 노인들 일부가 반대시위하다가 더 욕먹었다. 게다가 그의 아동 성추행을 문제삼은 한국 개독개신교회들에서부터 그의 노래가 사탄이라고 하는 망상적인 목사들의 반대와 심지어 아이들을 끌어들여 6.25가 어떤 날이죠? 사탄이 공연하는 날이 아닙니다 이따위 푯말이나 들고 반대시위를 하던 이들까지 있었다.천하의 개쌍놈들 그럼에도 결국 공연은 무사히 이뤄졌고 이들은 병크로서 확 잊혀졌다.
  • [10] 그리고 이미 발권된 런던 공연에 대해서는 환불이 진행되었는데 대다수는 런던 공연의 티켓을 잭슨의 유품으로 여기며 환불하지 않고 소장하여 회수율이 매우 낮았다. 게다가 이 티켓은 암시장에서 원래 가격의 10배가 넘는 비싼 값에 거래되기도 했다.
  • [11] 다만 이번 신보는 제이슨 말라카이라는 목소리가 비슷한 짝퉁 마이클 잭슨을 가지고 대리 녹음을 했다니, 가족들은 단 한 번도 못 들어본 노래라니 등 여러 가지 증언들이 겹쳐서 잡음이 엄청나게 끼어있다.
  • [12] 토이즈와의 협찬으로 판권 획득.
  • [13] 실제 잭슨의 춤은 모방이 힘든 춤으로 악명 높기로 유명하다. 당장 춤에 대해선 일가견이 있는 댄스 가수도 잭슨의 안무를 정확하게 소화하기엔 많은 무리가 따른다. 예능 프로의 개인기 코너 때 잭슨의 춤을 유사하게 추는 가수들을 흠모의 대상으로 보는 시선을 내보내는 장면에서 보듯이 그대로 따라만 해도 '정말 잘 춘다' 고 평가할 정도. 실력 있는 댄스 가수를 평가하는 잣대로 쓰이기도 유명한데 얼마나 따라서 잘 추느냐 못 추느냐의 여부로 실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구분하기도 한다.
  • [14] 슈게이징/포스트 록 밴드 불싸조의 기타리스트로 알려져있다.
  • [15] 2002년 최규선 게이트의 장본인인 최규선 회장은 마이클 잭슨과도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중앙일보에 투고한 글에 의하면 김대중 대통령의 옥중서신을 영어로 번역하여 마이클 잭슨에게 보여준 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 글을 읽고 마이클이 너무 감동하여 펑펑 울었다고 한다. 물론 최규선 게이트 당시 그가 했던 뻥들을 생각하면 100% 실화인지는 입증할 수는 없으나 어쨌든 그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잭슨 사이에 결정적으로 다리를 놓아준 것은 사실이기는 한 것 같다.
  • [16] 그런데 후일담에 의하면 본인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공연이 끝나고 엉엉 울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나가던 소녀가 너무 잘했다고 칭찬해줘서 그제서야 기분을 풀었다고 한다.
  • [17] 음악은 'The way you make me feel'.
  • [18] 대부분 실제 공연이나 뮤직비디오에선 바지 속에 무릎보호대를 착용하고 한다. 그리고 마이클 잭슨이니까 문제 없이 잘해낸 것이니 일반인이 함부로 따라하지 말자.
  • [19] 참고로 아스테어는 그후 잭슨에게 직접가 문워크를 배우기도 했다.
  • [20] 당시 700만 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되어 세계에서 가장 비싼 뮤직비디오로 기네스북에 기록됐다.
  • [21] 풀버전은 18분이나 된다. 잘 알려져 있지도 않아서 유투브에서도 멀쩡한 영상을 찾기 힘들다.
  • [22] 소녀시대의 'The Boys' 를 만든 테디 라일리 맞다. 사실 대단한 사람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요새는 퇴물이라는 평이 지배적.
  • [23] 대표적으로 퍼프 대디가 그의 노래에 참가한 적이 있었고 the notorious big과도 친분이 있어서 그의 사후에 자기 음반에 그의 랩을 넣기도 했다.
  • [24] 슬래시, 밴 헤일런, 스티브 루카서, 믹 재거, 프레디 머큐리, 카를로스 산타나 등 수많은 록/메탈 아티스트가 세션으로 참가했었다.
  • [25] 'Dangerous' 음반의 'In the closet' 에서 듀엣을 했는데 원래는 마돈나와 함께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돈나 본인의 스케줄 문제와 잭슨과 컨셉을 맞추는 문제 등 여러가지 난점으로 인해 취소되고 스테파니 공주와 함께 작업했다. 뮤비에서는 톱모델 나오미 캠벨이 나온다. 사실 뮤직비디오도 마돈나가 출연하기로 했으나 마돈나가 마이클 잭슨에게 여장을, 자신이 남장을 요구했으나 마이클 잭슨은 고민하다가 자신의 여동생 자넷에게 하지 말라고 단호한 조언을 받았다고 한다.
  • [26] 'Invincible' 음반의 'You rock my world' 인트로에서 여자를 꼬시는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만 끝난다. 유일하게 듀엣곡이 수록되지 않은 음반이 'Invincible' 음반이다. 그래도 30주년 콘서트에서 'You rock my world' 라이브 후반에 Usher와 같이 게스트로 무대에 올라와서 축하해줬다.
  • [27] 실제로 인터뷰에서는 유년 시절 레코드 사 건너편에 공원이 있었는데 아이들이 뛰는 모습을 보면서 곡 작업에 매진해야 했다고 한다.
  • [28] 다행히 잭슨 측에서 따로 영상을 촬영한 것이 남아있어서 대조한 결과 악질적인 편집임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이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아서 잭슨의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었다.
  • [29] 주변 사람들이 그를 40살 어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 [30] 소송 사건 당시 법원에서 병에 들어있는 사탕을 고르는 사진이 있기도 하다. 그리고 평소에 사탕, 껌 등을 단 것을 굉장히 즐겨 먹었다. 정작 자기 아이들한테는 절대 못 먹게 했다는 것이 함정 어린 시절부터 마이클 잭슨은 사탕이나 과자를 무척 좋아했는데 가수를 안했으면 사탕가게 주인이 됐을거라고 한다.
  • [31] 영화 《러시 아워 2》에서 성룡과 더불어 홍콩으로 파견 근무를 갔을 때 성룡이 '홍콩에서는 내가 마이클 잭슨이고 넌 토 잭슨이야' 라고 하자 터커가 '토토 잭슨이 아니라 토 잭슨(잭슨의 형제 이름)이야. 토토는 니들이 저녁에 잡아먹는 개 이름이구' 라는 장면이 나온다.
  • [32] 어머니인 캐서린 잭슨 여사는 막장 아버지였던 조 잭슨과 달리 그야말로 성인군자. 막장 쓰레기급의 아버지 밑에서 마이클 잭슨 같은 훌륭한 실력과 인성을 지닌 자식들이 나온 것은 어머니의 교육 덕분이라는 게 세간의 평가.
  • [33] 사우스 파크라는 미국 애니메이션에서 '깜둥이 수술'이라는 수술이 있는데 백인을 흑인으로 바꾸는 수술이라고 나오는데 뒤에 설명에 덧붙여 마이클 잭슨이 했던 '흰둥이 수술'의 반대판이라고 한다. 제작진들이 병 때문이라는걸 몰랐었던듯.
  • [34] 어린 시절에 찍은 사진에도 피부색이 조금씩 희끗희끗해진 사진들이 많다.
  • [35] 특히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한 손에만 낀 흰 장갑도 손의 백반증 자국을 가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그의 한손 장갑은 한국산 골프 장갑이라고 한다.
  • [36] 그의 파파라치 샷을 보면 유난히 온몸을 칭칭 감고 있거나 햇빛 쨍쨍한 날에도 우산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신분 은폐(...) 및 자외선 차단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그러고 다니면 누구든지 마이클 잭슨인 줄 안다.
  • [37] 해변에서 찍힌 사진들을 보면 각각 팔과 겨드랑이, 가슴 부위에 백반증 증세가 있다.
  • [38] 다만 아예 안 먹은 건 아니었다.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KFC 치킨이었다.
  • [39] 다만 이 근육도 사실은 마른 근육에 가깝다. 결이 잘 갈라져서 멋있어 보이긴 하지만.
  • [40] 우리가 흔히 엉덩이턱이라 부르는 턱에 파진 홈은 적당히만 파지면 서양권에서는 미남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참고로 턱의 홈은 유전이다.
  • [41] 자서전에서 언급한 것보다 훨씬 많은 코 성형과 턱 성형을 했다는 의사들의 증언이 있다.
  • [42] 그래서 90년대 초에 어느 기자가 '당신은 게이인가요?' 라고 물어보았을 때 '전세계에는 나의 팬인 게이들이 많아요. 날 게이로 생각하고 싶다면 그렇게 생각하세요. 전 그들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요' 라고 대답했다. 대인배...
  • [43] 'I feel privileged to have hung out and worked with Michael. He was a massively talented boy man with a gentle soul. His music will be remembered forever and my memories of our time together will be happy ones.'
  • [44] 'Thriller' 뮤직비디오 시작 전에 '이 영상은 오컬트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것은 자신(아마도 마이클)의 종교적 신념과 무관하다' 는 자막이 나온다.
  • [45] 그의 어머니가 여호와의 증인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46] Dangerous 가사 및 해석, Heal the world 가사 및 해석.
  • [47] 물론 춤에 일가견이 있는 댄서가 최선을 다해서 연습한다 한들 마이클 잭슨보다 퀄리티가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연습 제대로 안한 티가 팍팍 났으며 'Heal the World' 코러스 도중에 몇몇 가수들은 자기들끼리 떠들기까지 했다! 만약 마이클 잭슨의 춤이 댄스 가수들 사이에서 어떠한 지위에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면 이런 막장은 하지 못했을 테지만. 거듭 말하거니와 마이클 잭슨의 춤은 그저 그대로 똑같이 춰도 본전을 건지는 정도의 난이도가 넘사벽급인 안무다.
  • [48] 당장 대중문화의 발상지인 미국에서조차 추모 공연이 잘 이뤄지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어처구니 없는 노릇이다. 더구나 '팝의 제왕' 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의 위상을 생각해본다면 이런 식의 공연은 애시당초 올리지 말았어야 했다.
  • [49] 한국 언론들이 가지고 있는 큰 문제가 풍문과 실상을 구별해 보도하지 못하는 분별력 결여의 보도가 많다는 점이다. 당장 우리 역사속에서도 '실록' 과 '야사' 라는 두 가지 자료가 있거니와 '실록' 은 전문성 있는 전문가가 실제로 있었던 사건, 사고들을 기록한 것이고 '야사' 는 그 당시에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돌았던 일종의 '풍문' 을 기초로 만든 것이기에 두 가지가 엄연히 다른 것과 같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라는 속담이 있음을 강조한다고 해도 진실만을 엄선해서 보도해야 하는 언론 기관들조차 일종의 풍문과 카더라에 불과한 내용을 마치 사실인 양 보도하는 태도는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다.
  • [50] 당연하게도 이 발언 이후 'Invincible'은 어찌된 거냐, 당신이 돈 쓸어담을 땐 냅스터가 없었다는 둥의 각종 비아냥에 시달리게 되었다. 위의 악성 비난 외에도 이미 4억장을 넘게 팔아서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하기에는 부적절한 말이었다는 비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결국 같은 년도 다른 인터뷰에서는 It is wrong to download but the answer cannot be jail 라는 식으로 말을 좀 유하게 하게 되었다. 헌데 마이클 잭슨의 80년대 전성기 때도 카세트 테이프 레코더의 유행으로 음반 산업이 장난 아니게 타격을 입은 적이 있긴 했었다. 그럼에도 이 양반은 음반을 잘만 팔았다(...) 물론 카세트테이프 레코더와 현재의 불법음원 다운로드와는 규모 자체가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 [51] 50년대에 걸쳐서 탑 10에 진입한 유일한 아티스트.
  • [52] 스스로를 마이클 잭슨이라고 생각하는 레온 콤포스키라는 이름의 정신병자라는 설정이었다.
  • [53] 사실 EBS 홈페이지에서도 심슨 더빙에 관한 연혁을 찾을 수 없고 웹상에서도 '일본탐험'편을 빼면 EBS 더빙판 심슨 영상에 대한 정보가 거의 나타나질 않는다.
  • [54] 다만 1편의 경우 너무 참여가 늦어서 딱 한 부분만 출연하고 따로 녹음도 안해서 옛날에 나왔던 게임 문워커의 음성을 재활용했다. 2편에선 비중이 대폭 늘었고 녹음도 제대로 했다.
  • [55] 성추행 사건 두번이 전부 마이클 잭슨이 피해자임이 밝혀진 지금에 와서는 엄청 무례한 처사인데 본인은 그냥 넘어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