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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이 가즈오

last modified: 2015-04-10 01:33:43 Contributors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No.7
마쓰이 가즈오(松井 稼頭央)
생년월일 1975년 10월 23일
국적 일본
출신지 오사카 부 히가시오사카 시
포지션 내야수(유격수.2루수)
투타 우투양타
프로입단 1993년 세이부 라이온즈 드래프트 3순위
소속팀 세이부 라이온즈(1994~2003)
뉴욕 메츠(2004~2006)
콜로라도 로키스(2006~2007)
휴스턴 애스트로스(2008~2010)
콜로라도 로키스 산하 AAA 콜로라도 스프링스 스카이삭스(2010)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2011~)

松井 稼頭央(松井和夫)[1]

1998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 MVP
니시구치 후미야
(세이부 라이온즈)
마쓰이 가즈오
(세이부 라이온즈)
쿠도 키미야스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Contents

1. 소개
2. 선수생활
2.1. 세이부 시절
2.2. 뉴욕 메츠 시절
2.3. 콜로라도 로키스 시절
2.4. 락토버 이후
2.5. 현재
3. 플레이 스타일
3.1. 공격
3.2. 수비
4. 이모저모


1. 소개

일본프로야구유격수 계보를 잇는 최고의 선수. 일본프로야구의 진정한 5툴 플레이어 중 하나다. 그리고 대표적으로 알려진 재일 야구선수다. 세이부 라이온즈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활약하다 2004년부터 2010년까지 메이저리그로 진출, 현재는 다시 일본으로 복귀하여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서 뛰고 있다.

2. 선수생활

2.1. 세이부 시절

야구명문인 PL학원 고등학교 출신으로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그러나 갑작스런 팔 골절상으로 인한 슬럼프를 겪어 자신이 달고 있던 에이스 넘버를 한때 반납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뛰어난 운동능력은 각 구단의 스카우터에게 높이 사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결국 1993년 드래프트에서 3순위로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 강한 어깨와 빠른 발을 높게 평가받으며 투수에서 내야수로 전향하고, 거기에 스위치 히터로 변신하게 된다.

1년차인 1994년에 주로 2군에서 뛰다가 그 이듬해인 1995년부터 1군에서 활약했고, 1996년에 본격적으로 유격수로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이 해에 파리그 2위인 시즌 50도루를 기록하면서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또한 그를 대표하는 등번호 7번을 은퇴한 시게 히로미치로부터 물려받았다.

1997년에 처음으로 3할을 기록했고 도루도 62개나 훔치며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리고 팀이 파리그 우승을 하는데 큰 몫을 했다. 특히 이 해 올스타전에서 1경기 4도루를 기록하여 올스타전 MVP를 기록할 정도로 스타성도 갖추기 시작했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 3년 연속 도루 1위를 기록하며 처음으로 시즌 MVP를 수상했고, 나아가 파리그, 1990년대는 물론 일본프로야구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일본의 간판 유격수로 성장했다. 마침 이 때가 AV매니아 마쓰이 히데키가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거포로 명성을 얻던 시기인지라 그는 자연스럽게 리틀 마쓰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의 리즈시절은 1996년부터 2003년까지였고, 고로 일본프로야구 유격수의 역사를 써나가는 시간이었다. 1996년부터 2003년까지 8시즌 동안 통산 1143경기 연속출장, 1997년부터 2003년까지 7시즌 연속 3할 이상 타율과 시즌 170개 이상의 안타를 기록할 정도로 꾸준했다(1999년, 2002년 리그 최다안타 포함. 특히 2002년에는 193안타 기록). 거기에 장타력까지 더하여 1999년에 15홈런을 시작으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기 전까지인 2003년까지 131개의 홈런(연평균 26.2홈런)을 때려냈다. 20-20을 세 번(2000~2002) 기록했고, 특히 2002년에 역대 8번째이자 스위치 히터로서는 사상 최초의 트리플 쓰리(3할-30홈런-30도루)을 기록했다. 거기에 통산 1000안타를 역대 4위의 속도로 달성하는 등 일본프로야구의 역사를 써나갔다. 베스트 나인 7회(1997~2003), 골든 글러브 4회(1997, 1998, 2002, 2003) 수상에, 2001년에는 일본프로야구 20세기 센츄리 베스트 나인에도 선정됐다.[2]

하지만 우승하고는 인연이 없어서 파리그 우승을 3번(1997, 1998, 2002) 경험했지만 일본시리즈 준우승에 머물렀고 여기에 후술될 로키스 락토버 시절까지 포함하면 5번의 준우승을 경험한 일본프로야구의 대표적인 콩라인이었지만 2013년 라쿠텐 소속으로 일본시리즈 우승을 경험하면서 콩라인 탈출.

2.2. 뉴욕 메츠 시절


마쓰이 가즈오의 화려했던 리즈시절,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은 그의 탈일본급 수비와 다재다능한 공격능력을 높히 샀다. 게다가 스즈키 이치로의 메이저리그 적응 성공과 마쓰이 히데키의 메이저리그 진출 선언과 맞물려 더욱 주목받기 시작했다. 실제로 2002년 미일 올스타전에서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은 두 마쓰이의 활약에 집중했다.

결국 마쓰이 가즈오도 2003년 시즌이 끝난 뒤 FA로 풀렸고 오프시즌에 뉴욕 메츠로 전격 입단하게 된다.[3] 연봉은 연평균 $6M.

많은 관심을 받으며 어메이징 메츠에 입단했지만 처음부터 주전 유격수자리를 보장받을 수 없었다. 탈일본급 수비능력, 5툴 플레이어로서 좋은 평가를 받고있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립서비스. 당시 메츠에서 애지중지 키우고 있던 호세 레예스를 메이저로 콜업시킨 상황에서 이 둘의 유격수 자리를 둔 경쟁을 피할 수 없었다. 일단은 시즌 초에 마쓰이가 유격수, 레예스가 2루수로 수비진이 운영이 됐다.

처음에는 마쓰이 카즈오가 2004년 개막전에서 메이저리그 신인으로서는 첫 타석 초구를 홈런으로 쳐낸 최초의 선수로 기록되며 메이저리그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줬지만 그의 활약은 여기까지였다. 이후 침착하게 성장한 호세 레예스가 주춤한 마쓰이의 슬럼프를 틈타 다시 유격수로 돌아왔고 결국 마쓰이는 2루수로 수비위치가 변경됐다. 그러나 타격 부진은 그 이후에도 계속 되면서 결국 시즌 후반부에 주전자리도 빼앗기며 메이저리그 첫 시즌을 마감했다.

이후 2005년 개막전에 첫 타석에서 또 한번 홈런을 기록하면서 메이저리그 첫 해의 부진을 말끔히 씻는가 했더니 다시 부진에 빠졌다. 2006년 자신의 시즌 첫 경기 첫 타석에서 일본인 최초의 인사이드 파크 호텔 인사이드 파크 홈런을 기록하는 등 3년 연속으로 첫 경기, 첫 타석, 첫 홈런을 기록, 지켜야 할 자기 자리는 못 지키고 진귀한 기록만 내는 선수로 전락했다.

결국 2006 시즌 포스트시즌을 노리고 있던 메츠는 6월 9일 마쓰이 가즈오+현금에 콜로라도 로키스로부터 백업 야수 일라이 머레로를 교환하는 트레이드 딜을 성사시킨다.

2.3. 콜로라도 로키스 시절


마쓰이는 메츠에서는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줬지만 콜로라도 로키스에서 나름 부활하며 로키스 사상 최고의 시즌의 일원으로 활약하게 된다.

로키스로 이적했을 때 가장 반겼던 사람은 바로 토드 헬튼. 마쓰이와 헬튼은 1995년 하와이 겨울 훈련에서 처음 만났는데, 당시 헬튼은 마쓰이의 수비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결국 로키스로 이적한 이후 2루수로서 괜찮은 활약을 보이며 32경기동안 타율 .345, 2홈런, 19타점, 8도루를 기록하며 다음 해를 기대하게 됐다. 시즌이 끝나고 FA로 풀렸지만 로키스와 단년계약($1.5M)을 맺었다.

2007 시즌에 종종 부상에 시달리면서 규정타석을 못 채웠지만, 타격에서의 클러치 능력이나 빈틈없는 주루 플레이와 수비를 보여주며 시즌 중반부터 주전 2루수로 활약했다. 특히 시즌 32도루를 기록해 그간 잊고있던 주루 능력이 회복됐다. 시즌 후반에는 부상으로 잠시 자리를 비운 윌리 타베라스를 대신해 1번 타자로 나서기도 했다. 그리고 포스트시즌에서 타율 .340, OPS .847를 기록하며 앞으로도 전설로 남을 락토버 첨병으로 활약하며 명예회복을 했다.

2.4. 락토버 이후

로키스에서 괜찮은 활약을 보여준 마쓰이는 크레익 비지오제프 켄트 이후 공석이 된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2루수로서 2008 시즌부터 활약하게 된다. 하지만 애스트로스의 기대와는 달리 2008 시즌 개막부터 DL에 올라간 것을 시작으로 이후에도 각종 잔부상에 시달리며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듬해인 2009 시즌 8월 15일에 미일통산 2000안타(일본 1433안타, 미국 567안타)를 기록하여 구회에 가입되기도 했지만 예전의 명성을 이을 수가 없었다. 결국 잦은 부상유리몸화?이 문제가 되어 2010 시즌 중반에 애스트로스에서 방출되고 이후 콜로라도 로키스 산하 AAA팀에 머물었다.

2.5. 현재


결국 메이저리그 생활을 접고 2011 시즌에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로 복귀했다. 등번호도 자신이 처음 프로에서 썼던 32번[4]을 달며 처음으로 돌아가는 마음으로 시즌에 임했다. 시즌 결과는 타율 .260, 9홈런[5], 48타점[6], 15도루 등 전성기보다는 한참 먼 성적을 냈다. 하지만 시즌 34개 2루타(파리그 1위), 8할대의 도루성공률 등 아직까지는 리드오프로서는 준수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2012년 야마사키의 퇴단으로 7번을 닮과 동시에 팀의 주장이 되었다.

2013년에는 개인 성적은 하락세를 겪었지만 다나카 마사히로빨을 등에 업은 소속팀 라쿠텐 이글스가 선풍을 일으키는 가운데 주전 유격수이자 주장으로서 내야진을 이끌면서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 프로 데뷔 18년만에 생애 첫 우승반지를 끼게 됐다. 

2014년부터는 나이 탓인지 외야수로 자주 나오는 편.

3. 플레이 스타일

3.1. 공격

세이부 시절 첫 해만 빼고 그의 리즈시절이라 할 수 있는 1996년~2003년 동안 평균 .313 타율, 도루 35.6개, 홈런 18.5개의 먼치킨스런 성적을 냈다. 적어도 저 시절만큼은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공격형 유격수로 봐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모든 공격 능력이 메이저리그에 시절 이후 급감했다. 이치로처럼 중거리형 똑딱이로 메이저리그에 적응하려고 했지만 사실상 실패했다. 미국 생활 마지막 해인 2010년을 제외한 2004년~2009년의 기록을 보면, 평균 .271 타율, 홈런 5.33개로 급감했다. 그나마 락토버의 일원이었던 2007년에 32도루로 여전히 빠른 발을 보여줬으나, 도루 역시 최근들어서는 감소하는 추세다. 하지만 통산 도루성공률이 8할대 중후반를 꾸준히 웃돌고 있어 리드오프로서 아직도 활용 가능하다. 최근에는 하위타선에 주로 배치되고 있다.

3.2. 수비

수비는 아직도 정상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

전성기 때는 탈일본급 운동능력으로 평가를 받았는데, 일본의 유격수 치고는 다소 큰 체격(178cm)이긴 하지만 루저(...)으로 강견에 넓은 수비 범위를 자랑했다. 어느 정도였다하면, 통상적으로 2루수가 커버하는 우중간 얕은 외야를 커버하기도 했고,[7] 3-유간의 깊은 땅볼을 노스텝으로 던져 1루에 송구해 아웃 시키는 메쟈리그 급의 플레이를 보여줬다. 골든 글러브를 4회 수상(1997, 1998, 2002, 2003)했다.

하지만 화려한 퍼포먼스 때문에 실책이 적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수비쪽에서 가 은근 있었다. 한 예로, 평론가로 활동하던 오이시 다이지로(大石第二郞)[8]는 "수비면에서는 마쓰이보다 더 견실하고 범위도 더 넓은 코사카 마코토가 골든글러브를 받아야 한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9] 이걸 보니 뉴욕의 황제님이 생각나면 기분 때문이려니. 다만, 마쓰이가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해를 보면 코사카의 출장 경기수가 적거나 부진했던 점을 감안해도, 어쨌든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일본프로야구를 풍미했던 유격수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정작 미국에 가서는 자신의 포지션인 유격수를 지킬 수가 없었다. 어메이징한 메츠에서는 졸렬한 똑딱이와의 경쟁에서 밀려 2루수로 전향했고, 이후 산동네에서는 툴로가 간판 유격수로 자리잡으면서 계속 2루수로 활약했다. 그래도 유격수로서 기본 바탕이 있어서 2루수로서도 나름 적응했고, 2루수로서의 수비능력도 인정받아 크레익 비지오, 제프 켄트 이후 제대로 된 2루수가 없어 쩔쩔매던 휴스턴으로부터 오퍼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라쿠텐으로 복귀해서는 자신의 원 포지션인 유격수로 돌아왔다.

아무튼 적어도 수비만큼은 미국 진출 후 제대로 멸망한 후배들인 니시오카 츠요시나카지마 히로유키처럼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것은 아니다.쟤들 수비가 일본에서 과연 천당이었는지는 넘어가자 주 포지션을 잃어버렸다고는 해도 호세 레예스트로이 툴로위츠키 등 그의 경쟁자들이 이후 얼마나 거물로 성장했는지를 생각하면, 그리고 마쓰이 본인이 2루수로 포지션을 옮겼어도 괜찮은 활약을 보여줬다는 걸 보면 적어도 수비 쪽에서는 실패하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4. 이모저모

  • 대표적인 한국계 야구선수다. 2008년 그의 조부인 마쓰이 지로가 화재로 사망했을 때 마이니치 계열 방송에서 처음에는 통명이 아닌 본명인 '박재윤'으로 방송이 되었고, 이후 일본 네티즌에 의해 퍼져나갔다. 이로서 타의로 한국계 인증. 그리고 이 사건으로 또 다른 마쓰이도 한국계 썰이 나돌았다.[10]

    사실 이 사건 전에 마쓰이는 자신이 한국계라는 얘기를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지만, 재일 야구인 사이에서는 한국계라는게 정설이었다.

  • 본명 한자표기는 松井和夫다. 프로 1년차 때는 자신의 본명을 등록해서 썼지만 워낙 흔한 한자표기이다보니 이후 이름만 '稼頭央'으로 바꿔 등록해 지금까지 쓰고있다. 稼頭央으로 지은 이유는 일본프로야구계에서 최고의 선수가 돼 중심에 오르겠다는 의미로 지었다고 한다. 이름에 들어있는 한자만 봐도 '머리 두'에 '가운데 앙' 자다.

  • 한편 미국에서는 Kaz Matsui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11][12] 아무래도 먼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고지라와의 구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추가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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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왼쪽은 등록명, 괄호 안은 본명이다. 둘 다 발음은 똑같다.
  • [2] 일본프로야구 20세기 센츄리 베스트 나인 선정자 : 투수 에나츠 유타카, 포수 후루타 아츠야, 1루수 오 사다하루, 2루수 오치아이 히로미츠, 3루수 나가시마 시게오, 유격수 마쓰이 가즈오, 외야수 장훈, 스즈키 이치로, 마쓰이 히데키
  • [3] 같은 시기 이승엽도 FA로 풀려 해외진출을 타진하고 있어 여러모로 비교대상이었는데,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 전 국내 모 방송과 인터뷰를 갖기도 했다.
  • [4] 그런데 마쓰이가 돌아올 당시 7번은 야마사키 타케시가 쓰고 있었다. 그리고 2011 시즌이 끝나고 야마사키가 주니치로 이적하면서 7번으로 바꿔 달았다.
  • [5] 그런데 이게 팀 2위 기록. 아무리 2011 일본프로야구가 최극악의 투고타저 시대였다곤 하지만 이건 너무 심했다.
  • [6] 이건 팀내 공동 1위. 물빠따 라쿠텐.
  • [7] 마쓰이가 데뷔할 당시 세이부의 2루수는 지 하츠히코였다. 츠지는 전성기 시절 되려 유격수의 수비범위를 야금야금 뺏어먹는 아크로바틱한 수비를 펼쳤지만 세월 앞에서는 장사 없었고, 결국 마쓰이 가즈오는 츠지가 커버하지 못하는 수비범위를 보완했고, 이러한 플레이는 츠지가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이적하고 나베 노리오카기 히로유키등이 2루를 맡았을 때도 계속되었다.
  • [8] 킨테츠 버팔로즈 출신의 2루수, 2008 ~ 2009년 오릭스 버팔로즈 감독을 맡기도 했다.
  • [9] 코사카 마코토는 억울하게도 소속팀의 성적과 안습한 타격 때문에 저평가 받아왔다. 하지만 교진군으로 가서는 시망. 결국 니오카 토모히로의 백업으로 전락(...) 참고로 일본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골든 글러브는 수비위주로 주는 상이다. 각 포지션에서 가장 뛰어난 공격력을 보인 선수에게는 미국의 실버 슬러거처럼 베스트 나인 상이 수여된다. 그래서 비록 타격이 안습이지만 코사카에게 수상자격이 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 한국에도 도입이 시급합니다.
  • [10] 하지만 꼭 이 사건 때문인 것만은 아닌게, 마츠이 히데키의 아버지 마쓰이 마사오가 기독교계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점과 마쓰이 히데키가 자주 갔던 불고기 음식점의 사장님이 한국계라는 점 때문에 마쓰이 히데키도 한국계라는 썰이 퍼졌던 것이다.
  • [11] Kaz Matsui는 주로 언론에서 많이 쓰던 이름이었고, 실제는 자신의 이름 영어표기 그대로 등록됐다.
  • [12] 미국 언론에서 메이저리그에서 발음과 표기가 쉽지 않은 동양계 선수들의 이름을 저런 식으로 짧게 쓰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카 토모카즈로 오카는 '오카 토모'로 국내외 언론에 소개됐었다. 캔자스시티에서 뛰던 스즈키 마코토도 Mac Suzuki로 불려졌다. 봉중근도 한동안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언론에서 Jung Bong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