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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코 황후

last modified: 2019-06-05 21:51:17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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雅子皇后

일본황족. 나루히토 덴노의 황후. 결혼 전의 이름은 오와다 마사코(小和田雅子).[1] 일본의 前 외교관이며 현재는 일본의 황후이다.

1963년 12월 9일생. 황실로부터 받은 문양은 해당화(ハマナス).

Contents

1. 어린 시절
2. 하버드 대학교 졸업 및 외무고시 합격
3. 나루히토 친왕과의 만남과 결혼
4. '불행의 연속' 이었던 황태자비의 삶
5. 일본 황실의 혼란과 마사코 황태자비의 고통
6. 기타 이야기 및 세간의 평가


1. 어린 시절

아버지 오와다 히사시(小和田恆)[2]도쿄대학 출신의 외교관[3]이며, 어머니 오와다 유미코(小和田優美子)[4]게이오기주쿠대학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한 후 에어 프랑스에 근무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마사코는 1963년 히사시와 유미코의 3녀 중 장녀도쿄에서 태어났다. 마사코가 2살 때 아버지는 모스크바로 발령을 받았다. 마사코는 현지에서 유치원을 다니며 러시아어를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었다. 스위스 제네바에 살던 1966년 7월에는, 쌍둥이 여동생들이 태어났다. 아직 어린 아기였던 마사코에게 한꺼번에 동생이 2명이나 생긴 것. 마사코는 큰언니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면서 일찌감치 강한 책임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자신의 고민을 내색하지 않고 스스로 다스리는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5살 때부터는 뉴욕에서 살면서 영어를 배웠다. 히사시와 유미코는 외국 생활을 하는 중에도 딸들이 일본을 잊지 않게 하려고 나름대로 애썼다. 일본어를 가르치고, 일본 요리를 먹이고, 기모노를 입히고, 일본의 전래동화를 읽어주고, 일본의 전통과 문화를 가르치는 등등. 그럼에도 마사코는 일본으로 귀국한 후 문화충격으로 다소 혼란을 느꼈다고 한다.

8살 때 귀국한 마사코는 공립 초등학교 2군데를 거쳐 가톨릭계인 덴엔쵸후 후타바(田園調布雙葉) 여학원[5] 초등학교 3학년에 편입, 동(同) 학원에서 고등학교 1학년까지 다녔다. 마사코는 우수한 성적에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인기가 많았으며, 수예부ㆍ생물부ㆍ소프트볼 팀 등에서 활약했다. 중3 때는 소프트볼 팀을 조직하여 열심히 연습, 대회에 나가 우승까지 하는 등 운동능력과 리더십을 보였다. 또한 이과 과목에서 뛰어난 성적을 올려, 고1 때 담임교사는 마사코에게 의대 진학을 권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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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4월, 덴엔조후 후타바 여학원 중학교에 입학한 마사코. 아버지 히사시, 어머니 유미코, 동(同) 학원의 초등학교 4학년이 된 쌍둥이 여동생 이케다 레이코(池田禮子)ㆍ시부야 세츠코(澁谷節子)와 함께.[6] 동생들 이름이 참 예절 바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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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이후로 보이는 가족 사진. 앞줄 오른쪽이 마사코.

2. 하버드 대학교 졸업 및 외무고시 합격

마사코가 고1 때 아버지는 다시 미국으로 발령을 받아, 오와다 일가는 미국으로 이주했다. 마사코는 매사추세츠 주의 Belmont 고등학교 1학년에 편입했다. Belmont 고등학교에서도 합창ㆍ수학ㆍ소프트볼 등 여러 동아리 활동을 활발하게 했으며, 미국인 학생들을 따라잡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여 여러 명문 대학에 합격했다. 마사코는 그 중에서 하버드 대학교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그녀는 대학 기숙사에 살며 학업과 여러 활동을 열심히 하였으며, 국제무대에서 일할 꿈을 가지고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 외국어도 공부했다. 그리고 1985년 6월, 우수한 성적으로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7]하였다. 미국에서 좋은 기회가 많았지만, 어린 시절의 많은 기간을 외국에서 자라난 마사코는 일본을 더 잘 알아 정체성을 찾고 싶어서 귀국했다. 그 기회들을 다 뿌리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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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대학교 졸업식에서.[8]

도쿄대학 법학부에 편입하여 다니던 마사코는 외무고시를 준비, 1986년 10월 단 한 차례로 당당히 합격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외무성에 입성하게 되었다. 부녀(父女) 외교관의 탄생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외교관이 된 이유는, 일본에서도 남녀가 차별을 받지 않고 동등하게 일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본을 남녀 차별이 없는 나라로 만들고 싶습니다!!" 라고 딱 부러지게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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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으로 활동하던 당시.

이렇게 마사코는 촉망받는 외교관이었고 그녀의 성공을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3. 나루히토 친왕과의 만남과 결혼

1986년 10월 스페인 엘레나 공주의 영접식에 참석한 신입 외교관 마사코는 그 자리에서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바로 그는 쇼와 덴노의 장손 히로노미야 나루히토 친왕.[9] 나루히토 친왕은 그 자리에서 마사코를 보고 호감을 느끼게 된다.

나루히토 친왕은 마사코와 만남을 지속하게 되었고, 그녀에게 청혼하였다. 그러나 마사코는 외교관으로서 커리어 우먼의 인생을 살고 싶었기에 청혼을 거절한다. 게다가 마사코의 외할아버지 에가시라 유타카(江頭豊)미나마타병 추문을 일으킨 칫소 사(社)의 회장이었기 때문에, 마사코는 신붓감 후보 목록에서도 사라지게 된다. 그 외에 나루히토 친왕보다 키가 크다는 점, 딸만 낳은 가정이며 쌍둥이를 낳은 가정 출신이라는 점도 흠이 되었다.

마사코의 집에서도 반대를 하였다. 일본 황실에 시집가면 엄청 빡센 시월드의 왕따에 혼수[10]로 집안 기둥뿌리가 뽑히고, 현대 일본 안의 1천 년 전 세상이 그놈의 황실이니[11] 누가 그런 시월드에 가는 짓을 하고 싶겠는가?

나루히토 황태자는 단념하고 새로운 신붓감을 물색하였으나 결국 마사코를 포기하지 못하였고, "마사코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언한다. 황실은 뒤집어졌고, 마사코는 주변의 엄청난 직간접적 압력에 시달리게 되었다.[12] 나루히토 황태자는 몇 번이나 더 청혼하였고 결국 마사코는 청혼을 받아들이게 된다. 약 7년간 청혼하고 거절당하고 청혼하고를 반복했다고 하니 그저 흠좀무.

참고로 마지막으로 프로포즈할 때 했던 말이 "전력을 다해 당신을 지키겠습니다!"였다고. 이 말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엄청난 유행을 불러왔고, 1990년대 일본 남자들이 프로포즈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말이 되었다. (요즘도 쓰는 사람이 있다!!)

1993년 1월 19일 일본 황실이 두 사람의 약혼을 공식적으로 언급하였고, 같은 해 6월 9일 결혼식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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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기자회견 당시 모습. 마사코는 본래 개성 넘치는 멋쟁이였으나,[13] 이때부터 일본 황실 특유의 촌스러운 패션(…)을 따라야만 했다. 그러나 옷은 바뀌었어도 알맹이는 당장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여자가 감히 자기주장과 의견을 이야기하였다고, 게다가 신랑감인 나루히토 황태자보다 길게 말했다고 비난을 받았다. 뭐 이런 미친…

"이렇게 남편을 깎아내리는 여성은 일본 여성이 아니다!!" "나루히토 황태자가 3마디를 말하면, 마사코는 1마디만 말해야 한다!!"는 등등. 참고로 나루히토 황태자보다 길게 말한 시간은 불과 19초(…)였다. 겨우 19초 가지고 비난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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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앞두고 있을 무렵, 미혼 여성의 예복인 후리소데를 입은 마사코. 아버지 히사시, 어머니 유미코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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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에서. 보시다시피 마사코 황태자비가 나루히토 황태자보다 키가 더 크다.[14] 우익들은 애써 "나루히토 황태자가 2cm 가량 더 크다"고 주장한다는데, 가 웃을 일이다. 반대로 황태자비가 2cm 더 커 보인다면 맞겠다만. 또한 마사코 황태자비의 웨딩드레스는 목 부분이 장미 꽃잎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신부가 한 송이 처럼 보이게 하려는 디자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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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날의 마사코 황태자비.

4. '불행의 연속' 이었던 황태자비의 삶

나루히토 황태자와 오와다 마사코의 결혼은 일본 최대의 이슈였다.[15] 이미 나루히토 황태자보다 5살이나 어린 남동생 후미히토 친왕은 형의 결혼을 기다리다 3년 먼저 결혼, 까지 하나 낳은 상황이었다. 모든 일본인들이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했고, 마사코 황태자비가 엘리트 외교관 출신이라는 사실은 그녀에 대한 기대를 높여주었다.

그러나 마사코 황태자비는 결혼 직후부터 2가지 난제에 부딪히게 된다. 일본 황실의 보수성아들 출산이 바로 그것이다.

마사코 황태자비는 다른 서양의 왕족들처럼 황태자비로서 해외순방, 국제교류 등을 통하여 일본의 외교에 보탬에 되고 싶었다. 나루히토 황태자는 일본의 황족들이 나라의 외교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황태자 부부는 이 점에서 의견이 일치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 황족들의 해외 순방은 서양 왕실의 그것보다 형식적인 성격이 더 강했다. 거기에 일본 황실보수적인 일본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입장에 남존여비가 심해서, 여성 황족들의 사회생활은 엄격히 금지(or 자제)되며 단순히 남편을 내조하는 역할만을 요구받았다. 미국에서 오랜 시간을 성장하며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을 가졌던 마사코 황태자비에게는 넘을 수 없는 가치관의 차이였다.

마사코 황태자비가 했던 단순한 행동, (외국인이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함 그 자체인) 인터뷰[16] 등이 오만한 것으로 지적받기까지 할 정도다. 그녀가 나루히토 황태자보다 키가 조금 더 큰데, 그것을 옳지 못하다고 지적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17] 이런 가치관의 차이로 마사코 황태자비는 황실과 계속 충돌, 갈등하게 된다.

또한 마사코 황태자비는 황실의 다른 여성들과는 달라서 어려움이 있었다. 모두 대학을 졸업하긴 했지만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는 영문학, 아랫동서 키코 비심리학, 시누이 사야코 공주는 일문학을 전공했다. 즉 여성들이 좋아하는 전공과목들이다. 하지만 마사코 황태자비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도쿄대학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법학 및 정치학, 국제관계 등을 공부했다.

그리고 사야코 공주는 대학을 졸업한 후 조류 연구소에 근무하기도 했지만, 미치코 황후키코 비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황실로 시집왔다. 직업을 가진 여성이 황실로 시집온 것은 마사코 황태자비가 최초였다. 게다가 키코 비는 형님 마사코 황태자비보다 3년이나 먼저 시집와서 황실에 적응해 있었으며, 황실 학교인 가쿠슈인에 다니던 학창시절부터 황실 가족들과 돈독한 친분관계를 맺어오고 있었다. 마사코 황태자비는 그 틈에 끼기 어려웠다.

하지만 마사코 황태자비를 더 괴롭혔던 것은 바로 아들 출산의 문제였다. 1965년 후미히토 친왕이 태어난 이래 일본 황실에는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고, 딸들만 줄줄이 태어나고 있었다. 따라서 만세일계의 혈통을 이을 후계자, 즉 황태자의 아들을 낳는 것은 황태자비의 가장 큰 의무였다. 그러나 당시로써는 늦은 나이에 결혼한 황태자 부부에게 아이는 쉽게 생기지 않았고,[18][19] 그럴수록 주변의 심한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임신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궁내청에서 마사코 황태자비의 해외 순방을 허용하지 않는 등 생활을 엄격하게 제약하자, 마사코 황태자비는 대상포진우울증스트레스성 질병에 시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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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무렵의 마사코 황태자비. 그녀의 표정에서 고뇌가 다 느껴질 정도(…)

여러 번 유산을 했으며, 2000년에는 유산 후유증 때문에 시할머니인 나가코 태후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기도 했다.[20] 오랜 불임 끝에 그러다 결국 2001년, 임신이 되었다. 전 일본이 마사코 황태자비의 임신에 주목하였고 아들의 탄생을 바랐지만, 딸이었다. 2001년 12월 1일에 태어난 이 딸이 바로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이다. 아이코 공주를 낳은 후에도 마사코 황태자비는 아들을 낳아야 한다며 임신을 권유(라고 쓰고 '강요' 라고 읽는다)당했으나, 아이코 공주를 낳을 때도 노산이었던 데다가 스트레스를 받으니 임신이 될 리가 있나(…) 이후에는 더 이상 자녀를 낳지 못하였다.

5. 일본 황실의 혼란과 마사코 황태자비의 고통

마사코 황태자비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제약받고 아들 출산을 강요당하면서 각종 스트레스성 질병에 시달리게 되었고, 결국 우울증을 이유로 모든 공식 활동을 중지하고 장기간 칩거에 들어간다.[21] 나루히토 황태자는 이러한 압력에 대하여 일본 황족으로서는 드물게 "황실 내에 마사코 황태자비의 인격을 부정하는 세력이 있습니다!!"라는 발언을 하여, 아내를 부당하게 음해하는 세력이 있음을 공개적으로 시사하고 마사코를 지켜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 내에서는 발언의 직설성과 "황태자가 보호하는 황태자비를 부정할 수 있는 세력이란 덴노 내외뿐이지 않느냐??"는 점에서 논란이 일었다. 이 발언은 결혼 10년이 지나면서 황실과 마사코 황태자비의 불편한 관계에 다들 지쳐있을 때쯤이라, 나루히토 황태자의 충격적인 발언을 계기로 마사코 황태자비의 호감도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남동생 후미히토 친왕의 비난과 아버지 아키히토 덴노의 질책까지 들어 대단히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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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나루히토 황태자와 딸 아이코 공주와 함께 찍은 사진. 아이코 공주의 첫돌 무렵. 그래도 훈훈해 보인다.

마사코 황태자비는 칩거 중에도 무남독녀 아이코 공주를 정성을 다해 양육하였으며, 아이코 공주는 무럭무럭 자라서 2006년 4월 가쿠슈인 유치원에 입학하게 된다.[23] 이런 도중에 일본 정부는 남자 황족의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황실전범을 개정하여 여자 황족에게도 황위 계승권을 인정하려 하였고, 그 당시 일본 수상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이에 대하여 어쩔 도리가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렇게 된다면 아이코 공주가 제2계승자가 되고 장래 여왕이 되므로, 여론의 관심은 아이코 공주에게 집중되었다. 그런데 황실전범 개정을 논의하기 일주일 전 시동생 부부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가 셋째 임신을 발표함으로서 황실전범 개정은 흐지부지되고, 2006년 9월 6일, 늦둥이 아들이 태어났다. 그 아들이 바로 히사히토 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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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2월 1일 아이코 공주를 낳은 마사코 황태자비(왼쪽)와, 2006년 9월 6일 히사히토 친왕을 낳은 키코 비(오른쪽). 병원[24]도 다르고 5년이라는 시간의 차이도 있건만, 옷과 포대기는 물론, 목걸이귀걸이마저 통일했다.(…)

히사히토 친왕의 탄생 후 황태자 일가는 쩌리 신세가 되어버렸다. 모든 황족들과 국민들의 관심은 히사히토 친왕과 차남 일가에게 집중되었고, 황실전범 개정 움직임은 쏙 들어갔다. 이후 히사히토 친왕의 아버지인 후미히토 친왕은 덴노 부부의 총애를 등에 업고 황실에서의 발언권이 강화되었으며, 나루히토 황태자와 아키히토 덴노&후미히토 친왕의 사이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히사히토 친왕의 탄생 이후, 세인들은 마사코 황태자비가 아들 출산의 압력에서 벗어나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확실히 언론과 황실의 관심에서 벗어나서 그런지는 몰라도, 마사코 황태자비는 조금은 건강을 회복하여 공식 석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찍힌 사진 같은 것을 비교해보면 확실히 얼굴이 좋아진 게, 차라리 본인은 히사히토 친왕의 탄생 이후 본인에게 지워진 부담과 긴장을 덜어낼 수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된 모양.

그러나 아이코 공주가쿠슈인 초등과 2~3학년 시절, 학교에서 왕따[25]를 당하여 등교 거부를 하는 등 순탄치 않은 학교생활을 하였다. 다행히 고학년에 들어서는 학교생활에 적응하고 성적도 우수하다고. 과연 하버드 대학교 출신의 어머니를 닮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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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동서 키코 비와 함께. 두 사람 모두 세월이 느껴진다.

6. 기타 이야기 및 세간의 평가

일본 사회에서도 마사코 황태자비를 안타깝게 여기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일본 사회가 보수성이 강하다 보니, 적극적으로 그녀에 대한 동정 여론이 활발하게 전개되지는 않는 모양. 오히려 그녀에 대한 동정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는 측은 외국 언론들이다. 독일일본의 언론인이 집필한 <일본 왕실에 갇힌 나비 마사코>라는 그녀의 일대기를 담은 책이 출판되어, 일본 황실을 비판하고 마사코 황태자비에 대한 동정 여론을 펴기도 하였다. 한국에도 번역되어 출판되기도 했다.

마사코 황태자비는 일본의 모순에 희생당한 전형적인 경우로 볼 수 있다. 그나마 국왕과 국민, 의회가 충돌, 대립하고 투쟁하고 국왕이 자발적으로 왕권을 포기하여 입헌군주제, 의원 내각제등 정치 개혁이 실현되고 구습 잔재들이 상당부분 타파된 유럽의 군주국들과 달리[26], 일본메이지 유신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 되는 등의 정치적인 격동을 겪었으나 국가 자체가 크게 변화하거나 정치 개혁이 이루어진 적은 거의 없었다.[27] 부락민 항목에서 알 수 있듯 일본은 과거의 악습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자민당 1당 정권의 유지 등에서 알 수 있듯 이념 성향 자체가 매우 보수적인 편에 속한다. 특히 일본 황실은 '살아 있는 일본 전통의 상징'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마사코 황태자비는 서구적이고 현대적인 사고방식의 전형적인 커리어 우먼이었고, 애초부터 일본 황실과는 전혀 맞지 않는 여성이었다. 어찌 보면 황태자와의 결혼이 한 촉망받는 여성 외교관의 일생을 망쳐버린 것이라고까지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불행이라고 할 수 있으나, 아무튼 요양 생활이 10년 이상 지속될 정도로 오래 이어지면서 일본 내의 여론도 마사코 황태자비에 대한 여론은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지금으로서는 '좋게 봐서 폐인, 나쁘게 보면 남편에게 실드 받는 한없는 게으름뱅이' 로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 황실은 국비로 생활을 지원받는 입장이다 보니 아무런 대외활동도 없는 모습이 오래 지속되면서 국민 여론도 악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 하지만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워낙 동정론이 많이 불고 있어, 동정적인 기사를 내보내는 곳도 상당히 많아졌다.

나루히토 황태자에 대해서는 별 비난 여론이 없는데, 그는 아내의 입장에 서서 지속적으로 아내를 지켜주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래야지!! 애초에 저렇게 된 게 다 누구 때문인데 위에서 서술된 인터뷰 사건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애처가인 나루히토 황태자가 아내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애초에 일본 황실은 인터뷰에서 절대 저런 직설적인 말을 하지 않는다. 저 인터뷰는 상당한 후폭풍을 불러일으켰으며 궁내청이 해명하는 상황까지 발생하였다. 이후 나루히토 황태자는 지속적으로 아버지 아키히토 덴노 와의 불화설에 시달리게 된다. 심지어는 아키히토 덴노가 나루히토 황태자를 폐위하고 차남 후미히토 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할 것이라는 설까지 나돌았을 정도. 게다가 나루히토 황태자를 지지하는 측에서도 "제위를 지키시려면 이혼하고 젊은 여자를 새 황태자비로 맞아 아들을 낳으셔야 합니다."!!라며 나루히토 황태자를 압박하고 있는 상황이다.

2013년에는 결혼 20주년을 맞은 마사코 황태자비의 요양이 10년째 이어지자 치료가 해를 넘겨 계속되면 적응장애가 아니라 우울증일 가능성이 높다며 황태자 부부의 분가 생활이나 여름 해외 요양 등 보다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하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2013년 3월에는 '황실을 위해서 나루히토 황태자가 퇴위하라' 는 주장이 나왔다. 명목상 개인의 의견이라고는 하지만 일본에서 황실과 관련해서 어떤 분위기인지 알면 이게 절대로 한 개인의 의견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나루히토 황태자의 53세 생일 기념 공식사진 촬영 때 마사코 황태자비와 아이코 공주가 함께 사진을 찍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 사실상 나루히토 황태자의 퇴위나 강제이혼만이 남은 것 아니냐는 관측이 있지만 퇴위는 나루히토 황태자 스스로 결단을 내려야 하는 건데 그럴 가능성이 없거니와[28] 강제이혼을 가만히 당할 만큼 나루히토 황태자의 성격이 호락호락하지는 않다.[29]

세간의 인식과 남편과 딸의 입지문제를 인식한 탓인지 공식 활동을 늘리고 있다.# 적응장애에 대해서도 완치를 위해 계속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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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무남독녀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가쿠슈인 여자 중등과 입학식에서.

그리고 최근 기사에 따르면, 마사코 황태자비의 공무 참석 횟수가 많이 증가한 배경으로 아이코 공주의 독보적인 성적을 들 수 있다고 한다. 연일 기사에서는 아이코 공주의 성적에 대해 칭찬 일색이고, 황족 중에서 제일 머리가 좋다는 등 딸의 심상치 않은 성적이 마사코 황태자비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것으로 보인다. 아이코 공주는 향후 도쿄대학을 노릴 수 있을 만큼 가쿠슈인 초등과에서도 최상위권의 성적이라는데, 역시 어머니를 닮은 듯 여기에는 황태자 부부의 영재 교육이 뒤따랐다고 한다. 이를 두고 저널리스트는 아직 "황태자 부부가 아이코 공주여왕 즉위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도 염두하고 있는 것"이라고 추측을 하기도 했다. 만약 아이코 공주도쿄대학에 합격한다면, 아버지 나루히토 황태자가 덴노 지위를 승계하게 된 이후에는 확실히 황실 내에서 반격을 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흥미진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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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네이버에서는 '오와다 마사코'라는 결혼 전 본명으로 나와 있긴 하다. 아랫동서 키코 비도 마찬가지.
  • [2] 히사시의 아버지 오와다 다케오(小和田毅夫)는 교사였으며, 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 [3] 2009년 2월 6일 국제사법재판소장으로 선출되었다.
  • [4] 유미코의 아버지 에가시라 유타카(江頭豊)는 미나마타병으로 물의를 일으킨 칫소 사의 회장을 역임했으며(단, 유타카는 사건이 일어난 후에 부임했다고), 할아버지 에가시라 야스타로(江頭安太郞)는 해군 중장이었다.
  • [5] 친정어머니 유미코와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초등학교)도 이 학교를 다녔다.
  • [6] 레이코는 UN 난민고등판무관 사무소에서 근무했으며, 세츠코는 번역가이자 문화인류학자이다. 레이코는 2000년에 변호사 이케다 마사히사(池田祐久)와, 세츠코는 1999년에 도쿄대학 출신의 의사 시부야 켄지(澁谷健司)와 결혼했다.
  • [7] 졸업 논문의 제목은 <수입 가격 쇼크에 대비한 국제 간 조정>이었는데, 이 논문은 나중에 일본 외무성의 참고자료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 [8] 이 때는 그녀가 살을 빼기 전으로, 외무고시를 합격한 뒤 살을 빼면서 본격적으로 미모가 드러났다. 흠좀무.
  • [9] 1991년 2월 23일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 [10] 재벌 가문의 딸인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는 6t 트럭 3대 분량, 요즘 시세로 3억 엔 어치의 혼수를 들고 시집왔다. 가쿠슈인 대학 교수의 딸인 아랫동서 키코 비도 혼수깨나 들고 시집왔는데, 대학 교직원용의 작은 아파트에 살았던지라 혼수품을 보관해 둘 공간이 없어 애먹었다고 한다.
  • [11] 일본 황실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이 말은 절대로 과장이 아니다. 현대 한국에 고질적으로 잔류 중인 남존여비 의식은 아예 철없는 투정으로 보일 수준.
  • [12] 황실의 끈질긴 청혼에 못 이겨 시집와서 모진 시집살이를 겪은 점은,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와 비슷하다.
  • [13] 이 부분은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도 마찬가지이긴 했다.
  • [14] 실제로 現 일본 황실에서는 시동생 후미히토 친왕 다음으로 키가 크다. 윤종신 전미라 부부
  • [15] 사실 일본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당시 꽤나 큰 관심사를 불러일으켰다.
  • [16] 약혼 발표 기자회견 때 마사코가 나루히토 황태자보다 불과 몇 초 길게 말했다 하여 비난이 쏟아졌을 정도였다. "이렇게 남편을 깎아내리다니!!" 라는 등등.
  • [17] 그래서 마사코 황태자비는 공식 석상에서 언제나 낮은 굽의 구두를 신는다. 사진을 확인해보라.
  • [18] 1993년 결혼 당시 나루히토 황태자는 33세, 마사코는 30세였다. 요즘으로 치면 그다지 늦은 결혼도 아니지만 19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꽤 늦은 결혼이었고, 당시 일본인들의 평균 결혼연령보다 높은 편이었다. 더군다나 시동생 부부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는 이미 1990년에 결혼하여 이듬해에 까지 하나 낳은 상태였기 때문에 더욱 늦은 편이었다.
  • [19] 일본 황실의 비(妃)가 되는 여성들은 결혼 전에 일정한 교육을 받는데, 마사코 황태자비는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 때보다 교육 기간도 짧았고 배운 과목도 적었다. 이는 하루빨리 결혼시켜 후사를 보기 위함이었다. 또한 "옛날에 비해 오늘날 사람들의 건강과 영양 상태가 훨씬 좋으니, 임신에 큰 문제가 없다"고 말한 의사들의 전문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황실과 궁내청 측에서는 수천 년 된 관습에 따라 30세의 오와다 마사코가 임신하기에는 너무 나이 들었다고 간주하였다고 한다.
  • [20]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와의 고부갈등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 [21] 궁내청과 덴노 내외에 의한 '감금' 이라는 설도 있다.
  • [22] 황실이 덴노를 위해 존재하는데 훗날 나루히토 황태자가 덴노가 된다는 것을 고려했을 땐 누워서 침 뱉기였다고 볼 수 있다.
  • [23] 실제 황태자 부부의 유일한 낙이 아이코 공주의 성장이었다고까지 나올 정도.
  • [24] 아이코 공주는 궁내청 병원, 히사히토 친왕은 아이쿠(愛育) 병원에서 태어났다.
  • [25] 일각에서는 아이코 공주의 왕따 사건 뒤에, 숙모인 키코 비가 연루되어 있다고도 한다.
  • [26] 대표적으로 스페인, 덴마크, 영국, 노르웨이, 스웨덴, 네덜란드 등등
  • [27] 임진왜란 때와 상황이 뒤바뀐 셈.
  • [28] 아이가 없다고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문제가 없는 적장자를 왕위계승에서 배재한다는 것은 고대에도 없었던 일이다. 이런 경우에는 보통 동생에게 계승하거나 조카나 적당한 친척을 양자로 맞아들여 해결한다.
  • [29] 만일 가만히 당할 사람이었으면 1993년에 기어이 마사코와 결혼했을 리가 없다. 황태자임에도 불구하고 7년 동안 계속해서 청혼했다는 점을 본다면 그 역시 여간내기는 전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