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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하브

last modified: 2015-01-31 02:05:37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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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개관
2. 최초의 분파
2.1. 역사와 사상관
2.2. 과격화
3. 수니파
3.1. 하나피
3.2. 샤피이
3.3. 한발리
3.4. 말리키
3.5. 자히리
4. 시아파
4.1. 자파리(열두이맘파)
4.2. 자이디(다섯이맘파)
4.3. 이스마일(일곱이맘파)
4.4. 알라위
4.5. 드루즈
5. 그 외
5.1. 이바디
5.2. 수피즘


1. 개관

마드하브(Madh'hab, مذهب)는 이슬람 신학이나 법의 해석에 차이를 보이는 주장들을 총체적으로 부르는 말로, 우리말로 의역하자면 '학파'의 의미에 가깝다.

8~9세기 많은 마드하브가 난립하였으나, 신학적 논쟁과 무력충돌(...)을 겪으면서 현재는 7~8개의 학파로 대충 정리된 상태이다. 2004년 요르단의 암만에서 압둘라 2세의 주재 하에 200명이 넘는 이슬람 학자들이 모여 8개의 마드하브를 공인하였다.[1]

아래의 항목에서는 공인된 8개의 마드하브를 서술한다. 그 이전에 존재하였던 역사적 마드하브나 공인받지 못한 마드하브는 추가바람

종파와 혼동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이슬람에서는 학파가 다르더라도 이들 모두를 같은 무슬림으로 인정하고 있다.

2. 최초의 분파

2.1. 역사와 사상관

여러 마드하브를 참고하기 전에, 이슬람에서의 최초의 분파인 카와리지파에 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들을 이해하기 전에 왜 수많은 마드하브가 난립하였는지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3대 칼리프 오스만이 암살되자, 알리가 칼리프직을 승계받았다. 몇몇 무리들은 알리를 반대하며 오스만의 살해자들에 대한 강경한 복수를 요구하였다. 시리아 지역에서 우마이야집안을 중심으로 무아위야가 반란군을 조직하여 무장봉기를 하였다. 당시 전세는 무아위야가 극도로 불리했으나, 무아위야군은 꾸란을 높이 쳐들고 '꾸란의 심판에 따르자'며 알리에게 평화협상을 제기하였다.

알리는 더이상의 유혈분쟁을 막기 위해 다 이겨가는 전쟁이었음에도 이를 받아들였는데, 당시 주전론자들이 알리에 반대하기 시작했던 것. 알리가 암살되어 정통 칼리프 시대가 막을 내리고 무아위야가 정권을 차지하면서 이들의 적개심은 극에 달했다. 이들을 카와리지라고 한다.[2]

카와리지들은 알리가 중재협상에 임하기 전까지의 칼리파제는 옳은 것으로 인정하나 그 이후는 부당한 것으로 탄핵당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연히 그 이후의 우마이야 가문들의 칼리파들은 말할 것도 없다.

카와리지는 '꾸라이시 가문의 혈통이 있어야 칼리파가 될 수 있다'는 수니파의 주장이나, '무함마드의 혈통을 직접 이어받아야만 될 수 있다'는 시아파의 주장을 모두 배격하고 혈통이나 신분, 재산에 상관없이 깨끗한 인격을 가진 자면 모두가 칼리파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당시 차별받았던 비아랍인들에게는 매력적인 사상이였다.

카와리지는 칼리파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선거로 선출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만약 선출된 칼리파가 불의하거나 이슬람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면 즉각 탄핵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인간의 통치권은 전지전능하신 알라로부터 나올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것이 발전되면 현재는 알라의 인정을 받은 통치자가 없다라는 아나키즘적 논리로 빠지게 된다.

그당시에는 선진적이었던 민주주의, 평등주의적 관점으로 인해 차별받는 비아랍인들이 지지하였으나, 우마이야 왕조의 중앙집권화가 가속화되고 카와리지들이 힘을 잃게 시작하면서 정치적인 운동보다는 종교적 극단주의의 길로 빠져들었다.

2.2. 과격화

우마이야 왕조는 100년만에 멸망하였으나 카와리지들의 꿈은 실현되지 못하고 똑같이 세습 칼리프제인 아바스 왕조가 건설된다. 9~10세기쯤 되면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전제 군주제에 순응하게 되었다. 카와리지들은 당연히 이에 반대하였고, 현실에 순응하는 자들은 배교자로 간주되었다.

문제는 카와리지들이 간주하는 배교자들이 '거의 대부분의 무슬림'이었다는 것. 카와리지들은 이들 모두를 죽이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카와리지들은 기독교나 유대교의 이교도나 심지어 무신론자들보다도 '배교자'들을 혐오했다고 한다. [3]

결국 이러한 과격성과 신비성때문에 무슬림 공동체의 주류가 될 수 없었고, 이들은 항전을 계속하였으나 온건파였던 이바디를 제외하고는 모두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3. 수니파

3.1. 하나피

8세기의 이슬람 학자였던 아부 하니파에 의해 결성된 학파로, 가장 역사가 긴 학파이고, 가장 영향력이 크다. 터키,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를 비롯한 중앙아시아에 널리 퍼져있다.

종교의 학파지만 이성을 매우 중요시하며, 가장 관용적인 학파다. 실제로 지방민들의 토착관습을 존중하기 때문에 주민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었으며, 서구의 자유민권사상의 유입도 가장 찬성하는 학파. 문제는 부정적인 관습도 똑같이 존중한다. 덕분에 아프가니스탄이나 파키스탄에서는 여자를 돌로 쳐죽이는 것이 횡행하는 중. 4대 칼리프인 알리가 이슬람 제국의 수도를 이라크의 한 도시인 쿠파로 옮겼기 때문에, 하나피 학파의 많은 가르침도 그곳에서 전승되었고, 초기엔 이라크 학파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즈마(ijma)를 높게 쳐주는 학파기도 하다. 이즈마는 직역하면 합의라는 뜻으로, 즉 꾸란이나 하디쓰에 언급돼있지 않더라도 금지된 것이 아니라면 무슬림 공동체에서 임의로 합의한 사항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며[4] 실제로 하나피 학파의 국가들은 상당수가 세속화되었다. 여성의 사회진출에도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 이슬람 법학자가 되는 것도 가능하다.

이외에 기타 특징으로는 해산물 중 비늘이 없는 물고기(문어나 새우같은)는 하람으로 금지한다는 점, 몇몇 학파는 긴 여행중일 경우 예배를 잠깐 미뤄두는것을 허용하지만, 하나피 학파는 예배를 반드시 제 시각에 근행하여야 한다는 것, 위트르라고 하는 여섯번째 예배가 있는 점,[5] 결혼을 하는데 종교 지도자의 허락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들이 있다.

3.2. 샤피이

동남아시아, 동아프리카에 주로 분포해 있으며 무슬림 인구의 약 35%를 이루고 있다. 다른 학파들과는 달리 칼리프들의 가르침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정부에 의한 율법 해석만이 인정받을 수 있다는 다른 학파들과는 달리, 개인의 율법 해석도 높게 쳐준다. 이는 중앙집권국가의 출현이 매우 늦거나 아예 하지 않은 정치적 상황에서 기인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글자 그대로를 고집하는 보수주의자들과 당시 실용주의를 견지했던 메디나 학파를 적절히 융합한 학파로 평가받는다. 쿠란의 가르침을 중시하여 이와 모순되는 순나(Sunnah, 예언자의 행적. 꼭 지켜야 하는건 아니지만 순나를 지키는것이 강력히 권고된다)를 거짓된 것이라고 모두 부정했다. 이는 혁명적인 주장으로, 친무함마드계 사람들이 이슬람 공동체의 실권을 꽉 쥐고 있었던 사회를 들끓게 했다. 무함마드와 사이가 나빴던 부족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샤피이를 죽이려고 했을 정도이니 이들의 적개심을 알 만하다.

중도적인 성향을 가졌기 때문에 많은 무슬림들로부터 선호되는 학파이기도 하다. 실제로 하나피나 말리키학파가 우세인 곳에서도 신학자들은 샤피이 학파를 따르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3.3. 한발리

아흐마드 빈 한발리에 의해 만들어진 학파다. 무슬림 공동체의 15%가 이 학파를 따르며, 사우디아라비아는 한발리 학파의 주장을 그대로 국법으로 채택했다. 자히리 학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이 한발리 학파에서 더 나가면 와하비즘이 되고, 와하비즘에서 정신줄을 안드로메다로 놓으면 알 카에다같은 과격파가 된다(...)

한발리 학파를 이해하려면 당시 시대적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8세기 아라비아 사회에서는 무따질리나 자흐미트학파가 유행하고 있었다. 이들의 주장은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봤을때 매우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무따질리 학파는 그리스와 헬레니즘 철학의 영향을 대대적으로 받았다. 그렇기에 이성을 삶의 제1의 요소로 보았다. 논리적 추론을 중시하고 자유주의적인 주장을 펼쳤는다. 종교에 논리를 대입하려 하니 제대로 답이 나오지 않았고, 답이 나오지 않은 것은 이슬람의 중요한 요소라도 배제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들은 논리와 이성으로 신의 영역에 접근할 수 있다고 보는데, 이대로면 꾸란이 일점일획의 오류도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들의 이해를 위해 임의로 창조 했을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6]

무따질리파의 주장은 성경해석의 역사와 비슷하다. 무함마드가 계시를 받았을 때부터 현재까지 이슬람의 기본적 입장은 꾸란에는 일점일획의 오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무따질리파는 꾸란이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임의로 창조한 것으로, 조금의 오류도 없다는 것은 틀렸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어찌보면 현대가톨릭의 성경에 대한 입장과 유사한 셈.

이는 이슬람 사회에 두가지 충격을 가져다 주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무함마드를 부정하고,꾸란의 절대성에 반박했다는 점이다. 자흐미트학파는 여기서 더 나아가 사후세계를 부정하고 허무주의를 수용하는 충공깽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7]

한발리는 이러한 사상들에 대해 격분하고 이슬람의 가르침을 복원하겠다는 사명감 하에 학파를 만든다. 당연히 급진 자유주의적인 사상의 대립항으로서 결성되었으므로 보수적인 성향을 강하게 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체계적인 학파가 아니라, 한발리는 그냥 '꾸란은 신의 말씀 그 자체이므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펼치고 죽었다(...)

그 후 잊혀졌다가 이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된때는 십자군 전쟁때였다. 이븐 타이미야라는 법학자는 '부패한 자들을 타도하고 이슬람의 본위로 돌아가자'고 주장했고, 전후의 혼란기에는 이게 잘 먹혔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에 의해 계속 탄압당하다가, 서구 제국주의 열강이 아라비아를 침략하고 식민화하기 시작하면서 와하비즘이 사상적인 토대를 대충 갖추게 되고, 이것이 이슬람 극단주의로까지 흐르게 된다.

3.4. 말리키

말리키 학파의 창시자인 말리크 빈 아나스(714~795)는 메디나에서 태어났다. 말리크는 메디나의 이슬람적 전통들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메디나는 이슬람 공동체의 초기 중심지로서, 이러한 전통이나 하디스는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말리크는 이러한 이점을 이용하여 쿠란과 전승들을 잘 융합하였다. 말리크 학파는 하디스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이성을 높이 쳤던 하나피 학파와 대립하였다. 예언자와 그의 동료들을 높이 쳐 무함마드뿐만 아니라 아부 바크르등 귀감이 될 만한 동료들의 행동까지 모두 순나(Sunnah, 예언자의 모범적인 관행. 꾸란은 완벽하게 해석될 수 없는 책이기 때문에 보통 이 관행을 참고하는 경우가 많다.)로 간주하였다.

즉 말리키 학파는 예언자의 전통과 행적을 중시한 학파라고 보면 된다.

3.5. 자히리



4.1. 자파리(열두이맘파)[8]


4.2. 자이디(다섯이맘파)


4.3. 이스마일(일곱이맘파)


4.5. 드루즈[9]


5. 그 외


5.1. 이바디


5.2. 수피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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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수니파-하나피,말리키,샤피이,한발리,자히리. 시아파-자파리,자이디. 기타-이바디
  • [2] 카와리지는 떠나간 자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 [3] 무따질라파의 수장이였던 와실 이븐 아타이는 카와리지들에게 잡혔을때 무신론자로 행세하였다고 한다. 아바스조를 인정한 무슬림이면 100% 끔살 확정이었기 때문. 이슬람세계에서 무신론자가 짐승과 비슷하게 치급되는것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증오심이다.
  • [4] 꾸란에 직접민주주의에 대해 언급되어있기 때문에 보수주의자라 하더라도 민주주의 자체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수십명이 끼리끼리 모여살던 씨족 사회가 더이상 아니므로 이를 적용하기는 힘든것. 보수주의자들은 간접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 [5] 강력한 권고사항이나 의무사항은 아니다.
  • [6] 당시 이슬람 사회는 꾸란이 오직 유일한 삶의 진리이고 이성? 그게 먹는건가요 하는 태도를 보였다.
  • [7] 이들은 불신자로 규정되어 정식 이슬람의 사상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그래서 300년만에 소멸했다.
  • [8] 시아파 중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분파
  • [9] 일단 분류상 시아파의 범주에 넣기는 하지만 알라위파와 함께 기존 이슬람교에서 크게 엇나간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