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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테레사

last modified: 2018-07-21 01:23:56 Contributors

< 1979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
1978 - 안와르 사다트, 메나헴 베긴 마더 테레사 1980 - 아돌포 페레즈 에스키벨



저는 우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청빈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배고프고 벌거벗고 집이 없으며 신체에 장애가 있고 눈이 멀고 에 걸려서, 사회로부터 돌봄을 받지 못하고 거부당하며 사랑받지 못하며 사회에 짐이 되고 모든 이들이 외면하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이 상을 기쁘게 받습니다.
197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며 남긴 말.[1]

Contents

1. 개요
2. 비판
3. 시복 절차
3.1. 비판론
4. 여담

1. 개요

Mother Theresa(테레사 수녀원장).[2] 1910년 8월 26일 ~ 1997년 9월 5일 (87세)

본명은 '아녜즈 곤제 보야지우(Anjezë Gonxhe Bojaxhiu)'로 알바니아계의 로마 가톨릭 수녀이다. 현재의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수도 스코페에서 알바니아인인 니콜 보야지우(Nikollë Bojaxhiu)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가족관계로는 큰언니와 오빠가 있었다. 어릴 적부터 집안은 영국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을 믿고 있었으며, 특히 어머니가 열성적인 신자였다고 한다. 아버지 니콜 보야지우는 시의원으로 정치적 행사에 참석한 후 독살되었다. 1910년의 세계 정세가 혼란했음을 보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 직후 가족은 더욱 서로를 아끼게 되었으며 결속력이 강해졌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몸이 약했으나 우등생이었고, 가톨릭 성당에서 성가대원으로 활동한 후 성장한 후에는 가톨릭 청년 단체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1928년에 성모 수녀회에 입회하고 인도로 떠나 인도의 로게토 성모수녀회에서 수녀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는다. 가톨릭에서 정식 수녀가 되기까지는 몇 단계에 걸쳐 수녀회에서 활동하며 이 때 신에게 자신을 바치고 정결함을 유지하겠다는 유기서원을 한다. 이를 지속적으로 갱신하며 일정 기간을 보내고서야 종신서원을 거치고 정식 수녀가 될 수 있다. 기한은 한 10년정도. 1937년 로게토 성모수녀회의 수녀로서 종신서원을 한다. 직후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성 마리아 학교에서 교사 일을 한다. 1946년, 대피정을 떠나는 기차 안에서 약자들을 도우며 살라는 소명을 받는다. 직후 수도회 밖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기까지 2년의 세월이 지나간다. 1948년에 수녀복을 벗고 흰 사리(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여인이 입는 복장)를 입고 수녀회를 떠나 기초 간호학을 속성과정으로 수료한 후에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집안으로 불러와 먹을 것을 주고 돌보아주는 일을 시작한다.

마더 테레사의 봉사 방향성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혼자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었다. 그 해에 테레사는 인도 시민권을 요청하는데, 곧 평생 인도 시민권자로서 살 수 있게 된다. 1949년부터 성 마리아 학교의 제자들이 테레사를 따라 모여들어, ‘사랑의 선교회’라는 조직이 자연히 형성되었다. 1952년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임종자의 집’[3]을 연다. 이 집은 가톨릭 신자인 마이클 곰스가 제공한 셋집이었다.

사랑의 선교회는 점점 더 커져갔고, 모인 기부금으로 선교회 지부로 쓸 집을 살 수 있었다. 이 수도원은 사랑의 선교회 총사령부로 쓰이게 되고 같은 거리에 임종의 집에서 죽은 사람들의 아이들을 포함하는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도 설립한다. 이들의 활동은 나환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으나, 전염을 우려한 사람들의 반대로 이동병실을 우선적으로 만들었다가 후에 시 외곽에 나환자들의 자립을 위한 재활 센터를 설립한다.

15년간 활동한 이후 인도에서 활동하는 사랑의 선교회의 수녀들은 3백 명이 넘었다. 주교들이 청원을 올리자, 교황은 사랑의 선교회가 전 가톨릭 교회 내에서 일할 수 있도록 승인한다. 1965년부터 1971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사랑의 선교회'의 새로운 분원들이 문을 열어 활동하게 된다.

인도로 떠난 이후 수녀회 활동에 전념하며 평생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4] 어머니가 임종할 때는 알바니아로 돌아가려 했으나 정부에서 입국 허가를 거절했다. [5]

말년에 심장병을 얻어 두 번의 심장마비를 겪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받을 의료적 행위를 자신이 돌보는 가난한 이들은 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으나, 두 번째 발작 이후에는 정부의 지속적인 요구와 교황의 요청으로 수술을 받게 된다. 1991년에는 걸프 전쟁 중지를 호소하고, 조지 부시사담 후세인은 요청을 받아들여 화해의 제스처를 취한다. 물론 테레사 수녀의 요청만으로 전쟁이 멈춘 것은 아니다.

유해 운구 행렬
1991년에서 1993년 사이 두 번의 발작을 일으켰지만, 그녀는 계속하여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평화와 나눔을 호소한다. 자신의 임종이 가까워오자, 사랑의 선교회의 회원을 실제로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만으로 한정한다. 말년에는 말라리아에 감염되었는데, 까지 침범하였다. 선교회에서 죽고 싶다고 말해 일터로 되돌아왔고 1997년 9월 5일에 선종한다. 장례식은 9월 13일에 국장으로 거행되었는데 시신은 마하트마 간디자와할랄 네루의 시신을 운구했던 포가(砲架)로 운구되어 인도 정부가 나타낼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와 애도를 표했다. 유해는 생전에 가난한 이들과 함께 했던 테레사 수녀의 집에 안장되었으며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
(요한 복음서 15장 12절)
마더 테레사
1910년 8월 26일 ~ 1997년 9월 5일
우리의 사랑하는 수녀원장
사랑의 선교회 설립자

평생 허리를 구부리고 고개를 숙인 자세로 일해왔기 때문에 고령이 된 후에는 허리가 펴지지 않았고, 세계를 돌아다닐 때는 한쪽 귀가 멀고 심장이 약해진 상태였다고 한다.

인도의 캘커타에서 헌신적인 빈민 구제 활동을 하여 살아있을 때부터 성인으로서 많은 존경을 받았다. 1979년에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는데, 수상축하연에 사용될 돈을 빈민구제기금으로 써달라고 요청한 일화가 있다. 자선가에게 주어지는 각종 상과 선량한 종교인이 받는 각종 상들을 수상했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다음해인 1980년에는 인도에서 가장 높은 등급의 시민 훈장인 바라트 라트나(Bharat Ratna)를 받았다.

시복식 때 성 베드로 대성당 강복의 발코니에 걸린 초상화
선종 6년 뒤인 2003년 10월 1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복자로서의 명칭은 "캘커타의 복녀 테레사"이며 라틴어로는 Beata Teresia Calcuttensis라고 쓴다.[6] 축일은 9월 5일이다.

2. 비판

사망 후 시복 절차를 밟으면서 대두된 문제이나 살아 생전에도 몇 가지 이유로 비난 받았다. 이는 그녀의 문제라기 보단 수녀 혹은 가톨릭으로서 취하게 되는 근본적인 입장, 혹은 종교에 대해 안좋은 시선을 가진 이들에 의한 것도 있지만, 사회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의혹을 던져주는 몇몇 사건도 존재한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테레사 수녀가 활동하고 있던 80년대에 '자비를 팔다'라는 책을 통해 그러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의문을 던졌다. 이 책에서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가차없는 공격을 펼친 히친스의 공격력(?)을 높이 사, 교황청에서는 테레사 수녀의 시성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반대측 증인 중 하나로 히친스를 초청해 테레사 수녀에 대한 히친스의 의문과 비판을 경청했다.

이러한 검증을 가톨릭에선 악마의 대변인이라고 부른다. 히친스의 회고에 따르면 이 증언 작업에는 소수의 담당 성직자만이 동석했으며, 언성을 높이는 일 없이 차분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3. 시복 절차

마더 테레사의 결점 문제가 대두된 것은 그녀의 절차가 시작되면서부터이다.

절차가 시작되면 교황청은 조사자들을 두 무리로 나눈다. 이들은 현대 재판검사변호사의 역할을 맡는데, 각자 자신들의 주장[7]을 뒷받침하는 방대한 양의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해야 한다. 쉽게 말하면 한쪽은 비난만 하고 한쪽은 칭찬만 해야 하는 것인데, 이 주장을 뒷받침할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은 현지조사의 기간은 기본적으로 3~4년이며, 서류상의 검토는 대개 11~13년 정도의 기간을 들인다.

양쪽이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교황청은 해당 인물이 "생전의 부정적인 면모보다 긍정적인 면모가 뛰어나기에 성인으로 지정할 가치가 있다."라는 결론을 내려야만 성인으로 인정할 수 있다.

3.1. 비판론

화제작 비를 팔다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쓴 책인데, 테레사를 비판하기 위한 목적에서 쓰인 책이기 때문에 이 책만을 보고 그녀의 행적을 판단하는 것은 곤란하다.가령 예산 관리에 관해서 비판하는 것에서는 관련 근거나 출처가 부족하고 주변 증언과는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누가 뭐래도 인류애를 위해 헌신한 선한 모습과 무조건적인 사랑은 모두에게 귀감이 될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가톨릭 교인이라면 일반적으로 위인들에게 가지는 존경심 이상으로 복녀인 마더 테레사에 대해 종교적 경의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톨릭 교인들의 관점은 세속의 인물평론과는 그다지 맞아떨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실 간디와 함께 마더 테레사는 대표적으로 위인전에 등장하는 20세기 세계위인이다. 그리고 좋게만 그려지곤 하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종교인일지라도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다.하지만 비슷한 이미지인 마하트마 간디가 여러가지 면에서 비판을 받아왔었고 점점 대중적으로도 부정적 재평가가 이루어지기도 하는 것처럼 마더 테레사도 여러가지 면에서 비판을 받아왔었다. 비단 히친스의 책만이 아니며 페미니스트들에게도 이미지가 좋지 못하다. 일방적인 평가에서 다소 거리를 두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4. 여담

  • 사망 후 약 2개월 뒤, 뜬금없이 힌두교의 파괴신인 시바의 아내의 화신 중 하나로 힌두신화에 편입되어 버렸다. 칼리신(시바)의 사원에 ‘테레사 어머니의 집’ 이라는 가난한 이들의 휴식처가 생겼다고 한다. 역시 인도. 힌두는 불침벽이다. 고인드립인지 종교의 블랙홀인지.

  • 교황청그녀가 기적을 일으켰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했다.[8] 이로 인해, 진위여부는 둘째치더라도 마더 테레사는 20세기 들어 유일하게 공식적인 기적을 일으킨 사람이 되었다.

  • 테레사 수녀의 임종 이후, 알바니아인도는 테레사 수녀의 시신을 어디에 안치할 것인지, 그 국적은 어디에 있는지를 놓고 대판 싸웠다.

  • 2003년에 그녀의 봉사를 다룬 전기 영화가 제작된 적이 있다. 제목은 이름과 같은 '마더 데레사'. '줄리엣'으로 유명한 올리비아 허시가 노년의 데레사 수녀 역을 연기했다. 데레사의 인생과 신앙에 대한 태도들을 비교적 잘 묘사한 평작이다.

  • 2012년, 한국의 웬 개독들이 테레사 수녀가 지옥에 있다는 음성을 제작해 고인드립을 시전한 일이 드러났다. 개독들은 현실에서의 선행을 폄하하고, 한 사람이라도 전도해서 사후에 복받게 하는 게 선행이라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논리를 내세우기 때문(...). 비슷한 드립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테레사 수녀가 정말로 지옥에 있을 거라고 한다. 자기 혼자 천국에서 구원받기보다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의 구제를 위해 지옥에 갔을 거라고… 지장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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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그러나 이 직후 세계평화의 적은 바로 낙태라고 선언하는데, 전문은 낙태는 살인으로써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는 요지다. 이 때 감동했던 청중들은 벙 쪘다.
  • [2] 호칭에 대해 "테레사 수녀"라고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고 실제 위키백과에는 그렇게 등록되어 있으나, 엄밀히 말하자면 "Mother"는 "수녀원장"의 뜻이므로 수녀를 뜻하는 "Sister"와는 뜻이 다르므로 "테레사 수녀원장"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유명사화된 호칭으로서 "마더 테레사"라 하는 것이 더 옳다고 할 수 있다.
  • [3] 일종의 호스피스 개념이다.
  • [4] 가톨릭에서 사제와 수녀는 인간으로서 죽고 신의 종으로서 임한다는 개념이기 때문에, 가족이라도 사제/수녀가 되고나면 부모자식으로 대하는 일이 드물다. 가령 도미니크라는 세례명을 아들이 신부가 되었을 경우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도미니크 신부+존칭을 쓰는 것. 사제가 부모님을 부르는 것은 금지되지 않는다
  • [5] 당시 알바니아는 공산국가였기 때문에 천주교를 포함한 종교에 대한 탄압이 강했다. 나중엔 입국은 허가하되 출국은 불허한다는 방침이 되어서 결국 포기했다.
  • [6] Beata Teresia a(혹은 de) Calcutta라고 쓸 수도 있다. 영어로는 Blessed Teresa of Calcutta라고 쓴다.
  • [7] 성인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쪽과 인정해선 안 된다는 쪽. 인정해선 안된다는 쪽의 별칭은 '악마의 변호사'이다.
  • [8] 여기서 말한 "기적"은 마더 테레사가 사망한지 1년후인 1998년 9월, 위에 거대한 종양이 있던 34세의 인도여성 모니카 베스라(Monica Besra)가 테레사가 세운 "사랑의 선교회"에서 테레사의 환영을 본후 완치 되었다는 일화를 말한다. 한편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중병이 '자연스레' 완치된 것이 아니라고 해서 반드시 '초자연적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이로 인해 인도에서 돌팔이들과 종교적 사기꾼들이 신뢰를 잃어버리는 날이 늦춰졌다 (신은 위대하지 않다. 2007)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또한 그는 '모니카'라는 이름은 인도식이 아니라 세례명이라는 점, 그녀의 남편과 병원장들의 뚱한 반응 등이 심히 의심스럽다고 서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