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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슈트라우스

last modified: 2015-02-27 02:30:43 Contributors

풀네임은 리하르트 게오르크 슈트라우스(Richard Georg Strauss). 독일의 작곡가,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 독일 후기 낭만파 음악의 마지막을 장식한 음악가이자 엑토르 베를리오즈,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와 함께 서양 관현악 작법의 3대 괴수대가로 손꼽힌다. 라벨은 왜뺀거여

생몰 1864년 6월 11일 ~ 1949년 9월 8일

Contents

1. 생애
2. 주요 작품들
2.1. 관현악곡
2.2. 취주악곡
2.3. 협주곡
2.4. 실내악
2.5. 피아노곡
2.6. 가곡
2.7. 합창곡
2.8. 오페라
2.9. 발레
3. 창작 성향
4. 사생활
5. 정치적 논란
6. 지휘/피아니스트 활동
7. 대중 매체의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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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Op.30. 연주는 구스타프 말러 청소년 관현악단(Gustav Mahler Youth Orchestra).

1. 생애

뮌헨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당대 호른 연주의 본좌 중 한 사람이었던 프란츠 슈트라우스[1]였다. 음악 교육은 당연히 아버지로부터 받기 시작했고, 불과 여섯 살 때 '재단사 폴카' 라는 곡을 처음 작곡해 신동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아버지가 재직하던 뮌헨 궁정오페라 관현악단의 리허설도 자주 참관했고, 단원들과 지휘자로부터 음악 이론과 관현악 편곡법 등을 계속 배웠다.

1874년에는 바그너의 오페라들을 처음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하는데, 다만 아버지인 프란츠와 주변 지인들이 극렬 바그너 안티였던 탓에 드러내놓고 좋았다고 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1882년에는 뮌헨 대학교에 입학했고, 여기서는 음악이 아닌 철학과 예술사를 전공했다.

이듬해에는 베를린으로 잠깐 옮겨서 당대 최고의 지휘자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던 한스 폰 뷜로의 보조 지휘자로 일했는데, 뷜로가 이 후배를 좋게 봤는지 1885년에 자신의 후임으로 마이닝엔 궁정극장 음악 감독 직책을 넘겨주기도 했다. 하지만 마이닝엔 재직 시절부터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 시인이었던 친구 알렉산더 리터의 영향으로 점차 바그너와 리스트 류의 '신독일파' 계열 음악에 대한 강한 영향력을 작곡에 반영하기 시작하면서 뷜로와의 관계도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2]

1894년에는 첫 오페라인 '군트람' 을 발표했지만, 비평계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고 망했어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오페라에 주역으로 출연한 소프라노 가수인 파울리네 데 아나를 아내로 맞이하는 행운도 얻었으며, 보수적인 비평가들의 태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작곡과 지휘를 병행했다.

1905년에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을 오페라로 만든 '살로메' 가 당시로서는 극단적인 잔인함과 외설성으로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이어 작곡한 '엘렉트라' 도 전작에 뒤지지 않는 파격성을 보여주면서 '무서운 신예' 로 자신의 이미지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엘렉트라' 에서부터 호흡을 맞추기 시작한 대본 작가 후고 폰 호프만슈탈은 1932년의 '아라벨라' 까지 모두 여섯 편의 오페라 대본을 제공하면서 명작 오페라들의 양산에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1930년대 중반부터 독일에 득세하기 시작한 나치와 영 좋지않은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명성에 흠이 가기 시작했고, 괴벨스의 선전성 휘하에 만들어진 '제국 음악국(Reichsmusikkammer)' 의 총재로 취임하자 좌파/반나치 인사들이 거세게 반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슈트라우스와 나치의 관계는 원만하기는 커녕 계속 삐걱댔고, 호프만슈탈에 이어 새로 받아들인 유대인 대본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와의 관계가 문제가 되자 총재 직책을 사임해야 했다.

이렇게 나치와 늘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지만, 슈트라우스는 독일을 떠나지 않고 계속 남아서 음악 활동을 했다. 종전 후에는 나치 부역 문제로 군정 측으로부터 활동 제한 조치를 받았지만, 예전부터 쌓아온 명성 덕인지 오래 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미 80대를 넘긴 고령이었던 만큼 건강도 점차 나빠지기 시작했고, 대외적인 활동도 점차 뜸해졌다. 1947년 런던에서 지휘자로 마지막 공식 연주회를 가진 뒤에는 해외 여행도 하지 않았고, 독일 최남단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의 자택에 칩거하며 '네 개의 마지막 노래' 를 비롯한 마지막 작품들을 남긴 뒤 1949년에 타계했다.

굽시니스트의 본격 음악만화기필하모닉 콘서트 뽐뿌만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편 참조.

성이 같은 Strauss로 스펠링까지 동일한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가문과는 혈연적으로 전혀 관계가 없다. 헷갈리지 말것.

2. 주요 작품들

2.1. 관현악곡

재단사 폴카 (Schneiderpolka. 1870)
연주회용 서곡 B단조 (1876)
관현악을 위한 세레나데 G장조 (1877)
교향곡 제1번 D단조 (1880)
연주회용 서곡 C단조 (1883)
교향곡 제2번 F단조 (1883)
교향 환상곡 '이탈리아에서(Aus Italien)' (1886)
축전 행진곡 C장조 (1888)
교향시 '돈 후안(Don Juan)' (1889)
교향시 '맥베스(Macbeth)' (1888. 1890 개정)
교향시 '죽음과 정화(Tod und Verklärung)' (1888-89)
교향시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Till Eulenspiegels lustige Streiche)' (1895)
교향시 '차라투슈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1896)
교향시 '돈 키호테(Don Quixote)' (1898)
교향시 '영웅의 생애(Ein Heldenleben)' (1899)
가정 교향곡(Sinfonia domestica. 1904)
대관현악과 오르간을 위한 '축전 전주곡(Festliches Präludium)' (1913)
알프스 교향곡(Eine Alpensinfonie. 1915)
모음곡 '평민 귀족(Der Bürger als Edelmann)' (1917)
프랑수아 쿠프랭의 하프시코드 소품에 의한 무용 모음곡 (Tanzsuite aus Klavierstücken von François Couperin. 1923)
일본 축전음악 (Japanische Festmusik. 1940) 흑역사
프랑수아 쿠프랭의 하프시코드 소품에 의한 소관현악을 위한 '디베르티멘토(Divertimento)' (1940-41)
23명의 현악 주자를 위한 습작 '메타모르포젠(Metamorphosen)' (1945)
발레 '요셉의 전설' 에 의한 교향 단편 (Symphonisches Fragment aus "Josephs Legende". 1947)

2.2. 취주악곡

13개의 관악기를 위한 세레나데 E플랫장조 (1881)
13개의 관악기를 위한 모음곡 B플랫장조 (1884)
세 개의 솔로 트럼펫, 22개의 금관악기와 팀파니를 위한 '요한 기사단 기사들의 장엄한 입장(Feierlicher Einzug der Ritter des Johanniter-Ordens)' (1909)
22개의 금관악기와 두 대의 팀파니를 위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팡파르(Wiener Philharmoniker Fanfare)' (1924)
22개의 금관악기와 두 대의 팀파니를 위한 '빈 시의 음악주간 개회식을 위한 팡파르(Fanfare zur Eröffnung der Musikwoche der Stadt Wien)' (1924)
19개의 금관악기와 팀파니를 위한 '빈 시의 축전음악(Festmusik der Stadt Wien)' (1943) 흑역사
16개의 관악기를 위한 소나티네 제1번 '환자의 작업실에서(Aus der Werkstatt eines Invaliden)' (1943)
16개의 관악기를 위한 소나티네 제2번 '즐거운 작업실(Fröhliche Werkstatt)' (1944-45)

2.3. 협주곡

클라리넷과 관현악을 위한 로망스 (1879)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1881-82)
호른 협주곡 제1번 E플랫장조 (1882-83)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로망스 (1883)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부를레스케(Burleske)' (1886-90)
피아노(왼손 피아니스트)와 관현악을 위한 '가정 교향곡 부록(Parergon zur Sinfonia domestica)' (1925)
피아노(왼손 피아니스트)와 관현악을 위한 '파나텐 축제 행렬(Panathenäenzug)' (1926-27)
호른 협주곡 제2번 E플랫장조 (1942)
오보에 협주곡 D장조 (1945)
클라리넷, 바순과 현을 위한 '듀엣 콘체르티노(Duett-Concertino)' (1947)

2.4. 실내악

현악 4중주 A장조 (1880)
첼로 소나타 F장조 (1880-81)
피아노 4중주 C단조 (1883-85)
바이올린 소나타 E플랫장조 (1887)

2.5. 피아노곡

다섯 개의 피아노곡 (1880-81)
피아노 소나타 B단조 (1880-81)
피아노 모음곡 '인상집(Stimmungsbilder)' (1882-84)

2.6. 가곡

헤르만 길름의 시집 '마지막 장' 에 의한 여덟 개의 가곡 (Acht Gedichte aus "Letzte Blätter" von Hermann von Gilm op.10. 1885)
다섯 개의 중성(中聲)용 가곡 (Fünf Lieder für eine mittlere Singstimme op.15. 1886)
아돌프 프리드리히 폰 샤크 백작의 시에 의한 여섯 개의 고성(高聲)용 가곡 (Sechs Lieder von Adolf Friedrich Graf von Schack für eine hohe Singstimme op.17. 1886-87)
아돌프 프리드리히 폰 샤크 백작의 시집 '연잎' 에 의한 여섯 개의 가곡 (Sechs Lieder aus "Lotosblätter" von Adolf Friedrich Graf von Schack op.19. 1888)
펠릭스 단의 시집 '소녀의 꽃' 에 의한 네 개의 가곡 (Vier Gedichte "Mädchenblumen" von Felix Dahn op.22. 1888)
펠릭스 단의 시집 '소박한 가락' 에 의한 다섯 개의 가곡 (Fünf Gedichte "Schlichte Weisen" von Felix Dahn op.21. 1889-90)
니콜라우스 폰 레나우의 시에 의한 두 개의 가곡 (Zwei Lieder von Nicolaus von Lenau op.26. 1891)
네 개의 가곡집 (Vier Lieder op.27. 1894)
오토 율리우스 비어바움의 시에 의한 세 개의 고성(高聲)용 가곡 (Drei Lieder nach Gedichten von Otto Julius Bierbaum für hohe Stimme op.29. 1895)
칼 부세와 리하르트 데멜의 시에 의한 네 개의 가곡 (Vier Lieder von Carl Busse und Richard Dehmel op.31. 1895-96)
다섯 개의 가곡 (Fünf Lieder op.32. 1896)
네 개의 관현악 반주 가곡 (Vier Gesänge für eine Singstimme mit Begleitung des Orchesters op.33. 1896-97)
네 개의 가곡 (Vier Lieder für hohe Stimme op.36. 1897-98)
여섯 개의 고성(高聲)용 가곡 (Sechs Lieder für hohe Stimme op.37. 1896-98)
다섯 개의 가곡 (Fünf Lieder op.39. 1898)
다섯 개의 가곡 (Fünf Lieder op.41. 1899)
옛 독일 시인들의 시에 의한 세 개의 고성(高聲)용 가곡 (Drei Gesänge älterer deutscher Dichter für eine hohe Stimme op.43. 1899)
두 개의 저성(低聲)용 관현악 반주 가곡 (Zwei größere Gesänge für eine tiefere Stimme mit Orchesterbegleitung op.44. 1899)
프리드리히 뤼케르트의 시에 의한 다섯 개의 가곡 (Fünf Gedichte von Friedrich Rückert op.46. 1899-1900)
루트비히 울란트의 시에 의한 다섯 개의 가곡 (Fünf Lieder von Ludwig Uhland für eine Singstimme op.47. 1900)
오토 율리우스 비어바움과 칼 헹켈의 시에 의한 다섯 개의 가곡 (Fünf Lieder nach Gedichten von Otto Julius Bierbaum und Karl Henckell op.48. 1900)
여덟 개의 가곡 (Acht Lieder op.49. 1901)
두 개의 저음 베이스용 관현악 반주 가곡 (Zwei Gesänge für eine tiefe Bassstimme mit Orchesterbegleitung op.51. 1902/06)
여섯 개의 가곡 (Sechs Lieder op.56. 1903/05-06)
알프레트 케어의 시에 의한 열두 개의 가곡 '상인의 거울' (Zwölf Gesänge von Alfred Kerr "Krämerspiegel" op.66. 1918)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 과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서동시집' 에 의한 여섯 개의 고성(高聲)용 가곡 (Sechs Lieder nach "Hamlet" von William Shakespeare und "West-östlicher Divan" von Johann Wolfgang von Goethe für eine hohe Singstimme op.67. 1918)
클레멘스 브렌타노의 시에 의한 여섯 개의 가곡 (Sechs Lieder nach Gedichten von Clemens Brentano op.68. 1918)
아힘 폰 아르님과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에 의한 다섯 개의 작은 가곡 (Fünf kleine Lieder nach Gedichten von Achim von Arnim und Heinrich Heine op.69. 1918)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시에 의한 세 개의 고성(高聲)용 찬가 (Drei Hymnen von Friedrich Hölderlin für eine hohe Singstimme und großes Orchester op.71. 1921)
한스 베트게의 페르시아와 중국 번역시집 '동양의 노래' 에 의한 다섯 개의 가곡 ("Gesänge des Orients"-Nachdichtungen aus dem Persischen und Chinesischen von Hans Bethge op.77. 1928)
네 개의 고음 베이스용 가곡 (Vier Gesänge für hohe Bassstimme op.87. 1922/29/35)
세 개의 가곡 (Drei Lieder op.88. 1933/42)
소프라노와 관현악을 위한 '네 개의 마지막 노래' (Vier letzte Lieder für Sopran und Orchester. 1948)
가곡 '아욱꽃' (Malven. 1948)[3]

2.7. 합창곡

관현악과 합창 '올림픽 찬가(Olympische Hymne)' (1934) 흑역사

2.8. 오페라

군트람(Guntram. 1892-93. 1940 개정)
불의 결핍(Feuersnot. 1900-01)
살로메(Salome. 1903-05)
엘렉트라(Elektra. 1906-08)
장미의 기사(Der Rosenkavalier. 1909-10)
낙소스의 아리아드네(Ariadne auf Naxos. 1911-12. 1915-16 개정)
그림자 없는 여인(Die Frau ohne Schatten. 1914-17)
인테르메초(Intermezzo. 1918-23)
이집트의 헬레나(Die ägyptische Helena. 1923-27)
아라벨라(Arabella. 1929-32)
말없는 여인(Die schweigsame Frau. 1933-34)
평화의 날(Friedenstag. 1935-36)
다프네(Daphne. 1936-37)
다나에의 사랑(Die Liebe der Danae. 1938-40)
카프리치오(Capriccio. 1940-41)

2.9. 발레

요셉의 전설(Josephslegende. 1914)
휘핑크림(Schlagobers. 1920-21)

3. 창작 성향

전 생애를 통해 초기에는 교향시를 비롯한 표제음악, 중후기에는 오페라에 전념한 것을 볼 수 있다. 초기에는 아버지나 뷜로 등 바그너까 계열 인물들의 강한 영향력 아래에 놓여있었던 탓인지 오히려 브람스를 비롯한 절대음악 계열 선배들의 작품들을 벤치마킹한 교향곡이나 협주곡, 실내악, 소나타 등을 많이 남겼다.

하지만 리터와 만난 뒤로 서서히 바그너/리스트빠의 기질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교향시 분야의 괄목할 만한 작품들이 연이어 쏟아져 나왔는데, 특히 '돈 후안' 이후의 작품들은 지금도 관현악단들의 연주 곡목으로 남아있을 정도로 애주되고 있다. 이들 작품은 줄거리가 있는 문학 작품이나 희곡, 전설 등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악보에도 간략한 해설이나 제목을 나타내는 시 등이 적혀 있다.

이런 교향시들에서는 대개 큰 편성의 관현악을 사용하고 있고, 기존의 소나타 형식이나 론도 형식 같은 고전적인 틀이나 화성 구조 등에 얽매이지 않는 대담함을 보여준다. 첼로비올라 독주자를 요구하는 '돈 키호테' 처럼 협주곡 양식을 도입하기도 하고, '가정 교향곡' 이나 '알프스 교향곡' 에서처럼 교향곡 형식을 응용한 대규모 구성을 취하기도 한다.[4]

음악 자체보다는 표제나 가사를 통해 내용을 전달하는데 도가 튼 탓인지, '영웅의 생애' 이후 작곡한 오페라들도 주목할 만한 걸작들이 꽤 많은 편이다. 특히 호프만슈탈과 작업한 오페라들은 지금도 독일어권 뿐 아니라 전세계의 오페라극장들에서 상시 상연작으로 공연되고 있다. 하지만 교향시에서 보여준 대담한 성향은 '엘렉트라' 이후 많이 완화되어 있으며, 빈 왈츠에 대한 오마주를 보여주는 '장미의 기사' 나 모차르트 오페라의 영향을 반영한 '그림자 없는 여인' 에서처럼 신고전주의 계통의 사조로 경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2차대전 돌입 후에는 처절한 현실을 잊기 위해서인지, 초기 시절 작곡했던 협주곡 등 고전적인 양식의 기악 작품들을 주로 작곡했다. 이들 작품은 어두운 악상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밝고 유머 감각이 넘치는데, 다만 '메타모르포젠' 이나 '네 개의 마지막 노래' 같이 대단히 어둡고 비통하거나 진지하고 관조적인 작품도 몇 곡 남기고 있다.

관현악 작품에 있어서 그야말로 동시대 다른 작곡가들의 열폭을 자아낼 만큼 숙련된 솜씨를 보여주었는데, 대규모 편성을 때려박더라도 각 파트를 잘게 쪼개서 실내악에 가까운 정밀한 음색을 얻어내거나 새롭게 개발된 악기, 이미 사장되어 박물관에나 있을 법한 악기들까지 동원하는 캐근성을 발휘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베를리오즈의 명저 '관현악법' 을 개정한 책도 썼을 정도니 더 이상 말이 必要韓紙?

기악에서는 호른, 성악에서는 소프라노를 꽤 편애한 것 같다.[5] 아버지가 본좌 호르니스트였고 아내가 소프라노 가수였으니 어쩌면 당연한데, 다만 그 편애의 정도가 웬만한 관록의 음악인들도 종종 절망에 빠뜨리는 엄청난 난이도의 작품으로 나타났다는게 문제라면 문제. 특히 두 곡의 호른 협주곡이나, 오페라 레퍼토리 대다수의 소프라노 주역 가수들은 아무나 도전했다가는 제대로 피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까다로운 레퍼토리들로 손꼽힌다.

하지만 교향시나 오페라 같이 몸집 큰 편성과 규모의 곡들 외에 가곡을 높이 사는 사람들도 많다. 가곡의 경우 큰 단절 없이 평생 동안 작곡한 탓에 작곡 기법의 변천사를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고, 목소리와 피아노 반주법에 대한 진지한 접근 자세도 관현악 작곡 못지 않은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어서 많은 성악가들의 리사이틀 무대에서 애창되고 있다.

4. 사생활

오페라 가수였던 아내 파울리네는 슈트라우스와 기본적으로는 궁합이 잘 맞는 사이였지만, 슈트라우스가 파격적인 음악을 쓴 경우 자필보에 멋대로 비판하는 낙서를 마구 적어놓는 등 남편까(?????)의 면모를 공공연히 보여줄 정도였다. 하도 지배적이고 불같은 성질이다 보니 부부싸움도 심심찮게 일어났다고 하는데, 슈트라우스 자신은 이런 가정사를 감추기는 커녕 '가정 교향곡' 이나 오페라 '인테르메초' 등에 대놓고 보여주어 대인배 기질을 과시했다.

파울리네도 슈트라우스에게 다소 까칠하고 괄괄하게 굴기는 했지만, 평생 바람피지 않고 철저한 내조를 통해 대작곡가의 아내로서 임무를 다했다. 슈트라우스가 죽자 실의에 빠져 거의 매일매일 울며 지내다가 8개월 뒤 남편 곁을 따라간 것을 보면 대단한 츤데레조강지처.

물론 슈트라우스 자신도 초기부터 별의별 비평가들의 공격을 당해낸 탓인지 꽤 자존심이 셌다고 하고, '살로메' 가 반사회적인 오페라라고 비난하는 이들에게도 '나는 그 오페라 공연해서 번 돈으로 집샀지롱 ㅋㅋㅋ' 식으로 조롱하기도 했다.[6] 취미가 등산이었는데, 등산 애호가들 치고 야망이 없는 사람이 드물다는 속설이 슈트라우스에게도 적용된 모양이다. '알프스 교향곡' 도 알프스 등산 체험에 기반한 작품이고, 자택도 산장 수준으로 높은 고도에 지어놓은 것을 보면 극렬 산덕후.

나치 시대에는 괴벨스와 종종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고, 유대인 며느리를 두고 있던 탓에 며느리가 종종 게슈타포의 먹잇감이 되는 등의 위기가 있을 때마다 강하게 항의해 다시 데려오는 개김성도 보여주었다. 전쟁 말기에 자신의 별장을 부상병 수용과 치료를 위해 징발하겠다는 당국의 명령에도 '나는 이딴 전쟁 원하지 않았으니 못빌려주겠음 깝ㄴㄴ' 식으로 대응하다가 강제로 압류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5. 정치적 논란

나치에 고분고분하지는 않았더라도, 이미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던 시기에 독일 음악계를 대표하는 명사였던 탓에 나치가 대내외적으로 내세우는 '독일 음악의 우월성' 이라는 떡밥투척용 기믹에도 곧잘 이용되기 시작했다. 슈트라우스 자신도 초기 나치 정권에는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으로, 슈테판 츠바이크에게 보낸 서신에서 '음악을 후원하는 나치 정권을 나쁘다고 볼 수 없다' 라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7]

이외에 나치 정부나 관련 단체의 의뢰로 작곡된 작품들도 떡밥으로 자주 던져지는데,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위해 작곡한 '올림픽 찬가' 나 1940년 일본 기원 2600주년 기념 봉축곡인 '일본 축전음악', 1943년 나치 빈 대관구 주최의 행사를 위해 작곡한 '빈 시의 축전음악' 같은 곡들은 지금도 슈트라우스의 흑역사격 작품으로 간주되어 연주/녹음이 대단히 뜸한 편이다. 대략 1950년대 이후로 독일과 일본(일본 축전음악)을 중심으로 리바이벌되고 있기는 하지만, 상설 레퍼토리의 경지에는 절대 이르지 못할 것 같다. 슈트라우스 자신부터 작품의 질이 낮음을 인정한 바 있고, 과거 나치나 일본 제국에게 피점령국 신세를 당한 나라들로부터도 결코 좋은 대접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대인 며느리를 비롯한 주변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협력자의 자세를 취해야 했다는 동정 여론도 있고, 제국 음악국 총재로서 공공연한 반유대주의를 표명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치 부역자' 로 모는 것을 부당하다고 보는 이들도 많다. 실제로 슈트라우스는 총재를 역임할 동안 나치의 반유대주의 캠페인에는 별 신경도 쓰지 않았고, 오히려 나치의 신경을 거슬렀던 울 힌데미트 같은 음악인들을 옹호하는 등의 행동으로 괴벨스를 자주 빡돌게 했다.

슈트라우스 자신 외에 흔히 '슈트라우스의 제자' 라고 종종 얽히는 안익태와 관련해서도 이런저런 떡밥들이 최근 발굴되고 있는데, 실제로 안익태는 슈트라우스 전기를 집필할 정도로 슈트라우스빠였다. 하지만 2000년대부터 유럽 현지의 자료들을 바탕으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안익태는 그리 일찍부터 슈트라우스에게 배우지도 않았고, 그저 '일본 축전음악' 의 지휘자로 슈트라우스와 접촉하기 시작했을 뿐일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친일파 논쟁에 불을 붙여준 꼴이 되었다.

6. 지휘/피아니스트 활동

작곡 다음으로 슈트라우스가 명성을 얻은 것이 지휘 활동이었는데, 만년에 남겨진 동영상 등을 보면 '정말 재미없게' 지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팔의 움직임을 넥타이 폭으로 한정하는 등 극도로 최소화한 탓에 보기에는 대단히 무미건조하게 보인다. 음악이 커지건 작아지건 동작 변화도 거의 없어서 '박자 기계' 라고 까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화려하고 강한 연출이 담긴 지휘를 선호하는 사람들에겐 정말 지루하게 보일 수도 있다. 연주가 끝난 후에도 전혀 땀을 흘리지 않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하지만 청년 시절에는 '마치 발작이라도 난 듯 지휘한다' 는 평이 있었을 정도였고, 자작곡 보다는 모차르트를 비롯한 대선배들의 작품을 지휘할 때 꽤 강도높은 리허설을 했다는 기록을 봐서 절대 건성으로 임하지는 않은 것 같다. 만들어내는 음악 스타일은 가볍고 경쾌하면서도 탄탄한 구조를 보여주는 스타일이어서, 자기 주장을 작품에 많이 이입시키는 낭만주의 지휘 양식과 대척점에 있다는 평을 받는다. 후배였던 지휘자 조지 셀의 경우, 슈트라우스를 회고할 때 '지휘자로서는 별로 훌륭한 인물은 아니었다' 고 장난스레 회상하기도 했다. 특히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 를 지휘할 때 공연 끝난 뒤에 있을 회식이나 게임에 정신이 팔려 회중시계를 꺼내보며 갑자기 템포를 확 올려 지휘하는 등의 기행도 종종 있었다고 하니 흠좀무.

현재 남아있는 녹음들의 상당수가 자작 관현악곡들이라서 슈트라우스가 지휘자로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을 관찰할 수 있는데, 이 때도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빠른 템포를 취하고 과장이나 가식이 별로 없는 엄격한 면모를 보여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년에는 자작 연주회에서 리허설도 안하고 바로 본공연이나 녹음에 임하기도 했는데, 지휘자의 배짱이나 그걸 막힘없이 연주한 관현악단이나 ㅎㄷㄷ.

피아니스트로서도 뷜로의 지휘로 모차르트 협주곡을 연주할 정도로 꽤 전문가급 솜씨를 자랑했다고 하는데, 특히 자신의 가곡 리사이틀에서 반주를 맡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한 곡이 끝나고 가수가 박수를 받고있을 때 전혀 신경쓰지 않고 멋대로 즉흥 연주를 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고 하는데, 얼핏 보기에는 장난인 것 같았지만 각 곡 사이의 분위기나 가사를 암시하는 연주를 들려주면서 가수와의 교감을 극대화시키려는 행동이었다고 한다.

7. 대중 매체의 사용

아마 텔레비전이나 영화에 인용된 가장 유명한 슈트라우스 작품을 꼽으라면 '차라투슈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의 초반부 대목일 것이다. 조용하게 밑에 깔리는 저음 위에서 떠오르듯이 나오는 트럼펫의 팡파르와 팀파니강타부터 굉장한 카리스마를 보여주는데,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에서 쓰여 히트했다. 이 때문에 조로아스터교프리드리히 니체와 관련되어 이야기되던 이 곡이 단번에 '우주음악' 이나 'SF음악' 으로 이미지 체인징이 되기도 했을 정도.

영화 외에도 하도 간지폭발이라 그런지 엘비스 프레슬리도 자신의 콘서트에서 오프닝 음악으로 썼고, WWE의 노장 프로레슬러 릭 플레어도 '호우!' 하는 자신의 외침소리와 함께 등장 음악으로 사용했다. 이외에 다른 교향시들도 묘사적인 표현에 왔다여서 그런지 종종 광고음악으로 쓰인다고 한다. 역시 표제음악의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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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바이에른 왕립 오페라의 호른 수석이었다. 바이에른 국왕인 루트비히2세가 바그너의 열렬한 애호가이자 후원자였기 때문에 바그너의 중기 이후의 모든 작품은 바로 바이에른 왕립 오페라가 초연했다. 바그너는 당대 최고의 연주자인 프란츠 슈트라우스를 염두에 두고 여러 여러운 호른 패시지들을 작곡했다. 그러나 프란츠 본인은 바그너의 음악를 싫어하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추종했기 때문에 걸핏하면 연주 불가능한 패시지라는 둥 트러블을 일으켜 바그너 제자들의 애를 많이 먹였다. 바그너 서거 후 후모음악회에서도 전 오케스트라가 기립하여 연주하는 가운데 프란츠 슈트라우스만 끝까지 앉아서 연주했다고 한다. 니벨룽겐의 반지 초연의 중책을 맡았던 한스 리히터는 프란츠 슈트라우스가 연주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면 본인이 직접 연주해 보이곤 했다고 한다. 한스 리히터는 빈 필의 호른 단원 출신으로 나중에 빈 필, 런던 심포니의 상임지휘자를 역임했다.
  • [2] 참고로 뷜로도 예전에는 극렬 바그너빠였지만, 바그너가 자신의 부인이었던 코지마를 빼앗아가자 대번에 바그너까로 전향해 자근자근 씹고 있던 인물이었다.
  • [3] 이게 레알 슈트라우스의 마지막 노래다.
  • [4] 그래서 이 두 곡은 교향곡이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문헌들에서 관현악곡/교향시 영역으로 분류한다.
  • [5] 호른의 경우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이 '알프스 교향곡' 의 편성인데, 관현악단에 8대 배치한 것도 모자라 무대 뒤에 12명 더 쓰라고 지시되어 있다. 총 20명(!!!). 다만 무대 뒤의 연주자 배치에 대해서는 '정 여의치 않다면 생략해도 무방하다' 고 기입하고 있다.
  • [6] 참고로 그 집이 바로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의 자택이었다. 지금도 슈트라우스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슈트라우스 관련 문서나 자료의 보관소로도 이용되는 중.
  • [7] 그리고 듣보잡 상태지만, 가곡 '시냇물' 이나 '라플란드 평원의 비상 경보' 같은 곡들은 각각 괴벨스와 재무 장관이었던 발터 풍크에게 공식적으로 헌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