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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last modified: 2015-03-31 19:52:15 Contributors


Contents

1. 유럽에서 일어난 문화계의 대변혁
1.1.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발전한 이유
1.2. 건축
1.3. 조각
1.4. 회화
1.5.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쇠락
2. DCinside에서 시작된 합성계의 대변혁
3. 대한민국의 순정만화 잡지
4. 삼성전자가 생산했던 오디오 브랜드


1. 유럽에서 일어난 문화계의 대변혁

예술사 시대구분
고딕르네상스바로크

14세기 후반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유럽에서 일어난 문화계의 큰 변화. 각 세기별로 트레첸토(trecento, 300이란 뜻), 콰트로첸토(quattrocento, 400), 친퀘첸토(cinquecento, 500)라 부른다.

문화 전성기의 상징처럼 쓰인다. 기본적인 성격은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로의 회귀를 추구한다. 흔히 문예부흥으로 번역된다. 르네상스라는 뜻은 재생, 부활이며 그 어원은 조르조 바사리의 예술가 열전이란 책에서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해석하면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재림이라하여 리나시타(rinascita, 부활)라[2] 한 것을 프랑스의 역사가였던 쥘 미슐레가 '르네상스'라는 말로 확립시킨 이후에 스위스의 역사가였던 야코프 부르크하르트가 그 개념을 확립시킨 것이다. 르네상스를 행한 이들의 입장에서는 야만에 근거를 둔, 하느님이 모든 것의 중심인 종교(가톨릭)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었던 인문주의 시절의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시절로 회귀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는 고대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수백년 동안 몰락했던 이탈리아인들이 그들의 입장에서는 야만인의 문화였던 북쪽의 게르만 민족의 고딕문화를 넘어서기 위한 시도였다. 또한 피렌체, 베네치아 등 상업을 통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북이탈리아의 도시를 중심으로 르네상스가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면서 '야만인'들과는 차별화되는 문화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곧 전 유럽으로 퍼지게 되면서 지역마다 각기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된다.

일반적인 결과로는 중세적인 요소들이 퇴보하고 근세적인 문화가 성립하게 되었다. 교황권이 약화되고 페스트 등과 도시의 발달 등으로 봉건 제도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문화 변화로, 종교 문화 중심이던 유럽 사회가 서서히 인간 문화 위주로 변해가는 시기이다.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한 뒤 그리스-로마적인 문화가 유입되어 헤브라이즘의 영향력이 강했던 중세 유럽의 종교 문화를 거스르는 인본주의적인 고대 헬레니즘 요소들이 부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중세적 문화를 부정하고 근세적 문화를 성립했다고 주장[3]해도, 현대 역사학에서는 오히려 중세 전성기로 보는 입장이 강하다. 문제는 역시 자본주의의 발달 미비[4].

현대에는 전성기(특히 처음의 것)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쓰이기도 한다.

1.1.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발전한 이유

유독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발달할 수 있었던 까닭으로는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제국이 있었던 장소이며 터전이기 때문에 고대 문화의 보존이 잘 돼있고, 따라서 라틴족의 찬란했던 로마제국이 하루아침에 야만인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당한 것에 대한 이탈리아인들의 분노도 있었다. 뭐, 로마가 패망하였다고 해서 그 도시들도 같이 파괴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탈리아인들의 그러한 분노는 어느 정도 존재하였다.

그리고 중세 유럽을 지배하였고, 중세 사람들의 삶을 결정짓던 대표적인 제도인 봉건제가 유독 이탈리아에서는 발전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비록 크게 번영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이탈리아는 로마가 멸망했어도 도시라는 것이 존재하였고, 또한 이탈리아는 분열이 되었기에 딱히 군주라는 개념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지중해 무역의 중심이라 부유한 시민(상인)계층들이 많이 존재하였고[5], 십자군 전쟁으로 비로소 지중해가 평정이 되자 비교적 수월하게 상업활동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이후 부유한 시민들이 행정력을 장악하여 도시의 지배자가 되었고, 이들은 그 도시에서는 왕과 같은 권력과 지위를 누리게 된다. 이들은 (돈버는) 재능을 중시여기고 현실적인 이해타산이 확실하였다. 따라서 종교와 윤리적 규범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를 한다면 정통성의 문제가 있게 되지만 이들은 예술가들[6]이 자신들과 비슷한 속성인 재능에 기반을 둔 직종이라는 것을 알아차려 그 예술가 집단을 후원해주고 정통성을 얻게 되었다.

다만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활발하게 진행이 되었음에도 이것에 대해 연구한 이탈리아인 학자가 없는 이유[7]는 이때의 이탈리아가 분열이 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의 이탈리아인들이 관심을 가진 부분은 제각각 달랐기 때문이다.

1.2. 건축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은 15세기 초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에 의해 피렌체에서 시작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르네상스 시기 이전의 이탈리아 건축은 기술적으로 고딕에 비하면 뒤떨어져 있었다. 북쪽의 '야만인'들은 자신들이 멸망시킨 로마의 건축 유산을 잘 이어받아 로마네스크 양식이라는 모방을 넘어 고딕이라는 대담하고도 놀라운 구조의 건축양식을 만들었던 것이다.[8] 고딕건축으로 지어진 높은 성당과 거기에 들어간 기술 - 플라잉 버트레스, 리브볼트 등은 이탈리아인들이 가지지 못했던 신기술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는 자존심이나 미학적인 취향의 다름으로 인해 고딕의 새로운 구조를 높이에만 집착해 추한 덧댐으로 마무리된 불완전한 구조로 규정했다. 그리고 르네상스 건축은 다른 방향으로 발전을 모색하게 된다. "높이"에 집착하던 고딕과 다르게 건축물의 높이는 좀 낮더라도 건축의 "완성도"에 집중한 것. 기둥과 창의 엄격한 배치와 구성(오더), 기하학적인 형태와 비례를 가진 장식, 중앙으로 집중되는 평면 구조와 거대한 을 통해서 완벽한 구성미를 가진 건축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어쩌면 정신승리의 일종일지도 물론 기술적 성취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새로운 르네상스 성당들을 여러 곳 건설하면서 점점 더 거대한 벽돌 돔을 건축하는 등의 기술적인 발전 역시 뒤따르게 된다.


피렌체두오모가 대표적인 예이다.[9] 당시 유럽에는 이 성당의 돔 크기를 능가하는 건축물은 없었다[10]

고딕 성당과 비교한다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들로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뾰족하고 높은 첨탑과 외부로 나와있는 기둥들, 넓은 스테인드 글라스와 높은 천장을 가진 성당은 고딕양식이다. 반면 네모와 같은 도형과 그리스, 로마식 기둥과 창으로 장식된 벽면, 그리고 건물 가운데의 거대한 돔과 그 아래의 큰 공간을 가진 성당은 르네상스 양식이다. 다만 이후 시대로 가면서 점점 위의 특징들이 섞이게 된다는 점은 유의하자. 이러한 특징은 고대 로마의 건축을 제대로 연구해 응용한 것으로 레온 알베르티에 의해 로마 고전주의가 부활한 것이 계기이며 그동안 서유럽의 건축 구조에서 등한시한 돔이 다시 건축구조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다가 16세기에 고전법칙에 집착한 르네상스 양식에 대한 반발심으로 매너리즘 건축이 등장하게 되었다. 메너리즘은 일반명사로는‘습관적 반복, 상투적인 모방, 진부한 기교’ 등을 일컫는 말로 새로운 창조력이 상실되었다는 부정적 의미가 들어있다. 고유명사가 되면 달라진다.

매너리즘의 특징은 심한 탈 법칙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당시 종교개혁이 발생한 시대 상황의 산물인 측면이 많았지만 르네상스 양식을 대체하지는 못했고, 알프스 이북 너머로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알프스 이북 너머로 르네상스 건축 양식을 받아들인 곳은 프랑스로 이탈리아와도 지리, 인종, 언어, 문화 등 여러 면에서 가까웠을 뿐 아니라 이미 로마 시대부터 전 국토가 속주에 편입되어 로마 건축 양식을 경험한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거부감이 적었다. 또한 롬바르디아를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있었고 종교개혁의 여파가 적었기 때문에 교황청이 주도하던 르네상스 표준 고전주의를 적극 수입할 수 있었으며, 르네상스 애호가였던 프랑수아 1세때 시작되었다.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예술가들을 프랑스로 초청했고, 그중에 1541년 이주한 세바스티아노 세를리오는 프랑수아 1세의 수석 화가이자 건축가로서 부분적으로 프랑스 전통 양식을 혼합된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성관을 지으면서 프랑스 르네상스 건축 양식의 시작을 알렸다. 이후 피에르 레스코와 필리베르 들로름에 거쳐 세르소 가문에 이르려서 점차 이탈리아 르네상스 표준 양식과도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1세기가 지난 16세기의 영국에서도 뒤늦게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지리적으로 이탈리아와 먼 것과 종교개혁의 여파 때문에 1534년에 교황청과 단절되는 등 가톨릭이 지배하고 있던 로마와의 교류가 어려웠다.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때부터 권력층의 성채나 생활환경 등에서 이탈리아 풍이 유행하는 형식으로 르네상스 건축이 단편적으로 등장했지만 본격적으로 양식 운동으로 나타난 것은 17세기가 지나서였다.

프랑스와 달리 자연스러운 예술운동이 아니라 왕권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스튜어트 왕조가 신교와 연합하면서 자신들의 정치 이상을 상징할 새로운 건축양식이 필요해졌다. 중세 가톨릭을 이끌던 고딕을 밀어내고 르네상스 고전주의가 선택되었고, 이니고 존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대체적으로 이니고 존스 한 개인에 의해 선도되었고, 그에 따라 독창성도 부족했다.

독일의 경우 프랑스와 영국에 비해 침체된 상태로 개별 건물에 부분적으로 르네상스 어휘를 사용하는 정도였고 정식 양식운동으로서 르네상스는 미진한 상태로 독일 내부 사정이 제일 큰 이유였다. 종교개혁의 발상지로서 16세기부터 크고 작은 종교분쟁과 전쟁이 이어졌으며 1618년에는 신·구교 간에 발생한 30년 전쟁이 발생했고, 결과적으로 메너리즘이 유행했고, 이탈리아 메너리즘과 달리 분산적 장식을 이용한 흥겨운 율동이 주요 특징이었다.[11]

1.3. 조각

천재적인 건축가, 조각가였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등이 많은 작품을 만들었으며, 완벽함의 상징이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에 비견될만한 걸작들을 쏟아낸다. 당시 발굴된 고대 조각의 최고 걸작인 라오콘상은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후 파묻었다는 루머가 있을 정도.

1.4. 회화



회화에서는 마부에를 시작으로, 치오 디 부오닌세냐 두치오 데 루카가 아니다!, 지오토 디 본도네등의 예술가들이 초기 르네상스를 장식했다.

이후 중기에는 리포 브루넬레스키, 렌초 기베르티, 도나텔로[12], 올로 우첼로, 사치오, 라 필리포 리피, 나토 브라만테, 드로 보티첼리,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등이 활약했다.

후기 최전성기에는 반니 로렌초 베르니니,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산치오, 치아노 베첼리오,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등이 유명하다.[13]

1.5.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쇠락

분명 유럽 대륙의 정세가 혼란하고 지중해 무역이 성행하던 15세기까지는 나름대로의 군사력과 재력, 정보망을 틀어쥔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여러모로 유리한 입지에 있었다. 도시국가의 영주들이 무식한 힘싸움보다는 문화와 부의 과시를 통해 자존심 경쟁을 벌인 것도 한 몫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이 출현하자 상황은 달라진다. 오스만이 지중해 동부를 틀어쥐고 무역로를 차단하면서 이제 지중해를 통한 동방무역은 난항에 부딪친다. 자연히 이탈리아의 경제력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포르투갈스페인이슬람을 몰아내고 대항해시대를 열기 시작하면서 유럽 무역의 중심은 대서양으로 이동한다.

그래도 15세기 말까지는 대륙의 사정이 혼잡해서 외침의 걱정은 없었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백년전쟁을 마무리한 후 이탈리아에게 군침을 흘리기 시작하고, 여기에 신성 로마 제국스페인을 비롯 전 유럽을 한 손에 틀어쥔 합스부르크의 강대한 황제 카를 5세의 출현으로 이탈리아는 대륙의 영향 하에 놓이기 시작한다. 이제 대륙 세력은 이탈리아 개별 도시 국가로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입김이 강해진 것이다.

16세기가 시작되면서 이탈리아는 유럽 강대국들 사이에서 땅따먹기의 현장으로 변하고 특히 1525년 이탈리아를 둘러싼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카를 5세에게 개관광당함으로써 이탈리아는 사실상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 하에 놓이고 만다. 이로써 이탈리아의 부와 문화는 급속도로 대륙으로 유출되는 한편, 길었던 평화도 막을 고하고 불안한 시기가 찾아오고 만다. 이 시점을 흔히 '르네상스가 알프스 이북으로 건너간 분기점'이라 칭한다.

이에 당황한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어떻게든 이탈리아 내에서의 자주권을 확보하고자 코냑 동맹을 결성해 발버둥쳤으나, 이것을 명분으로 카를 5세는 교황의 비열함을 비난하면서 가톨릭 군대로 하여금 교황령을 털어버리는 진풍경을 연출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사코 디 로마. 이 전쟁에서 시원하게 털린 교황이 6개월이나 유폐에 가까운 피난 생활을 하는 동안 로마는 쑥대밭이 되었고 로마에 세워진 르네상스풍 건물은 개발살나서 현재 로마 시내에서는 르네상스풍 건물을 찾아볼 수가 없을 지경. 지못미.

사코 디 로마는 사실상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결딴냈다고 평가된다. 이후 결국 교황을 포함한 모든 이탈리아 도시국가가 카를 5세 밑에 굴종하는 처지로 전락했으며, 이탈리아는 지난 세기의 영화를 대륙에 내준 채 3류 세력으로 전락하고 만다. 반면 대륙으로 이식된 르네상스는 그 나름대로 각국의 토양에 문화가 융성하게 꽃피는 기폭제가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르네 데카르트같은 우수한 철학자과학자들이 출현할 수 있었다. 특히 15세기 이탈리아 못잖게 상공업과 개방성을 중시했던 네덜란드의 경우 이를 바탕으로 회화 예술이 붐을 일으켰다.

또한 종교에 대한 회의적 시각은 종교개혁에도 영향을 주었고, 군주론이라든가 인문주의에서 파생된 사회계약설은 훗날 유럽 각국의 절대왕정 체제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적어도 계몽주의의 새로운 바람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각국 귀족과 군주들의 후원 하에서 다방면의 발전이 계속될 수 있었다.

2. DCinside에서 시작된 합성계의 대변혁

2008년 경 Dcinside에서 일어난 문화의 혁신. 전진, 구준엽 등으로 변화의 발판이 마련된 가운데 빠삐놈이 등장해 본격적인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빠삐놈전진, 구준엽, 나아가 뿌뿌뽕빵상 등까지 끌어들이며 HIT 갤러리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빠삐놈병神디스코믹스는 20000플을 달성하는 기적을 이루었다.
이후 내가 고자라니, 빌리 헤링턴, 달이 차오른다 가자 등이 연타석에 섰다. 이 이후 갑작스런 훈훈한 힛갤 분위기가 조성되고 내가 고자라니 중심의 동영상이 과하다 싶은 생각이 살짝 들 정도로 많이 제작되면서 퇴보하는 듯이 보였으나, '올드미스 다이어리'의 할머니 욕(이른바 할미넴)이 등장하면서 이전보다는 약해졌지만 그래도 넓게 보면 2011년 지금까지 르네상스가 이어지고 있다.
초기에는 음악이 그 중심축을 이루었지만 시간이 흘러 시각 자료 중심으로 내용이 변화하면서 고대 자료까지 부활해 진정한 르네상스를 완성하고 있다. 홍진호, 김대기, 티벳여우 등은 물론이요 홍석천, 딸녀, 개죽이, 장승업, 아시안 프린스까지 가세한 상황.

이 덕분에 합성 갤러리는 부활, 아니 아예 부활을 넘어서 진화에 성공했다.

2011년 초에 퍼진 Dcinside 인수논란으로 이 르네상스가 끝나는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이 떡밥이 '타회사로의 인수가 아닌 김유식의 유령회사를 통한 법인전환'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지면서 일단 우려는 많이 가라앉은 상태이다.

2010년 말에 정사갤 문화권이 합필갤을 점령하면서 많은 수의 장잉들이 떠나 합필갤의 르네상스가 끝난다는 말이 있었으나, 지역드립 등이 매우 논란이 되지만 새로이 합필의 길에 들어선 이들 덕분에 퀄리티는 유지하고 있다.[14] 2011년 8월에 급부상한 모형탑 기자(기자상스)처럼 지금도 새로운 소스들이 발굴되고 있지만, 고인드립 패러디 때문에 합필갤 앞마당이라고까지 불리던 힛갤에 입성하는 합필 작품이 눈에 띄게 줄었다.[15] 합성 갤러리 항목에 따르면 엄밀하게는 2009년까지가 르네상스라고 한다.

3. 대한민국의 순정만화 잡지


대한민국 최초의 순정만화 잡지. 1989년 11월 창간, 1994년 7월 폐간.

1980년대 후반, 한국 만화는 여러모로 격변하는 시대를 맞게 된다. 기존 대본소 체제가 서서히 한계에 부딪힌 반면, 작가층과 독자층 모두 양적, 질적 성장이 두드러졌다. 더구나 거품이긴 했지만 경제 성장으로 인해 독자층은 구매력이 한결 커졌고 자연스레 출판업자는 서점 진출이라는 리스크가 큰 사업에 도전해 볼 의향을 품게 된다. 이 무렵 학교앞 문방구를 점령해버린 불법 일본만화 역시 '재미있는 만화는 팔린다'는 희망을 품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이후 댕기(1991) 윙크(1993) 이슈(1995) 등 순정만화 잡지가 차례로 등장하며, 1990년대 초, 순정만화는 잡지를 통한 르네상스를 맞이한다.

한가지 재미있는 부분은 잡지 주제에(?) 장편연재보다 중편과 단편이 더 비중이 컸다.
르레상스 연재작 가운데 그나마 장편이라고 꼽는다면 원수연의 '엘리오와 이베트'인데, 전10권. 그나마도 도중에 잡지가 망해서 다른 잡지로 옮겨서 완결했다.(...) 여타 장편(?) 연재작이라면 기껏해야 3~4권 분량 정도. 때문에 작가의 개성이 또렷하게 드러나고, 때로는 실험정신이 충만한 괴작이색작도 선뜻 실어주었고, 지금 와서 다시 봐도 읽는 맛이 있다.

더구나 최초의 순정잡지답게 참가한 작가진 면면을 살펴보면 입이 떡 벌어질 정도. 창간호부터 김동화, 한승원, 황미나같은 거물급 작가는 물론이고, 강경옥, 김진, 김혜린, 신일숙 등 1980년대 후반 대본소를 강타한 젊은 에이스들까지 연재했다.

또한 르네상스를 통해 만화 팬에게 이름을 알린 신인 작가들 또한 지금 보면 한마디로 ㅎㄷㄷ. 모림, 김은희, 계주, 이강주, 이빈, 은혜, 원수연, 유시진.

4. 삼성전자가 생산했던 오디오 브랜드

현재는 단종된 상태. 르네상스 이전에는 소노라마도 존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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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Renaissance의 영어식 표기이다.
  • [2] 우리가 알고 있는 르네상스라는 단어는 re, 즉 다시, naissance, 프랑스어로 부활, 즉 다시 부활이라는 뜻이다... 물론 어원의 기원은 라틴어인 리나시타이다.
  • [3] 애초에 고대, 중세, 근대라는 3시대 구분법이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한 것이다. 자신들과 가톨릭 가치가 우선시 되었던 중세를 구별하고, 다시 중세와 그리스-로마 시대로 대표되는 고대와 나눈 것이 3시대 구분법이다.
  • [4] 현대 역사학의 시대구분법은 칼 마르크스의 경제 체제에 따른 시대구분법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 [5] 그리고 비잔티움에 있는 과학자들, 건축학자들, 그리고 피난민들이 그 부에 끌려서 많이 이민했다. 그리고 이들은 곳 르네상스의 초창기를 화려하게 장식할 사람들이였다.
  • [6] 비단 화가나 조각가들만이 아닌 철학자와 수사학자, 인문학자 등을 모두 포괄해서다.
  • [7] 19세기까지 이탈리아는 외지인들에게 경이의 땅이었고, 관심의 대상이었다. 당연히 그 땅에 사는 사람들보다 외지인들이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것. 그리고 정말 르네상스를 연구한 이탈리아인 학자가 없었을까?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모르는 것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한다. 당장 위의 글에 언급된 바사리는 이탈리아인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가?
  • [8] 고딕이란 명칭 자체가 이탈리아인들이 비하의 의미로 붙인 명칭이다.
  • [9] 두오모는 돔이란 뜻이지만 대성당을 의미한다.
  • [10] 유럽 이외까지 포함하면 하기아 소피아와 Oljeitu Mausoleum이 가장 크다.
  • [11] 이 같은 기술은 다소 비판적으로 볼 여지가 많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그 당시 문명 발전의 최전으로 본 부르크하르트식의 역사관에 기초한 것인데, 같은 시대에서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두 집단을 단순비교하는 것이 맞는 문제인지는 좀 더 생각해보도록 하자. 독일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와는 다른 양식이 유지되었던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핵심이었던 고전주의적인 양식이 독일인들의 취향과는 너무 동떨어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고전주의적인 양식 외에는 이 지역에서도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같은 관심사들을 공유하고 창작에 활용했다. 독일에서 고전주의 양식이 유행하지 않은 이유는 도시 단위로 다른 취향을 갖고 있던 독일의 상황 때문이었다.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는 왕에 의해 국가 전체의 문화적 취향이 좌지우지 되는 프랑스처럼 어떤 한 취향을 가져가기 어렵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르네상스 양식이라는 것도 메디치가 피렌체 시의 절대권력이 된 이후에 등장한 소위 '하이 르네상스' 혹은 '피렌체 르네상스'이지 밀라노와 베네치아는 피렌체와는 다른 양식적인 특징들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본문에서 언급되는 독일에서 유행한 '매너리즘'은 '국제고딕양식'이라고 부르는 '고딕 매너리즘'이지,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르네상스 이후의 '매너리즘'와는 다르다. 독일인들의 입맛과 맞아 떨어지는 바로크는 르네상스와 달리 매우 쉽게 유입되었다. 베네치아 출신의 화가 티에폴로 등이 독일 내에서도 활동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관심 밖의 일이지만 많은 독일인 건축가들과 화가, 조각가들이 바로크 시대에 활동하게 된다. 이는 비슷한 사정이었던 네덜란드도 마찬가지. 15세기 독일과 네덜란드의 미술을 '북유럽 르네상스'로 지칭할지, '후기 고딕'으로 지칭할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거리지만,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와는 다른 성격을 지닌 북유럽 르네상스의 의미를 긍정하는 편이다. 물론 북유럽 르네상스에 대한 담론이 처음 등장한 건 나치의 싹수가 보이던 시대(...)였었지만....
  • [12] 아래의 인물 중 몇명과 더불어 닌자 거북이시리즈 주인공들의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 [13] 베르니니와 카라바조는 바로크의 대표 예술가로 분류된다. 그리고 베르니니의 주 작업은 조각과 건축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16세기 끝날 무렵에 태어나서 그들이 예술가로 활동할 때는 이미 17세기였다. 거의 한 세대 넘게 차이 나는 예술가들이랑 왜 함께 활동한 것처럼 분류한 것인지....
  • [14] 단 사진 합성에 한정. 음원/동영상 합성의 수준은 오히려 떨어졌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물론 몇몇 사람들은 고퀄의 작품을 내놓기도 하지만 평균수준이 그렇게 되었다는것. 사실 수준에 대한 문제는 개개인에 맡겨놓아야 할 문제지만, 합필갤이 정사갤/야갤 등의 영향권에 든 이후로 음원/영상 합성의 절대빈도수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다행히 2011년 10월 기준으로 점령기 초창기보다는 좀 나아진듯 하지만...
  • [15] 평균 2~3만, 못해도 1만힛을 하는 힛갤의 특성상 고인드립의 수위가 지나치면 법적 대응이 걸릴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