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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데카르트

last modified: 2015-04-10 01:20:58 Contributors


René Descartes
1596.3.31~1650.2.11

근대철학과 근대수학의 문을 연 경이로운 천재


Contents

1. 철학자로서
2. 수학자로서
3. 그 밖에


1. 철학자로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로 유명한 철학자.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사색은 방법적 회의(懷疑)에서 출발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라는 근본원리가 《방법서설》에서 확립되어 이 확실성에서 세계에 관한 모든 인식이 유도된다. 후에《성찰》에서는 '나는 있다, 존재한다.'로 제1명제를 치환하는데 그 이유는 "고로"를 포함한 표현이 전제와 결론처럼 읽히기 때문이라고......데카르트가 자기 견해를 더 표현하는 쪽으로 나아갔음에도 사람들에겐 이전의 공식이 너무 뇌리를 떠나지않아 그것도 "고로" 때문에 오늘날까지 제1명제는 보통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알려져있다. 덕분에 잘 모르는사람에게 더 까이고 있다.

데카르트는 가장 확실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를 찾으려 했다. 그가 살았던 시절 유럽대륙은 최후의 종교전쟁인 30년 전쟁으로 혼란에 빠진 상태였기 때문에, 종교적-정파적-문화적 차이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절대적 진리만이 혼란으로 인한 사회와 역사의 붕괴를 막을 수 있다고 봤기 때문.

학문에서 확실한 기초를 세우려 하면 조금이라도 불확실한 것은 모두 의심해 보아야 하는데 세계의 모든 것의 존재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치더라도 이러한 생각, 즉 의심을 하는 자신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라는 근본원리가 《방법서설》에서 확립되어 이 확실성에서 세계에 관한 모든 인식이 유도된다.
이 명제는 근대 철학을 대표하는 명제이며 데카르트 이후 근대 철학은 이 명제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특히 데카르트가 사용한 관념이라는 개념은 칸트와 같은 철학자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명제에 이어서, 의심하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에서 무한히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이 결과할 리가 없다는 데서 신의 존재가 증명되고 신의 성실이라는 것을 매개로 하여 물체의 존재도 증명된다. 이를 아주 거칠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유하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세상 모든 사람은 본유관념으로써의 신의 존재를 (믿고 안믿고를 떠나서) 인식한다.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 신은 완전한 존재이며 고로 극도로 성실하므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 실제 존재하지 않는 물체를 배치하여 우리를 기만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세상도 존재한다. 현대 논리학의 관점에서 도대체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할 지 알 수 없는 실로 엉망인 논증이지만(...) 이 논증 자체는 그것이 진리라고 데카르트가 주장했다기보단 수학적 연역을 통해 세상을 증명하려고 한 데카르트의 새로운 시도 중 하나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다. 수학자 겸업 철학자였던 그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가 이러한 논리를 전개한 이유는 그가 외부세계의 존재를 확립하는데 있어서 신의 존재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육체를 분리한 심신이원론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정신과 육체의 각기 다른 특성상 정신은 송과선을 제외한 육체의 어느 부분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즉, 정신과 육체가 친밀하게 결합되어있기는 하나 그 본질상 정신과 육체는 상호작용이 불가능하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자신의 정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을 의심하는 자신이 있다는 것으로 증명 가능하나, 정신은 육체에 영향을 받지 않고 그 반대도 성립되지 않으므로 육체와 물질적인 것들의 실존여부를 결론내릴 수가 없게된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모순점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으로 선량하고 완전한 신이라는 존재를 가정하였고, 그러한 주장의 뒷받침을 위해서는 신의 존재증명을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주장은 당대에도 까였는데, 피에르 가생디는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신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의 경우든 그 존재는 완전성은 아니지만, 존재 없이는 완전성이 없다. (중략) 존재는 완전성과 달리 한 사물 속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으며, 어떤 사물이 존재를 결여하고 있다면 그 사물은 단지 불완전하거나 혹은 완전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신의 완전성에 관한 정리를 선결 문제 요구의 오류를 범하지 않는 방식으로 진술하려면, "만일 어떤 것이 신성을 가진다면 그것은 존대한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 진술은 참일 터이지만, 신성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완벽하게 양립 가능하다. 그러나 어떤 것도 신성을 가지지 않는다면 신은 없을 것이고, 따라서 데카르트의 증명은 실패할 것이다.[2]

그보다 앞서서 심신이원론 또한 당대부터 까이기 시작했다. 찰스 1세의 조카딸인 팔라틴의 엘리자베스 공주는, 분명 운동은 접촉을 필요로하고 접촉은 연장을 필요로하며 영혼은 연장되어 있지 않은데 "어떻게 영혼이 육체를 움직일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여기에 대해 데카르트는 중력은 필요로 하는 표면접촉이 없는데도 물체를 아래로 밀어내린다며 반론했지만, 이러한 중력 개념은 데카르트 자신의 현학적인 혼란상태였다. 엘리자베스는 "나는 비물질적인 존재가 육체를 움직이고 육체에 의해 영향을 받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보다는 영혼이 질료와 연장을 가졌다는 것을 더 쉽게 용인할 수 있다."고 했다. 거기에 대한 데카르트의 답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영혼을 육체와 결합되어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므로 자유롭게 생각하라는 것이었으며, 그는 '더이상 그 문제로 어여쁜 머리를 괴롭히지 말라'고 대꾸했다.[3]

2. 수학자로서

여러분들의 만악의 근원 중 하나로 볼 수 있다.[4]

좌표계, 정확히는 직교 좌표계[5]를 도입했으며, 이것으로 인해 수학은 폭발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때문에 직교 좌표계는 그의 이름을 따서 'Cartesian coordinate'라고 부른다. 뉴턴이나 라이프니츠가 미적분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가 좌표계에 기초한 대수적 함수의 개념이 데카르트에 의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고등수학에서 좌표 안 쓰는 거 뭐 있는가...? 함수만 빼도 엄청나게 줄어버린다(n차함수, 삼각함수 , 지수-로그함수, 도함수(미분), 분수함수, 무리함수 등). 거기에 좌표를 통해 기하학과 대수학, 해석학이 결합하면서 해석기하학[6]이란 새로운 학문이 탄생했으니 좌표의 도입만으로도 데카르트는 수험생의 원수가 될 자격과 위대한 수학자의 반열에 들기 충분하다.

또 한가지 특기할 만한 사항은 데카르트는 처음으로 방정식의 미지수에 x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는 것.[7]

3. 그 밖에

몸이 많이 약한 편으로 그의 어머니에게서 유전된 듯하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것 때문에 부유한 그의 아버지는 그도 어머니처럼 일찍 죽을 것을 걱정하여, 그가 학교를 가고 싶다는 것을 말리고 그를 강제로 쉬게 했다오오 우리 아버지들도 저랬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시궁창

그래서 학교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수업을 그렇게 듣지를 못했는데도 철학자들이 대부분 그렇듯 공부를 무지 잘했다. 그런 그의 재능을 꿰뚫어 본 어느 관대하신 교장이 수업을 듣는 대신에 그 시간에 데카르트에게 늦게까지 잠을 자는 것을 허락했다 데카르트의 늦잠 자는 버릇은 이 때부터 시작된 듯하다.[8] 그러나 이런 늦게까지 침대에 있는 습관에서 그는 사색과 생각을 많이 했고 이 생각들이 훗날 그의 사상에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대표적인 업적이 위에서 말했던 좌표의 발견인데 날벌레가 천장에 붙어있는 것을 보고 저 날벌레의 위치를 계산하려다가 만들어 진 것이 바로 좌표의 발견이다.

본래는 철학보다 과학(수학)에 흥미가 있었으며, 1619년 11월 10, 11일 밤에 생생한 꿈을 세 번 꾸고 일생을 과학에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1633년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교회로부터 단죄 받아 지동설에 대한 갈릴레오의 모든 저작이 불태워졌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과학을 버리고 철학을 선택했다.

평생동안 사시[9]인 사람에게 호감을 가지고 살았다. 딸의 이름도 자신이 어린 시절 좋아하던 사시인 소녀의 이름인 프랑수아즈에서 이름을 따서 비슷한 이름인 프란시느라고 붙여주었다.

많은 업적과 대조적으로 동물을 사랑하는 이들과 수포자에게는 천하의 개쌍놈이나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는다. 우리나라 동물 관련 잡지에서도 철학자로선 위대하지만 동물학자들에겐 재앙 같은 존재로 바로 그를 언급하며 이러한 말을 한 것을 소개한 바 있다.

동물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처럼 말도 안 되고 우스운 이야긴 없다.

생각할 수 있는 사람만이 고로 영혼을 가진 증거이다.

보통은 동물기계론이라 불리는 사상이다. 그는 이 주장을 더욱 밀어붙여 사고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들 역시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기계와 다를 바 없다 여기기도 했다. 이를 통해 볼 때 그가 가진 사고가 인간중심적 사고였다기보다는, 이성중심적 사고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상은 기독교를 비롯한 전근대 시대에선 흔한 사상이라 그만 가지고 까는 건 다소 억울한 일이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자 영혼을 가진 유일한 존재로서 20세기 초중반까지, 아니 지금도 이렇게 여기는 시각이 많이 남아 있다는 걸 생각하면... 여담으로 시튼 동물기로 유명한 어니스트 시튼만 해도 동물이 사람을 이기는 소설이나 그림을 그렸다가 당시 엄청난 비난에 시달려야 했었다. 그보다 말이지, 한 발 더 나가서 인간기계론을 말한 사람도 프랑스인이라고!

애초에 단지 저 몇 마디 말만으로 희대의 동물학대범이라고 보기는 뭐한 것이 지금도 채식주의자와 육식주의자가 논쟁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다른 동물의 살을 뜯고 가죽을 무두질하고 뿔을 장식으로 쓰고 기름을 마시고 있지 않은가. 그 모든 행동의 기반에는 인간 외의 다른 동물은 사람보다 못하다는 인식이 있는 것 또한 분명하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당신은 눈 앞에 사람과 고양이 중 하나만 구할 수 있다면 누굴 구하겠는가? 아무 이유도 없이 동물을 학대하는 건 분명 비윤리적인 일이다만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생각할 수 있는 영혼을 지녔다는 저 말 자체는 지금 이 시대의 사고관으로 판단하여도 동물에 대한 비윤리적 학대의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단적으로 윤리란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것, 인간에 의해 사용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20대에는 용병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네덜란드에서 군복무를 거쳤다. 참고로 당시는 30년 전쟁 초기로,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프랑스가 대립하던 최전선.

1635년 7월 19일, 네덜란드에 있을 때 헬레나 얀스(Helena Jans van der Strom)라는 이름의 가정부[10]에게서 딸 프란시느(Francine)를 얻는다. 관계한 날짜를 일기에 기록했기 때문에 친딸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결혼을 하지 않고 얻었기 때문에 사생아라서 사람들에게는 프란시느가 자신의 조카라고 둘러댔다.

1640년, 데카르트는 프란시느를 프랑스로 데리고 가서 교육을 받게 할 것이라고 기록한다.[11] 하지만 프란시느는 동년 9월 7일, 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성홍열에 걸려 세상을 일찍 뜬다. 데카르트는 친구가 자신의 가족을 여의었을 때, 영혼 불멸에 대한 확신 같은 것을 말해가면서 꿋꿋이 슬픔을 참고 이길 것을 간곡한 편지로 써 보냈지만, 바이예에 의하면 데카르트는 프란시느가 죽은 후 몇 날 몇 일을 서럽게 울었다 한다.[12]

소문으로는 생전 딸의 모습을 빼닮은 피규어자동인형을 제작해서 전 유럽을 여행할 때마다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꼭두각시 서커스가 연상되면 그것은 기분 탓이다 하필이면 프란시느 인형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 하고 혐오했으며, 최후에는 데카르트가 배를 타던 중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 한 선장이 가방을 들추어보았고, 너무나 사람과 똑같이 생긴 인형을 보고 혐오스럽다고 생각해 바다에 빠뜨렸다는 얘기가 있지만 후대 사람들은 평소 데카르트에게 원한이 있던 사람들, 특히 그의 사상에 반기를 든 이들이 지어냈다며 이 일화를 거짓 취급한다. 단, 가정부와의 사이에서 딸을 두었고, 그 딸이 죽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얘기를 결부시켜 프란시느 인형 얘기를 꾸며낸 것 같다.

말년인 1649년에는 스웨덴크리스티나 여왕의 간곡한 초청으로 스톡홀름에 이주하여 여왕에게 자신의 철학을 강의했는데 문제는 여왕이 새벽 5시부터 강의를 시작할 것을 요구한 것. 이러한 스케줄은 보통 사람이라 해도 체력상 쉽지 않은데 설상가상으로 데카르트는 원래 몸이 약해서 항상 오전 늦게까지 잠을 자던 사람이었다.[13] 결국 과로에다 스웨덴의 혹독한 겨울 날씨에 따른 폐렴까지 겹쳐서 다음 해인 1650년 사망하고 만다. 아침형 인간의 허구성을 보여주는 사례.

여담으로 1791년 그의 묘지를 인장하던 중 두개골이 없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1878년 스웨덴에서 경매에 붙여졌다. 현재는 프랑스 인류학연구소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이마에 "이 두개골은 르네 데카르트의 두개골이 맞다. 스웨덴 근위대장 한스트림이 보증한다."라고 적혀있다. 한때는 전시했으나 지금은 전시하지 않고 나무 상자에 보관하고 있다. (출처:EBS 다큐프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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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부업이 용병이었다고.
  • [2] 앤서니 케니 편, 김영건 옮김, <서양 철학사>(이제이북스, 2004), P.187
  • [3] 앤서니 케니 편, 김영건 옮김, <서양 철학사>(이제이북스, 2004), P.183~184
  • [4] 그런데 만약 좌표계가 없었으면 여러분은 아직도 중학교 2학년의 그것을 가능한 한 끝까지 사용해야 하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가능한 한 끝까지가 어떤 것인지는 메넬라우스의 정리, 체바의 정리를 보면 어느정도 감이 올...까?
  • [5] 다만 이 당시 음수의 개념은 없었다고 한다. 일화로 좌표 개념을 떠올리게 된 이유는 몸이 허약해서 병영 내무반에서 누워 지내다 천장의 날벌레의 움직을 나타낼 방법이 궁금해서였다고 한다. 흠좀무.
  • [6] 방정식, 함수 등을 이용해 도형의 원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 [7] 데카르트가 미지수에 X를 쓴 이유로는 그의 책을 출판할 때 인쇄소에서 요구했다는 설이 있다. X는 잘 안 쓰는 알파벳이라 활자가 남아돌았고 재고 처리를 위해 그렇게 요구했다는 것(...)
  • [8] 설마 이게 죽음의 원인이 될 줄은 몰랐지
  • [9] 정확히는 내사시(內斜視).
  • [10] 결혼은 하지 않았다.
  • [11] Russell Shorto, 『Descartes' Bones: A Skeletal History of the Conflict Between Faith and Reason』, New York : Random House, 2008.
  • [12] 르네 데카르트, 최명관, 『데카르트 연구 방법서설ㆍ성찰』, 서울 : 창, 2010, 51쪽.
  • [13] 수도원 시절에도 (수도원에는 새벽 미사가 있다) 정말로 못 일어나서(...) 담당 신부로부터 특례로 새벽 기상을 면제 받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데카르트가 아주 골골대는 사람은 아니었고 사병 복무도 했었고 검술 수련도 열심히 했으며 결투도 좀 했다고 한다. 다만 타고난 체질은 약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