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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판 베토벤

last modified: 2016-04-26 23:18:15 Contributors

Ludwig van Beethoven

1770년 12월 17일 ~ 1827년 3월 26일

youtube(FwZsDzGY1XA)
▲ 피아노 소나타 Op.106 No.29 "함머클라비어"(Hammerklavier) 전 악장. 다니엘 바렌보임 연주.

독일클래식 작곡가. 통칭 악성(樂聖). 위대한 음악가 중 한 명이다.
흔히 요제프 하이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함께 고전파음악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알려져 있지만, 고전파음악을 완성하게 하면서 낭만주의음악[1]을 선구하는 역할을 하면서 음악사상 중요한 역할을 한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후대에 슈베르트, 슈만, 바그너, 베를리오즈, 브람스를 위시해 유명한 낭만파 음악가들이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게 많이 영향받았다.

베토벤이 아니라 '베트(호)-픈'이라고 읽어야 독일어 원음에 가깝다.[2] 이것은 姓인 '베토벤'이 Beet+hoven[3]의 합성어이기 때문인 듯하며 Beet-ho-ven으로 끊어서 읽게 된다. 발음기호상 /ˈluːtvɪç fan ˈbeːt.hoːfən/. 독일 음악대학으로 유학한 대한민국인들이 베토벤 베토벤 거리면 현지 교수들이 발음을 고쳐주려고 한다고 하지만, 정작 이름은 네덜란드식...[4] 한글로 쓸 때도 베토밴, 배토벤, 배토밴,배트맨 등 헷갈리는 사람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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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판 베토벤, 요제프 루트비히 슈틸러, 1820년

Contents

1. 생애
2. 루트비히 판 베토벤가 남긴 화제
3. 주요한 여러 작품
3.1. 교향곡
3.2. 협주곡
3.3. 실내악
3.4. 독주곡 (피아노)
3.5. 독주곡 (바이올린)
3.6. 종교음악
3.7. 오페라
4. 루트비히 판 베토벤 오류


1. 생애

1770년 12월 17일 독일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루트비히는 네덜란드 출신으로 독일로 이주하여 본 궁정의 악장을 지냈고 아버지인 요한은 궁정 가수였지만 잦은 폭음으로 결국 목소리가 상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신동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이 크게 주목받았기에,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아버지인 요한은 아들을 이용해 돈과 명성을 얻을 속셈으로 어린 루트비히를 그야말로 쥐잡듯이 잡으면서 피아노를 연습하게 해서 아버지를 굉장히 싫어했으며 장례식에서도 슬퍼하기커녕 비웃기만 했다는 일화가 있다. 한 때 화나서 피아노를 부수려고 했지만, 어머니의 만류로 포기한 일화도 있다. 7살에 본의 궁정에서 피아노 연주회를 개최했다고 전하며, 어린 루트비히의 음악상 재능을 식별한 크리스티안 고틀로프 네페에 의해 겨우 아버지에게서 해방되어 음악의 기초를 공부하게 되었다.

1787년에 본 궁정의 궁정 교회 오르가니스트가 되었고 1789년에는 빈에 가서 평소 존경하던 모차르트를 만났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두 사람은 별로 사이 좋게 만나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이 음울해 보이는 젊은이에게 별로 감동받지 못했다고 전한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도 당시엔 평범한 견습생에 불과했고 어머니의 위독 소식을 듣고 본으로 돌아갔으며, 어머니는 결국 그 해 죽었다.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의 가장이 된 루트비히였지만 빈에서 음악가로서 성공하고 싶다는 꿈을 포기하지 못했던 그는 고향의 절친한 귀족들과 친구들이 도와준 덕분에 1792년에 마침내 빈으로 유학을 떠났고 죽을 때까지 빈에서 살게 된다.

빈에서 베토벤은 저명한 요제프 하이든의 문하에 들어가서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리 성실한 제자는 아니었다. 늙은 하이든을 속여 먹다가 들통나자 하이든은 베토벤을 되먹지 못한 존재로 취급했다고 한다.[5] 일각에선 하이든이 나이가 들어서 베토벤을 만족하게 할 만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게 원인이라고 보기도 한다.[6] 요제프 하이든 외에도 쉔크, 살리에리 등에게 배우면서 음악가로서 성장해 나아갔다.

1795년, 마침내 빈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하여 성공했다고 할 만한 음악가로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빈에서 베토벤은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쌓아갔고 이듬해에는 프라하, 드레스덴, 베를린으로 연주 여행했다. 1800년에는 1번 교향곡과 6곡의 현악 4중주곡을 발표해 성공하며 그가 음악가로서 승승장구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베토벤은 이때부터 귀가 점점 들리지 않게 되는, 음악가로선 치명적이라 할 만한 문제[7]를 안게 된다.[8] 베토벤은 하일리겐슈타트로 가서 유서를 쓸 정도로 고통스러워 했다. 이 시기에 쓴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는 베토벤 사후에 발견되었으나 유서를 썼다고는 해도 자살을 기도하지는 않은 듯하다. 참고로 당시 지내던 하일리겐슈타트에 있던 집도 현재까지 하일리겐슈타트 베토벤 박물관으로 남아 그의 유품과 당시 쓰던 물건이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유서를 쓴 후 자신에게 주어진 음악적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고 새롭게 결의한 베토벤은 그 후로 걸작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1802년에는 2번 교향곡을, 이듬해에는 오라토리오 "감람산의 기독"을 작곡했다. "감람산의 기독"에서는 사망을 눈앞에 두고 고뇌하는 기독의 모습이 귀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고뇌하던 베토벤의 절절한 모습과 묘하게 중첩되어 있다.

1804년,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자신의 3대 교향곡 중 첫 번째 작품인 3번 교향곡 "영웅"을 작곡했다. 영웅 교향곡에서 베토벤은 앞선 두 교향곡에 남아있던 요제프 하이든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영향에서 완전히 탈피해 자신만의 음악계 구축에 성공했다. 기존 교향곡 작곡가들보다 훨씬 규모가 큰 1악장과 장송 행진곡을 도입한 2악장 등 당대로서는 파격적인 실험을 시도해 성공한 작품이 되었다. 원래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고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을 달았다가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르자 격분한 베토벤이 "보나파르트"라고 적은 표지를 갈갈이 찢고 "에로이카"(영웅)로 고쳤다[9]는 이야기가 전하지만, 일각에선 나폴레옹에게 헌정하기 위해 쓴 곡이 아니라 어떤 귀족에게서 청탁받아 쓴 것일 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영웅교향곡부터 약 10년간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절정의 물 오른 창작열을 발산해 많은 걸작을 탄생하게 했다. 영웅교향곡을 작곡한 이듬해인 1805년에는 오페라 "피델리오"를 작곡했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10] 그 후 괴테의 시에 기초한 시극 "에그몬트", 5번 교향곡 "운명", 6번 교향곡 "전원"과 피아노 협주곡 제5번 "황제", 바이올린 협주곡 등 다양한 작품이 탄생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이전 작곡가들과는 달리 귀족들에게 후원받았지만 그 귀족들에게 예속되지는 않았고 유럽 각국의 출판사들이 앞다투어 베토벤의 여러 작품의 악보를 인쇄해 판매한 덕에 베토벤은 그럭저럭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베토벤은 소위 불멸의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고 하는데, 이 편지의 주인공인 '불멸의 연인'이 누구인지는 지금도 논란 중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불멸의 연인 항목을 참고.

1815년 이후,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은 정세가 안정되었다. 정세가 안정되자 빈 청중의 음악상 유행도 바뀌어서 그 전보다 가볍고 경쾌한 음악이 애호되었다. 베토벤의 음악상 스타일은 이런 추세와는 거리가 있었던 탓에 창작 활동이 잠시 주춤하게 되었으나 그의 음악은 더 원숙해지고 깊은 경지로 들어가게 된다.

이 후기에는 9번 교향곡 "합창"과 "장엄미사"[11]가 작곡되었는데 합창 교향곡의 초연 당시 귀가 완전히 멀어 있던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청중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해 가만히 있었고 알토 가수 웅거가 베토벤를 부축해 돌려세워서 청중의 엄청난 환호를 보게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웅거는 고음 파트가 너무 어려워 베토벤에게 수정을 요청했다가 눈물 쏙 빠지게 혼이 났던 적이 있는 가수였다.

말년으로 갈수록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생활은 피폐해졌는데 가장 큰 원인은 조카 칼의 문제였다. 독신으로 살아가면서 자식이 없던[12]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동생 카스퍼(1815년에 43살로 죽었다.)의 아들인 칼의 친권을 놓고 카스퍼의 부인과 법정에서 분쟁하기까지 한 끝에 칼의 친권 획득에 성공하지만, 죽을 때까지 칼과 갈등했다. 아마 조카를 그냥 내비뒀다면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수명이 10년은 길어졌을지도 모르는데 조카한테 용돈 주고 일일이 영수증 끊어오라고 했다하니 조카가 짜증낼 만도 했겠다.(…) 그런데… 애니메이션 감독이면서 클래시컬 뮤직 마니아로서 책도 여럿 쓴 동헌 감독이 쓴 책에서도 돈에 유달리 매달리던 음악가로 단연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꼽혔지만,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구두쇠이거나 돈에 미친 건 절대로 아니다.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으로 죽어가면서 집안을 맡을 당시 가난에 시달리던 시절도 있었고 귀가 들리지 않으면서 모처럼 안정되던 음악단 지휘자도 그만 두면서 생활고로 곤란해했기에 저작권에 죽을 힘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돈에 관련된 일화로, 유서를 쓰던 곳으로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안정을 취할 당시 그 지역 작은 시골 악단이 베토벤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지역을 상징하는 음악을 하나 만들고 싶은데 그 유명한 루트비히 판 베토벤 선생이 오신 걸 듣고 찾아왔다는 것. 다만 워낙에 시골이고 겨우 마을 사람들과 농부들을 이롭게 하려고 연주하는 수준인지라 돈이 조금밖에 없지만 염치불구하고 부탁 한번 드려보고자 찾아왔다고 하자 베토벤은 이런 작은 마을에 음악단이 있다는 것 자체부터가 대단하다면서 내 어찌 그런 여러분 요청을 거부하겠느냐고 작곡까지 헐값에 해준 적이 있을 정도로, 그가 태생적으로 돈에 얽매인 사람은 아니었다. 귀족들에겐 거액을 부르곤 했지만, 그것조차도 많이 준다고 거들먹거리는 귀족들을 보며 코웃음치기 일쑤였다.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베토벤이 개무시하자 감히 후작인 나를 우습게 보느냐며 화를 낸 어느 귀족에게 차가운 눈으로 한 마디 던졌던 적도 있다. "세상에는 당신 같은 후작은 얼마든지 있으나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이 세상에 나 하나 뿐이오."오오 폭풍간지 오오

평소에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갈수록 옷차림이나 외모에도 신경을 쓰지 않아, 심지어 거리의 노숙자와 분간되지 않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스트레스 상황에 노출된 걸 길거리에서 소리를 마구 지르면서 풀거나[13] 집에서 기냥 찬물을 얼굴에 퍼붓곤 바깥으로 나오는 통에 사람들을 멍하게 했다.한번은 경찰관에 의해 노숙자로 오인받아 체포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자칭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라는 노숙자 영감을 미치광이 취급하던 경찰관은 뒤늦게 달려온 경찰서장이 그 사람이 진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라고 확인하자 데꿀멍했고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경찰서장에게 훈계했다. "배트맨베토벤도 못 알아보는 녀석들더러 도둑은 어떻게 알아보라고 거기 세워 놓았소?"

그리고 작곡가·음악가를 대상으로 한 저작권에 관련하여 여러 가지로 신경쓴 선구자로서도 알아준다. 더불어 당시까지만 작곡가들이 귀족들이 대주는 후원금으로 생활하는 방식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던 인재다. 제 아무리 돈을 줘도 귀족들이 뭐라고 하면 가차없이 쓴소리를 퍼부었고 굉장히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왕족이니 귀족이니 그딴 거 뭔데?"라고 여겼으며 프랑스자본가혁명도 바람직하게 여겼기에, 숭배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황제가 되자 배신감으로 바치려던 악보("영웅" 교향곡(No.3))를 수정했다는 전술한 이야기가 인정될 정도. 그것을 다룬 굉장히 유명한 이야기라면 1812년 당시 작가로서 유럽에서 세계에서 가장 알아주던 괴테와 만난 이야기이리라. [14]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평소 괴테의 글을 좋아했고 괴테도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명성을 잘 알던 터라 둘은 무려 21살 차이에도 즐겁게 대화했지만… 얼마 뒤 거리에서 오스트리아 황족 일행 혹은 어떤 귀족이 나타나자 괴테는 모자를 벗고 물러서서 고갤 숙였는데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모자를 쓴 채로 고개를 뻣뻣이 들고[15] "황족이 뭐 잘났어?" 라는 투로 황족 일행 사이를 거리낌없이 지나갔다. 괴테가 나중에 그걸 뭐라고 하자 실망한 듯이 "당신과 나는 안 맞나 보군요…"라고 고별하고서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후일 루트비히 판 베토벤 연구에 기여한 막시밀리안 타이어의 기록을 보면, 괴테도 나중에 그 일화를 회고하면서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 자신은 맞지 않는다고 지인들에게 이야기했다고. 즉, 위 일화는 사실에 가깝다.[16]

타이어의 기록을 보면,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숙집에서도 괴팍한 모습을 자주 보였는데 에서 사는 35년간 이사를 42번이나 했다고 한다. 1년에 한두 번은 기본으로 이사한 셈인데 성격이 워낙 괴팍한지라 하숙집 주인들이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루트비히 판 베토벤을 존경해 줬더니 신경 쓰여서 작곡을 못하겠다고 이사했다는, 어떤 하숙집 주인의 기장 내용이 있다…. 황당했겠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일기장을 보면 집안일을 하던 가정부들에게도 두어 달을 못 견뎌 그만두게 할 정도로 깐깐하게 굴었다고 한다. 가정부가 청소하다가 한 곳을 대충 청소하면 종일 잔소리를 했던 건 기본이고, 평소에 미식가였던 베토벤은 자신이 고용한 요리사의 요리가 미흡하자 요리사를 해고하고 자신이 직접 쇠약한 몸을 이끌고 요리했다고 한다.

말년의 괴팍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영화 《카핑 베토벤》에서 매우 자세히 묘사했다. 더 록의 프랜시스 허멀 장군역으로 유명한 에드 해리스의 베토벤 연기는 이 영화의 백미.

그러나 이 시기에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자신의 교향곡보다도 위대한 음악으로 찬사받는 후기 현악 4중주곡을 작곡했다. 많은 사람은 이 후기 현악 4중주곡을 "현악 4중주의 신약성서", "인류가 도달한 가장 위대한 음악의 경지"라고 부르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더불어 이 시기엔 돈도 제법 벌었다. 한 번 연주로 엄청난 거액을 받은 것도 이 시절 일이지만 이 와중에도 몸 속에 파고드는 고통 때문인지 베토벤은 종교에 대하여 매우 탐탁지 않게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일기장에 교회에 가서 헛소리로 울며불며 기도하느니 작곡하면서 남은 시간을 지내겠다고 쓴 걸 보면,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면서도 음악이라는 이름으로 그걸 극복하려 한 모양. 베토벤은 죽기 직전까지도 많은 작품을 구상했을 만큼 음악에 열중했다. 영국 필하모니아 협회가 청탁한 교향곡을 일부 작곡하던 중이었고[17] 이 밖에도 레퀴엠과 괴테의 파우스트의 오페라화도 구상되던 중이었다고 하나 모든 구상은 베토벤의 사망으로 결국 구상으로만 남고 말았다. 제자이던 모셀레스의 증언에 의하면 죽기 며칠 전까지도 음악을 구상했다고 한다. 심지어 배에 물이 차오르면서 혼수 상태가 되는 와중에도, 정신이 돌아오면 쓴웃음을 지으며 "괜찮아…. 머리에 물이 차서 아무 것도 생각지 못하는 것보단 낫지……."라고 애써 담담히 말했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죽기 며칠 전에 슈베르트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을 방문해 자신이 작곡한 악보를 보여주었고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악보를 읽고서 슈베르트의 재능을 칭찬하면서 "슈베르트 자네를 조금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1827년 3월 26일,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친구들 및 지인, 제자와 비서 앞에서 영원히 잠들었다.

유언"아쉽다. 아쉽다. 너무 늦었구나!"이다. 이것은 임종을 지킨 안젤름 휘텐브렌너의 증언이다. 죽기 전에 출판업자에게서 베토벤이 즐겨 마시던 포도주 12병이 선물로 들어온 걸 알려주자 품 안에 있던 베토벤이 허공을 향해 주먹을 쥐며 한 말이라고 한다. 휘텐브렌너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코미디는 끝났다'는 말은 한 적이 없다고 증언한다.[18]

베토벤의 묘비 베토벤의 데스마스크
29일에 빈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는데 무려 2만 명이나 되는 시민이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전한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운구하는데 여러 음악가가 선발돼 참여했는데 그중에는 슈베르트도 있었다.[19] 그러나 베토벤의 조카인 칼은 끝내 장례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칼은 군인으로 복무 중이라 못 나왔다는 말도 있지만…. 유서에 의하여 베토벤의 꽤 많은 재산은 칼에게 상속되었는데 칼은 이 재산을 상속받아 그다지 어렵잖게 살다가 1858년 52살로 죽었으나 음악 쪽에는 일절 흥미나 재능이 없었다고 한다.

2. 루트비히 판 베토벤가 남긴 화제

말이 많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유일한 친혈육으로 딸이 거론된다. 바로 요제피네 사이에서 딸인 미노나 폰 슈타켈베르크가 태어났다는 것. 하지만,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죽을 때까지 미노나가 자신의 딸이라는 걸 아예 몰랐는데 바로 요제피네가 그걸 숨겨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제피네가 죽게 될 때에서야 그걸 고백하였지만 세상에선 알려지지 않은 그 여자의 존재는 묻혔다가 막시밀리안 타이어를 위시해 루트비히 판 베토벤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에 의하여 알려지게 되나 그 여자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실제 딸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 여자는 작곡이나 피아노 연주에 소질이 있었으나 그다지 음악가로서 알려지지 못한 채로 1898년 85살에 죽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연구가 타이어와 직접 만났을 당시, 그 여자는 자신이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딸이라는 사실을 매우 자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요제피네의 언니 테레제 브룬슈빅과의 사이에 아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또 다른 아우인 요한은 많은 땅을 소유한 지주이자 약국을 운영하면서 부유하게 살다가 1848년에 74살로 죽었는데 이 요한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 원수지간이었다고 한다. 생활이 어려워진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요한에게 도와 달라고 했더니 요한은 비웃으면서 거절했고 편지에 '지주 요한 판 베토벤'이라고 거들먹거리면서 이름을 적기도 했는데 거기에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이렇게 답장했다.

네 걱정이니 충고니 모두 필요없다. 뇌주 요한 판 베토벤에게 예술주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게다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자신이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아우라는 점을 사업에 써 먹는 요한에게 욕하기도 했다. 이렇게 요한을 향한 분노를 숨기지 않았기에 당시에도 사이 나쁘기로 유명했기에, 요한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장례식에 참가하려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제자와 지인들의 분노 어린 반응에 포기해야 했을 정도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팬들에게 미움받았는데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자손 가운데 루트비히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자신이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직계 후손인 양 뻥치면서 악보 같은 걸 여러 곳에서 파는 추태를 저지른 일이 있다. 후에 사실이 밝혀져 욕을 쳐먹자 미합중국으로 이민했는데 거기서도 똑같은 짓을 저질렀지만 링컨이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누군데?" 할 정도로 미합중국에선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기에 루트비히는 그다지 큰 돈을 벌지 못하고 소리 소문 없이 죽었다고 한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사인, 그리고 귀머거리가 된 원인은 당시에 창궐하던 매독 때문이라는 설이 정설이었는데 머리카락을 분석한 결과 당시 독일 수도관의 주재료였던 중독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는데 이것이 형편이 바뀔 수 없을 만큼 확실한 사인은 아니라는 반론도 많다. 그 외에도 발진티푸스, 면역 장애, 손거스러미라는 설도 있다. 해부 도중 밝혀진 바로는 과음으로 말미암은 손상이 심했다고 한다. 가장 독특한 가설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잠에서 깨려고 찬물에 머리를 담그는 버릇이 있었는데 수도관의 재료인 납이 물에 많이 녹아 있었기에 이로 말미암아 죽었다는 것이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수많은 명작은 오히려 루트비히 판 베토벤가 귀가 들리지 않던 때에 만들어진 것이어서 더 경이롭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는 하이든모차르트가 이룩한 고전이 될 만한 내용이나 의의가 있는 형식미에 자신만의 독창성을 띤 강인과 힘찬 역동성, 열정을 결합하여 위대한 음악계를 창조했다. 오늘날에도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음악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음악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열정과 감동을 환기하고 음악을 향한 열정으로 생활의 온갖 역정을 극복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생애도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선사한다.

메모광이라 악상이 떠오르면 늘 메모했는데 정작 악보는 별로 쓴 적이 없다고 한다. 주변에서 "왜 많이 메모하는데 악보는 별로 안 쓰나요?" 그러자 나온 대답이 "나는 한 번 메모하면 다 외우니까 쓸 필요없다." 흠좀무.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자주 휴가를 보냈던 어느 여관에서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왔다 갈 때마다 악상을 메모한 문짝이나 벽지, 식탁보 등을 수집가에게 팔아서 쏠쏠한 재미를 보았다나.

더불어 악필로서도 명성이 높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가 쓴 편지나 일기나 기록도 대체 무슨 글씨인지 몰라서 연구가들을 애먹이는 게 한두 번이 아니라고. 오죽하면 이 악필이 곡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바가텔‘엘리제를 위하여(Fur Elise)’는 본래 ‘테레제를 위하여(Fur Therese)’였다. 출판사 담당자가 ‘테레제’를 '엘리제'로 오인했다는 것이지만, 지금 우리가 아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을 다룬 정보는 상당수가 알려지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귀가 들리지 않으니 사람들에게 공책을 줘서 대화 내용을 적게 하여 그걸 보고 대화했는데[20] 이런 공책이 400권에서 600권이 넘는다고 하나 현재에는 겨우 137권만 남아있는데 이것은 비서인 안톤 쉰들러(1795~1864)라는 자가 저지른 일이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제자라고 잘못 알려진 이 안톤 쉰들러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게 의도로 접근하여 (1822년에서 1824년 26년에서 27년에 걸쳐) 비서로 활동하던 음악인 중 한 사람이다. 염가로 비서로서 일하고자 애원하여 들어와서 일했는데 루트비히 판 베토벤도 참 모를 사람이라고 제자들에게 말하던 바 있고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죽자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유품 가운데 바로 대화를 적은 공책을 가로채서 137권만 남기고 그걸 지가 팔아서 엄청난 이득을 취하면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제자들에게 증오받게 된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제자로 가장 알려진 칼 체르니는 안톤 쉰들러에게 나머지 대화를 적은 공책을 어찌했느냐고 하자 답변하지 않았는데 죽을 때에서야 그 수백여 권 공책을 몽땅 태워 버렸다고 밝혔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쉰들러는 베토벤을 위대한 음악가로 만들고자 했다(덤으로 자신의 명성도 올리고 아니, 이게 진짜 목적이었다!). 그러기 위해 그는 노트를 위조(말 그대로 위조다. 단순히 가필, 삭제뿐만이 아니라 노트 하나를 새로 만들기도 했을 정도다!)했던 것이다. 베토벤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월광 소나타라던가 '솔솔솔 미-'로 유명한 교향곡 '운명'이라던가)는 거의 대부분 이 쉰들러라는 개망나니의 헛소문이라는것이 연구 결과 밝혀진 것이다.

그 덕분에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제자들과 지인과 딸까지 찾아가서 루트비히 판 베토벤 연구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막시밀리안 타이어(1817~1897)는 안톤 쉰들러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대화를 적은 공책 수백여 권을 태워 버려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숨겨진 이야기는 이제 영원히 사라졌다고 탄식했다. 안톤 쉰들러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 연구가와 제자들의 분노를 뒤로하고 그럭저럭 잘살다가 죽었는데 교묘하게도 안톤 쉰들러가 제자나 심지어 친구(...)라는 잘못된 정보로 오래전 위인전에 실리기도 했다.

베토벤(학교 (Unknown) 괴담).png
얼굴이 보다시피(…) 포스가 느껴지다 못해 공포를 불러일으킬 정도인지라 음악실에 걸린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초상화는 학교와 관련된 괴담의 단골[21]이다. 심지어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게 수업받은 체르니조차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모습을 처음 봤을 때 데꿀멍하고 울었다고 한다.[22]

이에 반영된 학교괴담베토벤의 망령은 '엘리제를 위하여'를 들은 사람을 끝까지 추적하며 엘리제를 들려주는데[23] 그걸 4번 이상 들으면 죽고 하는 게 스토커 이상이라서 나해미도 반쯤 정신이 붕괴될 뻔했지만 낭만클럽에서의 루트비히 판 베토벤 초상화는 피아노 귀신을 진정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시내에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생가가 아주 잘 보존되어 있는데 이게 사실 19세기에 한차례 헐릴 뻔하다가 그 집 1층의 술집 단골들(…)의 주도로 살아 남았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술집 같은 건 없다. 생가가 보존된 덕분에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몇 년 살지 않은 본은 지금도 루트비히 판 베토벤을 열심히 팔아먹는데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일생 대다수(35년)를 지낸 오스트리아 도, 빈이야말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일생을 대부분 지내면서 많은 작품을 창작한 진정한 고향이라면서 본을 까면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마지막을 보낸 집을 루트비히 판 베토벤 박물관으로 만들어 전시한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1866~1944)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을 매우 존경하여 루트비히 판 베토벤을 연구한 책인 '베토벤의 생애'까지 썼지만, 이 책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을 과다히 미화해서 호불호가 갈린다. 참고로 로맹 롤랑은 이 책에서 "신이 벌인 잘못 중에서도 가장 큰 잘못은 바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소리를 못 듣게 한 것이다!"라고 썼다. 이 외에도 로맹 롤랑의 명저 중 하나인 ' 크리스토프'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을 모델로 했는데 독일 음악가인 막스 레거(1873~1916)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을 부풀려진 음악가라고 혹평했다. 책에서도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귀가 안 들렸다면 이렇게 평가받았을까?"라고 주장했다가 로맹 롤랑을 비롯한 루트비히 판 베토벤 매니아들에게 죽도록 까였던 것은 당연지사. 하루는 어느 애송이 피아니스트가 막스 레거 앞에서 연주했는데 연주가 끝나자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가운데 한 사람의 흉상을 피아노에 올려놓고 싶습니다. 어디가 나을까요?"라는 질문하자 막스 레거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길.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나 올려놓으라고.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귀가 막혀서 못 들을 테니까." 즉 연주 솜씨를 깐 거다.

피너츠에 등장하는 슈로더가 가장 존경하는 인재.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생일을 기억하고 축하하면서 피아노를 늘 치는 슈로더에게 루트비히 판 베토벤 흉상은 보물. 그로 말마암아 슈로더를 짝사랑하는 루시가 아득한 옛날에 죽은 사람 생일이나 기억한다면서 질투하자 슈로더가 루시를 노려보기도 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덕분에 고전 악보를 그대로 재현하는 시대 연주가 어렵기로 유명해졌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메트로놈을 처음 썼는데 그걸로 정한 연주 속도가 일반으로 알려진 빠르기 2배에서 3배였던 탓에... 흠좀무.[24]

피아노로 카덴차 시에는 심취한 나머지 예정 시간을 훨씬 넘기면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때가 잦았다고 한다. 심할 때는 1시간 이상 연주해 동료 연주자들이 기다리다 지칠 정도였다고.

키아누 리브스 무명 시절에 나온 코믹 영화 '엑설런트 어드벤처(Excellent Adventure)'에서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 여러 나라를 내왕하면서 위인들을 현대 미합중국으로 데려온 주인공 둘 덕분에 현대 미합중국으로 온다. 현대 미합중국을 보고 어안이 벙벙하지만 백화점에 가득히 있는 전자 피아노를 보고 흥미를 느끼더니만 오래가지 않아 미친듯이 이 피아노을 연주하고 사람들이 몰려들어 경악스럽게 구경한다. 백화점 담당 직원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지만 경비를 불러와 결국 억지로 내보내는데 나가는 순간까지 연주하고 사람들이 환호하면서 손뼉치고 감탄해도 이 영화에 나온 위인들 가운데 괜찮게 나온 예(...)잔다르크는 에어로빅 강사, 나폴레옹은 다이빙만 죽어라 하고 연설하다가 미친놈 소리 듣는 링컨,칭기스칸은 다 때려부수고 이런 걸 봐도

후대에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음악을 정치상 이용한 집단이 있는데 바로 국가사회주의독일로동자당라고 쓰고 천하의 개쌍놈들이라고 읽는이다. 국가사회주의독일로동자당을 독일인들의 루트비히 판 베토벤 음악 애호를 이용해 루트비히 판 베토벤 찬양으로써 독일의 민족주의를 고취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여러 곡이 '독일 민족의 우월성과 단결'이란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독재와 권위주의를 혐오하던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이 사실을 알면 무덤에서 뛰쳐 나올 일이다. 당연히 국가사회주의독일로동자당이 패망하고서 개소리로 여기고 바그너[25]랑은 다르게 어떤 비난도 듣지않았다.

3. 주요한 여러 작품

루트비히 판 베토벤 자신이 붙이지 않은 비공식 부제에는 취소선을 그었다.

3.2. 협주곡

  • 아노 협주곡 제1번
  • 아노 협주곡 제2번
  • 아노 협주곡 제3번
  • 아노 협주곡 제4번
  • 아노 협주곡 제5번[26]
  • 이올린 협주곡

3.3. 실내악

  • 악 4중주 제7번
  • 악 4중주 제8번
  • 악 4중주 제9번
  • 악 4중주 제10번 '하프'
  • 악 4중주 제11번 '세리오소'
  • 악 4중주 제12번
  • 악 4중주 제13번
  • 악 4중주 제14번
  • 악 4중주 제15번
  • 악 4중주 제16번
  • 대 푸가

3.4. 독주곡 (피아노)

3.5. 독주곡 (바이올린)

3.6. 종교음악

4. 루트비히 판 베토벤 오류

애 엄마는 결핵 환자고 애 아버지는 매독 환자다. 그 둘의 첫째 아이는 맹인이고 둘째 아이는 유산했고 셋째 아이는 귀머거리에 벙어리고 넷째 아이는 결핵 환자다. 그 사람들은 이제 다섯째 아이를 가졌다. 이 아이를 낙태하게 해야 하는가?

위 질문에 "네"라고 대답하면, 다음과 같은 충공깽 답변을 듣게 된다.

당신은 방금 루트비히 판 베토벤을 살해했다.

하지만 이건 거짓말로, 근본주의 기독교도가 낙태 반대론을 펼칠 때 써 먹는 레퍼토리에 불과하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어머니는 이전 혼인에서 하나, 요한에게서의 첫째 아이는 출생 후 곧 잃었지만 셋째로 태어난 루트비히 판 베토벤가 첫째로 생존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병증세도 알려지지 않았다.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특수 사례를 일반론에 대입하게 하여 일부러 틀려 놓은 논리라는 것이다. 낙태 반대론자들을 비판하려는 논리라는 것. 위와 같은 방식으로, 낙태하지 않아 아돌프 히틀러가 태어났다는 내용의 소설도 있다. 역시 극과 극은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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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浪漫主義音樂;서양음악사에서 낭만의 표출과 심정의 주관에 기초한 표현을 중시한 19세기의 구주 음악. 선구한 사람은 베를리오즈이며, 바그너ㆍ쇼팽ㆍ슈베르트 등이 대표할 정도로 전형이 될 만하거나 특징이 있는 작곡가이다. 의어 낭만파음악ㆍRoman派音樂.
  • [2] 사실 독일어도 지역에 따라 발음의 편차가 있다. 베를린 출신의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전혀 다르게 발음한다.
  • [3] 아인트호벤의 그 호벤이다. 과거 영주들이 농부 등에게 할당한 소규모 토지를 뜻하는 단어 hove의 변형.
  • [4]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독일식은 베트호펜(독일어의 표기에서 ә는 ㅔ로 적게끔 규정이 되어 있다)이고 네덜란드식은 베이트호번. 베토벤은 아니다!
  • [5] 이전 스승 밑에서 했던 숙제를 하이든한테 똑같이 제출했다가 들켰다.
  • [6] 서로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보던 스승과 제자였지만 베토벤의 심포니를 분석해보면 하이든의 방식이 그대로 녹아들어가 수제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
  • [7]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이걸 철저하게 숨겼기에 이 질병을 다룬 기록이 없지만, 1799년과 1800년 몇몇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처음 느낀 건 20대 중반에서 후반인 1796년에서 1798년쯤부터 귀울림이 들리더니만 차츰 귀가 들리지 않았다고 밝힌다.친구들을 믿고 이야기하니 절대로 비밀을 지켜달라고 신신당부했으며 영원히는 아니라도 내가 살아 있을 때만이라도 비밀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나중에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소리가 아예 안 들리면서 굳이 비밀을 지킬 필요도 없었지만 친구들은 이 약속을 묵묵하게 지켜 줘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죽고서야 그 편지들을 공개했다.
  • [8] 초등학교 6학년 음악책 44쪽에 나왔는데 수정되었는지 모름. 제보 요망.
  • [9] 부제 격으로 붙은 글이 "이 곡은 한 사람의 영웅을 대상으로 한 추억을 기리고자 쓰여졌습니다"..
  • [10] 그렇다고 피델리오가 졸작이란 뜻은 절대 아니다.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로 숨겨진 걸작이지만 다른 작품이 워낙 위대하기 때문…. 아마 루트비히 판 베토벤을 대표하는 곡 중 가장 알려져 있지 않은 곡이리라.
  • [11] 미사 솔렘니스
  • [12] 정말 없었는지는 의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자세한 것은 불멸의 연인 항목을 참고. 더불어 독신이긴 했지만 약혼하기도 하고 여자와 사귀기도 했다.
  • [13] 막시밀리안 타이어의 베토벤 연구 기록을 보면, 당시 빈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헝클어진 머리와 매서운 눈매를 한 사람이 홀로 마구 소리를 지르면 "아...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구나!"라면서 아무렇지 않게 여기기도 했다고 썼다!
  • [14] 괴테도 침략자 격이었던 나폴레옹에게서 시대정신을 발견했다고 썼으나 나폴레옹이 황제로서 즉위한 후 돌아섰다.
  • [15] 심지어 상대가 인사했는데도 손가락을 에 대면서 대충 예의를 표했다고도 한다.
  • [16] 이 일화는 말을 옮긴 사람에 따라서 조금씩 뉘앙스가 다른데 괴테가 머리를 숙인 모습을 보고 베토벤이 괴테도 속물이라고 비웃는 식으로 말을 옮기고 다녀 괴테가 불쾌하게 생각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괴테가 황족에게 예를 표하려고 할 때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황족은 세상에 수백 명이 있는데 괴테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단 둘밖에 없으니 저쪽이 비키도록 놔두라'고 했다는 버전도 있다. 여하간 괴테는 동급이었단 이야기다
  • [17] 이 일부의 스케치가 지금도 남아 10번 교향곡으로 추정된다.
  • [18] http://en.wikipedia.org/wiki/Death_of_Ludwig_van_Beethoven#Final_words
  • [19] 그리고 다음해 슈베르트는 마치 베토벤을 따라가듯이 매독 혹은 식중독으로 죽어 베토벤의 곁에 매장된다.
  • [20] 보청기도 썼지만 한 마디로 작은 나팔 같은 것을 귀에 꽂고 상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게 당시 보청기였어도 1810년 초반까지는 이거라도 쓰면 조금 들렸으나 그 후로는 아예 들리지 않아 이것도 안 쓰게 된다.
  • [21] <개구리 중사 케로로> 중 케로로 소대가 킷쇼 학원의 7대 괴담을 연기한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그중 <음악실의 움직이는 초상화>를 연기했던 기로로는 맞은편 벽에 걸려 있는 베토벤 초상화를 보고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날 노려보지 마" 하며 역으로 자신이 공포에 질렸다.
  • [22] 체르니는 여덟살부터 아버지의 권유로 베토벤의 제자가 되었는데 첫날 베토벤을 찾아갔더니 집안은 돼지우리지(멀쩡한 가구라고는 피아노 한 대가 다였다고 했으니), 하인은 겁에 질려 있지, 선생이라는 사람은 무슨 노르스름한 액체가 묻은 약솜으로 귀를 틀어막고 악마도 맨발로 도망칠 정도의 얼굴로 피아노를 치고 있으니 겁에 안 질리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 [23] 초인종 누를때 그 소리.
  • [24] 그래서 농담 삼아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메트로놈이 사실은 고장나 있었던 게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하지만 몇몇 지휘자는 가능하면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연주 속도를 존중하려 노력했고 최근 녹음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여러 음악은 마치 2배에서 3배 속도로 연주한 듯이 매우 빠르게 들리기도 한다.
  • [25] 바그너는 실제로 아리안주의자였으며 심각한 반유태주의자이기까지 했다. 당장 이 사람의 음악을 들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독일 신화와 관련된 작품들이 매우 많다.
  • [26] 이 협주곡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거의 모든 협주곡은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이루어진 한참 후에 솔로 연주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곡에서는 도입부(Introduction)에서 피아노를 상당히 빨리 등장하게 하는 을 현로했다. 이런 파격은 야코프 루트비히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가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바이올린 솔로를 아예 처음부터 등장하게 시도하는 동기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 [27] 비창적 대 소나타(Grande sonate pathétique)의 줄임.
  • [28] 그런데 사실 pathétique은 불어로 ‘비창(悲愴)다운’이 아니라 ’비(悲壯)다운’이라는 뜻이다. 다행히도 요즘 악곡 해설에서는 슬픔(愴)보다는 장엄(壯)이 더 두드러진다는 쪽이 더 많으며 이 오역은 중화인민공화국이나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어는, 전자는 bēichuàng(悲怆)이고 후자는 bēizhuàng(悲壮)으로 성조가 완벽히 똑같지만 한국어의 ‘ㅊ’, ‘ㅈ’차이처럼 뒤 단어의 미묘한 자음에서 차이가 나는데 일본은 애석하게도 두 단어 모두 발음이 히소-(ひそう)로 똑같다. 아무래도 영어의 pathetic이랑 철자가 유사해서 야기된 오역인 듯하나 외국에서 먼저 오역된 것이 그대로 번역되어 들어왔을 가능성도 적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