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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 게릭

last modified: 2016-07-09 15:52:20 Contributors

Today, I consider myself the luckiest man on the face of the earth.
오늘,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1].

1939년 7월 4일 은퇴식에서

als.jpg
[JPG image (Unknown)]
이름 Henry Louis "Lou" Gehrig
헨리 루이스 "루" 게릭
출생 1903년 6월 19일
사망 1941년 6월 2일
국적 미국
출신지 뉴욕 주 뉴욕
포지션 1루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 입단 1923년 뉴욕 양키스 자유 계약
소속 팀 뉴욕 양키스(1923~1939)

뉴욕 양키스 영구결번
No.4

1939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헌액자
투표 없이 입성

1927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MVP
조지 번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루 게릭
(뉴욕 양키스)
미키 코크런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1936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MVP
행크 그린버그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루 게릭
(뉴욕 양키스)
찰리 게링거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별명인 철마(The Iron Horse)에서도 알 수 있듯, 플레이할 때만큼은 누구보다 힘차고 근성 있는 플레이를 했던 선수이다. 게다가 전 세계 프로야구 역사상 3위 기록인 2130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갖고 있다. 게릭의 기록은 1987년 일본기누가사 사치오(2215경기)에 의해 깨졌고, 1996년칼 립켄 주니어가 다시 기누가사의 기록을 넘어서며 역대 1위(2632경기) 자리를 차지하였다. 하지만 칼 립켄이 현역으로 뛰던 시절은 한 시즌 162경기, 게릭은 한 시즌이 155경기 남짓[2] 되던 시절에 플레이했으니 그 기록의 위대함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 게다가 칼 립켄 주니어가 뛴 1980~1990년대에는 스포츠 의학이 발달하여 몸도 잘 풀어주고 다치더라도 치료가 빨랐지만 게릭이 뛰었던 1920, 30년대는 선수들의 몸엔 별 관심도 없던 시기였다.[3] 은퇴 직전 X레이를 찍었더니 왼손뼈에 금이 갔다가 저절로 아문 흔적이 17군데가 나왔다고.

단순히 투지와 근성만 있었다면 뉴욕 양키스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1920~30년대에 2130경기나 꾸준히 출장할 수 있었을 리가 없다. 4번이라는 등 번호에서도 유추할 수 있지만[4] '살인 타선(Murderer's Row)'이라 불리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강의 타선을 보유했던 1920~30년대 뉴욕 양키스에서 당당히 4번을 꿰찬 선수이다. 통산 타, 출, 장은 무려 0.340, 0.447, 0.632. 통산 홈런은 493개에 통산 타점이 1995타점으로 역대 4위. 아깝다 타점의 경우 1시즌 162경기 기록으로 환산하면 평균 149타점인데 이건 메이저리그 역대 1위에 해당한다. 불의의 은퇴만 아니었다면 통산 홈런과 타점은 이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12년 연속 3할에 13년 연속 100타점의 기록을 갖고 있으며, 통산 만루 홈런 23개로 한동안 이 부문 메이저리그 1위 기록이었지만, 2013년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24개째를 치는 바람에 2위로 밀려났다. 아마 시절에는 투수로서도 훌륭했는데, 컬럼비아 대학 시절 기록한 1경기 17삼진은 아직도 대학 기록이라고 한다.

베이브 루스의 파트너였지만 베이브 루스는 게릭을 늘 질투했는데, 소년원에 보내졌을 정도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루스와 달리, 게릭은 유복한 가정에서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기 때문이다. 게릭은 원정 경기를 갔다가 돌아오면 늘 기차역에서 기다리던 어머니에게 먼저 달려갔는데, 루스는 그걸 보고 마마보이라고 놀려대곤 했다. 물론 게릭은 원체 착한 성격이라 루스에게 뭐라 하진 않았고. 또, 루스는 게릭이 1타석 후 교체 등 편법까지 써 가면서 연속 출장 기록을 늘려가는 것도 굉장히 싫어했다.

워낙 화려했던 베이브 루스에 비해 뛰어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덜 빛났던 게릭이지만 뉴욕 양키스에 더 오래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게릭이었다. 이후 1936년에 뉴욕 양키스의 1940~50년대를 책임질 조 디마지오가 등장할 때까지 팀의 중심을 잡아준 것이 바로 게릭이었다.

철마처럼 내달렸던 게릭이었지만 35살이던 1938년에 몸에 이상이 생겼다. 1926년 이후 단 한 번도 기록해보지 못한 2할대 타율을 기록했으며, 파워도 현저히 떨어져서 29개의 홈런밖에 기록하지 못했다. 뭐? 게릭은 노쇠화가 오는 것으로 생각해서 겨우내 열심히 운동했지만 1939년에는 안타도 때려내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시즌 8번째 경기가 있던 4월 30일, 평범한 땅볼을 잘 처리한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는 관중들을 본 게릭은 더 이상 연속 출장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조 매카시 감독에게 자신을 다음날 경기 라인업에서 빼달라고 말하며 연속 경기 출장을 2130경기에서 마감했다. 그리고 그날 경기는 그의 커리어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그해 7월 4일, 자신이 처음으로 MVP를 타고 47홈런을 때려낸 시즌인 1927년의 멤버들이 모두 모이고 6만여 명의 관중이 양키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자리에서 게릭은 은퇴를 발표한다. 이후 게릭의 병은 근위축성측상경화증(ALS), 일명 루게릭병으로 밝혀진다. 토미 존과 함께 의학계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메이저리거이지만, 토미 존과 달리 게릭은 해피 엔딩을 맞지 못했다. 2년 후인 1941년에 게릭은 눈을 감는다. 전미 야구 기자 협회는 은퇴 후 5년의 유예 기간을 갖는다는 명예의 전당 규정을 무시하고 1939년 곧바로 게릭을 명예의 전당에 올렸으며, 그의 등 번호 4번은 메이저리그 최초, 전 세계 스포츠 역사상 두 번째로 영구 결번이 되었다.

게릭을 싫어하고 질투했던 베이브 루스가 야구 선수로 데뷔한 후 죽을 때까지 어린이 팬들에게 사인을 거부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바로 루 게릭의 장례식에 참석한 날이었다.

하지만 2010년, 루 게릭은 루게릭병에 걸린 것이 아니었다는 충격적인 주장이 제기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루게릭병 항목 참조.

여담으로 루 게릭의 연설 일부분이 2015년에 출간된 EBS 수능특강 영어영역에 문제지문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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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실제로는 당시 병이 진행중이었기에 말을 많이 더듬거렸다. T, t, to, today... I, I, con... con.. sid... consider... 이런 식으로.
  • [2] 매 시즌 경기 수가 바뀌었다. 155경기를 기준으로 1, 2경기 정도 빠졌다가 더해졌다가를 반복했다.
  • [3] 어렵게 생각할 거 없이 1980, 90년대 한국 프로야구를 보면 답이 나온다. 최동원이나 김시진 같은 투수들조차 Oh my shoulder!를 외쳐야 할 정도였으니 더 이상 말이 必要韓紙?
  • [4] 초창기의 등 번호는 그냥 타순대로 1~9를 주고, 선발 투수에게 10번부터 그 이후 번호를 주는 식이었다. 포지션 넘버가 생긴 건 그 이후의 일. 베이브 루스가 3번이었던 이유이다. 덧붙여 이 번호를 준 것은 양키스가 전 세계에서 최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