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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비판

last modified: 2015-02-03 00:53:01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상세
2.1. 개괄
2.2. 역사관
2.3. 편견
2.3.1. 반비잔티움
2.3.2. 반그리스인
2.3.3. 반일신교
2.3.4. 여성 군주에 대한 혹평
2.3.5. 반페르시아
3. 권별 문제점 정리
3.1. 로마 왕정
3.2. 한니발 전쟁
3.3. 민중파와 귀족파
3.4. 로마 내전기
3.5. 6권
3.6. 7권
3.7. 콤모두스
3.8. 비잔티움
4. 전반적 문제점
4.1. 노예제도
4.2. 라틴어
4.3. 리메스
4.4. 후기 로마 제국 군제에 대한 전반적인 무지 혹은 상대적 무관심
4.5. 객관성 문제


1. 개요

시오노 나나미의 역사적 주장에 논란이 많은 이유는 그녀가 전문 역사가가 아니어서가 아니고, 당시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몇몇 가설들을 반박해서도 아니며, 일부 역사가들의 잘못을 지적해서도 아니다.

서술된 내용에 오류와 왜곡이 많은 데 이유가 있으며, 본 문서에서는 특히 그녀의 대표적인 저서 로마인 이야기에서 다루는 주장에 대한 비판을 다룬다.

2. 상세

2.1. 개괄

우선 감안할 점은, 로마인 이야기가 15년에 걸쳐 매년 1권씩 출간된 작품인만큼 출간 이후에 나온 연구 결과는 거의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이 단점은 학계에서도 다소 연구 진도가 늦은 편인 3세기 이후 로마 제국 역사를 다룬 12권 이후에 결정적으로 부각된다. 참고로, 늦는 편이라는 학계에서도 이미 3~11세기의 로마 - 동로마로 이어지는 소위 고대 - 중세사를 객관적으로 재평가하는 작업은 이미 90년대에 끝난 상태며, 국내 학계에서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정리된 견해다.

시오노 나나미가 이런 성과들을 수용하지 않는 이유는, 그 내용이 그녀 특유의 반 그리스도교, 유심론적 사관에 대한 극복으로 집중되어, 그리스도교의 발호로 로마 제국이 망했다는 기존 주장과 배치되는 데 이유가 있다. 아래의 상세 항목에서도 열거되는 반일신교-친다신교, 반비잔티움, 과도한 카이사르 옹호적 관점은 그 자체로 로마인 이야기 전체에 걸쳐 정상적인 역사 해석을 심히 방해하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점은 작중 내내 외치는 정체불명의 '로마다운 로마'란 말이다. 도대체 어느 시대의 로마가 로마다운 로마란 말인가? 여기에 대해 로마인 이야기가 말하는 답은 작가 자신이 애호하는 특정 시대의 로마만이 로마라는 것인데, 이는 문학 작품이라면 적합할지 몰라도 역사서가 갖는 객관성에서는 전혀 맞지 않는 기준이며, 문학 작품의 기준으로 볼 때도 로마에 살았을 로마인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 어느 면에서는 제국주의 시대를 향수하는 일본 극우 꼴통들과 통하는 면도 있다

이에 대해 로마인 이야기를 옹호하는 시각에 따르면 1. 작품 내에서 작가는 자신의 가설을 단정한 경우가 없고, 2. 다른 사람들의 역사관 역시 소개했으며 판단은 전적으로 독자에게 맡겼다고 말한다.

그러나 1. 완전히 틀린 사실을 적었거나, 2. 부정적인 부분만 부각시키거나, 3. 다른 사람들의 역사관에서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를 거의 생략해서, 결국 독자를 시오노 나나미 자신이 생각하는 결론에 이르게끔 유도한다. 이런 행태는 역사교양서로서는 치명적인 결함이 분명하고, 문학 작품으로 봐도 높은 수준의 작품으로는 보기가 어렵다. 교양서로서 올바른 방법은 학계에서 마찰이 있는 주장에 대해서는 양자의 근거를 동등하게 나열하는 것이다.

그나마 반일신교, 카이사르 애호에 대한 게 영향이 거의 없는 전기 로마사(1, 2권)은 상황이 상대적으로 낫다고 할 수 있으나 이 문제가 부각되기 시작한 이후에는 갈수록 역사서라고 보기 어려워진다. 아무리 학술서로서, 객관적인 역사서로서 로마인 이야기를 저술한 게 아니더라도, 14권 이후로 가면 문학 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에서도 높이 봐주기가 어려울 지경으로 질이 떨어져 간다. 이는 시오노 나나미의 건강이 하필 14권을 집필할 즈음에 급격히 나빠진 것에도 이유가 있으나, 설령 건강이 좋았더라도 그 앞권들에서 보인 경향을 볼 땐, 앞서 든 문제들이 나아졌을지는 영 의문이다.

2.2. 역사관

로마인 이야기의 기저에 깔린 성향은 작은 정부 - 감세를 비롯한 보수, 복고주의며 정치적으로는 제국주의를 옹호한다. [1] 또한 철인적 엘리트 혜민주의에 대한 긍정 내지 환상을 보이는 것은 전형적인 일본 보수 지식인층의 정치관과 상통한다. 일본의 전통 종교와 모순되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적대적인 성향이나, 민주주의를 중우정치로 보는 철인 정치관은 비단 시오노뿐 아니라 다른 일본인 작가인 다나카 요시키의 작품에서도 엿볼 수 있다. 단지 다나카는 명확히 '소설'을 쓴다는 점, 민주주의와 전제주의 둘 다 비판한다는 점에서 '역사서(로 혼동되는 작품)'을 써서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성향'을 독자에게 유도하려 하는 것보다는 양호(?)하다.[2]

철인정치를 주장하면서도 무솔리니식의 파시즘은 희화화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사실 히틀러와 협력하기 직전까지의 무솔리니는 시오노 나나미의 성향에 가장 부합한다.

아울러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고대-중세의 전이 단계를 단순히 로마적 정신의 쇠퇴로 인한 퇴화로 보고 있지만, 사실은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노예 노동에 의존하는 고대 시스템으로는 더이상 국가 유지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문화적으로 중세가 퇴화했다고는 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야만족인 게르만족이 점령한 서유럽에 한정된 것이었으며 로마 제국의 법통을 계승한 비잔티움이나 각지의 고대 문명을 자양분삼아 새로운 문명을 개척한 이슬람은 고대보다 훨씬 더 번영된 사회를 누리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중세가 고대보다 퇴화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서유럽도 중세의 전성기인 12-13세기면 이미 후진적이라고 보기 어려운 문화적 정교함을 보인다. 유럽 곳곳에 있는 고딕 건축물들과 그 시대의 세공품들을 보라. 로마인 이야기는 이 점을 간과한다.

2.3. 편견

2.3.1. 반비잔티움

로마가 사실상 세계의 수도라는 기능을 상실한 이후 비잔티움을 중점적으로 다루게 되는 후반권에서 로마인 이야기가 다루는 주요 주제는 거의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비난이다. 주로 로마 전성기의 황제들 및 정치 상태와 비교하며 비잔티움의 통치자를 제대로 된 국가원수가 아니라고 단죄하는 식인데 이 비난의 이유가 별 근거가 없다. 대부분 비잔티움의 통치자가 그리스도교를 맹목적으로 믿으므로 고대의 여러 교양을 익히지 않은 무식한 중세의 군주라는 편견이 기저에 깔려 있으며, 또한 로마 제국 전성기의 풍부한 가용 인적, 물적 자원 상황과, 한계 수익성이 떨어진 후대의 체제를 아무런 가감없이 비교하는 것은 형평성에도 어긋난다.

또한사실의 왜곡도 두드러진다. 예를 들면 비잔티움 최고의 통치자로 일컬어지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법학, 음악, 신학, 역사학 등 여러 학문에 두루 능통한 당대 최고의 교양인이자 비잔티움 제국의 전성기를 연 인물이었음에도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별 교양도 없는 데 불가사의한 업적을 거둔 군주로 폄하된다. 비록 말년에 오점이 있으며 군사적인 식견에 문제가 있었다 하나 통치자로서의 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시종 취하는 왜곡적인 해석에 합당할만큼 못난 군주가 아니다.[3]

여담이지만 로마인 이야기 완결 이후에 출판된 시오노의 저서《로마 이후의 지중해 세계》에서는, 로마 이후에 지중해권에 유통된 금화들을 나열하면서 이슬람의 디나르 금화나 베네치아, 피렌체의 금화는 소개하면서도 이들보다 일찍 유통되어 근동권의 기축통화 역할을 했던 비잔티움의 솔리두스 금화는 아예 언급조차 없다. 그나마 로마인 이야기 13권에서 콘스탄티누스의 솔리두스 도입을 언급하고, 그 이전에 출판된 저서《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에서도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기축통화 도입 시도를 설명하면서 솔리두스와 디나르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는 있지만

또한 《십자군 이야기》에서는 “고대 로마 제국과는 달리 강력한 상비군의 전통이 없는 비잔틴 제국은 용병을 쓰는데 익숙했다.”(1권 059쪽)는 글이 있다. 하지만 실제는 다르다.

알렉시우스 콤네누스 치하에서, 비잔틴 군의 총수는 70,000 명에 달했으며, 그 가운데 20,000은 상비군이었다.(Under Alexius Comnenus the total strength of Byzantine army was about 70,000 men, with about 20,000 of that total in the standing army.) -Men at arms Armies of the Crusades 17page

비잔틴 제국은 용병을 쓰는데 익숙했지만 한편으로는 테마 제도를 바탕으로 하여 오랫동안 거대한 상비군 조직을 갖추고 있었으며 이는 십자군 시대 당시에도 유지되고 있었다. 물론 테마 제도의 근간인 둔전병들이 완전한 상비군은 아니었고, 각 군관구의 중심부에 위치한 소수 부대와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변에 주둔한 타그마들만이 상비군이라고 할 수 있기에 고대 로마에 비해서는 상당히 축소되고 비중이 떨어진 건 사실이다.

그러나 제국의 상비군 조직은 7세기 이후로 꾸준히 확충되었으며 적어도 10세기~11세기 중반까지, 즉 십자군 전쟁 직전까지만 해도 제국은 유럽과 이슬람 세계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상비군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만지케르트 전투와 그 여파로 군제가 붕괴되기는 했으나, 당시 시점에서조차 이슬람 아랍 제국을 제외하면, 근 오백 년 동안 그리고 유럽에 한정하면 가장 강력한 상비군 조직을 갖춘 국가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용병 중에도 거진 상비군화된 부류들이 있었다. 예컨대 랑인 친위대는 용병이지만 가장 믿을만한 상비군이기도 했다.

즉 비잔틴 제국에는 국민군이 부재했던 것도 아니며 상비군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1081년 시점에 연이은 내전과 디라키움 전투의 패배로 용병의 비율이 높아져 있었을 수는 있으나, 강력한 상비군 전통이 없다고 한 시오노 나나미의 서술은 비잔티움 역사와 문화에 대한 비논리적인 혐오에 따른 무지와 비잔티움은 무조건 로마 제국과는 다르다고 여기는 편견의 산물이다.

2.3.2. 반그리스인

하지만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을 도읍으로 정했기 때문에 상당히 난처하고 개탄스러운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것은 지칠 줄 모르고 논쟁을 좋아하는 그리스인이라는 인종을 제국의 중추에 앉히는 체제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로마인이 말보다 실행이라면 그리스인은 실행보다 말이었다. -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13권 中

로마인 이야기 전반에 걸쳐 작가는 그리스인은 창의적이고 진취적 성향이 있다고 묘사하기도 하지만 비잔틴 제국에 대한 비판이 강해지는 것과 궤를 같이하여 제국의 중핵을 담당하기 시작한 그리스인에 대한 비난은 거의 인종차별 직전의 영역에 도달하게 된다. 한 2가지 국민성 문장이 아니라 거의 모든 사회 문제 자체를 '그리스인의 국민성'에다가 전가하는 수준이라서, 그 정도는 이 책을 그리스어로 번역해서 내놓는다면 당장 그리스에서 일본에 항의할지도 모른다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한다.

이게 그리스인에 대한 작가의 편견으로밖에 볼 수 없는 것은 후기 권에서 서로마 지역이 아무리 쇠퇴와 국가막장테크를 걸어도 '오늘날의 이탈리아인이 로마인의 후손이라니 믿기지 않는다' 라는 식으로 쉴드를 치기 때문이다. 시오노의 논리라고 쓰고 억지라고 읽는를 따르면, '오늘날의 그리스인이 고대 아테네인들의 후손이라니 믿기지 않는다' 라는 식의 반론이 가능하다.

2.3.3. 반일신교

또한 로마인 이야기 전반에 걸쳐 작가는 그리스도교, 유대교, 그 외 일신교로 간주되는 종교에 대한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스도교가 주류를 이루는 로마 제국 말기를 다루는 후반부에는 한 페이지에 최소 한 번 이상은 그리스도교 비판이 들어갈 정도.[4]

심지어 페르시아 제국이 그리스를 침공한 것까지 일신교인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페르시아 제국의 다신교인 그리스에 대한 공격이라는 언급고대십자군?을 하기도 한다.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공격한 것은 종교에도 원인이 있다는 주장인데, 이 전쟁이 종교가 원인이었다는 당대 사료는 전혀 없으며 당사자인 그리스인들조차 종교가 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이 전쟁은 페르시아인들의 그리스에 대한 팽창 목적의 침략 전쟁일 뿐이다.

이처럼 사료적 근거를 찾을 수 없을 뿐더러, 추론이라고 가정해도,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가 제국 내의 다른 민족과 종교에 대해서 대단히 관용적인 태도를 유지했던 점을 보면 이런 추론은 합리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 종교 꼴통인 유대인들조차도 아케메네스 왕조의 관용 정책을 시작한 키루스 2세를 다른 나라의 왕에게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극찬하여 칭송했을 정도이다. 또한 조로아스터교 자체가 아후라 마즈다에게 따르는 일종의 '부속신'을 인정하여 그리스도교, 이슬람과 같이 유일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신격을 배제하는 철저한 일신교와는 차별성이 있었으므로 동일시하는 것 자체가 오류이다.

이러한 반일신교적 역사관은 비단 시오노뿐 아니라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에서 이미 비롯되었다. 그는 로마제국의 쇠망의 주요 원인으로 그리스도교의 부흥을 꼽았으며 데이비드 흄도 <일신교와 다신교에 관하여>라는 에세이에서 비슷한 점을 주목한다. 이로 미루어 시오노 나나미의 일신교에 대한 비판적 견해는 18세기 계몽주의 전반의 역사관이 투영된 것일 수도 있다는 분석도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통일된 교리가 없던 다신교가 교리의 체계화와 철학적 복잡화를 통해 고등종교로 진화하는 일은 자주 있던 일이다. 사실 모든 고대 종교는 다신교적이지만, 실제 신앙 생활에서 한 신관이 말 그대로 여러 신을 모시는 사례는 별로 없고, 이런 경우라도 중심이 되는 특정한 주신은 존재하는 것이 보통이다.

교리와 철학의 심화 과정에서 이러한 '주신'이 강조되면서 다른 세력이 약한 신들은 삭제되거나 권속으로 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중세로 접어들면서 이런 고등종교가 국가이념으로 도입되는 일은 보편적 현상이다.

이 고등종교가 그리스도교이슬람교같은 일신교가 될수도 있고 힌두교와 같은 다신교, 또는 구분하기 곤란한 유교불교도 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역사 발전 과정에서 시오노 나나미가 그 미덕을 설파하는 로마식 다신교나 일본식 신토는 그 한계가 명확하다는 점이다.

시오노 나나미가 이상적으로 보는 일본식 신토조차 고대국가 형성에서 왜국이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사그라들었고,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신토 세력은 그저 불교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기번이나 시오노 나나미의 주장은 결과와 원인을 혼동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반일신교 감정으로 인한 해독은 후기 로마사 해석에 가면 더욱 분명해진다. 이건 로마사를 비그리스도교적 사관에서 제대로 해석한 게 아니라, 그냥 틀린 소리 한 것이다. 예를 들어 로마 후기에 유행했던 미트라교에 대한 서술도 엉터리이고 [5], 또한 그리스도교에 대한 증오가 너무 지나친 그리스도교 관련 내용을 모조리 삭제하기도 하며[6] 로마 후기의 여러 교리 논쟁을 다 부질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데,[7]

이는 단순히 교리가 아니라 교리를 지지하는 종족이나 지방들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이렇게 가볍게 서술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시오노 나나미가 중요하지 않다고 봐서 생략했다기보다는 아예 무지하기 떄문에 생략했다고 보는게 맞다.

2.3.4. 여성 군주에 대한 혹평

시오노 나나미는 여성 군주를 혹평하는 경향이 있다. 이집트의 독립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로마 장군들을 미모로 홀린 클레오파트라는 전통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지만, 시오노는 정반대로 혹평. 12권에서는 제노비아도 비판한다. 사실 클레오파트라와 제노비아만 대표적으로 거론되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여자가 권력을 잡고 정치적인 행위를 하려고만 들면 대대적으로 포화를 쏴댄다(…) 예를 들면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라든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어머니 율리아 마미아라든지. 물론 그녀들은 잘못이 전혀없었던건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반면 여성이 정치에 나서도 속된 말로 나대지 않거나 혹은 내조에만 전념하면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은근히 있다.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인 코르넬리아 아프리카나 라든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할머니 율리아 마이사를 묘사할때 조금 그런 느낌이 있다.

당시 정치 등에 적극 참여한 여성들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주장은 사실이고, 또한 여성이 정치 및 사회에 본격 참여하기 시작한 것 자체가 인류 전체 역사에서 그리 시간이 길지 않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고 해도, 시오노 나나미의 관점은 이런 것을 넘어서서 여자의 속성 자체가 정치하기엔 적합하지 않다는 식으로 은근히 몰아간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게다가 클레오파트라와 제노비아가 혹평을 받은건 단순히 여성으로서 정치를 했다기 보다는 감히 여자 주제에 대제국 로마에게 맞서려 하다니라는 식의 비논리적 감성이 은근히 깔려있다.

2.3.5. 반페르시아

오리엔트 군주와 주민들은 반드시 강자에게 달라붙는다.

로마인이 생각하는 군주는 통치하는 사람이지만, 페르시아인이 생각하는 군주는 전쟁이나 사냥이나 잔치를 하는 사람이다.
?-시오노 나나미

페르시아가 처음 등장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와 페르시아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하면 거의 항상 위와 같이 '서방' 과 '동방'. 또는 '옥시덴트' 와 '오리엔트' 를 비교하며 페르시아를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다. 대체로 '서방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반면 힘의 논리가 모든 것을 결정짓는 동방은 전제군주의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멍청한 놈들' 이라는 식인데, 가만히 읽다 보면 '페르시아는 로마에게 정복당하는 것이 마땅했으나, 현실적인 로마인들이 참고 넘어가 준 것' 이라는 생각까지 들게 된다. 이점은 사실 시오노의 견해라기보다는 근대의 서방역사관을 그대로 옮겨온 것 같기도 한데, 동양인인 시오노가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매우 괴이쩍은 일이다.

물론 '서방' 이 민주주의를 실시한 것은 사실이고 '동방' 이 전제군주정을 실시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문화적 차이로 접근할 일이지 단순히 힘의 논리로 보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8]. 일본이 그랬다고 해서 동양 전부가 다 그런건 아니다.[9]

여담으로 근동 군주국의 군주들이 벌인 "사냥이나 잔치"는 결국 로마의 "빵과 서커스"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인기 정책이다.

이 항목은 최근에 작성되었으므로, 지속적인 추가바람.

3. 권별 문제점 정리

3.1. 로마 왕정

  • 1권의 대부분 : 로마 7왕이나 당시의 에피소드들은 현재로서는 거의 전설에 가까운 설화이며 상당히 근거가 얕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고고학적 연구 결과를 반영하여 실제성을 가리지 않고 상당히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런 전설들을 놓고 현실 정치나 군주론을 논하는 것은 상당히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3.2. 한니발 전쟁

  • 제1차 포에니 전쟁의 발단이 된 시칠리아 메시나에서의 라틴용병 마메르티니의 만행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그냥 가만히 잘 있던 메시나를 시라쿠사가 공격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 칸나이 전투에 대한 서술에서 한니발이 사용한 전술을 완전히 잘못 소개한다. 시오노 나나미는 한니발의 선두부대를 로마 보병이 뚫자 뒤에 있던 정예 보병이 가로막았고 패주한 선두부대가 양익으로 협공했다고 서술하였는데 실제론 한니발은 전체부대를 초승달 대형으로 짰고 뚫리지 않은채 포위한 것이며, 로마군의 옆구리를 친 것은 별도로 편성된 정예부대다. 실제로 로마 보병은 한니발의 보병의 2배가 넘었는데 이중으로 전선을 짰을 수도 없고 무엇보다 이런 전술은 어느 사료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심각한 오류는 칸나이 전투 뿐만 아니라 로마인 이야기 2권 전반에서 심심치 않게 보인다.

  • 실제 사실과 전혀 반대되는 내용의 서술이 곳곳에 산재해있다. 예를 들어 칸나이 전투 이후 카르타고 본국의 사르데냐 섬 공격이나 전쟁 말기 마고의 리구리아 상륙 등에서 지역 원주민들이 로마군과 함께 카르타고 군을 공격했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거 죄다 틀린 얘기다. 사르데냐의 누라기 부족은 자기네들이 먼저 봉기한 후 카르타고에 지원을 요청한 것이었고 리구리아 인이나 갈리아 인들은 마고의 카르타고 군과 연합하거나 용병, 물자 등을 지원하며 같이 로마군에 맞섰다.

  • 자마 전투 이후 강화를 논의하는 카르타고 원로원에서 역사대로라면 원래 이 시점에는 죽은 지 오래인 시스코네(하스드루발 기스코)가 멀쩡히 살아서 돌아다닌다.

3.3. 민중파와 귀족파

  • 마리우스술라가 각각 로마에서 자신의 반대파에 대해 정치적 테러를 가한 것에 관해, "마리우스는 단순한 복수를 했지만, 술라는 원로원 체계를 세우기 위해 반대파를 철저하게 숙청한 것이다."라는 식으로 대조적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결국 승리자가 술라이고 마리우스와는 달리 승리 후에 오래 살아 있어서 체계를 다시 세울 시간이 있었던 것일 뿐. 일차적으로 두 행동은 모두 복수에 불과할 것이다.

3.4. 로마 내전기

  •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데키우스 브루투스로 잘못 표기하였다. 번역 오류인줄 알았는데 일본어 원문에도 데키우스 브루투스라고 되어 있어서 빼도박도 못하게 오기 확정. 또한 마르쿠스 브루투스 부분에서도 카이사르를 죽인 브루투스에 대한 미움이 지나친 나머지 되도 않는 왜곡을 저지르기까지 한다. 이는 해당 항목 참조.

  • 로마의 사제직에 대해 일반 시민 생활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고 양립할 수 있는 것처럼 서술했지만, 실제 사료를 보면 플라멘(사제)으로 선출되면 말(馬)을 만지거나 로마 밖에 하루 이상 나가는 일 혹은 자기 침대가 아닌 곳에서 사흘 이상 자거나 군대 업무를 보는 게 법으로 금지되어 버린다. 그래서 카이사르도 정계에 진출하기 위해[10] 소년 시절 사제로 선출되었다가 자진 사퇴하는데 이 부분을 완전히 빼먹고 사제로 선출된 것만 서술했다.

  •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집정관이었던 시절 원로원이 폼페이우스의 군단병에 배급할 토지 분배를 놓고 언쟁을 벌일 때 원로원들과 카이사르의 세력이 민중 집회에서 차례대로 연설을 한 것으로 묘사하였다. 하지만 아피안의 사료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원로원을 배제한채 평민집회를 열었으며 이를 안 원로원 의원들이 달려가자 민중들을 동원해 이들을 구타하였으며, 이때 동료 집정관이었던 비불루스는 주위의 폭도들에게 잡해 '죽일 테면 죽여라' 라며 외치다 카이사르에 의해 끌려나갔다. 카토는 연단에 몰래 올라가서 민중들 상대로 자신의 견해를 말하려고 하였으나 폭도들은 카토를 잡고 무리 밖으로 끌어내려버렸다. 그러나 로마인 이야기에선 카이사르의 지휘아래 원로원 의원들이 참석하였으며 이들 앞에서 폼페이우스, 크라수스가 차례대로 연설을 하였고 비불루스가 거부권을 행사하려들자 민중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실제론 카이사르와 그 일당들은 원로원 의원들의 참석자체를 물리적으로 저지하였기 때문에 이런 연설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 카이사르의 업적에 대해 설명하면서 로마를 재창조하였고 이로써 400년간 로마의 수명을 연장시켰다고 말하였고 갈리아 제패가 전무후무한 군사적 업적인 것으로 칭송하는데 이러한 주관에 문제가 있다. 공화정을 전복시키고 동양 그리고 아프리카 부족들도 할 수 있는 왕정으로 대처한 것이 어째서 재창조인지는 좀더 구체적인 설명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다만 당시 로마 공화정이 로마인 및 원로원 위주의 엘리트로 변해갔던 것은 사실이라 이 점에서 개선되었다고 평가한다면 의외로 설명이 정확할 수도 있다. 이를 시오노 나나미는 이를 "600명에게는 평가가 좋지 않았고 6천만 명에는 호평을 받았다"고 기록한다.

    뿐만 아니라 갈리아 제패의 경우 당시 갈리아는 게르만족에게 복속되기 일보 직전에 놓였으며 따라서 게르만족 대신 불러들인 게 카이사르였다. 카이사르는 이런 갈리아의 정세를 이용하여 게르만족을 격파한 뒤 이에 불만을 품은 친게르만파 갈리아족을 패주시키고 관용을 베푸는 것만으로도 갈리아족을 쉽게 제패할 수 있었다.[11] 따라서 로마인에게 적대적인 민족 위주로 살고 있는데 로마가 쳐들어온 게르마니아나 혹은 브리타니아 제패와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곤란하다.[12]

  • 카이사르의 간질설을 기각하고 있는데, 실제 100년 이상 뒤의 플루타르코스의 사료가 남아있긴 하지만 동시대의 사료는 없다. 간질은 현재에도 군면제가 될 만큼 심각한 병으로, 갈리아에서 이집트까지 군대를 끌고 왔다갔다 하던 사람이라면 당연히 주위에서 알았을테고 동시대의 사료가 하나쯤 남아있을 법도 한데 남아있지 않다. 때문에 그냥 편두통이 아니었나 하는 의견이 많다. 또, 사료의 진정성을 인정한다해도 의학계에서는 사료에 나타난 증상으로 판단하기를 간질이 아니라 저혈당증에 가깝다고 본다. 이런 이유로 카이사르의 간질설은 현재 학자들이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이 점을 부인한 것은 시오노 나나미의 잘못이라고 하기 어렵다.

3.5. 6권

  • 아르미니우스베르킨게토릭스를 비교하면서 전자에 대해 부정적, 후자에 대해 긍정적으로 기술. 로마인 이야기 6권에서 이들을 비교하면서 갈리아인들을 단결시킨 베르킨게토릭스와 게르만족과도 내전을 벌인 아르미니우스의 차이점을 들어 비교했다.

    하지만 타키투스와 같은 당시대 로마인들조차 자신의 민족을 위해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는 아르미니우스를 적이지만 훌륭하다며 높이 평가한 것을 보면 조금 지나칠 정도. 사실 베르킨게토릭스도 근본적으로 부족 체계인 갈리아 인들을 단결시키는데는 한계가 있었고, 그의 실패에는 갈리아 부족들의 대립 관계 역시 큰 원인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에서 역시 비슷한 문제로 패배한 아르미니우스에 비해 특별히 좋은 평가를 받기는 어렵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아르미니우스는 동족에게 죽었고 베르킨게토릭스는 카이사르의 손에 죽었다는 정도인데 베르킨게토릭스가 죽은 원인도 결국 갈리아인들이 투쟁을 포기하고 그를 로마인들에게 넘겼기 때문임을 생각해 보면 결국 다를 건 없다고 볼 수 있겠다.

3.6. 7권

  • 티베리우스 시기 판노니아 방면 군단의 반란을 선동한 군단병 페르켄니우스가 동료 병사들을 상대로 자신들의 처지를 토로하면서 한 연설을 비판하면서, "이 돈으로 옷이며 무기며 천막을 사야하고"라는 부분을 놓고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군복이나 무기나 천막은 식량과 함께 나라에서 지급해주었으니까, 모든 것을 자비로 마련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라고 서술했다.
    하지만 현대 연구에 따르면 페르켄니우스의 연설 쪽이 참말이며, 시오노 나나미의 주장은 신뢰할 만한 출처를 전혀 확인할 수 없는 수수께끼의 반론이고 독자를 뻔뻔하게 속이는 거짓말이다.
    현재 연구에 따르면 당시 로마군은 식량, 장비(무기, 텐트, 의복, 신발, 건초 등)을 봉급으로 구매했음이 밝혀져 있고, 페르켄니우스의 발언은 주요 사료로 취급받고 있다. 물론 이 발언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자료에서 교차 검증이 충분히 된다.
    해당 연구는 제껴놓고서라도, 그냥 상식적으로 한 번 생각해보자. 페르켄니우스는 로마군의 병사이고 그 연설을 듣는 동료들도 같은 로마군 병사이며, 로마군 병사의 생활에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이 로마군 병사인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앞에서 연설하면서 말도 안되는 거짓부렁을 늘어놓으면 "저새끼 헛소리하네."라고 생각하지 도대체 누가 "그 말이 옳소!"라고 동조하겠는가? 이런 선동적 연설을 비판없이 받아들이는 것도 문제지만 아무 근거도 없는 그냥 자기 망상으로만 부정할 수도 없다.
    도대체 시오노 나나미가 왜 이런 반론을 하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는데, 현대적인 군사 시스템 관념을 그대로 대입해서 군대라면 당연히 무기나 군복 등의 물자를 지급해주는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사실 이는 현대 작가들이 흔히 하는 실수이며, 영지물만 봐도 이런 고증 오류를 상당히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근대 시기까지만 해도 군인이 무기나 갑옷을 스스로 장인에게 주문하거나 해서 마련하는 문화권은 흔히 있었다. 오히려 무기나 갑옷까지 모조리 제조해서 지급하는 경우는 상당히 특수한 사례에 속한다.

3.7. 콤모두스

  • 콤모두스에 대한 평가 자체는 객관적이지만 암살 과정에 대해 서술한 부분에 오류가 있다. 콤모두스는 그의 애첩과 근위대장에 의해 암살을 당했는데 이에 대해 '동기를 전혀 알 수 없다'고 언급했다. 콤모두스와 동시대에 살았던 역사가 헤로디안은 콤모두스의 암살 정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면서 그들이 왜 콤모두스를 살해했었는지의 정황을 기록에 남겼다. 즉 콤모두스가 검투사 막사에 들어가 살겠다고 하자 그의 애첩과 근위대장이 콤모두스를 말렸었고 이에 분개한 콤모두스가 이들을 죽이려고 살생부를 작성한 뒤 목욕을 하러 갔는데 그의 애첩이 그 근위대장과 자신의 이름이 적힌 살생부를 보게 된 것이었다. 이들은 선수를 쳐서 콤모두스를 독살하려 시도했으나 독을 먹어도 죽지 않자 레슬링코치인 나르키소스를 보내 죽인 것이었다.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무엇때문인지 이것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동기는 전혀 모른다. "그들이 콤모두스를 죽이면 손해인데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다"라고 서술한다.

3.8. 비잔티움

  • 15권 내용 상당 부분 : 동로마 측에 대해서는 시오노 나나미의 편견을 강화하는 주제만 다루고 있으며 그나마도 아예 사실과 틀린 부분이 많다.

동로마 제국이 재정 낭비만 한 것으로 다루지만, 유스티니아누스가 제국의 새로운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며 실제로 그것은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유스티누스 2세 때 재정난이 있었으나, 티베리우스 2세의 긴축 정책만으로도 제국의 국고는 다시 건전하게 회복될 수 있었다. 물론 시오노 나나미는 이런 것을 생략한다.

그리고 유스티니아누스의 로마법 대전이 이후의 제국에서 활용되지 못했다는, 아예 FACT하고 다른 틀린 소리도 대놓고 뻔뻔히 한다. 자기가 싫어서 편향된 사료에 편향된 해석을 들이대는 것도 문제가 되는 판에 이렇게 아예 틀린 정보를 집어넣어버리는 건 역사학자는 고사하고 작가로서도 실격이다.

비잔티움 제국에는 라틴어를 이해할 줄 아는 식자층이 많았으며 법관들은 라틴어를 반드시 배워야 했고, 이슬람 제국의 맹진 시기에는 라틴어 가능자가 대폭 줄어들지만 이것은 국가에서 교육에 들일 예산이 없어서 벌어진 일이지 있지도 않은 로마혼이 열등한 그리스인들 때문에 갑자기 죽어서가 아니다.

로마법 대전은 이 시기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리스어 번역본과 다이제스트판이 나오면서 활용되었다. 애초에 로마법 대전이 르네상스 때 재조명을 받은 건 비잔티움 제국이 로마법 대전을 보존한 게 이유인데, 그렇다면 비잔티움 제국은 아예 쓰지도 않는 법전을 국가 예산까지 들여 생돈 써가며 보존하는 나라였다는 말인가? 당연히 말이 안 된다.

또한 로마 제국은 라틴어를 쓰며 로마가 수도인 제국이었고 비잔티움 제국은 그리스어를 쓰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수도인 제국이라 다르다는 편견도 피력한다. 물론 이런 얘기는 시오노 나나미만 하는 소린 아니지만 후기 로마사를 전공하는 학자들은 아예 하지도 않는 얘기며, 전기 로마사 전문가라도 제대로 후기 로마사를 보는 사람은 하지 않는다. 로마 제국은 공화정 때부터도 그리스어를 상용했고 제정 시절에도 원래 제국 동부는 그리스어가 공용어였으며, 특히 로마 상류층이 향유한 문학들은 그리스어로 제작되었다. 애초에 공화정말기~제정초기의 대표적인 서적인 <신약성경>만 하더라도 다른 민족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공용어인 그리스어로 쓰였으며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역시 <명상록>을 그리스어로 썻을 정도이다. 즉 로마제국이 그리스어를 쓰는 것은 절대로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 더군다나 소위 말하는 "비잔티움 제국"의 시절에도 라틴어는 아주 오랫동안 여러분야에서 사용되었으며 특히 군사용어는 헤라클리우스 황제 시대때까지 라틴어였다. 또한 수도의 경우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어디까지나 애칭일 뿐이였으며, 정식 명칭은 '새로운 로마'(노바 로마)였다. 즉 동로마 제국은 명백하게 '로마시(市)를 수도로 하며, 로마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로마제국 그 자체'이다. 물론 여전히 문학적 수사로 볼 때는 유효한 얘기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이걸 우월하고 열등한 것을 가르는 기준으로 사용하고 있으니 큰 문제다.

4. 전반적 문제점

4.1. 노예제도

노예제도를 터무니없이 미화하였다. 마치 노예제가 현대의 고용-피고용이나 입양-피입양 관계처럼 묘사되었다. 로마 시대의 노예들은 근세기의 아프리카 흑인노예와 달리 가족과 같은 취급을 받았으며 주인이 죽을 땐 해방시켜주는 게 다반사라고 설명하였다.

하지만 로마 시대때엔 도시 노예, 교외 노예 둘로 나뉘었으며 시오노 나나미가 설명한 이런 노예는 도시 노예 및 가족 노예에만 해당되었을 뿐이다. 이 도시 노예들은 특별한 기술을 가진 엘리트 노예들이나 혹은 로마인 가족과 같이 생활하면서 정든 노예들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인간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었고 이들의 상당수가 정치적 문제 등으로 숙청되는 주인과 운명을 함께한 것은 바로 이런 점에서 기인한 것이다. 근데 따지고보면 19세기 미국 흑인노예도 집안에서 주인과 생활하는 노예는 그럭저럭 대우를 받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이런 경우 주인이 죽으면서 해방시켜주는 경우도 많았다. 고대 로마만이 특별한게 아니라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봐야한다.

그러나 이런 노예보다는 교외 노예가 훨씬 많았고 이들의 운명은 그냥 19세기 미국 흑인노예나 남아시아, 아프리카 등에 넘쳐나는 현대판 노예, 또는 섬노예와 비교하는 게 오히려 더 정확하다. 특히 에서 일하는 노예들의 운명은 상 이상으로 열악했다. 게다가 소녀(미소년도 포함) 노예들은 주인의 성욕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13] 뿐만 아니라 엘리트 노예들 역시 그리스 귀족들이 해적에게 잡히거나 전쟁을 지휘하다가 패배해서 포로로 잡혀 팔리는 등 그야말로 재수가 제대로 옴붙은 경우가 꽤 많았는데 주인이 죽을 때 해방시켜준다는 것만 가지고 미화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4.2. 라틴어

라틴어를 독학으로 공부했다고 하는데 고대음과 중세음을 혼동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고대음인 "카이사르"와 중세 라틴어음인 "체자레"의 음가 차이를 단순히 학설의 차이라고 설명했는데, 이건 그녀가 라틴어 발음변천사나 고전 라틴어나 속라틴어의 차이를 잘 모른다는 이야기.

4.3. 리메스

12, 13, 14권에서 계속 반복되는 문제점. 4세기 이후 로마 제국이 선방어 전략을 포기하고 종심 방어 전략을 채택한 것은, 로마 제국 자체의 내적 역량이 약화된 탓도 있으나 근본 이유는 국경 지대 자체에서 가해지는 압력이 이전과는 달리 갈수록 가중되었기 때문이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것이 파밀리아라는 개념의 쇠퇴라고 설명하지만 근거없는 해석이다.

애초에 시오노 나나미가 주장한 '리메스', '안전한 국경'이라는 개념 자체가 역사적으로는 '얼마 안 되는 최전성기 동안' 로마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만 가능했던 이상적인 조건일 뿐이며, 이것을 전반적인 '로마의 대전략'이나 '제국 성립 기본 조건'으로 보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틀린 얘기다. 적이 국경에 들어온 다음에야 요격하는 체제가 문제라고 거듭 주장하지만, 그렇다면 3세기 때처럼 일단 방어선이 뚫리고 나면 적에게 강요하는 희생은 거의 없는 채 발칸 반도에서 뚫린 타격이 아테네까지 그대로 가는 상황은 정상적인가? 심지어 오현제 말기에조차 게르만족의 대규모 공세에 방어선이 뚫린 일이 있었을 정도다.

선방어를 하기 위해 로마군은 예방전쟁을 해서 국경을 지켰다는 근거를 들기도 하나 예방전쟁 역시 국가적으로 엄청난 물자가 투입되므로 단지 국경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이런 전쟁비용을 지출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오현제 시기에 로마의 국력이 절정에 달했던 상황과 야만족이 전반적으로 분열되었다는 상황이 겹친 한정된 조건에서 가능했던 것일 뿐이다.

상당히 잘나가던 공화정 시절조차 로마는 선방어로 저지한 적은 가뭄에 콩나듯 하였고, 적군이 방어선을 뚫고 분탕질을 친 뒤에야 비로소 수도에서 군단을 징집한 다음 집정관이 출정하여 제압한 케이스가 대부분이었다.

아우구스투스와 오현제때 선방어가 성공한 것으로 보인 이유는 선방어의 위력이라기보단 게르만족의 정세와 아우구스투스때 벌인 대규모의 게르만 원정 때문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게르만 원정은 유명하고 또 네로의 전임인 클라우디우스 황제땐 코르불로의 지휘하에 게르만 원정을 한 일이 있었다. 또 오현제 시대로 넘어간 이후엔 먼 게르만족과 가까운 게르만족의 전쟁으로 이들이 로마를 넘볼 상황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오현제 시대에도 주기적인 정벌은 멈추지 않았다).

여기에 카라칼라 황제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말기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방어선을 다시 보강하고 게르만족이 본격적으로 세력을 갖추기 전 연이어 격파함으로써[14] 선방어 체제가 3세기 중반까지 유지되었던 것. 그러나 이후에는 게르만족의 거대한 물결을 갖추는 것을 막지 못해 선방어 붕괴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즉, 시오노 나나미의 말대로 로마가 선방어 전략을 포기한 것은 아니고 선방어로는 도무지 국경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한반도 같이 진격로가 극히 한정된 준 산악지대 같은 곳이 아니면 현대전에조차 선방어로 적을 막지 못하는데 고작 10여만(대략 20개 군단. 나머지는 동방과 후방)을 지금의 유럽 서쪽부터 동쪽 끝까지 길게 늘어뜨려 어떻게 선에서 적을 격퇴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병력을 무제한적으로 늘릴 수도 없으니 결국 로마는 선방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로마 제국 바깥의 야만족들은 지속적으로 사회 조직도와 편제가 발달하여, 장교단과 부사관단이라 할 수 있는 집단의 숙련도 또한 상승하고 있었다. 이는 전술과 전략 숙련도가 우수해진다는 얘기와 일맥상통하며, 때문에 대규모 야전에서도 더 이상 로마군에게 일방적으로 당하지만은 않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물량과 체계적인 군사학이란 분야에서는 로마보다 쳐질 수 밖에는 없었으나 이들은 카이사르 시절의 그 야만족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상대해야 했던 야만족들은 바로 이런 군사 조직들이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러한 연구 성과를 모르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후로는 카이사르 같은 천재적 무장들이 나타나지 않아, 혹은 원수정 로마의 전술을 버려서 로마가 고전했다는 이상한 결론 밖에는 내지 못하는데, 다른 사항이야 특유의 반기독교 유심론적 사관과 배치되어 납득이 안 되었다곤 치더라도 이런 부분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건 자료 조사의 불성실을 나타낸다.[15]

4.4. 후기 로마 제국 군제에 대한 전반적인 무지 혹은 상대적 무관심

가장 서두의 소위 "로마다운 로마"의 문제점이 가장 극심하게 두드러지는 대목이다. 리메스 항목에서 언급하는 문제기도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모든 이상적인 기준을 공화정 후기 ~ 원수정 초기로 맞추면서 이것과 달라지면 무조건 퇴보의 전조라고 하는 괴이한 잣대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로마군의 레기오들이 전부 허접한 국경수비대로 전환되어 유명무실화되었고, 이것이 로마의 쇠락 원인이라고 하는데 이는 아주 잘못된 인식이다. 실제로는 종전 레기오들의 정예 병력들 같은 경우 코미타텐세스 편제로 분류되어 국경선에서 물러났고, 나머지 다른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병력 자원들이 리미타네이가 되어 국경 수비를 맡았으며 전쟁이 벌어지면 리미네타이가 일선에서 방어에 종사하는 동안 코미타텐세스가 요격에 나서 외적의 침입을 격퇴하는 형태였다.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파밀리아 개념을 포기했다는 말에서만 언급하고 넘어갈 전자의 존재는 싹 무시하고, 후자만 레기오의 후예인 양 서술하면서 후기 로마 제국의 군사적 역량이 엄청나게 퇴보한 것처럼 쓰지만 이는 아주 큰 오류다.[16]

후기 로마군의 발전 사항이 궁금하면 로마군,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부분 참조. 또한 후기 로마군이 게르만족의 전술도 벤치마킹해서 발전한 것을 놓고 "야만화"라는 이상한 소리를 하는데, 이는 시오노 나나미만 하는 소리는 아니지만 후기 로마사 전공자들은 하지도 않는 얘기고, 또한 시오노 나나미가 이런 이상한 소리를 한 탓에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 널리 퍼진 편견이 되고 말았다. 로마 제국은 저 공화정 초기 때부터 그리스, 갈리아, 삼니움 등의 무장을 참조해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당장 로마군의 기본군장인 투구와 사슬갑옷(로리카 하마타)은 갈리아, 글라디우스는 히스파니아, 필룸은 삼니움의 무기를 대폭 참고하여 만든 것이고, 당연히 원수정 때도 사르마티아나 파르티아의 전술과 편제를 참조해서 군제와 전술에 반영했는데, 왜 꼭 후기 로마군만 그 굴레를 뒤집어 써야 할까? 게다가 후기 로마군의 무장과 편제는 게르만족 것만이 아닌, 사산조 페르시아의 그것도 대단한 영향을 미쳤는데 시오노 나나미는 이것도 간과한다. 사각 큰 방패와 필룸, 로리카 세그먼타타, 글라디우스 이런 것들은 리인액트할 때는 인기 있고 확실히 간지나긴 해도, 로마성이란 정체성과 필요충분조건 관계는 아니다.[17]

4.5. 객관성 문제

세기말이 낳은 최고의 동인지라는 평도 있다. 작가 본인이 좋아하는 인물의 이야기가 나오면 객관성을 던져버리고 완전히 '빠순이'모드로 돌변하는 모습 때문. 특히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이성을 잃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봐도 동인지다.

특히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키케로에 대해서 카이사르의 적이었다는 이유로 저평가한다. 키케로를 입만 산 찌질이, 개혁자 카이사르 각하에게 대항하는 책상물림 따위로 표현하는 건 이미 18세기 영국에서도 퍼진 풍조기는 하니 시오노 나나미만의 탓은 아니라지만, 이는 즉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사 인식 수준이 아직도 18세기 레벨에 머물러 있다는 얘기다. 비잔티움을 정도 이상으로 까는 성향도 역시 18세기적 인식에 가깝다. 진중권이 이문열에게 한 평가를 패러디하자면, 그녀는 훌륭한 18세기 역사작가다.

아울러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내용도 너무 짧다. 스파르타쿠스에 비하면 무명이나 다름이 없는 동시대의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는 시시콜콜하게 써놓으면서도, 스파르타쿠스에 대해서는 대충 언급하고 넘어간다. 정작 당대 로마인들은 스파르타쿠스를 반란 노예라고 부르면서도 굉장히 높게 평가했고 이후 로마사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을 고려하지 않은 것.

또한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한국과 일본에서만 저평가받게 되는 데도 큰 원인을 제공했다. 크라수스가 부를 축적한 방식이 권력을 이용한 것이라, 이런 면만 부각하면 졸부라고 폄훼하기 쉽지만 이에 못지않게 당시 로마 귀족들의 사회에 대한 헌신과 예의를 그대로 따라 공공사업에 막대한 돈을 기부했기도 하다. 대개 시오노 나나미는 그녀가 칭송하는 인물들에 대해서는 이 공공사업 기부를 통해 보다 추켜세우고는 하면서도 이에 못지않은 기부를 한 크라수스를 인기없는 졸부처럼 표현했다. 그는 결코 졸부에 비견할만한 인물이 아니며 자금력과 기부 활동을 통해 로마 정계에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거물급 인사였다는 것이 현대의 연구 결과이다. 특히 시오노 나나미는 크라수스가 막대한 채권 때문에 역으로 카이사르에게 끌려다녔다는 식으로 묘사했으나 크라수스와 카이사르는 공생관계였다. 당시 로마의 부호들은 정치인들을 금전적으로 후원하면서 그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이를 카이사르가 일방적으로 주도권을 쥔 것처럼 묘사한 것도 크라수스가 저평가 받는 큰 원인이 되었다. 다만 파르티아 원정 과정 및 이후 결과에서 볼 수 있듯이 군사적으로 굉장히 무능했기에 로마사에 오점을 남겼고 이에 대해서는 시오노 나나미가 비판한 바가 거의 사실과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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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로마 제국의 이런 세금시스템은 고대적인 노예제 하에서만 제대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전문적으로 역사를 공부한 바 없는 시오노는 이를 간과하고 있다. 폭넓은 사론이나 사관을 접하지 않은 역덕후가 빠져들 수 있는 함정에 제대로 빠진 것이다.
  • [2] 하지만 사실 다나카 요시키 역시 엘리트 독재자라면 괜찮을지도? 라는 성향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단지 그의 대표적인 저서 은하영웅전설에서 그는 양웬리라는 캐릭터를 통해 완벽한 독재자가 2대 연속으로 나올 수는 없다는 것 또한 언급하며 우회적으로 엘리트 독재자의 연이은 출현과 세습이 불가능함을 지적하고 있다. 즉, 적어도 다나카는 최소한의 균형 감각정도는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 [3] 아울러 국내 번역된 로마인 이야기의 15권에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뒤를 이은 황제가 유스티니아누스 2세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오기이다. 원문에는 유스티누스 2세로 올바르게 표기되어 있다. 번역서만의 문제이므로 각주 처리.
  • [4] 그에 비하면 이슬람교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언급이 없다. 다른 저서인 십자군 이야기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등에서는 이슬람교그리스도교보다 더 인간적이었다거나 유연했다는 평가를 곁들이기도.
  • [5] 미트라를 태양신이라고 쓰기도 했다. 사실 미트라가 광명의 신이긴 하지만, 태양신(아폴로)을 믿는 집단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쓰면 오류가 된다.
  • [6] 예를 들어 필리푸스 아라부스는 최초의 그리스도인 황제라는 설이 있지만, 시오노 나나미의 경우 필리푸스의 행적은 완전히 생략해 버려서 그저 운좋게 로마황제가 된 아랍인이 되어버린데다가, 그리스도인 황제설 또한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 [7] 게다가 상당부분을 생략했다.
  • [8] 물론 '그냥 다를 뿐이다' 라는 식의 말도 쓰지만, 대충 읽어보기만 해도 '그냥 다를 뿐' 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는 걸 알 수 있다
  • [9] 일본에는 혁명이나 대중운동이 일어난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작가들이 대중운동을 바라보는 관점은 지극히 편향적일 때가 많다. 가령 진정남 나폴레옹에서 벌어지는 프랑스 혁명은 그저 불만에 가득한 대중의 폭동이 되는데, 많은 일본 작가들의 관점이 이런식이다.
  • [10] 참고로 로마군은 선출직인 집정관이나 법무관이 지휘했으므로 정계 진출에는 군 경력이 거의 필수적이었다.
  • [11] 가령 만일 게르만족이 카이사르를 패주시킨 뒤 불만을 품은 친로마파 갈리아족을 패배시켰으면 갈리아 전역은 게르만족이 제패하게 되었을 것이다.
  • [12] 시오노 나나미는 카이사르는 7년만에 재패했는데 왜 아우구스투스는 수십년간 게르만족의 엘베강까지의 지역을 제패하지 못했고 또한 클라우디우스때 브리타니아를 제패하는 것이 30년 정도가 걸렸느냐라며 비교하는데 이러한 직접적인 비교는 문제가 있다. 마치 폼페이우스는 군단을 이끌고 동방으로 오자마자 셀레우코스를 멸망시키고 유다를 점령하는데 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수백년간 셀레우코스와 싸웠으면서도 이것을 해내지 못했냐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
  • [13] 아우구스투스가 제정했던 간통죄에서 예외적으로 노예와의 성관계는 합법이었다. 고대 이래로 여성 노예는 노동력뿐만 아니라 주인의 성적 만족을 위한 도구였다.
  • [14] 카라칼라는 군사적인 측면에서의 재능은 훌륭한 편이었다. 정치적 재능이 전무한 것이 문제였지만.
  • [15] 물론 이미 12권 집필 시기부터 여사의 건강 상태가 몹시 나빠졌다는 점을 감안해야 겠지만, 기독교를 까는 부분에서는 여전히 성실한 조사를 보인다는 점을 봤을 때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 [16] 이게 뭐가 그리 심각하게 틀렸다는 건지 한국의 독자는 영 감이 안 올 수도 있겠으나, 예컨대 현대 한국군의 실태를 취재한다는 어떤 외국 기자가 예비군 훈련때 소집된 예비군들의 여러 꼴사나운 모습만 집중적으로 부각한 다음 그것만이 현대 한국군의 모습인양 침소봉대한다면 각처에서 어떤 반응이 나오게 될까? 이는 후기 로마군에 대한 모독이라고 해도 좋을정도로 심각한 오류다. 전면전 자체가 아니라 애초에 진로 방해나 경보 그리고 지역 방어 예비대 마련을 목적으로 설치된 부대들을 놓고 전투력과 장비 타령을 하면 안 된다.
  • [17] 그런 소린 현대 한국군이 창군 당시의 카빈 소총과 민무늬 군복을 안 쓴다고 한국군 아니라는 소리와 똑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