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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10세

last modified: 2016-08-09 00:23:30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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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 산치오가 그린 레오 10세의 초상. 좌측은 훗날 교황 레멘스 7세가 된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 오른쪽은 루이지 데 로시 추기경.
교황명 레오 10세 (Leo X)
세속명 조반니 디 로렌초 데 메디치 (Giovanni di Lorenzo de' Medici)
출생지 이탈리아 피렌체
사망지 교황령 로마
생몰년도 1475년 12월 11일 ~ 1521년 12월 1일 (45세)
재위기간 1513년 3월 9일 ~ 1521년 12월 1일 (8년 267일)
라틴어 Leo PP. X
이탈리아어 Papa Leone X
영어 Pope Leo X

역대 교황
216대 율리오 2세 217대 레오 10세 218대 드리아노 6세

레오 10세의 문장

Contents

1. 개요
2. 교황이 되기까지
3. 재위기간에 일어난 일들
3.1. 여러 가지 전쟁들
3.2. 품위 유지와 후원 활동
3.3. 종교분열의 불씨
3.4. 재위 말년

1. 개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제217대 교황.

그 유명한 재벌 메디치 가 사람으로 피렌체의 은행가 로렌초 데 메디치와 클라리체 오르시니 사이에서 '영리한' 차남[1]으로 태어났다. 또한 그와 함께 성장한 사촌[2] 줄리오 디 줄리아노 데 메디치는 교황 레멘스 7세가 되어 가톨릭 교회사상 최고의 굴욕을 당하게 된다.(...) 잠깐 눈물 좀 닦고.

대체로 씀씀이가 커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퍼다주는 교황이었다. 이렇게 어려운 사람들만 도와주면 참 좋을 텐데, 자신과 자신의 지인들을 위해서도 교황청의 재정을 아낌없이 퍼주는 바람에 안 그래도 잦은 전쟁으로 거덜나 있던 교황청의 재정이 바닥을 드러내었다. 교황청이 메디치가인 줄 알았나 보지. 얼마나 흥청망청 썼느냐면, 성 베드로 대성당 재건 사업에 들어가야 할 몫까지 싹싹 긁어썼기 때문에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정도. 그래서 그는 한 가지 묘책을 생각해 냈다.

그렇다. 이 분이 바로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기금 마련을 위해 독일면벌부 판매를 승인함으로써, 마르틴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을 촉발하게 만든 원흉이시다.

2. 교황이 되기까지

조반니 데 메디치의 어린 시절은 순전히 가문빨에 의한 승승장구였다. 7세에는 탁발수도회에 들어갔고, 아버지 로렌초와 교황 노첸시오 8세의 거래[3]에 의해 13살이 되던 1489년 3월 8일에는 추기경이 된 것이다. 추기경이긴 하지만 이름만이기 때문에 문장을 사용하거나 추기경단에 낄 수는 없었던 로렌초는, 3년 동안 피사에서 제대로 신학과 교회법을 공부하고 난 1492년 3월에야 정식으로 추기경단에 들어가게 된다. 같은 해 4월에 아버지 로렌초가 죽고, 7월에는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선종하자 콘클라베에 참석하여 은근히 교황직을 노렸다. 하지만 이 때 선출된 교황은 다름 아닌 로드리고 보르지아 추기경. 그는 알렉산데르 6세로서 1503년까지 교황직을 수행했고, 그 뒤를 오 3세율리오 2세가 잇는 짧은 순간 동안 조반니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형 피에로 데 메디치와 피렌체에 머물던 조반니는, 알렉산데르 6세에게 파문당한 수도사 사보나롤라가 일으킨 봉기에 프랑스의 황제 샤를 8세의 침공이 겹쳐 나란히 밖으로 쫓겨난다. 이 난리통에 형과 헤어진 조반니는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등지를 전전하다 1500년에 로마에 안착한다. 이 때 알렉산데르 6세의 도움을 받아 지내며 수 년 간 예술과 문학에 푹 빠져있었다. 이 동안 알렉산데르 6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체자레 보르지아콘클라베에 난입해 깽판을 치려 했으나 결국 교양 있고 정갈한 오 3세가 후임 교황으로 착좌했고, 안타깝게도 그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선종한 1503년에는 호전적인 율리오 2세[4] 교황이 뒤를 이었다. 같은 해에 형 피에로가 죽자 집안을 이끌던 그는 1511년 10월 볼로냐와 로마냐의 교황특사가 되었지만 라벤나 전투 기간 동안 프랑스군에 붙잡혀 밀라노로 송치되었다가 간수에게 뇌물을 먹여 빠져나왔다. 이듬해 율리오 2세가 프랑스 주교단이 멋대로 개최한 피사 공의회를 인정하지 않으며 제5차 라테란 공의회(1512년~1517년)를 연 뒤 조반니로 하여금 교황군에 합류하여 피사 공의회(1511년~1512년)[5]를 지지하는 피렌체를 치도록 했다. 어차피 프랑스를 등에 업었던 사보나롤라는 화형당한 지 오래인 데다 가스통 드 푸아가 전사한 프랑스군도 철수한 마당에 피렌체 시민들도 그를 환영했고(...), 고향에 무혈입성한 그는 동생 줄리아노를 내세워 메디치로서 복권할 수 있었다.

1513년 교황 율리오 2세가 죽자 콘클라베가 열렸는데, 그의 젊은 나이는 교황이 되는 데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으므로 지병인 치질을 내세우며 최대한 아픈 척을 했다. 그래야 "아, 쟤는 교황이 되어도 그렇게 오래 버티지는 못하겠군"이라는 메리트가 붙기 때문(...). 그게 먹혔는지, 조반니는 3월 9일 교황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그 때 나이 37세. 그리고 8년만에 다른 병으로 죽어버려서 어쨌든 추기경단의 예측대로 되어버렸다.

3. 재위기간에 일어난 일들

3.1. 여러 가지 전쟁들

레오 10세는 전쟁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임 교황이 전쟁 마니아(...)였기 때문에 하던 전쟁을 중간에 그만둘 수는 없었다.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베네치아와 결탁하여 이탈리아 북부의 패권을 쥐려 했기 때문에, 1513년 4월 5일에는 그에 대항하여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아라곤르난도 2세, 잉글랜드헨리 8세와 더불어 메헬린 동맹을 맺었다. 처음에는 좀 밀리는가 싶었는데 6월 노바라 전투에서 프랑스-베네치아 연합군을 몰아내고야 말았다. 전쟁은 10월까지 계속됐지만 한 번 꺾여버린 전세가 좀처럼 회복되지 않은 프랑스-베네치아 연합군은 결국 평화협정을 체결한다.

그런데 1515년 루이 12세의 후임으로 즉위한 프랑수아 1세가, 9월 13일 고요를 깨고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 연합군은 다시 모였지만 프랑수아의 3만8천 대군을 막아내지 못했다. 9월 14일 마리냐노 전투에서 패배하자 교황은 그가 원하는 밀라노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고, 동맹은 깨졌다. 이를 위해 12월 교황이 프랑수아 1세와 볼로냐에서 단독 비밀회동을 가지자 에스파냐 국왕은 상당히 아니꼬워했다고 한다.

1513년 12월 9일에는 제5의 라테란 공의회를 재개하여 피사 공의회를 재차 이교로 단정, 개최한 주교단을 너 해고 파문하여 교황의 수위권을 아무나 지 못하는 발판을 공고히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 공의회가 제대로 거둔 수확은 이것과 평화협정 뿐이었으며, 위에 언급된 정신없는 전쟁 때문에 교회 개혁 같은 문제는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1516년에는 피렌체 공화국을 다스리던 동생 줄리아노가 세상을 떠나자, 형 피에로의 아들인 로렌초를 우르비노 공으로 임명하려고 우르비노 공작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 1세를 파문하고 추방시켰다. 또한 로렌초를 프랑스 왕가와 혼인시켜 프랑스와의 동맹을 강화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도 별로 성과는 거두지 못했는데, 로렌초가 딸 하나 남기고 일찍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딸이 바로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 한편 빡친 로베레는 우르비노를 탈환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순조롭게 재입성, 몬테 임페리알레에서는 비비에나 추기경 베르나르도 도비치가 이끈 군사를 신명나게 털어 페사로로 쫓아내지만 사비가 부족해서 전쟁을 종결시킨 뒤 만토바로 퇴각했다. 레오 10세는 이를 위해 교황청 금고를 탈탈 털었으며 알렉산데르 6세마냥 괜한 전쟁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교황과 마찬가지로 제정신이 아닌 추기경단의 미움까지 샀다. 반면 로베레는 레오 10세가 죽은 해인 1521년 우르바노 공작위를 되찾는다.

레오 10세는 자신을 미워하는 추기경단을 그냥 두지 않았다. 자신을 독살하려 했던 추기경들을 색출하여 알폰소 페트루치 추기경을 처형시키고 나머지는 산탄젤로 성에 감금했다. 더불어 물갈이용으로 31명의 새로운 추기경단을 뽑았으며 이 중에는 후임 교황 드리아노 6세가 있었다.[6]

한편 십자군 원정을 재추진하기 위해 원대한 계획을 짜고 십일조로 기금을 모은 뒤, 기독교 국가들의 단결을 주재하려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실현하진 못했다.

3.2. 품위 유지와 후원 활동

레오 10세는 메디치가 출신답게 품위를 중요하게 여겼으며, 예술을 사랑한 인문주의자였다. 또한 사회로부터 소외받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훌륭한 자선가였다. 물론 자신의 낭비벽과 쓸데없이 낭비한 전쟁 비용만 빼면. 그의 교황 즉위식 때 세워진 개선문에는 "과거 베누스[7]가 지배하였고 마르스[8]가 통치하였으며, 이제는 미네르바[9]의 시대가 온다"라고 써진 명문이 걸렸다고 하며, 재임 시기 내내 르네상스의 절정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콘텐츠들이 쏟아져나왔다.

본인도 치장을 좋아했기 때문에 여러 발굴품들 및 유물들을 사들여 바티칸 내부에 전시했고, 학자들을 섭외하여 여러 사전이나 인문학 서적을 편찬하도록 했다. 성경을 번역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파괴된 문화재가 있다면 복원도 시켰다. 잡음이 심했던 레오 10세 치세에서 유일하게 부정할 수 없는 긍정적인 면인 셈. 하지만 반대로 그의 사치가 겹쳐 교황청에 미증유의 재정 파탄이 일어난 점에 대해서는 그런 거 없다(...). "레오 10세는 3대에 걸친 교황의 수입분을 혼자 처먹었다. 율리오 2세 때 축적된 재산, 레오 10세 자신의 수입, 다음 교황 것까지 3인분!"이란 소리까지 나왔다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또한 지극한 동물애호가로, 언제나 포르투갈 왕에게서 공수한 애완 코끼리[10]인 하얀 한노(Hanno)를 데리고 로마 시내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한노라는 이름은 한니발에서 따온 것으로, 교황이 바티칸 정원에 따로 지어준 집에서 살며 전용 신발을 신었다고 한다(...). 게다가 한노를 보살피는 사람은 다름아닌 '브란코니노'라는 이름을 지닌 라파엘로 산치오의 친구. 한 번은 조카 로렌초가 한노를 데리고 피렌체에 가면 안 되겠냐고 할 때, 교황은 코끼리가 아파할까봐 단호히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한노는 1516년 병으로 쓰러졌고, 교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 교황은 너무나 슬퍼 주치의들에게 사인서를 작성하도록 하고, 한노를 바티칸의 어느 담벽에 고이 묻어주었다.

평소에 많은 예술가 양성에 힘썼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도 그 중 하나다. 특히나 아끼던 수석 건축가 라파엘로 산치오가 과로로 사망했을 때는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다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경우는 너무 늙었고 건강도 안 좋았기 때문에 교황으로부터 큰 도움은 받지 못했던 듯하다.

3.3. 종교분열[11]의 불씨

예술을 사랑하는 레오 10세는 라파엘로 산치오를 비롯한 여러 예술가들을 초빙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속행했다. 그가 진행한 작업은 자신의 초상화, 시스티나 경당의 벽면, 바티칸 회랑의 벽화 등이었는데, 성 베드로 대성당이야 옛날부터 꾸준히 증축해오던 차였으니 별로 다를 바는 없겠지만, 특유의 낭비벽과 적절하지 못한 인력 배치로 인해 공사에 차질이 빚어지게 되었다.

본래 가톨릭에서는 간간히 대사을 반포하여 교황명으로 지시된 보속 절차를 밟으면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하였다. 보속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기도와 성지순례로 대표되는 신심행위와 봉사활동 등의 선행이 있었다. 레오 10세는 이를 이용하여 대성당 건축 특별 대사령을 반포, 성지순례나 선행이 어려우면 자선헌금으로 대신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일정한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대사부를 뿌리기 시작했다. 사실 이 방법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다. 성지순례 같은 기존의 보속 방법은 일반인들에게는 정말 혹독하고도 여러 모로 힘든 것이었기 때문에 차라리 일정한 '벌금'을 내고 면벌받는 것이 편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면벌부(대사부) 항목 참고. 사실 여기서 끝난다면 기금이 얼마나 모이든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의 아래에 포진해 있던 성직자들에게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선제후 중 한 명이자 마인츠 대주교인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Albrecht von Brandenburg-Ansbach)'는 '요하네스 테첼'이라는 도미니코회 수사를 비롯한 몇몇의 대리인에게 대사부 판매를 맡겼다. 알브레히트 대주교 본인도 초입세[12]를 낼 돈이 없어 대상인에게서 빌린 것을 갚기 위해 교황의 허가를 얻고 대사부를 판매한 것. 그는 대리인의 수입까지 떼먹을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이 요하네스 테첼 수사라는 사람은 한 술 더 떠 "돈이 헌금함이 짤랑 떨어지는 순간 당신 뿐 아니라 당신 부모, 친지의 영혼까지 모조리 연옥에서 해방, 천국으로 고고싱!"이라는 식의 과대 허위 광고를 떠벌리고 다니며 수금에 열을 올렸다. 그놈의 입방정이 문제. 이걸 보다 못한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대사부 판매를 금지시켰지만 소용이 없었고, 그에 이어 비텐베르크 대학 신학 교수로 있던 마르틴 루터 수사신부가 수면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사실 마르틴 루터는 처음부터 교황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파문당하기 직전까지도 교황권을 의심하지 않았다.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건 것도 사실무근. 단지 대사를 너무 남발하는 게 아니냐며 학술토론회를 요청했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교황 측에서 답신이 없자[13] 대사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동료들에게 하소연했는데, 이게 출판업자 손에 들어가 95개조 반박문으로 변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랬다. 변수는 바로 발달된 인쇄기술이었다. 이로서 예상도 못한 비난을 받은 루터는 교황에게 다시금 반박문에 대한 해명을 하려 했지만 이미 상황은 뒤틀릴 대로 뒤틀렸다. 교황은 교황대로 칙서를 발표해 그의 반박문을 재반박하였고, 루터도 딱히 자신의 입장을 철회할 생각이 없었다. 레오 10세는 급기야 1521년 마르틴 루터를 파문하고 만다.

후일담, 저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는 나중에 가톨릭에서 파문당하고 루터교회로 개종한다(...). 무슨 지거리야

3.4. 재위 말년

1519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서거하자 공석인 제위를 놓고 각국의 신경전이 벌어졌다. 크게 에스파냐의 왕 카를로스 1세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계승권을 놓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는데, 어느 쪽을 택하든 이탈리아가 위험할 거라고 생각한 레오 10세는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를 밀었다. 하지만 결국 제위는 카를로스 1세가 차지하게 되었고, 에스파냐프랑스가 크게 한 판 붙으려 하자 눈치를 보던 레오 10세는 슬그머니 카를 5세가 된 카를로스 1세에 빌붙었다. 이로서 볼로냐 밀약협정으로 동맹을 맺었던 프랑스와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한편 1521년 5월에는 카를 5세와 본격적으로 동맹을 맺었다. 여기에 잉글랜드의 헨리 8세가 동참하면서 빡친 프랑스는 카를 5세와 한 판 붙었지만 도리어 밀라노 등을 빼앗기고 만다. 그리고 그건 레오 10세가 바라던 것이었다.

1521년 10월 25일, 45세의 레오 10세는 갑작스런 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된다. 그 뒤 몇 주 동안은 상태가 나아지나 싶었지만, 11월 말에 갑자기 악화된 상태는 더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12월 1일 의식을 잃고 다시 눈을 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다. 사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말라리아라느니 독감이었다느니 설만 나도는 상황. 심지어는 시신의 상태로 미루어 보아 프랑스에서 보낸 자객에 의해 독살당한 게 아니냐는 추측까지 있다. 그의 유해는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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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로렌초 데 메디치는 자신의 세 아들을 평하여, "내 세 아들 중 첫째는 미쳤고 둘째는 똑똑하고 셋째는 착하다."라고 했다.
  • [2] 로렌초의 동생 줄리아노의 서자.
  • [3] 모든 지지자들을 잃은 인노첸시오 8세가 메디치가에 의존하는 대가.
  • [4] 1492년 콘클라베에서 로드리고 보르지아와 대립각을 세웠지만, 추기경단에게 뇌물을 마구 먹인 로드리고 보르지아에게 패한 전적이 있다. 또한 프랑스의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할 때 그에게 힘을 실어 알렉산데르 6세를 쫓아버리려고 했으나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 [5] 공의회의 결의가 교황수위권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 [6] 페트루치 추기경은 레오 10세의 주치의를 매수하여 치질 자리에 붙이는 고약에 독을 타려다가 발각되었다. 한편 여기에 서양판 십팔자위왕 이야기가 따라오는데, 로마에 다음 교황은 가난한 가문 태생이지만 학식이 뛰어난 아드리안이라는 사람이다. 라는 소문이 퍼지자, 이 소문이 자신을 가리킨다고 믿은 아드리안 사울리 추기경이 마침 교황을 개인적인 원한으로 암살하려고 하던 페트루치 추기경과 합세하여 교황을 암살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페트루치 추기경은 사형당하고 아드리안 사울리 추기경은 자진 망명하였다. 그 후 레오 10세가 말라리아로 죽자 후임 교황이 뽑혔는데, 정말로 가난한 가문 태생이지만 학식이 뛰어난 아드리안 데달 추기경이 하드리아노 6세 라는 이름으로 교황에 즉위했다.
  • [7] 성생활이 문란했던 알렉산데르 6세.
  • [8] 전쟁을 좋아했던 율리오 2세.
  • [9] 레오 10세 본인.
  • [10] 아시아코끼리라고 한다.
  • [11] 가톨릭에서는 종교개혁이라는 말을 쓰지 않으며, 종교개혁은 가톨릭의 입장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단어라며 불쾌해하는 가톨릭 신자도 많다.
  • [12] 성직자가 임명된 첫 해의 수입을 교황에게 바치는 세금.
  • [13] 애초에 당장 급전이 필요해 고의적으로 반포한 대사였고, 교황청 또한 마르틴 루터듣보잡 취급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변수를 생각하지 못한 교황청은 그냥 입단속만 잘 시키면 넘어가겠거니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