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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원정

last modified: 2016-02-22 20:33:04 Contributors


러시아 원정 당시의 참혹했던 프랑스군의 모습
나폴레옹 전쟁
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 러시아 원정 나폴레옹의 몰락

나폴레옹 전쟁의 여덟번째 국면. 나폴레옹 몰락의 서곡이 된 전쟁이다.

Contents

1. 전쟁 배경
2. 병력 규모
3. 전역 경과
4. 모스크바 점령
5. 위대한 군대의 위대한(?) 몰락
6. 기타
7. 미디어


1. 전쟁 배경

독일.폴란드 원정에서 나폴레옹에게 깨진 러시아는 1807년 틸지트 조약으로 명목상은 프랑스의 대등한 동맹국이었다. 나폴레옹은 어느정도 자유주의 성향이 있었던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1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영국을 대적하는 프랑스의 입장에서 유럽지배의 파트너로 러시아를 구상했기 때문에 프로이센이나 오스트리아와는 달리 명목상 대등한 동맹국 취급을 했다.

나폴레옹은 1809년 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으로 오스트리아를 다시 굴복시키면서 당분간은 유럽 대륙내에는 나폴레옹에 맞설 나라가 없었다. 영국은 본토가 침공받지는 않았지만 나폴레옹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고 나폴레옹에게 패배한 다른 나라들은 절치부심하면서 이를 갈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유럽지배와 영국에 맞선 대륙봉쇄령을 강화하기 위해 유럽해안을 모조리 장악했는데 여기서 영국과 우호적인 포르투갈이 반발하자 두들겨패러 이베리아 원정에 나섰고 독일쪽에선 당초 영토적 합의를 무시하고 라인강을 넘어 네덜란드 전역과 독일 북해안과 엘베강 하구까지 발트해의 거의 모든 항구를 점령한다.

여기서 합병한 지역중에는 독일북부 올덴부르크 공작령도 있었는데 올덴부르크는 알렉산드르 1세의 어머니 마리아 페도로브나의 외가친척인 뷔르템부르크 가문이 다스렸었고 [1]
나폴레옹 입장에선 프랑스의 전통적 우방 오스만 투르크를 패는것도 용인해 주었고, 스웨덴이 영국쪽에 붙자 1809년에 핀란드까지 러시아에게 주었는데 대륙봉쇄령을 쌩까는게 매우 고까운 마당에 1811년에 알렉산드르가 프랑스의 확장에 항의하여 파리대사 쿠라긴 공작을 소환하자 러시아 원정 계획을 세우기로 한다.

한편, 나폴레옹은 해군력의 미비 때문에 영국 본토를 침공할 수 없어,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사시키겠다는 생각에서 대륙 봉쇄령을 내렸었다. 오스트리아가 쳐발린지 1~2년 만에 대군을 회복한것도 영국의 경제력을 바탕으로한 비밀 지원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고 유럽지배를 확고히 하려면 영국을 경제적으로 굴복시키지 않으면 장기적으론 불가능하다는 전략적 판단 때문... 러시아도 처음에는 여기에 미온적으로나마 참여했다. 하지만 러시아 입장에선 국익에 전혀 도움도 안되는데다가 대외교역량 감소로 경제적 타격을 프랑스에서 보상해주는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쌩갔고 [2] 대륙봉쇄령으로 영국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만더 밀어붙이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3] 이에 국내외의 반발을 무시하며 밀어붙인 대륙봉쇄령의 실효성을 기하기 위해 러시아를 굴복시키지 않고선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한 것.


2. 병력 규모

이에 나폴레옹은 유럽 역사상 최대의 원정군을 꾸리게 되었다. 원정군 규모에 대해선 여러 출처가 난립하는데 여러 서적에서 취하는 클라우제비츠의 기록에 따르면[4]

  • 총 병력 61만명 (11개 군단)[5]

이중에 국경을 넘어 간건 42만명 정도다.[6] 스웨덴과 영국의 상륙에 대비하여 발트해에 병력을 남겨야 했고 미덥지 않은 동맹(?)꼬붕 프로이센 점령용 병력도 남겨야 했기 때문.

  • 나폴레옹 본대 23만2천명 (근위대 4만 6천 포함)
러시아 원정의 핵심 모스크바 공격용 병력으로 나폴레옹 본대엔 평소 탐내던 프로이센 포병대를 본대에 선발(?)로 대려갔다. 프로이센과 별도로 근위대를 제외하면 프랑스군 내에서 프랑스인이 아닌 병력이 더 많았다고 한다. 프랑스 영토에서 고른 병력도 프랑스 제국에 합병된 이탈리아 라인란트 네덜란드 스페인 영토 병력이 상당수였다고...동생 제롬 보나파르트 양아들 외젠등으 병력을 합치면 모스크바 공략용 병력은 35만 정도로 추산 됨.

  • 인 동맹 병력 13만명 [7]
    바이에른 왕국 3만, 베스트 팔렌 왕국 2만 5천, 작센 왕국 2만, 뷔르템베르크 왕국 1만 2천, 바덴 대공국 8천9백, 베르크 대공국 5천 헤센-다름슈타트 4천, 나사우 3천8백, 프랑크푸르트 2천8백 등등.
  • 바르샤바 대공국 9만 5천
  • 오스트리아 3만 3천 (벨로루시에 짱박혀 있다가 이심전심으로 러시아랑 전투를 안하다가 은근슬쩍 퇴각)
  • 프로이센 2만 (역시 쿠를란트에 짱박혀 있다가 프로이센 국왕이 러시아와 내통하며 마크도날의 10군단에서 이탈)
등등

러시아군의 군세는 전역 초기 카자크는 제외하고 37만명으로 추산 되는데 주력은 1전선군 바르클라이 드 톨리과, 2전선군 표트르 바그라치온이 주력이었다.
  • 1전선군 바클라이 드 톨리 12만 7천
  • 2전선군 표트르 바그라티온 4만 5천
  • 3전선군 알렉산드르 토르마소프 4만[8]

크림반도 치차코프가 3만병력으로 북상하여 나폴레옹 추격시 합류하고 스웨덴과 강화하여 핀란드에서 4만명을 충원했고, 스웨덴은 전쟁 말기 동맹군 2만명을 리가로 파견함. 카자크를 합치면 전역초기 나폴레옹의 침공병력과 비슷한 45만명선의 병력을 보유했다고 한다. 별 도움은 안되었으나 인구 1000명당 3~4명의 신병이 징집되어 전역후반엔 민병까지 합쳐 숫자상으론 90만 병력까지 충원되었다함.


3. 전역 경과

1812년 6월 24일, 나폴레옹은 네만 강을 건너 러시아령 폴란드로 침공했다. 나폴레옹의 목표는 속전속결로 러시아 주력을 일시에 섬멸하고 빠른 항복을 받아낸다였는데 알렉산드르의 반응은 훗날에도 회자 되는데

러시아 국경내에 단 한명의 프랑스 무장 병력이 있는 한 강화는 없다.

라고 통보했고 자신과 장군들과 궁정신하들 에게도 못을 박아 놨다. 총사령부에서 따로 나폴레옹에게 사신을 보내는것도 차단하고 감시했으며 쿠투조프가 후에 나폴레옹이 보낸 사절과 대화한만 한것도 크게 질책할 정도.

이곳에는 러시아의 제1서부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병력도 10만에 달했지만 사령관인 바클레이 데 톨리는 나폴레옹의 병력이 생각보다 엄청난 군세라는것을 알고나선 신속히 퇴각하면서 나폴레옹의 의도인 결전을 피했다.

빌뉴스에 있던 알렉산드르 1세도 후퇴하면서 바지사장 데 톨리에게 총지휘권을 넘겨준 뒤, 모스크바를 거쳐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 데 톨리는 3만에 달하는 바그라티온의 제2서부군과의 합류를 요구했다. 드리사도 나폴레옹을 막는데 역부족이라고 판단한 데 톨리는 드리사도 버리고 계속 내륙으로 후퇴했다(…). 덕분에 프랑스군은 별 저항없이 동쪽으로 진군를 계속했다.

드 틀리가 신속히 퇴각하고 그에 따라서 나폴레옹도 강행군을 한 탓에 비전투 손실이 극심했다. 강행군이 시작된지 며칠만에 러시아에 폭우가 내려서 길이 엉망 진창이 되었고 불어난 강물에 폴란드 기병대 병사들 상당수가 익사... 특히 프랑스 기록에 의하더라도 군마의 먹이인 건초와 귀리가 부족했는데 말먹이 부족으로 농가의 지붕을 벗겨다가 먹였다가 메멜을 거친지 몇일만에 군마 2만마리가 굶어죽거나 탈진... 식수도 부족해서 비상용 화주는 금방 바닥이 나고 목이말라 노천수를 먹은 병사들은 발진티푸스에 걸려서 첫 2주만에 13만5천명의 병력을 비전투 손실로 잃었다.

특히 구급약품 수송마차들은 전투부대 뒤로 쳐져서 아무런 치료도 못받았기 때문에 일선에선 약품을 대체할 대용품도 없었다고 한다.[9]

이런 안습한 복무 여건 속에서 탈영자 자살자가 속출하여 독일 지역 동맹군(?)들에게는 민심이반을 우려하여 본국으로 편지 보내기가 금지 당할 정도...

나폴레옹의 본대 주력군은 스몰렌스크 전투 직전 17만 5천명으로 감소 되었고, 한편 바르클라이 드 톨리는 비텝스크에서 나폴레옹을 저지하려 했지만 바그라티온의 2군이 모길레프에서 격파당하고 비텝스크로 가는 도로가 차단 되었기 때문에 동쪽으로 이동하여 2군과 합류하여 스몰렌스크에서 합류했다.

사실 드 톨리의 작전을 청야전술의 일종으로 보기도 하지만, 데 톨리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게 아니라 뭔가 프랑스군에게 맞서려고 하다보면 어느새 프랑스군이 와버렸기 때문에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이 강하다. 특히 전쟁과 평화를 서술한 레프 톨스토이는 러시아군의 청야전술이 의도적으로 한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것이다라고 평가하는 편... 근거는 차르 알렉산드르 1세는 거점이 함락 될 때마다 총사령부에 직접 신하를 파견해 드 톨리를 질책했고 스몰렌스크가 함락되자마자 화가 벌컥나서 짤라버렸고 모스크바 함락시에도 쿠투조프에게 해명을 요구하면서 크게 화를 냈었다는것을 근거로 한다.

어쨌든 의도적이든 결과적이든 러시아 측은 병력을 최대한 보존한 반면[10] 공세측인 입장인 프랑스 측은 장거리를 이동하면서 막대한 비전투 손실을 겪으며 특히 보급선이 점점 길어지는 문제를 겪게 된다. 굳이 소련시대 예를 들지 않아도 나폴레옹의 급속한 행군은 당시 전문가들이나 나폴레옹에 호의적인 프랑스 사가들 조차 무리한 공세였다는게 중론이다.

8월에 접어들어서 스몰렌스크에서 전투가 벌어졌다.(스몰렌스크 전투) 나폴레옹은 여태까지 러시아군과 제대로 된 전투를 겪지 못하고 여러번 찰나에 잡힐만하면 도망치는 러시아군의 전술에 초조하면서 화가 많이 나있었다. 마침 스몰렌스크는 러시아군의 서유럽 전진 보급기지였고 군수물자가 풍부했기 때문에 일시에 장악하려 했지만 선발대가 공성용 대포를 못챙겨 와서 시간을 놓쳤다.. 그사이 드 톨리가 스몰렌스크 기지창 파괴를 명령했고 목조건물이 많은 스몰렌스크는 불바다가 되었다...

양측은 교전이 있긴하지만 큰 교전은 아니었고 사상자수는 2만이하..

알렉산드르 1세는 스몰렌스크 전투 이후 스몰렌스크를 지키내라는 명령도 못 지키고 도시를 션하게 태워먹은 드 톨리를 크게 질책하면서 그동안 청야전술에 부정적인 미하일 쿠투조프를 총사령관으로 지명하는데 애초에 쿠투조프를 기용하지 않은건 드 톨리를 바지사장으로 세워놓고 일일히 감놔라 배추놔라 전술에 간섭질을 하기 편하도록 주전파이며 러시아 전통파를 대표하는 바그리티온보다 스코틀랜드계 이민자 출신인 드 톨리를 기용한것. 애초에 주전파인 러시아파와 드 톨리를 비롯한 반대파를 모두 아울를만한 대장감은 쿠투조프 밖에 없었다. 쿠투조프는 취임 조건으로 황태자인 콘스탄틴 대공[11]을 기용하여 명령권을 간섭치 말것을 차르에게 직접 요구했고 차르는 화가 났지만 수락할 수 밖에 없었다. [12]

쿠투조프는 막상 실무를 떠 맡고 보니 그동안 열심히 깟던 드 톨리의 전술을 채용하긴 했지만 옛 수도 절대 사수라는 알렉산드르 1세의 명령도 있었고 "한번도 싸워보지 않고 모스크바를 내줄순 없다."는 드립을 황제 앞에서 쳐놨기 때문에 모스크바 앞에서 전투를 벌일 구상은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그라티온 같은 주전파들의 반발이 심한데다가 사기상 계속 싸우지말고 도망치면 지휘도 어려워지기 때문..

보르디노에서 우주방어를 치고있던 러시아군을 나폴레옹이 까부쉈다(?)라고도 알려져있는데 보르디노는 쿠투조프가 선택한것은 아니었다. 쿠투조프는 멀리 있어서 보르디노에 참여하지 못 했고, 나폴레옹도 마찬가지로 전날 열심히 지형을 답사하다가 감기에 걸려... 후방에서 명령만 내렸다고...

레프 톨스토이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보르디노 전투는 우발적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스몰렌스크에서 보르디노까지 러시아군이 더 유리할 지형을 내팽겨치고 보르디노에서 붙은점. 전투에서 가장 극심한 격전지인 러시아군 좌익의 방진이 고작 하루에서 사흘정도밖에 공사를 안한점. 좌익에 진을 친 이점을 이용 하려면 프랑스 군의 칼라차 강 도강을 저지했어야 하는데 이미 따라잡혀서 아무 간섭없이 도강한점 등을 미루어 볼때 나폴레옹의 추격에 러시아군이 보르디노에서 따라잡혔고 보르디노에서 전투가 이뤄졌다는 설을 펴고 있다.

아무튼 현재까지 설로는 보로디노에서 양군의 병력은 대포의 화력까지 얼추 비슷했다고 전해지고[13]
새벽부터 프랑스군의 포격으로 전투가 시작되어 양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에게 러시아 우익에 유도 공격을 하는 척 하면서 러시아군의 좌익 바그라티온을 프랑스군 우익 포티아토프스키가 기병을 이끌어 우회하고 중군의 다부가 바그라티온을 협공하면서 시작되었다. 포니아토프스키는 러시아 보병대에 저지당했고 바그라티온의 러시아군 좌익은 프랑스군의 집중공격을 받으며 버텨냈다. 하지만 톨스토이의 평가로는 러시아군의 병력배치가 잘못되어 좌익에 병력이 적었고 집중공격을 받자 우익의 드톨리가 구원을 하러 오자 개활지에서 프랑스군 좌익 외젠 드 보아르네에게 측면을 노출 당했고 이때문에 시작도 전에 배치실수로 진 전투라고 평가 했다... 어쨌든 격렬한 전투는 오후까지 계속 되었고 양군은 너나 할것 없이 탈진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근위대 투입을 거부했고 전투는 시간이 흐를수록 개싸움이 되어갔다... 양군은 엄청난 사상자를 남긴채 소강상태에서 더 피해가 큰 러시아군이 후퇴함으로 프랑스군의 승리로 끝난다. 전투 피해는 러시아군 사망 6만 프랑스군 5만명으로 추산되는데 러시아군에서는 바그라티온을 비롯한 적어도 6명의 장군급이 전사했고(바그라티온은 치명상을 입고 며칠 후에 사망이지만) 프랑스군에선 다부가 말에 떨어져 중상을 입고 실려갔으며 11명의 장군이 전사했고 18명이 부상을 입었다.. 양군은 인명 피해 뿐만 아니라 기병손실이 매우 컸는데 프랑스군의 작센기병여단은 러시아군의 포화속에 전멸을 포함하여 3만 5천필이상의 군마를 잃었다고.. 비록 패배했지만 러시아군의 격렬한 저항에 대해서 훗날 세인트 헬레나에서 나폴레옹은 "러시아 보병은 요새이며 오로지 포격으로만 파괴할 수 있었다" 라고 높이 평가할 정도 였다.

여기서 러시아군의 미스가 생기는데 쿠투조프는 전선에서 떨어져서 보고를 받는 입장이라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상트 페테르그부르크에 승전보를 보내버린것... 그 결과 황실 주최 감사기도회가 열린건 헤프닝이지만 전투 5일 후에야 모스크바 포기 명령을 내린 병크를 터뜨렸다.

4. 모스크바 점령

나폴레옹은 보르디노 전투 7일 후인 9월 15일, 유유히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5일 후에야 후퇴명령을 내린 덕에 모스크바 시엔 러시아군 부상자 1만 명이 치료를 받고 있었고 이들은 고스란히 포로로 잡혔다.

모스크바에 머무르면서 이집트 원정 때처럼 마음껏 정복자 행세를 했다. 이집트에서 나환자 병원에 찾아간 것처럼 모스크바 에선 고아원 양로원을 방문해서 돈을 기부하고[14] 정교회 사제들에겐 평소처럼 교회를 열어 예배를 볼 수 있도록 배려했고, 포고문으로 약탈을 금지하고 모스크바에서 흩어진 상인과 수공인들에게 공정한 통상과 안전을 보장하며 평소처럼 경제활동에 종사할 것을 주문했다. 나폴레옹과 참모들의 계산으론 모스크바엔 대군을 먹여살릴 반년치 정도의 식량이 확보되어 있고 이 정도면 모스크바에서 월동을 지내면서 항복 사절을 기다려도 된다고 판단한 것.

그러나 9월 14일-18일에는 모스크바에서 의문의 화재가 발생했다. 발생 원인으로 프랑스 측에선 러시아인들의 야만적인 애국심 때문이라고 주장하는데, 내용인 즉 (나폴레옹이 페테르부르크에 보낸 편지에서 나오듯이) 당시 알렉산드르 1세로부터 직접 임명된 전시 모스크바 총독 로소토프친 백작의 작품으로, 프랑스 측에선 방화범 400명을 체포하여 자백(?)을 받아냈다는 것. 그러나 방화범을 몽땅 처형하고 나서도 다음날 또 큰 화재가 터져서 모스크바의 4분의 3을 태워먹고 한때 나폴레옹이 머문 크레믈린 근방까지 번져서 잠시 성 밖으로 몸을 피해야 할 정도.
러시아 측에서는 프랑스군의 약탈 때문에 벌어졌다고 주장하는데, 현재엔 의도적 방화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관대한 정복자 코스프레도 별로 통하지 않았다. 모스크바 인구는 점점 줄어들었고 도시 안에서 병력들은 위대한 군대에서 당나라 군대 폭도떼가 되어가고 있었다. 독일, 폴란드, 이탈리아 출신 할 것 없이 "여기까지 왔는데..." 하고 본전(?) 생각이 들어서 뿔뿔이 흩어져 고관대작들의 집을 서로 차지하려고 술을 퍼먹고 멱살잡고 싸웠으며 주민들을 학대하고 총질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유서깊은 교회들도 약탈당했기 때문에 점령군은 사제들에게 사탄 취급을 받았고 나폴레옹도 크레믈린 경호에 방해가 된다며 성 바실리 성당을 "저 모스크를 빨리 때려 부숴라" 라고 명령했기 때문.

나폴레옹이 예전처럼 극장에서 연극과 오페라를 상영할 것을 지시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배우들이 통째로 약탈(...)당했기 때문.. 나폴레옹 말도 안 들어먹는데 장교 말은 말할 것도 없고 약탈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지만 아무도 지키지 않았다. 장교들은 물론이고 헌병대까지 말 안 듣는 약탈병들에게 공공연히 살해당했다. 이는 근위대 병력에게까지 번져서 이들조차 근무서는 걸 거부하고 약탈에 나섰으며 크레믈린에서 나폴레옹 침실 앞 복도까지 약탈당했다.
이 때문에 훗날 자신의 실패에 대해서 정신승리 화법을 많이 구사한 나폴레옹조차도 모스크바에 너무 오래 머물면서 병사들을 타락시킨 걸 유일하게 후회했다.

나폴레옹은 모스크바를 점령하면 알렉산드르 1세가 강화를 맺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3번이나 항복을 권했지만 알렉산드르 1세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군부와 황태자 콘스탄틴 대공 황태후 마리아 페도로브나까지 강화를 권유했지만 알렉산드르는 전투지휘에선 엑스맨이었으나 정치 면에선 굳건했다. 오히려 쿠투조프 진영에 나폴레옹 사절이 간 것을 알고는 문전박대하지 않았다고 쿠투조프에게 직접 신하를 보내 질책까지 했다.
약탈은 끝을 보이지 않고 식량이 모자르게 되자 모스크바 밖에까지 병력이 흩어지면서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생활은 끝을 보고 있었다. 사실 나폴레옹이고 장수들이고 모두 알고 있었지만 체면 때문에 말을 못 하고 있었는데 나폴레옹이 모스크바 순찰중에 병사와 대화에서 병사가 "지금이라도 신속이 후퇴해야 할 겁니다. 황제 폐하" 라는 말을 듣고 이틀 후에 전군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는 일화도 있다.

결국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화딱지가 나서 크렘린 궁전이라도 까부수고 퇴각하려 밑에다가
폭약을 잔뜩 설치했지만 후퇴 당일에 비가 내려서 파괴를 면했고, 대신 탑 3개와 성벽 일부분만 부수고 모스크바에서 퇴각한다.

5. 위대한 군대의 위대한(?) 몰락

나폴레옹은 후퇴 날에 또 한번 깜짝 놀라게 되는데 위대한군대들의 어마어마한 짐 때문이었다. 모스크바의 모든 짐마차를 동원(?) 물론 나폴레옹 조차도 많이 챙기긴 했지만 일개 졸병까지 금붙이[15] 골동품 미술품들을 산더미처럼 들고 왔으니 행군대열이 아니라 소풍이나 이삿짐 대열이었다.. 이정도로 군기는 개판이 되었지만 나폴레옹은 "마차가 많으니 부상병들에게 도움이 될것" 이라며 애써 정신승리 했다.. 4주간의 모스크바 생활동안 병력은 저희끼리 죽이고 이탈하고 약탈하러 나가느라 9만으로 줄어 있었다.

10월 24일 마로야로슬라베트에서 일어난 러시아군과의 전투에서는 나폴레옹군이 간신히 승리를 거두었다. 사실 쿠투조프는 공격에 매우 소극적이었는데 주전파와 젊은 장교들의 등쌀에 함 해봐라는 식으로 공격했다. 의도친 않았지만 이 전투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군을 스몰렌스크 방면으로 퇴각하도록 유도하는데 성공했다. 스몰렌스크 방면은 이미 나폴레옹군이 모스크바로 오는 길에 양군의 격전으로 초토화 된 후라 보급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이에 대해 남쪽 칼루가와 툴라 방향으로 퇴각 하지 않은게 나폴레옹의 실책이라는 의견과 그럴수밖에 없었다는 의견이 갈린다.

쿠투조프는 추격에 두가지를 강조했는데 하나는 나폴레옹 군대 10명을 잡고자 러시아군 한명을 상하게 하지 않는것. 두번째는 나폴레옹을 러시아 국경에서 몰아내는것 두가지만 강조했다. 따라서 작대기에 헝겊 쑤셔놓은 걸레짝같은 군기나 고철더미 대포 몇개를 군공으로 삼고 싶어하는 젊고 공명심에 부푼 젊은 장교들은 노쇄하고 겁 많은 노인네라며 마구 깠는데 신중한 정도가 지나쳐서 쿠투조프가 나폴레옹을 전멸시킬 기회를 여러번 놓쳤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나폴레옹을 뒤쫓는 병력도 극심한 고생을 하며 손실이 극심했기 때문에 옳은 판단이라는 의견도 상당수...

어쨌든 바짝 추격하며 몰아내는건 지시하면서도 공격하는건 자제시키며 나폴레옹군도 신속하게 후퇴 했어야 하는데... 앞서 짐들이 너무 많아서 신속은 커녕 너무 느려 터지게 퇴각하느라 따라 잡히고 말았다. 이를 견제해야 할 프랑스군의 기병대는 앞서 기병병력이 극심하게 소모 된데다가[16] 극심한 식량난으로 말을 잡아 먹는 지경에 이르러 사실상 붕괴되어 버렸다. 게다가 말을 잡아먹는 바람에 다량의 대포와 수송차들이 버려졌다. 이는 나폴레옹군의 주 전력이라 할수 있는 포병대의 붕괴로 이어져 나폴레옹 몰락에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네 장군의 3군단 기병병력은 사실상 전멸했고 뮈라의 병력도 겨우 수천으로 감소했다.

극심한 식량난으로 행군 탈락 탈주병들이 급증했다. 그러나 탈주병들은 잡혀서 포로가되기라도 하면 다행이었지만 운이 나쁘면 잔뜩 뿔이 나있던 러시아 농민들에게 붙잡혀 죽기도 했다… 병력은 갈수록 줄어들어 11월 8일 스몰렌스크에 겨우 도착했을때는 생존자는 6만까지 줄어들었고 무장한 병력은 4만에 불과했다. 쿠투조프의 판단대로 공격하지 않아도 적은 알아서 무너지고 있었고 바싹 뒤쫓기만해도 말고기에 화약을 뿌려먹다가 알아서 병들거나 굶어 죽든가[17] 농가에 약탈하며 흩어지던가. 카자크에게 목과 약탈품을 조공으로 바치던가. 포로로 잡혀도 운명은 가혹했는데 러시아군이고 프랑스군이고 간에 서로를 먹여 살릴 능력은 없었다.포로를 안만드는(?) 경우도 상당했고 포로로 잡힌 병력들도 관대하게 봐야 절반정도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11월 6일, 나폴레옹은 본토에서 클로드 프랑수아 드 말레 장군이 "나폴레옹은 러시아에서 사실 뒈졌음" 이란 명분으로10월 23일에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보고받았다. 11월 28일, 드네프르강의 지류인 베레지나강을 건너기 위해 나폴레옹군이 배다리를 놓자, 쿠투조프는 이때가 결정타를 먹일 쿨타임이라 판단하고 배다리를 건너 나폴레옹군을 급습했다.(베레지나강 전투) 이 전투로 나폴레옹군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전투능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12월 5일, 나폴레옹은 조아생 뮈라에서 뒷일을 맡기고 본국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그러나 조아생 뮈라는 자신의 영지인 나폴리 왕국을 지키려는 목적에 외젠 드 보아르네에게 잔존부대를 남기고 탈주해버렸다(...) 12월 7일부터9일까지는 영하 39도의 강추위가 찾아왔다. 당연히들판에서 노숙하던 병력들은 상당수 얼어죽었다...보아르네는 간신히 남은 부대를 이끌고 12월 14일, 러시아 영내를 완전히 벗어났다.

러시아에서의 패배는 나폴레옹 몰락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에서 엄청난 전력 손실을 입었는데 모스크바 원정 병력은 본대병력은 거의 전멸했고, 말 20만 마리와 대포 천여문을 잃어 기병대와 포병대가 괴멸했다.나폴레옹이 병력 꼴아 박은 숫자는 물론 1808~ 15냔 싱; 이베리아에서 6년간 러시아 원정과 처럼 많은수인 25만을 잃긴 했지만 임팩트 있게 날려먹은 건 러시아 원정이 컷고 나폴레옹에게 당한 동맹국들은 기회로 여긴것.다만 60만 대군중에서 중에 앞서 국경을 건넌건 42~만이고 본대와 모스크바 병력은 35만 정도다.. 후퇴하면서 6만이남았느니 4만이 남았느니 하는데 빠른 후퇴 덕에 수습할 시간이 없어서였다. 완전히 전멸했다는 것은 모두 죽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속설대로 몇천만 살았남은건 아니고 아니다. 현재 추산하기론 러시아 국경을 넘어 도망친 병력은 9만~12만 정도로 추산한다.

여기엔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병력 4~5만여명이 포함이고 포로로 잡혔다 나중에 살아난 병력을 감안하면 몽땅 러시아에서 죽은건 아니다. 물론 본대중에 80%이상 집에 못 돌아간건 맞다만.
겨울철이 겹치고 날씨 기후가 혹독했기 때문에 특히 비전투 손실이 양군 모두 큰데 러시아군도 주력 1전선군이 12~3만에서 전역 후반엔 5만까지 감소했고 벨로루시에 짱박혀서 산책하다 돌아간 오스트리아 군마저 3만3천중에 2만만 본국으로 돌아갈 지경.. 러시아군 총손실은 모두 합쳐 21만정도로 추산.

6. 기타

안타깝게도 러시아 원정때 프랑스군 뿐만 아니라 러시아 귀족가에 있던 많은 프랑스인 가정교사[18]들도 외국인 포비아 때문에 같이 후퇴하다가 많이 죽었다. 프랑스인 뿐만 아니라 독일인 영국인등이 의사나 엔지니어로 러시아에 많이 와있었는데 1812년 6월부터 외국인상대로한 폭행과 약탈이 급증해서 러시아인이더라도 외국말을 쓰면 귀족이라도 거리에서 린치당하고 외국인들은 첩자취급했기 때문에 같이 퇴각한것..

러시아에서는 이후 이 전쟁을 1812년의 조국 전쟁(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1812 года)라고 부르게 된다. 줄여서 조국 전쟁. 참고로 대조국전쟁도 있다. 그건 2700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독소전쟁.

100년도 더 지난 후에 나치가 러시아에서 나폴레옹과 비슷한 꼴을 당한다. 과연 대륙의 기상. 실제로 나치러시아의 대결인 독소전쟁과 묘하게 비슷한 국제 구도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서유럽을 제패→영국 공격이 지지부진→러시아에 시비걸러 감→털림→망함(…). 또한 비슷하게 6월 24일(프랑스군), 6월 22일(독일군) 러시아 침략을 개시했으며, 스몰렌스크를 점령한 날도 8월 10일경으로 양쪽이 모두 같다.

그나마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 발이나 들여봤지 이 친구들은 몇년을 러시아 대평원에서 구르고도 모스크바에 발끝하나 못대봤다. 다만 이건 다른 땅은 무시하고 모스크바로 어택땅한 나폴레옹과 다 점령하면서 진격한 히틀러의 전략의 차이를 감안해야 한다. 오히려 러시아인들에게 충격과 공포는 나폴레옹보다 히틀러가 많이 줬을 것이다.[19]

7. 미디어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쟁과 평화》가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소련에서 영상물로도 만들었기 때문에 읽어보지도 않고 러시아의 입장에서 영웅적인 러시아 민중들의 힘으로 괴수 나폴레옹을 분쇄한 거겠지 하지만 작품의도는 러시아민중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는 있는데 농부들이낫질이나 쇠스랑으로 프랑스군 까부수고 그런 장면은 한컷도 안나온다... 읽어보지 도 않고 입으로 부르짓는 덕후들의 전형적인 고정관념으로. 전쟁과 평화에서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은 사실적이고 냉철하게 쓰였다. 오히려 프빠 나폴레옹빠들이 부르짓는 떡밥들을 분쇄하며 "나폴레옹은 전술적으로 잘못한게 없고, 매 상황 최선을 다했다. 애초에 질 싸움 이었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역사속에 위대한 인물이라도[20] 역사를 마음대로 좌우 할수 없다는 메시지지 러시아 민중이 몽둥이로 악마같은 프랑스군을 때려잡았다는 식의 저질 내용이 아니다.

이를 원작으로 1956년에 할리우드에서 만든 영화 《전쟁과 평화》는 당시로서는 대작이고 소련에서 조차 환영받으며 흥행했지만 스토리가 약한게 흠, 분량상 7년에 걸친 수천 페이지의 소설을 3시간정도에 담으려니 내용연결이 안돼고 생략부분이 너무 많다.. 무엇보다 50먹은 헨리 폰다가 소설상 20 극 초반 주인공역에 캐스팅된게 큰 흠... 나타샤 역의 오드리 햅번 캐스팅은 모두가 입을 모아 찬양

한편 1968년에 우리도 질수 없다며 소련에서 만든 《전쟁과 평화》는 그야말로 걸작. 원작 장면 하나 하나를 다 살렸고 수십만의 엑스트라가 동원된 전쟁 장면은 원작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의 스텝들을 활용한 서구-소련 합작 영화가 일종의 후속작 격인 워털루. 그러나 너무 길어서(총 405분, 약7시간!) 개봉은 고사하고 TV 미니시리즈로 봐야한다. 한국에서 방영할때도 미니시리즈로 방영해줬다. 문제는 미니시리즈로 하면 김이 새는 문제가 있다.. .역시 대륙의 기상..

혼블로워 시리즈의 결전! 발트해 부분도 러시아 원정을 그리고 있다. 약간 대체역사적인 상황인데 나폴레옹의 분견대가 발트해를 통해서 상트페테르스부르크를 기습하여 러시아 황제를 잡으려고 하고 그것을 혼블로워의 원정군이 막는 스토리.

차이콥스키의 작품 <1812년 서곡>은 바로 이전쟁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다. 프랑스 국가와 러시아 국가가 각각 포함되어 있다.

2012년에 러시아에서 조국전쟁 200주년 기념으로 보로디노 전투를 재현하는 대규모 리인액트 행사를 하였다.# 더해서 새로운 박물관도 개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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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오스트리아 원정전에 청혼한 차르의 넷째 여동생이 올덴부르크 공의 후계자에 시집간 개인적 감정(?)도 있었다.. 물론 국가대사에서는 참고 대상이지만 if 떡밥으론 호사가들의 먹잇감 아는데로 결국엔 프란츠 2세의 딸과 결혼한다. 나폴레옹의 청혼 부분은 파벨 1세후손 항목 참조
  • [2] 가장 심했을 때에 영국이 한 방에 600 척의 상선을 발트해 쪽으로 보내서 무역을 하곤했다.
  • [3] 대륙봉쇄령으로 영국의 실질임금이 3분의 1로 감소했고, 미국이 프랑스에 붙어서 대미 수출이 10분의 1로 감소한데다가 네드러드 같은 기계 파괴 노동자 폭동 때문에 영국에선 전시도 아닌데 런던에 5만명의 병력을 배치해야 되었다. 이는 워털루에서 웰링턴의 병력과 맞먹으며, 잘싸우던 이베리아 전선에서 웰링턴의 병력에서 4개연대 병력을 급히 차출해서 국내 에 배치해야 할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물론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해안 항구 도시들의 피해도 막심했다.
  • [4] 전쟁론의 저자로 프로이센 군인이며 러시아 원정에서 러시아군 바클라이 드 톨리의 진영에서 참모장을 지냈다. 1830년 유고집에서의 러시아 원정 기록으로 많이 쓰인다.
  • [5] 이중에 10군단 마크도날엔 프로이센군 2만명이 배속, 11군단은 오스트리아군 별동대 3만 3천명은 별도인데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의 장인어른에 명목상은 대등한 동맹국이지만 프로이센은 그런거 없기 때문... 60만대군의 이동로로 사용하며 물자를 대느라고 프로이센이 초토화 되었다고 한다.
  • [6] 기록에 따라 45~50만 병력설도 있다.
  • [7] 라인동맹과의 1806년 협정에 따라 13만의 병력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 라인동맹의 보호자 프랑스는 유사시 16만의 병력을 제공해 준다는데 어째 이것도 호구느낌이...
  • [8] 3전선군은 우크라이나에 초기전역에 투입하지 못했고 추격시 민스크 탈환시 합류한다.
  • [9] 러시아 원정 당시 군의관으로 활약한 도미니크 장 라레(1766~1842) 기록에 따르면 붕대대신 속옷을 감아주다가 나중엔 종이 나중엔 지푸라기로 감아주었다고 한다.
  • [10] 러시아군에서도 급속하고 무리한 후퇴속도 덕에 탈영과 탈주, 이탈자가 많이 발생하여 뭉쳐 다니며 농촌을 약탈하고 다녔다.
  • [11] 알렉산드르 1세의 2살 연하 동생. 황제가 자식이 없기에 황태자였다.
  • [12] 하지만 훗날 조건은 지켜지지 않았다. 콘스탄틴 대공도 파견했고 인사권과 실무 전술에 까지 간섭을 했으며 참모장 베니그센을 스파이 활용(?)하여 쿠투조프를 감시했다.. 쿠투조프는 콘스탄틴 대공한테는 동문서답 하고 베니그센은 황제께서 여기가 더 필요하시다는데요 하면서 한직으로 좌천시키는 능구렁이 같은 실력으로 차르의 간섭을 피해나갔다.. 애초에 차르는 쿠투조프를 음흉한 노인네라며 싫어했기 때문에 급한 상황에 몰려서야 쓴것이다.
  • [13] 양측 12만에서 16만사이
  • [14] 원정에 앞서 현지 조달을 위해 다량의 러시아 위조지폐를 찍어서 가져갔다.
  • [15] 러시아 원정시에 위조지폐를 엄청 뿌린덕에 은화값이 폭락해서 은붙이는 개도 안 줏어갔다고 한다.
  • [16] 보르디노 이후 뮈라에게 쿠투조프를 추격하라고 또 기병을 쓴 점도 컷다.
  • [17] 화약에 질산칼륨 성분 때문에 소금간대신 쳐서 먹는다고 한다. 물론 이정도 까지 가면 막장이다. 러시아 경기병대들이 "적에게 말고기를 먹이자"가 구호였을 정도
  • [18] 귀족은 물론 상공인들도 유럽 공용어가 프랑스어라 프랑스인 가정교사를 많이 써야 했다. 톨스토이의 소설보면 귀족들이 러시아 말에 서툴러서 뒤늦게 러시아어 과외를 받는 장면도 나올정도
  • [19] 사실 생각해볼것도 없이 당연한 건데, 나폴레옹은 짜르를 굴복시키는 정치적 목적으로 원정을 감행했고 히틀러는 인종 몰살이 목적이었는데. 러시아인들에게 누가 더 악마로 보였을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 두 원정은 사실 시작부터가 완전히 다른 목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단, 당시 러시아 귀족층들은 프랑스 문화를 상류 문화로 받아들여, 심지어 프랑스어는 알아도 러시아어를 모르는 귀족도 많았다. 이런 기류에 힘입어 나폴레옹은 러시아 내에서 큰 인기를 얻고있었는데, 그런 인물이 러시아를 공격한 것이다!
  • [20] 소설속에서 위대함 명석함은 반의적 부정적으로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