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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루이드

last modified: 2014-08-10 23:26:40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드루이드
2.1. 드루이드의 본질
2.2. 무엇을 섬겼는가?
3. 드루이드의 역사
4. 드루이드의 철학
4.1. 재생과 균형
4.2. 자연관
5. 축제와 의식
6. 인신공희
7. 교육
8. 바드, 오바테, 그리고 드루이드
8.1. 바드
8.2. 오바테

1. 개요

Druid.

고대 영국켈트 신앙의 사제를 가리키는 말.

영국의 켈트 신앙에만 존재하는 고유체계이나, 일부 게임에서 주술착신앙등의 관계성으로 인해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모습을 대입되어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전국구급으로 유명한 드루이드는 영국아더왕 전설에 나오는 멀린이다. 보통 마법사라고 알려져 있으나, 후대의 기술이고 멀린의 행보와 활동한 것으로 여겨지는 시대, 지역을 보면 드루이드가 맞다.

2. 드루이드

미국산 짝퉁과 영국산 정품 드루이드를 구분하는 가장 간단한 것은 루이디즘이다.

드루이드라는 직책의 사제를 중심으로 한 신앙의 형태가 유지되면 정통적인 드루이드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 짝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드루이디즘에 대한 사료는 남아 있지 않고 드루이드에 대해서 남은 자료는 전무하다.

오로지 구전의 형태로 의존한 드루이드 신앙은 사실상 소실 되었으며, 그나마 로마의 지배하에 잇던 시기 일부 자료가 문자로 기록되어 이름과 대략적인 구성이 남았고 당대의 문학작품에 마법사의 요소로 나온 흔적만이 남아있다.

만약 후대의 학자들이 고문서를 연구해, 드루이드들이 스톤헨지를 신성히 여겼다는 사실과 일부 지역에 남아 있던 성소를 지키고 종교적 의식을 대표로서 집행한 것을 밝혀내지 못했다면 이들의 존재는 전설이나 역사속의 직책명 정도로 분류되었을지도 모른다.

드루이드들의 철학아일랜드웨일즈, 스코틀랜드, 잉글랜드로 흩어져잇는 켈트족 사회를 하나로 묶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나, 드루이드들은 제각기 다른 신앙과 지침을 내세웠다. 같은 동네에 산다고해도 소속된 부족이 다르면 다른 신을 섬기는 등 자유분방했으나 기본적인 자연친화에 대한 부분만큼은 공통점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동물로 변신한다

2.1. 드루이드의 본질

드루이드는 제사와 의식의 집행을 담당하는 사제로 전해지지만 그들의 행동을 모아보자면 리학자이자 철학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드루이드들은 자연을 이해하고, 자연에 어울려 살며, 자연과 사는 법을 전파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러니까 해당 지역의 권위와 영향력을 가진 지식인이자, 운셀러같은 것이다. 랍비

그러다보니 각종 교양역사, 정치, 천문, 지리,약학,조제,음악등등 대부분의 학문에 능해야했고 이걸 또 후대에 잘 가르쳐야 했다. 드루이드들에 대한 로마의 기록에선 한 사람의 드루이드가 드루이드로서 필요한 과정을 이수하는데 약 20년이 걸린다고 기록해두고 있다. 필수과정 마치면 독립해서 또 현장업무로 한 10년 굴러야 한다

이와같이 드루이드는 당대의 최고층 지식인이었고, 한 사람의 드루이드로서 인정 받게 되면 족장은 물론이거니와 에 이르기까지 일단 한수 접어줘야 하는 막강한 권위를 가지게 되었고 왕의 문가로서 활동하며 왕족의 교육을 담당했다.

2.2. 무엇을 섬겼는가?

드루이드가 무엇을, 그리고 무엇을 숭배했는가에 대해서는 수많은 이견들이 있다.

드루이드의 입장에서 제대로된 기록이 남아잇지 않아, 일부 구전이나 로마의 기록을 토대로 추측하는것에 가까운데 일단 드루이드들이 무언가 제사와 의식을 담당한 것은 맞지만 어떤 신을 섬긴 것인가에 대해서는 확실히 나와있지 않다.

트신화가 워낙 족보가 개판인데다가 드루이드들의 일부가 대자모신에 해당되는 땅을 어머니로 섬긴다는 구전이 있고, 켈트신화의 여러신을 동시에 섬기는 다신론적인 면모도 보인데다가 자연친화적인 기록이 있어 자연 그자체를 섬기는 범신론자였다고 볼수도 있고 그냥 자기 동네에서 믿는거 하나만 믿는 유일신자였다는 추측도 존재한다. 이게 다 기록이 안남아서다

한편, 드루이드들이 스톤헨지를 성스럽게 여긴것은 기록으로 남아있는데 이는 드루이드들은 스톤헨지가 일종의 거대한 시계로 기능로 사용하였다는 기록을 남긴 로마의 역사가인 디오도루스 시쿨루스(Diodorus Siculus)의 스톤헨지가 19년에 한번 열리는 의식을 위한 알람시계기능을 한다는 내용 떄문이다.

즉, 드루이드들의 신앙인 드루이디즘은 어느신을 따른다기 보단 어떠한 형태로 숭배하는 것에 중점을 둔 것에 가까울수도 있다.

드루이드들의 행동은 불교에서 말하는 의 개념에 가까운것으로 균형영혼의 재생과 불멸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이것은 깨달음이라는 개념에 가까워 드루이드들이 구술로 후진을 육성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고 여겨진다.

3. 드루이드의 역사

드루이드가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관해서는 밝혀진 자료가 없다. 아마도 그 시작은 기원전 약 40세기 정도가 아니었을까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문자가 발명되어 역사가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존재해 왔다는 사실밖에 없다.

오늘날 드루이드라는 존재는 브리튼 군도를 중심으로 연구되고 있다. 특히 아이오나, 혹은 모나라고 불렸던 섬[1]은 드루이드의 성지로써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 자료들은 브리튼 군도가 단지 드루이드들의 최후의 보루였을 뿐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고대인들이 남긴 드루이드의 성소와 기념물은 거의 유럽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특히 브리타니 지방과 프랑스에는 드루이드들이 무척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에 의하면, 갈리아의 드루이드 교인들은 자신들의 종교가 브리튼 섬에서 왔다고 믿었으며, 아일랜드의 전승에 의하면 고대 아일랜드인들 역시 드루이드 교의 기원을 브리튼 섬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점에서 브리튼 군도는 드루이드 신앙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대의 켈트 사회에서 드루이드는 지식과 지혜 그 자체와도 같은 존재였다. 이들에게는 오늘날의 사제, 교사, 입법가, 정치 고문, 천문학자, 화학자, 음악가, 시인, 신학자, 철학자, 그리고 재판관의 역할이 모두 한꺼번에 요구되었고, 의학적, 약학적 지식 역시 필수 조건이었다. 그들의 기억력과 지식은 로마인들을 질리게 할 정도였으며, 그들의 지위는 왕들조차 그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사실 그들은 부족장이나 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일반 백성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였다. 일반인들[2]은 그들을 숭배하고 따랐으며, 로마 인들의 점령기에 저항 세력을 지휘했던 중심 세력도 드루이드들이었다. 때문에 카이사르가 이들이 자신의 권위에 위협이 된다고 보고, 이들을 말살시키려 했던 것은 매우 당연한 반응이었다. 카이사르의 계획은 거의 성공했다. 모나의 드루이드들은 완전히 전멸당했으며, 그 때부터 드루이디즘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로마의 침략 이후 크리스트 교가 유입되기 시작했을 때, 드루이드들은 아직 로마가 가한 타격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했다. 자연히 새로운 종교의 전파는 매우 빨랐다. 그 이면에는 켈트의 종교를 무조건 배척하지 않고 상당 부분 받아들인 교회 세력의 노력도 있었다. 켈트족의 신들은 크리스트 교의 성인들이 되었으며, 드루이드의 신성한 샘은 성자들의 전설이 덧붙여진 채 보존되어 세례에 쓰였다. 드루이드의 성지는 크리스트 교의 성지가 되어 성당이 세워졌다.

그러나 그 후, 이러한 종교의 융합을 거부하는 수도사 세력이 나타났다. 이들은 종래의 켈틱 기독교 시대의 잔재들을 청산하려는 목적으로 그 내부의 이교적 요소들을 멸절하기 시작했으며, 드루이드들과 그 신도들을 박해했다. 결국 7세기경, 드루이디즘은 브리튼 군도에서 자취를 감추었으며, 간신히 살아남은 세력은 철저히 모습을 숨기고 비밀 결사가 되었다.

17세기 경, 드루이디즘은 다시 런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히무스 산의 숲이라 불리는 조직이었다. 그리고 1858년, 캘리포니아에서도 플레이스빌이라 불리는 미국 최초의 드루이드 조직이 탄생했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지에서도 드루이디즘이 살아남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는 증거도 밝혀진 바 있다.

4. 드루이드의 철학

앞서 언급했듯이, 드루이드가 섬기는 신은 지역과 부족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자연히 요구되는 종교 의식 역시 신들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갖는 종교의 개념에 비추어 볼 때, 이들의 종교를 통틀어 "드루이디즘"이라는 하나의 번주 안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당혹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드루이드는 종교인으로서보다는 오히려 철학자로서의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 역시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영혼불멸설에 입각한 "재생" 혹은 "윤회"의 사상과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균형"의 개념은 공통적으로 이들의 철학의 근간이 되었으며, 이 철학에 기반한 자연친화적 태도 역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다양한 신들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교리는 하나였으며, 드루이드들 스스로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4.1. 재생과 균형

드루이드의 지혜는 트라이어드[3]의 형태로 흔히 표현되었다. 신은 세 가지 일에서 발현되는데, 바로 삶과 학문과 힘이다. 세상에는 끊임없이 증가하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불과 지혜와 생명이다. 음악이 주는 세 가지 선물은 잠과 웃음과 눈물이다. 추구해야 할 미덕은 세 가지인데, 그것은 용기와 신의 혹은 우정, 우애와 이타심이다. 결코 범해서는 안 될 악덕도 세 가지인데, 그 하나는 오만이오, 그보다 더 나쁜 것이 배신이요, 가장 나쁜 것이 이기심이다...

인생 역시 세 가지 단계로 인식되었다. 최초에 인간은 심연의 세계에 있다가, 우리가 사는 물질 세계로 태어난다. 그리고 죽어서 천국에서 다시 태어난다. 이러한 세 단계를 거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완전한 존재를 누릴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세 가지로 정리된 지혜들은 하나의 명제로 환원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삶이란 일시적인 것이며, 다른 세계들을 오가는 잠시 동안의 유예일 뿐이라는 것이다. 육체가 죽더라도 영혼은 불멸하며 다른 세계로 오간다는 믿음, 곧 영혼불멸과 재생의 사상은 드루이드의 철학을 구성하는 근간이었다.

사람은 자궁에서 태어나 죽으면, 마침내 영혼의 안식을 얻게 될 낙원으로 가게 될 때까지 다시 태어나고 죽으며 윤회를 반복한다. 따라서 고대의 켈트 인들은 죽음과 탄생을 모두 애도했다. 이 세계에서의 탄생은 곧 다른 세계에서의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한 영혼이 이 세계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을 모두 경험하고 배울 수 있는 것을 모두 배웠을 때, 마침내 그 영혼은 영원한 안식의 땅으로 간다고 그들은 믿었다. 따라서 다른 몸으로 다시 태어날 때마다, 그 영혼은 더 성숙해진다.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을 모두 경험한다는 것은 학대자로서, 그리고 학대받는 자로서, 살인자로서, 그리고 살해당하는 자로서, 건강한 사람과 병약한 사람으로서, 부자와 빈자로서 모두 살아 본다는 것을 뜻했다.

학대자와 학대받는 자, 살인자와 살해당하는 자, 건강한 사람과 병약한 사람, 부자와 빈자 등은 모두 균형을 이루기 위해 함께 세상에 존재해야 한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인생의 모든 면에는 균형을 맞추기 위한 반대되는 면이 있다. 남자와 여자 없이는 동물도 식물도 번식할 수 없으며, 좋고 나쁨의 양극단 없이는 어떤 물질도 없을 것이요, 빛이 없다면 암흑만이, 암흑 없이는 빛만이 있을 것이다. 악이 없다면 선 또한 없고, 선이 없다면 악 또한 없다.

이러한 철학에 입각해 있었으므로, 드루이드들은 선입관을 갖지 않고 삶의 모든 면모를 대할 수 있었다. 그들의 철학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거나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섣불리 판단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드루이디즘에서 모든 사람들, 더 나아가서는 세상의 모든 만물들은 각기 나름대로의 살아갈 이유와 권리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우리가 사회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까지 포함했다.

4.2. 자연관

드루이드들은 자연을 존경하고 사랑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자연은 삶을 주는 자였으며 이를 유지하는 자이기도 했다. 그들이 말하는 자연이란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 즉 우주와 그 현상, 힘과 에너지, 성질, 본능, 직관 등 수많은 것들을 가리켰다.

예를 들어, 태양의 빛과 열 없이는 동물도 식물도 살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태양은 동식물을 자라나게 하고 계곡에 물을 흐르게 하며 시와 음악을 지을 영감을 주는 동시에, 기근을 초래하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태양의 모든 면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자체로서 사랑하고 존경해야 한다는 것이 드루이드의 가르침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드루이드들은 자연의 지혜를 얻는 데 있어서 초자연적인 계시에 의존하지 않았다. 이들의 자연 철학은 철저한 자연주의에 입각해 있었다. 자연의 세계는 끈기 있게 탐구하는 자에게만 정당한 대가를 얻게 한다. 따라서 모든 지식은 곡식의 낱알을 줍듯 조금씩 조금씩 얻어 축적함으로써 완성되어야만 했다.

신성화하지 않아도, 어머니 대지는 충분히 고귀하며 존중맏아 마땅했다. 지역과 부족에 관계 없이, 거의 모든 드루이드들이 어머니 대지를 숭배했다. 그러나 개개의 자연물을 숭배하는 드루이드는 드물었다. 드루이드가 보통 나무를 숭배한다는 것은 무지에서 비롯된 현대인의 오해에 불과하다. 드루이드가 나무를 신성하게 여기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태계를 유지하고 신과 인간을 이어 주는 존재로서 존중한 것이었다. 드루이드라는 명칭의 근원이 된 참나무(drui) 역시 신앙의 대상이 아닌, 이들의 신앙과 의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나무였을 뿐이다.

말을 하고 생각을 할 능력이 있는 인간은 종종 다른 동식물들보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드루이드들은 인간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가 아니며, 단지 세계를 구성하는 일부분에 비롯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들은 대지와 자연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인간은 자연을 구성하는 다른 존재들과 평등하게 다루어져야 하며, 결코 어떤 것보다 상위(上位)를 차지해서는 안 되었다. 자연 속의 우리는 자궁 속에서 보호받는 태아와 같으며, 따라서 어머니를 해하는 행동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들의 철학은 현대인이 가이아 이론 이라 부르는 가설, 즉 지구라는 행성은 스스로 살아 있는 하나의 생물이며, 그 생물의 아이들인 우리 인간은 그녀를 사랑하고 존경해야만 한다는 이론과도 같았다. 생태학적인 지식은 드루이드의 기본 조건이었으며, 스스로 이를 실생활에 적용시키고 남들도 그렇게 하도록 교화하는 것은 이들의 신성한 사명이었다.

5. 축제와 의식

약 12주의 간격으로 한 해에 네 번 돌아오는 불의 축제와, 그 사이에 위치한 춘분, 추분, 하지, 동지는 모두 드루이드가 주관해야 할 종교적 기념일이었다. 따라서 드루이드들은 약 6주에 한 번씩 대대적인 종교 의식을 집행했던 것이다.

불의 축제는 첫째 날의 일몰부터 시작되어 3일동안 행해졌는데, 이 때 드루이드는 제물을 바치고 미래를 계시받았다.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사윈과 겨울의 끝을 알리는 임볼크, 봄과 재생의 때인 벨타네, 그리고 추수제인 루나사가 불의 축제일에 속했다.

이러한 축일에는 언덕 꼭대기에 거대한 모닥불이 피워져, 축제가 끝날 때까지 꺼지지 않았다. 낮에는 떠들썩한 잔치가 벌어졌고, 밤이면 경건한 종교 의식이 치루어졌다. 드루이드는 잔치와 의식을 함께 관장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일랜드의 모든 불을 껐다가 드루이드가 피운 신성한 모닥불에서 얻어간 불씨로 새로이 켜는 사윈의 의식이다.

불의 축제들에 비해 천문학적 기념일들, 즉 춘분과 추분, 그리고 하지와 동지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카이사르 등 로마의 저술가들이 이들에 대한 자료를 거의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이러한 날들이 불의 축제들보다 덜 중요했다고 단정짓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켈트 족이 분포했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스톤헨지, 둥근 고분, 선돌 등, 천문학에 쓰였으리라 추정되는 수많은 유적들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정황을 종합해 볼 때, 불의 축제들이 드루이드와 대중이 함께 즐겼던 축일이라면, 춘분, 추분, 하지, 그리고 동지는 일반인들보다는 드루이드 계층에게 훨씬 더 의미있는 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러한 날들은 공식적인 축제의 날이 아닌, 조용한 연구와 비밀스런 의식의 날이었던 것이다.

6. 인신공희

드루이드는 인간 제물을 바쳤는가? 이것을 부정하려는 많은 켈트 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적 자료들에 비추어 볼 때 일부 지역에서 인신공희가 행해졌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듯 보인다. 위커맨의 의식도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에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숭배 대상과 숭배 방법의 다양성에 대한 문제가 다시 한 번 제기된다. 어떤 지역의 드루이드들이 인간 제물을 바쳤다는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이는 반면, 다른 지역의 드루이드들은 인신공희를 암시하는 힌트조차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 거의 모든 지역의 드루이드들에게 보편화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많은 경우 인간을 제물로 바쳤다는 의심을 살 만한 자료는 발견된 바 없다. 타르브-훼이스(황소의 축제)라는 단어가 암시하듯 아일랜드의 주된 제물은 황소였으며, 적지 않은 지역에서는 약초와 향 만을 바치기도 했다.

7. 교육

드루이드가 되기 위한 교육은 대체로 어린 나이부터 시작되었다. 가장 흔한 나이는 약 5~6세 경이었지만 특별히 정해진 나이는 없었고, 드루이드로서의 재능이 있다고 밝혀지면 좀 늦거나 일러도 그 때 당장 교육을 시작하곤 했다. 교육 과정은 보통 15-20년 걸렸지만 개인차가 심했다. 그것은 몸도 마음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힘든 과정이었다. 드루이드의 힘과 지혜의 원천인 '자연'의 본질이 생존이었기 때문이다.

드루이드가 되고자 하는 학생은 단 한 명의 선생으로부터 교육받지 않았다. 주로 드루이드 사회 전체가 지식을 나누어 가졌다. 배우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된 학생들조차 자신의 후배들을 가르치곤 했다. 가르침의 기술 역시 드루이드가 반드시 갖추어야만 할 능력이었으며, 그것은 실습에 의해 가장 잘 습득되었기 때문이다.

드루이드에게는 특별히 요구되는 지식의 영역이 없었다. 그들의 교육 과정은 시인이자 역사가인 바드의 교육 과정과 사제이자 예언가, 의사, 약사인 오바테의 교육 과정을 모두 포함했을 뿐 아니라, 잡다하다고 생각될 정도의 온갖 분야의 지식과 지혜를 가르치고 실천하게 하는 과정이었다. 드루이드들에게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즉 우주 전체를 이해하고, 부족이 조언을 구하는 문제라면 그것이 어떤 분야의 문제가 되었건 올바른 해답을 줄 것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드루이드가 되고자 하는 학생은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지식이라도 외면하지 말아야 했고, 온갖 분야에 걸친 다양한 지식들을 모아들여야 했다. 한마디로, 드루이드가 되기 위해서는 "걸어 다니는 사전"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드루이드에게는 전통으로부터,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온갖 지식과 지혜를 얻는 동시에, 그것을 실천하고 타인에게 전파할 2중의 의무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드루이드가 되기 위한 교육 과정의 가장 큰 특징은 완성의 단계가 없다는 데에 있었다. 비록 약 20년의 교육을 거치면 드루이드라는 칭호를 부여받기는 했지만, 그것이 교육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드루이드는 결코 배움을 멈추어서는 안 될 존재였기 때문이다.

8. 바드, 오바테, 그리고 드루이드

기원전 1세기에 스트라보는 "갈리아인 중에는 특히 존경받는 세 부류가 있었는데, 그들은 바드Bard, 바테Vate, 그리고 드루이드이다. 바드는 시인이자 가수였고, 바테는 점술사이자 과학자였으며, 드루이드는 과학자이면서 윤리학자이기도 했다"라고 기록했다.

바드, 오바테 혹은 바테, 그리고 드루이드의 관계는 현대인을 가장 혼란스럽게 하는 요소 중의 하나이다. 종종 이 세 가지는 전혀 다른 직업군인 것처럼 이야기되지만, 어떤 때에는 마치 바드와 오바테가 드루이드의 하위 개념에 속하는 것처럼 설명되기도 하며, 다른 때에는 바드와 오바테가 드루이드가 되기 위해 거쳐 가야 할 중간 과정처럼 묘사되기도 한다. 과연 바드, 오바테, 그리고 드루이드는 독립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는가? 아니면 드루이드라는 넓은 개념 안에 바드와 오바테가 포함되었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바드와 오바테는 드루이드가 되기 위해 거쳐가야 할 하나의 과정에 불과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세 가지 모두 "그렇다"이다.

바드, 오바테, 그리고 드루이드는 기본적으로는 모두 독립된 직종이다. 스트라보가 기록했듯, 바드는 흔히 말하는 음유시인이었고(비록 그 사회적 지위가 현대인이 상상하는 것보다는 훨씬 높았다 하더라도), 바테는 자연과 신들을 연구하고 미래를 점치는 종교인이었다. 그리고 드루이드는 앞서 이야기했듯, 기본적으로 철학자였다.

혼란은 드루이드가 이론적인 철학자일 뿐 아니라 실천적인 철학자이기도 했다는 데서 온다. 그들의 역할이 책상에 국한되지 않았으며 종교, 정치, 사회, 문화, 교육 등 해당 사회 전반에 걸쳐 요구되었음은 앞에서도 설명한 바 있다. 철학을 실천하고 그 실천을 전파하는 자로서, 그들은 이들에게는 오늘날의 사제, 교사, 입법가, 정치 고문, 천문학자, 화학자, 음악가, 시인, 의사, 재판관 등등의 역할이 모두 한꺼번에 요구되었다. 간단히 말해, 드루이드의 역할 속에는 바로 바드, 즉 시인의 역할과 오바테, 즉 사제의 역할이 함께 녹아들어 있었던 것이다.

자연히, 드루이드의 교육 과정 역시 바드가 되기 위한 교육 과정과 오바테가 되기 위한 교육 과정을 모두 포함하고 있어야 했다. 이 중 바드의 교육 과정이 선행되는 것이 일반적인 사례이기는 했으나, 웨일즈를 포함한 일부 지역에서는 오바테의 교육 과정을 먼저 수료하게 하는 등, 지역과 부족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두 과정이 모두 포함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어느 지역, 어느 부족이라도 차이가 없었다.

바드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 오바테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 그 위에 드루이드에게만 요구되는 교육을 또 받아야만, 한 사람은 드루이드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교육 과정에는 최소한 20년이 소요되었다고 카이사르는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드루이드를 항상 노인으로 표현하는 오늘날의 고정 관념은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어쨌든 이러한 드루이드의 교육 과정이 바드와 오바테를 드루이드가 되기 위한 과정처럼 보이게 했다. 그러나 드루이드가 되기 위해서는 바드인 동시에 오바테이기도 하고, 또한 그 이상이 되어야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드와 오바테가 독립된 직업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스트라보가 기록했듯, 드루이드 못지 않은 존경을 받는 엄연히 다른 직업군이었다.

마지막으로, 바드와 오바테는 드루이드라는 범주 속에 포함되는 하위 개념이 될 수도 있었다. 이것은 드루이드라는 단어를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나누어 생각할 때에만 이해가 가능하다. 좁은 의미의 드루이드란 앞서 설명한 대로, 바드와 오바테와는 구별되는 '철학자'로서의 드루이드이다. 그러나 이들 철학자를 중심으로 한 해당 계층 전체, 즉 혈통이 아닌 재능과 노력에 의해 사회 전반의 존경을 받게 된 재인 계급 전체를 드루이드라 부를 수도 있다. 이 때의 드루이드는 바드와 오바테, 그리고 좁은 의미의 드루이드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바드와 오바테, 그리고 드루이드는 비록 전문 분야가 다르기는 했지만, 모두 같은 철학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주된 일 역시 공통되는 부분이 많았다. 이것은 현대인의 혼란을 야기하는 또다른 이유일 것이다. 비록 드루이드만이 본격적인 철학자였고, 바드는 시인과 역사가의 직책에, 오바테는 사제와 의사의 직책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들 모두는 재생과 균형의 철학을 공유하며 이를 실천하고 전파한다는 면에서 분명 '드루이드'라 부를 수 있었다.

마비노기 재능의 3명의 영웅의 모티브로 추정된다.

8.1. 바드

바드는 부족의 전통을 보존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이 세상의 신성함을 수호하고 알리는 사람들이었다. 드루이드가 되기 위한 교육의 첫 단계가 바드이기는 했지만, 우리는 바드가 드루이드의 도제일 뿐이라거나 드루이드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드 안에도 여러 등급이 있었고, 드루이드가 되기 위한 과정은 그 중 아주 낮은 단계에 속했다. 최고의 경지에 이른 바드는 오바테나 드루이드와 마찬가지로 존경받았으며, 그들 못지 않은 사회적 영향력을 가졌다.

바드가 되기 위한 교육 과정은 무척 길고 힘든 것이었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그리고 웨일즈의 바드들은 모두 다른 방식으로 교육받았으나, 그것이 오랜 시간과 엄청난 노력을 요한다는 면에서는 다름이 없었다.

아일랜드 바드의 교육 과정을 예로 들자면, 갓 입문한 학생은 1년안 올리레Ol, 타반, 그리고 드리사크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 기간동안 그들은 바드의 기초 과정을 배웠는데, 올리레는 바드의 원칙을, 타반은 시학을, 드리사크는 풍자를 교육받았다. 또한 문법과 오검 문자를 완벽히 터득하고 스무 개의 이야기를 암기하는 것 역시 요구되었다.

이 과정을 무사히 졸업한 학생은 청동 가지를 수여받았다. 그리고 다음 네 해 동안, 그는 한 해에 각각 열 가지의 이야기, 백 가지의 오검 문자 조합, 열 두 가지의 철학적 교훈, 그리고 셀 수 없는 시들을 암기해야 했다. 또한 이 동안 그들은 2중 모음의 조합법과 특권층에 관한 법률, 그리고 문법의 사용법 등도 완벽히 터득해야 했다.

여기까지 요구되는 교육을 모두 마치면 그는 비로소 클리, 즉 '기둥'이라는 호칭을 부여받았다. 클리가 된 학생은 한 해동안 48 가지의 시와 20여 가지의 이야기를 암기해야 했다.

클리의 과정을 졸업한 학생에게는 은 가지가 수여되었다. 그는 안루흐, 즉 '고귀한 흐름'이라 불렸는데, 그것은 그로부터 아름다운 말들이 흘러나오고, 부가 그에게 흘러들기 때문이었다. 안루흐의 교육 과정은 모두 3년이었는데, 이 동안 그는 95 가지의 설화와 175 가지 이야기의 레퍼토리를 모두 익혀야 했다. 운율과 시어, 문체, 구성 등 시작에 필요한 모든 것과 여러 가지 시의 형식을 배우는 것도 이 시기였다. 그 외에도 신에게 기원하여 예언을 하는 법과, 아일랜드 전역의 지명에 얽힌 이야기들을 완전히 터득하는 것 역시 요구되었다.

안루흐의 과정을 마치면 에케스, 즉 학자와 필리, 즉 시인의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에케스는 모든 시형과 구성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했고, 필리는 100 가지의 시와 120 가지의 논설을 암기하는 동시에 네 가지 시학을 터득해야 했다. 그러면 350 가지 이야기를 모두 터득한 그 학생은 마침내 올라브, 즉 시의 대가가 되어 황금 가지를 수여받을 수 있었다.

청동, 은, 그리고 황금으로 만들어진 각각의 가지들에는 모두 종이 달려 있었다. 그래서 시인들이 강당으로 걸어들어가 시를 낭송(朗誦)을 할 때면, 항상 지팡이에 달린 종이 울리곤 했다. 이 종소리는 청중들에게 조용히 할 것을 고하고, 시나 이야기에 혼을 불어넣을 힘을 시인의 내면 세계로부터 소환하는 소리였다.

바드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역사와 영감이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 주었으며, 영감은 인간과 자연을 연결해 주었다. 그것이 드루이드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바드의 교육 과정을 밟아야만 하는 이유였다. 바드의 웅변술역시 드루이드에게 필요하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 필요했던 것은 역사를 통한 자기 부족의 이해와 영감을 통한 자연의 이해였던 것이다.

세대를 관통하는 힘과 자연에서 샘솟는 힘을 이해하고 다루는 것은 바드의 조건인 동시에 드루이드의 조건이기도 했다.

8.2. 오바테

오바테는 죽음과 부활의 비밀을 이해하며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들은 미래를 예견했고, 조상들과 이야기했으며, 저승으로 여행하여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충고를 하곤 했다. 바드가 '말의 힘으로 문을 여는' 자였다면, 오바테는 '시간의 문을 여는' 자였다.

예언과 예견의 대가인 오바테는 시간을 뛰어넘어 여행할 수 있었다. 이것은 고대의 켈트 족이 믿었던 시간의 순환론에 기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데, 불교도나 힌두교도와 마찬가지로 드루이디즘의 신자들은 영혼이 불멸하며 다른 모습으로 환생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고대 켈트 인들에게 조상들의 땅은 단지 사자의 땅이 아니었다. 환생을 기다리는 조상들이 거하는 그곳은 시간을 초월한 공간이었으며, 따라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지혜가 한데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그곳으로 여행한 오바테는 과거와 현재에 대한 조언 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계시까지 얻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오바테는 다른 누구보다도 저승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으므로, 사자의 축제인 사윈 의식에서 그들의 역할은 가장 중요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올라브의 역할이 음울한 것은 아니었다. 켈트 인에게 죽음과 재생이 하나였던 것만큼, 오바테는 죽음의 사제인 동시에 곧 삶의 사제이기도 했다. 오바테가 의사이자 약사이기도 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나무의 지혜는 오바테의 지혜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죽음과 재생, 희생과 변화, 그리고 시간의 비밀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나무처럼 좋은 스승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무들의 뿌리는 알 수 없는 과거와 무의식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고, 씨앗을 숨기고 있는 열매와 잎새는 미래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다. 따라서 오바테가 약초학에 정통한 약사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바테는 몸이나 마음이 자연의 조화에서 벗어나 있을 때 인간이 병에 시달린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약초와 천체의 순환에 힘이어 몸의 병을 고쳤으며, 죽음과 재생에 대한 지혜로써 마음의 병을 고쳤다. 인간은 죽음을 직시해야 하며, 죽음으로써만 인간은 또다른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그러므로 집착에서 벗어나야만 인간은 추구하는 것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가르치는 것은 오바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었다.

- 출처: 티르 나 노그

로마가 갈리아를 정복한 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동화 정책에 의해 모든 특권계급은 그대로 남겨두었지만,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경멸하는 로마인들은 그들을 그다지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점점 로마화되어가는 갈리아에서는 이후 제정 시대에 드루이드 계급은 퇴출되게 되며 그 때문에 브리타니아, 즉 영국으로 도망가게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위대한 마법사요 아더 왕의 인도자인 멀린이 신통력으로 돌을 옮겨 스톤헨지를 쌓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단지 전설로, 고고학적 발굴 결과 켈트족이 영국 땅에 들어오기 훨씬 이전인 기원전 3천 년쯤에 스톤헨지가 만들어졌으며 세 번 증축되었음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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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오늘날에는 앙글시라고 불리는
  • [2] 평민들은 물론, 귀족과 왕족까지 포함한
  • [3] 삼제가라고도 불림. 세 개의 제목을 가진 시의 일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