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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last modified: 2018-12-24 21:38:22 Contributors

東夷
중국의 오랑캐 지칭
북적
서융 중국 동이
남만

Contents

1. 개요
2. 동이의 어원
3. 역사상의 동이
3.1. 선진시대
3.2. 과도기
3.3. 동이교위 설치기
4. 사서상의 서술
4.1. 예기
4.2. 한서
4.3. 삼국지
4.4. 제갈량집
4.5. 후한서
4.6. 수서 · 북사
5. 종류와 범주
5.1. 구이
5.2. 동이

1. 개요

중화사상을 기반으로 중국에서 한민족을 불렀던 이름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 단어. 실제로는 중원을 기준으로 동방에 있는 세력은 어지간하면 다 동이라고 불렀고, 특히 선진시대에는 산동성안휘성 일대에 있던 자생 소국들이 여기에 해당했다. 즉 그냥 그 방면에 살고 있던 집단 전체를 묶어서 부르는 것이지, 어느 특정한 정체성 집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춘추전국시대에는 산둥 반도에 있던 제나라까지도 동이라고 비하하기도 했다. 제나라가 엄연히 강태공의 후예이자 춘추오패의 일원이고,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번영을 구가했던 사실을 생각해보면 그저 흠좀무.

이는 결국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파악하는 상대적인 의미이기에, '나'의 자리에 누가 들어가는지에 따라 얼마든지 그 정의가 달라질 수 있었다. 중원고구려비를 보면 고구려가 한참 잘 나가던 시절에 신라를 동이라고 부른 것이 보이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일본을 동이로 칭하는 기록이 나온 바 있으며, 일본에서도 간사이간토를 멸시하여 부르는 말로 쓰였으며, 간토에서도 아이누족을 에조(蝦夷)라고 비칭하였다. 애시당초 막부 정권의 쇼군도 이들을 토벌하는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에서 비롯된 말이다. 뭐, 한국이나 중국에서 보면 똑같은 왜인이지만...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렇게 동쪽에 있는 외국이면 싸잡아서 동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특정한 정체성을 띠는 동이족(族)이라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 싸잡아서 동이라고 지칭되었어도 그 안에서 혈통 및 종족 의식이 확연히 구분되었기 때문인데, 대표적으로 정사 삼국지를 위시한 중국 사서의 동이열전 내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숙신, 동예, 삼한, 가 중국과 자기들이 구분하는 대로 구분되어 있으며 풍속이나 사회 구조도 모두 확연히 다르다. 특히 이 중에서도 읍루, 숙신, 물길, 말갈, 발해가 모두 하나의 계통이라고 서술하면서 물길까지는 동이로 분류하고 말갈부터는 북적으로 분류했으니 그 기준도 지들 맘대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동이가 한민족을 부르는 말이라는 것 서양인이라면 다 앵글로색슨이라고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말갈족 등 만주에 살던 이들이 분명 한족과 다른 민족이기는 하나, 한민족과의 연관성 또한 제한적인 수준으로 추정된다. 관련 글의 본문과 이글루스 주인과 다른 사람들의 겁나게 긴 덧글 참고. 단지 수많은 동이의 구성원들 가운데 현재까지 살아남은 것이 한국과 일본일 뿐이다. 더군단ㄱㆍ 후한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예맥은 엄연히 북적으로 분류되었다.

2. 동이의 어원

흔히 설문해자에서 夷를 大弓이라고 파자한 것을 가지고 동이는 활 잘 쏘는 민족을 가리키는 데서 비롯된 말이고, 따라서 곧 한민족이라는 주장도 있다. 문헌 고증 정도가 한계이던 시절의 정약용도 이런 해석상의 오류를 답습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각종 민족주의 계열의 책들, 심지어 한국사학계를 주도하는 인물 중 하나인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의 '다시 찾는 우리역사' 같은 책에도 이것이 자세하게 소개된다. 교과서에서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夷)라는 것은 큰 활(大弓)이다. 이의 습속은 큰 활을 사용하여 남들을 상처입히니, 고로 육서가에서 그 글자를 가차(假借)하여 상해를 입힌다는 뜻으로 삼은 것이다.
─ 정약용, 『여유당전서』 제2집 경집 제40권 주역 4전 제21괘

그러나 최근 갑골문과 금석문의 연구 성과가 축적되면서 夷는 사실 大와 弓이 합쳐진 것이 아니라, 人과 尸가 합쳐진 글자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에는 두 글자 모두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니, 이것의 본래 의미는 결국 그냥 사람. 레알 위 아 더 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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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만들어진 글자가 이민족이라는 뜻으로 정착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고대 중국의 상나라는 지금의 산동성과 안휘성 일대에 있던 이민족 집단을 인방(人方·大方·尸方)이라고 일컬었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이라는 의미와 이민족이라는 의미가 분리되면서 후자를 특정하기 위해 두 글자를 겹친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당초의 夷는 산동성과 안휘성 일대의 이민족을 가리키던 말이었지만, 주나라 시대만 되어도 제유법적으로 이민족 일반을 가리키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이는 근대에 활쏘기와는 무관하게 서양인들을 양이(洋夷)라고 부른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예로 오랑캐가 있는데, 이쪽은 여진족의 일파를 부르던 고유명사가 확장되어 이민족을 뜻하는 보편명사로 자리잡았다.

사실 생물학적인 유사성이나 여타 관계성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하나의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민족이라는 개념은 근대를 거치며 만들어진 것이고, 같은 조상을 공유하는데도 고구려백제, 프랑스독일처럼 으르렁대며 싸웠던 역사의 사례가 많다.

3. 역사상의 동이

3.1. 선진시대

은나라의 탕왕이 혁명을 일으키고 나서 이들을 정벌하여 평정하였는데, 중정(仲丁) 대에 이르러 남이(藍夷)가 침구하였다. 이로부터 혹은 복종하고 혹은 배반하길 삼백여 년이었는데, 무을(武乙) 대에 국세가 기울자 동이가 점차 강성해져 마침내 회하와 태산으로 나누어 옮겨오니 중토(中土)에 점차 살게 되었다.
─ 『후한서』 동이열전

이미 위에서 언급한 대로 동이는 본래 인방(人方)이라 불리던 산동성과 안휘성 일대의 자생 소국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들은 문헌상으로 하나라 시대에 해당하는 기원전 20~15세기부터 중원의 얼리터우 문화(二里頭文化)와 구분되는 웨스 문화(岳石文化)를 독자적으로 영위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두 지방은 지속적으로 충돌과 갈등을 겪게 되었는데 죽서기년에는 하나라 시절부터 이미 중국이 회이(淮夷), 견이(畎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풍이(風夷), 양이(陽夷) 등 수많은 동이 족속들과 접촉하면서 정벌과 교섭을 반복했음이 전해진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신화 상에도 반영되어 한족을 대표하는 황제와 그에 맞서는 염제, 형천, 치우 등의 투쟁에 모티브가 되었다고 이해되기도 한다.

이후 보다 엄밀한 의미의 국가라고 할 수 있는 상나라가 들어서면서 동이와 화하 사이의 갈등은 한층 격화되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갑골문을 보면 인방(人方·尸方)에 대한 정벌 기사가 무려 65번이나 나오는데, 실질적으로 갑골문이 출토된 시기가 은허에 도읍한 상나라 후기의 300년 정도라는 것을 생각하면 빈도상으로도 결코 무시하지 못할 수준. 특히 그 중에서도 산동반도 남부에 있던 차(虘)가 주요 공격 대상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싸우기만 했던 것은 아니고 회합이나 책봉과 사여와 같은 상당히 다채로운 외교 활동이 각국을 상대로 벌어졌던 것으로 확인된다.

갑골문에서 확인되는 상과 동이의 관계[1]
국명 적대 우호
전쟁 제물 포획 재앙 회합 책명 사여 방문 공납 기타
人方·尸方 65 6 1 1
2 2
2
14 2
1 1
1 6 3
1 3
4 1
2 1 2 1 2 1
2 2
虎方 1
1 2 2 2
1
통계 85 8 9 2 4 3 1 10 3 12
104 33

특히 상나라의 마지막 왕인 제신이 대단히 적극적으로 동방정책에 나섰는데, 위에서 말한 65건의 정벌 기사 가운데 반이 넘는 46번이 이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심지어 이는 사서상으로도 남아서 그로부터 500여 년이나 지난 춘추시대에도 주나라가 동이를 정벌하다가 신세를 망쳤다며 경고하는 문장이 등장하고 있을 정도였다. 때문에 갑골문을 연구한 학자들은 상주혁명의 실체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주왕과 달기가 폭정을 해서가 아니라, 상나라가 동이와의 전쟁에 매진하는 사이 서방에 있던 제후국 주나라강족 등의 이민족들을 모아 상나라를 기습하여 상이 멸망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오거(伍擧)가 "무릇 6왕과 2공의 사적은 모두 제후들에게 예법을 보여서 제후들이 그 명령을 받든 것입니다. 하나라 걸왕이 잉(仍)에서 회합할 때 유민(有緡)이 반란했고, 상나라 주왕이 여(黎)에서 사열할 때 동이(東夷)가 반란했고, 주나라 유왕이 대실(大室)에서 회맹할 때 융적(戎狄)이 반란했으니, 모두 제후들에게 교만을 보여서 제후들이 그 명령을 내버린 것입니다. 지금 임금님께서 교만하시니 성공하지 못할 듯합니다."라고 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 『춘추좌씨전』 소공 4년

숙향(叔向)이 대답하길 "이깁니다. …… 걸왕이 유민을 이겼으나 그 나라를 잃었고, 주왕이 동이를 이겼으나 그 신세를 망쳤습니다. 초나라는 그들보다 작고 낮은데도 걸왕과 주왕보다 더 난폭하니 재앙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늘이 착하지 않은 자를 거짓으로 도와주는 것은 복을 내리는 것이 아니고, 그 흉악함을 더 쌓도록 해서 벌을 내리려는 것입니다."라 하였다.
─ 『춘추좌씨전』 소공 11년

이렇게 상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들어선 이후에도 동이는 여전히 주나라에 위협적인 존재로 남아 있었고, 더욱이 상나라의 잔당과 연합하면서 더욱 큰 문젯거리가 되었다. 주나라는 제신의 아들 무경을 제후로 책봉하여 상나라의 사직을 보존시켜 주는 대신 그 주위의 관(管), (蔡), (霍)에 친족들을 분봉하여 이를 감시하도록 했는데, 그로부터 2년만에 주 무왕이 죽고 어린 주 성왕이 즉위하여 주공 단의 섭정을 받게 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관숙과 채숙이 오히려 무경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버린 것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반란에 지금의 안후이 성 일대의 회이(淮夷)와 서융(徐戎)까지 끌어들였지만 주공은 3년만에 가까스로 이들을 진압하고 동방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이후로도 주나라와 동이 사이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주공은 다시 동이에 대한 정벌에 박차를 가하여 지금의 산둥 성에 있던 엄(奄)을 몰아낸 뒤 그 땅을 자신의 봉지인 노나라로 삼았고, 강태공 또한 이와 비슷하게 (萊)를 몰아내고 그 땅을 자신의 봉지인 제나라로 삼았다. 애당초 서주시대 초기에 봉해진 제후들은 '이미 완전하게 영토로 확정된 곳'을 받은 것이 아니라 '가서 그 지방을 정복하고 살아라'라는 개념에 가까웠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곤 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서주 중기까지 동이의 판도는 계속해서 축소되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 집단은 회하 유역을 중심으로 건재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 가장 강성했던 (徐)나라는 아예 그 일대 동이의 우두머리로 왕을 자칭하면서 중원 한복판까지 침범해 들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춘추전국시대가 전개되면서 각국이 경쟁적으로 확장을 개시함에 따라 동이라 불리는 소국들이 존속할 수 있는 여지는 점점 더 좁아졌다. 단적으로 산동반도에 있던 래(萊)는 기원전 567년에 제나라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였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초나라를 필두로 한 남방 국가들의 북진이었는데, 초나라는 회하를 따라 동진하면서 육(六)과 주래(州來)와 (莒)와 같은 소국들을 합병하였고, 이어서 흥기한 오나라와 월나라는 북진하면서 서(徐)와 (郯) 같은 동이의 핵심 국가들을 멸망시키고 자신의 판도 안으로 편입하였다. 이후 이 지역들은 월나라가 망하고 초나라의 영역이 되었다가 천하통일 이후 통일 진 제국의 치하에서 전 중국에 일괄적인 군현제로 편성되었고, 이로 말이암아 새로운 의미의 중국 관념이 대두되면서 더 이상 이민족으로 인식되지 않게 되었다.

진(秦)이 6국을 병합하고 그 회수와 사수의 이족들을 모두 흩어서 민호로 만들었다.
─ 『후한서』 동이열전 서문

3.2. 과도기

진시황에 의해 전 중국이 일원적으로 재편되고 이에 따라 전통적인 의미의 동이가 해체되면서, 동이라는 명칭은 자연스럽게 그 의미를 재정의하게 되었다. 이전까지의 동이가 중국 동해안 일대의 특정한 지역과 국가들을 가리키던 고유명사에 가까웠다면 이후로는 동방의 이민족들을 광범위하게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되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중원의 동북방인 지금의 만주일대를 가리키는 용어로 정착되었다.

물론 중국에서는 그전부터 이미 동북방의 종족들에 대한 지식을 조금씩 갖춰 오고 있었다. 위에서 이야기했던 주 성왕 대의 동이 정벌 과정에서 중국은 최초로 그 너머의 숙신과 접촉하여 돌촉을 단 싸리나무 화살(楛矢石砮)을 조공받기도 했고, 그 뒤로도 연나라제나라 등이 육로와 해로를 통해 동방과의 교역을 벌이면서 모피의 산지인 조선이 중국의 동방에 있는 중요한 교역 대상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동북방 혹은 북방에 있는 여러 이민족들 가운데 하나일 뿐, 엄밀히 말해 당시의 '동이'라는 개념에 포함되는 존재들은 아니었다. 이는 전한 대까지도 마찬가지여서 사마천의 사기에서도 조선은 이민족 일반을 가리키는 만이(蠻夷)의 하나일 뿐 동이로 지칭되는 종족은 아니었다.

사방 오천 리로 황복(荒服)까지 다다랐다. 남쪽으로는 교지(交阯)·북발(北發), 서쪽으로는 융(戎)·석지(析枝)·거수(渠庾)·저(氐)·강(羌), 북쪽으로는 산융(山戎)·발(發)·식신(息愼), 동쪽으로는 장(長)·조이(鳥夷)를 어루만지니 사해 안이 모두 제순의 공적을 떠받들었다.
─ 『사기』 오제본기

점차 진번조선의 만이(蠻夷)들과 옛 연나라제나라의 망명자들이 복속하므로 그들의 왕이 되었다. …… 위만을 외신(外臣)으로 삼아 국경 밖의 만이들을 지키고 변방을 노략질하지 않도록 하며, 뭇 만이의 군장들이 입조하여 천자를 알현하고자 하거든 금지하지 말도록 하였다.
─ 『사기』 조선열전

그러나 이후 통일 한 제국이 300여 년에 걸쳐 존속하면서 중국인들의 세계관이 확장되고, 또한 선진시대에 존재하던 동이의 실체가 사람들에게서 잊혀지면서 동이는 점차 동쪽의 이민족들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확장되기에 이르렀다. 즉 동방에 이(夷)라는 나라들이 있는 게 아니라, 동방에 있는 나라들을 이(夷)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개념상의 변화는 후한 말에서 서진 시기에 걸쳐 두드러졌고, 정현까지만 해도 이들을 동북이(東北夷)라 부르던 것이 관구검의 원정을 거쳐서 삼국지가 편찬될 시점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동이라는 개념으로 자리잡았다. 이때 동이의 범주 안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읍루, 동예, 삼한, 가 포함되어 있었다.

3.3. 동이교위 설치기

이후 요동군에 설치되었던 동이교위(東夷校尉)의 존재는 중국에서 바라보는 '동이'의 개념이 어떠한 것이었으며 어떻게 바뀌었는지 보여주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동이교위가 처음 설치된 시기에 대해서는 한나라가 선비족을 위무하기 위해 동이교위를 두었다는 기록과 위나라가 공손씨 일족과 관련해 동이교위를 두었다는 기록이 상충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전자와 후자를 절충하여 조조가 답돈을 정벌하고서 원상원희의 수급을 보내온 공손강을 좌장군 양평후로 책봉하면서 동시에 선비족을 비롯한 주위 이민족들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의미에서 동이교위라는 관직을 만들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동이라 총칭되는 각 나라들과의 중개와 교섭은 그에 해당하는 각각의 동방변군이 나누어 맡고 있었고, 따라서 그에 해당하는 영향력을 행사하던 공손씨 일족이 사마의에게 멸문당하자 동이교위는 단순히 유명무실한 직함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실제로 동이교위가 설치되었다는 한나라 말은 물론 위나라 시대까지도 기록상으로 동이교위가 임명되거나 활동하는 모습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변군 통어하는 종족
요동속국 오환 분파
현도군 부여
고구려
요동군 선비 분파
낙랑군 옥저
동예
진한
대방군 마한
변한

이러한 동이교위가 실질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서진이 건국되고 삼국통일이 이루어진 뒤 체제를 정비하던 태강 연간의 일이다. 이 시기 사마염은 282년에 서이교위(西夷校尉), 284년에는 남이교위(南夷校尉)를 신설하여 운남 일대의 이민족들을 관장하도록 하고 289년에는 서융교위(西戎校尉)를 신설하는 등 여러 이민족통어관을 설치하고 있었는데, 이 와중에 동이교위에게도 실질적인 힘이 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동이교위가 사료상에 대두되는 것은 285년에 선우영(鮮于嬰)이 모용외부여에서 깽판을 치는데도 가만 보고 있었다는 죄목으로 해임되고 하감(何龕)이 부임하면서부터의 일이었다. 뒤이어 부임한 하감은 독호 가침을 보내서 부여를 재건시켜 주었고, 나중에는 모용외에게 항복까지 받으면서 이 시기 동이교위의 위세는 절정을 달렸다.

4. 사서상의 서술

4.1. 예기

선진시대 이래 성립된 유교 경전인 예기에서는 왕제(王制)에서 사방의 이민족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무릇 거주하는 백성의 성질은 반드시 하늘과 땅의 차갑고 따뜻하고 마르고 습한 데에서 말미암으니, 널따란 골짜기와 커다란 물줄기에 따라 제도가 달라지고 백성들은 그 사이에 살면서 풍속을 달리한다. 굳세고 부드럽고 가볍고 무겁고 느리고 신속함이 가지런하지 않으며, 음식의 조화가 다르며, 기물의 제도가 다르며, 의복의 편의가 다르다. 그 교화를 닦지 그 풍속을 바꾸지 않으며, 그 정치를 바로잡지 그 편의를 바꾸지 않는다.
중국과 융적과 오방의 백성들은 모두 저마다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고칠 수 없다. 동방은 이(夷)라 하는데, 머리를 풀어헤치고 문신을 하였으며 화식을 하지 않는 자들이다. 남방은 만(蠻)이라 하는데, 먹물을 새기고 발이 엇갈리며 화식을 하지 않는 자들이다. 서방은 융(戎)이라 하는데, 머리를 풀어헤치고 가죽옷을 입으며 곡식을 먹지 않는 자들이다. 북방은 적(狄)이라 하는데, 깃옷과 털옷을 입고 굴에 살며 곡식을 먹지 않는 자들이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문신을 했다는 대목에서 무슨 딴 나라 이야기인가 싶지만, 예기에서 이야기하는 동이는 선진시대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즉 여기에서 고조선을 연상하면 안 되고 지금의 산둥 성 남부에서 안후이 성 일대에 있던 중국의 소국들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들로부터 그다지 거리가 멀지 않았고 나중에는 이들을 병합하였던 월나라에서 몸에 문신을 하는 문화가 있었음이 묵자[2]장자[3] 등의 기록으로부터 확인되어 이러한 점을 뒷받침한다.

4.2. 한서

후한 때 반고가 완성한 한서 지리지에서는 동이의 범주와 성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현도, 낙랑은 무제 때 두었다. 모두 조선, 예맥, 구려의 만이(蠻夷)이다. 은나라의 도가 쇠하자 기자는 조선으로 가서 그곳 백성들을 예의, 농잠, 방직으로 교화하였다.
낙랑 조선의 백성들은 8조를 금하였는데 서로 죽이면 바로 죽여서 갚고, 서로 상처입히면 곡식으로 배상하고, 서로 도둑질하면 남자는 적몰해서 그 집의 노(奴)로 들이고 여자는 비(婢)로 삼으니 스스로 속(贖)하려는 자는 50만 전을 냈다. 비록 면죄받아 양민이 되더라도 시속에서 오히려 이를 부끄럽게 여겨서 혼인하고자 해도 짝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로써 마침내 그 백성들이 서로 도둑질하지 않게 되어서, 문호를 닫지 않더라도 부인들은 정숙하여 음란하지 않았다.
그곳 농민들은 변두(籩豆)로 식사하고, 도읍에서는 자못 관리나 내군(內郡)의 상인들을 본받아 왕왕 배기(杯器)로 식사하였다. 군의 초기에는 요동에서 관리들을 취하였는데, 관리가 백성들이 문을 잠그고 감추지 않음을 보고는 상인으로 간 자들과 밤마다 도둑질을 하니 풍속이 점차 야박해지고 지금은 금하는 바가 점차 많아져서 60여 조에 이르렀다. 귀하도다, 인현(仁賢)의 교화여!
그리고 동이(東夷)는 천성이 유순해서 다른 세 방면의 외이들과는 달랐다. 고로 공자가 도가 행해지지 못함을 탄식하면서 바다에 배를 띄우고 구이(九夷)에 살고자 하였던 것은 이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후한서에서 '동이가 천성적으로 유순하다'고 한 것과 '공자가 구이에 살고자 하였다'는 인용은 후대 동이에 대한 대부분의 표현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면서 동이의 성향을 규정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이후 동이의 성격은 유순하고 공자는 구이를 동경했다는 것이 마치 정석처럼 여겨지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공자의 말과 더불어 한대 이후 유행한 오행사상에서 동방을 오행으로는 목(木)으로 오색으로는 청(靑)이며 오덕으로는 인(仁)이라고 정의한 것과 밀접히 연관된다.

4.3. 삼국지

서진 때 진수가 완성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서문에서는 동이의 성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비록 이적(夷狄)의 나라이기는 하나 조두(俎豆)의 법도가 여전히 남아 있으니, 중국이 예를 잃으면 사이(四夷)에게서 구한다는 것을 더욱 믿을 수 있다.

4.4. 제갈량집

제갈량이 저술한 글을 묶은 것으로 되어 있는 제갈량집의 장원(將苑)에서는 동이의 공략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동이의 성품은 예(禮)를 업신여기고 의(義)가 적다. 사납고 급하며 싸움을 잘 하는데, 산에 기대고 바다를 참호로 삼으니 험지에 의지하여 굳게 지키므로 상하가 화목하고 백성이 안락하면 도모할 수 없다. 만약 위가 어지럽고 아래가 분열되어 있다면 간첩을 운용할 수 있는데, 간첩을 운용해 틈을 만들고, 틈이 만들어지면 덕을 닦아서 귀순하게 하거나 굳센 군대로 공격하여야 그 세력을 반드시 이길 수 있다.

사람들은 호전적이고 지형은 험준하니, 나라가 잘 단합되어 있으면 침공해도 이길 수가 없다고 하고 있다. 때문에 반드시 먼저 그들끼리 내분이 일어난 뒤에 공작활동으로 내부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그로써 안으로부터 와해된 뒤에 외교나 군사작전을 통해서 굴복시킬 것을 제시한다. 한마디로 안에서부터 스스로 무너지도록 조장하라는 것. 다만 제갈량집은 후대의 위작이라는 의혹도 있다.

4.5. 후한서

유송 때 범엽이 편찬한 후한서에서는 동이열전에서 동이라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그 특징을 설명한다.

왕제(王制)에서는 '동방을 이(夷)라 한다'고 하였다. 이라는 것은 뿌리이니, 어질어서 살아나는 것을 좋아하므로 만물이 땅에 뿌리내려서 나오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고로 천성이 유순하기에 도(道)로써 이끌기 쉬워서 군자국(君子國)과 불사국(不死國)이 있다고 할 정도다. 이에는 아홉 종류가 있는데, 견이(畎夷)·우이(于夷)·방이(方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풍이(風夷)·양이(陽夷)가 그것이다. 고로 공자가 구이(九夷)에 살고자 하였던 것이다.
…… (중략) ……
동이는 대개 토착생활을 하며,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추기를 즐긴다. 혹 고깔을 쓰고 비단을 입으며 조두(俎豆)를 그릇으로 쓰니, 이른바 중국이 예(禮)를 잃으면 사이(四夷)에게서 구한다는 것이다. 무릇 만(蠻)·이(夷)·융(戎)·적(狄)을 총칭하여 사이라 하는데,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을 모두 제후라 부르는 것과 같다고 한다.
…… (중략) ……
논한다. 옛적에 기자가 쇠망하는 은나라의 운수에서 벗어나 조선 땅에 피난하였다. 처음에는 그 나라의 풍속이 알려진 바가 없었으나, 8조의 규약을 시행하여 사람들에게 금하는 것을 알게 하니 마침내 그 고을에 음행과 도둑이 사라져서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았으며, 완고하고 박덕한 풍속을 바꾸고 너그럽고 간략한 법규를 이루어 수백 년 동안 행하여졌다. 그러므로 동이에 유순하고 근칙하는 풍속이 통하여 다른 세 방면과는 다르게 되었으니, 진실로 정치가 창달하면 도의가 있기 마련이다. 공자가 분연히 구이에 가서 살고자 하였더니, 누군가 그곳은 누추하다고 하자 공자가 "군자가 그곳에 사는데 어찌 누추함이 있겠는가!"라 한 것도 이런 까닭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 뒤에 드디어 상인들이 오가며 만나게 되고 점차 상국(上國)과 교역하더니,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그들의 풍속을 혼잡하게 만들자 이에 따라서 경박해지고 말았다. 노자는 '법령이 불어날수록 도적이 많아진다'고 하였으니, 기자가 법조문을 간략히 하고 신의로 다스린 것은 성현께서 법을 만드신 근본을 얻은 것이라 하겠다.

4.6. 수서 · 북사

당나라 때 국가적으로 편찬된 수서와 북사에서는 서두의 서문이 아니라 말미의 찬자평을 통해 동이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널따란 골짜기와 커다란 물줄기에 따라 제도가 달라지고, 사람들은 그 사이에 살면서 풍속을 달리하니 기호가 같지 않고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 성인이 시절에 따라 교화를 펼치는 것도 그 뜻을 전달하고 풍속을 통하게 하고자 함이었다. 구이(九夷)가 사는 곳은 중국과 멀리 떨어져 있는데, 그러나 천성이 유순하고 광포한 풍조가 없어서 비록 산과 바다로 막혀 있어도 도(道)로써 거느리기 쉽다.
…… (중략) ……
기자가 조선 땅으로 피하면서부터는 8조의 금법을 두었으니, 성기면서도 빈틈이 없고 쉬우면서도 오래갈 만하여 교화의 영향이 천 년 동안 끊이지 않았다. 지금은 요동의 뭇 나라들이 의복에 면관의 모양을 갖추기도 하고 음식에 조두의 기물을 갖추기도 하였으며, 경전을 받들고 학문을 좋아하며 문적을 즐기고 사적을 사랑하여 경도에 유학하는 자가 길 위에 왕래하길 끊이지 않았다. 더러는 일생을 마치도록 돌아가지 않았으니, 선현들의 유풍이 아니었다면 그 누가 이런 일을 이룩할 수 있었겠는가? 고로 공자께서는 '말이 바르고 믿음직하며, 행동을 삼가고 공경한다면 그것이 만맥(蠻貊)의 나라라도 도를 행할 수 있다'고 하시었다. 참되도다 그 말씀이여! 그 풍속에서 본받을 만한 것이 어찌 호시(楛矢)의 조공 뿐이겠는가?

5. 종류와 범주

5.1. 구이

구이(九夷)라는 단어로 지칭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나서 동이에는 아홉 가지 종류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여기서의 구는 실제로 아홉이라는 의미보다는 단순히 많다는 것을 표현하는 관념적인 수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동이는 9이, 북적은 8적, 서융은 7융, 남만은 6만이라고 표현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도 점차 본말이 전도되어서, 아홉이라서 구이가 아니라 구이라서 아홉이라는 끼워 맞추기 식으로 개념이 정리되어갔다. 하지만 이것이 액면 그대로의 사실이라고 받아들일 것은 아니고 그냥 관념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구이가 와서 조회하니 견이(畎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풍이(風夷), 양이(陽夷)였다.
─ 『본죽서기년』 후분 3년

이 가운데 사료상으로 확인되는 동이 국가들의 명칭은 방이, 황이, 백이, 풍이의 4가지이다. 이 가운데 풍이는 춘추좌씨전에서 풍성 국가로 확인되는 임(任)·숙(宿)·수구(須句)·전유(顓臾)를 가리킨다는 것이 유력하고 견이는 견융(犬戎)과, 우이는 차우(且于)와 관련된 것일 수 있지만 사실 여부는 불확실하다. 이밖에도 구이에 들어가지는 않지만 사료상으로 확인되는 여러 자생 소국들이 있었다.

  • 숙(宿=夙)
  • 엄(奄)
  • 기(㠱=紀=箕)
  • 래(萊=來攴)
  • 차(虘=且于)
  • 방(方)
  • 담(郯)
  • 서(徐)
  • 육(六)
  • 주(州)
  • 황(黃)
  • 백(白=栢)
  • 림(林)

구이라고 함은 하나는 현도(玄菟), 둘은 낙랑(樂浪), 셋은 고려(高麗), 넷은 만식(滿飾), 다섯은 부유(鳧臾), 여섯은 소가(素家), 일곱은 동도(東屠), 여덟은 왜인(倭人), 아홉은 천비(天鄙)이다.
─ 『이아』 이순 주

5.2. 동이

  • 하늘색 칸은 사서에서 동이로 분류된 것이고, 붉은색 칸은 사서에서 북적으로 분류된 것입니다.
  • 역사적 해석과는 무관하게 어디까지나 사서에 기술된 계승관계에 준하여 표를 작성합니다.
  • 실위, 고막해, 지두우, 거란, 오락후는 북적으로 분류되는 것이 통설이지만, 위서와 북사에서 확실히 북적의 범주에 들어가는 유연 등의 국가들과 같은 권으로 엮이지 않고 확실히 동이의 범주에 들어가는 고구려 등의 국가들과 같은 권으로 엮인 것을 감안하여 목록에 명기합니다.

사서(편찬연대) 분류
사기(BC) 조선 진번 임둔
한서(1C) 조선 진번 임둔
삼국지(3C) 부여 고구려 옥저 읍루
후한서(5C) 부여 고구려 옥저 읍루
송서(5C) 고구려 백제
남제서(6C) 고구려 백제 가라
위서(6C) 두막루 고구려 물길 실위 고막해 지두우 거란 오락후 백제
양서(7C) 고구려 백제 신라
주서(7C) 고려 고막해 백제
수서(7C) 고려 말갈 실위 거란 백제 신라 류구
진서(7C) 부여 숙신 비리
남사(7C) 고구려 백제 신라
북사(7C) 두막루 고려 물길 실위 지두우 거란 오락후 백제 신라 류구
구당서(10C) 고려 발해말갈 말갈 실위 거란 오라혼 백제 신라 일본
구오대사(10C) 고려 발해말갈 흑수말갈 거란 신라
신오대사(11C) 고려 발해 흑수말갈 거란 신라
신당서(11C) 고려 발해 말갈 실위 거란 백제 신라 일본
요사(14C) 고려
금사(14C) 고려
송사(14C) 고려 발해 정안 신라 일본 류구
원사(14C) 고려 탐라 일본 류구
명사(18C) 조선 일본 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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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박재복, 殷商시기 甲骨文에 보이는 商과 夷族의 관계, 동양사학연구 제123집, 2013
  • [2] 묵자 공맹편, "옛적 제나라의 환공은 높은 관을 쓰고 넓은 띠를 두르고 청동 칼을 차고 나무 방패를 들고 그 나라를 다스렸고, 옛적 진나라의 문공은 거친 베옷과 암양 갖옷을 입고 가죽끈으로 칼을 차고 그 나라를 다스렸고, 옛적 초나라의 장왕은 화려한 관을 써서 갓끈으로 묶고 풍신한 옷에 넉넉한 도포를 입고 그 나라를 다스렸고, 옛적 월나라의 구천은 머리를 깎고 문신을 했하고 그 나라를 다스렸는데 모두 잘 다스렸소."
  • [3] 장자 소요유편, "송나라 사람이 장보관(章甫冠)을 사가지고 월나라로 갔으나, 월나라 사람은 머리를 깎고 문신을 해서 쓸 데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