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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문

last modified: 2015-01-26 20:23:22 Contributors


일제에 의해 허물기 전 모습



敦義門. 조선시대 한양의 4대문 중 하나. 숭례문(남대문), 흥인지문(동대문)과 더불어 한양의 대문중 하나였다.

조선 한성의 4대 성문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
동문 서문 남문 북문

Contents

1. 위치
2. 역사
3. 현황과 복원 계획

1. 위치

서대문이라는 이명(異名) 때문에 서울 서대문구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은 서울 중구 정동의 현재의 경향신문 사옥 앞 정동사거리 자리가 돈의문 터였다. 서대문구에는 서대문이 없어요
다만 중구 정동을 비롯한 중구 서쪽 지역은 1975년에 서대문구에서 중구로 편입된 곳이기 때문에, 1975년까지는 실제로 서대문구에 돈의문 (터)가 존재했던 게 맞다. 동대문구와 같은 케이스.

2. 역사

건설된 때는 1396년으로 한양의 2차 성곽공사가 마무리 될때 지어진 8개의 성문중 하나로 세워졌다. 그러나 1413년 태종 13년에 돈의문을 폐쇄했다. 이유인즉 태종시대의 대표적 권신이던 이숙번의 집이 돈의문 근처에 있었는데 당연히 사람들의 통행이 많고 수레가 오가자 시끄럽다라는 이유로 돈의문을 막아버린것이다.(...) 님비 돋네 그냥 지하화 하지 그랬냐이리되자 사람들은 이숙번의 집을 지날때마다 "색문가", 즉 성문을 막아버린 집안이라며 손가락질 해댔다고 한다.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해지자 조정에서 백성들의 불편을 덜기 위해 새로 길을 내고 대문을 만들려고 했는데 그 길이 이숙번 집 앞을 지나게 되자 이숙번은 인덕궁 앞에 작은 동네가 있는데 거기에 길내고 대문을 만들자라고 해 조정이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문이 서전문인데... 인덕궁은 바로 상왕 정종이 기거하던 궁이었다.(...)

결국 이숙번이 몰락하고 1422년, 세종 4년에 서전문을 철거한뒤 폐쇄된 돈의문을 다시 수리해 개방했다. 이후로 조선왕조 내내 존속하다가 세월이 오래되어 성문과 성루가 낡게되자 1711년, 숙종 37년에 다시 짓게 되었다. 이때 다시 지으면서 새문, 신문이라는 이명을 얻게 되었는데 그래서 구한말에 정동에 세워진 문안교회가 새문 안에 세운 교회라는 의미에서 이런 이름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육조거리에서 돈의문까지 잇는 길을 새문안길(신문로)라 불렀으며, 이게 현 도로명 체계에서도 그대로 굳어지게 된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어지던 돈의문은 일제에 의해 파괴되는 수난을 당하게 된다. 일제는 경성을 재개발하겠다면서 그 과정에서 전철 복선화를 추진했는데 전철을 복선화하려면 돈의문이 걸림돌이 되었다. 결국 일제는 편리하게 돈의문을 철거하고 전철을 복선화 했다. 이뭐병

3. 현황과 복원 계획

숭례문과 흥인지문만이 남아있던 탓인지 돈의문의 이명인 서대문은 각종 지명에만 남아있었지만 정작 사람들은 서대문은 어디있는지 관심을 안가졌다는 점에서 비운의 대문이 되었다(...) 일제가 철거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남아있었을 것이란 점에서 매우 안타까운 일.

남아있는 일제때 촬영된 사진을 보면 숭례문이나 흥인지문과는 달리 한가운데에 크게 문이 있고 성루에는 2층 누각인 숭례문,흥인지문과는 달리 단층 누각이라는 특징이 있다.

복원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던 끝에 서울시는 인근의 서대문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2013년 완공을 목표로 돈의문을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레알 새문 2015년까지 서울 성곽도 복원될 예정이며, 그러면 복원된 숭례문과 함께 4대문과 성곽이 복원되는 셈이다. 이는 돈의문 복원을 위한 자료수집 중에 국립 고궁 박물관에서 돈의문 현판을 발견하였기에 가능하였다. 그러나 이후 돈의문 복원사업은 예산 및 원형 복원 등의 문제가 겹쳐 2022년까지 중장기 과제로 미뤄진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