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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참사

역대 아시안게임 야구 경기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야구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야구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야구

21세기 대한민국 스포츠 쇼크 역사
년도 종목 명칭
2003년 축구 오만 쇼크
야구 제1차 삿포로 참사
2006년 야구 도하 참사
2007년 축구 바레인 쇼크
2010년 축구 중국 쇼크
2011년 축구 제2차 삿포로 참사
레바논 쇼크
2013년 야구 타이중 참사
2014년 남자 쇼트트랙 소치 쇼크

Contents

1. 개요
2. 전개
2.1. 당시 일본 대표팀 명단
3. 결과
4. 후폭풍


1. 개요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에서 일어난 대한민국 야구흑역사 중의 하나. 그리고 도하의 비극도하의 기적으로 리다이렉트하지 못하게 만든 주범


야구판 오만 쇼크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후폭풍이 오만 쇼크보다 심각한 수준이었던 사건.[1][2]

3년 전, 2003년의 삿포로 참사 때와 똑같은 경기 내용으로 벌어진 일이라, 교훈을 개한테 줘 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톡톡히 보여 주었다.

2. 전개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야구에서 대한민국은 대만전에서 2:0으로 앞서다가 손민한이 불을 제대로 질러서 4:2로 역전패했다, 대만이야 무시 못할 수준이라고는 하지만 한국이 프로 올스타로 구성된 대표팀으로 붙으면 2번을 제외하고 모두 이겼다.[3] 그래서 어느 정도 넘어갈 수는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 일본과의 경기에서 발생하고 말았다. 4:0으로 앞서나가다가 류현진이 무너지면서 7:7이 되고, 끝내기 홈런이 나오면서 7:10으로 패했다. 그것도 보통 패배가 아니라 프로 선수가, 사회인으로 구성된 야구팀에게 역전패를 당한 것.

후반부에 접어들자 이 경기를 중계한 MBC"무한도전 틀어라!"라는 비난이 쏟아졌으며, 경기가 끝난 후, "야구 집어쳐라"라는 비난과 함께 3회 2점홈런과 함께 역전을 허용한 류현진과 끝내기 홈런을 맞은 오승환은 죽도록 욕을 먹었다.

2.1. 당시 일본 대표팀 명단

이름 포지션 당시 소속팀 이후 프로 진출
11 핫토리 야스타카 투수 도요타자동차 2007년 대학생·사회인 드래프트 1순위
(치바 롯데 마린즈)
13 미야니시 나오키 투수 간세이가쿠인대학 2007년 대학생·사회인 드래프트 3순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4]
14 이시구로 타쿠야 투수 닛산자동차
17 사케이 산치 투수 세이노운수
18 다카사키 겐타로 투수 닛산자동차 2006년 대학생·사회인 드래프트 희망입단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5]
19 이소무라 히데토 투수 토시바
20 고마츠 사토시 투수 JR 큐슈 2006년 대학생·사회인 드래프트 희망입단
(오릭스 버팔로즈)[6]
21 하세베 고헤이 투수 아이치공과대학 2007년 대학생·사회인 드래프트 1순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22 다나카 다이스케 포수 도요대학
24 스즈키 겐지 포수 니혼통운
27 다카노 시게치 포수 JR 큐슈
1 후쿠다 고이치 내야수 도요타자동차
2 스즈키 간야 내야수 미쓰비시중공업 나가사키
5 시노미야 요스케 내야수 닛산자동차
6 사이고 야스유키 내야수 미쓰비시후소 가와사키
9 요코야마 겐이치 내야수 미쓰비시중공업 고베
10 고야마 고 내야수 닛산자동차
25 우에야마 코스케 내야수 미쓰비시후소 가와사키
3 초노 히사요시 외야수 니혼대학 2009년 드래프트 1순위
(요미우리 자이언츠)[7]
7 이케베 게이지 외야수 JX-ENEOS(신일본석유)
8 노모토 게이 외야수 고마자와대학 2008년 드래프트 1순위
(주니치 드래곤즈)
29 요시우라 다카시 외야수 닛산자동차

당시는 비시즌 기간이라서 프로선수들의 참가도 가능했지만, 12월과 1월은 계약기간이다 보니 프로선수들의 참가가 보류되면서 일본 국가대표팀은 사회인야구 선수 17명, 대학야구 선수 5명 등으로 22인 엔트리를 채웠다.

'사회인야구'라는 단어가 착각을 불러올 수 있는데, 일본의 사회인야구는 그 스펙트럼이 넓어서 일반 동호회팀부터 기업/지자체팀까지 매우 다양하다. 특히 기업에서 운영하는 팀의 경우엔 말이 사회인야구지, 야구 명문 고교/대학 출신으로 실질적으로는 국내에서는 사라진 실업야구 수준의 팀이다. 당시 출전한 선수들 중 대학야구 선수를 제외한 사회인 야구팀 소속 선수들은 모두 이러한 실업야구 수준의 기업팀 소속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멤버들 중에도 프로로 진출한 선수도 몇몇 있었다. 특히 쵸노 히사요시의 경우 원하는 구단의 지명을 위해 대학 졸업 후 사회인야구 팀에 입단했다가 1순위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이후로 요미우리의 주전 외야수로 2011년, 2012년 2년 연속 센트럴리그 수위타자 타이틀을 차지할 정도로 실력이 있는 선수다.

이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종종 고교, 대학 때 원하는 구단으로부터 지명을 받지 못한 선수가 사회인 야구를 재도전의 기회로 삼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그곳에서 엄선된 선수들의 실력은 의외로 수준이 있다. 후루타 아츠야노모 히데오도 이러한 사회인야구 팀을 거쳐 프로로 진출했다.

문제는 여전히 이를 사실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당시 이를 개그 소재로 삼았다가 호되게 비판받은 개그맨 유민상이 대표적인 인물.

한 마디로 말해 위의 소동은 일본의 사회인야구에 대한 무지(無知)가 빚어낸 해프닝이었다고 하겠다. 물론 한국 선수들의 기량이 높다는 건 분명하지만, 야구는 아무리 강팀이라도 10경기 중 3경기는 질 수 있는 게임인 것을 명심해야 한다.

3. 결과

결국 이 대회에서 대한민국은 동메달을 획득했고[8], 대만이 금메달을 차지하였다. 대만 야구가 도하를 통해 자신감을 얻은 것에 비해 대한민국에선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고조되었던 기대를 한꺼번에 무너뜨렸던 사건. 당시 독일 월드컵에서의 아쉬운 탈락으로 동정표를 얻던 축빠가 득세한지라 축빠들은 이 사건으로 야빠들을 심하게 까댔다.

도하 참사의 제일 큰 원인은 풀 시즌을 치른 주축 선수들의 심각한 피로에 있었다. 또한 의도적으로 서울 라이벌 팀 손시헌을 뽑지 않고[9] 검증되지 않았다며 이미 메이저리그에서 유망주로 주목받던 추신수를 선발하지 않는 등[10] 완전한 병역 미필 선수단도 아니고 그렇다고 최상급 선수단도 아닌 어설픈 진용을 꾸린 것이 더욱 더 독이 되었다. 베테랑들은 목적 의식이 없었으며, 뉴 페이스들은 경험이 없어서 국제 대회에서 서툴렀다. 거기에 대다수가 지쳐 있었고, 이미 부상이 심각했던 이혜천신철인을 단지 성적이 좋다는 이유로 뽑았다가 두 선수가 개점휴업을 하면서 사실상 투수는 7명뿐이었다. 그 중 하나는 아마추어 쿼터인 정민혁이었기에 실질적으로 기용이 가능한 투수는 6명뿐이였다. 그 중 성적이 좋았던 류현진손민한이 선발에서 털렸고, 마무리였던 오승환마저 털리니 어떻게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이혜천은 대회 이후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아 병역이 면제됬지만, 2007년을 개점휴업 상태로 지내다가 한국시리즈 때가 와서야 등판했다.

다만 손시헌의 경우 대신 뽑힌 박기혁의 현장 평가가 워낙 좋았던데다 성적 자체가 큰 차이가 없었고, 주전 유격수는 박진만으로 정해진 상태에서 백업 유격수 자리를 놓고 경합하다가 떨어졌기 때문에 이게 문제였다고 보긴 힘들다. 그보다는 이미 부상이 확인된 신철인이혜천을 빼고 마당쇠 역할을 해줄 다른 투수를 넣었다면 이러한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도하 참사 이후 베이징에 승선한 군 미필 선수들은 강민호, 류현진, 윤석민, 이대호, 이용규, 이택근, 장원삼, 정근우 등이다. 이들은 훗날 베이징에서 도하의 아픔을 씻어내게 된다.

4. 후폭풍

이 사건 이후로 야구장에서 마운드를 낮추고, 경기 공인구도 기존에 사용되던것과 달리 좀 커졌으며 심판들의 스트라이크 존에 대한 적용에 대한 교육 작업이 뒤따랐다. 그리하여 당시 이승엽 말고는 성적을 내지 못한 타자들이 많았으나, 도하 참사 이후로 저렇게 바뀌면서 공격적인 타자들이 점점 늘어났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뛰었던 이대호, 이용규 등의 선수들이 성장해나가면서 베이징 올림픽 야구 금메달을 시점으로 한국야구가 다시 정상에 오를 수 있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큰 시련으로부터 다시 일어선 것이다. 이에는 KBO의 국제대회 적응을 위한 노력들도 나름의 영향이 있었다.

이 참사 때문에 프로야구 흥행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가 되었다. 2006년 시즌의 관객수가 WBC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전년도에 비해 되레 떨어졌기 때문.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한 반성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결국 2007년 시즌은 다시 410만명을 기록하며 다시 흥행 상승세를 기록했다.

그런데 2010년 FIFA 남아공 월드컵에서 도하 참사과 비슷한 일이 실제로 이탈리아 대표팀에게 일어났다. 결과는 무승부였지만 이탈리아는 우승국이었고 상대가 축구 약팀 뉴질랜드였다는 점에서 도하 참사보다 쇼크는 더 컸다.[11]

팬들은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길 바랐지만, 7년 후 이것과 비슷한 참사가 발생하고 만다. 근데 왜 하필이면 딱 7년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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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그래도 오만이 아랍에서도 도깨비팀이었다는 점. 무엇보다 오만 골키퍼 알리 알 합시는 아랍, 아니 아시아에서 가장 성공한 빅 리그 골키퍼 선수가 되었다는 점도 있지만 이 때 일본 야구팀은 사회인 야구팀이라 그 충격이 엄청났다. 그러나 일본의 사회인야구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 사회인 야구는 아니다.
  • [2] 잉글랜드 풋볼리그 2, 4부는 엄연히 프로리그이며 팀 핵심 선수들은 억대 연봉자이다. 거기다 그 아래의 4개 리그들도 세미프로로서 파트타임이지만 주급을 받는 선수들로 이루어져 있다. 괜히 축구종가가 아니다.
  • [3] 공교롭게도 그 2번 패배 당시의 감독은 모두 당시 대표팀 감독이던 김재박이다.내려갈 감독은 내려간다
  • [4] 왼손 스리쿼터 투구폼이며 현재는 중간계투의 주축으로 활약중이다. 데뷔시즌인 2008년부터 2014년까지 7시즌 연속 50경기 이상 등판, 2009년부터 6시즌 연속 두 자릿수 홀드 기록중.
  • [5] 2009 시즌 중간계투로서 56경기에 등판했고 2011, 12 시즌에는 괜찮은 선발 요원으로로서 활약했다. 다만 팀이 막장을 달리는지라
  • [6] 2008년 오릭스가 2위를 할 때 15승 3패 2.51 ERA 151탈삼진의 맹활약을 떨치며 퍼시픽리그 신인왕을 차지했고 2009 WBC 국대에도 뽑혔다. 문제는 바로 그 해에 1승 9패 7.09 ERA로 폭망하더니 아직까지 부활하지 못하고 있다. 2009년~2014년 성적이 9승 22패(...)
  • [7] 사실 프로에 갈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다른 팀의 지명을 거부한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고.
  • [8] 1994년 아시안게임에 야구가 채택된 이후로 한국, 일본, 대만 이외의 팀은 동메달조차도 획득하지 못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말이 3등이지 사실상 꼴찌인 셈이다.
  • [9] 단, 손시헌은 백업 유격수 경쟁에서 떨어진거라 실질적으로 전력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 힘들다.
  • [10] 덕분에 추신수가 정상급으로 자리를 잡은 현재에 이르러서는 김재박이 당시 추신수를 뽑지 않았던 이유로 내세운 "추신수같은 선수는 국내에도 널렸다." 는 두고두고 까야 제맛인 망언으로 정착했다.
  • [11] 뉴질랜드는 실제로 당시 프로선수가 아닌(2010년 시점),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은행원 앤드류 배런(정확히 말하자면 호주 2위 은행인 웨스트팩은행 근무중)이 막판에 4분간 교체출장했다. 10주간 몰래 휴가까지 내가며 뉴질랜드 대표팀으로 활약하며, 자신의 조국을 월드컵 본선까지 진출시킨 그는 일에 집중하고 싶다고 밝혀서 은퇴했다. '축구계의 엄친아' 카카가 취미로 주식을 한다면, 그는 투자은행에 근무하면서 직업으로 주식을 한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그는 직업으로 카카, 호날두 연봉의 몇 배에 해당하는 돈을 자기가 굴리면서 취미로 축구도 하는 거다. 실제로 비즈니스 SNS인 Linkedin에 이름이 등록되어 있으니 검색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