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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대공습

last modified: 2015-04-07 23:09:32 Contributors

태평양 전쟁일본 본토 공습 작전의 일환으로 일본의 수도 도쿄에 가해진 미군의 폭격에 관한 항목.

Contents

1. 개요
2. 상세
2.1. 다른 나라와의 비교
2.2. 작전 내용
2.3. 작전의 성과
2.4. 네이팜탄(소이탄)이 사용 된 이유
2.5. 이후의 공습
2.6. 사족 : 경성(서울)에 끼친 영향
3. 도쿄 대공습에 대한 반응
3.1. 일본: 피해자 행세의 주요 레퍼토리
3.2. 미국
3.3. 다른 나라
4. 대중매체에서의 도쿄 대공습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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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KYO-HOT 실사판.jpg[1][2]
폭탄을 떨어뜨리기 시작해서 그냥 많이 떨어트렸습니다
불길이 시뻘겋게 번져 용암이 흘러내리는 것을 방불케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끝자락인 1945년 3월 9~10일, 전쟁의 빠른 종결을 위해 일본 제국을 무력화시키고자 도쿄에 대량의 네이팜탄을 떨군 폭격 작전을 말한다.

이로 인하여 도쿄가 완전히 황폐화 되었으나, 원자폭탄 투하로 인한 임팩트가 너무 컸기 때문에 폭격이 유발한 직접적인 피해(특히 사상자수)는 도쿄대공습이 더 심했다는 연구결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폭보다 상대적으로 취급을 덜 받고있다.참고로 인구를 보자면 공습이전에는 600만 인구를 보유하던 도쿄가 공습후에는 200만명대로 급감한다(!).다른 도시들(오사카,고베,나고야등)도 마찬가지로 전쟁중에 큰 피해를 입었다.

2. 상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 일본인의 최대의 정신적 트라우마이다. 핵폭탄 투하 다음으로 일본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준 사건. 그럼에도 일본은 항복을 하지 않았고 이런 모습에 미국도 정신적으로 충격을 먹었다.싸대기를 x나 맛깔나게 후리면 감동먹어서 나랑 화해하는게 아니라... 화해를 시켰더니 빅엿이 배달[3]

고지라를 비롯해 마징가 이후로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줄창 울궈먹는 기계수 군단 도시 강습 테마의 정신적 원형.

2.1. 다른 나라와의 비교

영국도 같은 섬나라라서 본토에서 직접적인 전투는 없었지만 전쟁 초기엔 자국 공중에서 치열한 공중전이 일어나고 폭격을 당했으며 영국 본토 항공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공격당했다. 비단 V1, 2뿐만 아니라 본토 항공전 이후에도 산발적으로 독일 폭격기들이 아직도 영국을 폭격을 통해서 좌절시킬 수 있다는 히틀러의 집착 때문에 런던 공습을 나섰다. 심지어 항복하기 직전까지도 제트 폭격기인 Ar 234를 영국 상공에 날려보내기도 했으니...독일은 가장 심한 폭격을 당했으며, 드레스덴 폭격과 같은 무시무시한 폭격을 당한 끝에 전국토가 잿더미가 되었다.

중국을 폭격한 일본도 역지사지로 전국토가 불바다로 변했으며 도쿄를 비롯한 대도시를 포함해서 중소도시까지 모두 타버렸다. 처음에 둘리틀 특공대도 있었지만 일본인 전체에 충격을 줬다기 보단 대본영에 충격을 주었다고 보는게 옳다. 애초에 이들이 몰고갔던 건 중형 폭격기라 피해를 크게 줄 수도 없었으니...당시 일본인들 반응은 "어떻게 미국이 천황폐하가 계신 곳에 폭격을 가한단 말인가?"라고 의아해 하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카더라. 때문에 이 공습은 가만히 잘 있었는데 도심에 폭격을 가한 귀축영미를 주제로 역으로 일본의 피해자 드립의 좋은 떡밥.

2.2. 작전 내용

1945년 3월 9일에서 10일 새벽, 사이판과 티니안섬에서 약 344기의 B-29 슈퍼 포트리스 폭격기를 출격, 기존의 고고도 폭격 전술 대신 5000피트(약 1.5km)의 저공에서 폭격기 1대당 7톤씩, 총 2,400여톤의 소이탄(네이팜탄)을 도쿄에 떨어뜨려 일본의 수도인 도쿄의 기능을 완전 마비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조금이라도 비행기 무게를 줄여 비행속도를 높이고 폭탄적재량을 늘리기 위해 폭격기 후방 기총을 제외한 모든 방어기총과 탄약을 제거한 후, 로버트 K. 모건 대위[4]의 지휘 하에 폭격에 나섰다. 전략적으로는 일본 수뇌부에게 "당장 무조건 항복하셈!"이라는 압박 외에도 몇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 일본 국민의 동요: 폭탄을 퍼부은 미국 측에선 죽창 운운하던 최후 항전 이야기 때문에 사실 별 기대는 안했다고 하는데, 일본쪽의 기록에 따르면 대단한 동요를 가져온 모양이다. 일본 국민들에게는 진주만 공습, 난징 대학살, 이오지마 전투, 동남아에서의 일본 육군의 몰살 등등의 이야기는 그냥 '전쟁터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음' 정도로 남일처럼 취급되었고 이오지마 전투 전까지만 해도 전쟁을 하는 국가 같지가 않았으나, 폭격 이후로 국민들이 '전쟁'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핵 투하와 함께 대부분의 일본 국민들이 기억하는 '일본이 했던 전쟁'의 이미지로 남게 된다.[5] 이후 미군의 일본 도시에 대한 전략폭격이 본격화된 시기에, 이른바 전쟁에 나간 아들이 덴노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명문가의 어르신들도 정작 대공습이 시작되자 폭격을 피해 다 시골로 튀었다. 입전쟁의 말로 덴노를 위해 폭격맞아 죽는건 전사가 아니니 자랑스럽지 않다 이건가

  • 큐슈 상륙작전(올림픽 작전) 시행을 위한 준비: 큐슈 상륙 전에 이와 같은 네이팜 폭격과 상륙지에 대한 핵 투하가 예정되어 있었다. 미군이 투입될 상륙작전지에 핵을 사용하려 한 것은 그 당시 방사능의 위험을 맥아더 장군을 포함한 장성들과 과학자들이 과소평가했던 것도 있다.

  • 큐슈 상륙작전, 더 나아가 몰락 작전 전체의 당위성 무효화: 위와는 완전히 대치되어보이지만, 작전을 입안한 커티스 르메이는 제21폭격기 사령부 발령 당시 상관인 노스태드 중장으로부터 "몰락 작전이 실행되는 (그리고 백만명 이상의 미군 장병이 죽고 다치는) 꼴을 막고 싶다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일본의 공업 능력을 무력화시켜라"는 지침을 받았다.[6] 이는 아군 인명피해를 최소화시키려고 노력했던 르메이에게 던지는 떡밥이었다. 그 떡밥을 문 방식은 아래에서 자세히 설명된다.

  • 군 시설과 군수품 공장의 괴멸: 이미 도쿄는 관동 대지진으로 박살난 뒤 재건되었는데,누가 재건 계획을 세웠는지는 모르나 시가지에 민간인 거주지와 군사시설이 무분별하게 뒤섞여 있었다!
    이렇게 무질서한 도시계획이 진행된 이유는 미약한 산업기반에서 군국주의로 진화한 일본의 상황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대형 공장과 최신 산업설비를 갖출 능력이 없이 수공업 따위에만 의지하니 주택가와 공장이 섞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7][8] 일본 쪽의 기록에 따르면 그 이전까지의 고고도 폭격으로도 꾸준히 피해를 입어왔지만, 미군 수뇌부에서는 전투기 등의 병기 생산 능력 상실을 요구해왔다.[9] 아래에서도 언급하지만 커티스 르메이가 "사실 저 밑의 곤도네는 군용 볼트를, 옆집 스즈키네는 군용 너트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고 말한 것이 순전히 개드립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등이 거론되었다.

작전강행 당시, 미군이 전선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제공권을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기에 대대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철저한 준비 속에 이루어져 폭격의 성과는 더욱 컸다.

2.3. 작전의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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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간 동안 도쿄 상공에 뿌려진 8500발의 E-46 네이팜탄 확산탄은 50만개 M-69의 네이팜 자탄, 총 1700톤의 네이팜을 투하해 거대한 화염 폭풍을 일으켰다. 그 결과 도쿄의 기능을 완전히 마비시켰으며 일본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83,793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40,918명이 중상, 100만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를 합치면 피해자가 약 20만에 달하는 원폭 이상의 피해를 가져왔다. 이로 인하여, 종전직후의 도쿄 인구수가 진주만공습이 발발하기 직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관동 대지진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입어 계획도시로 복구한 일본제국의 수도 도쿄는 이 작전으로 석기 시대로 회귀 다시 잿더미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도쿄에서 과거 에도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오늘날 사이타마현의 카와고에시는 옛날 에도 분위기의 길거리가 보존된 것으로 유명한데 원조 에도인 도쿄에는 이런 곳이 거의 하나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2.4. 네이팜탄(소이탄)이 사용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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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이탄이 공중작렬해서 뿌려지는 모습.

네이팜탄을 쓴 이유는 일본의 가옥의 90%이상이 목재로 지은 목조 건축물이었기 때문. 이는 쑥 재배를 상당히 좋아하는 누군가 작정하고 방화하면 목재건물은 초토화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실제로 도쿄에 퍼부어진 네이팜탄으로 인해 가옥 대부분이 전소되었고 대량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의 건축물이 주로 목재라는 것은 빌리 미첼 준장이 1924년에 일본의 장차 전쟁 수행 능력을 평가하면서 작성한 보고서에서도 강조되었던 부분이고, 더군다나 드레스덴 폭격의 참상을 통해 소이탄의 위력을 폭격기 승무원을 비롯한 육군 항공대 전체에서 이미 알고 있었던 시점이기 때문에 민간인 피해가 엄청나게 발생할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사실을 무릅쓰고 소이탄이 실제로 투입된 이유는 세가지였다.

첫번째는 몰락 작전의 실행이 1년 이내로 가까워져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략 폭격으로도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을 꺾지 못하면 결국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일본 본토를 직접 침공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고, 그렇게 되면 아무리 피해를 적게 추정해도 최소한 50만명 이상의 미군 장병이 죽고 다칠 것이라는 점은 자명했다. 일본의 민간인을 전쟁 수행원으로 간주하여 민간인 피해에 개의치 않았던 커티스 르메이조차도 휘하 장병들의 목숨은 매우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몰락 작전을 수행할 필요가 없도록 압도적인 화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일찍 끝내야 민간인도 덜 죽고 미국 장병도 무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점은 르메이를 제21폭격기 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시킨 노스태드 중장이 르메이에게 전달한 지침이기도 했다.

두번째로, 당시 미군 폭격기가 수행하던 고고도 폭격으로는 폭격의 정확성을 보장할 수 없었다. B-17로 비교적 저고도에서 폭격을 가했고 기류가 평온했던 유럽에서 먹혔던 방식 그대로 고도만 높여서 폭격을 해보려고 하였지만 일본 상공에서 불어오는 제트기류 때문에 재래식 고폭탄의 명중률이 시망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르메이는 제트기류를 피해 저공으로 폭격을 가하고, 이왕 저공으로 폭격을 가할 것 같으면 좀 더 광범위한 범위에 석기시대 테마파크를 만들자 피해를 입힐 목적으로 네이팜탄을 선택한 것이다. 이는 중일전쟁 진행 중 일본군의 중국 도시 폭격 방법에 영감을 얻은 것. 한마디로 지들이 쓴 방식에 똑같이 당했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소이탄의 파괴력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다. 당장 유럽전선에서 석조 건축물 위주였던 드레스덴에 가해진 드레스덴 폭격에서도 발군의 파괴력을 보여준게 소이탄이었다. 소이탄 앞에서는 건물이 목조냐 석조냐가 문제가 아니었던것(...).

폭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남긴 증언에 따르면 화재현장의 열기로 인해, 가까이만 가도 간접화상을 입거나 옷이 불타오를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네이팜탄의 조합에 사용된 오일이 불이 붙은 채 하천과 바다로 흘러들어 강과 바다에서도 불이 붙었다고 한다. 참고로 네이팜탄은 대충 설명하자면 기름에 다른 물질(원래는 고무같은것을 쓰다가 고무가 비싸고 부족하다보니 대체품으로 만든게 네이팜가루)을 혼합해서 점성을 높여서 잘 들러붙어서 오래타게 만든 혼합물이다. 애초에 주제료인 기름이 물과 섞일 리도 없으니 강에서도 불이 붙어오르는 것이다. 물론, 소량의 네이팜이 물과 접촉하면 결국 불이 꺼지기는 하지만, 워낙에 많은 양이 물을 뒤덮어 버린다면 또 다른 이야기. 게다가 물만 뒤덮은 게 아니라 주변까지 전부 불바다인 상황이므로 이건 뭐...

민간인들은 상식적으로 불은 물에 약하니까 물로 도망치자!! 하면서 모두 동네, 또는 주변 개천 등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필사의 질주 후 사람들은 물에 들어온 이상 불이 붙을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 긴장이 풀려 탈진을 하기 시작해 그냥 물에 떠있었는데 네이팜은 용암 흐르듯 흘러들어올 뿐이고...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흘러들어오지는 않았는데 강 양쪽 대안이 죄다 불타오르는 바람에 강물이 말 그대로 끓어올라 버려 강물은 말 그대로 인간탕이 되어버리고 강물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사람들도 증기에 질식사하거나 심한 화상을 입었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 그냥 서있으면 불타죽고 물에 뛰어들면 물 속에서 산채로 삶아져 죽고 건물에 들어가면 타오르면서 죽고 했다는 말씀. 지하로 파고 들어가면? 웬만한 지하는 그대로 초고온 찜질방을 만들어버리면서 산채로 쪄죽는다. 드레스덴에서 소이탄에 희생된 사람들 상당수가 이랬다. 이건 뭐 도저히 살아남을 방법이 없다...

2.5. 이후의 공습

도쿄 대공습이 최초, 최대 규모의 폭격이라 가장 유명하지만 일본에 대한 공중 폭격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특히 도쿄가 불탄 후 나고야, 오사카, 고베 등 일본의 주요 공업 도시들이 단 1주일 만에 폭격으로 모조리 불타 버렸는데, 이중에서 3월 13~14일에 이뤄진 오사카 공습이 절정이었다. 일본 제2의 도시이자, 최대의 상공업 거점 도시이었던 오사카를 미군이 놓칠리 없었고, 274대의 폭격기를 동원해 1,700여 톤의 소이탄을 퍼부어 오사카 항구를 포함해 약 20km2의 시가지를 파괴했다. 이 당시 오사카 성도 완파당했다.[10] 당시 가옥 13만 여채가 완파되었지만 도쿄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소방 방재가 잘 이루어져서 인명피해는 사망자 4,000여명, 행방불명자 500여명으로 도쿄에 비해선 적은 편이었다고 한다. 이 때 일어난 에피소드 중 하나가 있다. 폭탄이 오사카의 육군 병기창에 명중, 대폭발을 일으켜서 2,000m 상공을 비행하던 폭격기를 고도 3,600m까지 날려버린(!) 일이 있었다. 이후 실속 상태에 빠져 하강했으나 다행히 조종사가 상황을 수습, 600m 고도에서 정상 비행을 수행했다고 한다.

이렇게 순식간에 여러 도시에 폭격을 쏟아낸 이유는 일본측 대공망이 B-29의 저공 비행에 대한 대응 방안을 모색하기 전에 공업 생산 역량을 최대한 무력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어찌나 폭격을 퍼부어댔는지, 약 1주일 후인 3월 19일에 마지막으로 나고야를 폭격한 뒤에는 잠시 폭격을 멈춰야 했다. 장병들에게 휴식 시간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쌓여있던 소이탄 물량을 전부 소진했기 때문이었다.

이 작전을 주도한 커티스 르메이 소장은 투하 직전 민간인 공습으로 양심에 가책을 느낀 일부 병사들을 비웃으면서 "사실 저 밑에 곤도네는 군용 볼트를, 옆집 스즈키네는 군용 너트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라는 말로 공습을 합리화시켰다고 한다.[11] 참고로 이 아저씨는 미 육군항공대(공군으로 분리되기 이전 미 공군의 명칭) 내에서도 소문난 폭격기 덕후. 나중에는 전략공군(Strategic Air Command)의 사령관이 되는데, 이 아저씨가 베트남전 당시 내뱉은 유명한 말이 바로 "저놈들을 석기시대로 돌려놓겠다!"(…). 참고로 쿠바 미사일 사태를 다룬 영화 D-13에서 케네디 말을 안 듣고 폭격 주장하다가 욕먹는 공군 장성이 바로 이 사람이다. 물론 이 사람만 그런건 아니지만...

그리고 이러한 주장 덕분에 공식적으로 미국의 공습으로 인한 학살은 존재하지 않는다. 편법이라면 편법이긴 한데 당시에 적용되던 전시 국제법상으로도 위법은 아닌 상황이었다. 방어되고 있는 군수공장과 그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집을 박살내버리는데 그런군수공장과 노동자주거지를 민간인 주거지에 혼합해서 자국 민간인을 인간방패로 쓴 일본때문에 순수 민간인 희생이 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덧붙이면 저 발언은 폭격 당시 미군 장성들의 실제 관점이기도 하다. 당시 일본의 공업지대는 산업혁명 당시의 영국처럼 거주지대와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게 계획도시야? 위 문단에서 커티스 르 메이가 했던 말도 과장이 섞여있기는 했어도 틀린 말도 아니었던 것이다. 특히 파괴전까지 항공기를 계속 생산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던 일본의 항공기 생산 공장들이 미군 장성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고. 아이러니하게도, 종전 후 르메이는 일본 항공자위대 활성에 큰 공로(?)를 세워 훈장[12]을 수여받는다.

덧붙여서, 이전까지의 '미군이 평가하기에는' 별 효과가 없었던(일본군의 관점에서는 "고고도 폭격기를 격추할 수 없어!"라며 좌절한 전투기 파일럿이 적지 않았다지만) 일반 폭탄을 이용한 고고도 수평 폭격 대신 미군의 공습에서 '실질적인 성과'를 냈던 기념비적인(?) 사건이며, 그 당시까지 지지부진하던 미 공군의 독립(르메이 등이 주장)과 관련한 논의가 급진전되는 계기가 된다.

여러모로 윌리엄 테쿰세 셔먼이 남북전쟁 당시 실시했던 셔먼의 바다로의 진군(Sherman's March to the sea)"과 유사하다.

그리고 이렇게 일본 전역이 개박살 나는 와중에도 이상할 정도로 폭격을 안맞는 도시들이 있었는데 교토, 니가타, 고쿠라, 그리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였다

2.6. 사족 : 경성(서울)에 끼친 영향

도쿄 대공습 같은 대규모 폭격시 목조주택이 많은 일본 대도시 특성상 일부 지역의 폭격만으로도 화재가 도시 전체로 번지는 일이 많았다. 따라서 폭격을 당해도 해당 지역만 화재가 일어나고 화재가 도시 전체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도시 내부에 대규모 소개지역(마치 도로처럼 줄 모양으로 특정지역을 비워놓는 것)을 만들게 된다.

이는 일본 열도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의 식민지배하에 있었던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경성부 중심가에도 이러한 지역을 만들게 된다. 대표적인 곳이 현재 종묘앞에서 퇴계로까지의 남북 구간과 동대문운동장에서 서울역까지의 동서 구간이다.

이 남북 구간은 해방 후 그냥 빈 땅으로 있었지만 집 없는 사람들이 움막을 치고 살던가 노점을 하던가 했는데 훗날 이 지역을 일제시대 계획 취지대로 방재구간(화재가 번지지 않게 만든 공지)으로 둘 것인가 건물을 세워 재개발 할 것인가 의견이 맞서다가 결국 두 가지 다 하기로 결정, 세운상가로 개발된다. 현재의 종로 세운상가에서부터 진양상가가 들어선 곳이다.

동서 구간은 해방 이후 도로포장을 하여 도로로 사용했는데, 이것이 오늘의 퇴계로다. 일제시대 전쟁 전 경성부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퇴계로에 해당되는 도로는 없었다. 대신 오늘날 충무로라고 부르는 도로는 있었다. 왕복 6차로인 퇴계로 한 블럭 뒤에 있는 왕복 2차로짜리 도로이다.

시기가 전쟁중인 시기에다가 장소가 식민지 도시인 만큼 철거지역 건물주에게는 단 한푼의 보상도 없이 정부시책이라고 그냥 내쫒았다고 한다. 뭐 일본군항목을 보면 이런걸 보상할 작자들이 절대 아니지만...

3. 도쿄 대공습에 대한 반응

첫타자로 도쿄가 얻어맞은 탓에 가장 대규모의 피해가 있었고, 덕분에 그 수많은 폭격 중에서도 소이탄 폭격중에서도 도쿄대공습이 지금까지 회자된다.

3.1. 일본: 피해자 행세의 주요 레퍼토리

훗날 도쿄 토박이 주민들이(일부 생존자들) 한숨을 쉬면서 그날, 또는 그 3월의 어느 날이라고 부르며 몸서리 칠 정도로 매우 끔찍한 사건으로 회상한다고 한다.

일부 일본 우익들은 이 폭격을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와 함께 '미국이 저지른 대학살'이라면서 미국을 까기도 하고, 일본 안에서 미국을 비난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 십만 단위의 민간인 피해자가 발생했으니 틀린 주장은 아니지만 일본 때문에 중국과 한국, 동남아에서 죽은 희생자는 천만 단위를 가볍게 넘어간다. 추산치 대략 2,500만명. 미국이 폭격으로 죽인 일본 민간인이 대략 25만으로 추산되니 약 백배. 정작 그런 주장을 하는 일본 우익들은 식민지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학살과 만행을 부정하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심지어 일본군은 자국민들까지도 학살한 바 있다. 사이판 전투, 오키나와 전투 등에서 일본인 민간인들을 죽게 만든 게 누구인지 관련 링크를 따라가 보자. 더 심각한건 일본 군부의 세뇌정책도 일조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류큐는 자국민이 아니잖아...

무엇보다 일본도 중일전쟁때 중국에게 소이탄을 꽤 많이 퍼부었다(...). 물론 언제나 그랬듯 일본 우익들은 이 점에 대해선 침묵한다.

1995년에 종전 5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에서 일본인은 원폭 피해자라고 병맛 시위를 일본에서 하던 시위대에게 한국 기자가 미국가서 뉴욕 거리나 워싱턴 거리에서 이런 시위를 하라고 하자 일본인들은 별 말도 못하고 그냥 가버렸다. 대신 일본계 2세, 3세들이 비슷한 시위를 벌였으나 미국에서도 되려 일본에 대한 반감이 커진다는 우려와 같이 일본계로서 나치와 전투에 참여한 노병들이 극구 말리는 통에 죄다 취소되었던 적도 있다.

그리고 이런 시위 벌이다간(정확히는 일본 극우들이 종군 위안부는 미군도 있었다고 개드립치다가) 미국 극우 기분을 상하게 하면서 되려 종군위안부 미 하원 결의안 통과도 벌어지듯이 일본이 실컷 보복당한다. 그렇다고 지금의 미국에게 대들 일본도 아니니.

그런데 2013년 5월 7일, 똘끼 넘치는 아베 정권은 도쿄대공습은 인도주의와 부합하지 않는다일본제국은 그렇게 전쟁도 인도적으로 하고(카미카제, 신요), 적국 도시를 점령해도 민간인은 인도적으로 대해줬고(난징대학살) 탐구, 실험도 인도적으로 했는데(731부대) 그런 비인도적인 처사를 당했다니 며 미국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버블경제 시절에도 당했는데 이젠 또 무슨 보복을 당하려고 그런데 한참 일본 경제가 잘 나갈 시절, 이제는 천조국에 큰소리좀 처야겠다고 주장하는 책,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시리즈의 책이 히트친 적이 있었다. 지은이는 이시하라 신타로[13]. 물론 그때 이후 일본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다들 알고 있을 듯.

3.2. 미국

어찌됐든 미국은 콧방귀도 안 뀐다.

당시의 일본에는 민간인 거주지와 군수공장이 뒤섞여 있어서 그 당시의 기술로는 둘을 구분해서 공격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지금처럼 정찰 위성이나 토마호크 미사일이나 엑스칼리버 포탄 같은 정밀 타격 무기가 있던 것도 아닌 상황이라, 둘을 구분해서 군수 공장만 폭격하려고 계속 고고도 정밀 폭격을 주장했던 핸셀 소장(Haywood S. Hansell)은 결국 기술력의 한계에 부딫히고 시간만 보내다가 르메이에게 폭격단 사령관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14][15] 물론 일본인들은 핸셀의 이런 노력에 대해서는 당연히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공격하지 않는다면, 거기서 미군을 죽일 무기들이 무더기로 생산될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미군이 그걸 구경만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미군으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셈이다. 거기에다 총력전의 개념으로 본다면 일본에는 선량한 국민같은거 없이 오로지 '전쟁 수행원'만이 있었을 뿐이다.

2차 세계대전은 너나 할것없이 총력전이었고, 미국의 국민들도 상당수가 전쟁 수행원 역할을 했다. 일본 우익들은 그저 자국의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 이기적이고 편협한 자기들의 보상심리를 위해 떼를 쓰듯이 미국에 항의하고 있는것 뿐이지 '군수공장이 포함된 도시를 파괴할 것'을 전제로 한 도쿄 대공습은 당시 상황에선 당연한 작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입장을 뒤바꿔, 설령 일본이 대규모 폭격기 편대를 구성해 미국의 군수공장이 포함된 도시를 폭격한다 하더라도 일본의 이 폭격을 가리켜 학살이라고 비난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 도시의 국민들 중에는 군수공장의 노동자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핸셀이 주장했던 식의 정밀 폭격 시도가 계속되다가 지지부진했을 경우, 미군은 몰락 작전을 통해 일본 본토를 침공하여 일본어를 지옥에서나 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만들어버렸을 것이다. 물론 미군도 수십만명, 심하게는 수백만명의 귀한 미군 장병이 희생당할 판이니 병사는 병사대로 희생시키고 미군은 총옥쇄를 부르짖는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악마화되는[16], 사실상 최악의 시나리오로 치달았을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커티스 르메이를 비롯한 육군 항공단은 이런 사태를 막자는 취지로 소이탄 사용을 결정한 것이다.

3.3. 다른 나라

일본 제국의 침략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한국과 중국 등의 나라들은 당연히 이 공습을 정당하게 여긴다.TOKYO HOT! 그간 수십년에 걸쳐 일제가 참혹하게 살해한 아시아인이 얼마나 되는지는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당시 한국인들은 이 처참한 소식을 듣고 우리도 폭격을 당할 지 모른다며 걱정하기도 했으나 조금이라도 국제 정세를 아는 사람들은 미국은 절대로 조선은 폭격하지 않는다며 안심시켰다고 한다. 다만, 한국에 대한 공습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어서 함흥, 원산, 부산, 대구 등지에 소규모의 폭격이 있었다. 그래도 도쿄 대공습과 같은 초토화 공습은 아니었고, 산업 및 군사시설, 철도역 등에 대한 정밀폭격이 주를 이루었고 폭격빈도나 규모도 일본 본토에 비교할 바가 안되었다.

특히 중국은 도쿄 대공습에 대해 전혀 유감을 표하지 않는데, 중국 또한 일본으로부터 충칭 대공습을 당한 바 있기 때문에. 국민당 정부가 충칭을 임시수도로 정하자 일본은 충칭을 집중 폭격하는데, 민간인 거주구역을 구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소이탄도 사용했다.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수많은 민간인들이 방공호를 찾아가다가 피격 혹은 질식해서 사망했으며, 방공호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 1200명이 질식사한 사건도 벌어졌다고.
물론 이에 대하여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충칭에 면한 쓰촨 성 또한 여기저기에 폭격을 당한 기억이 강렬히 남아 있는 데다 반일감정이 고조되고 있는 관계로 최근에는 일본인 관광객은 그림자도 볼 수 없다(...).

4. 대중매체에서의 도쿄 대공습

  • 애니메이션 여름의 폭풍!에서도 주인공들이 과거로 날아가 겪는 주요사건들이 모두 도쿄 대공습과 관련된 것들이다.

  • 애니메이션 반딧불의 묘에서 이를 다루었다. 다만 일본을 피해자로만 다루었다는 이유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 영화 언브로큰에도 나온다. 이쪽은 실화. 도쿄 대공습날 주인공과 포로들은 수용소 불끄기에 강제동원. 이때 이거 우리가 왜꺼야 하나? 타버리게 나두자는 말까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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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참고로 이 표현은 말이 많은데, 고인드립이니 뭐니 해서 지워지면 '고인드립은 무슨! 저들이 이때까지 한 짓을 생각하라고!'라고 하며 복구되기를 반복한다. 게다가 저 표현이 워낙 저 사진과 싱크로율이 높아서(...)
  • [2] 더욱이 이게 중일전쟁에서 한 짓을 벤치마킹했음을 생각하면 자업자득이다.
  • [3] 미국이 원자폭탄을 쓰기로 한 원인 중 하나가 이것 때문이기도 하다.
  • [4] 이 사람은 유명한 B-17기인 멤피스 벨의 파일럿이다. 멤피스 벨이 유럽 전선에서 물러난 후 B-29의 조종간을 잡은 것.
  • [5]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더라도 외계인 침략자들은 일단 닥치고 도시를 때려부수기 시작한다.(...)
  • [6] Kozak, W., LeMay: The Life and Wars of General Curtis LeMay, 2009
  • [7] 이러한 흔적은 서울에도 남아있는데, 을지로 5가에 있는 주한미군 공병대가 일제시대 일본군 병영을 그대로 쓰고 있다. 다른 사례를 들자면 을지로 한복판의 공구상가나 소규모 영세공장들과 주택들이 마구 뒤섞인 독산동 같은 곳들을 생각하면 쉽다.
  • [8] "... 1944년 즈음에는 일본의 전쟁 경제에서 가내수공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거의 없어짐. 하지만 부품과 장비의 상당부분은 직원 250명 이하인 소규모 공장에 하청을 맡기는 식으로 조달하였음. 이런 소규모 공장은 도쿄에 밀집되어 도시 전체 공업 생산량의 50% 가량을 차지하였음." United States Stategic Bombing Survey, 1946, p. 87. 표준화와 대량 생산 분야에서 한참 앞서있던 미국 입장에서 250명 규모 공장이면 사실상 가내수공업이나 다름없게 보였을 것이다.
  • [9] 르메이가 발령받기 전에도 계속 네이팜탄 보급이 은연중에 계속되서, 그가 발령될때 쯤 병기창에 천톤 가량의 네이팜탄이 쌓여있었다. 미국 공군의 아버지격 되는 빌리 미첼(William "Billy" Mitchell) 준장 역시 장차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을 예상 보고서에 일본의 건물이 대체로 목조 건물이란 점을 강조하고 소이탄 공격의 가능성을 거론한 적이 있다. 르메이 이전의 사령관인 핸셀 소장은 정밀 폭격의 성과가 지지부진하다는 이유로 잘려나가기까지 했다. 이 쯤 되면 소이탄 투하를 생각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환경일 것이다.
  • [10] 하지만 오사카 성은 이미 19세기에 벼락으로 천수각이 완파되어 1931년에 철근 콘크리트로 복구된 것이었다. 부서져도 안심(?).
  • [11] 근데 아주 틀린말도 아닌게 당시 도쿄는 군사시설과 민간시설이 뒤죽박죽 섞여있었다. 한마디로 군사시설만 파괴하는건 애초부터 불가능했다는것.
  • [12] 욱일대수장
  • [13] 혼자 집필한 것은 아니고 시리즈마다 공동저자가 있다. 소니 전 사장인 리타 아키오, 문예평론가 에토 준 같은이가 공저자.
  • [14]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던 르메이는 절대로 핸셀 소장에 대해 성과를 내지 못했다느니 하는 험담을 하지 않았다. (Kozak, 2009)
  • [15] 사실 토마호크 미사일이나 F-117의 레이저 유도 포탄 등 정밀 타격 무기는 핸셀 소장의 주장과 노력을 현대 기술로 구현한 것에 가깝다. 민간인 오폭의 정치적/외교적 악영향이 2차대전 때보다 엄청나게 커진데 따른 운용 교리의 변화이다. 사실 최첨단 장비로 정밀 타격이 가능한 21세기 초기인 지금도 100% 민간인 피해 없는 작전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물며 전세계가 총력전을 펼치던 WW2 때야 포기하지 않는 일본 군수공장이라는 급한불을 꺼야했으니...~~
  • [16] 그런데 이는 당시 일본은 거의 모든나라를 적국으로 두었고 그런 전투후엔 사실상 인구도 대다수가 죽어서 나라꼴이 막장인데다가 한반도도 미국이나 소련이 한쪽에서 완전히 점령할 가능성이 높기때문에 한국전쟁도 안일어날테고 결국 미군을 욕할 나라 자체가 안남았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