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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last modified: 2019-05-21 18:26:13 Contributors

Contents

1. 그릇의 종류
2. 네이버 웹툰
3. KBS 스페셜
4. 판타지 갤러리의 용어

1. 그릇의 종류


China. 진흙으로 빚어서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그릇의 총칭. 라믹이라는 신소재로 다시 각광받고 있으며, 순수 재료는 다르지만 제작 방식은 도자기와 닮았다.

예로부터 쓰인 재질로 , 접시, 화분 등을 만들 때 많이 쓴다. 인체에 무해하고 방수성을 가지면서 높은 경도를 지니고 있고 만들 때 모양내기가 쉽다다. 충격에 약해 잘 깨지지만 이것도 제품마다 달라 어느 정도 높이에서 떨어져도 금도 안가는 제품도 있다.

한때 중국이 서양 등을 상대로 거래한 주요 물품. 실크로드나 배를 통해 자주 운송되었으며[1] 유럽에서는 이게 귀해, 연금술사가 도자기를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말에 왕이 그 자리에서 스카웃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중국의 백자를 수입하지 않고 자체 생산하려는 노력 끝에 유럽에서는 차이나라는 동물의 뼈를 이용해 하얀색을 극대화한 도자기가 나왔다. 중국이나 한국의 백자가 약간 창백한 백색을 띤 데 반해 본차이나는 우윳빛같은 특유의 부드러운 질감이 특징이다. 기원이 기원이니만큼, 중국제를 최고로 치는 몇 안되는 물건 중 하나.

한국에는 고려청자, 분청사기, 그리고 선백자가 있다. 고려청자는 한때 기술이 끊겼으나 현재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높은 온도를 만드는 기술은 아주 중요한데, 800~1,000℃의 흙그릇을 "도기" 1,100~1,400℃에서 만드는 것을 "자기"라고 하고 합쳐서 도자기라고 한다. 그리고 1,000℃ 내외에서 자기가 되는 온도에 도달하지 못한 발전중간형 그릇을 석기 (stoneware , 炻器 돌로 만든 그릇이 아님)라고 한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청자는 필연적으로 백자로 발전하게 되어 있다. 이를테면 기술적인 면에서는 백자는 청자의 발전형이다. 조선 백자의 예술은 고려청자에 뒤지지 않으며 백자를 만드는 백토가 청자의 원료인 태토보다 입자가 훨씬 고운데다가 불순물이 섞이면 작품이 안 나온다. 색이야 청자가 더 화려하지만 자기는 색이 전부가 아니다.

백자는 재료부터 제약이 있다. 백자는 양질의 고령토로 만들어야 한다. "고령"이라는 명칭은 중국에 있는 도자기의 총본산인 "고령산 (kaolin)"에서 왔다. 청자는 약간의 불순물을 포함하는 것이고, 백자를 만들자면 불순물을 완전히 제거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온도면에서도 청자는 철의 제련온도인 1,100℃ 이상의 온도[2]를 유지할 수 있는 기술이면 만들 수 있지만 백자는 최고 1,400℃ 이상까지 온도를 올릴 수 있어야 한다.

구현하기 어려운 색이 제법 되는데, 경매로 올라서 최고가를 경신한 조선백자는 그 가치가 백자에 그려진 붉은 꽃에 있었다. 붉은 색은 진사라고 부르는 주사로 그려내는데 높은 온도에서 변색되지 않고 붉은 색을 만드는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며 자칫하면 담황색, 암록색, 암흑색으로 변화한다.

통일신라 전까지 한국의 도자기 기술은 조악한 수준이었다. 통일신라 말기부터 중국에 혼란기가 계속되면서 도공들도 망명하였고 이덕에 도자기 기술이 전래되면서 고려시대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 특히 10~11세기에서는 송으로부터 다양한 제조기법이 소개되었고, 고려도공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독특한 고려자기를 만들어 냈다.

그런데 중국의 도자기는 북방식의 백자와 남방식의 청자로 나누어져 있었다. 당시의 백자는 현재의 완전한 형태는 아니었다.

당나라 이후로 송나라 대까지 당시 귀족들은 백자와 청자를 두루 사용하였다. 그런데 송 휘종이 "황제의 그릇은 청자로 하라"고 명령하게 되자 청자의 대유행이 시작되었고, 송의 귀족들은 청자를 애호하게 된다. 또한 북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강남으로 쫓겨나면서 남방식 청자가 우세하게 된 이유도 있다. 고려도 이에 영향을 받아 청자에 기울어지게 된다. 참고로 서해에서 발견되는 도자기 운반선의 경우 실려있는 도자기의 대부분은 송 청자이다.

그런데 원나라가 세계를 제패하면서 유행에 변화가 온다. 원은 세계제국으로 원 황제의 통행증만 보유하면 콘스탄티노플에서 베이징까지 안전하게 교역을 할 수 있는 시대였다. 참고로 중국과 마주보고 있는 황해 연안의 상업도시에는 상인 출신 이슬람인들이 오늘날의 시장으로 임명된 사례가 비일비재할 정도었다.

전통적으로 우유와 양모를 귀하게 여기는 몽고족은 백색을 좋아했다. 게다가 원의 수도가 북방에 있는 관계로 북방식 백자가 우세하게 되었고 이때에 이르러 중국의 백자는 기술적으로 완성되게 된다. 그리고 원황제가 황제의 그릇은 청자가 아닌 백자로 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유행은 완전히 기울게 된다.

세계적으로도 이슬람인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백색을 좋아했고, 서구의 기독교 제국들도 기독교적 교리 때문에 백색을 숭상하는 편이었다. 따라서 국제무역에서도 백자의 단연 우세였다.

원대에 고려는 북방식 가마기법이 본격적으로 소개되어서 기술적으로 크게 진보하게 되었으나 14세기 나라가 혼란해지면서 분청사기 형태의 청자만이 만들어지게 된다. 고려 말기는 역사에서도 막장 중의 막장으로 주요 도자기 산지이던 남해안이 왜구들에게 초토화된 결과로 양질의 고령토를 얻을 수가 없었던 이유도 있다. 결국 완성된 형태의 백자가 제작되기 시작한것은 15세기 조선조였다. 그 후 조선의 도자기 기술은 급발전하게 되고 18세기까지 절정을 이루나, 19세기가 되고 세도정치 시기가 닥쳐오면서 정체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경우, 13세기에 중국인 귀화 도공들이 만든 도자기 가마들이 있고, 자체적으로도 생산을 했지만 중국이나 조선에 비해 품질과 디자인에서 확연히 밀렸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잡아서 본토로 데려온 조선의 도자기 장인들을 통해서 도자기 제조기술이 뛰어 올랐으며 오래된 가마터에는 조선인들이 남긴 흔적이나 조선인들의 후손들이 사는 경우가 있다.

도쿠가와 정권으로 바뀐 후 사절을 통해 포로 송환협정이 진행되었음에도 이들만은 돌려보내지 않으려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대접을 워낙 잘해줘서 그들 스스로가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십만명 단위의 장정을 잃어 (이들이 가장 핵심적인 경제 활동 인구인지라 만회가 쉽지 않음) 납치한 조선인을 돌려보내면 안돼는 입장이었고, 돌려보내지 않기 위한 기본 중의 기본이 바로 납치된 자들이 귀환을 바라지 않는다고 우기는 것이었다. 덤으로 그 때 일본의 다이묘들은 납치한 조선인들을 가두고 숨기고 매수하는 등 온갖 짓을 다해가며 돌려보내지 않으려고 버텼다.

그리고 일본이 도공들을 잘 우대해줬다는 주장의 근거로 제시되는 것중 하나가 도자기에 장인의 이름을 쓰게 했다는 것인데, 이는 장인들을 브랜드 제작자로 인정해줘서 그랬다는 지나치게 현대 중심적인 주장이며, 이미 조선시대에도 도자기에 이름을 쓰게 하는 제도가 있었다. 거기에 이렇게 이름을 쓰게 한 것도 브랜드 가치 때문이 아니라, 품질이 저하될 때 책임질 사람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은 진정한 재일교포 1세대로 흔히 여겨지고 있는데 도쿠가와 막부는 이들이 만든 자기를 내국 생산제품과 구분해서 이도다완이라는 이름을 붙여 판매했는지라 귀화를 불허했고, 자기생산 이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없었으며 거주지를 바꿀 수 없게 제한했다. 다만, 각 계층에 대한 엄격한 사회적 통제를 가한 에도 막부의 특성상 딱히 조선 도공들만 이런 불이익을 받은 것은 아니다.

도자기 제작 기술이 뒤졌던 전국시대에는 차를 따르는데 쓰던 다기 하나하나가 부르는 게 값이었고, 그중에는 성 하나 값에 맞먹는 것도 있었다.[3] 지배층에 다도 문화가 도입되면서 차를 마시는 것이 최고급 문화 향유로 인식되었고, 당연히 여기에 사용되는 각종 기물들 역시 값이 뛰는 것이 당연했다. 이런 데에 나무 잔 같은 평범한 물건을 쓴다는 것은 최고급 호텔 파티에 초대해놓고 튀긴 청어 몇 조각 대접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초기에는 제대로 된 태토가 아닌 거친 진흙에 유약도 아닌 잿물을 발라 구운 수준의 싸구려도 최고급 자기로 치기도 했다. 다완이라고 하여 귀하게 여기던 그릇은, 본래 조선의 서민들이 사용하던 사발[4] 이나 그 정도 수준의 그릇이 전해진 물건이 대부분이라고. 지금도 장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다완들을 보면 이 막사발 형태를 하고 있다.

오다 노부나가마츠나가 히사히데에게 차솥을 주면 살려주겠다고 하자 격분해서 폭사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열악했던 도자기 제조 기술은 임란을 통해 납치한 조선의 도공들을 통해 발전하게 되어 막부정권에 이르러서는 네델란드를 통해 서양에 수출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당시 네덜란드는 청나라가 무역봉쇄를 시작하자 새로운 자기생산지를 찾았고[5], 일본에 디자인을 수주하고 샘플을 보내는 등의 공을 들여 일본 생산품 자체의 질을 끌어올리고 값싸게 사가는 방식의 무역을 했다. 손잡이가 달린 찻잔도 일본에서 최초로 제작했는데, 뜨거운 차와 찻잔에 익숙치 않았던 서양인들의 기호에 맞춰 제작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발전한 일본의 도자기는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유럽의 기술까지 도입하여, 매우 얇고 가벼운 도자기를 공장에서 찍어내는데까지 이르렀고, 일제강점기에 백자를 대체하는 소위 왜자기로서 시장을 잠식했다.

터키의 경우 13세기 경부터 도자기를 굽기 시작했는데, 특히 이즈닉 (İznik)의 도자기가 유명하다. 다만 만드는법이 상당히 다르다. 터키에서도 도자기 (Porselen)이 아니라, 치니 (Çini)라고 별도의 용어로 부른다. 이 이즈닉 도자기는 중국산 도자기에 열광하던 요구에 의해 중국산 도자기를 모방해서 만들기 시작했다.

코발트 염료를 사용하는 중국식 청화백자의 영향을 짙게 받았지만, 코발트 염료대신 다양한 색깔의 광물성 물감을 직접 도자기 위에 그리고, 그 가장자리를 가느다란 붓으로 검게 윤곽선을 두드러지게 만들고 구워내는 점이 다르다. 색깔이 매우 선명하며, 자기와 달리 겉에 유리질의 유약을 발라서 굽기때문에 광택은 진짜 자기와 비슷하지만, 진짜 자기에 비해 가벼운것이 특징인데 주로 모스크벽을 장식하는 타일로 만들었고 그 외에 중산계급과 귀족들을 위한 각종 그릇과 생활용품들을 만들어 사용했다. 왕족들은 여전히 중국산 도자기를 애용했다고.

훗날 16세기가 되어 이즈닉에서 질 좋은 흙이 고갈되자 중심지는 내륙의 퀴타햐 (Kütahya)로 옮겨졌고 심지어 한때 이즈닉 도자기는 맥이 끊기기도 했으나 1985년 에쉬레프 에르오울루 (Eşref EROĞLU)와 세이한 에르오울루 (Seyhan EROĞLU)부부에 의해 복원되어 오늘날에는 관광지에서 값비싼 기념품으로 팔리고 있다.



중국 명나라 시기 경덕진에서 생산된 당초문 청화백자 (1470년경)와 1세기 후인 1550~1570년경 이즈닉에서 만든 도자기의 비교. 위쪽이 경덕진 도자기이다.

도자기와 관련된 유명한 클리셰중 하나가 일반인의 눈엔 멀쩡해보이는 도자기가 장인의 마음에 안 들면 거침없이 깨지는 전개. 그런데 어지간히 네임밸류가 높은 장인이 아니면, 지인들이 아까우니까 달라고 하면 준다고도 한다.

발굴되어 나오는 도자기들도 기형이 뒤틀리고 터져나간 것이 나오는 것도 모자라서 사용한 흔적까지 남은 경우도 있다. 거침 없이 깨버리는건 오늘날에야 가능해진 것으로 청화백자에 사용하는 코발트 안료 같은 경우 정말 질 좋은 것은 아프간에서 중국을 통해 들여와서 비쌌다. 게다가 관요에서 납품할 때도 뇌물로 그 갑절을 찔러줘야 했다는 기록도 있어 도공들이 가마에서 안터지고 나온 자기들을 마구 깨버릴 여유는 없었다

모공이나 잡티가 없는 꿀피부를 도자기 피부라고도 한다. 화장을 너무 심하게 해서 사람피부같지 않다는 의미로 도자기 인형 같다는 말도 한다.

충치 치료시 대신 충전재로도 사용된다. 금과 달리 색상이 기존 치아와 같아서 미관상 좋고 강도도 좋기 때문.

만든 지 얼마 안되었는데도 억소리나는 도자기도 있다.(#)

불만제로에서 도자기의 유해성을 다루기도 했다. 제조과정 중 납이 함유된 유약을 바르면 가열 과정에서 연료를 적게 써도 되고 도자기 표면이 반들반들해지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여러 업체에서 납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유약을 광명단이라고 하며, 보통 유약에 비해 단가가 싸서 많이 사용된다.

기이하게 많은 수치의 납 성분이 납득이 안가는 부분도 있어 당사자들이 강하게 부정해 재조사를 의뢰하기도 했으며 (#) 불만제로에 대한 반박글도 있다.

크리스탈 그릇에는 납이 함유되긴 한다. 불만제로에 대한 반박글은 대부분 불만제로 측에서 한국의 도자기라는 도기는 크리스탈 그릇을 검사한 결과다. 크리스탈 그릇의 경우 투명도를 위해 납이 함유되고 이는 유연과 무연으로 나뉘는데, 무연의 경우 함유된 납이 산화납이므로 인체에 무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며, 유연의 경우 사용 전에 한번 식초물에 행궈 닦아야 된다.

2. 네이버 웹툰

호연네이버에 연재했던 웹툰.

한국의 도자기를 바탕으로, 아기자기하면서도 그윽한 수묵화같은 그림체로 그린 카툰이다.

빵 터지는 개그는 없었지만 언제나 일정 이상의 재미와 감동을 보장하며 단행본도 출간되었다.

내용에 힘입어 2011년부터 대한교과서 및 디딤돌 출판사 국어교과서 중학교 3학년 과정에 등재된다. 2012년에는 고등학교 2학년 문학 교과서에 인용 자료로 등장한다.

호연은 도자기를 마치고 야후! 카툰에서 꿈의 주인을 연재했지만 2009년 3월에 심장병 진단[6]을 받고 연재중단. 지금은 회복해서 자신의 블로그에 활동중이며, 2010년 5월부터 네이버 웹툰에서 신작 《단군할배요!》 연재를 시작했다.

3. KBS 스페셜



2004년 11월부터 12월까지 방영된 KBS의 6부작 HD 다큐멘터리.

제작기간 3년, 제작비 12억 5천만원, 5개 대륙 30개국에 걸친 1년 6개월 동안의 해외 촬영과 국내 최초로 HD CG를 사용, 고대 도시들을 3D 그래픽으로 재현한 점 등으로 화제를 모았으며 차마고도누들로드로 이어지는 KBS 명품 다큐 시리즈의 서막을 알렸다. 나레이션은 성우 김종성이 담당했다.

방영 직후부터 BBC 다큐를 보는 것 같다는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이에 따라 인터넷 다시보기 및 DVD 발매에 대한 문의가 쇄도했으나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느라 시간이 상당히 지연되어 2007년에서야 DVD가 발매 되었다.

이 다큐에 등장한 상당수 도자기들은 해외에서 내로라하는 박물관의 국보급 소장품이며 유적들 또한 각국에서 중요 문화유산으로 보호하고 있다. 특히 유럽, 미국, 일본에서는 강력한 저작권 통제를 하고 있어 이들과의 협의가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으면 DVD를 만들어도 수출할 수가 없다. 가령 중국 촬영에서는 만리장성, 자금성, 진시황릉 등의 유적에 대한 당국의 허가를 받지 못하거나 막대한 촬영비 요구 때문에 일본 NHK의 영상자료로 대신했는데, 지상파 이외의 전송권에 대한 계약을 따로 체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NHK에서 인터넷 서비스 중단을 요구해 다시보기가 막히기도 했다.

도자기를 통해 인류문명과 역사의 과거, 현재, 미래를 탐구한다는 원대한 기획 의도하에 제작되었으며 갖가지 진귀한 도자기가 화려한 영상미를 뽐냈다. 각 편의 구성내용은 아래와 같다.

1편 흙으로부터 Origins: the birth of china
2편 신비의 자기 Destiny: porcelain, the mystery
3편 이슬람의 유산 Blue & White: legacy of the Islams
4편 청화의 제국 Empire: the Chinoiserie world
5편 도전의 세기 Rivalry - the century of challenge
6편 문명을 넘어 Beyond - the path of civilization

음악은 양방언이 담당해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며, 메인 테마인 '흙의 전설 : The Legend Of Earth'는 신비롭고 웅장한 선율로 호평을 받았다.


OST도 출시되었다.

2004년 한국방송촬영감독연합회 주관 2004 그리메상에서 대상을, 2005년 방송위원회 주관 방송위원회 우수프로그램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전세계 영상 콘텐츠 가운데 영구보존할 가치가 있는 프로그램만 선정해 소장, 전시하는 미국 시카고 소재 방송통신박물관 (MBC·Museum of Broadcast Communications)에 영구보존 하기로 결정 되었다.

4. 판타지 갤러리의 용어

남의 작품을 자신의 것인 양 행세하면 도작했다는 의미로 도자기라고 한다. '도작이다'의 발음이 '도자기다'와 같아서 생겨났다. 용법은 자작나무와 비슷하다.

예전에 판갤 주최의 대회에서 도작 사건이 일어나 정착된 유행어이다. 해당 사건을 일으킨 갤러가 천안 출신이었기 때문에 천안의 명물은 도자기라는 구호가 유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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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그래서 영어로 도자기를 china라고 한다.
  • [2] 그런데 2011년에 재현된 고려청자는 2,000℃나 되는 플라즈마 상태까지 갔었다.(#)
  • [3] 정확히는 자국에서도 생산을 했지만, 외제차와 국산차와 마찬가지로 상등품의 외제 도자기는 높으신 분들이 썼고, 저질의 국산은 서민들이 썼다지만은. 그마저도 국산도 숫자가 적어서 한참 밀리는 형편이였다.
  • [4] 싸게 많이 만들기 위해 그릇 바닥에 자그마한 돌받침을 놓고 수십개를 쌓아 굽는 대량생산품이다. 지금도 도요지 터에서 이렇게 굽다 무너진 것들을 볼 수 있다.
  • [5] 일본이 조선에서 납치한 도공들의 힘으로 도자기 생산을 시작했을때, 중국 대륙은 이자성의 난 + 교체 + 삼번의 난, 경덕진을 비롯한 도요지가 초토화되는 바람에 수출할만큼의 잉여물량을 생산하지 못했다.
  • [6] 이 때 수술비를 마련한다고 그림을 그려서 파는 형식으로 모금 받은 일이 있었다. 호연은 부모님께는 비밀로 하고 싶다고 밝혔으나, 한 기자가 이 일을 신문기사로 내서 부모님께 발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