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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치 그라모폰

last modified: 2018-08-20 17:43:25 Contributors


Deutsche Grammophon 홈페이지
도이치 그라모폰은 곧 클래식음악의 역사입니다

도이치 그라모폰 또는 도이체 그라모폰이라고도 부른다. 풀이하면 독일 축음기 정도..도이치 그라목손이 아니다

Contents

1. 연혁
2. 특징
2.1. 인터넷
3. 소속 아티스트
4. 발매 시리즈


1. 연혁

에밀 베를리너가 횡진동 방식으로 재생되는 그라모폰이라는 이름의 축음기 제조사를 만든 뒤 유럽 시장 공략을 위해 영국독일에 지사를 만들었는데, 독일 지사는 1898년에 에밀 베를리너의 조카가 하노버로 건너가서 도이치 그라모폰 게젤샤프트(=유한회사,이하 DGG)라는 이름으로 설립했다. 명칭대로 이 지사가 현 도이치 그라모폰의 직계 모체가 된다.

지금은 튤립마크를 사용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레코드에 녹음된 주인의 목소리를 축음기 앞에서 듣고있는 니퍼(nipper)라는 의 그림을 쓰고 있었다고 한다. 프란시스 발로라는 화가가 그렸던 이 그림을 마음에 들어해 사들였고 훗날 베를리너 그라모폰 전체 계열사의 상표로 취득했다. 1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HMV와 제휴를 했으나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항복을 하면서 DGG의 상표권을 잃게되어 His Master's Voice[1]라는 상표를 HMV와 컬럼비아가 합병한 EMI에게 팔아넘겨지고 DGG는 지멘스에 인수된다.[2]

지금의 튤립무늬 상표는 이 때 새로 만들어진 것... 튤립마크 시기부터 한 유대인 여성이 이 음반사를 먹여살려서 EMI가 음반사들 중 가장 역사가 깊음에도 불구하고 50년대 후반~70년대 후반까지의 명연은 거의 다 이 쪽에서 쓸었다. 나중에는 필립스 클래식과 합병을 하는데, 이 때의 명칭이 폴리그램이다.[3]

2차 세계대전 후에는 한동안 패전국으로서 독일의 어려운 경제상황의 영향을 겪었다. 특히 DGG의 근거지인 베를린은 4개국에 의해 분할지배되었고, 최종적으로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으로 분단되었는데, 문제는 서베를린이 동독의 한복판에 위치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DGG는 필연적으로 근거지의 베를린 필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었다. DG는 베를린 필과 전속계약을 맺었다. 전속계약을 맺은 댓가로 DG는 베를린 필에 다른 오케스트라보다 30% 정도 높은 개런티를 받았다. DG와 베를린 필의 전속계약은 80년대 중반 베를린 필과 카라얀이 자비네 마이어 사건으로 갈등을 일으킬 때, 베를린 필 단원 측의 요구로 파기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 때 베를린 필 측이 전속계약을 파기한 것은 카라얀이 아닌 다른 음반사 소속의 지휘자들과도 적극적으로 녹음을 추진하려는 계획 때문이었다. 물론 전속계약이 파기된 후에도 베를린 필과 DG의 녹음은 가능했지만 프리미엄 없이 다른 오케스트라와 동일한 수준의 개런티가 지급되었다.

전후 DG는 베를린 필과 활동이 가능한 지휘자들을 중심으로 영입하였다. 오이겐 요훔, 칼 뵘, 페렌츠 프리차이 등과 계약을 맺었고 이들은 50년대 DG의 간판 지휘자들이었다. DG는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였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계약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당시 훨씬 규모가 큰 회사였던 영국의 EMI에 밀렸다. 1951년에 푸르트벵글러와 EMI의 프로듀서 월터 레그와 불화를 겪다가 재계약에 실패한 틈을 타 DG가 푸르트벵글러에게 접근했고, 푸르트벵글러가 자신의 교향곡 2번도 같이 녹음하게 해달라는 조건을 받아들여 단기 녹음 계약을 성사시켰다. 푸르트벵글러의 교향곡 2번 외에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 하이든의 교향곡 88번이 그 해 12월에 녹음되었다.[4]

그러나 곧 EMI가 레그 대신 로렌스 콜링우드를 프로듀서로 붙여주고 계약금 인상 등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여 푸르트벵글러와 계약을 성사시키면서 푸르트벵글러와 DG의 짧은 동거기간은 끝났다. 푸르트벵글러가 DG에서 남긴 음반들은 지금까지 상당한 명연주로 평가받고 있다. 게다가 EMI와는 달리 푸르트벵글러 본인의 수족인 베를린 필과 녹음할 수 있었고, 녹음 음질 또한 EMI보다 DG가 좋았다. 그런 점에서 DG와 푸르트벵글러가 많은 녹음을 남기지 못한 것은 음악애호가 입장에서도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50년대까지만 해도 DG는 클래식 음반사 중에 후발 주자[5]로 인식되고 있었다. 당시 DG의 녹음 기술은 EMI보다는 확실히 좋았고, CBS[6]보다 괜찮았다고 볼 수 있지만, DECCA나 RCA에는 미치치는 못했다. 음반사의 인지도는 독일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다.

50년대 중반 향후 DG의 운명을 바꾸는데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 발생했는데, 바로 카라얀의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로 취임한 것이었다. DG는 EMI에 소속되어 있던 카라얀에게 회사의 명운을 건 파격적인 제안를 하고 58년 결국 카라얀과 계약을 성사시켰다. 63년에 완성된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은 전무후무한 대성공을 거두었고 DG에 일대의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DG는 카라얀뿐만 아니라 61년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에 취임한 라파엘 쿠벨릭을 영입했다. 60년대 DG는 소속 지휘자들을 중심으로 교향곡과 관현악 중심으로 레퍼토리를 구축하였다. 특히 유명 작곡가의 교향곡 전곡 녹음을 추진했다. 카라얀과는 베토벤과 브람스 전곡, 차이코프스키 후기 교향곡을, 요훔과는 브루크너 전곡 및 하이든 후기 교향곡을, 뵘과는 모차르트, 슈베르트 전곡을, 쿠벨릭과는 슈만, 드보르자크, 말러 전곡 녹음을 진행했다. 한편 60년에 유럽 순회 공연을 나왔던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에 재빠르게 접근해 빈에서 차이코프스키 3대 교향곡을 녹음하였는데, 이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비슷한 방법으로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가 서유럽 순회 공연을 나왔을 때도 접근해 카라얀과 협연으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제1번 녹음을 성사시켰다.

한편 DG는 50년대말에 뮌헨을 근거지로 활약하던 칼 리히터를 영입하면서 고음악 분야에서도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아예 아르히브라는 고음악 전용 산하 레이블을 별도로 만들어 고음악 분야의 선두 주자로 나서게 되었다.

DG는 교향곡과 관현악 분야를 중심으로 레퍼토리를 구축한 반면, 오페라의 녹음에는 상당히 소극적이었다. 오페라 중심으로 레퍼토리를 구축했던 데카와는 상반되는 행보였는데, 결과적으로는 DG의 전략이 주효했다고 볼 수 있다. 오페라는 교향곡, 관현악에 비해 제작 비용이 훨씬 많이 들었기 때문에 채산성이 결코 좋지 않았다.

DG가 오페라를 전혀 녹음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데카 등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는 것이다. 컬럼비아(DBS) 등 미국 음반사에 비하면 DG도 오페라 음반이 풍부한 편이었다. DG가 독일, 오스트리아 음악 중심으로 아티스트를 영입하고 레퍼토리를 구축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오페라 녹음을 우선 순위에 두지 않은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고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모차르트, 바그너 등 독일, 오스트리아 작곡가들의 경우 DG도 어느 정도 오페라 녹음에 적극성을 띄기도 했다. DG는 레퍼토리 구축이 끝난 70년대 후반 이후에는 정책을 바꿔서 오페라 녹음에도 적극적으로 임하기 시작했다. 오페라에는 소극적이었지만, 오라토리오, 미사 등의 대규모 합창곡의 녹음은 활발히 진행되었다.

60년대 주요 교향곡 전곡 중심의 레퍼토리 구축하면서 세계적인 레이블로 도약한 DG는 70년대에는 클래식계 최고의 레이블로써의 위상을 확립하였다. 60년대에도 DG는 유망한 지휘자들을 닥치는 대로 영입하여 지휘자 왕국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60년대 후반에 신예지휘자 아바도와 계약을 맺었고, EMI 소속의 줄리니, 필립스 소속인 보스턴 심포니의 오자와 세이지, CBS 소속인 레너드 번스타인, 신예 카를로스 클라이버 등을 영입했다.

50~60년대 동안 DECCA와 전속계약으로 묶여있던 빈 필이 1970년 DECCA와 전속을 해지하면서 DG에게 큰 기회를 제공했다. 뵘, 번스타인, 카라얀, 아바도 등 빈 필의 핵심지휘자들을 모두 DG가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0년 뵘과 빈 필의 베토벤 교향곡 전곡 녹음이 시작되었고, 이후 DG는 뵘, 번스타인, 카라얀, 아바도, 레바인 등의 지휘자를 통해 빈 필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70년대 중반에는 경영진이 교체되면서 정책 변화가 있었는데, 가장 큰 내용은 기존에 자제해왔던 오페라 녹음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로 한 것과 동일 지휘자에 의한 동일 레퍼토리의 재녹음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다른 음반사보다 훨씬 많은 거장 지휘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DG는 지휘자들이 녹음하고자 하는 레퍼토리와 회사의 이익과의 접점이 되는 곡을 찾아 타협해야 했는데,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카라얀은 60년대부터 과거 녹음을 재녹음하고 브루크너 교향곡을 녹음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는데, 요훔과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을 녹음을 진행하고 있던 DG는 중복 투자를 하기 힘든 형편이었다. 이에 카라얀은 69년에 EMI와 별도 계약을 맺고 브루크너 교향곡을 녹음했을 뿐만 아니라 DG에서 몇년전에 녹음했던 차이코프스키 3대 교향곡을 EMI에서 다시 녹음했고 이 음반들은 불티나게 팔렸다. 이는 결과적으로 DG의 정책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거장 지휘자들의 동일 레퍼토리르 재녹음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한 것이다. 70년대 중반부터 카라얀은 기존에 녹음했던 레퍼토리들을 재녹음하기 시작했다. 차이코프스키 3대 교향곡, 베토벤과 브람스 교향곡 전곡 등이 다시 재녹음되었다. 칼 뵘도 빈 필과 모차르트 교향곡 전곡을 재녹음하기 시작했다.

60년대까지 독일 지휘자를 중점적으로 영입했지만, 70년대부터 세계화를 위한 포석으로 아바도를 필두로 줄리니, 번스타인, 바렌보임, 오자와 등 다양한 지역의 지휘자들을 영입하였다. 80년대에도 레바인, 시노폴리, 정명훈 등을 영입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과포화된 지휘자 라인에 대한 정리도 이루어졌는데, 오자와가 필립스로 이적한 것을 필두로 바렌보임, 줄리니 등이 타사로 이적하기도 했다. 아바도도 잠시나마 EMI로 완전 이적했으나 다시 DG로 돌아왔다.

90년대 후반 음반계에 장기 불황을 겪으면서 DG도 예전같지 않았았는데, 그래도 다른 음반사들보다는 나은 형편이었다. 90년대에 틸레만, 2000년대에 두다멜을 영입한 것 말고는 딱히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이지 않고 있다. 2002년에 새로 베를린 필에 취임한 래틀이 EMI 소속이었기 때문에 베를린 필을 EMI에 빼앗겼지만 워낙 음반시장이 불황이라 EMI에서 베를린 필의 음반이 별로 출시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나중에 폴리그램에 데카도 넘어오게 되고, 이후 음반/음악계에 불화가 생기면서 98년 캐나다의 주류회사인 시그램에 통째로 인수되며 지주회사 시그램의 계열사인 니버셜 뮤직안에 있는 데카 뮤직 그룹에 편입된다.

2. 특징

이 바닥에서 가장 거대한 레이블이다 보니 일단 음반점의 클래식 코너에 가기만하면 전부 노란색 밖에 안보인다고 알려져있다(...)[7] 그리고 카라얀에 대한 상술이 대단하다. DG에서 나오는 카라얀 음반만 모아도 웬만한 CD장 따위는 가볍게 채울 수 있을 것이다.같은 연주라도 여러 장 나오니까 카라얀 탄생 기념 전집부터 시작해서, 카라얀 2008, 카라얀 골드, 심지어는 카라얀 아다지오 까지 있으며, 클래식 입문자용 음반에는 카라얀이 덩그러니 깔려있다(...)

한국에서는 90년대만 해도 성음레코드에서 독점계약을 하여 여기서 연주한 전집을 다 냈다. 80년대,아니 90년대 초중반만 해도 음반가게에 가면 한 코너 클래식 분야에 노랑색으로 통일될 정도로 국내에서도 제법 많이 내곤 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디 오리지날이라는 결정반시리즈 발매에 주력하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디 오리지날에 수록할 녹음 대부분의 저작인접권이 소멸하게 되는데.. 그 때의 미래가 아주 걱정되긴 하다.

최근 이바닥 시장이 마이너 레이블 들의 춘추전국시대로 가고 있어 메이저 레이블의 입지가 점점 줄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후에 인수합병이라는 과정 없이는 생존이 어려워보인다. 마이너 레이블의 신보는 꾸준히 나오고 있는데 메이저 레이블은 재발매와 합쳐서 1년에 나오는 음반이 손에 꼽는다.

2.1. 인터넷

뒤늦게 온라인 음악시장의 힘을 깨닫고 자사 홈페이지를 통해 판매중인 음반 전부를 무손실 FLAC과 320k MP3로 구입 소장할 수 있는 서비스를 개시하였다. 그런데 유럽(정확히는 유로존) 외 지역에서는 무조건 파운드화로 결제해야해서 결과적으로 국내 유저는 이래도 손해 저래도 손해. 미국 달러화 결제를 오픈한다고 하더니 몇년째 소식이 없다. 다행히도 한국어 홈페이지는 오픈했다.

홈페이지의 myDG 코너에서 DG가 발매했거나 발매중인 음반의 샘플러를 다운받을 수 있다. 2012년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한달 내내 하루에 한곡씩 푸는 행사를 했는데, 다 받아서 모아보면 웬만한 컴필레이션 앨범급의 양과 질을 자랑했다.

3. 소속 아티스트

지멘스 AG로 넘어와 튤립마크가 생긴 뒤부터 카라얀이 죽을 때까지 이 음반사와 얽힌 이야기가 진짜 많다고 한다(...) 하여간 카라얀은 DG에 큰 기여와 간섭(?)을 하였으며.. 그 수준은 카라얀에게 한 마디 잘못했다가 짤리는 수준이었다고 한다(실화다...).[8] 카라얀 외에도 칼 뵘이겐 요훔, 라파엘 쿠벨릭, 레너드 번스타인 같은 동시대의 거물급 지휘자들이 전속 계약을 맺고 수많은 음반을 내놓았다. 정명훈도 2000년대 이후로는 전속 아티스트가 아니지만 여전히 이 음반사를 중심으로 녹음 활동을 하고 있고, 서울시립교향악단이 그의 지휘로 2015년 3월 현재 여덟 장의 음반을 발매하며 세계 음반 시장에 발을 들여놓고 있다.

사이먼 래틀EMI쪽에 있어서 그런지 현재 이 레이블에서 지휘자는 그렇게 뜨진 않는 것 같다. 뭐 어느 쪽이건 레퍼토리 발굴이 되지 않는 이상 미래는 없다. 2000년대 후반에는 엘 시스테마의 유명세를 타고 뜨고 있는 베네수엘라의 신예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과 전속 계약해 그의 출세로 득을 보고있는 듯 하다.

2000년대 들어 한국 아티스트들 중에서도 이 레이블의 딱지를 단 음반들을 내놓고 있다. 상술한 지휘자 정명훈을 비롯해 피아니스트 김정원과 백건우, 서혜경, 임동혁, 바이올리니스트 김수연,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 첼리스트 여미혜, 콘트라베이시스트 성민제, 소프라노 조수미 등이 그 예. 다만 이들의 음반은 정명훈의 것을 제외하면 한국 한정으로만 라이선스를 받아 생산/유통되고 있어서, 본사 홈페이지에서는 검색되지 않으니 주의.[9]


4. 발매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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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약칭 HMV. 영국과 캐나다, 일본에는 동명의 음반 소매 체인이 아직도 있다.
  • [2] 폴리도르 레코드가 1924년에 생겼는데, 해외수출용 상표라는 말도 있고 그 쪽 상표로 녹음된 레코드가 대중음악 쪽으로 알고있는데, 정확한 기록이 없다. 확실한건 DG와 연관이 있으며 한때는 DG의 LP리마스터링 음반에 폴리도르 인터내셔널이라는 명칭이 붙어있었다는것, 쉽게 설명하면 DG의 그냥 두번째 상표다.
  • [3] 폴리돌과 그라모폰의 합성어로 보임.
  • [4] 원래 슈만의 교향곡 4번을 녹음할 예정이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얼마 전 공연했던 하이든을 대신 택해 리허설 없이 바로 녹음했다(!). 이 때 빠진 슈만 교향곡은 1953년 5월에 가서야 녹음할 수 있었다.
  • [5] 본사의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DG는 지사로 출발해서 본사에서 분사한 상황이었다
  • [6] 현 SONY
  • [7]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다보니 그 만큼 카탈로그의 수도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비해서 현재 나오고 있는 음반의 수는 적은 느낌.. 그것도 그럴 것이 대다수가 폐반됐는데 이런 음반들의 원본을 회사 창고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혼자 듣지말고 같이 듣자구..ㅜㅜ
  • [8] 애초에 카라얀 자신이 공돌이 출신이기도 해서, 음반 녹음 때 프로듀서와 엔지니어의 고유 권한이었던 사운드 조정에도 관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 [9] 사실 이런 '로컬 마케팅'은 전세계 메이저 음반사들이 공통적으로 행하고 있는 판매 전략이다. 이미 1980년대 후반에도 서울음반(현 로엔 엔터테인먼트)이 클래식 음반 사업을 할 때 RCA 레이블의 한국 라이선스 생산/판매 계약을 따내면서 서울시향의 첫 단독 음반과 한국 민요의 오케스트라 편곡 음반, 금난새의 초기 음반들 같은 순수 국내 제작반에 RCA 상표가 붙어서 나온 바 있었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해당 국가의 로컬 아티스트들이 이런 식으로 음반을 제작하고 있는데, 내수용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런 계약을 맺는 것은 메이저 레이블들의 상표 자체가 갖는 권위와 역사성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