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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last modified: 2015-11-17 22:17:30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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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정대신 시절의 초상화.컨트롤 C


관백시절의 초상화.컨트롤 V


도요토미 가문의 문장. 동나무, 현재 일본 정부를 상징하는 인장이기도 하다. 정확히는 고시치키리몬(五七桐紋)이라고 하며, 사실 이 문장은 히데요시만의 전용 문장이 아니라, 본래는 일본 덴노 가문이 쓰던 문장 중 하나였는데, 아시카가 다카우지고다이고 덴노에게 하사받은 이래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이 문장을 하사받은 적[1]이 있으며, 노부나가 항목에 있는 초상화에도 노부나가의 옷에 이 문장이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참고로 이 문장은 조선총독부 휘장에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문장을 쓰는 건 일본이 한국 침략의 야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위 경위에서 볼 수 있듯이 그렇게까지 볼 필요는 없다.


하시바 가문 시절의 문장. 호리병박.

Contents

1. 개요
2. 입지전적 출병
3. 원숭이, 천하를 잡다
4. 조선 침략
5. 후계자 문제와 죽음
6.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
7. 히데요시의 능력
8. 후세의 평가
9. 기타
10. 대중매체에서


1. 개요


豊臣秀吉(とよとみ ひでよし, 풍신수길로도 많이 불린다)
1537.03.17~1598.09.18

일본에서는 노부나가, 이에야스와 함께 전국시대 3대 천하인이자 전국시대에 최고로 출세한 인물로 유명하다. 실제로도 무사 출신이 아니라 서민 출신으로 태어나서 일본 조정 최고의 자리인 간파쿠(관백)까지 오른 인물이다.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표현할 때 빠지지 않는 어구가 바로 "戦国一の出世頭(전국 최고의 출세가도를 달린 인물)". 하여튼 오늘날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출세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것보다 임진왜란의 주동자, 침략자로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병자호란과 더불어 한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임진왜란의 주동자이기 때문에 일본 역사 속 인물 중 한국인들 에게는 침략자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2] 자매품 : 당태종, 수양제

2. 입지전적 출병

본인의 주장으로는 일본 오와리국(현재의 아이치 현 서부)에서 아시가루[3]의 아들로 태어났다하나 확실하지 않다. 공가나 무가출신조차 제대로 된 기록이 없던 시절인지라 히데요시의 출생배경을 정확하게 알 수단은 없고 부정적인 주장을 따르면 미천한 신분까지 고귀한 것으로 만들 수는 없으니 그나마 부친이 아시가루였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4]. 히데요시의 가족관계는 잘은 알 수 없으나 모친을 매우 아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후에 자신의 모친을 홀대했던 자에게 할복을 명령한 적이 있다.

아명은 코자루(小猿, 원숭이 새끼) 또는 히요시(日吉). 집을 나가면서 키노시타 토키치로(木下藤吉郞, きのした とうきちろう)로 개명하였고, 오우미 국을 평정한 뒤에는 노부나가로부터 치쿠젠노카미(筑前守)의 관위를 받으면서 하...시바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라고 개명하였다가 태정대신(太政大臣), 관백(關白)이 되면서 도요토미(豐臣)라는 성을 썼다. 더해서 후지와라 가의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후지와라 성도 있다. 또한, 당시 겐지(源氏) 씨족이었던 아시카가 막부를 멸망시키고 헤이지(平氏)계임을 자처한 노부나가의 뒤를 이은 탓에 조선 측 기록을 비롯한 일부 문헌에선 '평수길(平秀吉, 타이라노 히데요시)'이라고도 불린다. 대륙의 삼성가노(여포)를 능가하는 성씨 갈기단, 위에 기록한 타이라, 후지와라, 토요토미는 '우지(氏)'이므로, 실제 사용한 성씨(苗字)는 계속 하시바였다는 주장도 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뒤 어머니가 재가하여 의붓아버지와 살았다가[5] 집을 떠나 마츠시타 유키츠나(松下之綱)라는 자를 섬기다 얼마 안 가 그만두고[6], 18세 때에 오다 노부나가의 하인이 된다. 이후 키요스 성 수리 실무자와 주방 담당자 등을 담당하며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고 한다.[7] 1555년에는 하치스카 마사카츠의 가신으로 들어갔다고도 하며, 유명한 스노마타 이치야성(墨俣一夜城)의 일화도 이 시기(1561)의 것이다.[8] 히데요시의 이름이 사료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1568년의 일인데, 칸논지 성 공략 당시의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해에 상락에 성공한 노부나가의 명으로, 아케치, 니와 등과 함께 교토의 정무를 담당하였다.

1570년의 가네가사키 전투에서는 아자이 나가마사의 배반으로 인해 급히 퇴각하는 노부나가의 후위를 자청하여 큰 공을 세웠고, 1573년의 오다니 성 전투에서도 3천의 군세를 이끌고 아자이 격파에 일조하였다. 아자이 나가마사 사후 그의 옛 영지인 북 오우미 3개 군 18만 석을 영지로 받아 다이묘가 되었으며 치쿠젠노카미의 관위를 받았는데, 이때 오다 가의 중신 니와 나가히데(丹長秀)와 시바타 카츠이에(田勝家)의 성으로부터 한 글자씩 따와 하시바(羽柴)라는 성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오우미 출신의 인재들을 발굴하는데 힘을 쏟았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이시다 미츠나리이다[9].

1575년에는 나가시노 전투에 종군하였고, 이듬해에는 상락해오는 우에스기 켄신을 막기 위해 시바타 카츠이에와 연합전선을 펼쳤으나 쌍방의 견해 차이로 히데요시가 이탈, 오다 군이 대패해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토리가와 전투). 이 일로 노부나가의 격분을 샀지만, 이후 용서받고 시키잔 성의 마츠나가 히사히데를 공략하여 이를 멸하였다. 이후에는 츄고쿠 지방 공략에 참가하여, 1579년까지 아카마츠(赤松)[10], 마츠바라(松原)[11], 벳쇼(別所)[12], 코데라(小寺), 우키타(宇喜多) 등을 항복시켰으나, 연달아 일어난 반란으로 모리 공략은 연기되었다.

1581년부터 재개된 모리 공략에서, 톳토리 성, 빗츄 타카마츠 성 등을 공략하였다. 이 빗츄 타카마츠 성을 포위하고 있을 때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살해당하는 혼노지의 변이 일어났는데, 히데요시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모리 측과 즉시 화친하고[13], 황급히 교토로 향했는데, 이를 츄고쿠 회군(中國大返し)이라 한다. 현재 유력한 설을 따르자면, 6월 6일 오후에 타카마츠를 출발하여 7일 밤에 히메지에 도착했다고 하는데,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30시간 만에 70킬로를 주파했다는 기록만으로도 그의 군사적 재능을 알 수 있을 것이다[14]. 13일에 교토 근교인 야마사키에 도착하여 미츠히데와 회전, 이를 격파하고 교토에 입성하였다.

3. 원숭이, 천하를 잡다

6월 27일에 키요스에서 열린 회의에서, 노부나가의 차남 노부카츠와 삼남 노부타카 파로 중신들이 대립하는 가운데, 장남 노부타다의 적자인 산보시(훗날의 오다 츄나곤 히데노부)를 지지하여 이를 옹립하였다. 이 일로 오다 노부타카 및 타키가와 카즈마스 등으로부터 탄핵장을 받았으나, 자신의 양자이자 노부나가의 4남인 하시바 히데카츠를 상주로 삼아 노부나가의 장례식을 성대히 치르는 것으로 회피하였다. 그 해 12월에는 시바타 가츠이에가 폭설로 군을 움직일 수 없는 틈을 타서 기후 성의 오다 노부타카를 공격하여, 생모와 딸을 인질로 받는 조건으로 화의를 맺었고, 이듬해 봄에는 이세의 타키가와 카즈마스를 공격하여 3월에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2월 말에 출진한 시바타 카츠이에와 그에 동조하여 다시 거병한 오다 노부타카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나, 마에다 토시이에의 배반과 신속한 반격으로 승리, 4월 24일에 시바타 가츠이에와 시즈가타케에서 일전을 벌이고 그 결과 가츠이에는 부인인 오이치와 함께 자살한다. 곧이어 5월 2일에는 오다 노부타카가 할복하였다.

오다 가문은 몇 파벌로 갈렸는데, 혼노지에서 노부나가와 함께 사망한 노부타다의 아들 산보시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히데요시가 데려다 옹립한 상태였다. 오다 노부카츠는 도쿠가와의 편에 섰으나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 이후 영토와 영향력을 상실한다. 오다 노부타카는 히데요시를 반란을 일으킨 종놈쯤으로 취급하고 공개적으로 대항했으나 패배한 게 어지간히 분했던지, 아주 섬뜩한 절명시를 남겼다. "예로부터 주인을 치는[15] 곳이로구나. 천벌을 기다려라 하시바 치쿠젠[16]" 흠좀무

1584년에는 오다 노부카츠를 공격하기 위해 군을 일으켰으나,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키이 사이가 당, 쵸소카베 모토치카 등이 오다 군에 가담하였다. 히데요시는 이세의 키 요시타카다 노부카네, 미노의 케다 츠네오키 등을 포섭하여 초반 국면을 유리하게 이끌어갔으나, 하구로, 나가쿠테 등에서 연패하였다. 이에 히데요시 본인이 직접 전선에 나서자, 다 노부카츠가 단독으로 강화에 응하여 전쟁은 종결되었다. 전투는 패배로 끝나 오다나 도쿠가와를 멸망시키는 데는 실패하지만, 이후 도요토미가 절대적으로 우세한 상황에 서자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아 히데요시에게 귀순하고, 오다 노부카츠는 소국의 다이묘로 쫓겨난다.

전쟁이 한창이던 10월 중순에 종오위하 사콘에노곤쇼쇼[17]에 임명되었는데, 그로부터 약 한 달 만인 11월 22일에는 곤다이나곤[18]으로 임명되었다. 이로서 관위로도 오다 가 필두가 되어, 명실 공히 히데요시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해에 오사카 성을 쌓았고, 1585년 3월 10일에는 정이위 나이다이진(內大臣)에 서임, 임관되었다. 3월 21일에는 토도 타카토라로 하여금 키슈를 정벌하게 하여 이를 평정하였다. 또한, 시코쿠를 정벌하여 7월 25일에 이를 평정하였다. 같은 달에는 오랫동안 지속하여 온 칸파쿠(關白)[19] 직 계승 문제에 편승하여, 후지와라 씨의 수장인 코노에 사키히사의 양자로 들어가 칸파쿠 직을 수여받았다. 이듬해에는 조정으로부터 토요토미 성을 하사받아 토요토미노 아손을 칭하게 되었고, 12월 25일에는 다죠다이진(太政大臣)[20]으로 임명되었다.

  • 간파쿠 취임에 대해 조금 더 서술하면, 당시 일본의 직위 체계는 조정의 권위 실추와 함께 개판이 되어 있었다. 막부 정치 이후 어짜피 실권은 슈고 등의 막부 무가직에 있었으나 전국시대에 오면 그것 또한 유명무실에 가까웠고, 다이묘들은 무가직 뿐만 아니라 조정의 관위 또한 뇌물을 주고 얻어내거나, 혹은 참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최고직인 간파쿠는 공가에서도 최고 명문이었던 후지와라 씨의 고셋케끼리 돌아가면서 취임하였는데, 혼노지 사건 직전 조정은 노부나가에게 정이대장군, 관백, 태정대신 중 원하는 관직을 주겠다고 한 바 있었으나 그 대답을 듣기 전 노부나가가 죽게 된다.[21]

    히데요시는 무가 출신으로써는 최초로 간파쿠에 취임하였고, 게다가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음으로써 고셋케가 아닌 무가 출신의 새로운 가문이 간파쿠에 취임했다는 의의를 갖는다.[22] 이것은 막부가 아닌 조정의 일원으로써 율령체계에 입각한 통치를 하겠다는 의미였으며, 이후로도 조정의 관직을 무사들에게 수여하고 조정의 실권을 회복시킨다. 그리고 그 정점인 간파쿠직을 도요토미 가가 세습함으로써 정권을 유지하려는 구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헤이안 시대의 셋켄 정치와 유사한 면이 있다. 실제로 히데요시는 간파쿠 직을 후계자로 내정하였던 히데츠구에게 물려주었고, 히데츠구를 사사한 후에도 다른 누구에게도 간파쿠 직을 내리지 않아, 히데요리의 장성을 기다린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체제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도요토미 가의 당주가 간파쿠가 된다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이 필요했는데, 히데요리가 너무 어려서 히데요시 사망 직후 간파쿠가 되지 못했고 후견 세력도 마땅치 못하여 정권이 무너진다.

    세키가하라 합전으로 실권을 잡은 이에야스는 간파쿠 직을 다시 고셋케에 주었고, 자신은 쇼군에 취임하여 막부를 통한 통치로 돌아갔으며, 관직을 공가의 것과 무가의 것으로 엄격하게 나누게 된다. 후대 메이지 시대에 히데요시의 이러한 정치체제 구상은 천황을 존중한 것으로 높게 평가되고, 이에야스의 막부 개창은 천황을 무시한 것으로 평가하게 되어 히데요시는 충신으로, 이에야스는 역신으로 평가하여 천황의 권위 강화에 써먹었다.

  • 또한 히데요시가 간파쿠가 되어 조정 내에서 정치를 한 이유는 쇼군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록 덴노가 무력화된 지 오래라고는 하지만 그 상징성까지 없어지는 게 아니어서 일본은 누가 뭐라 해도 덴노가 다스리는 나라이고, 여기서 덴노를 무력화시키려면 어쨌건 덴노가문의 출신 정도는 되는 등 최소한의 혈연적 유사성은 있어야 했다. 그래서 미나모토 가문도 덴노가에서 떨어져 나간 뒤 무사가 된 것을 강조하며 막부를 수립했던 것이고 호조 가문이 싯켄에 머물러야 했던 것이다. 그 뒤 쇼군은 덴노와 혈통상 연관성이 존재하는 미나모토 가문의 후손이어야만 한다는 전제가 반드시 붙었는데 잘해봐야 농민 출신인 야시가루의 아들에게 그런 고귀한 혈통이 존재했을 리 없고, 있어도 증명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쇼군 대신 간파쿠에 취임하여 실권을 행사하려 든 것이고 권력의 정당성이 인정되지 못했기에 쉽게 무너진 것이다.[23] 반면 덴노 가문 출신은 아니라도 그 방계 후손이기는 했던 쿠카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에 충성하는 소수의 가신들만 쳐낸 다음 막부를 수립하고 쇼군이 될 수 있었다.

1587년에는 20만 대군으로 규슈를 정벌하여 시마즈 씨를 복속하였고, 87년에는 교토에 쥬라쿠다이(聚樂第, 취락제 또는 聚樂臺, 취락대)라는 성곽대 저택을 건축하여 이듬해 텐노를 초청하였다. 이 해에 칼사냥(刀狩り) 및 해적 금지령을 내렸다.[24] 또한, 규슈 일대의 기독교도들의 횡포를 목격한 후에 바테렌 추방령(バテレン追放令)을 내려 기독교에 압박을 가하였다.

1589년에는 측실인 요도도노[25]로부터 장남 츠루마츠(鶴松)를 얻었다. 이듬해에는 호죠 가가 사나다 가의 영지를 무단으로 침범했다는 이유로 20만 대군으로 오다와라성을 포위, 3개월 만에 항복을 받아내었다. 포위 중에 다테 등 토호쿠의 다이묘들도 항복의 의사를 표했으므로, 이 시점에서 일본의 통일은 완수되었다. 장남 츠루마츠가 죽은[26] 1591년에 조카 토요토미 히데츠구를 양자로 삼아 칸파쿠 직을 물려주고 자신은 타이코(太閤, 전 칸파쿠에 대한 경칭)를 칭하여 히데츠구를 후계자로 선언하였다.

4. 조선 침략

1590년, 조선은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조선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히데요시는 조선에 대한 답서로 보낸 국서에서 정명가도[27]를 주장하였다. 마침내 1592년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를 선봉으로 하고 우키타 히데이에를 총대장으로 하여 16만 군세로 조선을 침공한다.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도 있고 그 중에는 1591년에 겨우 낳은 아들 츠루마츠마루의 죽음과 맞몰려 그 충격으로 말미암은 '히데요시 노망설'도 있지만, 사실 히데요시가 대륙 진출을 운운한 최초의 기록은 1585년부터 나타난다. 즉 일본을 완전히 통일하기 전부터 대륙 진출을 운운했다는 뜻으로 대륙에 '진출' 한다는 생각은 어떤 형태로든 히데요시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켰고 초반 조선 측의 예상치 못한 지리멸렬로 인해 운도 많이 따라줘서 쾌승을 거듭한다. 그러나 진격의 결과 보급선이 늘어진 데다 조선군도 치명타를 입은 게 아니라 주요 진격로에서 소수 병력으로 틀어막은 부대들만 전멸하고 끝난 것이어서[28] 해상에서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의 한산도 해전을 포함한 여러 해전에서의 무패의 맹활약과 조선 각지에서의 의병 활동 및 늦게나마 시작된 조선군의 반격으로 보급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여기에 명나라군이 참전하면서 전황이 불리해진다. 결국 전쟁을 빠르게 마무리하고 싶었던 명과 일본의 이해관계가 일치해 강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음과 같은 강화의 조건을 내세웠다. 굵은 글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명에 대한 정보나 현실인식이 제대로 되지 않은 수준을 넘어 과대망상 정도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조항들. 사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절대로 바보는 아니었고 아래 조항들은 전쟁을 다시 일으키려고 일부러 억지 조건을 내걸고 그게 무시되면 전쟁을 일으킬 작정으로 완전히 억지만 부린거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누군데 조선 4도만 가지고 만족하며 애초에 조선이 그렇게 극단적으로 국력에서 뒤지거나 당장 동원할 병력이 없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4도를 일본에게 그냥 줄거라고 확신했겠나? 그럴거면 처음부터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았을거다.

1. 명나라 황녀를 일본 덴노의 후궁으로 삼는다.
2. 무역증서제를 부활한다.
3. 일본과 명나라 양국 대신이 각서를 교환한다.
4. 조선 8도 가운데 4도를 일본에 이양한다.
5. 조선의 왕자와 신하를 볼모로 일본에 보낸다.
6. 포로로 잡고 있는 조선의 두 왕자를 석방한다.
7. 조선의 권신이 일본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다.

이런 허무맹랑한 조건을 조건이랍시고 내밀었기 때문에. 명과의 강화 교섭은 당연하게도 결렬되었으며 명과의 강화 교섭이 결렬되자, 1596년에 다시 조선을 침공할 것을 명하였다(정유재란). 이때, "전라도를 철저히 정벌하고, 충청도와 경기도도 되도록 침공할 것. 이후 성곽을 짓고 성주 대리를 둔 뒤에 귀국시키겠다."고 하였다. 이듬해인 97년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를 대장으로 삼아 14만 대군을 다시 일으켰고, 이번에는 조선군이 약화된 틈을 타 조선의 병합을 목표로 중남부 지역을 휩쓸었으나 명군이 감축된 조선군의 자리를 대신해 잘 싸우고, 바다에서는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에게 털려 수로 병진 작전이 불가능해지게 되면서 결국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남부 지역에 왜성을 여러 개 짓고 장기간에 걸친 교두보 확보를 지시하게 된다. 이로 인해 1598년 내내 왜성에서의 혈전이 벌어졌다. 1599년에도 대공세를 계획하고 있었다고 하나,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혼자만의 천하 야욕으로 임진왜란을 일으켰을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한테 "일을 그르치게 되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는 식으로 말렸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똥고집을 부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임진왜란에 출전시키려고 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병들어서 몸져누웠다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지도 않고 도적이 들어서 돈 가진 거 다 털렸다고 변명하기도 하고 병사들이 신병이라 훈련해야 한다고 핑계 대가면서 임진왜란이 끝나는 순간까지 끝끝내 불참하고 만다.[29] 이는 후에 조선침략에 대한 면죄부가 되어서 도쿠가와 막부의 조선 통신사 재개에 대해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있다.

다만 도쿠가와가 실패할 것을 미리 알아보고 몸을 빼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도요토미는 도쿠가와를 애당초 조선 공격에 크게 동원할 의도가 없었다. 대신 이에야스는 일본 내에서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여러 성 건축 등의 사업을 시행하고 있었다. 더구나 계속해서 영지를 바꾸어버렸기 때문에 이에야스는 병사를 보내고 싶어도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 거기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영지가 조선에서 멀었기 때문인 것도 있었는데 전국시대 전쟁은 오다 노부나가가 확장전쟁을 시작한 이래, 그리고 오다 노부나가 이전의 다른 대영주도 마찬가지인데, 공략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를 성주로 삼고, 그 성주가 주위 도자마 세력들의 대장이 되어 상대방을 공략하고, 공략이 성공하면 그 부하 장수에게 새로 얻은 땅의 영지를 주는 시스템이었다. 최초로 군단장이 된 시바다 가쓰이에는 원래 오미 지방의 성주로 임명된 후, 아사꾸라 공략에 투입되어, 나중에 아사꾸라의 영지인 에치젠이 주어지고, 그 후에는 에치젠 군사를 바탕으로 가가/노도/엣추의 우에스기 영지를 공략해서 자기와 자기에게 딸린 사무라이들의 땅으로 만들었다. 비슷한 걸, 히데요시도 하리마에 파견된 이후 계속했었다.

    즉, 파병이란 건 의무이기도 하지만 권리이기도 한 것이다. 파병을 해야 상으로 영지나 다른 선물(관직, 보물 등. 이를 '은상'이라고 한다.)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그 비용이 너무 심하게 많을 것 같으면, 아무리 히데요시라고 해도 부담스러워서 파병하라고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쉽게 생각해서 규슈의 영주가 10000명을 1년동안 파병하려면, 쌀 5만석과 화폐 1000관이 들어간다면... 그럼 나중에 영지를 얻었을 때 그걸 감안해서 논공행상을 해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비해 간토의 이에야스가 10000명을 1년동안 파병하려면 거리가 엄청 멀기때문에 여비와 각종 비용이 3배로 들어서 15만석과 화폐 3000관이 들어가게 된다. 그럼 결국 나중에 논공행상할때도 3배로 줘야 하는 데 이건 히데요시에게도 엄청난 부담인 것도 있었다.

    그래서, 항상 적성지와 인접한 지역의 부하 장수, 혹은 부하 다이묘가 소소한 싸움을 하면서 기회가 무르익는 것을 기다리다가 기회가 오면 가까운 지역의 군대와 중앙의 파병 군대가 잔뜩 몰려가서 단기에 결판을 내는 것이고, 결국 그 때까지 고생한 접경지역의 부하가 가장 큰 상을 받게 되고, 나중에 파견되는 군대는 약간의 상을 받게 되고, 먼 곳의 군대는 파병도 안 되고 상도 못 받는 것이다. 호죠 정벌때 규슈의 시마즈나 막 규슈에 배치된 히데요시 부하 장수 병력을 부르지 않은 것도 이와 같은 이유고, 그 반대로 임진왜란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 및 간토의 여러 장수들 병력을 부르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였다.

    여담으로 이는 멀게는 헤이안 시대 말기 부터 일본 사무라이들 사이에서 으로 여겨지던 것이다. 세이와 겐지 종가의 하치만 타로가 무사들 사이에서 높은 명성을 얻은 것은 조정에서 은상을 내리지 않는데 자기 스스로 가산을 털어서 은상을 분배했기 때문이며, 가마쿠라 막부가 만들어진 것은 '파병(봉행)에 대하여 토지(은상)을 공정하게 제대로 지급하겠다.'는 구호 때문. 가마쿠라 막부가 권위를 잃은 것도 몽골과 고려의 침공에 대항하여 싸운 무사들에게 제대로 은상을 주지 못했기 때문. 무로마치 막부가 개창될 수 있었던 계기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무기력한 덴노의 조정을 대신하여 무사들에게 은상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작업에 착수했기 때문이다. 즉, 쇼군과 같은 '사무라이의 수장'이라는 권한은 곧 '봉사를 받는 대신 논공행상을 해야 할 것'이라는 요구를 받아들이는 대신 성립하는 것이었다.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듯이 보였던 사무라이지만 이 관행 만은 에도 시대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이를 제대로 시행하지 않으면 정권이 뒤집힐 위기가 된다.

일본의 전국시대를 다룬 소설책에는 이때를 흑역사 취급 한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에서는 시종일관 부정적인 관점에서 서술되며, 소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히데요시가 일본통일을 하였으며 말년에는 노망나서 임진왜란을 일으켰다가 쓸쓸하게 죽었다는 단 한줄로 끝내 버린다. 대략 200년 뒤 유럽에선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서 같은 경험을 하지

5. 후계자 문제와 죽음

적남이 죽은 히데요시는 조카 히데츠구를 후계자로 공인했으나, 1593년 요도도노가 다시 아들(히로이마루, 후의 도요토미 히데요리)을 낳자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게 된다. 방해물이 되어버린 히데츠구는 자신의 딸과 히데요리를 혼약시키는 등 교섭을 시도했으나, 결국 1595년에 히데요시는 모반을 이유로 히데츠구를 고야산으로 추방한 뒤 할복을 명하고 히데츠구 일가를 처형하였다. 어린 처자식까지 공개 처형한 이런 잔인한 처사 때문에 히데요시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민중들의 평이 크게 저하되고 후일 히데요시의 손자 쿠니마츠가 붙들려 처참한 죽음을 맞자 민중들 사이에서는 이게 모두 인과응보라는 내용의 풍자 노래가 유행했을 정도. 현대에도 히데요시가 민중에게 사랑받은 것은 거짓말이라는 설이 있다.

무리한 조선 침략이나 전쟁에 반대한 다인인 센 리큐[30], 히데츠구의 잔인한 숙청 등을 들어 만년의 히데요시는 지적 능력이 현저히 쇠퇴해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많으며, 그래서 인지 히데요시의 찬란했던 장년까지의 이력만 조명하는 경향이 있다. 한 예를 들자면 히트했던 대하 드라마 '히데요시'의 경우는 히데요시의 화려한 이력만 줄거리로 삼은 뒤에, 화려하게 퇴장하는 장면에서 잠시간 말년의 행적을 얼버무리고 끝나버릴 정도. 저지른 행보들이 마치 늙어서 노망난 손권같다.

전국 최고의 출세아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갖고 있으나, 이는 역으로 보자면 다른 유력 다이묘나 무장들과는 달리 그 지지기반이 탄탄치 않음을 의미한다.[31]말년의 히데요시는 도요토미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안배를 하는데 그 핵심은 오대로(五大老)와 오봉행(五封行) 지방의 유력 다이묘인 오대로와 도요토미 가의 가신인 오봉행의 합의로 어린 히데요리를 보좌한다는 구상이었다. 또한 각 다이묘에게 히데요리에의 충성 맹세를 받고, 4살에 불과했던 히데요리를 원복시키는 등 도요토미 정권의 유지를 꾀했다.

1598년에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 후시미 성에서 이에야스를 비롯한 5대신의 앞에서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후견을 거듭 부탁하고 숨을 거두었다. 오대로와 오봉행은 조선에서의 전쟁을 중단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히데요시의 죽음을 한동안 극비로 부친 채 군의 철퇴를 명령한다.이렇게 임진왜란도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왜군의 조선에서의 패퇴나 다름없는 철수로 종결된다.

사세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는 이 몸이여. 나니와(오사카의 옛 지명)의 영화도 꿈속의 꿈이련가.
(露と落ち 露と消えにし 我が身かな 浪速のことは 夢のまた夢)

6.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

사후 교토 동산의 아미타봉에 묻혔고, 일본에서는 사실상 처음으로, 평안하게 죽은 당대의 권력자를 신격화하여 신사에 신으로서 봉안되었다. 신명은 도요쿠니 다이묘진(豐國大明神). 보통 신사에서 人神을 받들 때는, 해당 사람이 원한을 품고 죽어 세상에 해를 끼친다고 판단할 때, 그 원혼을 달래고자 지었다. 그러므로 평안하게 죽은 당대의 권력자를 신으로 모시는 것은 신토의 논리로 볼 때 무척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살아서는 권력자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죽어서는 신으로 받들린다니 그것 참 매력적인 일이기도 하고...... 동상을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에 대한 기억을, 그리고 그 후예들을 단결시키는 상징이 되는 등 허영심과 실익을 겸한 효과가 매우 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러한 상징을 노려 자기가 죽은 뒤 신사를 세우도록 미리 유언을 남겼다.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신사를 해체하였고 히데요시의 무덤은 아예 박살내버렸다. 이후 메이지 시대 히데요시를 재평가하면서 재건하여 오늘날에 이른다.

재미있는 것은 조선 통신사들의 연회를 이 근방에서 열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사정을 모르던 통신사들도 여기가 히데요시를 제사 지내는 곳이라는 것을 알고 분노했다고.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는 각지의 다이묘와 혼인 관계를 맺는 등 히데요시가 사전에 정한 법도를 무시하지만, 마에다 토시이에의 생전에는 어떻게든 오대로-오봉행 체제가 작동하여 이에야스를 견제할 수 있었으나 그 기간은 결국 1년 남짓에 불과 했다. 토시이에 사후 도요토미 가신 내부의 무단파와 문치파의 갈등이 심화되고, 결국 이시다 미츠나리가 실각하면서 오대로-오봉행 체제는 와해된다. 미츠나리는 이에야스를 물리치기 위해 거병하지만 이에야스는 무단파의 지지를 얻어내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문치파를 격파하고, 논공행상으로 도요토미 가의 영지를 해체, 도요토미 가를 65만석의 다이묘로 전락시키고 막부를 연다.

1615년 호코지 종명 사건을 빌미로 이에야스는 오사카 성을 공격, 두 번의 전투로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한다.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는 자살했으며 손자 쿠니마츠는 숨어 있다가 결국 사로잡혔다. 쿠니마츠는 당시 불과 7세에 불과했으나, 교토에서 오사카 성의 잔당과 함께 처형됨으로써 히데요시의 대는 완전히 끊겼다.

7. 히데요시의 능력

실력주의자였던 오다 노부나가에게서 중용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매우 유능한 장수였다고 한다. 특히 공성전에 능하여 수공을 성공하거나 포위를 하기 전에 미리 인근 지역에 사람을 풀어서 시세보다 훨씬 비싼 가격으로 곡량을 긁어모아 두는 등 용의주도했다. 또한, 인물을 씀에는 노부나가를 본받아서 실력을 중시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소설이나 게임의 영향으로 잘못 알려진 사실도 적지 않은데 전국시대의 공명이라고까지 불리는 타케나카 시게하루는 원래 히데요시의 참모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시게하루 항목에도 있듯이 엄연한 오다 가의 직속 가신이었으며 히데요시 휘하에서 종군한 것도 '요리키(일종의 파견 근무)' 자격으로 종군한 것이었다. 이는 또 다른 그의 참모로 알려진 구로다 간베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원래 신분이 미천했던 히데요시는 적아군 할 것 없이 인재를 끌어모았고 최종적으로 그것이 노부나가의 후계자 싸움에서 승리하는 요인이 된 것은 사실이다.

노부나가의 횡사 소식을 들었을 때도 당장 눈앞에 모리의 군이 있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그대로 교전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회군을 할 수도 없는 처지였는데 이것은 그대로 전투를 계속하면 분명히 마에다나 시바타가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하고 노부나가의 후계자 자리를 꿰어찰 것이 분명했고 그렇다고 군을 돌리면 당장에 모리가 등 뒤에서 달려들어서 히데요시를 박살 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노부나가에 심취해있던 히데요시는 소식을 듣고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이때 히데요시에게 회군을 진언한 것이 바로 귀모(鬼謀: 귀신같은 모략)이라고도 불리는 구로다 요시타카였다.
일설에 따르자면 이때 구로다는 "마침 잘 되었군요. 이걸로 히데요시님에게 천하의 길이 열렸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몹시 놀라서 손에 들고 있던 물건까지 떨어트릴 정도였고, 구로다의 말에 따르기는 했지만, 그 지략을 몹시 두려워하여 경계했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구로다 간베에 참조. 히데요시가 구로다의 제안에 따라서 한 신속한 회군은 일본사에 남는 역사적인 것이 되었다.

또한, 일본의 상업을 크게 발전시킨 것으로도 알려지는데 사실 이건 노부나가의 정책을 본받은 것이다. 원래 밑바탕이 없던 히데요시는 자신을 써준 노부나가에게 심취하여 노부나가 흉내를 많이 내었다.[32]

일본의 정치사적으로 보면 도쿠가와 막부가 다스린 에도시대 체제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기도 하다. 토지 조사(태합검지)와 가타나가리(칼사냥), 상업통제와 사농공상 신분제를 철저히 한 것은 도요토미 정권이 시행한 정책들로, 히데요시 정권의 정책은 이후 도쿠가와 막부가 그대로 수행해 나갔고 이것은 도쿠가와 막부가 전근대 일본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권을 수립하는 데 주춧돌이 된다.

8. 후세의 평가

에도 막부 시절에는 당연히 저평가되었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명분상이지만) 천황을 중시했다는 점이 높게 평가되어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신 신사를 재건하는 등 이후 일본 제국 시절까지 상당히 고평가되었다. 조선/중국 침략에 광분해 있던 그들에게는 히데요시가 대륙 침략의 선구자였으니까. 실제로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는 경술국치 당시 "고바야카와, 가토, 고니시가 이날을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시를 지을 만큼 그들에게는 임진왜란은 대륙침략의 모범적 사례, 히데요시는 나름 국위선양을 한 인물로 인식된 모양이다. 이런 천하의 개쌍놈들이 있나

반대로 이에야스는 음침한 계략꾼으로 상당히 저평가되었는데, 이유는 물론 메이지 유신 체제에서는 타락한 구체제 역할을 맡은 것이 에도 막부인데다가 교토 근방이 거점이었던 히데요시에 비해 막부를 세우고 에도에 거점을 둔 이에야스는 황실을 푸대접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에야스 외에도 일본 역사상 천황을 갈아치웠던 아시카가 다카우지,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그 목상(木像)이 대역죄로 효수를 당했다(…).

물론 일본의 패전 후에는 이 평가가 정반대로 뒤집혀 이에야스는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하소설 버프를 받아 평가가 수직상승한다. 이래저래 이데올로기에 따라 평가가 왔다갔다하는 인물들이지만 분명 저마다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국내에서는 임진왜란의 원흉인 탓에 대체로 부정적인 이미지이지만, 일본에서는 그의 입지전적인 출세 경력과 일본 국내에서의 업적, 평소 다정다감하고 허물없던 성격에 더 많이 주목한다. 일본 사람들이 자주 쓰는 히데요시의 호칭 중 하나는 생전에 그의 경칭으로 쓰인 '타이코(太閤)'다. 특히 오사카 성을 쌓고 오사카를 크게 발전시켰던 인물이라 그런지 오사카에서는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오사카 사람들은 히데요시를 타이코한(太閤はん)[33]이라는 친숙한 애칭으로 부른다고 한다.

이 외에도 조선에서는 한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군을 시역했다는 식의 풍문이 널리 퍼진 바 있다. 이러한 풍문은 징비록과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시역했다는 사실은 한 때 조선 조정이 일본과의 수교를 꺼리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는 사극 징비록에도 나타나 있다. 훗날 강항 등이 도착해서 찬탈, 즉 반역을 한 것은 맞으나 시역은 아니라고 했다.[34]


임진왜란의 임펙트가 워낙 거대해서 문제지만 임진왜란의 침략자라는 관점을 배제하고 보면, 가장 밑바닥의 병사부터 시작해서 최고 위치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일본에서 인기가 많을 만도 하다. 일본 드라마 등에서는 매우 다정다감하고 잔혹한 살육을 싫어하는 인물로 묘사되곤 하지만, 사실 노부나가의 부장일 때부터 잇코 잇키를 토벌하기도 했고 심지어 모리와의 싸움에서는 모리에 대한 위협으로 여자와 아이 2백여명을 책형에 처하는 잔인한 행위를 저지르기도 했다. 이것들은 당시에는 흔히 있던 일이라 특별히 히데요시가 잔인하다고 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권력을 잡고 나서는 친조카인 히데츠구의 일족을 아이까지 잔인하게 학살하거나 자신을 비방한 사람을 집요하게 찾아내서 몰살하곤 했으니 꽤 잔인한 처사가 많았던 것은 사실. 오사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은 사실 지방의 역사적 인물일 뿐이어서 그럴 뿐, 정작 히데요시 본인은 나고야 출신인데다가 오사카 사람들에게는 이런저런 일로 비방이나 풍자의 대상이 될 정도였다.

9. 기타

2ch에서의 별명은 '라스트 보스'. 오다 노부나가 빠들이 많은 이곳 특성상 악당 취급될 때가 잦다. 우리 노부나가 님이 이룬 걸 어디서 갑툭튀한 듣보잡 원숭이가 집어먹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의사 양반!

장사하며 밑바닥부터 올라온 인생 여정 때문인지, 만화 등의 매체에서 묘사할 때는 물건이나 사람 보는 눈이 좋은 인물로 묘사된다. 어느 만화에서는 생선장수로 나오는데, 말투만 듣고도 그 사람의 출신을 알아내고 그 지역의 입맛에 맞게 소금간을 해서 인기를 끄는 모습도 보여줬다. 상인으로서도 대성했을 것 같은 모습이 긍정적인 면으로 자주 부각되는 인물. 야사에서는 천하를 통일한 뒤에 가마쿠라의 쓰루가오카 하치만구에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목상을 보고 "당신은 천황의 후손에[35] 할아버지 때부터 관동 땅에서 한끝발 하던 분들이라 유배지에서 거병했을 때에도 사람들이 막 따랐겠지만, 난 성씨도 계도도 없이 이렇게 천하를 잡았으니 은수저 물고 태어난 당신보다는 내가 더 뛰어나지 않음? 그래도 같은 맨주먹으로 일어난 처지끼리 서로 친구나 먹는 게 어떰??"이라 말했다고 전한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임란 직전 통신사들이 남긴 기록에서 그에 관한 서술이 남아 있는데, 대체로 "생김새는 원숭이 같고, 왜소한 체격을 숨기기 위해 낙낙한 옷을 입었다. 볼품없는 풍채이나, 눈빛만은 광채가 형형해 주위의 대신들을 압도했다"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또한, 아직은 설에 불과하지만 강항선생의 간양록이나 몇몇 문헌에 의하면 오른쪽 손가락이 6개였다고 하는데 이것 때문에 컴플렉스가 있어서 잘라버렸단 설이 있다. 만화 센고쿠 덕분에 한국에도 알려졌다.

오랜 세월 자손이 없었는데 갑툭튀한 히데요리에 대해서는 실은 친자가 아니라 요도기미가 불륜을 통해서 얻은 자식이라는 설이 있다. 사실 히데요시는 여자를 꽤 좋아해서 전국에서 미인을 끌어모았는데 그럼에도 자식은 세 명밖에 안 되며 그중에 두 명이 요도기미가 낳은 것이다. 심심치 않게 제기된 설이었으나 비교적 이후에 이루어진 연구에 의하면 히데요시가 나가하마 성주 시절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더 두었다는 기록도 발견되면서 히데요리 비친자설은 그냥 설 중 하나로 전락 상태.

위에서 말했듯이 농민 출신이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여자는 대단히 밝히지만 당시 다이묘나 무장 중에선 드물게도 남색을 좋아하지 않은 인물로, 이 때문에 반대파들은 이를 두고 "천한 출신이라 풍류도 모른다"(...) 게이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 아니 천박해! 라고 깠다. 한 번은 이러한 평판을 불식시키려고 부하들이 미동 수십 명이 있는 방에 히데요시를 데리고 갔는데, 히데요시가 미동 중 하나를 보고는 달려가서 그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잠시 후 미동이 돌아오자 부하들이 그 미동에게 '총애'를 받았냐고 물으니까 미동 曰 "누나 있냐고 물어보셨습니다" (...) 도요토미 병장

여색은 그야말로 혹해 있었던지 쥬라쿠다이 저택에 수백의 첩을 둘 정도였는데, 그중에는 친구인 마에다 토시이에의 딸도 있었다. 나이차는 당연히 30세 이상.(!) 낮은 신분에 대한 컴플렉스 탓인지 고귀한 여성이 취향이었다고 하며 측실 중에 옛 주군 노부나가의 혈연이 많다. 노부나가의 여동생의 딸이라든지, 노부나가의 남동생의 딸이라든지, 노부나가의 딸이라든지.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와는 달리 천주교를 매우 탄압했는데, 루이스 프로이스 같은 수도사는 "우수한 기사로 전투에 숙련되어 있으나 기품이 부족하다. 키가 작고 추악한 용모에 한 손에 여섯 손가락이 있었다. 극도로 음탕하고 악덕에 오염되어 성욕에 탐닉해 있었다. 빈틈없는 책모가이다."라고 히데요시를 평가했다. 이에 반해 그 부인인 네네에 대해서는 "이교도이지만 대단한 인격자"라고 찬평하기도 했다.[36] 히데요시 초기에는 노부나가의 정책을 이어받아 천주교에 대해 긍정적이었지만 갑자기 태도를 바꿔 크리스천을 멀리하게 되고 탄압하였는데, 이렇게 된 동기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그들이 진출한 나라에서 포교 뒤에 한결같이 포르투갈 령이나 스페인 령의 식민지로 변해 가는 사실과, 더욱이 규슈 정벌 중에 쿠마모토현 아마쿠사 제도(熊本縣 天草諸島) 지방의 빈곤 가정출신의 수많은 여성이 노예선에 태워져 인도 방면으로 팔려 나간 사실 등을 알게 되고서부터였다고 한다. (山岡莊八저 역사문고 講談社 발행 "德川家康" 제20권 중에서)

한일관계를 사상 최초로 악화시킨 장본인으로서 임진왜란 이전에도 왜구들이 기승을 부렸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그냥 소수[37]의 도적패들이 난립하는 모양세였지 국가 VS 국가의 싸움은 아니었다. 그 이전의 한일관계를 보자면 오히려 삼국시대 당시 황산벌 전투에서 백제가 패배하고 계백이 전사하자 일본측에서는 고교쿠 덴노가 몸소 3만명의 일본군을 징발하고 거처를 옮겨 가며 백제의 멸망을 막기 위해 거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38]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킴으로 인하여 한국과 일본은 사상 최초로 국가 VS 국가의 전면전을 치르게 되었고 한일관계는 유사 이래 최악으로 치달았다. 임진왜란을 시작으로 한 한일관계 악화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문이 일본을 다스리는 기간 동안에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가 다시 일제강점기로 인하여 심화되었다.

히데요시의 사인에 대해서는 매독,결핵,이질, 등 여러 설이 있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에서는 소수의 설이지만 독살로 죽었다는 얘기가 있다. 문제는 이 독살설을 꾸민 주역이 명의 강화 사신으로 온 심유경과 조선인 소년 양부하라는 것. 이 이야기의 원전은 숙종조 문신 염헌 임상원의 개인문집 <염헌집>에 실려있다. 임상원은 직접 90세 고령의 양부하를 만나 히데요시 죽음에 대해 들은 얘기를 채록했고,후대에 이익의 <성호사설>,이긍익의 연려실기술,정조대에 <국조인물고>등에도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체로 염헌이 정리한 독살설이 수록돼있다.

양부하[39]는 어린 나이에 동래에서 살다가 왜군이 부사 송상현을 죽이고 동래성을 함락시키는 와중에 할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이 왜군에게 살해당했다. 그 직후 포로로 끌려간 양부하는 하루 만에 간단한 일본어 회화를 구사해 총명함을 인정받아 히데요시의 시동으로 보내졌고 그의 수발을 들게 됐다. 몇 년후 강화 교섭으로 건너온 심유경을 만났고 그와 히데요시 독살을 모의하게 되는데 그 과정은 이와 같다.

어느 날 심유경은 히데요시와 대면하면서 이상한 환약을 자꾸 섭취했다.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계속 약을 집어 삼키는 심유경의 행동에 히데요시는 궁금하게 여겼다. 이윽고 히데요시의 질문에 심유경이 대답하길 대륙과 열도의 풍토가 맞지 않아 몸이 허해졌는데 그 허해진 기운을 보충해주는 아주 좋은 강장제라고 대답했다. 그 말에 히데요시는 처음에는 의심해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자꾸 권하는 심유경의 권유에 결국 약을 들이삼켰다. 그런데 얼마 후 히데요시는 몸에 기운이 솟는 것을 느끼게 되고 심유경에게 약을 받아 그 후로도 자주 약을 섭취하는데…….

이것이 사실 심유경이 진정 의도한 바였다. 훼이크다 이 병신들아

그 약은 사실 복용한 사람을 점점 말라죽이는 비소 계열 독약으로 심유경은 객사로 오자마자 바로 해독약으로 응급처치를 해서 아무 탈이 없었으나 이를 모르고 해독제 없이 복용한 히데요시는 그 탓에 점점 말라가고 기운이 빠져 사경을 헤메여 백약이 무효인 채 얼마 안가 비명횡사했다.

다만 이야기의 출처가 정식 사서가 아닌 개인이 기록한 야사이며 현재도 히데요시의 사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있으므로 단순히 조선과 일본 소수 측에만 돌던 가설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하다. 아무튼 이 설이 맞다면 세 나라를 속이고 더 나아가서 뛰어난 사기로 전쟁을 일으킨 전범까지 골로 가게 만든 심유경은 도대체……. 대륙이 배출한 진정한 사기꾼 of 사기꾼, 사기의 신.

인터넷 트롤링에 낚인 기자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개전을 선언하며 한 말이 니코니코니라는 기사를 올리기도 했다.(...)
도요토미: 니코니코니, 조선의 하트에 니코니코니. 죽음을 전하는 도요토미 니코니코.
휘하 장수 및 병졸: 니코니코니!!!
오다 노부나가 : 사루, 이놈 뭐하고 있느뇨?
히데요시 : 개전연습을 준비하고 있습죠
이순신 : ?!!

10. 대중매체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기타 창작물 항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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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다만 이에야스는 이 문장을 거절하고 본래 자기 가문의 문장인 접시꽃 문장을 쇼군 가문의 문장으로 사용했다.
  • [2] 가토 기요마사,와키자카 야스하루,토도 다카토라,고니시 유키나가,후쿠시마 마사노리등등 임진왜란때 참여했던 무장들도 상당수 있지만 그래도 임진왜란을 주도했던 히데요시보다는 덜 유명하다. 한국에서의 인지도도 낮지만 저들은 하나같이 객장이라 비중이 크게 다뤄지는 경우도 거의 없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쿠빌라이칸이 고려를 침략했다고만 알고있지, 실제로 선봉에선 몽골 장수들의 이름은 잘 모르는 것 처럼.
  • [3] 당시 일본에선 아시가루는 말이 좋아 무사이지(전국시대에는 하급 보병단 역할), 발에 챌 정도로 흔한 졸병. 이 정도로 미천한 신분이었기에 단순하게 '천민 신분'으로 규정하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당대 아시가루는 무사와 농민의 중간적 계급이었는데, 이 때문에 천민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 [4] 칸파쿠 취임 후에 자신의 모친이 츄나곤의 딸로, 궁정에서 시녀로 일하다 낙향한 후 자신을 낳았다고 선전한 적은 있다.
  • [5] 이때 얻은 이부(異父)동생이 도요토미 히데나가와 여동생 아사히히메. 이에 대해 이설도 있지만, 아무튼 히데나가는 그의 영지였던 야마토국의 이름을 따서 야마토 다이나곤이라 불리며 형의 충실한 동반자요 심복으로 활약한 인물로 그의 이른 죽음이 도요토미 정권의 붕괴로 이어졌다는 설까지 있는 거물, 그리고 아사히히메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정략결혼을 하여 스루가 마님이라 불렸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
  • [6]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배배신, 즉 가신의 가신의 가신이었다!
  • [7] 추운 날 노부나가의 신발을 데우려고 품 속에 품고 있자 노부나가가 크게 마음에 들어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한데, 사실 이 일화는 명확한 사료가 있는 게 아니라 전설의 영역에 가깝다고 한다.
  • [8] 이 일화도 후세에서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높다.
  • [9] 히데요시는 천한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그의 가신들은 대부분 그와 그의 아내 고다이인의 친인척들일 수밖에 없었고, 정식으로 가신들을 양성하기 시작한 것은 오우미에 터를 잡으면서부터의 일이었다. 이런 정황 때문에 히데요시 사후 이시다 미츠나리를 중심으로 하는 오우미 계열 가신들과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을 중심으로 하는 오와리 계열 가신들의 갈등이 일어났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 [10] 62대 무라카미텐노의 7대손인 미나모토노 스에후사(源季房)의 아들 아카마츠 히데노리(赤松秀則)을 시조로 하는 가문. 무로마치바쿠후의 창건에 힘쓴 가문이지만 카키츠의 난을 일으킨 대가로 멸문당하기도 했다.
  • [11] 아카마츠 히데노리의 5대손인 아카마츠 노리무라(赤松則村)의 4대손 마츠바라 사다모토(松原貞基)를 시조로 하는 가문. 흔히 무라카미겐지 아카마츠시류 마츠바라씨(村上源氏赤松氏流松原氏)라고 불린다.
  • [12] 아카마츠 노리무라의 증손자 벳쇼 아츠미츠(別所敦光)를 시조로 하는 가문. 이렇게 1579년까지 멸망했던 가문 중 아카마츠·마츠바라·벳쇼의 세 가문은 같은 혈족에서 갈라져 나온 가문이다.
  • [13] 모리 측 대장인 시미즈 무네하루가 할복하고 성은 히데요시 측이 갖는 대신, 성내 약탈을 금하는 내용
  • [14] 물론 이건 기마무사 기준이다. 보병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함
  • [15] 우츠미로 발음하는데, 노부타카가 죽은 곳의 지명. 그리고 과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등의 아버지였던 요시토모가 부하에게 배반당해 죽은 곳이기도 한데, 이를 빗댄 구절이다
  • [16] 이때 히데요시의 관직이 치쿠젠노카미였으므로 하시바 치쿠젠노카미 히데요시(羽柴 筑前守 秀吉)고 불렀다.
  • [17] 근위부의 차관급
  • [18] 태정관의 차관급, 조선의 도승지에 상당. 단 권관이므로 정원 외.
  • [19] 헤이안 시대에 등장한 율령 외 직위로써, 헤이안 시대 후지와라 가문이 섭정(셋쇼), 관백(칸파쿠)를 장악한 셋칸 정치를 벌인 바 있었다. 이 시기에는 명예직에 불과한 공가의 직위였다. 유래는 <한서(漢書)> 곽광전(霍光傳)에 “모든 정사는 곽광에게 거친 뒤에야 천자에게 아뢰었다.”는 글에서 나온 것.
  • [20] 조정 최고위
  • [21] 다만 살았다면 조정의 지침을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오다는 미나모토 가문의 후손이 아니었기에 쇼군이 될 수 없었다.
  • [22] 당시 일본은 성(性)과 씨(氏)가 구별되었었는데, 히데요시는 고셋케의 일가인 후지와라(氏) 씨 코노에(性) 가의 일원으로 관백에 취임했으나, 조정으로부터 도요토미(氏)를 받음으로써 새로운 가문을 열게 된 것이다.
  • [23] 물론 그 휘하의 병력을 동원해 압박할 수는 있었겠으나 그 병력은 대부분 조선 정복하겠다고 보냈다가 말아먹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도요토미 가문이 확실하게 믿을 만한 병력은 이시다 미츠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오오타니 요시츠구, 우키다 히데이에 등 소수에 불과했고, 오사카 성의 전투 때는 좀더 병력이 늘긴 했지만 이것도 실상은 진짜 충성하는 자들이 아니라 에도 막부에 대한 반감이 큰 낭인들이 대거 가세한 것이다.
  • [24] 다만 농민과 무사를 완전히 분리하지는 않은 것 같다.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대규모 병력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 [25] 야사나 민간설화에서는 히데요시가 오이치를 짝사랑했다는 설이 많고, 오이치의 딸 중 그녀를 가장 많이 닮은 딸이 요도도노라고 한다.
  • [26] 이 때 너무 슬퍼한 나머지 자기 상투를 칼로 잘라버렸을 정도라고 하며, 또한 이 때의 충격으로 히데요시가 노망 잔혹하고 의심많은 성격으로 변했다는 해석도 있다.
  • [27] 쉽게 말하면 일본이 곧 명나라를 정복할테니 조선이 그 길을 안내하라는 뜻. 만약 조선의 왕이 이를 받아들인다면 그때부터는 히데요시 휘하의 한명의 다이묘로 전락하게 된다.
  • [28] 탄금대 전투 정도가 예외적인 케이스인데, 이 경우도 경군 일부를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오합지졸이었다. 이런 병력을 데리고 조령에서 매복하는 대신 달천평야에서 정공법으로 승부를 건 신립이 괜히 비난을 받는 게 아니다.
  • [29] 형식적으로는 참가한다면서 1000명 가량의 병력을 차출하긴 했지만, 일본 본토에서만 대기했을 뿐 조선에는 단 한 명의 병력도 보내질 않았다. 80년대에 MBC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 임진왜란에선 도쿠가와에게 파병하라고 명령을 내려도 나중에는 대놓고 배째 개무시하는 도쿠가와를 보고 히데요시가 버럭 거리다가 쓰러지는 묘사가 나왔었다. 그런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얼마나 여우같은 위인이냐 하면 그나마 예비대라고 내놓은 것도 자신의 영지에 도적이 횡행한다는 이유로 몇십명씩 곶감 빼먹듯 빼갔다.
  • [30] 1591년 할복
  • [31] 당장은 힘으로 누르고 있는 이에야스만 하더라도 미카와에서 누대에 걸친 충성스러운 가신단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자신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히데요시는 싹수가 있어보이는 유망주들을 모아서 키워내 적절하게 써먹었으나,그의 사후...
  • [32] "노부나가가 진을 치면 풀 한 포기 나지 않지만, 히데요시가 진을 치면 시장이 들어선다"란 말이 있다. 다만, 이것은 상업 장려 외에도 히데요시가 즐겨쓰던 '기동전'과 '기만전술'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한데, 예를 들어 오다와라의 호죠가를 정벌할 당시에 대군으로 오다와라 성을 포위한 뒤 뒤에 목책을 쌓고 그 너머에 시장과 유곽(!)을 세워 비번인 병사들과 여자들이 노닥거리는 모습을 일부러 보여주어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등의 공작을 펼치기도 했다고 전한다.
  • [33] 'はん'은 "~씨"를 뜻하는 'さん(~상)'의 간사이 방언이다. 한국어 식으로 번역하자면 방언이니까 '태합 아재' 정도.
  • [34] 히데요시가 반역자인지 어떤지에 대해 여기서도 토론이 있었다. 통상 반역을 주인에게 가야 할 권리를 부하가 빼앗는 행위로 해석한다면 히데요시는 오다 히데노부에게 가야 할 주군으로서의 권리를 결과적으로 볼 때 빼앗은 셈이므로 히데요시도 반역자가 맞기는 하다. 다만, 전국시대는 워낙에 상막장의 시대였으니 이것이 당시 일본에서 특수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오다 가문은 히데요시와 서열이 뒤바뀌어 있기는 하나 요도도노 등의 사례를 통해 볼 수 있듯이 완전히 몰락하지는 않았고 훗날 가문이 이어져서 메이지 시대 당시 자작급은 될 정도로 그 세력을 유지하기는 했다. 그런데 일개 듣보 대마도 영주도 백작인데 천하통일을 할 뻔한 가문이 자작이라니 너무하다.
  • [35] 미나모토 씨 자체가 덴노에게서 갈라져 나온 성씨다.
  • [36] 천주교에 우호적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에 대해서는 "신불과 같은 우상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에게는 오직 현실만 있을 뿐, 내세같은 것은 믿지 않는다."라고 했다. 프로이스도 노부나가가 우호적이긴 하지만, 천주교를 믿을 생각은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 [37] 물론, 고려 말의 왜구의 경우에는 '소수'라는 말이 무색하게 수천에서 수만 단위로 난리를 일으켜댔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 항목 참고.
  • [38] 결과는 기록적인 참패를 당하고 그 3만명은 전멸했다.
  • [39] 남원 양씨로 히데요시 사후 모리 테루모토 휘하에 있었다가 35세의 나이로 조선인 백여 명을 데리고 조선에 귀환 후 95세까지 장수했다. 참고로 이 이야기는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 서당 등에도 나와서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