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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노

last modified: 2017-09-01 16:38:24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칭호 문제
3. 입헌군주국으로서의 왕국과 제국, 일왕과 천황
4. 어원
5. 관련 신화
6. 상징성
7. 현재
8. 한국과의 관계
8.1. 방한(訪韓) 여부?
9. 기타
10. 관련 항목

일본 황실의 인장[1]


1. 개요

일본국 헌법
  • 제1조
    天皇は、日本国の象徴であり日本国民統合の象徴であって、この地位は、主権の存する日本国民の総意に基く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고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이 지위는 주권이 있는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초한다
天皇(てんのう). 일본의 군주이자 일본의 종교신토의 중심을 구성하는 사람을 부르는 명칭.

한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하늘의 황제라는 뜻이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일본의 국교였던 국가신토에서는 신으로 모셔졌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황국사관'과 관련되어 일제 군국주의 시대의 대명사로도 쓰인다.

리그베다 위키에서는 일본어 발음(てんのう)을 국립국어원 외래어 표기법으로 표기한 '덴노'로 표기한다.

2. 칭호 문제

일본 제국 시대의 일본어 발음은 한자를 그대로 읽어서 '텐노'. 영어로는 Emperor of Japan. 1975년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공산혁명으로 폐위되면서 에티오피아 황실이 붕괴되었고, 샤한샤를 칭하면서 황제의 칭호를 쓰던 이란의 팔레비 국왕이 1979년 2월 이란 이슬람 혁명으로 축출되면서 1979년 9월까지 군림하던 중앙아프리카제국보카사 1세 홯제도 있었다 현재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외적으로 'Emperor'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현대의 일본에서는 덴노를 부를 땐 대부분 존칭을 붙인 덴노 헤이카(천황 폐하)를 사용한다, 또는 줄여서 헤이카(폐하). 간혹 금상(今上)이나 미카도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황실 사람만이 아니라 보통 일본인들이나 일본 언론도 모두 '덴노 헤이카'라는 말을 쓰고 덴노와 그 일가에 대해 존칭을 사용한다. 황실이 있으니 당연한 것이긴 한데 옛날에 황실이 사라진 한국인들이 보면 낯선 부분.

그러나 북한에서는 가끔 '왕'이라 부른다.(...) 조선시대 때는 주로 '일본국왕'을 사용하였으나 왜왕(倭王), 왜황(倭皇), 천황(天皇), 국왕(國王), 위황(僞皇, 가짜 황제), 기군(其君, 그 나라 임금) 등의 다종다양한 명칭이 혼용되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왜왕이란 단어가 '야마토'의 국왕이란 뜻이라서, 일본에 쇼군 이외의 다른 군주가 있다는 자체를 몰랐던 시기도 있었을 정도. 애초에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는 덴노는 아무 실권이 없고 일본외교 주체는 쇼군이었고, 쇼군중국이나 조선에 대해 자신을 일컫는 말은 '일본국왕(무로마치 막부)'이나 '일본국 대군(도쿠가와 막부)'이었다. 이것이 수정된 것은 숙종 대의 일로, '일본국 대군'이라고 하던 쇼군의 칭호를 '일본국왕'으로 상향시켰고 이후 조선에서도 덴노를 '왜황(倭皇)'이라고 부른 것을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 19세기 말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사신단이 대놓고 일본 덴노가 조선 국왕보다 서열이 높다고 강조하기 전까지는 명칭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며, 상하 관계라고는 전혀 생각한 바가 없었다. 조선인으로선 조선과 일본은 동등한 관계에서 화친해야 마땅한데, 19세기 후반 들어 일본이 자기들이 높다고 하면서 밀고 들어오니 조선으로서는 어이상실. 더군다나 일본은 중화세계에서 벗어나 서양의 오랑캐들과 동급이 되기로 자처한 나라 아니던가? 결국 조선 측에서 일본이 화친을 하고자 한다 하여 여기서는 한 수 접고 들어가주었다. 다만 정작 중화사상의 본거지였던 중국에서는 1871년에 이미 청일 수호 조규, 즉 대등한 관계로서 국교를 맺었던 적이 있어 미묘하긴 하다. 이는 청나라 건국 이후 일본을 당시 통치하고 있던 에도 막부와 조공, 책봉 관계를 맺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이 근대화된 이후 대등한 관계에서 근대적인 조약을 맺은 것이다. 그런데 조선 입장에서는 청나라도 오랑캐였고 소중화사상에 의거 중화의 정통 계승자는 조선이었다

이 문제 역시 조선이 독립국으로서 대군주 칭호를 택하면서 사실상 해소되었고, 대한제국으로 국제가 바뀌면서 '대한제국 황제'가 '일본제국 천황'과 동등해짐으로서 이 문제는 형식적으로는 완전히 해결된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백범일지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천황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며, 한창 전쟁 중인 중국에서도 천황으로 불렀다. 또한 신채호가 쓴 조선혁명선언에서도 천황이라는 단어를 쓰고있다. 참고로 인왕산, 의왕시 등 한국의 지명에 들어있는 '旺'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이 '王'을 '旺(= 日+王)'으로 멋대로 바꾼 일제 잔재라면서 이를 '王'으로 환원하는 작업이 꾸준히 추진 중인데, 이는 지극히 우리 중심적으로 생각한 편견이다. 과거 사료에도 '旺'이 꽤 쓰였다는 건 차치하더라도, 일본에서는 금기시되는 표현인 '일왕'을 당시 조선총독부가 앞장서서 사용했다는 건 어불성설이기 때문. 덴노를 대놓고 깔아뭉개는 단어를, 군국주의 정신에 충만해 있었던 조선총독부가 미쳤다고 그렇게 애써 사용하려고 했을까.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일왕, 천황이라는 표현이 혼재되어 사용되어 왔지만, 1989년 재일동포 지문날인 파동 이후 대일 감정이 악화되면서 언론에서는 일왕이라는 명칭만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8년의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으로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호칭할 때는 천황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래서 언론에서는 천황, 일왕 표현이 혼재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노무현 정부 때 독도 분쟁으로 천황 표기의 일왕(日王) 전환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결국 성사되지 않았고,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공식석상[2]에서 일본 천황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명박 정부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초기 '천황'이란 발언을 했었고 후기 '일왕사죄발언'당시에는 '일본왕'이라는 표현을 썼으나, 이것은 1회성에 그쳤고 이후 공공기관에서 기존의 천황 표기를 일왕으로 교체하는 등의 후속조치는 없었다.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 이후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현재까진 '천황' 호칭을 그대로 쓰고 있으며 이것을 단순한 외교적인 관례라고 치부할 만큼 천황과 다른 국내용 표기를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한 바는 없다. 이외 국립국어원에서의 천황이란 단어에 대한 정의를 '천황: 일본국 왕을 가리키는 말'내리는데 고유명사 취급이다. 戰後 평화노력 인정 '천황' 공식 사용키로
노무현 정부, 공식문서에서 '日王' 전환 추진역대 언론자료로 본 천황 사용 비율 역대 언론자료로 본 일왕 사용 비율 서구와 베트남 말레이시아에서 쓰는 사용 실태(오마이뉴스)

다른 식의 표기로는 이원복 교수는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서 일본어 발음을 그대로 쓰는 '덴노'라는 표기를 주장했다. 다만 이 주장은 덴노를 천황으로서의 의미보다는 '파라오'나 '짜르'처럼 일종의 유명사로써 바라보자는 근거를 곁들였다. 2012년부터 고등교과목으로 채택될 예정인 동아시아사천황이라고 써서 논란이 일고 있는데, 사실 고대사를 다룰 때 '천황제의 확립'과 같은 표현은 일반적인 편이다. 물론 이쪽도 '일본의 고유명사', '일본식의 특이한 세계관'을 표현하는 것임을 전제로 한다[3].

현지에서 표기하는 방식과 다른 어휘를 쓰는 예시로 황제도 있다. 중국에선 황제=최고 지배자이고 왕=황제의 지방관리로 인식하기 때문에[4] 우리나라의 사극중국으로 넘어가서 방영되면 조선 왕이 조선 황제로 바뀔 때도 있다.출세했다

3. 입헌군주국으로서의 왕국과 제국, 일왕과 천황

현재 국제관계에서 일본이라는 나라가 다른 나라들을 거느린 제국은 아니다. 일본은 여러 왕국들을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제국"(Empire)이 아닌 하나의 "왕국"(Kingdom)에 해당된다. 때문에 제국의 임금을 부르는 "황"(Emperor)이라는 호칭을 일본의 임금에게 쓰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맞지 않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천황"(天皇, てんのう)을 일본이 그들의 임금을 부르는 고유명사로서, 하나의 존칭으로서 인정할 수는 있으나 실제적 직위로서의 의미를 담은 객관적 이름이라고 볼 수는 없다. 때문에 "일본국의 입헌군주"(constitutional monarchy of Japan)로서의 기능을 하는 "일본의 국왕"이라는 말을 줄여 "일왕"이라고 부르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가장 맞는 것이 사실이며, 때문에 천황이라고 부르지 않고 일왕이라고 부르는 것이 꼭 한국민의 감정적 이유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조선도 실질적으로는 왕국이었으나 중국과의 사대를 철폐하기 위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왕"이라는 칭호도 "황제"로 유지했다 새롭게 격상시켰다. 사실 이러한 칭호는 그냥 제국이든 아니든 어쨌든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황실'을 유지했으니 칭호도 '황제'로 유지한 것으로 보는게 옳다. 굳이 군주를 높인다는 의미보다는 말 그대로 전해져 내려온 것을 유지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결론은 불러달라는대로 불러준 것. 사용할 수 있다. 예부터 이어져온 왕실을 황실로 높여 부르면 그만일 뿐. 하지만 분명 제국과 황제라는 칭호는 그 근원을 따지고 보면 어쨌든 왕보다 높고 왕실보다 높고 제후국들을 거느리는 걸 전제로 하기 때문에, 여러 민족을 지배한 다민족국가인 에티오피아가 황제 칭호를 사용하는 건 그렇다 쳐도 스스로 단일민족을 자부하는 일본이, 특히 대동아공영권 운운했던 전범국가가 사용했을 경우엔 주변국, 특히 대동아공영권의 권역에 속하게 되어 지배를 받았던 피해국들에게는 묘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러한 모순, 즉 일본은 그들의 임금을 왕(King)이 아닌 더 높은 이름(Emperor)으로 부르고 싶으나 실제로 일본이 제국은 아니라는 사실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모순 때문에 일본은 패전이후 기존에 쓰던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 Empire of Japan)이라는 국호를 포기했지만 그렇다고 "일본왕국"(Kingdom of Japan)을 새로운 국호로 하지는 않았다. 제국을 쓰지 못 한다면 차라리 아무 것도 쓰지 않겠다는 심보일까? 현재 일본의 정식국호는 "일본국"(Japan)이다. 일반적으로 입헌군주제를 시행하는 나라는 공식적으로 왕국(Kingdom)이란 표기를 쓴다. 왕이 없는 나라는 물론 공화국(Republic)이나 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등을 쓰고 러시아처럼 여러 나라가 모인 체제는 연방(Federation), 영국의 경우는 연합왕국(United Kingdom), 스위스는 동맹(Confederation)이란 표현을 쓴다(역사적 이유 때문에). 하지만 일본은 1947년이후 현재까지도 국제적으로 "일본국"(Japan)이라는 애매한 이름으로 활동하며, 정식국호에 자신들의 국가체제를 표현하는 왕국이나 공화국 등을 붙히지 않고 아무 것도 안 붙힌 몇 안 되는 나라가운데 하나다.

4. 어원

사실 덴노라는 명칭은 고대 일본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고대 일본의 지배자들의 명칭은 오키미(大王) 등을 거쳐서 마지막으로 스메라미코토라는 명칭으로 올라갔는데 바로 이 스메라미코토의 의미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천황(天皇)이다. 따라서 스메라미코토라고 읽었지 덴노라고 읽지는 않았다.

천황이라는 표기를 사용하게 된 것에 대해서 일반적인 속설로는 중국의 황제인 천자(天子)보다 높아보이려는 목적에서 저렇게 이름 지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쇼토쿠 태자오노노 이모코수나라에 파견했을때 당시의 서찰의 서두에 "동천황이 서천황에게 보낸다" 라고 적혀있는 것으로 볼 때 '천황'이라는 단어 자체를 원래 일본에서 썼을지도 모른다. 사실 천황이 '천신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만큼 원래부터 이렇게 썼다고 하더라도 그다지 이상한 건 아니다.

도교에서는 천황, 지황 등 방위구분이 있었으며 진시황은 모든 황의 가운데에 있는 태황이라는 명칭을 건의받았으나 황제라는 새로운 호칭을 만들었다. 도교 신앙이 일본에 영향을 미치면서 천황이라는 호칭을 수입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천황이라는 용어는 본래 옥황상제를 의미하는 말이다. 중국은 신의 계율사회를 정립하였기 때문에 하늘을 다스리는 황제인 옥황상제를 천황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중국에서의 천황과 일본의 덴노는 확실히 구분해야 한다. 또한 이 '천황' 이라는 단어의 언급 문제는 중국 측과 일본 측의 자료가 확실하게 엇갈린다. 중국측에서는 위진시절에 중국에서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한편 일본에서는 쇼토쿠 태자가 보낸 외교서찰이 시초라고 본다.

혹은 측천무후당나라를 다스리던 시기에 일시적으로 황제를 천황, 자신을 천후라고 높였던 시대가 있는데 이때 일본이 당나라와 접촉하여 천황 칭호를 수입했다는 말도 있다. 또한 도교에서는 북극성을 천황대제(天皇大帝)라고 하는데 북극성은 천상의 궁궐인 자미원의 정점에 자리한 군주이기 때문이다. 지상의 군주도 이와 빗대어 군주는 북쪽에 앉아 남면하고 신하는 남쪽에 앉아 북면하며 궁궐도 북쪽에서 남면하여 남쪽으로 큰 주작대로를 낸다. 도교의 영향으로 군주를 북극성에 비기는 호칭이 퍼졌다는 것이다. 도교 영향을 받기 이전 덴노의 의례는 태양과 연계되는 동서축이 종교의례적으로 중요했다.

사실 일본 내부에서는 미카도(帝)라고 호칭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는 '스메라미코토'라는 명칭을 생각해 보면 단순히 한자어를 발음대로 읽은 덴노보다 더 '정통적인' 호칭인 셈이다. 덴노라고 읽기 시작한 것은 무로마치 막부 시대 황실이 권력투쟁에서 완전히 밀려나면서 스메라미코토라는 의미가 잊혀져간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메이지 유신 후 덴노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확정하기 전에는 덴노는 여러 명칭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지는 못했다. 미카도 등의 다른 명칭들을 제치고 덴노라는 명칭이 낙점된 이유는 바로 '천황'이라는, 하늘에서 내려온 세상의 지배자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5. 관련 신화

다른 나라에서도 흔히 보이는 '지배자를 신격화 하려는' 특성으로 인해서 덴노는 일본 신화의 신의 자손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자나기(男神)와 이자나미(女神) 남매가 현관합체를 비롯한 각종 행위(코를 만지거나 귀를 씻거나 기타 등등)를 통해 일본의 무수한 신을 만들었는데, 그 중에 하시라노우즈노미코(三貴者, 삼귀자, 산키시)라 일컫는 아마테라스, 츠쿠요미, 스사노오가 가장 막강하다. 각각 하늘과 하늘에 있는 타카마가하라(아마테라스)와 달과 역법(츠쿠요미), 바다(스사노오)를 통치하고 있었다.

이 중 바다를 통치하는 스사노오야마타노오로치를 물리치고 야마타노오로치에게 잡혀있던 쿠시나다히메와 결혼해 자식을 두었는데 일본서기나 고사기 등 옛 기록에서는 '오쿠니누시'는 스사노오와 친척이자 스사노오의 사위로 여러 가지 시련을 겪은 뒤 스사노오로부터 마지막 축복을 받았다. 그 뒤 이즈모에 거점을 두고 '나라 만들기'[5]를 계속하여 땅 위를 다스렸으나 지상은 여러 신들이 혼란스럽게 구는 어지러운 나라에 불과했다.

이후 아마테라스의 손자인 아마츠히코히코호노니니기노미코토(天津彦彦火瓊瓊杵尊)와 니기하야히노미코토(饒速日命) 형제를 각각 규슈와 야마토에 내려오면서 '원래 니들 거니까 뺏어와'라고 해서 따지고 보면 사촌인 오쿠니누시를 몰아냈고 그 후 니니기의 자손인 진무 덴노가 또 사촌을 몰아내고 야마토를 통일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서기에서 아마테라스의 손자인 '니니기(아마츠히코히코호노니니기노미코토란 이름에서 神名에 해당하는 부분)' 등을 내려보낸 주체가 전승에 따라 다르다. 일본서기는 여러 가지 전승을 취합했으며 본문이나 일서니 하는 식으로 다른 전승이 있음을 분명히 구분했다. 본문과 일서를 포함하여 가장 오래된 전승에서는 니니키를 내려보낸 주체는 천계 타카마노하라가 열릴 때 처음으로 나타난 세 신들 중 하나라는 '다카미무스히'이다. 그보다 덜 오래됐으며 일본서기 편집자들이 표준판으로 간주한 본문의 기록에는 '다카미무스히'와 '아마테라스'가 공동으로 명을 내렸다. 그리고 일서에 기록된 가장 후기의 전승은 '아마테라스'가 단독으로 명을 내려 손자 니니기 일행을 내려보냈다는 것이다.

시간의 순서에 따라 아마테라스가 황조신(皇祖神)이자 천계 다카마노하라의 주신으로 자리매김함을 알 수 있다. 사실 다카마노하라란 개념 자체가 민간층이 아니라 야마토 조정 내부에서 생긴 궁정신화이다. 야마토 조정의 초기 황조신이 아마테라스가 아니라는 데에는 거의 모든 학자들의 의견이 모인다.[6]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서기 중 일서에만 기록된 가장 후기의 전승을 표준판인 양 정책적으로 퍼트리고 교육했다. 전후 일본인은 물론 외국인마저도 그 영향을 강하게 받아 그때의 덴노관을 일본 고대의 덴노관처럼 이해했다. 가장 후기의 전승을 메이지 정부가 표준판으로 간주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 가장 후기의 전승에 따르면 아마테라스가 손자 니니기를 지상으로 내려보내면서 '천양무궁의 신칙'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천양무궁의 신칙 내용은 요약하면 이러하다. "지상은 내 손자 니니기와 그 자손들이 영원히 다스릴 땅이다."

덴노가 신이면서 죽음을 맞는 부분도 신화를 이용해 구색을 맞춰뒀는데, 니니기가 지상에 내려오면서 코노하나사쿠야히메를 보고 미모에 반해 청혼했더니 그 아버지가 언니인 이와나가히메도 데려가라고 했더랬다. 이와나가는 못생겨서 거절하고 봤더니, 사쿠야를 통해 황실이 만발하는 꽃처럼 번성하라는 것이었고 이와나가를 통해 돌처럼 튼튼하게 유지하라(불사)는 뜻이었다. 니니기가 사쿠야를 취해 황위도 얻고 만세일통하지만, 이와나가를 버렸기에 신의 자손이면서도 불사를 얻지 못해서 죽는다는 것.양손의 꽃을 거부한 댓가 참 핑계좋다

일본서기고사기 등 속칭 '기기신화'가 완성되기 전의 기록을 보면 신화적인 의미에서 진무 덴노 자신이 아마테라스이자 니니기 자신으로 간주되었다. 신화적, 종교적 의미에서 덴노의 계승식이란 아마테라스이자 니니기이자 진무덴노이자 역대의 덴노였던 바로 그 존재가 되는 의식이다.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옛 신화적 관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다.

6. 상징성

일본의 신화에 따르면 '세계 유일의 황제'이자 신의 혈통을 이어받은 '현신'이며 일본의 역사 기록에 따르면 덴노의 혈통이 끊어졌던 적이 없기 때문에 '만세일계의 수호신'으로도 불린다.

이렇게 일본의 명목상 지배자이며 상징성을 가진 구심점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권력을 지닌 시기는 길지 않았으며, 가신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전국시대 이래로는 권력을 잃은 단순한 얼굴마담적인 존재로 전락해 있었다. 무엇보다 쇼군이 실질적으로 일본을 다스리던 막부 시대에는 그게 절정에 달했다. 이 탓인지 한때는 허름한 집에 그림이나 글을 팔아먹고 살고[7] 동네 아이들이 돌을 던지던 안습한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자기들 말대로는 일본 최초의 국가로 생각되는 야마토(大和)로부터 신의 피가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져내려오며 일본을 통치했다고 하여 '만세일통(萬世一統)의 덴노'라고 불리운다. 하지만 '덴노'라는 명칭이 사용된 건 비교적 최근이며 피나 이름이 끊긴 듯도 한 애매한 시기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일본의 패전 직후인 1954년 미즈노 유(水野祐)가 주장한 '3왕조 교체설'이 대표적이다. 그는 "덴노 가문의 역사는 10대 스진 덴노에서 15대 오진 덴노까지의 고왕조, 16대 닌토쿠 덴노에서 25대 부레쓰 덴노까지의 중왕조, 26대 게이타이 덴노 이후의 신왕조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하면서 "스진 덴노 이전의 덴노는 역사상 실재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학설은 많은 비판 혹은 보충의 대상이 되었으나 이후 '기마민족 정복설'이나 '규슈 왕조의 야마토 지역 정복설' 등 다양한 왕조 교체설의 시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런 학설들이 주류로 인정받고 있지는 못하지만 일단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만세일계'라는 것은 허구적인 관념에 가깝다는 것이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덴노가 상황으로 물러나거나 상황이 출가하여 법황으로 물러난 뒤에야 오히려 실권을 가지게 되고 덴노는 사실상 황태자 정도의 지위에 불과한 시대도 있었다. 이를 인세이라고 한다.

특히 이른바 '남북조시대'라고 하여 덴노가 2명이나 있던[8] 시대도 있었는데 가끔은 남조가 우세하기도 했지만 점차 막부가 세력을 넓혀가고 규슈를 완전 복속하면서 결국 북조 쪽으로 기울고 만다. 결국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알선으로 남북조 두 가문이 황위를 번갈아가며 계승할 것과 전국의 천왕 직속령인 "고쿠가레(국어령, 国衙領)"를 다이가쿠지계의 소유로 삼을 것을 조건으로 남조의 요시나리 친왕(후에 고카메야마 덴노로 추숭)이 북조의 고코마츠 덴노에게 3종 신기를 넘겨 남북조가 통일되었다.[9] 물론 이 시기 고쿠가레의 토지는 거의 조금밖에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남조 세력이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기에 당초에 약속했던 교대계승은 당연히 지켜지지 않았고 남조의 혈통은 권력에서 밀려나게 된다. 이 시기의 남조 혈통을 후남조라고 부르는데, 약간 남은 기록이 있기는 하나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어버리는 정도로 매우 안습하다. 결국 '서진의 남조(가칭)'라는 한 왕자가 어느 절에 의탁하였다는 기록을 끝으로 남조의 계통은 완전히 단절되었다.

메이지 시대에는 남조의 정통을 인정했다. 1911년(메이지 44년)에 메이지 덴노의 명으로 남조 2대를 정통 덴노로 인정하고 종래의 96대부터 100대까지의 덴노를 "북조"로 보고 정통에서 제외하였고 남조의 노리요시 친왕, 요시나리 친왕은 덴노가 아니었으나 즉위한 것으로 보고 고카메야마 덴노로 추숭했다. 1926년(다이쇼 15년)에 다이쇼 덴노(실제는 섭정을 한 황태자 히로히토)의 명으로 남조를 정통으로 한 이후에도 즉위의 여부에 대해 의견이 갈린 유타나리 친왕에 대해서도 즉위한 것으로 보고 조케이 덴노로 시호를 올렸다.

하지만 이 때문에 자신이 남조의 후손으로 제위를 이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차례차례… 총합하면 약 50여명 정도 나타났다. 그 중에는 나름대로 큰 반향을 일으킨 사람도 없지는 않지만 지금은 모두 근거없는 주장으로 추정된다.

남북조 시대 혈통분쟁과 관련한 부분은 교고쿠도 시리즈 3권 <광골의 꿈>에서 소재로 사용된다. 그야말로 안습한 역사.

쇼군들이 권력이 있었다 하되 자기가 직접 덴노가 되지 않은 건 권력층에게 지니고 있던 상징성 때문이며 쇼군들도 덴노에게 위임받아서 다스렸다는 식으로 권력을 휘둘러왔다. 나폴레옹이 직접 황제가 되고 교황에게 복종을 요구하면서도 몸소 교황이 되려 하지 않았던 것과도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이덕일의 주장에 따르면 중세 일본의 덴노는 제사장 역할 그 이상도 아니었다고 한다. 실제로 무사들의 지배체제가 굳어지면서 덴노는 직접 권력을 휘두르는 존재가 아닌 상징성만을 지닌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굳이 덴노 자리를 빼앗아서 긁어부스럼을 만들 필요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바지사장과 전주

그러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구심점이자 절대권력으로 옹립되어 막부에서 권력을 돌려주면서 '대일본제국'의 심볼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 이후 덴노가 신이 아닌 인간임을 밝히는 '인간선언' 때문에 '신의 후예' 정도로 약간 위상이 내려갔다.

사실 일본제국 시절에도 덴노가 절대군주였는지는 일본 근대사를 차분히 곱씹어야 할 일이다. 일본제국 시절에 중요한 것은 덴노가 전일본을 다스리는 신국의 계승자라는 '이미지', 즉 권위를 지닌 구심점이었기 때문. 이토 히로부미는 서양 외교관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황족으로 태어남은 큰 불행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예절에 얽매여 살고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라고 하면서 손으로 마리오네트 다루는 시늉을 하여 지켜보던 외교관들이 당황했던 일이 있었을 정도이다.[10]

메이지 시대 초기에 덴노의 위치는 민중에게도 대단히 모호하게 여겨졌다. 당시 일본인들은 오랫동안 쇼군다이묘, 사무라이들의 지배를 받았지 덴노의 지배를 받은 것은 아니었으며, 그랬기에 덴노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현인신(現人神, 아라히토가미)'이라는 개념조차도 민간의 생각과 지배층의 생각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았다.[11]

이를테면 메이지 시대 초기에는 덴노의 행차에 을 집어던지는 레알 돈벼락 일이 꽤나 자주 벌어졌는데, 신에게 돈을 바쳐서 경의를 표하는 민간 신토의 전통을 그대로 덴노에게 적용한 것이다. 만이 아니라 덴노의 행차가 지나가면 이나 노래 또는 음식을 바치는 사람도 나타났다. 이것은 민간인들이 자신들이 아는 민간 신토의 방식으로 신이라고 하는 덴노에게 경의와 숭배를 나타내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덴노에게 서양의 절대 군주와 같은 권위를 씌우려 했던 정부는 이런 행동에 기겁하였고, 금지와 억압으로 이런 전통을 단절시켰다.[12] 같은 이유로 현인신인 천황이 존재하는데 신과 소통한다고 자처하는 것은 불경스럽다는 이유로 기존 신토계의 무속인들도 탄압당했으며, 이는 현재 일본 신토에서 무녀가 아르바이트 직업화하고 신관은 사실상 신사 관리인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메이지 정부는 덴노에게 서양의 절대 군주와 같은 권위를 도금하려 했고, 제국주의 열강의 위협 아래 최대한 빨리 이 일을 해치우기 위해서는 전 국민을 상대로 한 세뇌 작업이 필요했으며, 당연히 폭력과 금지·억압이 덤으로 따라붙을 수 밖에 없었다.[13] 일제강점기 초기의 '헌병경찰'도 사실은 일본에서 하던 짓을 식민지로 가져온 것에 불과했으며, 학교에서는 위처럼 메이지 정부의 입맛에 맞게 각색된 신화를 사실로 가르쳤고, 덴노의 사진과 초상화인 어진영(御眞影)을 모셔 놓고서는 북쪽에서 김가 놈들이 하듯이 큰 절을 올리게 만들었으며, 불타는 학교에 그 어진영을 구하려고 뛰어들어갔다 죽는 교사가, 그리고 2차대전 때는 다이호가 피격당해서 함내에 화재가 발생했는데도 함내에 걸린 어진영을 다른 구축함에 옮기겠다고 뻘짓을 해서 화재유폭-굉침에 일조하는 일이 나올 정도였다(…). 나중엔 궁성요배식민지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강요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실패와 몰락은 이미 여기서 예견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 실제 권력이야 어쨌건 근대 일본에서 덴노의 상징성과 신성함은 대단한 수준으로 격상되었다. 심지어 메이지 덴노가 잠시 묵었던 집에서는 그가 썼다는 물건과 자리에 투명 덮개를 덮어 박물관의 전시물 다루듯 하였고 메이지 덴노가 마시고 목욕했다는 우물물은 '신이 사용한 물이니 신령함이 깃든 만병통치약일 것이다'라고 해 사람들이 줄을 서서 그 물을 받아갈 정도였다고 한다. 덴노가 잠시 머무는 집이더라도 지역에서 유지 가문이어야 하고 가족 중 죽은 이가 없어야 하며 집안에 우환이 없어야 하는 등, 까다로운 조건을 걸고 각별히 신경을 써 머물 집을 뽑았다.

다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덴노였던 히로히토는 단순한 신성불가침의 대상이나 얼굴마담이 아닌 꽤나 실권이 있었던 국가원수였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히로히토가 직접 영향력을 행사했던 케이스는 단 3차례가 있다. 첫째는 다나카 기이치 수상을 질책해서 물러나게 한 사건, 둘째는 2.26 반란 사건 당시 '짐이 직접 지휘하겠다!'고 까지 할 정도로 강경한 태도를 보여서 반란 진압의 계기를 마련한 점, 셋째로, 패전 과정에서도 '성단'을 내리는 등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다. 이 외에도 전쟁 당시 히로히토는 육해군의 동향을 일본 내에서 가장 잘 파악하고 있었으며, 작전을 수정하라고 지시한 사실도 있다. 그를 처벌하지 않았던 더글러스 맥아더는 이런 면에서 잘못한 것이라는 떡밥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문제는 공식적으로는 군부가 덴노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규정되어 있지만 동시에 군부나 정치권의 그들의 의견을 종합해서 올리면 덴노는 그에 따르는 것이 일종의 '전통'으로서 당연시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덴노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메이지 유신 이래의, 더 길게 보면 막부들이 사실상 일본을 통치하게 된 시대부터의 오래된 전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태평양 전쟁 개전 시에 히로히토는 그것이 무모한 시도가 아닌지에 의구심을 표명했지만, 군부는 개전을 재고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단지 덴노를 재차 '설득'해서 개전에 동의하게 했다. 덴노는 군사적 문제의 의사 결정 과정에 사실상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히로히토를 무시하고 개전을 강행하지도 않고 덴노의 동의를 구하는 것 자체는 필수적인 일로 간주했다. 이와 같이 2차대전 당시 쇼와는 군부나 정부에서 이미 결정된 사항을 보고받기만 하면서(막판에 일본의 항복을 결정할 때도 실상을 확인하기 위해 측근을 별도로 파견해야 했다.) 어디까지나 '전통'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만 명령을 내렸고 그러한 명령은 실행되었다. 만약 '전통'의 범위를 벗어나는 명령을 내리려고 했다면, 예컨대 태평양 전쟁 개전에 대해 강경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천명했다면 과연 군부에서 어쩔 수 없이 그에 복종했을 것인지, 아니면 '부적합한' 덴노를 암살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교체하고는 자기들이 원래 결정했던 대로 행동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그저 추측밖에 할 수 없다. 사실 당시의 관계자들조차도 실제 상황이 닥치기 전에는 어떻게 될지 몰랐을 것이다.

사실 히로히토는 서자였던 아버지할아버지와는 달리 적장자였기에 정통성에 흠이 없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미래의 군주로 태어나고 자랐다. 그리고 그가 덴노로 즉위했을 무렵엔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실세들은 이미 죽고 없었다. 히로히토를 위협할 힘을 가진 것은 일본군뿐이었지만 당시 일본군의 육군과 해군은 상호 대립 관게였고 그 둘 모두 내각의 통제는 거부하지만 최고 지휘관인 덴노에게만은 절대복종한다고 맹세했다.

이런 덴노의 상징성과 덴노가 가지는 권위주의 신화에 대해서 MBC가 2005년 '천황의 나라 일본'이라는 이름의 5부작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방영한 적이 있다(이 문서의 참고자료이기도 함). 광복 60주년 기념 특별기획 되시겠다. 이 해 초부터 독도 문제와 교과서 문제로 시끌시끌 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대인배의 기상.

7. 현재

현재도 일본의 상징격인 존재. 영국 국왕과 비슷한, 권력은 없지만 신성 불가침적인 존재이며 언론에서도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 민감한 부분이라 잘못하면 칼 맞을 수도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모에선마저도 비껴나가는 절대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만화나 애니에서 덴노 가문을 소재로 한 건 거의 보기가 힘들다(마코 공주를 제외하면).[14] 다만 아키히토 덴노의 차남 부부인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당시 가와시마 키코)의 결혼을 기념하여 만든 애니메이션이 있다.

또한 언론에서 보도하지 않을 뿐이지, 실제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황실의 숨겨진 스캔들이나 소문, 치부에 대해서 소문이 상당히 돌아다닌다. 예컨대 후미히토 친왕의 불미스런 사생활 문제와 같은 것들. 일본 생활을 해본 어떤 사람이 일본 황실에 대한 일본인들의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자, 그 자리에 모여있던 일본인들이 피식하면서 황실에 대해서 많은 소문들이 돌아다닌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물론 상징이기 때문에 상징답게 처신해야 할 의무가 부과되어 있다. 일본 헌법 1조부터 8조까지 덴노의 규정과 덴노가 해야 할 의무, 권리가 적혀 있는데 한마디로 압축하면 '늬들은 상징이니까 국가 행사에는 무조건 참가해서 상징답게 굴어야 하고 권력? 그딴 거 없으니 님들은 내각이 정하는 것에 군소리 말고 도장만 찍으면 됨'이다. 즉 헌법 레벨에서 '늬들은 꼭두각시니 내각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라'라고 못을 박아놓은 셈이다.

입헌군주제 국가 중에서도 이 정도로 군주를 꼭두각시로 만든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입헌군주제 국가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 명목상의 권리에 불과하기는 해도 국왕은 법률거부권이나 인증거부권, 의회해산권은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덴노는 그런 것도 없다. 왕실 재산조차도 자의적으로 처분할 수 없고, 국회의 의결에 따라 처리하도록 규정되어 있다.[15]

일본국 헌법
  • 제3조
    덴노의 국사에 관한 모든 행위는 내각의 조언과 승인을 요하며, 내각이 그 책임을 진다.[16]
  • 제4조
    ① 덴노는 이 헌법이 정한 국사에 관한 행위만을 행하며, 국정에 관한 권능은 갖지 않는다.
    ② 덴노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그 국사에 관한 행위를 위임할 수 있다.
  • 제5조
    황실전범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섭정을 두는 때에는, 섭정은 덴노의 이름으로 그 국사에 관한 행위를 한다. 이 경우에는 전조 제1항의 규정을 준용한다.
  • 제8조
    황실에 재산을 양도하거나, 또는 황실이 재산을 양수 또는 사여(賜與)하는 것은 국회의 의결에 기초하여야 한다.

보다시피 국사행위에 거부권은 없는데 무조건 승인을 해줘야 한다는 조항도 없다. '덴노는 선하기 때문에 국민의 대표인 의회의 의결을 승인하지 않을 리가 없다'는 다소 어처구니 없는 이유라고 한다. 물론 이건 의식적인 문제이고, 일본 정치인들이 그렇게 머리가 나쁘지 않아서 대책도 다 세워뒀다. "덴노가 핑계를 대며 승인을 차일피일 미룬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법무부에서는 "선한 덴노가 의회의 의결을 승인하지 않는 것은 정신병에 걸린 것이므로 섭정을 세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더 골 때리는 건 중의원 해산(의회해산)에 있어서도 아무런 권한이 없다.(…) 총리(내각회의)에서 중의원 해산을 결정하면 반드시 승인해야 한다. 무조건 승인을 해줘야 한다는 조건은 없지만, 바로 윗문장을 다시 읽어보자. 승인을 안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총리가 각의에서 중의원 해산을 결정하면, 덴노는 그냥 도장 찍은 문서를 주는 역할밖에 못 한다.

거기다 궁내청은 일본 덴노와 그 가족의 일상생활 모든 것을 통제한다. 무엇을 하던 일단 내청으로부터 인가를 받아야 하는데, 한 10가지의 신청을 하면 그 중 9개는 인가를 받지 못한다고 한다. 덴노라고 예외는 없다. 現 마사코 황태자비의 경우에는….

- 책방 가는 것? 불가.
- 친정 가는 것? 불가.
- 커피 마시러 잠깐 나가는 거? 불가.
- 외국에 있는 대학교 동창들한테 전화하는 것? 불가[17].

물론 다른 국가에서는 같은 입헌군주제라 해도 상상하기 힘든 조치다. 패전국의 군주로써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인 셈. 그래도 왕이니까 재력은 빵빵할 것 같다고? 많기는 하다. 정부에서 국민이 내는 세금을 왕에게 때어주니까. 즉, 왕 주제에 정부한테 용돈받아 쓰는 꼴. 기본적으로 입헌군주제 나라 중에서는 정부가 군주에게 월급을 많이 바친다던지, 또는 군주가 직접 세금을 걷되 일부를 정부에게 주는 나라도 있지만 일본은 그다지 안습이다.

이것 외에도 할 수 없는 게 산더미 같다. 그러니까 저 앞에 예로 든 몇 가지 사례는 그 일부이다. 워낙에 많아서 일일이 다 적을 수 없을 뿐이다. 그래서 황실의 신붓감이 될 가능성이 있는 여성들은, 서둘러 다른 남성과 결혼해 버리거나 혼담이 있다는 핑계를 대며, 어떻게든 황실에 시집오지 않으려 한다고. 반면 마사코 황태자비에게는 외교관이었던 전직을 살려서 충분히 일을 하게 해주겠다고 감언이설해 결혼시키긴 했는데, 물론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아니, 지킬 수조차 없었다. 애시당초 자유로운 행동을 허용한다는 것 자체가, 상징성을 넘어 일정한 권리를 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일본 그 자체의 상징이란 이미지는 남아 있다. 애초에 헌법 1조부터 8조까지가 덴노에 관한 것이라는 것은, 덴노의 의미가 일본인에게는 정말 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쇼와 덴노의 죽음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덴노 위중하다고 일본 내 모든 행사가 전부 취소되는 등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물론 처음엔 야단법석에 침울한 분위기를 조성했지만, 해(1989년)를 넘어 질질 끌자 김이 샜는지 서거 당일에는 조용했다.

또 현임 덴노인 제125대 아키히토[18]의 즉위식을 준비할 때는 테러를 방지한답시고 도쿄도 경찰 전체가 동원되어 도쿄 시내 전체의 맨홀 뚜껑을 일일이 열어 확인한 후 봉인하는 유난을 떨었던 적이 있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를 '진저리나는 바보 짓'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또 당시 가이후 토시키 총리가 즉위식에 참여했고 축사와 만세삼창을 불렀으며, 국민의 대표인 총리보다 덴노가 높은 단에 위치해 있었음을 들어 문제가 제기되었다. 즉위 비용으로 소비된 약 400억원의 금액이 전액 국고 지원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는 일본 내에서조차 문제가 제기되어, 가나가와 현의 시민단체가 흔히 만세소송이라 불리는 소송을 걸었으나 14년을 질질 끈 끝에 2004년 기각되었다.

이 시기 시의회에 참석했던 모토시마 히로시 당시 나가사키 시장이 좌익계열 정당에서 당선된 시의원과 이야기하던 중, 전쟁 책임에 대한 집요한 추궁 질문에 "천황에게도 전쟁 책임이 있다"고 답변했다가 글자 그대로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그 시장은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일본 경찰의 철통같은 호위를 받으며 청사 안에서 생활해야 했으며, 집으로는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리고 사태가 좀 진정되어 다시 출근했다가, 1990년 차에 타던 중 등 뒤에서 발사된 총격을 맞고 중상을 입었다. 그가 평소 극우에 가까운 성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입바른 소리 한 번 했다가 생명을 잃을 뻔한 것이다.[19]

아키히토 덴노 스스로가 '일본의 황족에 백제인의 피가 섞여 있다'라는 발언을 했을 때 한국의 소위 재야사학계에서 많은 관심을 가졌지만, 그 근거가 고사기에서 무령왕 - 간무 덴노가 모계 방향으로 먼 연관이 있다고 한 문구 수준이었으므로 확대 해석은 삼갈 필요가 있다. 맞을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여진족 신라인설이 학술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지 않듯, 약 300년간 떨어진 이러한 머나먼 혈연 관계는 고대 백제와 왜국의 관계가 가까웠음을 일정 부분 보여줄 수는 있어도, 덴노가의 혈통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볼 근거가 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단지 現 아키히토 덴노가 외교적 수사를 구사하였을 뿐이며, 오히려 저 발언을 악용해서 한국 침략에 대한 정당화를 주장할 수도 있다는 떡밥도 있었다. 실제로 일본제국의 악명 높은 내선일체가 그 떡밥에서 피어난 곰팡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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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졸업식에 참석한 마코 공주(왼쪽)와 카코 공주(오른쪽). 마코 공주는 가쿠슈인 여자 고등과를, 카코 공주는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를 졸업했다.

황족들의 교육에도 조금은 특이한 면이 있는데, 가쿠슈인이라고 부르는 에스컬레이터 식 학원을 다닌다. 황족뿐만 아니라 패전 때 신적강하되었던 황족의 방계나 재벌가의 자녀 등 유수 가문의 자녀들이 재학하여, 최고의 명문 사립학교[20]로 손꼽혔다. 그러나 이 명성만 믿고 발전이 미비해져[21], 마코 공주가쿠슈인 대학이나 가쿠슈인 여자대학이 아닌 국제기독교대학 교양학부 예술과학과에 진학했다. 아키히토 덴노의 5촌 조카딸들 중 다카마도노미야 쓰구코 공주와세다대학 국제교양학부, 다카마도노미야 아야코(高円宮絢子) 공주는 죠사이(城西) 국제대학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다. 큰아버지 나루히토 황태자의 뒤를 이을 것으로 보이는 히사히토 친왕도 오차노미즈 여대 부속유치원을 거쳐 동(同) 대학 부속초등학교로 진학하는 등, 가쿠슈인의 그 위상이 예전같지 않음은 확실하다.

이에 가쿠슈인위기 의식과 대책의 필요성을 느꼈는지, 2013년 4월부터 문학부에 교육학과를 신설했다. 이 학과는 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학과로, 개설된 첫 해에 카코 공주가 입학했다. 외가인 가와시마(川嶋) 가문에 교육자가 많은 영향에, 어머니 키코 비도 교직을 권했으며, 카코 공주 본인도 아이들을 좋아하고 교육에 관심이 많아 지원, 합격했다. 매체에서는 "오래 전부터 개설을 준비하던 학과였는데, 우연히 그렇게 된 것뿐입니다."라는 가쿠슈인 측의 입장과 함께, "우연이라기에는 지나치다!!"는 세간의 반응도 슬쩍 흘렸다고. 그러나 카코 공주도 이듬해 8월 말 가쿠슈인 대학을 중퇴하고, 언니 마코 공주가 졸업한 국제기독교대학 교양학부 예술과학과를 지망하여 합격했다. 일본 황실에는 신토라는 고유의 종교가 있는데, 공주들이 둘씩이나 연이어 그리스도교 미션스쿨에 가다니 신기한 일이다. 레알 마리아님이 보고 계셔를 찍고 싶었나보다

현재 황위 계승서열 1위는 아키히토 덴노의 맏아들 나루히토 황태자이며 2위는 차남 후미히토 친왕, 3위는 2006년에 태어난 유일한 손자인 히사히토 친왕. 나루히토 황태자가 덴노에 즉위한 이후엔 히사히토 친왕이 차후 덴노로 지목되고 있다. 2006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무남독녀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밖에 없는 현 황실을 우려해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를 대두로 하여 여성 덴노가 가능하도록 황실전범(皇室典範)을 개정하려 했다. 그러나 당일 차남인 후미히토 부부가 셋째 임신 중을 언론에 밝혀 무산되었다.[22] 그러나 2011년에 일본 황족 23명 가운데 남자는 7명뿐인 사실을 감안하고 남녀평등의 여론이 불어 여성에게도 계승권을 주는 개정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마코 공주후미히토 친왕의 큰딸이며, 아키히토 덴노의 손주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 마코 공주의 여동생인 카코 공주는 2년간 합숙훈련을 한 끝에 2004년 가쿠슈인 초등과 4학년 재학 중에 피겨 스케이팅 대회에 출전했을 정도로 열의가 높았다고 알려져 있다.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 1학년이던 2007년에는 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다만 실력은 그저 그런데 공주라서 점수를 잘 받았다는 평도 있다.[23]

아키히토 덴노의 딸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는 2005년 11월 평민[24] 공무원이자 작은오빠 후미히토 친왕의 가쿠슈인 동창이며 절친인 구로다 요시키(黑田慶樹)와 결혼하여 평민이 되었다. 사야코 공주오타쿠로도 유명하다.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 시절부터 가쿠슈인 대학(일어일문학과) 시절까지 쭈욱 아니메 계열 동아리 소속이었다고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팬이라는 듯. 소문으로는 코미케에 왔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황궁 근처 서점에서, 시종으로 추정되는 양장 차림의 점잖은 노신사들이 만화책을 구입하러 다녔다는 일화까지(…) 고쿄 근방에서 대중문화 서적을 취급할 만한 규모의 서점은 키노쿠니야밖에 없는데…

2013년, 쇼와 덴노의 조카인 故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의 미망인 히사코(久子) 비가 IOC 총회에 모습을 드러낸 데 대해 논란이 일었다.

2013년 10월 31일에 야마모토 타로 참의원 의원이 덴노에게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의 실태를 호소하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가 정치문제가 되었고 결국 국회에서 사죄해야 했다. 정작 덴노 쪽은 편지는 읽어 보지도 않았다고. 편지를 읽어 봤자, 전후(戰後) 체제에서 어차피 덴노는 내각이 독재를 하건 국민들을 학살하건 진짜로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법률로 금지된 정치개입을 하려 했다는 의심만 살 수 있고 이 경우 덴노 자신도 위험에 처할 수 있으며 해당 의원은 아예 감히 신성한 덴노께 멋대로 자신이 쓴 편지를 건넨 놈이라는 보수 우익들의 린치로[25] 어떤 참혹한 꼴을 당할 지 모르기 때문에[26] 아키히토 덴노도 해당 의원을 보호하기 위해 편지를 읽지 않고 현장에서 그냥 측근에게 건넨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해당 의원의 안위를 염려하기도 했다.

2014년 아키히토의 생일에 맞춰 트위터에서 천황합성축제(天皇クソコラ祭り)란게 퍼지면서 대규모 키배가 터지고 있다.

8. 한국과의 관계

한국 역사에서 일본의 교섭 주체자 내지는 덴노가 처음으로 분명하게 기록된 것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이다. 신라의 8대 군주 아달라 이사금 재위 20년(173)자를 보면 "왜의 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 와서 예방하였다(倭女王卑彌乎 遣使來聘)"라고 하여 아달라 이사금 때에 왜국과의 교류 사실을 전하고 있다. 특히 왜의 여왕 비미호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히미코(비미호, 卑彌呼)와 같은 인물로 보인다.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히미코는 일본 내 소국들이 서로 다투던 혼란한 시기에 여왕으로 공립(共立)된 인물로서 경초(景初) 2년(238)과 정시(政始) 4년(243)에는 중국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사의 등장 시기가 173년으로, 삼국지에 등장하는 238년, 243년과 시간적 차이가 있어 사건의 진위여부를 놓고 이견이 존재한다. 이 기사를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비미호를 역사적 실체로 인정하게되면 그 수명이 지나치게 길어지는 점을 문제 삼아 중국사서에 근거한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조작으로 이해한다. 반면에 삼국사기의 비미호 기사를 인정하는 입장에서는 그녀가 왜국왕으로 공립되기 전에 야마타이국(邪馬臺國)의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 인사를 한 것이며, 그 연대는 신라의 고기록(古記錄)이나 구삼국사(舊三國史)에 기록되어 있던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히미코의 생몰기간이다. 히미코의 사망연대가 삼국지 위서 왜인전의 기록을 보면 247년경으로 되어 있는데 173년에 야마타이국 여왕으로 즉위했다면 최소한 75년간 재위한 것이 된다. 비미호의 즉위시 연령은 확인할 수 없지만 최소 10세에 즉위하였다고 해도 최소 85세 이상은 생존했던 것이 된다. 만일 이러한 생몰기간이 가능하다면 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 이사금 20년(173) 기록에 등장하는 비미호 기사에 대한 이해가 가능해진다. 히미코는 왜국의 대표로 공립되기 이전에 이미 야마타이국 왕으로 재위해 있었고, 즉위 초년에 즉위 사실을 신라에 알리고 견사하여 우호관계를 맺으려 한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기록은 중국 문헌에도 전하지 않는 신라와 야마타이국 간의 교류를 시사하는 중요한 자료라 하겠다.

명목상의 국가 수장으로서 필연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근대 이후 강한 갈등 관계였던 한일관계 사이에서는 '천황', '덴노', '일왕' 등의 호칭 논란에서 알 수 있듯 중요한 갈등의 구심점이 되기도 하는 존재. 특히 덴노에 대한 언급이 금기시되는 것은 군국주의 시대의 만행이 덴노의 이름을 걸고 행해졌던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어, 일본(제국과 텐노의 이름 아래 저질러진 악)의 상징'으로 여기기 때문.'''

좀 더 구체적으로는 한때 식민지 조선이나 대만에서 해당지 총독을 임명하는 고유권한도 가진 적이 있었기 때문에[27] 덴노가 전쟁 책임은 면책 받을 수 있어도 아시아 침략의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한다는 주장도 있다. 때문에 총독부의 직속 상관이 덴노가 되므로 총독의 위치가 사실상 총리대신과 비슷했다. 실제 정치적 영향력은 본국 내각의 수장인 총리대신이 강했겠지만. 물론 1945년 패전 이후 식민지를 모두 상실함에 따라 총독 자체가 사라져 임명권한도 폐지되었다.

한편으로 현재 군주가 존재하지 않는 한국에서는 총리를 건너뛰고 덴노를 국가의 대표자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특히 자국에서 대통령이 좋은 술안주 농담거리가 되는 상황에서 보기에, 덴노에 대한 정신적인 충성이 강하게 무장되어 있는 일본의 상황은 '비정상적인 현상'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28] 이 때문에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덴노를 공격한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의 격한 반응에 당황하거나 경멸스러운 반응을 보내는 일이 많은 편. 위에서 서술한 배경들을 잘 알고 일본인들의 반응을 이해해야 좀 더 구체적인 이해가 가능하니 잘 읽어보자.[29]

8.1. 방한(訪韓) 여부?

역사적으로나 현재까지도 역대 덴노들은 역대 일본 수상이나 각료들과는 달리 1907년 다이쇼 덴노가 황태자 시절 한 번 방문한 것 외에는 공식적으로 한국을 방문한 기록이나 사례가 없다. 특히 일제강점기를 겪었고 임진왜란 등을 통해서 일본에 의해서 군사적으로 침략받았던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근방(近邦)임에도 불구하고 수상이나 각료들을 제외하고 덴노는 물론 덴노 황가 친족 등도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과 히사코(久子) 비 부부가 방한한 것 외에는 방한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예전에 개인적으로 방문한 친족들이 있기는 했다. 1970년 영친왕의 장례식 때나 1989년 이방자 여사의 장례식 때가 그 예다. 이방자 여사의 장례식 때는 전술한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의 아버지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30]과 유리코(百合子) 비 부부가 조문했다. 이는 이방자 여사가 일본 방계 황족 출신이기 때문. 참고로 영친왕이방자 여사의 차남인 이구의 장례식 때는 주한 일본대사가 조문했고,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 부부 명의의 조화가 왔다고 한다.

2009년 이명박 대통령이 일왕 방한을 추진하겠다는 언론보도가 나오면서 국민들은 물론 호국 및 애국단체와 독립단체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반일단체들이 강력하게 반발하거나 규탄하고 나섰으며 한국 국민들 대부분도 덴노의 방한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결국 한국 정부가 급히 "일왕의 방한 계획은 사실상 없다"라고 발표하면서 분위기가 누그러지기도 하였다.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은 일왕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발언을 날렸고 이에 우려하는 말이 나오자 해명하였다.

사실 이전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등 역대 한국 대통령들도 덴노 방한을 추진하거나 추진하려고 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과거사 문제해결과 반일 성향이 짙은 국민정서 그리고 반일 및 애국단체들의 반발과 반대로 인해 모두 무산된 적이 있다.

그런데 2012년 9월 아키히토 덴노가 "가능하면 방한(訪韓)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언론사에 밝혔던 적이 있어서 주목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의 사과 발언에 대해서는 "사과하라고 하면 사과할 용의도 있다"고 밝혀 주목을 끌고 있다. 사실 황태자 시절인 1986년 방한 의사를 밝혔으나, 아내 미치코 황태자비의 건강 문제로 인해 방한을 포기한 적이 있었다.

9. 기타

일본 왕실에서는 일본의 황족어를 옛날과 같이 똑같이 사용하기 때문에 관련 공문서(일본의 항복 선언이라든지)나 발언은 알아듣기 힘들다. 어느 정도냐 하면 일본인을 위한 황족어 번역기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일본어에 자신이 있다면 아래의 글을 한번 읽어보도록 하자.

이 글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한 히로히토가 했던 "인간선언"의 일부분이다.

然レドモ朕ハ爾等國民ト共ニ在リ、常ニ利害ヲ同ジウシ休戚ヲ分タント欲ス。朕ト爾等國民トノ間ノ紐帶ハ、終始相互ノ信賴ト敬愛トニ依リテ結バレ、單ナル神話ト傳說トニ依リテ生ゼルモノニ非ズ。天皇ヲ以テ現《アキツ》御《ミ》神《カミ》トシ、且日本國民ヲ以テ他ノ民族ニ優越セル民族ニシテ、延テ世界ヲ支配スベキ運命ヲ有ストノ架空ナル觀念ニ基クモノニモ非ズ。 朕ノ政府ハ國民ノ試煉ト苦難トヲ緩和センガ爲、アラユル施策ト經營トニ萬全ノ方途ヲ講ズベシ。同時ニ朕ハ我國民ガ時艱ニ蹶起シ、當面ノ困苦克服ノ爲ニ、又產業及文運振興ノ爲ニ勇往センコトヲ希念ス。我國民ガ其ノ公民生活ニ於テ團結シ、相倚リ相扶ケ、寬容相許スノ氣風ヲ作興スルニ於テハ、能ク我至高ノ傳統ニ恥ヂザル眞價ヲ發揮スルニ至ラン。斯ノ如キハ實ニ我國民ガ人類ノ福祉ト向上トノ爲、絕大ナル貢獻ヲ爲ス所以ナルヲ疑ハザルナリ。

위의 글을 현대 일본어로 옮겨적으면 이렇다.

私は私の国民と共にあり、常に利害を同じくし、喜びと悲しみをともにしたい。私と私の国民との間の絆は、いつも互いの信頼と敬愛によって結ばれ、単なる神話と伝説によって生じえるものではない。天皇を以って現御神とし、且つ日本国民を以って他の民族に優越な民族にして、ひいて世界を支配すべき運命を持つとの架空な観念に基づくのもでもない。私が任命した政府は国民の試練と苦難とを緩和するため、あらゆる施策と運営に万全の方法を考え実行しなければならない。同時に私は我が国民が難問の前に立ち上がり、当面の苦しみを克服するために、また産業と学芸の振興のために前進することを願う。我が国民がその市民生活において団結し、寄り合い助け合い、寛容に許し合う気風が盛んになれば、我が至高の伝統に恥じない真価を発揮することになるだろう。そのようなことは実に我が国民が人類の福祉と向上とのために、絶大な貢献を為す元になることは疑いようがない。

짐은 그대들 국민과 함께이며 항상 이해(利害)를 함께하며 함께 고락을 나누고 싶다. 짐과 너희 국민과의 유대는 언제나 서로의 신뢰와 경애로 맺어지며, 단순한 신화나 전설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덴노를 현어신(現御神)이라고 하고, 또한 일본 국민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한 국민이라고 하며, 나아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운명을 가진다는 가공(架空)의 관념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짐의 정부는 국민의 시련과 고난을 완화하기 위해, 모든 시책과 운영에 만전의 방도을 계획하고 실행하여야 한다. 동시에 짐은 우리 국민들이 당면한 난관에 맞서,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다시 한번 산업과 학문, 그리고 예술을 부흥시키기 위해 전진하기를 바란다. 우리 국민들이 생활함에 있어 다같이 단결하여 서로 돕고, 너그러운 정신으로 서로 용서하는 기풍이 성한다면, 지고의 전통에 부끄럽지 않게 우리들의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실로 우리 국민들이 인류의 복지 향상을 위하여 큰 공헌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바이다.

의역을 추가해서 번역부분을 조금 첨삭했음. 번역에 대한 수정바람.

그런데 황족어니 뭐니해도 사실 별로 어려운 말도 아니다. 찬찬히 읽어보면 황족어(?) 부분에 사용된 상당수의 한자어가 한국에서 사용하던 말이다. 일본 황족이 사용하는 말이 서민들이 사용하는 구어와 달리 문어체에 상당히 가까운 것이다. 황족어를 해석하는데 어려움은 가나자로 표기되는 어미의 활용부분 중 현대에 쓰이지 않는 일부에 불과하다. 이 정도의 문장은 보충 수업 정도의 고문(古文:한국의 한자수업에 상당) 수업을 몇 시간만 받아도 해석할 수 있다.

친왕제는 중국한국에서도 볼 수 있지만, 공주를 '내친왕'으로 봉하는 건 일본만의 특징이다. 친왕은 혼인하더라도 지위를 유지할 수 있지만, 내친왕은 평민과 결혼할 시 황적을 이탈해 평민으로 강등된다. 사야코 공주가 이에 따라 평민이 되었다. 이 때문에 요즘 들어 문제가 되고 있는 남자 황족 부족에 따른 대란 우려와 맞물려, 앞으로는 이러한 경우에도 황족 신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황실전범을 개정하자는 얘기도 잠깐 있었다. 그러나 이 논의는 히사히토 친왕이 태어나자 흐지부지됐다. 또한 일본 황실에서도 어김없이 남존여비의 분위기는 지속되어, 아무리 덴노의 딸인 내친왕이라 할지라도 남편보다 먼저 앞서 걷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구로다 사야코 항목을 참조.

그리고 자신을 욕하는 말조차도 거침없이 모에화 해버리는 21세기 오타쿠들이 절대로 모에선으로 건드리지 않는 존재이기도 하다. 극우 성향이 강한 일본에서, 극우가 숭상하는 덴노를 모에화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 맞아죽기 딱 좋은 행동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실존하는 황족을 모에화 하거나 덴노라는 어휘를 사용하지 않는 것 뿐이다. 미카도니 하는 명칭으로 덴노 비슷한 위치에 있는 캐릭터로 빠바박 만든다. 마코 공주는 이것을 무시

사실 극우들이 숭배한다는건 일본의 진보주의자들이 가루가 되도록 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대놓고 깠다간 신상에 위험이 오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일은 드물다.

그리고 2011년 도쿄에서 아키히토 덴노가 대국민담화를 할 때 TV 도쿄에서는 대국민담화 방송을 틀지 않고 정규방송을 하는 용자 짓을 하였다. 왜 그런지는 항목참조.

10.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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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국화를 본뜬 문양으로 사실상 일본 그 자체를 상징하고 있다. 근대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소총부터 군함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무기 혹은 군관련 장비에 문양을 새겨넣고 있고, 여권 표지에도 새겨넣고 있다.
  • [2] 2005년 연두기자회견 등 단 "'일본 왕'이라고 써야 하는지, '일본 천황'이라고 써야 하는지 미처 준비를 못했다"며 양해를 구하고는 '일본 천황'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 [3] 예를 들어 한반도 국가는 물론이고 중국조차 일본에게 '조공'했다는 일본서기 식의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
  • [4] 귀족 작위로서의 왕과 통치자로서의 왕은 중국에서도 달랐다고 하지만, 형식상으로는 조선 왕마저 중국 황제의 신하였다. 새로운 왕의 즉위 등등을 중국 정부에 보고하던 것 등을 생각해보면 된다.
  • [5] 나나기와 이자나미가 미처 다 하지 못한 나라/땅 만들기를 오쿠니누시가 계속 이었다는 의미이다.
  • [6] 아마도 초기 황조신은 다카미무스히였을 가능성이 있다.
  • [7] 105대 고나라 덴노(재위 1526년~1557년)가 대표적이다. 고나라 덴노는 특히나 즉위식을 치를 돈도 없어서 유력한 센고쿠 다이묘인 고호조(後北条)나 오우치(大內), 이마가와(今川) 등의 가문으로부터 헌금(...)을 받아서 즉위한 지 10년 만에야 즉위식을 거행할 수 있었으며, 덴노 자신도 자신의 어필을 팔아서 황실 수입에 보탰다고 한다.
  • [8] 하나는 원래 덴노, 다른 하나는 당시 막부가 추대한 새 덴노
  • [9] 이 해(1392)는 조선이 건국된 해이기도 하다.
  • [10] 이건 그냥 도시전설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실제로 그랬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이토 히로부미는 군주에게 매우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는 독일 제국 헌법을 모방해서 일본 제국 헌법을 제정할 정도로 메이지 덴노를 존중하고 섬겼다. 다만 메이지 덴노가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실세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의 뜻에서 어긋나지 않게 행동한 것은 사실이다. 사실 이것은 메이지 덴노만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군주가 된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하지만 실세들의 도움 없이 군주가 되었고 정통성이 완벽했던 손자는(...)
  • [11] 메이지 시대 초기 덴노가 행차할 지역에 사전 파견된 정탐꾼이 그 지역의 민심에 대해 기록한 점이 이러한 점을 잘 드러난다. '덴노께서 행차하시니 길을 닦으라고 명령해서 길을 청소했다. 덴노의 행차라는 것은 정말로 귀찮기 그지 없다.' 게다가 행차를 위해 뭘 만들라고 하면 적당히 대충 만들고 끝인 경우도 종종 있었다나.높으신 분들이 까라면 까는거지
  • [12] 하지만 일부 지방엔 아직도 남아있는 경우도 존재한다.
  • [13] 현대 일본에서 '따귀'를 뜻하는 말인 '핀타(ピンタ)'는 메이지 정부의 주축이었던 사츠마(지금의 가고시마)지방에서 머리를 뜻하는 사투리였다. 쪼인트의 원류였던 셈.
  • [14] 동인지가 있긴 있다. 마코 공주 항목 참조. 윤간(…) 장면이 나오는 동인지가 한때 웹에서 돌았던 적이 있다.
  • [15] 다만 이건 GHQ가 히로히토 덴노의 지위 자체는 유지하는 대신 권력과 더불어 자산도 모두 몰수하고 의회에서 예산을 타서 쓰도록 만든 게 크다. 다른 나라 왕들의 경우는 자기 재산이 있으니 마음대로 처분이 가능한 거고.
  • [16] 이 조항에는 '덴노가 내각의 조언을 받아 자의로 승인을 한다'는 식으로 해석될 요지도 있지만, 잘 보면 마지막에 내각이 책임을 진다는 문구가 있다. 책임을 지는 쪽이 당연히 권한도 갖는 것이다.
  • [17] 마사코 황태자비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수개국 언어를 구사하는 유학파라서, 외국인 친구들이 많다고 한다. 자세한 건 마사코 황태자비 참조
  • [18] 아키히토가 사망하면 일세일원의 원칙에 따라 추존 시호로 '헤이세이 덴노'가 되는 것이 확실하지만 아키히토헤이세이 덴노라고 부르는 것은 '시호(죽은 사람에게 붙이는 이름)'를 아직 살아있는 덴노에게 쓰는 셈이니 제대로 된 건 아니다. 일본인들이야 금상(今上)이나 덴노 헤이카(천황 폐하) 등의 경칭으로 부르지만, 외국인은 자기 나라 왕도 아닌 만큼 존대를 해줄 이유는 없기에, 다른 유럽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이름만을 불러 아키히토라고 칭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 [19] 나가사키 시장에 대한 테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후임으로 당선된 시장 이토 잇초 시장은 전임자와는 달리 중도에 가까운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평소 극우 정치인들의 일본 핵무장 발언이나 평화헌법 개정 움직임에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가, 2007년 야쿠자 출신 괴한에게 총격을 당해 끝내 사망하기도 했다. 핵을 맞았던 전력이 있는 나가사키극우 성향에 대해 반발하는 경향이 강했고, 이 때문에 극우파들의 정치 테러의 목표가 된 셈.
  • [20] 본래 관립학교였으나, 패전 후 사립학교로 전환되었다.
  • [21] 가쿠슈인 대학에는 문학부, 이학부, 법학부, 경제학부의 4개 학부가 있는데, 40여 년 동안 새 학부가 개설된 것이 없었다. 가쿠슈인 여자대학에는 학과가 더욱 적다(3개).
  • [22] 일설에 의하면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 부부는 몇 번씩이나 아들인지를 확인했다고 한다. 히사히토 친왕이 태어난 날, 아키히토 덴노는 갓 태어난 손자에게 황실의 보물인 삼신기를 내렸고, 거의 출산이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는 황태자 부부가 아들을 낳지 않는 한 히사히토 친왕이 큰아버지 나루히토 황태자의 황통을 이을 것은 자명해 보인다.
  • [23] 부친인 후미히토 친왕은 딸이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했으면 좋겠다는 말로 지지를 하고 있지만, 일본 보수우익들은 '어떻게 공주께서 저리 망측한 짧은 옷을…'이라는 반응을 보이는 등 카코 공주의 취미생활에 거센 반발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인지 고등학생, 대학생이 된 후로는 피겨 스케이팅을 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 [24] 말이 평민이지, 가쿠슈인을 다니며 왕자와 친구로 지냈을 정도면 상당히 좋은 집안이라 추측된다.
  • [25] 애시당초 덴노가 편지 자체를 안 읽어 봤고, 내용도 단순히 후쿠시마 원전 사고 실태에 대해 호소하는 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런 꼴을 당했다. 만일 덴노가 직접 읽어 봤고 내용이 상당히 비판적이었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 [26] 당장 왕실 행사 금지 징계에 극우 단체의 협박 편지까지 받았다.
  • [27] 마찬가지로 현재 여러 대륙에서 속령 및 연방국을 거느리는 영국의 경우에도 영국 수상이 아닌 영국 국왕이 직접 총독을 임명한다. 공화정 국가인 프랑스의 경우에는 프랑스 대통령이 속령 지역의 총독을 임명한다.
  • [28] 특히 한국은 해방공간부터 대부분이 어떤 형태였던 간에 민주주의를 지지하였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 같은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 [29] 그런데 사실 이건 일본 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입헌군주국에 해당되는 일이다. 입헌군주국의 국민들 앞에서 총리라면 모를까 군주에 대해서 함부로 언급하는건 정말 위험한 일이고, 크게 실례되는 일이다. 당장 영국만 봐도 영국인들과 동석한 자리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을 'Her majesty(여왕 폐하)'가 아닌 본명으로 칭하는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엄청나게 싸늘해질 수 있으며, 태국인들과 동석한 자리에서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을 본명으로 취했다간...영국이나 일본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대참사가 벌어질 수 있다. 조심하자.
  • [30] 다이쇼 덴노와 데이메이 황후의 4남 중 막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