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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즈카 오사무

last modified: 2016-07-03 19:54:48 Contributors


코가 진짜 주먹코 대표사진.


1988년 11월 상하이국제만화제에서.

手塚治虫, 본명은 手塚治. 테즈카 오사무. 데즈카는 외래어 표기법을 따른 것이다. 또한 塚에 연탁이 들어가서 '즈' 로 읽으니 데츠카 오사무라고는 읽지 말자.

1928년 11월 3일[1] 출생-1989년 2월 9일 사망. 향년 61세.

후대로부터 일본 만화의 신으로 추앙받는 인물.

Contents

1. 소개
2. 데즈카 오사무의 인생
2.1. 부모님과 조부모
2.2. 유소년기
2.3. 청소년기와 청년기
2.4. 만화가의 길
3.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군과 스타일
4. 데즈카 오사무와 일본 아니메
4.1. 일본 애니메이션의 시초
4.2. 부정적 평가
4.2.1. 사실에 대한 일부 반론
4.3. 다른 이야기
5. 여담과 비화
6. 어록
7. 작품 목록


1. 소개

만화의 신.

일본만화가. 망가의 초창기에 활약한 인물로서 그 어떤 장르도 가리지 않고 훌륭한 만화를 그려 만화를 하나의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 전설적인 작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전 모든 만화가를 자신의 경쟁자로 여기고 정진한 사람이자 만화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위대한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만화와 애니메이션 들은 일본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굉장한 인기였는데 몇몇 캐릭터들은 거의 국민 영웅급 캐릭터였다. 대표적으로 아톰밀림의 왕자 레오 등등... 다만 한국에서는 아동물로 워낙에 인기를 모았기 때문에 뒤늦게 그의 만화를 찾아본 한국 팬들이 성과 고어 묘사가 높은 것에 꽤 충격받은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일본 만화가라고 하면 보통 연상되는 빵모자를 쓴 안경잡이 캐릭터를 정립해버린 인물이기도 하며 지금도 '만화의 신' 이라고 하면 역시 빵모자에 안경잡이, 그리고 주먹코다.[2]

나가이 고는 데즈카가 죽었을 때 어린아이처럼 울었다고 한다. 일본 만화, 즉 스토리 만화의 창시자라고 알려져 있으나 정작 본인은 전통적인 만화작법에 충실했고 이후 데즈카 오사무를 본 받은 일본 작가들이 소위 '망가'라 명명된 독특한 장르를 탄생시키게 된다.

사후에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한 업계 증언에 의하면 꽤나 괴팍한 성격이다. 데츠카 화실 스텝이 만든 데츠카 전.

데즈카 오사무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고 싶으면 유고 산문집 <아톰의 슬픔>과 강의 테이프와 기록을 모아 발간한 <어머니는 나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하셨다>의 일독을 권한다.

2. 데즈카 오사무의 인생


2.1. 부모님과 조부모

1928년 오사카에서 탄생.[3] 11월 3일에 출생했는데 이 날은 메이지 덴노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메이지(明治) 덴노의 연호에서 치(治)를 따와 이름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상당히 근대적인 취향의 소유자로 카메라를 좋아했고 당시엔 드문 물건이었던 수동식 영사기도 소유하고 있어서 어린 데즈카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나 디즈니 장편을 즐겨봤는데 데즈카 오사무가 디즈니의 열렬한 팬이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이런 아버지는 어머니에겐 상당히 강압적인 폭군의 이미지였다고 데즈카는 후에 회고하기도 했다. 데즈카의 작품에 아버지상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기도 하다.

어머니는 육군 중장의 딸로 남편에게 절대복종하는 여성이었지만 그렇다고 수동적인 여성은 아니었다고 한다. 남편이 전쟁에 나갔을 때는 혼자서 집안 살림을 책임지는 억척스런 면도 있었고 아들 데즈카에게는 만화책을 사주고 직접 구연동화식으로 읽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후에 데즈카 오사무의 아들인 데즈카 마코토가 데즈카가 어렸을 때 본 만화책에서 만화책의 여백에 그려진 만화를 발견했는데 마코토는 처음에 이것을 아버지가 어렸을 때 그린 만화로 생각했지만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니 데즈카의 어머니가 그린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할아버지 데즈카 타로.


핫토리 한조의 후손인 할머니.

2.2. 유소년기


1929년 3월 21일 돌.

5살 때 데즈카의 가족은 효고 현의 다카라즈카 시로 이사갔다. 다카라즈카시는 유명한 다카라즈카 극단의 본거지이자 온천과 루나파크 등의 근대적인 시설들이 갖춰진 도시였다. 데즈카는 이때 큰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데즈카의 아버지는 다카라즈카 호텔 클럽의 회원이었고 어린 데즈카를 이끌고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데즈카의 어머니는 데즈카를 데리고 다카라즈카를 자주 보러 다닌 데다 데즈카의 바로 옆집에는 다카라즈카 극단의 최고 스타가 살고 있었던 탓에 이래저래 데즈카의 어린 시절은 다카라즈카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1931년 5세.

또한 이 시절에 데즈카는 친구의 영향을 받아 천문학과 생물학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데즈카의 집은 마당이 넓어서 곤충 채집에는 최적의 장소였는데 이때 곤충 채집에 빠진 데즈카는 몇 시간이고 마당을 돌아다니며 곤충을 채집했다고 한다[4]. 데즈카가 후에 필명으로 쓰게 된 오사무(治虫)는 이때 딱정벌레에서 따온 이름이었다고 한다.


동년 부모님, 여동생 미나코와 함께.

한편으로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보게 된 만화는 이제 직접 그리는 수준에 이르러서 수업시간에 몰래 만화를 그리다가 선생님에게 들켜 그린 것을 압수당하고 혼났지만 교무실에서 선생님이 데즈카가 그린 만화를 보고 재미있어해서 동료 교사들과 돌려보고 나중에 가면 교사들이 데즈카가 만화 그리는 것을 묵인해줄 정도였다고 한다. 친구들과도 칸사이벤을 쓰지 않는 탓에 처음에는 따돌림을 당했지만 재미있는 만화를 그린다는 걸로 점점 친해져서 나중에는 데즈카의 집에 친구 20명이 우루루 몰려올 정도였다고(...) 자서전에 따르면 만화로 인해 안경잡이 꼬마 라는 별명에서 데즈카 군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미 만화의 신은 어릴 때부터 조짐을 보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1936년 10세.

2.3. 청소년기와 청년기

1941년도에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군대의 색이 강한 학교였기 때문에(그냥 군대도 아니고 세기말 막장 일본군이다!) 만화를 그리는 것을 들키면 두들겨 맞곤 했다고 한다[5]. 이런 에피소드들은 이후 '종이요새' 라는 단편 만화에서 묘사가 되는데 그 당시 일본이 얼마나 미쳐 돌아가는 시대였는지를 간접적으로 볼 수 있다. 참고로 그림을 그리다가 선생한테 걸리면 쓸데없는 짓 한다고, 혹은 전쟁 물자를 낭비하는 2등 국민이라고 두들겨 맞는다... 흠좀무.

이후 학교 대신 강제 훈련소에 보내지기도 하다가[6]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4년 만에 중학교를 조기졸업하는 비극을 겪었으며 오사카의 공장에서 노동 작업에 투입되었다가 오사카 대공습에 휘말려 머리 위로 소이탄이 떨어지는 와중에 겨우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이후 공장을 때려치고 집에서 만화를 그리게 되는데 이때의 경험은 후에 1974년작 '종이요새[7]' 로 이어진다. 한편 이 시절 때 만난 아카시라고 하는 전쟁에 참전해서 전사한 친구(당시 유명한 야쿠자 조직 두목의 아들이었다)와의 이야기로 대부의 아들 이라고 하는 단편 만화를 만들었다.


1945년 18세.

그러다가 시험을 쳐서 1945년 오사카 제국대학의 의학 전문부에 입학, 졸업했다. 사실은 이 시험을 보기 전 구제 나니와 고등학교[8]에 입학하려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오사카 제국대학의 의학부(의과대학) 출신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같은 대학의 의학전문부(의전[9]) 졸업. 의학전문부는 태평양 전쟁 당시 군의관의 부족을 메꾸기 위해 신설된 일종의 약식 과정으로 당시 다수의 의과대학에 의학부(일반 의대 과정)와 함께 병설되었었다. 1951년 폐지되긴 했지만 졸업 후 의사고시에 합격하면 똑같이 정식 의사였다. 데즈카는 중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의과대학이나 제국대학 의학부에 진학할 수 없었으나 전문부는 약식 과정이었기 때문에 응시가 가능했다. 데즈카 생전에는 1944년까지 구제 나니와 고등학교를 다니고 이후 1945년에 오사카제국대학 의학전문부를 입학했다고 경력이 나왔지만 데즈카 사후에 이것이 틀렸다는게 밝혀졌다.

만화를 경시 내지는 천시하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제국대학 출신이 만화가라는 것만으로도 만화의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데즈카 오사무 본인도 위와 같은 사실을 적극적으로 해명하지는 않았다. 의사 면허증을 딴 뒤 슬럼프에 빠진 시기 지도교수의 조언으로 논문을 써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의전 졸업은 맞으나 의사 자격증과 의학 박사 학위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희한하게도 논문 테마는 우렁이 정충에 대한 것이었으며 이에 관해 주변에서도 "그냥 인간 걸로 하지 왜 우렁이..." 라는 말이 나왔다고.

2.4. 만화가의 길

전후 데즈카는 전쟁 중에 그린 장편 만화들[10] 중에 고심하다가 '유령남[11]' 의 원고를 마이니치 신문에 보냈지만 마이니치 신문에선 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근처에 살던 마이니치 신문 인쇄국의 여직원이 어린이 신문의 기자를 소개해주었고 그곳에서 1946년에 4컷 만화 <마아짱의 일기>로 데뷔했다[12].


1946년 19세.

숱한 명작을 남기고 애니메이션 업계에 한 획을 긋기도 하고 슬럼프에 빠졌다가 부활하기도 하며 파란만장한 삶을 보내다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언은 "부탁이니까 일하게 해줘(頼むから仕事させてくれ…)" 였다고 한다. 문자 그대로 평생 현역. 죽기 3주 전까지 일기에 자신의 몸 상태나 신작의 아이디어를 적었다고 한다.


1988년 11월 상하이 국제 애니메이션 대축제 심사원으로, 사진만 봐도 삐쩍 마른 모습인데 이 당시부터 암 말기라서 의사들에게 여기 가지 말라는 충고까지 듣었음에도 갔다. 참고로 사망 당시 몸무게가 40kg대까지 살이 빠졌을 정도(한창일 때 몸무게가 70Kg이었다). 그리고 석 달도 안돼 세상을 뜬다.

전설적인 인물답게 제자들도 유명한 사람이 많은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데자키 오사무 등을 들 수 있으며 그 외에도 린 타로, 테라자와 부이치(우주해적 코브라의 작가) 등등 숱한 그의 제자가 이름을 날렸고 날리고 있다. 데즈카 이래의 모든 일본 만화가/애니메이터 전부다 제자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물론 그게 절대적인 건 아니다. 국내에는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백사전의 스텝, 토에이 계열 또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이들은 니폰 애니메이션에서 작품을 만들었었다(ex)빨강머리 앤, 미래소년 코난 등). 이들 중 지금까지 남아있는 사람들은 지브리 계열에 속해있다.

3.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군과 스타일

진지한 극화는 물론, SF만화, 추리만화, 학습만화, 개그만화, 순정만화, 심지어 에로만화까지 현재 일본 만화의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하고 또 그 모든 분야에서 굵직한 업적을 남긴 거장. 철완 아톰, 정글대제, 블랙잭 등의 명작을 수없이 남겼다. 특히 그 자신이 의사였기 때문에 블랙잭의 디테일한 수술 묘사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유일하게 취약했던 분야가 스포츠 만화. 특히 카지와라 잇키로 대표되는 소위 열혈 근성 스포츠 만화에 대해서는 '도대체 이런 만화의 어디가 그렇게 재미있다는 건지 누가 제발 설명 좀 해줘!' 라며 답답해하며 심지어 눈물까지 보였다는 루머가 전해진다. 스포츠 만화를 안 그렸을 뿐이지 야구를 좋아했다고 하며 한신 타이거즈의 팬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톰은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전신인 산케이 스왈로즈의 마스코트였고 현재 세이부 라이온즈의 마스코트인 백사자는 정글대제의 레오다.

아톰이나 정글대제 레오 등과 그의 그림체 때문에 아동 만화나 그런 쪽을 자주 그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톰도 의외로 어두운 면이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아돌프에게 고한다 같은 심각한 분위기의 작품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심지어 MW, 아야코 같은 작품을 보면 동성애, 살인, 시체유기, 수간, 근친애 등 충격적이고 어두운 소재도 안 나오는 법이 없다. 이런 계열을 블랙 오사무라고 부른다. '일본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에게서 꿈을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면 나가이 고에게서는 특유의 성적 개방성과 폭력성을 배웠다고 한다' 는 말이 있는데 이런 면을 보면 성적 개방성과 폭력성에 데즈카가 기여한 바도 크다. 그리고 불새, 붓다 등의 작품은 소재부터 생명이나 죽음 같은 묵직한 주제를 다루고 내용도 어린이용이라 보기 어렵다.

거기다가 리본의 기사(사파이어 왕자)나 도로로에서는 남장여자 캐릭터들도 적극 사용하며 블랙·잭에서는 네코미미를 연상시키는 캐릭터[13]를 등장시킨다거나 로리처럼 보이나 실은 성인인 캐릭터(피노코)를 최초로 제시해 보이는 등 몇몇 모에 장르의 기원을 보여주고 있다. 역시 화신.

유명한 만화들을 많이 만들어냈지만 범작 역시 많았다. 특히 1960년대 말, 데즈카 만화가 재미 없다는 어린이들의 말도 많았고 무시 프로덕션의 부도로 1970년대는 데즈카 오사무에게 있어서 굉장히 힘든 나날들이었다. 1973년 11월 주간 소년 챔피언에 내본 실험적인 단편이 큰 성공을 거두어 장편화되는데 그게 바로 블랙·잭이다.

그 외에 인간 곤충기에서는 과거 일제의 주요인물과 동행하던 주인공이 한국의 요원들에게 자신은 전후 태생이니 죄가 없다고 하자 "몇 년도에 태어났든 간에!" 라고 일갈한다거나 다른 작품에서 비슷한 대사를 한 인물에게 원주민의 유령이 "모른다고 죄가 없어지진 않는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재일교포가 주인공인 <긴 구멍>이란 작품도 있을 정도로 깨어있던 인물. 긴 구멍의 경우 그의 다른 작품과는 다른 스타일의 연출이 사용되기도 했다.


무시무시한 역동성이 가득한 페이지다. 작품 소개 (일본어).

그 외의 대표작으로는 붓다, 불새 등이 있다. 이 작품들은 생명, 죽음 등을 소재로 삼은 명작들이다. 불새의 경우 그 스토리 전개 방식과 소재는 훗날 많은 작품들이 오마쥬한다. 어느 쪽이 더 명작인가를 두고 논쟁을 벌이는 팬들도 있다. 덧붙이자면 여러 작품들에서 괴테의 파우스트와 관련된 언급이나 내용들이 등장하는데 실제로 데즈카 오사무가 죽기 직전까지 작업했던 것이 아사히 신문에 연재하던 네오 파우스트였다고 한다.

4. 데즈카 오사무와 일본 아니메


4.1. 일본 애니메이션의 시초

오늘날의 일본 애니메이션의 수익 구조나 체제는 데즈카 오사무가 만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화 잡지에서 연재되는 만화가 인기를 얻어 애니메이션화되고 관련 캐릭터 상품의 판매로 수익을 얻는 구조는 데즈카 오사무가 시작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타겟의 애니메이션을 최초로 시도한 것도 데즈카 오사무라고 볼 수 있는데 소위 아니메라마(아니메+드라마)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1969년에 개봉된 '천야일야 이야기'는 69년 일본 박스오피스 5위에 들 정도로 흥행에 성공했다. 이후 '클레오파트라'와 '슬픔의 벨라돈나'가 흥행에 실패해서 무시 프로덕션이 도산 위기에 몰리긴 했지만 내일의 죠의 히트로 겨우 기사회생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열악한 제작 환경에서도 힘이 넘치는 연출 기법을 만들어내는 업적을 남겼다.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서 사용한 리미티드 기법의 응용을 극대화한 것이다. 일반적인 애니메이션의 1초당 컷의 프레임(24~30)에서 하프 프레임(12~16)을 도입한 것. 그렇게 되면 프레임 수가 적으므로 화면이 휙휙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져 디테일한 묘사는 불가능하지만 반면 속도감이나 박진감 같은 묘사는 기존 애니메이션보다 뛰어나게 된다. 이후의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액션에 강점을 드러내게 된 것도 데즈카 오사무의 공인 것이다.

4.2. 부정적 평가

이런 사정으로 애니메이션 업계에서도 으로 추앙받기도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등등에게는 공공의 적으로 까이기도 하는데, 당시 애니메이션 업계는 '50만엔 예산인 주간 연재 애니메이션'이라는 방송사의 요구를 보이콧하고 있었다. 그 당시 물가나 인건비로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수지가 남지 않는 장사였던 것. 쪼들리는 제한된 제작비에서 그 한계를 뛰어넘는 리미티드 기법으로 최대한의 애니메이션스러운 표현을 궁리했던 것은 이후 애니메이터들의 업적이었고 철완 아톰은 당시에는 '테레비 망가'라고 불리면서, 즉 애니메이션이라고 부르기도 쑥스러운 작품이었고 토에이 동화를 비롯한 기존의 애니메이션 업계의 사람들에게는 조소의 대상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림을 움직이기 위해 애니메이션을 하려고 모여든 업계 사람들에게는 난데없이 잘 나가시는 만화가 대선생님이 입만 뻥긋뻥긋, 잘 움직이지도 않는 그림 연극의 저가격 덤핑 상품을 들고 나타나 텔레비전 시장에 쳐들어온 행위는 민폐에 가까운 악덕상술로 여겨졌다.

데즈카 오사무가 그들에게 까이는 이유는 '철완 아톰'으로 50만 엔짜리 주간 연재 애니메이션 시대를 열고 말았고 애니메이션을 저예산 산업이라고 인식하는 관행을 만들어버렸다는 것 때문이다. 현실은 무시 프로덕션 입장에서도 50만엔은 너무 낮은 금액이었다. 리미티드 기법과 동일한 씬을 재활용하는 뱅크 기법에도 불구하고 적자분을 데즈카 오사무 본인이 연재하는 만화 원고료로 메꿨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덕분에 일본 애니메이션의 양적인 성장을 가져왔고 결국 세계에서 통하는 일본의 문화상품이 되었지만 업계인에게는 박한 평가를 받기도 한다. 특히 당시 5년만 일하면 집을 살 수 있었던 고소득 직종이었던 일본의 애니메이터는 최하층 노동자로 전락했기 때문에 미야자키 하야오는 장례식 추도문으로 까버렸다.[14][15] 게다가 21세기에 들어와도 일본 애니메이터의 봉급은 그나마 일반 회사 정도는 지급하는 스튜디오 지브리 혹은 일부 제작사를 제외하고는 엄청나게 박한 편이다. 심지어는 최저임금도 받지 못한 채 노동착취를 당하는 애니메이터들도 수두룩하다. 차라리 프리터로 사는 게 낫겠다는 업계인도 있을 정도로 극한 직업.

4.2.1. 사실에 대한 일부 반론

위에 적힌 내용이 정설이 되어왔지만 2007년에 출판된 '津堅信之『アニメ作家としての手塚治虫-その軌跡と本質' 라는 책에는 당시의 관계자들이 증언이 적혀있다. 이를 토대로 말하자면 애당초 50만엔이라는 방송사 요구도, 50만엔의 제작비 따위도 없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면 왜 50만엔이라는 금액이 나왔을까?

관계자의 증언을 들어보면 데즈카 오사무는 대외적으로는 50만엔을 받았다는 것으로 하고 몰래 뒤로는 150만엔을 받았으며 데즈카는 "편당 50만엔으로 팔아라. 그 이상은 올리지 말아라. 이런 낮은 가격이라면 다른 데에서는 못 만들 테니까" 라면서 저가 덤핑 전략으로 TV 아니메 시장를 독점을 시도하려고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당시 영업부 차장은 "까놓고 제작비는 얼마를 받든 상관이 없었습니다. 로얄티(캐릭터 상품 등)로 수백만 엔이 들어오고 있었으니까요[16]. 물론 경리상에는 처음부터 150만엔으로 처리하고 있었습니다. 그 뒤로는 가격인상을 교섭해서 아톰은 방영된 4년간에 최종적으로는 1편당 350만엔이 넘었다고 생각합니다." - 당시 무시 프로덕션의 영업부 차장의 증언[17]

4.3. 다른 이야기

데즈카 오사무는 자신이 수입이나 재산의 대부분을 차기작에 만드는 투자비용으로 사용했으며 심지어 데즈카 오사무 자신이 사장임에도 노동조합을 결성하거나(...) 파업 때는 경영진 측이 아닌 노조측의 선두에 서서 교섭을 하는 사건도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 이 일화는 알고 보면 무시 프로덕션 설립 당시 '무슨 일이 있으면 노조의 선두에 서서 함께 회사를 규탄하겠다!' 라고 농담으로 한 말이었고[18] 실제로는 1973년에 무시 프로덕션의 노조가 노동쟁의를 일으켜 교섭이 결렬, 도산할 때에 회사 측의 사장은 데즈카 오사무였다. 물론 자신의 수입이나 재산을 투입해서 도산을 막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5. 여담과 비화

PTA와 최초로 맞서 싸운 만화가로도 유명하다. PTA가 자신의 만화를 유해도서로 지정하여[19]화형식을 하자 데즈카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만화는 아카혼(조악한 종이질에서 유래한 유해만화의 부류)이 아니라며 공청회 등에서 치고 받았다. 결국 PTA는 데즈카에게 패배하고 아톰 등의 만화를 유해도서에서 해금시킨다.

이는 당시 서슬이 퍼랬던 PTA의 위엄에 비추어보면 깜짝 놀랄 만한 일. 우리나라로 예를 들면 정병섭군 자살사건에서 만화를 싱나게 불태우는 와중에 웬 만화가 하나가 '모든 만화가 해로운 것이 아니다!' 라며 정화위원회에 당당히 맞서 싸운 정도의 위상이었다.

디즈니의 대단한 팬으로 데즈카 오사무를 담당하는 편집장은 그가 마감을 매일 어겨버리는 문제 때문에 개인 사생활을 포기하는 것은 기본이며(마감을 피해 해외로 도주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를 만날 때 항상 디즈니 만화(아기사슴 밤비)가 상영되는 극장에서 만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20]. 몇몇 표절 작품들이 있으며 저작권 무시도 꽤나 저질렀다(유명한 건 '메트로폴리스' 에 나왔던 미키 마우스). 그 때문에 라이온 킹이 정글대제 레오의 표절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때 유족들도 그다지 적극적으로 항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참고로 데즈카와 월트 디즈니 본인이 실제로 만난 건 아톰(1963년판 애니메이션)의 수출을 위해 미국에 방문했을 때 잠깐 만난 게 전부. 1분도 채 안되었다고 한다.

하마터면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제작에 관여할 뻔한 적이 있다. 스탠리 큐브릭이 이번에 SF영화를 만들건데, 자문을 구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데즈카에게 보냈는데, 데즈카는 그러고는 싶지만, 식구 240명을 먹여살리느라 바빠서 못한다는 답장을 주었다. 그런데 큐브릭은 그에 대한 답장에서 식구 240명처자식 240명(...)으로 잘못 이해하는 바람에 데즈카는 당혹감을 느꼈다고.

단 것을 굉장히 좋아해서 말년에는 거의 모든 이가 썩어 틀니를 착용해야 했다고 한다.

흔히 만화가 하면 떠오르는 빵모자는 데즈카 오사무가 젊었을 때는 곱슬머리를, 말년에는 탈모를 가리기 위해서 쓰고 다녔던 것에서 유래했다.

작품 여러 곳에서 데즈카 오사무 본인의 캐릭터가 등장하곤 한다. 블랙 잭에서는 숫제 친구로 등장. 살짝 가르마 탄 머리에 주먹코, 안경잡이 캐릭터이다.

북미에서도 MW 등의 블랙 오사무 계열이나 성인풍의 작품들이 출시되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개구리 중사 케로로에서 유령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세인트 영멘에서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환생했다고 한다. (전)데즈카 오사무

아직 일본에서 만화에 대한 평가가 박하던 시절 대표작인 철완 아톰이 학부모 단체들에게 비판받은 사례가 있다. 비판의 이유는 아이들에게 허황된 망상을 심어준다 는 것이었으며 그 근거는 일본이 고속철도를 건설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느냐 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2008년 6월 이와테에서 지진이 일어난 것을 데즈카 오사무가 정확하게 예언했다는 이야기가 일본 웹에 떠돌았다. 블랙잭 17권 158화에 이런 내용이 나왔다고 하는데... 이와테에서 일어난 지진의 사상자 수가 17명 사망에 158명 부상이었다고(...)

데즈카 가문은 사실 족보를 별로 따지지 않는 일본임에도 불구하고 계보를 따라가면 헤이안 시대 말기까지 올라가는 뼈대 있는 집안이다. 한국으로 따지자면 통일신라시대, 즉 남북국 시대까지 올라간다는 이야기. 족보에 따르면 '미나모토노 요시나카' 의 부하인 '데즈카노 타로미츠모리' 라는 무사가 조상이라고. 그를 주인공으로 한 <사네모리 이야기>라는 가부키가 있다고 한다. 거기다 덤으로 데즈카의 할머니는 핫토리 한조의 후손이라고(...)

'양지의 나무' 라는 막말을 다룬 작품에는 증조부를 모델로 한 '데즈카 료안' 이 등장한다. 난학 의사로 일본 제국 최초의 군의관이었다고 한다.

그의 아들 데즈카 마코토는 데즈카 프로덕션의 이사이자 영화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다. 딸 루미코는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다고. 며느리 오카노 레이코는 만화 음양사의 작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97년 그 해 최고의 만화에 대해 시상하는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이 제정되었다.

괴짜가족 시리즈의 한 에피소드에서도 출연하는데 한때 호러만화로 인기를 끌었으나 지금은 지독하게 재미없는 만화를 그리는 3류 만화가 벰의 꿈 속에 나타나 "만화를 우습게 보지 말게!" 라고 일갈을 하는데 벰의 반응은 "누구시죠?" 였다(...) 배경이 일본인데 일본 만화가가 데즈카 오사무가 누군지도 모르니 작품이 그 모양 그 꼴이지!

아키타 쇼텐에서 출판된 '블랙 잭 제작비화' 란 만화에선 소싯적 1시간에 3~4페이지를 그렸다고 하며 마감 전의 속도는 그야말로 빛에 가까웠다고 한다. 또한 당시 같이 일하던 사람들에게 별걸 다 구해오라고 한 듯...

스타 시스템을 써서 다양한 캐릭터가 여러 모습으로 등장하는데[21] 그는 캐릭터들에게 배우처럼 출연료까지 설정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한 캐릭터 중 '로크 홈[22]' 은 선역으로 출발했다가 나중에는 미형 악역으로 자주 얼굴을 보인다. 그리고 일명 콧수염 할아버지라 불리는 '반 슌사쿠' 도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 이곳저곳에서 등장하는데 아톰에선 탐정으로 등장했다가 블랙·잭에선 가난한 부부의 아이를 살리기 위해 블랙잭을 상대로 사기치려 했던 의사로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블랙잭의 작품 특성상 이 콧수염 할아버지를 비롯해 여러 캐릭터들을 자주 볼 수 있다.

2014년 4월 7일, 구글문화원에서 최초의 만화가 컬렉션으로 지정되었다. 링크는 이쪽.

6. 어록

만화는 본래 감성의 영역이므로 리얼리즘에 속박되면 꿈이나 낭만은 사라집니다.
이런 점에서 만화가어린이는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유치하다는 이유로 부모나 교사가 그것을 짓밟는 것은 어른들의 파시즘이지요.
쓸모없는 것, 멀리 돌아가는 것, 예정된 길에서 벗어나 잠시 딴짓을 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는 사회는 아무리 생각해도 풍요로운 앞날이 보이지 않습니다.
합리주의나 생산지상주의는 결국 그 사회를 피폐하게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때 묻지 않은 감성과 독창성을 지닌 어린이들이 자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척 힘들었지만 돌이켜보면 그마저도 아름다웠노라는 식으로 포장되는 것, 이것이 추억의 본질입니다.
예를 들어 "그 옛날 전쟁 중엔 이랬지. 그때가 좋았는데" 하던 것이
"훌륭한 전쟁이었어. 누가 뭐래도 위대한 시대였다고" 와 같은 위험한 발언으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애니메이션에서 전쟁을 묘사할 때도 제작자의 메시지를 담는다면 괜찮지만
전쟁을 단순하게 묘사하기만 하는 것은 큰 죄악이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23]

나처럼 체력이 약한 아이들은 국민체육훈련소라는 일종의 강제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1년 동안 체력을 키워 국가에 봉사할 수 있는 소년으로 갱생시킨다고 수용소에 처넣는 것입니다.
이곳은 철조망이 이중으로 쳐져 있어서 한 번 들어가면 절대 탈출할 수 없었습니다.
체력을 키우기는 커녕 콩찌꺼기 같은 것만 먹어가며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혹독한 군사훈련을 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군국주의 교육을 받은 나는 일기에 이렇게 쓰고 있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적군은 수적으로 우리보다 월등하다. 하지만 국민의 정신력은 우리가 수천 배나 강하다.
따라서 우선 적의 인적자원에 손실을 입혀야 한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인다면 물리적 위협 따위는 두렵지 않다."
이것이 중학생의 일기입니다. 내 어리석음을 만천하에 까발리는 일이지만
나는 잘못된 교육이 어린이들의 고운 심성을 얼마나 무자비하게 파괴하는지 알리고 싶었습니다.

일본의 군부와 정부기관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영상교육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세대는 고스란히 그 영향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내가 애니메이션 제작에 힘써온 것은
군국주의가 남용한 영화의 효용을 거꾸로 좋게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7. 작품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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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 날은 화의 날이다. 단, 그의 생일을 따와서 이 날이 만화의 날이 된 것은 아니다. 항목 참고.
  • [2] 참고로 그가 모자를 쓴 이유는 젊은 시절에는 그의 콤플렉스였던 곱슬머리를 가리기 위해서, 나이가 든 이후에는 탈모를 가리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 [3] 참고로 데즈카가 태어나고 2주일 뒤 미국에서는 미키 마우스가 주인공인 영화가 개봉된다.
  • [4] 지금도 데즈카가 유년 시절 직접 그린 곤충 도감이 남아 있는데 드로잉 실력이 거의 사진 수준이다.
  • [5] 만화를 그리는 게 어려워지다보니 화장실 벽에 자기가 그린 만화 종이를 붙여 사람들에게 보여주곤 했다고 한다. 일부러 종이마저 빳빳하고 두툼한 걸로 썼다고. 그런데 화장실 휴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결국 포기.
  • [6] 이 때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행군 도중 무단으로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가 안 그래도 부족한 음식을 모조리 먹어치웠다고 훗날 고백했다. 어머니의 설득으로 다시 돌아가지만.
  • [7] 에이케이 커뮤니케이션즈에서 정식 번역판으로 출간한 <로스트 월드>에 수록되어 있다.
  • [8] 구제고등학교는 중등교육기관인 오늘날의 고등학교가 아닌 대학 본과에 입학하기 위한 예비과정이다. 대학 예과에 상당한다. 고등학교 졸업자는 대부분 제국대학이나 의과대학에 진학하였다.
  • [9] 참고로 약자가 '의전' 이긴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의학전문대학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 [10] 공습 등으로 전부 타버릴 뻔한 일도 있었고 여러 사정으로 자기 손으로 태우기 직전까지 갔다고 한다.
  • [11] 메트로폴리스의 원형이 된 만화라고 한다.
  • [12] 처음 연재가 된 날 이 신문을 찾아 몇 시간이나 신문 가판대를 해맸다고 한다.
  • [13] 비록 등장인물의 환상이긴 했지만...
  • [14] "그는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중략) 하오나 애니메이션 저임금화로 생활고에 시달리게 만들어 하청 제작에 의존해야 하는 현실로 만들어 놓았기에 애니메이션의 발전에 극악을 끼친 점이 있습니다." 1996년 10월호 월간 키노 지 참조.
  • [15] 사실 미야자키도 여느 만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어릴 적에 데즈카의 작품을 좋아했고 영향도 많이 받았다. 그러던 중 18세 때 만화가가 되겠다고 결심을 했을 때 '차남으로 태어났어도 장남과 똑 닮아선 안된다' 고 하여 데즈카 모사로 가득 찬 낙서들을 불에 태우는 등 데즈카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노력을 했고 토에이 동화에 입사 후 애니메이터로 일하게 된 이후부터는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이것과는 별도로 데즈카가 제작한 몇 단편 애니메이션에 나타난 염세주의에 대해 매우 탐탁하게 여기지 못한 것도 한 몫 했다.
  • [16] この時、手塚は「(一本につき)五十万で売って。それ以上高くしないでください。それ(くらい低価格)なら他でつくれないでしょ」と指示、「手塚さんはテレビアニメを独占するつもりだったのかどうか。萬年社は『安すぎる』と、手塚さんに内緒で百五十万円を虫プロに払っていました。実際は制作費がいくらなんて、どうでもよかった。ロイヤリティーが日銭で何百万円と入ってきたんですから。」(虫プロ・元営業部次長・須藤将三)
  • [17] もちろん、経理上は最初から百五十五万円で処理していました。その後も値上げ交渉をしていって、『アトム』は放映された四年間で、最終的には一本三百万円を超えるまでになったと思います。(p.129)
  • [18] 社長の手塚治虫は虫プロ設立当時「僕は何かあったら労組の先頭に立って一番に会社を糾弾する」と冗談を言っていたことがある。
  • [19] 50년대에는 자신이 그렸던 만화인 '복안마인'이 옷을 갈아입는 여성의 맨다리(특정 신체부위는 물론이고 속옷차림이 아니라 진짜 맨다리다.)가 보였다는 이유로 판매중지 크리를 맞은 적도 있었다.
  • [20] 인기가 절정을 달릴 때는 원고를 받으러 온 각기 다른 잡지들의 편집장들의 신경 싸움에 관한 에피소드, 다른 편집장들 몰래 원고를 보내기 위해 머리를 굴린 에피소드, 편집장들이 원고 완성을 돕기 위해 덧칠 등 어시스트 노릇까지 하며 의외로 실력을 발휘한 에피소드 등 이 원고 담당자들에 대한 에피소드는 차고 찬다.
  • [21] 아톰도 이런 식으로 여러 군데 다양하게 등장하며 가장 유명한 '스타'로는 악당 햄에그 등이 있다.
  • [22] 이름은 셜록 홈즈에서 따왔다. 첫 출연작이자 주인공인 작품이 '소년탐정 로크 홈'. 간혹 타 작품에선 '마쿠베 로쿠로' 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 사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쪽은 맥베스에서 따왔다.
  • [23] 이 발언은 2013년 미야자키 하야오바람이 분다가 개봉되면서 재조명되었다. 다만 이 작품은 전쟁 씬이 간략하게 묘사됐어도 반전(反戰) 메세지가 없는 건 아니다. 주인공의 모티브가 된 실제 인물이 반전과는 거리가 먼 놈이라서 그렇지
  • [24] 한권당 천만권 넘게 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