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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콘

last modified: 2015-03-24 22:36:46 Contributors


그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사진.


이름 데이비드 브라이언 콘 (David Bryan Cone)
생년월일 1963년 1월 2일
국적 미국
출신지 미주리캔자스시티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1981년 드래프트 3라운드
소속팀 캔자스시티 로열스 (1986년)
뉴욕 메츠 (1987년 ~ 1992년)
토론토 블루제이스 (1992년)
캔자스시티 로열스 (1993년 ~ 1994년)
토론토 블루제이스 (1995년)
뉴욕 양키스 (1995년 ~ 2000년)
보스턴 레드삭스 (2001년)
뉴욕 메츠 (2003년)

1994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사이 영 상
잭 맥도웰
(시카고 화이트삭스)
데이비드 콘
(캔자스시티 로열스)
랜디 존슨
(시애틀 매리너스)

옥수수

5회 올스타 (1988, 1992, 1994, 1997, 1999)
5회 월드 시리즈 챔피언 (1992, 1996, 1998-2000)
AL 사이 영상 수상 (1994)
AL 다승왕 수상 (1998)
2회 NL 삼진왕 (1990, 1991)
1999년 7월 18일 퍼펙트 게임

메이저리그 역사상 16번째 퍼펙트게임의 주인공이며 다섯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경험한 80~90년대의 명투수.

애칭은 Coney
트위터도 한다. @dcone36

Contents

1. 학창 시절
2. 현역 시절
2.1. 캔자스시티 시절
2.2. 메츠 시절
2.3. 토론토 시절
2.4. 다시 캔자스시티에서
2.5. 양키스 시절
2.6. 그 후
3. 플레이 스타일
4. 은퇴 이후



1. 학창 시절

캔자스시티에서 태어난 콘은 만능 스포츠맨이었고 지역의 스타였다.
지역 고등학교인 Rockhurst High School(헤이든 카톨릭 고등학교)에 입학해 쿼터백으로 풋볼팀의 지구 우승을 이끌었고, 농구팀에서는 포인트 가드를 맡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학교엔 야구팀이 없었다..... 야구에 대한 열정도 높았던 그는 Ban Johnson League라는 여름 리그를 통해 야구까지 섭렵한다.운동덕후 연고지에서 나온 재능있는 선수를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된 캔자스시티 로열스는 콘의 야구경력이 부족함에도 1981년 드래프트에서 3라운드라는 높은 순위로 그를 지명하였고 콘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서 그의 본격적 야구경력은 시작되었다.

2. 현역 시절

2.1. 캔자스시티 시절

로열스 입단 후 루키-싱글a에서 두시즌 동안 선발투수로서 22승7패 ERA2.21를 기록하며 상당히 높은 가능성을 보였으나 부상으로 1983시즌을 통째로 날려버리며 상승세에 제동이 걸렸다. 부상복귀시즌인 1984년 더블A Memphis 팀에서 8승12패 ERA4.28을 기록하였고 트리플A팀 Omaha로 승격한 1985시즌엔 9승15패 ERA4.65로 부진했다.
선발투수로서의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로열스구단은 1986시즌부터 콘을 릴리프로 컨버전 시켰는데 이것이 작은 성공을 거두었다. 8승4패 14세이브 ERA 2.79을 기록한 콘은 이 시즌에 가까스로 메이저리그 데뷔를 이루어 냈다. (팀의 사이영투수 렛 세이버하겐의 구원투수로 데뷔) 하지만 오래 활약하지 못했고 확장로스터 기간에 조금 더 던지며 도합 22.2이닝 ERA5.56의 초라한 루키시즌 기록을 남겼다.

2.2. 메츠 시절

1987시즌에 앞서 로열스구단은 뉴욕 메츠와 트레이드를 추진하게 되는데 백업포수 Ed Hearn과 중고신인투수 Rick Anderson,13라운드 마이너투수Mauro Gozzo 세명을 뉴욕 메츠로부터 받고, 외야 유망주 Chris Jelic과 데이비드 콘을 내어주는 트레이드였다.
Ed Henarn과 Rick Anderson은 1986시즌에 데뷔했던 신예들이었는데, 즉시전력감이었지만 성장가능성은 낮은 대체가 가능한 자원들이었다. Mauro Gozzo는 낮은 드래프트 순번이 말해주듯 깍두기.. 로열스입장에선 팀의 예비전력을 보충하는 트레이드라고 할 수 있었다.일단 저 세명은 별볼일없이 은퇴했다. x망... 한편 트레이드에 포함 된 Chris Jelic 1985년 드래프트 2라운드 지명선수로서 당시 트레이드에선 콘보다 비중이 더 높은선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트레이드의 주인공은 데이비드 콘이되었고 메츠는 어마어마한 이득을 남겼다.

트레이드 직후 첫 시즌이었던 1987년,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5승 6패 ERA3.71이라는 쏠쏠한 성적을 남기고 메츠에게 일찌감치 본전을 뽑아준 콘은 이듬해인 1988시즌부터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드와이트 구든을 위시한 막강한 마운드를 자랑했던 메츠였기에 1988시즌을 불펜에서 시작하게 된 콘은 5월달 첫째 주에 땜빵으로 선발기회를 얻었는데 이 경기에서 애틀란타 브레이브스를 완봉으로 제압하는 사고를 치게된다. 이후 정규 로테이션에 편입되어 전반기를 9승2패 2.52의 방어율이란 훌륭한 성적으로 마쳤으며 올스타게임에도 나서게 되었다.
시즌 최종성적은 20승 3패와 2.22의 평균자책. (하지만 그 해 사이 영 상은 24승이나 거둔 랭크 비올라에게... 콘은 사이영투표3위) 콘의 활약에 힘입어 뉴욕 메츠는 시즌 100승을 거두며 챔피언쉽시리즈에 진출하나 렐 허사이져가 투혼을 보인 LA 다저스에게 7차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패배하고 말았다. 콘은 실력으로, 그리고 주둥이으로 맞섰지만(신문에서 싸웠다) 팀의 패배를 막지 못했다. 콘의 메츠시절 중 우승에 가장 가까운 시즌이었지만 이 시즌은 MLB역사에서도 메이징 메츠에 버금갈 정도의 업셋 시즌으로 꼽힌다. 그냥 운이 없었다고밖엔..
하지만 그 후에도 91시즌까지 4년연속 +10승 +200이닝을 기록하며 구든이 한물간 메츠 마운드의 에이스 + 내셔널리그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특급 우완투수로 올라서게 되었다. 마구마구에서 그의 레전드카드도 이 팀 소속일 정도로 메츠시절의 활약은 대단했다.

2.3. 토론토 시절

FA를 앞둔 1992년 시즌, 올스타전에서 데이비드 콘은 뉴욕 메츠의 유일한 대표였다. 그 정도로 소속팀은 많이 망가져 있었다. 올스타 브레이크시점에서 콘의 성적은 9승4패 ERA2.56 그러나 팀 성적은 지구선두 피츠버그에 14게임이 뒤진 56승67패.. 결국 메츠는 미래를 위해 토론토로부터 파워포텐셜이 넘치는 2루수 유망주를 받고 콘을 트레이드시킨다.[1] 트레이드 데드라인을 넘긴시점인 8월27일 웨이버트레이드로 넘어갔기에 토론토에서는 많은 경기를 뛰지 않았고 2.55의 평균자책점과 4승을 보태며 1992년 전체성적으로는 17승 10패, 2.81의 평균자책을 기록한다. 그리고 토론토가 콘을 영입한 진짜목적이었던 포스트시즌에선 준수한 활약을 펼치며(1승1패 ERA3.22) 캐나다 팀의 첫 월드시리즈 정복에 기여했다. 콘 개인적으로도 첫 우승반지를 득템, 그리고 FA 자격을 얻더니...

2.4. 다시 캔자스시티에서

FA 자격을 얻은 콘은 고향팀 캔자스시티 로열스를 선택한다. 콘이 금의환향하게 된 계기는 고향팀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캔자스시티 기반의 기업가이자 로열스구단주 유잉 카프만의 투자가 가장 큰 이유였다. 캔자스시티는 인구수 100만명도 안되는 스몰마켓이었지만 리그 정상급의 페이롤을 유지하는 팀이었다. 이것은 순전히 구단주 한명의 열정으로 이루어 낸 것이었다. 유잉 카프만은 아름다운 야구전용구장을 짓고 고액연봉선수를 영입하기위해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심지어 콘의 영입을 지시한 1993년 당시 카프만은 암 투병중이었다...
콘은 계약 첫해에 기대에 조금 모자란 성적을 내지만 1994년엔 개막후 8연승, 6월이후 6연승을 거두며 맹렬히 질주하더니 16승4패 ERA2.94의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서 마침내 사이 영 상을 받는 데 성공한다! 다승을 중요시했던 시절이라 승수가 좀 미미해보이긴 하지만, 1994년 시즌은 선수 노조의 파업으로 일찍 끝났기 때문에 콘이 올라올 수 있었던 경기 수가 적었다. (23경기 등판). 콘은 사이영수상외에도 MVP투표에서 9위를 기록하며 당대 최고의 선수임을 입증했다.

이렇게 고향팀에서 전성기를 누리며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는데...

역사상 가장 캔자스시티 로열스를 사랑한 남자, 구단주 유잉 카프만이 1993시즌도중 암투병끝에 사망하며 사태가 급변하게 되었다. 돈줄이 끊어진 로열스 운영진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고 콘이 대질주를 하는 시즌중에도 그를 팔 궁리에만 몰두했다. (1994시즌 개막당시 로얄스의 페이롤은 리그4위) 결국 파업이 끝난 나흘 후 로열스는 Chris Stynes, David Sinnes , Tony Medrano 세 명의 선수를 토론토로부터 받고 콘을 트레이드했다.(그러나 받아낸 세명의 유망주는 다 망. 했. 다. 그나마 Chris Stynes가 유틸플레이어로 메이저에 남았지만 그것은 로열스를 떠난 후의 일이다.) 콘은 어려운 고향팀을 위해 자신의 이적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한편 파업당시 콘은 톰 글래빈과 선수협회의 대표를 맡아 선수들의 권익 신상을 주장하기도 했다.밉보였던것도 팔린 이유??

2.5. 양키스 시절

하지만 콘은 다시 온 토론토에서도 오래 있지 못했고, 1995년 시즌 중반 쯤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된다. 토론토가 다시한번 우승의 꿈을 품고 콘을 데려오긴 했지만 팀 성적이 너무 안좋았던것이다.(트레이드 당시 35승 47패), 양키스가 콘을 데려오며 지불한 유망주들은 Marty Janzen, Jason Jarvis and Mike Gordon. 근데 이 유망주들도 망. 했. 다. 어째 콘이랑 바꾼애들은 거의 다..
어쨌든 양키스에 합류한 첫시즌에 마이크 무시나에 이어 18승으로 다승 2위를 기록한 콘은 신뢰높은 에이스의 모습을 보여줬고 팀을 와일드카드까지 이끌었다. 그 가치를 인정받고 양키스와 재계약에 이르렀는데...(3년 19.5M) 새 계약의 첫 시즌인 1996년 정맥류수술을 받으며 시즌의 대부분을 날려먹게 되었다. 하지만 후반기 복귀하여 7승2패 ERA2.88을 좋은 성적을 기록하고 완벽한 몸 상태로 포스트시즌을 준비하게 되었다. 당시 양키스는 13시즌 연속 포스트시즌 탈락중이었는데 콘은 디비전시리즈, 챔피언쉽 시리즈에서 부진하다가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와의 월드시리즈 3차전에서 6이닝 1실점의 시리즈 첫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 승리는 양키스가 무려 18년만에 처음으로 월드시리즈에서 거둔 승리였다... 그리고 양키스는 월드시리즈 우승을 거뒀고 콘은 2개째의 반지를 갖게 되었다.
이듬해 97시즌엔 승운이 따르지 않으며 12승 6패 ERA 2.82를 기록하며 에이스역할을 해냈지만 포스트시즌엔 부진했고 팀도 탈락했다. 98년엔 전년도의 불운을 보상받는듯 생애 두번째 20승을 기록하였고, 사이영투표 4위를 차지했다. 98시즌엔 무엇보다 포스트시즌에서의 활약이 뛰어났는데 결정적 경기마다 활약하며 양키스에서의 2번째 우승, 개인통산 3번째 우승을 이뤄냈다. 3년계약이 끝난 콘은 800만 달러에 양키스와 1년 재계약을 하며 양키스생활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1999년 7월 18일에는 몬트리올 엑스포스를 상대로 MLB역사상 16번째의 퍼펙트 게임을 기록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그날은 요기 베라데이였다..겹경사 한국나이 37세의 시즌임에도 콘의 위력은 줄어들지 않았고 시즌내내 좋은활약으로 팀을 포스트시즌으로 이끌었다. 포스트시즌에서도 2년연속 맹활약하며 개인통산 네번째 우승반지를 득템했다. 이 시절 메이저리그에선 로저 클레멘스, 그렉 매덕스, 페드로 마르티네스, 마이크 무시나 같은 엘리트 선발투수들이 많았는데 콘의 시즌정적이 그들보다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위상은 결코 떨어지지 않았었다. 톱니바퀴처럼 척척 들어맞던 양키스에서 QS를 밥먹듯이 소화해내는 콘의 모습은 솔리드함 그 자체였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WS)에선 항상 양키스가 이겼다. 시대의 진정한 승리자는 양키스와 콘이었던 것이다.

2.6. 그 후

99시즌 맺은 1년 계약이 만료된 콘은 2000년 시즌을 앞두고, 다시 1년 1,200만 달러에 양키스와 재계약한다. 리그 최정상급과는 거리가 멀어졌지만 그래도 안정적인 피칭으로 양키스의 로테이션을 이끌 줄 알았는데.... 4승14패 ERA6.91의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며 먹튀질을 하고야 말았다. 등판기회를 꾸준히 준게 용할정도의 성적, 시즌 내내 콘의 반등만 기다리며 기용했지만 반등은 끝내 없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충격적 몰락. 빅게임 피쳐의 이미지덕에 포스트시즌 합류하였지만 콘의 기여는 전-혀 없었다. 어쨌든 다섯번째 월드시리즈 반지는 획득 성공... 시즌 종료 후 양키스와의 세번째 재계약에 실패한 콘은 2001년 양키스의 라이벌 보스턴 레드삭스와 가까스로 계약해서 9승7패 ERA4.31을 기록 어느정도 재기에 성공했다. 시즌중 양키스의 새 에이스 마이크 무시나와 선발대결을 펼쳐 8과 1/3이닝 1실점의 빛나는 피칭으로 이목을 끌기도 했다. 2000시즌은 진짜 마가 끼었나
보스턴과의 1년 계약이 만료된 후 부상등의 문제로(만성 고관절) 2002시즌을 통째로 쉬며반 은퇴상태로 지내다가 2003년 처음으로 재능을 꽃피웠던 뉴욕 메츠에 재입단 하여 피날레를 장식하고자 했다. 하지만 부진과 부상이 겹쳐 별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5월 28일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17시즌 동안 활동하며 통산 194승 126패와 3.46의 평균자책을 남겼다. (통산성적)

200승은 충분히 달성 가능한 영역이었는데도 막판에 너무 허망하게 무너진것이 아깝다.


3. 플레이 스타일

우완 파워 피처로 전성기 때에는 삼진을 잡는 능력이 준수했다. 1990년, 1991년 탈삼진 타이틀을 2년연속으로 차지할 정도였으며 한이닝 9스트라이크, 3삼진아웃의 진기록을 가진 25번째 투수이기도 하다. 1991년 10월 6일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상대로 19삼진 경기를 하기도 했는데 이 기록은 그때까지 기록된 한경기 삼진기록중 역대 2위였다.
많은 탈삼진을 잡았던 비결은 바로 당대 최정상급 위력을 자랑한 슬라이더와 제구력. 상황에 따라 급작스럽게 팔 각도를 쓰리 쿼터에서 사이드암까지 다양하게 변화시켰는데, 슬라이더에 더욱 심한 움직임을 주는 투수들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이 슬라이더는 "라레도(Laredo) 슬라이더"라는 별칭까지 만들어져있다. 다만 말년기 (2000년)에 쓰인 콘에 관한 스카우팅 리포트에는 체력이 좋은 편은 아니기 때문에 등판 간격을 지켜 등판하면 잘 털리므로 더 많은 휴식일을 줘야 한다는 내용이 쓰여있었다고 한다. 함께 자웅을 겨루던 글래빈, 매덕스 등이 준수한 40대 커리어를 보낸걸 생각하면 콘의 몰락이 안타깝긴 하지만 이건 콘의 몸 관리문제를 탓하기 전에 저들이 너무 괴물이라서..

4. 은퇴 이후

90년대 양키스 르네상스의 핵심투수답게 관련된 행사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2009년에는 구단의 부탁을 받고 팬들에게 새 양키스타디움의 고급 좌석을 사달라고 전화로 부탁하는 일을 맡기도 했고, 2010년에 이후로 올드 타이머 데이에 꾸준히 참석하고 있다. 폴 오닐, 플라허티 등등처럼 YES 네트워크에 간간히 해설위원으로 모습을 비추고 있다. 대체로 원정 경기에 많이 나오는 편. 지금은 코네티컷 주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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