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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마사타케

last modified: 2016-07-29 23:19:19 Contributors



총리대신 취임 뒤 사진(왼쪽). 초상화로 색을 알 수 있다(오른쪽)
寺内正毅, 1852년 2월 24일 ~ 1919년 11월 3일

역대 일본 총리
17대 오쿠마 시게노부 18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19대 하라 타카시

역대 조선 통감
2대 소네 아라스케 3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부 승계)

역대 조선 총독
(통감부 승계) 1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2대 하세가와 요시미치

Contents

1. 출생부터 육군대장까지
2. 식민지 조선에서의 행적
3. 내각수상 시절
4. 기타


1. 출생부터 육군대장까지

1852년 일본 야마구치[1]에서 일본 사무라이 가문의 3남으로 태어났으며 초명(初名)은 우타다 마사다케(宇多田正毅)[2]였으나 외가에 양자(養子)로 입문하면서 어머니의 성씨인 데라우치(寺內)로 바꿨다.

1868년 메이지유신일본군 육군부에 입대하여 육군 장교에 올랐고 1877년 정한론(征韓論)를 제창한 사이고 다카모리가 일으킨 세이난 전쟁 때 참전하였으나 다바루자카(田原坂) 전투에서 오른팔이 칼에 잘려 나가서 야전보다는 후방에서 보직을 맡았다.

1898년 일본 육군 교육총감과 육군대학 총장을 역임하였고 1901년 가쓰라 다로 내각하에서 육군대신에 올라 조선총독으로 임명받을 때까지 조선총독을 겸임하여 10년간 육군대신 역할을 맡았다.

1904년 러일전쟁일본의 승전에 따라 육군대장으로 진급했고 철도회사인 남만주철도회사(만철) 위원을 맡았다.

2. 식민지 조선에서의 행적

1910년 7월 2대 조선이었던 소네 아라스케[3]가 물러나면서[4], 일왕의 임명으로 한양으로 입성하여 3대 조선통감에 부임하였다.

한일병합 착수를 위해 동년 8월 16일 매국노 이완용과 농상공대신[5] 조중응 등 친일파 대신을 통감관저로 비밀리에 불러들여 병합조약을 밀의(密議)하고 22일 이완용을 내세워 순종 앞에서 형식상의 어전회의를 거치게 한 뒤 비밀리에 총독관저에서 이완용과 양자간 첫 한일병합에 관한 조인식을 가졌다. 이레 뒤 황제의 도장을 강탈한 끝에 병합 조약을 29일 공식 발표하였다.

이렇게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경술국치)을 하면서 천황에게 총독직을 임명받아 일본 육군대신을 겸직하여 초대 조선총독으로 격상 부임하여 조선을 지배하였다.

총독을 하기 직전부터 자신의 통치를 반기지 않거나 반항하는 조선인들을 억압하러 부임 초기부터 무단통치 및 헌병의 경찰 직무통치를 실시하였다. '조선주차헌병조례'(1910년 9월 12일자)'를 발표하여 일본 헌병을 증원하고 경찰 업무를 맡도록 조치했다. 일본 헌병대에서 장교 30명, 하사 600명, 헌병 3000여 명을 충원받아 각 지역에 헌병대 분견소를 세우고 조선을 총칼로 억눌렀다.

조선인은 일본통치에 복종하든지 죽든지 하나를 택해야 한다. - 마왕 총독 취임사

총독이 된 그는 조선일본의 속령지역으로 지정하면서 '집회취체령'을 공포하여 모든 사회단체를 해산[6]시켰으며, 1911년에는 105인 사건을 일으켰다. 또, 조선의 애국가 등을 불온선동 금지곡으로 지정하였고 교육상에서 조선인들의 황국신민화를 위해 친일(親日) 성향의 학교를 세웠다.

토지사업에서도 그는 조선 농민들의 농토(農土)의 상당수를 총독부 사유지로 지정하여 침탈하였고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친일파, 매국노들에게 이를 매각하여 넘기기도 하였다. 이 탓에 조선의 지주와 농민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은 물론 빚더미까지 안았고, 농토를 강제로 빼앗겨서 농사도 못 짓는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다만 식민지 근대화론 학자들에 따르면 이는 한 개인의 근거 없는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총독부가 사유화한 토지는 전체 토지의 2.6%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조선의 소작농들에게 값싸게 매각, 불하했다고 한다. 그래서 도리어 이 사례는 근대화 사례로서 쓰기도 한다. 또한 조선회사령을 실시하여 "산업 보호"를 명목으로 회사들을 등록제가 아닌 허가제로 운영하였다.[7]

3. 내각수상 시절

1916년에 그는 일본 정부에서 내각수상으로 임명을 받아 6년간의 조선총독직에서 사임하고 일본 도쿄로 건너가 일본 내각수상으로 취임했다. 조선총독 → 총리로 승진한 첫 사례. 여기에 원수로 승진하고 대장성대신과 외무성대신까지 겸임했으니 말 그대로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전임 오쿠마 시게노부가 하던 제1차 세계대전을 이어받은 전시내각으로서 독일과 전쟁을 이었고, 뭐가 아쉬웠는지 총리 재직 중에도 조선과 대만, 특히 조선의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했다. 하세가와야 그의 부하였을 뿐이니(...) 상왕 돋네

1917년 레닌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이 공산혁명에 반대하는 세력을 지원하러 적백내전기간 시베리아에 군대를 보내 침략하는데, 이것이 '베리아 출병'으로 제출 당시 중의원이 발칵 뒤집혔다. 나중에 후임인 하라 타카시가 이어받아 원만하게 매듭지었다.

1916년부터 이런 군인스러운 막장체제를 2년 동안 줄곧 유지한 바람에 1918년에 이르러서는 전쟁으로 인플레가 나타나 경제개판이었으며, 식량분배에 차질이 나자 결국 그 유명한 ' 폭동'으로 이어졌다. 이걸 해결하러 애꿎은 대만과 조선의 농부들만 계속 쥐어짰지만 끝내 사표. 사임하고 1년 뒤 병으로 사망하였다. 사이토 마코토도 그렇고, 왜 조선 총독 출신 총리의 팔자는 나쁘냐?

총리 재임 중 별명빌리켄 총리. 리켄 인형과 비슷해서 붙은 별명인데, 잘 발음하면 비입헌(非立憲)일어 발음과 비슷하다고. 이런 별명이 붙었다니 같은 일본인도 싫어했던 모양.

4. 기타

평소 성격이 엄격횡포하며 강경했다고 한다. 덕분에 부하들에게는 꽤나 피곤한 상사. 부하가 올린 결제문서를 검토할 때 그가 볼펜으로 고친 곳이 많았다고.(...) 공석에서는 자주 부하들을 혼냈지만, 부하가 입원하면 문병은 꼭 갔으며 심지어 몰래 입원비까지 냈다라 한다. 심지어 자신이 쓴 글씨를 팔아 고아원에 기부했다니 흠좀무.

피곤한 상사답게 자신의 부임지와 관련해 생산한 물건은 반드시 썼다고. 조선총독 시절 품질에 관련 없이 한반도에서 만든 물건은 꼭 식탁에 올리거나 썼다니 일 중독자 맞는 듯.(...)

취미로 칼과 불상의 수집을 즐겼다. 심지어 한반도에서 불상과 석탑의 유출을 막는 조치를 폈다고 한다.무리한 공사로 석굴암 망가뜨리고 책 약탈한 건? 석굴암 건은 의도는 좋았다.

이 자가 대만과 조선 등지에서 (이라 쓰고 약탈)한 서적들은 현재, 라우치 문고라는 이름으로 현립 야마구치 여대에 있다.

기자를 싫어한 역대 일본 총리 3인 중 한 사람이다.(데라우치 마사타케, 가토 다카아키, 사토 에이사쿠)

장남은 라우치 히사이치태평양 전쟁 중 남방총군 총사령관. 무다구치 렌야의 제15군과 함께 무개념 3군으로 활동한 그 남방총군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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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야마구치현과 가고시마현은 전통적인 보수성향 지역으로 유명하다.
  • [2] 일본의 유명가수 우타다 히카루의 그 우타다(宇多田) 맞다. 우타다라는 성씨조슈번 하급무사 가문에서 유래하여 현재 일본에 100명 정도만 있는 희귀한 성씨이다. 우타다 성씨끼리는 다들 먼 친척관계이지만 우타다 히카루와 데라우치 가문과는 성씨외의 연관성은 전혀 없다.
  • [3]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보좌한 부통감. (1849 ~ 1910)
  • [4] 물러난 지 넉달 만인 9월 13일에 죽어서 지병 사임설도 있고 경질이 죽음을 불렀다는 설도 있다.
  • [5] 지금의 농림수산식품부 및 지식경제부 장관직.
  • [6] 친일단체인 일진회도 싸잡아 해산시켰다.토사구팽 돋네
  • [7] 헌데 이것은 한참 뒤 등록제로 바뀌는데 일본 내지의 회사들이 "조선회사령 때문에 조선 진출이 힘들다."는 까닭이었다고. 정보 추가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