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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츠카사 카즈코

last modified: 2015-03-25 12:44:53 Contributors


쇼와 덴노와 고준황후의 2남 5녀 중 3녀. 아키히토 덴노의 셋째 누나이다. 미혼 시절의 이름은 다카노미야 카즈코(孝宮和子) 내친왕.

Contents

1. 약혼
2. 불행한 결혼생활 및 사별
3. 친정으로
4. 사망

1. 약혼

카즈코 공주는 1948년 가쿠슈인 여자 고등과를 졸업한 후 前 시종장 햐쿠타케 사부로(百武三郞)의 거처에서 1년 정도 신부수업을 받았다. 이듬해 11월 23일 이종사촌 오빠인 오오타니 고쇼(大谷光紹)[1]와의 약혼이 발표되었다. 오오타니 가문에서도 적극 환영했으나, 이 약혼은 파기되었다.

그리고 1950년 1월, 6살 연상인 다카츠카사 도시미치(鷹司平通)와의 약혼이 정해졌다. 도시미치의 아버지 다카츠카사 노부스케(鷹司信輔)는 옛 공작[2]이자 메이지신궁의 제관(祭官)이었다. 패전 후 처음인 공주의 결혼에, 신랑감이 옛 공작 가문의 아들이지만 일반 직장인이라는 것도 화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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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니히토에를 입은 카즈코 공주. 신랑 도시미치, 할머니 사다코 태후와 함께.

약혼 기간 중에 도시미치는 카즈코 공주가 두 여동생 요리노미야 아츠코 공주, 스가노미야 타카코 공주와 함께 생활하는 구레타케(烏竹) 기숙사[3]를 자주 방문했다. 큰언니인 히가시쿠니 시게코는 결혼 전에 신랑 될 사람을 한 번 만나보지도 못하고 어른들이 정한 상대에게 시집가서 어려움을 겪은 바 있어, 여동생들은 형식적으로나마 맞선, 교제, 데이트 등을 거친 것이다. 특히 어머니 나가코 황후는 딸들의 이러한 신식 행보를 적극 지지해 주었다.[4]

2. 불행한 결혼생활 및 사별

1950년 5월 20일, 카즈코 공주는 도시미치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그녀는 황족의 신분을 잃고 평민이 되었다. 5년 후인 1955년에야 임신했지만 사산(死産)되었고, 이후로 다시는 임신하지 못했다.[5]

1966년 1월에는, 사라졌던 도시미치가 이틀 만에 단골 바(bar)의 마담(당시 39세)과 함께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장소는 마담의 집이었고, 두 남녀의 사인은 일산화탄소 중독이었다. 이 사건은 세간의 큰 관심을 끌었고, 몹시 충격을 받은 카즈코와는 상관없이 언론은 정사(情死) 등의 선정적인 제목으로 신나게 보도했다. 남편의 불륜에 이어 갑작스러운 사별과부가 된 카즈코는, 언론과 공공장소에 노출되는 것을 점점 피하기 시작했다.

2년 후인 1968년에는 강도까지 당했다. 카즈코가 집에 혼자 있을 때, 주방에 칼을 든 강도가 침입한 것. 입을 틀어 막힌 카즈코는 겨우 현관으로 도망쳤지만, 양손 가운데손가락에 전치 1주의 부상을 입었다.

3. 친정으로

그 후로 카즈코는 친정인 황실로 돌아가서 살았다. 아버지 히로히토 덴노가 그녀의 안전을 염려하여 아카사카(赤坂) 이궁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남동생 아키히토 황태자도 홀로 된 누나 카즈코를 가족 휴가 등에 초대하여 함께 어울리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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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여름휴가에서, 큰올케 미치코 황태자비 및 그녀의 두 과 함께.

1974년에는 고모할머니 기타시라카와 후사코(北白川房子)[6]의 뒤를 이어 이세신궁의 제관을 맡았다. 1988년 카즈코가 퇴임한 후로는 바로 아래 여동생인 이케다 아츠코가 뒤를 이어 제관이 되었고, 2012년부터는 조카인 구로다 사야코가 임시 제관이 되었다.

4. 사망

아버지 히로히토 덴노가 사망하고 약 4개월 후인 1989년 5월 26일, 카즈코도 뒤따르듯 심부전증으로 사망했다. 이듬해인 1990년에 아키히토 덴노의 차남 아야노미야 후미히토 친왕이 가와시마 키코와 결혼했고, 고모 카즈코가 살던 아카사카 이궁에 신접살림을 차려 1997년까지 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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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고준황후의 여동생 오오타니 사토코(大谷智子)의 아들.
  • [2] 1947년의 신적강하로 인해 평민이 됨
  • [3] 일본 황실의 전통에 따라, 자녀들은 부모와 떨어져 양육되었다. 그러나 훗날 평민 출신의 비(妃)로 화제를 모았던 미치코 황태자비는 이 전통을 깨고, 2남 1녀를 자신의 곁에 두고 길렀다.
  • [4] 그러나 1959년 큰아들 아키히토 황태자가 평민 여성 쇼다 미치코와 연애결혼을 할 때는 강하게 반대했고, 그 반대를 이기고 결혼이 이루어진 후에도 큰며느리 미치코 황태자비를 몹시 미워하여 호된 시집살이를 시켰다.
  • [5] 끝내 자녀를 낳지 못하여, 시누이 마츠다이라 아키코(松平章子)의 아들인 나오다케(尙武)를 양자로 들였다.
  • [6] 메이지 덴노의 7녀. 후사코의 손녀 기타시라카와 하츠코(北白川肇子)는 1939년 출생한 직후부터 아키히토 황태자의 신붓감으로 거론되었으나, 평민 쇼다 미치코에게 밀려 탈락하고 나가코 황후의 외가인 시마즈 가문으로 시집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