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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 스펜서

last modified: 2015-03-16 18:44:32 Contributors

Diana Frances Spenc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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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세자빈 시절(1981년~1996년 / 이혼 전) 쓰던 문장
이혼 이후(1996년~1997년) 쓴 문장

Contents

1. 개요
2. 직위
3. 일생
3.1. 어린 시절
3.2. 찰스 왕세자와의 결혼
3.3. 불행한 신데렐라, 그리고 이혼
3.4. 활발한 봉사활동
3.5. 죽음
4. 추모의 물결
5. 이모저모

1. 개요

영국의 前 왕세자빈이자 왕위 계승 서열 2위 케임브리지 공작 윌리엄3위 였으나 이제는 조카한테 밀려4위 해리 왕자의 어머니. 대신 서열 3위의 할머니잖아 1981년찰스 왕세자와 결혼해 두 아들까지 낳았으나, 불화 끝에 1996년 이혼했다. 자신이 가진 영향력을 이용해 봉사와 자선활동에 헌신하여 영국인들과 세계인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지만, 이혼 다음 해인 1997년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흔히 다이애나 빈이라고 부른다.

2. 직위

다이애나가 찰스 왕세자와 결혼했을 때 정해진 공식적인 호칭은 다음과 같았다.

'웨일스 공작부인(=왕세자빈), 체스터 백작부인, 콘월 공작부인, 로스시 공작부인, 캐릭 백작부인, 렌프루 남작부인, 아일의 레이디, 스코틀랜드 공작부인이신 찰스 필립 아서 조지 왕자빈 전하(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Charles Philip Arthur George, Princess of Wales & Countess of Chester, Duchess of Cornwall, Duchess of Rothesay, Countess of Carrick, Baroness of Renfrew, Lady of the Isles, Princess of Scotland)'

그리고 1996년 이혼한 뒤로는 '왕세자빈 다이애나(Diana, Princess of Wales)'로 호칭이 변경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전하(Her Royal Highness)'의 경칭이 빠졌다. '전하'는 왕족에게만 허용되는 경칭이므로, 전하로 불리지 못한다는 것은 곧 왕족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론적으로는 '왕족이 아닌' 다이애나가 공식 석상에서 '왕족인' 자기 아들들에게 절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 이걸 잘 알고 있던 다이애나는 이혼 후에도 전하의 경칭을 유지하기 위해 왕실과 신경전을 벌였으나 장남 윌리엄이 "내가 왕이 되면 엄마한테 다시 전하의 칭호를 돌려줄게요"라고 말해 이를 받아들였다고. 머..멋있어... 비슷한 시기에 이혼한 사라 퍼거슨(찰스 왕세자의 바로 밑 동생인 앤드류 왕자의 전 부인. 즉, 다이애나에게는 아랫 동서인데 사실 둘은 어릴 때부터 관계가 있었다고 한다.)도 "전하"의 경칭이 빠지고 단지 "요크공작부인"으로만 불리고 있다.

다이애나 사후 토니 블레어 총리는 추도연설에서 그녀를 민중의 왕세자빈(People's Princess)라 불렀는데 다이애나에 대한 영국 국민의 애정을 생각해보면 그 어떤 호칭보다도 가장 잘 어울리는 호칭일지도.

3. 일생

3.1. 어린 시절

8대 스펜서 백작 존 스펜서(Edward John "Johnnie" Spencer, 1924.1.24.-1992.3.29.)의 3녀로 태어났다. 다이애나의 친정인 스펜서 가문은 스튜어트 왕조 찰스 2세의 후손으로 찰스 2세의 사생아 중 하나였던 그래프턴 공작 헨리 피츠로이의 후손이다. 다이애나의 8대조 할아버지 찰스 스펜서를 통해 윈스턴 처칠과도 혈연이 닿아 있는 엄연한 귀족 가문이다.[1] 후술된 내용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사실 이 "귀족 가문의 딸"이라는 신분 덕분에 왕세자와 결혼할 수 있었다. 가문의 역사만 놓고 보면 스펜서 백작 가문이 영국 왕실인 윈저 왕가보다 더 유서가 깊을 정도. 귀족 가문 출신인데다 스펜서 백작 가문의 선대가 무역업 등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덕분에 다이애나와 그 언니들, 남동생 모두 유복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2]

그러나 6세 때 부모가 이혼하면서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이 인생에 걸쳐 트라우마로 작용했다. 다른 사람을 돌보고 도와주는 일이 적성에 맞았고 이 일을 하면서 존재감을 인정받고 행복을 느꼈지만, 주변에서 신경을 쓰지 않는 바람에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자랐다. 그리고 이런 성격은 왕세자빈이 되었을 때 언론의 과도한 관심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결혼 전에는 상류층들이 다니는 유치원에서 시간제 보모로 일했다고 한다.[3] 아이를 좋아해서 한 일이라고 하며 유치원 보모로 일하면서도 친분이 있는 다른 귀족의 자녀를 개인적으로 돌보는 베이비 시터로도 일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여 가방끈이 짧았던 탓에 정식 직업을 갖지는 못했고 웨이트리스 등의 여러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3.2. 찰스 왕세자와의 결혼

다이애나가 찰스 왕세자를 처음 만난 것은 17세 때의 일이었지만 그때는 그저 지나가는 인연 정도로만 넘어가는 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차가 열 세살이나 났으니(...) 그러다 3년 뒤인 20세 때 다시 만난 자리에서 찰스는 다이애나의 자상함과 아름다움에 호감을 가지고 교제를 시작했다. 띠동갑 도둑 + 천하의 못된 왕세자 분

이후 시도때도 없이 기자와 파파라치유치원 로 일하던 다이애나에게 달라붙어 찰스와의 관계를 캐물었고, 쏟아지는 세간의 폭발적인 관심으로 정신이 없어질 무렵 다이애나는 찰스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영국 왕실은 1981년 2월 24일 찰스와 다이애나의 약혼을 공식 발표했고 5개월 후인 1981년 7월 29일 세계인 수억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세기의 결혼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결혼식 당시의 실황 중계 영상.



결혼식 때 다이애나가 입은 웨딩드레스.

이는 찰스의 내연녀였던 카밀라가 골라준 옷으로, 움직일 때마다 옷감에 간 구김이 마치 폐지처럼 보이게 하려는 의도였으나 드레스가 다이애나의 미모빨을 받았다(…).드완얼

'20세기의 신데렐라'로 불리며 새로운 왕세자빈이 된 다이애나를 본 세계인은 그녀의 매력과 아름다움에 열광했다. 많은 사람이 이 부부가 앞으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지내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이애나가 입은 의상과 착용한 장신구는 당대의 패션을 선도하는 유행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고, 왕실은 더할나위 없이 가족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러나…

3.3. 불행한 신데렐라, 그리고 이혼

남편 찰스는 결혼하기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카밀라 파커 보울스와 불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카밀라가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한 유부녀였음에도 그들의 사랑은 계속되었고, 찰스의 마음이 자기에게 없다는 것을 안 다이애나는 찰스가 자기와 결혼한 이유가 왕세자비라는 자리에 앉혀놓기 위한 적당한 인형을 마련하기 위함이었음을 깨닫고 절망했다.

사실 다이애나는 결혼 직전에도 찰스가 과연 자신을 정말 사랑하는지를 물어보았고, 이에 찰스는 애매한 대답을 내놓았다.

"사랑하오, 그 의미가 무엇이든지."

사실 찰스가 카밀라와의 사랑을 쟁취하는 방법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할머니 엘리자베스 왕대비와 사이가 나빠질 걸 각오하고, 큰할아버지 에드워드 8세를 본받아 왕세자 자리를 포기하고 평민 출신인(카밀라의 외가는 상당한 귀족집안) 카밀라와 결혼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찰스는 왕위와 사랑을 모두 가지려고 했기에 대중을 눈속임하여 왕세자로서의 인기를 얻으려고 젊고 아름다운데다 '성공회 신자'이며 '처녀'인 다이애나와 사랑도 없는 결혼을 한 것이다. 심지어 다이애나와의 신혼여행 중에도 카밀라가 선물한 커프스를 달았을 정도니 말 다했다(…). 결혼한 다이애나의 눈에 남편의 불륜 행각이 보이지 않았을 리 없었을 터. 당연히 카밀라와의 관계를 끝내라고 여러 번 요구했다. 그러나 찰스는 오히려 다이애나가 괜한 걸로 트집 잡아 오해한다며 뻔뻔하게 관계를 유지했고,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다이애나는 자살 시도에 거식증과 폭식증으로 심신이 지쳐갔다.

급기야는 시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에게 호소하기에 이르렀지만 다이애나의 간청을 들은 여왕의 답변은 "왕세자는 구제불능이구나."라는 말뿐 어떠한 대책도 내놓지 않았다(…). 왕실은 왕세자 부부의 화목한 모습을 바라는 대중을 위해 끊임없이 언론플레이를 했고 다이애나는 그에 맞춰 미소 짓고 손을 흔드는 일을 반복해야만 했다.

비록 찰스의 진심 어린 사랑은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슬하에 윌리엄과 해리 두 왕자를 출산해 차기 대통을 잇는 왕세자빈으로서의 의무를 다한 다이애나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신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 아들들을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으로 훈육했다. 동서고금의 왕실에서 어린 왕자녀의 양육을 유모에게 맡기고 교육도 엘리트 코스만 밟게 한 것과 달리 다이애나는 모유를 먹여가며 두 아들을 직접 돌봤고 일반인과 같은 학교에 다니도록 하는 등 서민적인 양육을 고수했다. 그녀의 따스한 보살핌 아래 성장한 윌리엄과 해리 형제는 미래의 영국 왕실을 상징하는 세대로 부각되었으며 왕실에 오만 정이 떨어진 다이애나가 마음을 붙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기에, 자기가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부모의 이혼으로 자식이 불행해지는 것을 막으려고 마음에도 없는 결혼 생활을 15년간이나 지속했다.

한편 그녀의 관심은 왕실 내부가 아닌 바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왕세자빈이라는 지위로 대외활동에 나선 다이애나에 대한 영국 국민의 인기는 매우 높아졌고, 왕실은 찰스를 대신해 인기를 독차지한 다이애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규제했다.

하지만 분노한 다이애나는 더 이상 참고만 있지 않았다.

찰스와 카밀라가 보란 듯이 승마 선생과 맞바람(…)을 피우는가 하면 경호원들과의 염문설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왕실 전기 작가의 손을 빌려 자신의 불행한 결혼 생활과 왕실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모두 폭로하는 책을 출판하게 하고는 1992년 12월 9일 별거에 들어갔다. 결혼 생활 정리와 의전 문제를 마무리짓느라 시간이 흐르는 동안 1994년 BBC와 인터뷰한 다이애나는 왕실과 남편이 체면치레를 위해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다며 대놓고 비난의 칼날을 세웠고 결국 1996년 8월 28일 최종적으로 찰스와 이혼했다.

'전하(Her Royal Highness)'라는 경칭은 사용할 수 없게 되었지만, 왕위 계승 서열 2위와 3위 왕자의 어머니라는 점을 감안해 '왕세자빈(Princess of Wales)'이라는 직함은 유지하고 양육권을 나누어 가졌으며 이전부터 살던 켄싱턴궁에 계속 거처할 권리와 함께 1,700만 파운드 위자료를 받았다.

여나중에 찰스 왕세자와 재혼한 카밀라 파커 보울스는 프린세스 오브 웨일스를 얻지 못하고 콘월 공작 부인(Duchess of Cornwall)으로 불린다. 사실 헌법부에서는 찰스가 즉위한다면 카밀라가 왕비 칭호를 쓸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으나, 하원의 반대와 국민의 여론("완소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자리에 저런 을 앉힐 수는 없음.", "싸우자", "카밀라를 왕비로 인정할 거면 왕실 없애자"라는 말이 나오는 험악한 분위기)에 밀렸다.

3.4. 활발한 봉사활동

테레사 수녀와 다이애나 대인지뢰 제거운동.

자선과 봉사에 열성적이었던 다이애나는 테레사 수녀와도 가까워졌는데, 공교롭게도 1997년 8월 31일 다이애나가 급서한 뒤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같은 해 9월 5일 테레사 수녀도 선종해 언론들은 '세계는 연인과 어머니를 모두 잃었다'며 추모했다.

왕세자빈 시절부터 자선사업과 봉사활동에 적극적이었던 다이애나는 이혼한 뒤 더욱 활발한 행보를 보이며 아프리카 빈민촌 구호와 적십자 활동 등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녀가 관여했던 다양한 봉사활동 가운데서도 특히 애착을 가졌던 사업은 대인지뢰 제거운동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3.5. 죽음

다이애나가 이혼한 뒤 만난 남자들은 하나같이 파파라치의 카메라를 피할 수 없었고, 그중에서도 이집트 출신으로 런던 해로스 백화점과 프리미어 리그풀럼 FC를 운영하는 백만장자 모하메드 알 파예드의 아들인 42세의 도디 알파예드와 연인 관계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최근 집사의 증언에는 그가 아닌 파키스탄 출신의 하스낫 칸이 연인으로 추정된다.)

다이애나는 찰거머리처럼 따라붙는 파파라치를 피하기 위해 변장까지 했지만 완전히 따돌리지는 못했다. 이미 영국왕실과 싸운 적도 있는 다이애나는 참지 않고 런던 시내 한복판에서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서 파파라치 한명을 잡아서 패기도 했고 파파라치의 사진기를 압수하기도 했고 마틴이란 유명한 영국 파파라치를 300미터 안에서 접근 못하도록 접근금지령 소송을 내서 승소했다. 그러자 마틴은 그까짓 사진 좀 찍히는게 무슨 대수라구요! 다이애나보다 내가 더 고통스러운 처지요! 라고 징징거리며 망언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다이애나의 사진은 그야말로 천정부지였고 그가 알 파예드와 요트에서 밀회를 즐기는 사진은 1997년 당시 돈으로 30억원에 팔렸다. 이러니 파파라치들 눈이 안뒤집어질 수가 있나. 아예 사진과 영상을 조작해서 파는 일도 부기지수였다. 다이애나가 애인의 등위에 타고 말처럼 몰고다니는 영상이 유출된 사건이 있었는데 돈을 노린 조작인 걸로 판명되기까지했다. 오토바이, 차, 요트, 헬리콥터까지 총동원된 도촬 작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1997년 8월 31일, 프랑스 파리.

리츠칼튼 호텔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호텔이 제공한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3세대 모델)에 올라탄 다이애나와 도디를 파파라치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쫓아갔다. 그들의 카메라를 피하기 위해 속도를 내던 벤츠는 중심을 잃고 퐁드랄마의 지하도 기둥으로 돌진했다. 운전사와 도디는 즉사했고 다이애나는 중상을 입은 채 아직 숨이 붙어 있었지만 파파라치들은 그녀를 살리려하기는커녕 그 상황에서도 카메라를 들이대며 플래시를 터뜨려댔다. 당연히 이들은 사망 방조로 입건되었고 국제적으로 욕을 처먹었다. 언론들은 파파라치를 하이에나라고 까대고 그런 파파라치에게 사진이나 자료를 군침 흘리며 사던 곳이 어디더라? 당시 파파라치 한 사람은 천안문 사태 당시 기자로서 참여하던 인물이라 더 욕을 처먹었다. 이러니 마라도나가 파파라치에게 실탄을 발사하지. 그리고 정신못차린 잡지사들은 죽어가는 다이애나의 사진을 사겠다고 파파라치들에게 비밀리에 수억원의 돈을 제시했다가 CNN에 의해 폭로되기도 했다.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기레기답이 없다.

다이애나의 생전 별명 중 하나는 'the world's most photographed woman'. 평생을 파파라치의 손아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실제로 그녀의 사진이 표지로 실린 잡지들은 언제나 완판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 어떤 연예인이나 유명인보다도 사진을 많이 찍혔다.

20세에 왕세자빈이 되어 15년간의 불행한 결혼을 끝내고 막 자유로워진 다이애나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36세 71일의 짧은 삶이었다.

아들 도디의 사후 모하메드 알 파예드는 아들과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죽음에 영국 왕실 - 특히 여왕의 남편 필립 공 - 이 배후에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이에 대한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 참고로 알 파예드는 매우 성공적인 사업가지만 영국과 유럽에서의 현지 평판이 원래 매우 나쁜 인물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조폭이 유력한 기업을 소유한 꼴. 그래서 다이애나가 알 파예드의 아들과 연인 의혹이 있다는 것에 더욱 왕실의 분노를 샀다. 또한 두 왕자도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재혼할지도 모른다는 데 대해선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알 파예드는 유명한 바람둥이로 첫 결혼을 8개월 만에 끝낸 것으로 유명했고 이미 모델 출신 약혼녀까지 둔 상태에서 염문을 뿌리고 있었다. 그는 전 세계에 있는 그의 별장들을 순회할 때마다 각 지역의 모델들을 불러서 파티를 즐겼다고 한다.

아직도 다이애나의 죽음에는 많은 의문이 있다. 그중에 하나는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높은 수준의 프랑스의 응급치료가 다이애나에겐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던가... 다른 국가의 급 의료 시스템이 훈련된 구급대원을 사고 현장에 보내 이송 중 환자 상태의 악화 방지 혹은 지연을 목표로 피동적 대응을 한다면 프랑스의 응급의료 시스템인 SAMU는 현장에 구급대원만이 아닌 의사를 동행시켜 악화 방지, 지연만이 아닌 상태 파악, 진단과 그에 따른 조치 등 좀 더 적극적인 대응 시스템을 갖고있다. 이런 프랑스 의료 체계는 마이클 무어가 만든 식코에서도 잘 나온다.

4. 추모의 물결

다이애나의 갑작스런 사고사는 세계인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특히나 그녀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대단했던 영국 국민의 상실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녀의 인생에 대한 재평가가 속속 이루어지는 가운데 다이애나의 죽음을 애도하는 꽃다발이 생전에 거주하던 켄싱턴 궁 앞에 쌓이기 시작했다.

위의 사진에 하얗게 보이는 것들이 전부 다 켄싱턴 궁 정문 앞에 쌓인 다이애나를 추모하는 꽃다발들이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2세가 머물던 버킹엄 궁전 앞에도 다이애나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항의의 표시로 꽃다발이 쌓여갔다. 그렇지만 왕실은 찰스와 이혼해서 왕실을 떠난 다이애나의 죽음에 쌀쌀한 반응을 보였다. 왕실이 다이애나를 파국으로 몰아넣었다는 여론이 비등하면서 영국 국민의 분노는 커져갔고, 당시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가 이례적으로 여왕에게 다이애나의 죽음을 왕실이 추모할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자 결국 왕실은 기존의 입장을 번복해 다이애나의 장례를 왕실장으로 치르고 전세계에 텔레비전으로 방영했다. (이 사연을 엘리자베스 2세의 시각을 중심으로 다룬 영화가 2007년 개봉한 더 퀸이다.) 당시 왕실에 대한 영국 국민들의 여론은 최악이라서 왕정 폐지의 지지율이 사상 처음으로 50%에 육박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지금은 다시 10% 안팎으로 폭락했다.

(왼쪽 사진) 필립 마운트배튼, 윌리엄 왕세손, 다이애나의 남동생인 스펜서 백작, 해리 왕자, 찰스 왕세자.

다이애나의 왕실장 영상. 노래는 엘튼 존이 개사해 부른 추모곡 '바람 속의 촛불(Candle in the Wind)'. 엘튼 존은 다이애나 생전에 매우 절친했기에 그가 커밍아웃하지 않았더라면 영국 타블로이드 언론들이 보나마나 다이애나와 사귄다고 난리법석을 떨었을 것이라는 소리가 많았다. 당시 추모방송에서 그는 이 노래를 피아노를 연주하며 부르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다이애나의 무덤 퐁드랄마 지하도 위에 있는 추모 조형물
(왼쪽)다이애나 & 찰스 왕세자 / (오른쪽)캐서린 & 윌리엄 왕세손
다이애나의 장례식은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1997년 9월 6일 거행되었으며 유해는 그녀의 친정이 있는 올소프에 안장되었다. 그로부터 14년이 흐른 2011년 4월 29일, 다이애나의 큰아들인 윌리엄 왕세손은 어머니를 떠나보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약혼녀 캐서린 엘리자베스 미들턴과 결혼식을 올렸다. 세간의 해석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인생에서 가장 경사스러운 의식을 통해 극복하려고 한다"는 것이 지배적.

우선 윌리엄이 언론에 결혼을 발표하면서 예비신부인 캐서린의 손가락에 끼워준 사파이어 반지부터가 찰스가 다이애나에게 청혼하면서 주었던 약혼반지였다. 그리고 결혼식이 있기에 앞서 윌리엄은 올소프에 있는 어머니의 묘소에 캐서린과 함께 참배했다. 윌리엄과 캐서린의 결혼식날 강론한 리처드 샤트레스 주교는 다이애나의 10주기 추도식에서도 강론했으며, 다이애나의 장례식 때 추모곡을 열창한 가수 엘튼 존이 결혼식 하객으로 초청받았다. 또한 예식 때 부른 찬송가 '오 위대한 주여, 나를 인도하소서'는 다이애나의 장례식 때 불렸던 곡이기도 하다.

사고현장이었던 퐁드랄마 지하도 위에는 다이애나를 추모하는 금빛 불꽃 모양의 조형물이 1999년에 세워졌다. 사람들은 윌리엄의 결혼식 날 여기에 꽃다발을 헌화하며 다이애나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5.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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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왕실은 이 사람을 끔찍히도 싫어해서 우표조차 만들지 못했지만... 북한에서 기념우표를 만들었다. 흠좀무 북한이 외화를 벌기 위해 기념우표를 남발하여 수출하는 케이스 중 하나로 보면 된다. 실제로 이 우표들은 북한으로 역수입되어 유통되지 못하게 소인이 찍혀 있다.

이 사실이 참 웃긴 게, 북한영국2000년에 와서야 수교를 했다. 다이애나 스펜서가 결혼을 했을 때까지만 해도 영국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북한이 영국 기념우표를 찍은 것(…).


2011년 7월 1일, 살아 있었다면 50세가 되었을 다이애나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뉴스위크지가 그녀의 50세 모습을 CG로 합성해 고인드립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저 표지가 실린 뉴스위크지에는 다이애나가 죽지 않고 지금까지 생존했다면 어땠을까를 다룬 가상 기사가 게재되었는데, 그 내용은 '연적 카밀라 파커 보울스를 비롯한 여러 유명인사와 페이스북 친구가 되고 트위터 팔로워를 1천만명 이상 거느리며, 며느리 캐서린 미들턴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만 젊은 며느리의 등장으로 다이애나의 위치가 예전 같지는 않을 것이고, 도디 알파예드와 이혼한 뒤에는 어째 이혼한다고 못이 박혔다? 뉴욕에서 거주하며 각종 자선사업의 후원자로서 열성적으로 활동할 것' 등이었다.

여자로서는 키가 상당히 크다. 178cm. 상술되어 있는 테레사 수녀와 같이 찍은 사진만 봐도 다이애나 스펜서가 얼마나 키가 큰지 알 수 있다.본격 걸리버 여행기의 위엄. 찰스 왕세자는 결혼 기간 내내 다이애나가 자신보다 키가 커 보일까 봐 하이힐을 신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고도 한다.

첨언하자면 '왕세자빈'이 맞다. 비(妃)는 왕(제후)과 황태자의 아내를 말하고 빈(嬪)은 왕세자의 아내를 말한다. 다이애나 생존 당시 찰스 또한 왕이 아니라 왕세자 신분이었으므로 우리네식으로 '왕세자비'라 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왕세자비(X) 황태자비(0)라면 차라리 몰라도... 많이 오류를 범하는 부분. 만약 왕세자비라 하면 왕비랑 동급인데 과연 Princess랑 Queen으로 단어가 아예 다른데 그걸 왕세자비로 오역해서 부르는건 잘못된 것이라 하겠다.

영국의 락 밴드 오아시스의 곡 Falling Down의 뮤직비디오는 다이애나의 비극적인 삶을 그리고 있다.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부분은 하나도 없으나, 영국 왕실에서 결혼으로 맺어진 왕가의 일원, 불륜, 그리고 결정타로 뮤직비디오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찰스 왕세자까지 어떻게 봐도 다이애나 이야기.

영국의 여배우 나오미 왓츠가 주연을 맡고 몰락으로 유명한 독일의 히르슈비켈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다이애나'가 2013년 9월에 영국에서 개봉했다. 예고편 그리고 평이 아주 참혹하다. 나오미 왓츠는 정말 안 어울린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첫 주 흥행은 겨우 62만 파운드에 그쳤다. 참고로 엘리자베스 2세를 다룬 영화 더 퀸은 개봉 첫 주에 250만 파운드를 넘게 벌었다. 한국에서는 2014년 3월 6일 개봉했다. 제목만 보고 가면 다이애나의 일생을 다룬 전기영화로 오해하기 쉬우나 다이애나와 파키스탄 외과의의 연애를 다룬 영화라서 아무것도 모르고 보면 충격을 받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어디에 중점을 맞춰야 할지 갈팡질팡하다 끝나는 경향을 보인다. 이름도 유명한 파예드는 영화 막판에 오분 정도밖에 안 나오며 찰스 왕세자나 왕실의 주요 일원들은 등장도 하지 않는다.(...) 그나마 윌리엄과 해리 왕자는 딱 한컷 얼굴은 보인다.

영드스푹스시즌4에서 다이애나의 죽음이 계휙되었다는 설정의 에피소드가 있었다. 물론 당연히 사실이 아니었고, 사고 자체는 그냥 사고가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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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위의 개인 문장에서 조개 3개가 있는 것이 가문 문장이다.
  • [2] 물론 세월이 지나면서 재산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다이애나의 남동생인 현 스펜서 백작 찰스, 그리고 다이애나의 아들들인 윌리엄과 해리가 물려받을 스펜서 백작 가문의 재산도 상당하다고 한다.
  • [3] 한국 언론과 인터넷 등에서는 이것이 와전되어서 평범한 유치원 교사를 한 것처럼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