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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상륙작전

last modified: 2018-03-06 03:23:45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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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개요
2. 1944년 유럽전선
3. 과정
3.1. 양측의 병력 구성 및 배치
3.1.1. 연합군
3.1.2. 독일군
3.2. D데이
3.2.1. 피의 오마하 해변
3.2.2. 푸앵트뒤오크(Pointe du Hoc)의 전투
3.2.3. 골드 해변의 영국군
3.3. D데이 이후
3.3.1. 독일군의 반격
3.3.2. 연합군의 진격
3.3.3. 굿우드 작전
3.3.4. 독일군의 퇴각
4. 결과
5. 기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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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1944년 6월 연합군프랑스의 노르망디에서 실시한 인류 역사상 최대규모의 상륙작전. 작전명은 오버로드(Overlord).

엄밀히 말하자면 시칠리아 상륙작전인 허스키 작전에 동원된 사단이 2개 더 많다. 그러나 동원된 해군력을 생각하면... 연합군의 해군 및 공군의 상당수가 이 작전에 참가했다.

2. 1944년 유럽전선

이오시프 스탈린독소전쟁에서 독일군의 압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제2전선을 연합군에게 계속해서 요구하고 있었다.

1942년, 이러한 요구로 인해 결국 정치적인 입장과 국민의 사기 진작, 그리고 독일군의 해안 방어 능력을 시험해 볼 겸 윈스턴 처칠 경이 야심차게 준비한 디에프 상륙작전망했어요로 끝났다. 물론 이 작전으로 인해 상륙작전의 기본이 뭔지를 깨닫는 성과도 있었지만, 준비가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상륙하면 망하므로 연합군의 제2전선 형성은 계속 연기된다.

1943년 7월, 동부전선의 쿠르스크 전투에서는 소련군이 독일군의 공세를 저지해내고 성공적인 반격을 전개해 키예프를 탈환했고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는 영국 제8군이 롬멜 원수의 아프리카 군단을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격파해냈다. 그리고 11월, 테헤란 회담에서 소련의 요구도 있다고 하여 각국의 정상들은 프랑스 혹은 북프랑스 지역에 상륙하기로 결정하였다.

처음에 연합군은 영국의 전략적 이점을 고려, 처칠 경이 아돌프 히틀러의 '부드러운 아랫배'라고 주장한 이탈리아와 남부 유럽에 상륙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943년, 연합군은 시칠리아 상륙작전(스키 작전)을 실행에 옮긴다. 연합군이 시칠리아, 그리고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하자 이탈리아 정부는 겉으로는 히틀러의 편에서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선언을 했지만, 동시에 몰래 연합군과 교섭하고 있었다. 결국 이탈리아는 연합군에 항복했고, 이탈리아 주둔 독일군(케셀링의 G집단군)과 연합군이 이탈리아에서 전투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독일군은 이탈리아의 험한 지형을 이용해 저항에 들어갔고, 연합군은 독일군의 강한 저항에 휘말려 거의 진격하지 못하게 된다.

이에 연합군은 유럽 북부, 즉 프랑스 쪽으로 상륙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독일군은 연합군의 상륙 지점을 파 드 칼레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연합군의 기만 계획(포티튜드 작전)도 한 몫 하여 노르망디 주변에 별 신경을 쓰지 않게 된다. D데이(D-day)로 처음 계획된 6월 4일은 파도가 심해 상륙할 수 없었고, 6월 6일 날씨가 잠깐 갠다존나좋군?는 소식을 들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상륙일을 6월 6일로 미룬다.

3. 과정

3.1. 양측의 병력 구성 및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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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연합군

연합군은 미군, 캐나다군, 영국군, 자유프랑스군, 폴란드군, 기타 영연방 소속 연합군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D-Day 하루 동안에 병력 8만 7천여 명이 상륙하여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이후 3주 동안 노르망디를 통하여 연합군 병력 156만 명과 차량 33만 3천 대가 프랑스로 쏟아져 들어 왔으며, 프랑스를 해방시키고 독일의 숨통을 죄기 시작하였다. 당시 상륙부대의 자세한 배치는 아래와 같다.

영국군
제2 군[1]
소드 해변 배후 : 제6 공수사단
소드 해변 : 제1 코만도 여단[2], 제41 코만도 대대, 제3 보병사단, 제27 기갑여단
주노 해변 : 제46 코만도 대대, 제48 코만도 대대, 캐나다 제3 보병사단, 캐나다 제2 기갑여단
골드 해변 : 제47 코만도 대대, 제50 노섬브리안 보병 사단, 제8 기갑 여단, 제79 기갑사단[3]

미군
제1 군[4]
유타 해변 배후 : 제82 공수사단, 제101 공수사단
오마하 해변 : 제2 레인저 대대, 제5 레인저 대대[5], 제1 보병사단, 제29 보병사단
유타 해변 : 제4 보병사단, 제90 보병사단 휘하 제259 연대전투단

3.1.2. 독일군

B집단군의 사령관 겸 대서양 방벽의 책임자를 맡고 있었던 에르빈 롬멜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의 경험을 살려, 1943년 말 서부전선에 부임하면서부터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연합군 상륙부대를 저지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 결과 대규모의 지뢰지대와 해안 장애물, 벙커, 포진지 및 공수부대의 강하와 공수를 방해하는 장비들을 설치했다. 롬멜의 방침에 따라 프랑스 해안 등지에 설치하게 될 지뢰는 약 2천만 개 정도가 될 것이며, 프랑스 내 여러 방어선을 구축하며서 매설할 양은 계획상 총 2억 개에 달하였다(독일군 B집단군 공병사령관 마이제 장군의 1944년 3월 17일자 편지에서 발췌). 실제로 1944년 5월 20일까지 해안에 설치한 지뢰의 수는 4,193,167개에 달하였으며, 이중 2,672,000개가 로멜의 지휘하에 매설되었다. 이외에도 일부 지뢰는 공수부대를 우려해 후방에 매설했다. 또한 5월 13일까지 총 517,000개의 수중 장애물이 프랑스 해안에 설치되었으며, 그 중 31,000개는 기뢰였다(독일군 B집단군 전사일지에 기록된 지뢰 매설 현황에서 발췌).

이외에도 로멜은 수도 없이 많은 장애물을 해안에 깔아 두었는데, 해안 장애물의 목적은 연합군의 상륙주정들을 파괴시키는 목적이며, 썰물시에는 상륙하는 적의 전차를 저지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 방해물들 중에는 기뢰나 폭탄이 장착되어 강한 충격을 받으면 폭발하도록 설치된 장애물도 있었으며 이들은 상륙 작전 당시 톡톡히 제 몫을 다했다.

그러나 실제로 장애물을 설치하기로 한 해변의 4개 구역 중 2개 구역만 상륙개시일까지 완료되었고, 나머지 공사중이던 구간도 상륙 당일날 상륙부대보다 앞서 출발한 영국군 코만도들에 의해 폭파되었다. 이외에도 공수부대를 막을 목적으로 로멜은 공수부대의 글라이더가 착지할 만한 지점에 30m간격으로 높이 3m의 말뚝을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만으로 글러이더에 타격을 줄 수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말뚝과 말뚝에 전기가 통하는 선을 설치해 글라이더에 큰 타격을 줄 수 있게 했다. 또한 말뚝 위에 달아놓아 글라이더를 폭파시킬 폭탄 100만 개를 준비했지만, 정작 상륙 당일까지 말뚝 설치가 완료된 곳은 거의 드물었다. 당시 독일군 방어부대의 배치는 아래와 같다.

유타 해변 - 709 보병사단
오마하 해변 - 352 보병사단, 726 척탄병 연대의 일부
골드 해변 - 716 보병사단, 352 보병사단
주노 해변 - 716 보병사단
소드 해변 - 716 보병사단, 711 보병사단

3.2. D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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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6일 새벽, 미군 제82공수사단과 101공수사단, 영국군 제6공수사단이 먼저 강하하고, 아침 6시~7시 30분 사이에 연합군 본대가 상륙한다. 애초부터 가짜 병사로 위장된 폭발물 낙하산으로 독일군의 주의를 다른곳으로 돌렸고, 대부분의 해안을 지키던 독일군 사단은 약체화된 2선급 부대들로, 연합군은 별 다른 피해없이 상륙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들이 오기 전에 롬멜 장군이 일부 지역을 강을 이용해 이나 호수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꽤 많은 수의 인원이 강하 후 낙하 장비를 풀다가 익사했다. 이 때 영국군은 장비가 버튼 하나로 한번에 해체가 가능했지만 미군은 벨트를 3개나 풀어야했다.

3.2.1. 피의 오마하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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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이미 죽은 자와 곧 죽을 자이다."
- 미군 제1 보병사단 16연대장, 조지 테일러.

youtube(uFMSw_IvmX4)
독일군: welcome to Europe아하이고 맙소사

오마하를 지키던 독일군 352사단은 원래 태생이 동부전선에 땜빵 투입될 보병사단으로 창설되었다가 임시로 방어임무를 맡은 것이었으니 만큼 절대 정예라고 할 수 없었지만, 이탈리아에서 연합군이 상륙한 지형과 노르망디의 지형이 비슷한 것을 알아본 롬멜의 혜안으로 인해 해안 방벽이 그나마 제대로 설치된 곳에서 방어를 하고 있었다. 상륙 당시 미군 병사들이 처한 상황을 묘사하자면, 몇 백 미터를 넘는 거리에 각종 장애물과 철망에 1700개의 대인지뢰까지 설치된 해안을 수천의 병력이 복닥거리면서 MG42와 105mm 포 사격 등 무차별적인 사격을 뒤집어쓰고 지나가야 했던, 그야말로 헬게이트였던 것이다. 게다가 미군 지휘부의 무능과 실수가 겹쳤다. 당장 태평양 전쟁에서 이미 많은 상륙작전 경험을 가지고 있던 해병대의 충고를 거의 무시하여 사전 지원포격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상륙부대가 돌파할 거리를 크게 늘리는 썰물 상륙을 강행하는 대뻘짓을 저질러서 상륙부대가 큰 피해를 입었다. 당장 바로 옆의 골드 해변에 상륙한 영국군만 봐도 한 시간 늦게 상륙했음에도 불구하고 밀물 때 상륙한 덕에 오마하 해변의 1/10도 안 되는 피해로 상륙에 성공할 수 있었다.

미군 지휘부는 오마하 해변을 서쪽부터 동쪽으로 에이블, 베이커, 찰리, 도그 그린, 도그 화이트, 도그 레드, 이지 그린, 이지 레드, 폭스 그린, 폭스 레드로 구성된 총 10개 구역으로 구분하여 병력을 상륙시켰는데, 이 중 폭스 그린과 이지 레드 구역에 상륙했던 부대가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일단 상륙 전에 아침식사로 각종 고기, 소시지, 계란 등 사기를 높이려고 제공한 아침식사가 병사들에게 파도가 심한 바다에서 당연히 심각한 멀미를 유도했고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상륙 직전 장면에서 몇몇 병사들이 토하는 장면의 원인이다. 상륙주정의 문이 열리자마자 엄청난 기관총 세례를 버티지 못하고 옆의 바다로 뛰어내린 병사들은 멀미에 체력이 바닥이 나는데 무거운 군장을 풀어야 다시 떠오를 수 있었으므로 익사한 사례가 많았다. 우라돌격으로 그냥 뚫을 수 있을 것 같지만 MG42의 연사력을 참고한다면 그야 말로 비명지르기도 전에 벌집이 되는 거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독일군 토치카 정면에 상륙하는 불운을 떠안았던 미 29보병사단 16연대는 상륙주정의 문이 열리자마자 기관총 세례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6] 어떤 중대는 중대원 198명 중 상륙 개시 5분 뒤 단 2명만 살아남았다고 하니... 흠좀무 이 날 미군은 오마하 해변에서만 약 3,000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말았다. 엄청난 전사자를 낸 미군은 정말로 어찌어찌하여 도달한 독일군 벙커앞에서 포기 직전까지 몰리고 있었으나 막판에 George A. Taylor 대령이 선두로 돌격을 감행하면서 방어선 돌파에 성공했다. 이곳이 땜빵이 아닌 방어만을 위한 부대가 지키던 곳이였으면 어쩌면 미군은 오마하 해변 자체를 포기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상륙작전의 지휘를 맡은 오마 브래들리는, 오마하 해변에서의 엄청난 피해로 인해 이 곳을 포기하고 유타 해변 등에 상륙을 집중시키는 것을 검토하기도 했다.

아무튼 주노, 유타, 소드 등 다른 해변에서는 먼저 투입 된 공수부대가 독일군의 포진지를 잘 차단하였고 별다른 저항도 없어서 대부분이 큰 피해 없이 상륙할 수 있었다. 심지어 주노 해변에서는 캐나다군이 독일군의 저항을 무려 15분(…) 만에 분쇄한 뒤 다른 해변의 독일군을 우회하여 공격하기까지 하였다.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는 유타 해변의 후방에 강하한 101 공수사단 이지 중대가 본대의 원활한 상륙을 위해 독일군의 포 진지를 공격하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3.2.2. 푸앵트뒤오크(Pointe du Hoc)의 전투

한편 수만의 병력이 물밀듯이 상륙하는 동안 오마하 해변의 도그 그린에서는 225명의 미군 2 레인저 대대 소속 병사들이 절벽 위로 특수한 박격포를 쏘아 로프를 걸친 뒤 상륙정에 큰 위협이 되는 각종 직/곡사포 들을 제거하기 위해 상륙했다. 그러나 바닷물에 젖은 로프 상당수가 절벽위에 걸치지를 못했고, 29개의 로프를 겨우 연결하고 20명 남짓되는 사상자를 내면서 절벽위로 올라간 그들은 독일군이 이미 진짜 포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가짜 포를 설치한 것을 발견했다(...) 망했어요 지휘관 개갞기들아!!! 그 와중에도 해변의 미군은 포격에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있었다.

사실 이건 지휘관 개객기라고 할 만한 건 아닌 게, 지휘부 입장에서는 투입이 최선의 선택이였다. 그도 그럴것이 상륙작전 직전에 기상이 안 좋아지는 바람에 추가정찰을 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마지막에 가진 정보를 기반으로 작전을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그 시점에 가진 정보들 상으로는 작전을 속행할 수밖에 없던 면이 있다.

어쨋든 다행이 정확히 이곳 지역에 있어야 했던 포들은 저어어 후방에 떨어진 공수부대가 발견하여 포신에 폭탄ㅆㅂ 작은 포에게 폭탄 한 발을 놔줬답니다을 주입하여 모조리 무용지물로 만들어 줬다.

푸앵트 뒤 오크에는 독일군 사령부 건물 등이 있었던지라 연합군 입장에서는 이들의 공격이 그리 큰 헛수고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상륙작전이 급했던 연합군은 반격한 독일군에게 포위된 이들을 제때 구원해 주지 못했고, 결국 이들은 81명의 전사자의 55명의 부상자 등 부대원의 절반 가까이를 잃고 나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 전투는 콜 오브 듀티 2의 미군 첫 번째 미션으로 실감나게 체험해 볼 수 있다.

해당 지역은 현재 관광지로 사용되고 있는데, 엄청난 수의 포탄 구멍과 그 사이사이의 콘크리트 벙커가 있는 풍경이 밀덕이라면 충분히 즐거울...지도?

3.2.3. 골드 해변의 영국군

오마하 해변에서의 참혹한 전투에 가려 별달리 주목받지는 못하였지만, 골드 해변에 상륙한 영국군 역시 꽤나 거센 독일군의 저항에 직면하였다. 영국군은 골드 해변을 킹, 지그, 아이템으로 구성된 세 개의 섹터로 구분하여 병력을 상륙시켰는데, 기상 때문에 전차를 바로 상륙시키지 못하여 초반에는 독일군의 반격에 꽤나 고전하였다. 그러나 코만도 부대의 활약 및 전차들의 상륙에 힘입어 독일군의 저항을 깨고 교두보를 확보하였으며, 15분 만에 주노 해변을 확보한 캐나다군이 곧장 우회하여 달려와 독일군을 소탕해 준 덕분에 오히려 한 시간 일찍 상륙한 옆 해변의 미군보다 더 빨리 주변을 장악할 수 있었다. 골드 해변에서의 영국군은 약 400여 명의 사상자를 냈고, 주노 해변의 캐나다군은 359명의 전사자와 574명의 부상자를 기록하였다. 소드 해변의 영국군 및 자유 프랑스군은 683명의 사상자를 기록하였으며, 유타 해변에서는 고작 200여 명의 사상자만이 나온 것을 보면 오마하 해변의 참혹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미 1군이 오마하 해변에서만 기록한 사상자 수가 4천 여명이고, 다른 해변의 사상자 수를 모두 합해 보았자 2천 명이 조금 넘을 정도이다.

3.3. D데이 이후

3.3.1. 독일군의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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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랑탕에서 연합군의 M7 프리스트 자주포.

일단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은 상륙작전의 초기목표인 르부르 항구로 미군이, 영국군은 노르망디의 중심도시인 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일군의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서부전선 독일군의 지휘를 B집단군 사령관 에르빈 롬멜과 서부방면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두사람이 함께 하고 있었고, 이 두 사람의 지휘권까지 동급이었기 때문에 양측의 논쟁으로 기갑부대의 즉각적인 투입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또한 연합군 공군의 폭격으로 대부분의 도로가 파괴되어 독일군의 이동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D데이 오후까지도 OKW 사령부에서는 상륙지점을 놓고 설왕설래가 오가고 있었다. 게다가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얼마 전에 각종 통신 장비와 철로를 파괴하기도 했는데 물론 이들은 가차없이 처형당했다. 결국 독일군이 첫 반격에 나선 것은 12시간이나 지난 뒤였다.

세밀하게 계획되지 않은 명령, 실타래처럼 엉킨 지휘권으로 인해 휘하사단들은 자기가 B집단군인지, 서부방면군인지 소속도 제대로 확인하기 힘들었고, 당연히 명령권자가 없으니 사단들은 그 자리에 발이 묶여 있었다. 결국 D데이 첫날 반격에 나선 부대는 캉으로 출동한 제21기갑사단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반격도 단 하루만에 보유전차 146대가 76대로 줄어드는 막심한 피해를 보곤 캉에 틀어박혀야 했다.

D+1일 서부전선의 최정예 병력 중 하나인 무장 SS 제12기갑사단 '히틀러 유겐트'가 캉으로 증원되었다. 그리고 D+2일 캉 주변지인 바이외가 영국군에 함락되면서 캉을 중심으로 한 공방전이 벌어진다. 한편, D데이 당일 서부전선 최강의 부대였던 전차 교도사단이 노르망디를 향해 출발했다. 하지만 무려 160Km 밖에 주둔하고 있던 전차 교도사단은 연합군 공군의 폭격에 벌벌 떨면서 야밤에 전차가 자력주행으로 노르망디까지 이동해야 했다. 결국 이들이 노르망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독일군 병력은 내륙에 밀려나 지연전을 벌이고 있었고, 전차 교도사단도 그쪽에 합류해야 했다.

하지만 독일군의 분전도 있었다. 6월 13일, 캉으로 가는 시골마을 빌레르보카쥬를 통과하던 영국군 제7기갑사단이 미하엘 비트만이 이끄는 101전차대대 소속의 전차 9대에게 기습을 받아 28대의 전차를 잃어버렸다. 덕분에 연합군의 캉 진격은 또다시 늦춰지게 되었다('빌레르보카쥬 전투').

3.3.2. 연합군의 진격

그리고 상륙작전시에는 고려하지 못한 노르망디 특유의 지형이 연합군의 발목을 단단히 잡았다. 당장 연합군은 시가지도 아닌 곳에서 시가전을 벌여야 했다. 보카주라고 불리는 1m에서 4m 정도의 키작은 과일나무가 밀집한 벽으로 가득한 노르망디의 지형으로 인해 독일군이 이곳저곳에 저격수대전차포를 매복시켜 뒀다가 한두발 쏘고 튀는 짓을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합군에게는 비장의 공군!!이 있었기 때문에 공군의 화력을 앞세워 독일군의 출혈을 강요했다.

6월 22일 미군 선발대가 셰르부르에 도착했고, 25일에는 치열한 시가전 끝에 셰르부르 수비대 사령부가 함락되면서 30일 완전히 셰르부르가 연합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다만 항복전에 셰르부르 수비대가 항구를 개박살내놓아서 항구 복구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6월 25일부터는 캉을 노리는 영국군의 공세가 개시되었다. 중간에 독일군이 히틀러의 재촉에 못이겨 반격에 나서기도 했지만 영국 육군 대신 해군의 함포사격과 공군의 폭격을 신나게 쳐맞고 데꿀멍해야 했다. 덤으로 방어태세로 전환할 것을 요청하러 베를린으로 날아간 로멜과 룬트슈테트는 히틀러의 헛소리만 듣고 왔고, 룬트슈테트는 서부방면군 사령관에서 짤렸다(…).

7월 11일, 히틀러 유겐트 사단을 중심으로 완강하게 버티던 독일군에 대해 영국군은 500여대의 폭격기를 동원해 아예 캉을 들어엎는 대폭격을 감행해 아예 캉을 먼지구덩이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캉에는 70년 넘는 건물이 거의 없을 정도로 폭격의 피해가 심했으며, 결국 폭격을 참지 못하고 히틀러 유겐트 사단은 캉을 버리고 튀었고, 캉은 영국군의 손에 들어왔다.

한편, 셰르부르를 점령한 미군은 셰르부르 남부의 를 점령하기 위해 또다시 악전고투를 벌여야 했고, 7월 18일 결국 생로를 점령해 노르망디 지역을 빠져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 시점까지 연합군이 낸 사상자는 무려 12만 2,000명에 달했다. 사실상 상륙시 별로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을 그 동안의 전투에서 날려먹은 셈으로, 연합군의 주요 수뇌부를 긴장타게 만들었다.

3.3.3. 굿우드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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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점에서 연합군은 심하면 몇 미터를 전진하기 위해 엄청난 피를 쏟아내는 상황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독일군도 계속 증원돼서 노르망디 교두보를 완전포위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연합군은 슬슬 조급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입안된 것이 '굿우드 작전'이었다. 영국군이 캉 인근의 독일군 부대를 물고 늘어지는 사이에 미군이 생로 남쪽으로 진격해 돌파구를 마련한다는 것이 계획의 일환이었다. 동원된 병력도 무려 3개 완편 기갑사단에 첫날 4,500대의 항공기가 8천톤에 달하는 폭탄을 쏟아부을 예정이었다.

7월 18일 영국군이 굿우드 작전에 나섰다. 그러나 영국군의 조급증이 병크를 불러왔다. 딱 3Km짜리 진격로에 3개 사단이나 병력을 밀어넣은 탓에 교통정체가 발생해 진격로가 꽉 막혀버렸고, 폭격에서 살아남은 독일군이 대전차포의 파도로 정면의 영국군을 물고 늘어지자 진격이 완전히 막혀버렸다. 이런 상황은 20일까지 전혀 개선되지 않았고, 결국 20일 폭우가 쏟아져 진격로가 진창이 되면서 딱 3일만에 작전이 취소되고 말았다. 그동안 영국군은 500대 이상의 전차와 4,000여명의 병력을 잃는 참상을 맛봐야 했다.

그나마 굿우드 작전으로 독일군이 상대적으로 영국군에게 병력을 집중했기 때문에 미군이 최소한 2대 1의 우세를 브라 작전에서 누릴 수 있었다.

3.3.4. 독일군의 퇴각

7월 24일, 굿우드 작전 다음에 개시될 예정이었던 미군의 브라 작전이 개시되었다. 그런데 하필 작전 개시일에 짙은 구름이 껴 오폭의 위험이 있다고 여긴 리 말로리 대장이 공군의 폭격을 중지시켰다. 그러나 이 명령을 전달받지 못한 일부 폭격기가 그대로 폭격을 가해서 레슬리 맥네어같은 일부 오폭사상자가 나왔다. 육군 쪽에서도 폭격이 이루어진 것을 보고 작전이 예정대로 진행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나와서 소규모의 혼란스러운 공격을 하다가 소득 없이 물러나기도 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오히려 독일군 쪽에서 발생했다. 당시까지 부대건제를 유지하고 있던 전차 교도사단은 이 실수가 작전개시 신호인 줄 착각했고, 폭격에도 불구하고 부대의 피해가 경미한데다가 이어진 육군의 공격 역시 대단치 않은 수준이었기 때문에 자신감을 갖고 반격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전차들이 기어나와 공격개시선에 늘어선 7월 25일, 진짜 폭격이 개시되면서 전차 교도사단은 90%나 되는 병력이 싸그리 녹아내렸다…는 것이 통설이었으나, 90년대 이후 당시 문서를 검토한 결과 8월 1일 기갑교도사단에는 수리중인 것을 포함해 67대의 전차와, 적어도 10대의 돌격포가 있었다. 기동가능한 전차 수량도 7월 23일 31대에서 8월 1일에는 27대로 단 4대 줄었을 뿐이다. 어쨌든 미군은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교두보 돌파에 성공한다.

결국 패잔병들만 남은 독일군은 이 날을 기점으로 노르망디 지역에서 후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몰린다. 하지만 히틀러는 현지 사수 및 오히려 반격을 통해 돌파한 미군을 차단하고 다시 연합군을 노르망디 교두보에 묶으라는 현실성 없는 명령을 내려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다.

4. 결과

연합군은 노르망디 지역에서 무려 두 달을 묶여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 두달간의 혈전 끝에 서부전선 독일군의 정예병력이 녹아버렸고, 히틀러의 사수명령으로 인해 현지에 묶인 서부전선의 잔존전력을 팔레즈에 몰아넣어 섬멸하였다. 이를 레즈 포켓이라고 부른다. 이후 프랑스 해방까지 독일군은 제대로 된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패주를 거듭하게 되었다.

5. 기타

  • D-DAY라는 말의 어원. 앞의 D가 무슨 단어를 요약한 것인지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고 Date의 약자다, DAY의 약자다, Decimal의 약자다,[7] Doom의 약자다 등등의 학설들만 난무할 뿐이다.

  • 1962년작 영화 《상 최대의 작전》은 180분의 상영시간에 D-DAY 당일의 상황을 전체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는 고전적 걸작이다.

  •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유일하게 격전이 벌어졌던 오마하 해변의 상황을 처절할 정도로 실감나게 연출해놨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대히트를 친 이후로 배틀필드 1942, 메달 오브 아너,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등 2차 대전을 다룬 게임에서는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 밴드 오브 브라더스》 2화에도 이지 중대의 첫 전투로 등장한다. 이쪽은 공수부대를 초점으로 맞추고 있기 때문에 강하작전을 묘사하고 있다.

  •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의 미군 캠페인 <노르망디 침공>은 미군의 노르망디 상륙부터 레즈 포켓까지의 시점을 다룬다.

  • 노르망디에서 미군에 포로로 잡힌 한국인의 사진인 노르망디의 한국인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기도 했다.

  • 상륙작전을 실시하기 직전인 1944년 5월에 발생한 에피소드. 영국 신문인 데일리 텔레그래프 지에 십자말풀이 문제가 올라왔는데 여기에는 '유타', '마하', '오버로드' 등의 용어가 등장했다. 이는 상륙작전 및 주요 상륙지 등의 암호명이었다. 연합군 사령부는 발칵 뒤집혔고 문제의 출제자인 학교 교사 레너드 다우와 신문 편집담당자를 영국 정보기관에서 연행해 강도 높은 코렁탕 대접 아니지 코로 영국 요리... 조사를 벌였지만, 결과는 무혐의였다. 기밀 유출과는 무관한 우연의 일치였던 것.

  • 2007년 3명만으로 오마하 비치를 재현한 용자들이 화제가 되었다. CG의 힘은 위대했다. 정확히는 BBC 역사 다큐멘터리 시리즈인 《타임워치》(Timewatch) 시리즈 제작진의 용자짓. 노르망디 상륙작전 특집편 〈피의 오마하〉 촬영 때의 일이다. 이 때 해설자는 탑기어 호스트인 리처드 해먼드.

  • 히틀러는 연합군의 상륙 작전이 계획되기 전에는 노르망디가 연합군의 상륙 지점이 될 것이란 걸 예측했다고 한다(!). 물론 옛날에도 노르망디는 영국군의 주요 상륙지였다 노르망디가 칼레보다 전략적으로 떨어지는 위치였던 데다 히틀러는 전략 전술과 관련된 군 관련 지식은 전무했기 때문에(...) 독일군 수뇌부는 그럴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고 생각했고 나중에는 히틀러 자신도 노르망디에 연합군이 상륙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 2011년 11월 29일 이란 시위대가 영국 대사관을 습격했을 때 영국대사관은 빅토리아 여왕에드워드 8세의 유화 초상화 같은 역사적 유물이 파손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노르망디 상륙작전문서가 도난당했다. 테헤란 회담의 결과로 실행된 작전이니 거기에 보관한건가 이 문서의 도난에 대해 영국 외교관들은 "혁명수비대의 번역사들이 충분히 오랜시간을 들여 이것이 70년전 프랑스에서 있었던 침공작전임을 깨닫기를 바란다"고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혔고 다른 이들은 혁명수비대 순전히 이문서들과 다른 문서들로 인해 혼란을 겪길 원한다고 대꾸했다(……). 역시 영국! 대인배기행신사 숙녀들의 나라!

    출처:서방의 대규모 침략계획, 유출되다

  • 20세기 최고의 사진 작가로 유명한 로버트 카파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상륙정에 직접 타서 다른 현역 병사들과 함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오마하 해변의 지옥도를 생생히 촬영했다. 하지만 운이 없게도 촬영 이후 필름을 현상, 인화하는 과정에서 기술자가 실수로 온도를 너무 높게 맞추는 바람에 대부분의 필름이 녹아 버렸고, 남아 있는 사진은 10장에 불과하다. 하지만 카파의 이 사진들은 오마하 해변의 참상을 생생하게 기록해 주었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다.

  • 이상하게 한국의 교과서 등에선 독일에 막타를 날린 게 노르망디 상륙이라고 쓰는 게 대부분이다. 물론 노르망디 상륙이 제2전선의 형성과 함께 독일을 굴복시키는 데 일조하긴 했지만, 독일에 결정타를 날린 쪽은 소련이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 바그라티온 작전, 베를린 전투까지 조금만 조사해봐도 명백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냉전 시절 한국에서는 마음놓고 소련 찬양을 할 수가 없었지

  • 네이트는 2014년 6월 6일, D-DAY와 노르망디 전투 70주년 기념하며 전투에서 희생된 나치 독일의 장병들을 추모하는 배너를 올렸다.*현충일 기념 배너에 국군 철모 대신 독일군 철모를 그려넣은 것이 논란이 된 것이다.

  • 노르망디 상륙작전 66주년 기념 다큐멘터리에서 당시 오마하에 상륙한 보병,유타 해안에 상륙한 보병 그리고 해변 방어에 참전한 독일군 생존자들이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방송 후반에 이셋이 만나자 우리가 그날 같은곳에 있었다는 것에 놀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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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제1 군단(제3 보병사단, 캐나다 제3 보병사단, 제6공수사단 지휘), 제30 군단(제 50 노섬브리안 보병사단 지휘) 지휘
  • [2] 제3, 4(증편), 6, 45 코만도 대대 지휘
  • [3] 퍼니전차 사단.
  • [4] 제5군단, 제7군단 지휘
  • [5] 레인저 대대들은 오마하와 유타 해변 사이의 푸앵트 뒤 옥을 공격할 예정이었으나 2대대와 5대대 A, B, C 중대는 유타 해변에 상륙.
  • [6]
    참고로 여기서 활약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하인리히 제페를로(Heinrich Severloh, 1923. 6. 23. ~ 2006. 1. 14.)《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토치카 모델이 되는 WN-62 토치카의 제 352보병사단 소속 MG42사수였던 제페를로는 당시에 19살의 갓난 일병이었지만 장교의 후퇴명령 전까지 2정의 MG42로 12,000발을 쏜 후 탄약이 떨어지자 2정의 Kar 98K로 400여발을 쏘아 1,000여명의 미군을 사살했다. 당연히 포로가 되었으며 후세에 오마하 해변의 괴물(The Beast of Omaha)로 불렸고 2006년에 사망했다...
  • [7] Decimal의 사전적인 뜻은 '십진법의, 소수의'이지만 군사 용어로는 '작전계획상의 공격 예정일'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