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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 일본인

last modified: 2015-04-01 23:10:39 Contributors

북한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벌인 일본인 납치를 말한다. 일본 정부는 12건의 납북으로 17명이 납치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북한측은 13명의 납치는 인정하고 5명을 일본으로 돌려보냈으나 8명은 사망했다고 밝히고 4명에 관해서는 북한에 입국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에선 "북조선에 의한 일본인 납치사건(北朝鮮による日本人拉致事件)"이라고 표기한다.

Contents

1. 개요
2. 납북자 명단
3. 후폭풍

1. 개요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일본에서 부자연스러운 실종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 경찰과 공안 당국은 북한 출신의 탈북자나 망명한 북한 공작원, 북한으로 갔다가 돌아온 재일교포일본인의 증언을 토대로 북한 정부가 일본인을 계획적으로 납치했다고 판단하였다. 1991년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북한은 부정하였다.

그러다가 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북한을 방문하여 북일정상회담을 하였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북한의 특수기관들의 조총련계 공작원들이 공모하여 일본인을 납치하였다고 사과하였다. 고이즈미의 방북으로 일본인 5명이 일본으로 귀환하였다. 2004년에는 고이즈미가 다시 방북했고 해당 일본인들의 가족을 추가로 데리고 일본으로 갔다. 북한은 17명 가운데 남은 12명 중 8명은 이미 사망하였다고 밝혔고 4명은 납치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요코다 메구미(横田めぐみ, 1964-1994?)이다. 1977년 니가타에서 납치되었고 북한에 끌려온 뒤 1986년 북한인 김영남과 결혼하였다. 1987년에 딸 김은영을 출산하였고 1994년에 자살했다는 게 북한 측의 주장이다. 요코다의 화장된 유골이 일본에 전달되었는데 DNA 감정 결과 다른 사람이란 결과가 나왔고 일본은 분노로 들끓었다. 요코다 메구미의 생존설이 빈번하게 대두되고 있으며 요코다가 공작원들에게 일본어를 교육했다는 설[1]도 나오고 있다. 납북 일본인 문제에서 중대한 폭로가 된 일이 김현희은혜라는 이름을 쓴 일본인에게 일본어 교육을 받았단 걸 밝힌 것이었다.[2]

2. 납북자 명단

일본 정부 측의 명단에 따랐다.
  • 구메 유타카(久米裕, 1925-?): 도쿄도 관공서 경비원으로 1977년 9월 19일에 납치되었다. 재일 조선인 공작원 이추길(李秋吉)이 납치하였다. 원래 이추길과 알던 사이로 이추길이 해안에 데려가 괴선박에 태워 납치했다. 이추길은 공작원 김세호에게 구메를 넘겼다. 그 후 기소 처리됐는데 유예됐고 현재는 일본인으로 귀하하여 리 아키요시란 이름으로 도쿄도에서 자영업을 하고 있다. 북한에선 공식적으로 구메 납치를 부인하고 있다.

  • 요코다 메구미: 1977년 11월 15일에 니가타에서 납치되었다.

  •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 1955-): 1978년 6월 29일 납치. 김현희와 공작원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던 교관으로 추정하고 있다. 도쿄도의 음식점 직원 출신으로 1984년에 마찬가지로 납북된 일본인과 결혼하였다. 1986년 남편이 병사하고 같은 해에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홍수로 묘지가 유실되었다는 게 북한측 주장이다. 북한은 다구치가 이은혜임을 인정하지 않으나 일본 정부는 당시 실종자 사진을 모아 김현희에게 확인시켰다.

  • 소가 히토미(曽我ひとみ): 19세 때 어머니인 소가 미요시(曽我ミヨシ)와 함께 시장에 다녀오다 납북된 뒤 북한에서 월북미군찰스 로버트 젱킨스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하지만 2002년 이루어진 일본과 북한의 협정 때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김정일과의 회담에서 납북자의 석방을 요구하여 일본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 뒤 남편인 젠킨스도 그녀를 따라 탈북, 현재는 일본 영주권을 취득하여 그녀와 함께 작은 가게를 차려 살고 있다. 참고로 소가 히토미는 요코다 메구미를 만난 적도 있다고 한다. 함께 실종되었던 그녀의 어머니는 북한에서도 만나지 못했고 북한 당국도 납치를 부인하여, 북한으로 가는 중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지무라 야스시(地村保志, 1955-), 하마모토 후키에(濱本富貴惠, 1955-). 1978년 7월 7일 후쿠이 마바시에서 납치되었다. 지무라는 목수 견습생이었고 후키에는 옷가게 점원이었는데 두 사람은 북한에서 결혼해 2남 1녀를 두었다. 위의 사진은 2002년에 일본으로 돌아온 야스시가 일흔이 된 아버지와 포옹하는 사진이다. 2004년엔 두 사람의 세 자녀도 일본으로 영구 귀국했다.

  • 하스이케 카오루(蓮池 薰) : 1978년 니이가타에서 납치되었다.당시 일본 츄오대에 재학중이던 그는 사귀던 여자친구인 오쿠도 유키코(奥土佑木子)와 해변에서 납치되었고 이후 그녀와 북한에서 결혼했다.고이즈미 총리와 함께 피해자들이 일시 귀국[3]할 때 납북 일본인들 중에서 일종의 리더 격이었다고 한다. 이후 한국어 번역 등에 종사하면서 대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3. 후폭풍

북한의 미사일 실험 등으로 대북 여론이 극도로 나빴던 일본은 요코다 메구미의 유골 사건으로 분노했다. 조총련은 이 일로 극도로 이미지가 나빠졌으며, 덩달아 혐한 감정까지 심화되었다.한국에도 납북자가 수두룩한데

한국에선 이 문제에 대해 이렇다할 논평은 잘 나오지 않고 있다. 아무래도 일본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납북된 터라 남의 납북 문제에 관심이 안 가서 그럴지도.아니면 반일감정과 역사왜곡에 대한 반감으로 믿지 않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납치자 문제에 대해 생트집을 잡는다고 비판할 정도면 말 다한 거나 다름 없다.

어찌됐든 납북 문제와 북핵 문제는 일본의 자위대방위성으로 나아가는데 보탬이 되고 있다.

2014년 아베 신조 총리는 납북 일본인 문제의 추가 조사를 요구하였고 북한은 이를 받아들이면서 일본은 경제 제제를 일시적으로 풀었으며 일시적으로 북일관계가 호전되는 듯 했으나, 북에서는 질질 끌다가 '조사해보니까 더 없다'고 발표하고 입을 씻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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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김현희가 요코다에게 일본어 교육을 받았다는 일본측 언론 주장도 있다.
  • [2] 메구미라는 이름은 보통 한자로 은혜 혜(恵)자를 쓴다.
  • [3] 당시에는 일시 귀국이었다. 고향방문후 북한으로 돌려보낸다는 조건으로 북한에서 귀국을 허용했는데 이후 일본 사회에서 그들을 돌려보내선 안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수십년만에 만난 가족들도 그들의 영구 귀국을 일본 정부에 요구하여 결국 일본 정부가 당초 합의를 깨고 그들을 잔류시켰다.이에 대해서 북한도 의외로 조용히 넘어갔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