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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타 히데토시

last modified: 2015-02-02 22:41:14 Contributors

* 상위항목 : 축구 관련 인물


이름 나카타 히데토시 (中田 英寿 / Nakata Hidetoshi)
생년월일 1977년 1월 22일
국적 일본
출신지 야마나시 현 고후 시
포지션 공격형 미드필더
신체조건 175cm
소속팀 벨마레 히라츠카(1995~1998)
AC 페루자(1998~2000)
AS 로마(2000~2001)
파르마 FC(2001~2004)
볼로냐 FC 1909(임대)(2004)
ACF 피오렌티나(2004~2006)
볼턴 원더러스 FC(임대)(2005~2006)
국가대표 77경기 / 11골

1997~1998년 아시아 올해의 축구 선수
다다드 아지지(흐만 FC) 나카타 히데토시(쇼난 벨마레)
나카타 히데토시(페루자 칼치오) 알리 다에이(바이에른 뮌헨/헤르타 BSC)


Contents

1. 소개
2. 성장
3. 전성기
4. 하락
5. 은퇴
6. 인맥
7. 기타

1. 소개

1990년대 일본의 축구를 대표하던 '미우라 가즈요시'를 잇는 일본 축구의 상징으로 유명했다. 일본 축구의 축복이라 불리며 한때 일본 축구를 넘어 아시아 축구의 아이콘이었던 선수지만 29세에 홀연히 은퇴해 더 큰 화제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이나즈마 일레븐 2에서 나오는 유명한 사기캐릭이자, 애니메이션 3기에서 본격적으로 나오는 히데 나카타는 이 인물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캐릭터. 히데 나카타의 모히칸 헤어스타일도 AS 로마때 나카타의 헤어스타일을 그대로 따왔다.
라이크 라이프에서는 구기대회와 관련해서 언급되기도 했다.(한글 패치판에서는 박지성으로 변경)

2. 성장

9살부터 축구를 시작했으며 어린시절 이미 미우라의 뒤를 이을 스타선수의 재능을 보였다. U-17 대표로 93년 U-17 세계대회에 출전했고 95년엔 U-19 세계대회에 출전했다. 두 대회 당시 일본대표의 중심은 언제나 나카타였다는걸 생각하면 전형적인 엘리트의 길을 걷고 있었던 셈. 95년 대회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고 그해 벨마레 히라츠카(현재 쇼난 벨마레)를 통해 프로에 데뷔한다. 데뷔시즌을 치른 18살의 나카타는 26경기 8골을 터뜨리며 산뜻한 출발을 한다. 96년 올림픽대표에 합류, 애틀란타 올림픽 예선 1차전 브라질을 상대로 1:0 승리를 거둔 멤버들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당시 브라질 멤버가 디다, 카를로스, 주닝요, 파울리스타, 히바우두, 호나우두...지금 이 멤버면 월드컵 우승해도 안 놀란 선수들이다. 일본은 2승1패를 했으나 골득실에 밀려 8강진출에는 실패했다. 97년 5월 한국과의 경기에서 성인 대표팀 데뷔전을 치룬다.

3. 전성기


일본의 첫 월드컵인 1998 프랑스 월드컵 당시 지역예선에 나카타는 맹활약했다. 도쿄대첩으로 회자되는 당시 지역예선에서 일본은 2위를 차지, 직행에는 실패했지만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이란과의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일본은 3-2 승리를 거두고 본선에 진출했는데 3골 모두 나카타가 어시스트한 골이었다. 그 후 월드컵 본선에서 일본 대표팀은 3전 전패 떡실신 당했지만 나카타는 월드컵 직후 세리에A에 진출한다.


97년, 98년 AFC 올해의 아시아 선수상을 수상했으며 98년 여름 세리에A의 페루자에 입단하게 된다. 당시 나카타는 J리그에서 단 4시즌밖에 안뛴 21살의 새내기 선수였으며 아무런 주변 지원 없이 혼자힘으로 나가서 활약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첫시즌 33경기에 출전해 11골을 놓으며 좋은 활약을 펼쳤다. 자신의 패션 센스와 현지팬들의 감각이 일치했는데 현지의 반응도 엄청 좋았다고 한다. 이후 팀내 주전선수로 활약, 00/01시즌 세리에A의 명문 클럽 AS 로마의 러브콜을 받게되고 곧 이적하게 된다. 직접적인 AS 로마의 영입 이유는 토티의 대타, 당시 스쿠데토를 노리던 로마의 스쿼드를 생각하면 깜짝 이적인건 사실. 비록 주전/백업을 넘나드는, 현재로 말하면 로테이션 멤버였지만 실력만큼은 뒤지지 않았다. 2001년 5월 6일. 유벤투스와의 경기에서 2-0으로 지고 있던 상황. 토티와 교체된 나카타는 자신의 진가를 확실히 보여준다. 후반 24분 30m 중거리 슈팅으로 만회골을 기록했고 경기 종료직전 몬텔라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하기도 했다. 00/01시즌 그는 아시아 선수 최초로 스쿠데토를 차지한다.

AS 로마의 베스트 11에 들어갔다는 말이 있는데 이건 잘못된 정보. 이즈음에 활약한 선수중 카푸알다이르, 그리고 토티는 베스트11에 들어가지만 나카타는 토티와 플레잉타임을 나눠갖는 위치였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

01년 일본의 컨페더레이션스컵 준우승에 일조하는 등 국가대표내에서도 팀내 기둥역할을 한다. 01/02시즌 안정적 주전확보를 위해 파르마로 이적하게 되는데 당시 이적료가 1850만 파운드(약 2600만 유로)라는 세리에 최상급 선수 랭크. 당시 멘디에타가 이적료로 5천만 유로를 받는등 7공주 시대로 선수들 몸값이 펑펑뛰었던 때이기도 하지만 상당한 이슈였다. 그리고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1골 1어시스트로 오노, 야나기사와, 이나모토와 함께 일본의 16강 진출에 기여한다.

4. 하락

하지만 2002년 월드컵 이후 나카타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02/03시즌 파르마에서 준수한 활약을 하지만 팀내에서 겉도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04년 볼로냐로 임대, 다음해 피오렌티나로 이적하게 되고 얼마 후 볼턴 원더러스로 임대가게 된다. 몰락의 길을 걷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속사정을 살펴보면 파르마 시절 감독과 전술적 견해차로 인해 불화가 있었고 고질적인 부상으로 인해 정상적인 컨디션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특히, 본인의 베스트 포지션은 중앙 미드필더[1]가 아닌 윙어로 올라오면서 제 실력을 보여주지 못한 것. 결국 점점 벤치를 지키는 시간이 늘어갔고 이는 경기력 저하로 이어졌다.

5. 은퇴

경기력 저하, 라이벌이자 후배인 나카무라 슌스케의 급성장 등은 나카타의 대표팀 내 입지도 좁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그러다 2006 독일 월드컵이 끝난 후 7월 3일. 나카타는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은퇴를 선언한다. 나카타의 은퇴 소식은 당시 일본 축구계를 뒤집어 놓았다. 갑작스런 은퇴로 인해 많은 팬들은 금방 다시 복귀할 것이라는 의견을 냈지만 그는 끝내 복귀하지 않았다[2]. 그 후 약 3년간 세계여행을 한 그는 현재 사업가, FIFA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다만 은퇴 후에도 여러 자선 축구 경기에 꾸준히 참가하고 있다.

6. 인맥

나카타는 인맥이 엄청난 선수로 유명한데 자신과 친한 선수들만 해도 대부분 세계적인 스타 플레이어들이다. 자신이 주최한 자선경기에 초청한 선수들 면면을 봐도 유럽생활을 성공적으로 보냈다는걸 알 수 있다.[3]

7. 기타

22살 때 AS 로마로 이적한 후 전 소속구단인 쇼난 벨마레가 2부리그로 강등당하여 자금사정이 어려워지자, 자신이 직접 벨마레의 스폰서가 되었고[4], 지금까지도 계속 스폰서를 해오고 있다.

홍명보J리그에 진출 했을 때 같이 벨마레에 있었는데 그때 영어책을 항상 끼고 다니면서 해외진출을 준비한 것을 보고 야망이 큰 선수라고 자신의 자서전에서 칭찬했었다. 여튼 이러한 인연때문에 홍명보와 나카타는 서로 이름을 부를정도로 친한 사이라고 한다.[5]

페루자 입단당시 일본에서 유니폼이 많이 팔리고[6] 경기마다 일본인이 찾자 이에 고무된 구단 측에서 한국에서 안정환을 입단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정작 한국인들이 유니폼도 안팔리고 경기장도 찾지않자 구단에서도 대놓고 안정환에게 한국인들이 왜 유니폼과 경기장을 찾지 않냐고 하기도 했다고.당시기사

나카타는 자국 언론을 싫어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그 이유는 기자들이 자신의 발언을 자극적으로 바꿔서 보도하곤 했기 때문이다. 나카타가 '기미가요는 촌스럽다'는 발언을 했다는 아사히 신문의 보도가 대표적이었는데 이 보도로 인해 나카타 본인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까지 우익들의 협박을 받기도 했지만 실제로 나카타는 아사히의 기사와 달리 기미가요는 촌스럽다고 발언한게 아니라 스포츠 경기 직전에 부르기엔 어울리지 않는다는 취지의 발언이었고 현역 시절 기미가요 제창을 거부한 적도 없었다. 실제로 월드컵 등에서 그는 다른 일본 대표들과 마찬가지로 기미가요 잘만 불렀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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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수비형 미드필더가 아니다. 나카타는 그시절에도 상당히 클래시컬한 플레이메이커였다. 비교 대상이 한국 K리그의 윤정환이나 콜롬비아의 를로스 발데라마 같은 선수였다. 이와 비슷한 사례의 선수가 맨유에서 뛰었을때의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
  • [2] 일설에 따르면 나카무라 슌스케가 주도한 파벌에게 왕따를 당하면서 국가대표팀에 넌저리를 느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 [3] 심지어 자신이 주최한 자선경기에 주제 무리뉴 감독을 초청한 적도 있다.
  • [4] 유니폼 스폰서 계약(자신의 홈페이지 'Nakata.net')과 벨마레 후원회 계약. 전직 선수가 팀 스폰서가 된 사례는 전세계적으로도 드물고, 일본에선 이 사례가 유일하다고 한다. 이후 J리그와 여자축구 리그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음으로써 대인배 인증.
  • [5] 일본식 이름 문화를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일본에서는 성이 아닌 이름을 부르는 것은 웬만큼 친해지지 않으면 힘든 경우다. 나카타는 홍명보를 '명보상'이라고 부르고 홍명보는 나카타를 '히데'라고 부른다고 한다.
  • [6] 유니폼 7만장(약 84억원 어치)이 팔렸다고 한다.
  • [7] 아사히 신문의 나카타 기미가요 발언 왜곡 보도는 일본에서도 전형적인 날조 왜곡 보도의 표본으로 취급받고 있다. http://www.geocities.jp/tamacamat/nakata.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