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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

last modified: 2016-05-29 20:08:14 Contributors

대독일국
Großdeutsches Reich
국기 문장
존속기간 1933년 ~ 1945년
표어 Ein Volk, ein Reich, ein Führer
(하나의 민족, 하나의 제국, 하나의 총통)
국가 독일인의 노래,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
위치 중부유럽
수도 베를린
정치체제 일당제 전체주의 독재
국가원수 총통
언어 독일어
민족 게르만족
주요사건 (1919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창당)
1933년 나치당 여당 등극,
힌덴부르크 대통령으로 부터 히틀러 수상 임명,
국제 연맹 탈퇴
1934년 힌덴부르크 대통령 사망->
히틀러 총통 등극->나치 독일 건국
1939년 폴란드 침공,독-소 불가침 조약 체결
1940년 파리 점령
1941년 독소전쟁 발발
1945년 연합국에 항복->멸망
통화 라이히스마르크
성립 이전 바이마르 공화국
멸망 이후 연합군에 의한 독일 군정기


한국어 나치 독일, 제3제국
영어 Nazi Germany, The Third Reich
독일어 Deutsches Reich 1933 bis 1945,



Contents

1. 개요
1.1. 나치 독일의 최대 판도
1.2. 나치 독일의 국기와 하켄크로이츠
1.3. 나치 독일의 국가
2. 나치 독일의 역사
2.1. 히틀러의 집권과 일인독재 수립
2.2. 전쟁의 길
2.3. 나치 독일의 리즈 시절
2.4. 나치 독일의 몰락
2.5. 나치 독일의 멸망
3. 역사적 의의
3.1. 독일인이 입은 손실
3.2. 학문과 문화의 손실
3.3. 전체주의에 대한 경각심 고취
4. 나치 독일의 정치
4.1. 지도자 원리(Führerprinzip)
4.2. 일당 독재
5. 대중 매체에서의 취급
6. 한국과의 관계
7. 일본 제국과의 관계
8. 미국과의 관계
9. 영국과의 관계
10. 프랑스와의 관계
11. 이탈리아와의 관계
12. 소련과의 관계
13. 관련 인물
13.1. 나치 전문 배우(?)
14. 관련 용어/사건







1. 개요

우리는 사악한 세력과 맞서 싸울 것이다. 우리의 적은 폭력과 불신과 불의와 억압과 박해다.
- 네빌 체임벌린[1]

민주주의의 도구들에 의해 민주주의는 살해당했고 법의 부재는 '합법적' 행위로 인정됐다. 노골적인 권력이 지배했고 그것의 유일한 목표는 나머지 모든 권력들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 Eric Metaxas, Bonhoeffer: Pastor, Martyr, Prophet, Spy 미국의 소설가

"거짓말은 진실보다 믿기 쉬워." "왜 그렇죠?" 얀나가 내게 물었다. "거짓말이란 건 감정을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하거든. 엄마들이 자기 딸이 얼간이가 아니라 그저 노력을 안 할 뿐이라고 믿듯이 말이야. 독일인들은 그들이 전쟁에 졌다는 걸 믿기 보다는 내부의 배신자들뒤에서 칼을 꽂았다고 믿은 거지. 누구든지 자신의 불행에 대해서는 남을 탓하는 걸 좋아해. 진실은 항상 힘들거든. 그걸 깨닫기 전에는 함부로 거짓말을 하지 마렴."
- Hilda van Stockum, The Borrowed House



제3제국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제 3'이란 의미는 신성로마제국독일 제국에 이은 3번째라는 의미다. 이 명칭은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1933년 수권법을 만든 뒤 1934년 힌덴부르크 대통령 사망 이후 총통으로서 권력을 장악한 뒤 1939년까지 스스로를 일컬을 때 쓰던 명칭이다.

그러나 공식 국명은 1943년까지 Deutsches Reich(도이체스 라이히, 독일국/독일제국)이었고, 1943년부터는 "대독일국"이라는 의미인 Großdeutsches Reich를 썼다.[3] 1945년 독일이 연합군에게 패전하고 베를린을 뺏기면서 실체로는 완전히 소멸했다.[4] 히틀러는 집권할 때 제3제국이 천년동안 지속하리라고 호기롭게 떠벌렸으나, 겨우 12년만에 망했다. 대신 천년 이상 영원히 지속적으로 까이게 되었다.

"라이히(Reich)"는 흔히 제국이라 번역하지만, 독일어 단어 Reich는 한국어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뜻의 제국이 아니다. 차라리 "나라", "영토"의 뜻에 가깝다. 그래서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도 독일 제국 시대의 "도이체스 라이히"라는 국호를 그냥 뒀다.

흔히 히틀러나 나치당이 "제3제국"이라는 명칭을 썼다라 알지만, 실제로는 연합군의 선동 등을 방지하기 위해 1939년부터 독일 안에서 금지한 명칭이었다. # 하지만 나치도 초기에는 엄연히 쓰던 명칭이고, 역시 연합군도 같은 뜻에서 나치 지배하의 독일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써서 현재 역사서나 전기(戰記), 다큐멘터리 등에서 공식국명이 아님에도 널리 쓴다.

제3제국은 영어권에서도 The Third Reich라고 하며, Reich라는 독일어를 번역없이 그냥 쓰고 있다.[5] 그런 뜻에서 "제3제국"이란 표현 역시 "제3라이히"라는 표현이 지지를 받지 않는 한 타당할 수는 있다.

여담이지만 2006년 국내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독일 점령하의 노르웨이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가 다룬 다큐를 방영했다. 그런데 나레이터가 '히틀러의 Third Reich가 어쩌구...' 하고 말하는 걸 '히틀러의 써드 라이는(...)'이라고 개판으로 자막처리해 많은 이들의 실소를 자아냈다. 딱히 엄청난 전문지식이 필요하거나 고레벨 밀덕이나 알 만한 명사도 아닌데(...) 다만 NGC 자체에는 문제가 없고, NGC 작품을 번역하는 아이앤키 미디어의 과실로 보인다.

동서독 통일 뒤 민족주의적인 일부 독일인들은 이것을 "제4제국의 시작"이라 불렀고, 궁극적으로 독일민족에 속하는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를 여기에 참여시켜 독일인의 진정한 제4제국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메트로 2033? 하지만 국제정세를 볼 때 주변 어떤 나라도 이런 "제4제국"을 용인 못할 테니(...) 아시발꿈[6]

그래서 오늘날의 독일은 "통일 독일"이나 "현대 독일"로 불리고 있다.

제3제국이라는 이름은 제3세계와는 이름이 비슷해 보여도 전혀 다르다.

메트로 2033에서는 이것을 계승한 제4제국이라고, 답이 없는 네오 나치 러시아인 집단이 있다.

1.1. 나치 독일의 최대 판도

1.2. 나치 독일의 국기와 하켄크로이츠


공식 국기(설명.). 독일 제국 국기의 모양을 섞어 썼다. 흑백적의 배색을 차용. 악명 높은 나치의 상징 하켄크로이츠가 있다.


외국에서 이 갈고리 십자가를 그리거나, 관련한 물품은 절대 쓰지 말자! 한국에서 욱일기인공기들고 다니는 것보다 더 심각할 것이다. 특히 독일에서는 독일연방공화국 형법 86,86a조에 의거, 이거 들고 다니다간 경찰이 바로 체포한다 아니, 잡히는 것 보다 잡히기 전에 독일 국민들에게 잡혀서 린치당해 죽는 것을 더 고민해야 할지도 모른다. . 독일에서 나치 깃발은 물론이거니와 나치를 연상시키는 사물을 소지하는 것은 학술연구나 당시를 반영하는 영화 촬영 등의 특수한 상황을 빼면 불법이다. SS 제복도 히틀러 유겐트 단검히틀러의 상판이 그려진 혐짤초상화도 오달 룬문자도 전부 안 된다. 니어처조차도 빨간 바탕에 하얀 동그라미로 대체할 정도. 이런 까닭에 네오 나치조차 저 깃발을 직접 못 든다. 비슷한 것이라도 절대 안 만드는 착한 위키러가 되자.

1.3. 나치 독일의 국가


국가는 독일인의 노래였으나,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도 국가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위 동영상은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지에서는 법으로 청취를 금지하며 네오 나치 활동으로 오해받을 수 있으니 남들 앞에서 듣지 말자. 보는 사람이 있다면 네오나치 활동과 관계 없는 '교육 목적'의 위키 사이트임을 주지시킬 것.

한국북한 정권을 확실히 찬양하면 당연히 에 들어가지만, 인공기나 북한 노래들은 국가보안법 위반이나 경우에 따라 불법이거나 불법이 아닐 수 있다. 예를 들어 북한의 실태를 고발하는 다큐멘터리 등의 교육 매체를 제작하기 위해서 일부 사용하는 것은 허용한다.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노래 자체는 금지하지 않았다.[7][8]

제3제국 당시의 독일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묶은 동영상.
충격과 공포를 느껴보자. 왠지 브금과 사진들이 안 맞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면 기분탓이다. 하필이면 프랑스 작곡가의 음악을(...) 그것도 하필 제작자가 러시아인이다.

2. 나치 독일의 역사

2.1. 히틀러의 집권과 일인독재 수립

제1차 세계대전패전 이후의 독일(바이마르 공화국)은 민주주의를 최대한 보장하려고 노력한 긍정적인 체제였으나, 군국주의에 길들여졌던 독일인들은 이렇게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제도를 "약해빠졌다"라고 생각했다. 그나마 바이마르 정부와 집권 사회민주당은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고 애썼지만 그때마다 대공황의 여파와 베르사유 조약의 독소조항을 들먹이며 정부를 흔드는 좌우파의 극단세력에게 시달렸다.

베르사유 조약의 경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미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의 입장에서도 그것은 너무 과하다고 여겨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많은 금액을 탕감해주거나 해서 그렇게까지 무리가 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초인플레이션이 독일국민에게 많은 고통을 안기긴 했으나, 그 고통에 가린 중요한 이점이 하나 있었으니, 이런 초인플레 때문에 1차대전 당시의 빚을 내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했다가 정부가 망해버려 대금을 한푼도 못받게 되어 부채에 허덕이던 많은 독일 기업들은 부채를 사실상 탕감받으면서 되살아났다는 점이다.그리하여 초인플레이션이 어느정도 진정되고, 미국의 차관이 들어오자 독일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하며, 1920년대 후반이 되면 이미 전쟁전 유럽 최고의 공업국에 재등극했다. 결국은 초인플레의 고통 때문에 독일이 나치에 기울어졌다는 것은 나치를 선택한 독일국민의 변명의 하나일 뿐이다. 문제라면 당대의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적 발전은 미국의 도움이 강했는데 대공황이 미국에서 터지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를 뒷받침해주던 미국의 달러가 대거 이탈하면서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정치적으로도 혼란스러웠다. 사실 이것은 (소련을 제외한) 세계의 모든 나라가 마찬가지였는데, 독일 국민들만이 나치를 선택한 것은 도저히 변명이 안되는 것이다. 즉 초인플레나 대공황은 부차적 원인이 될 뿐, 독일인이 나치를 선택한 것은 스스로를 탓해야 한다.[9]

어쨌든 이런 위기는 극우극좌에 의해 모두 바이마르 공화국 탓으로 돌려졌고, 독일 국민들이 뽑은 선택지는 바로 나치.

이런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에서, 그 때까지만 해도 맥주홀에서 폭동을 일으켰다가 지대로 데이는 바람에 숨죽이고 지내던 나치당과, 그 나치당을 이끌던 아돌프 히틀러가 대두하기 시작한다.

히틀러와 나치당은 대공황으로 정신붕괴 상태에 빠진 독일 국민들을 선전과 선동을 바탕으로 자신들을 지지하게 만들고, 자신을 대놓고 까는 사람들은 온갖 정치적 꼼수와 공작으로 매장하거나 암살해버렸다. 그 후 1932년 총선에서 다 늙어가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대통령이 되자 히틀러는 힌덴부르크를 포섭하여 1933년 힌덴부르크가 의회를 해산하게 만들고, 프란츠 폰 파펜과 연정을 통해 히틀러 자신은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나서 히틀러가 제정한 법은 바로 수권법 (授權法). 이윽고 바이마르 공화국은 멸망했다.

아돌프 히틀러 항목에서 그가 어떻게 이딴 중2병스러운 제국을 세우게 되었는지 더 자세히 나와있으며, 집권하는 과정의 선전, 선동은 요제프 괴벨스 항목을 참조하자.

2.2. 전쟁의 길

케인즈적 경제 회생정책을 통해 국내사정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나치 독일은 외부로 시선을 돌린다.

첫번째 목표는 국제 연맹이 관할하던 라인강 연안의 공업도시 루르를 되찾아오는 것이었다. 이곳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비무장지대가 된 곳이었다. 1936년 히틀러는 빈약한 무장[10]의 독일국방군을 진주시키는 도박을 거쳐, 이곳을 무혈로 되찾는데 성공했다. 이는 조약의 위반사항이었으나, 전쟁을 피하려는 영국프랑스의 묵인 속에 히틀러는 대박을 얻는다.

1938년 오스트리아 나치당을 선동하여 혼란을 조장, 오스트리아 정부를 무력화시켰다. 이후 독일 국방군을 진주시켜 오스트리아 공화국을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독일의 한 주로 병합하였다. 이를 안슐루스라고 한다. 이것도 명백한 베르사유 조약 위반이었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또 수수방관했다.

1939년 3월 다민족국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독일인이 다수였던 주데텐란트가 히틀러의 눈독에 들어왔다. 히틀러는 이곳을 할양하라고 체코슬로바키아에 협박을 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를 달래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를 희생시키며 독일의 요구를 들어주는 뮌헨 협정을 맺었다. 이로서 히틀러는 다시 도박에서 승리했다.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에 "더이상 영토를 요구하지 않겠다"라 했고 그 서약서까지 영국과 프랑스에 제출했으나, 실제로는 지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만 영국과 프랑스의 인내력은 이것으로 한계에 달했고, 더 이상 독일이 협박을 이으면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여론이 우세하게 되었다.

서약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인 1939년 여름, 히틀러는 폴란드에게 동프로이센과 독일 본국을 잇는 단치히 회랑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그러나 폴란드는 앞의 나라들처럼 순순히 당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전쟁을 염두에 두며 총 동원령을 내리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가 또 방관할 것[11]이라는 생각을 했고, 폴란드와의 전쟁에 개입할 수 있는 소련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을 맺자마자 독일은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을 개시했다. 더이상 히틀러의 수법과 나치 독일의 깡패짓을 두고 볼 수 없던 영국과 프랑스는 결국 나치 독일을 향해 선전포고를 했고, 이로서 제2차 세계대전이 개막되었다.

2.3. 나치 독일의 리즈 시절


1939년 9월 시작된 폴란드 침공에서, 독일은 고작 한 달만에 육군이 강력했던 폴란드를 철저히 박살내고, 소련과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는 했으나, 독일에 선제공격을 가하려는 생각은 전혀 안했다. 이후 아돌프 히틀러는 1940년 이듬해 4월에는 하루만에 덴마크를 점령하고, 전광석화처럼 바다를 넘어 노르웨이도 침공, 점령했다. 이로써 발트해에 갖혀 있었던 독일 해군은 이제 대서양으로 나갈 출구를 확보했다. 출구만 확보한 거지만

마침내 히틀러의 독일은 1940년 5월, 프랑스 침공을 시작하였다. 프랑스군제1차 세계대전과 마찬가지의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예상했다. 그러나 낫질 작전으로 독일군은 단 6주만에 프랑스군을 패퇴시켜 항복을 받아냈고, 이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이쯤에서 히틀러는 영국과 종전협상을 맺으려고 했으나, 영국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고, 독일은 공군을 동원하여 영국을 폭격하지만(영국 본토 항공전) 소기의 성과를 이루지 못 했다.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히틀러는 공군을 늘리기보다는 먼저 소련을 정복하기로 결심했고, 몇 달간 부대들을 동부로 이동시켜 소련 침략준비를 했다.

그 사이 이탈리아는 히틀러를 본따서 그리스를 침공했으나, 거꾸로 지면서 도리어 이탈리아의 식민지인 알바니아가 위험해 독일에 구원을 청했다. 히틀러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지만, 이탈리아를 구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아돌프 히틀러는 이탈리아를 구원하기 위해 1941년 4월에는 다시 칸 침공을 벌여 유고슬라비아를 거쳐 그리스를 순식간에 점령했다.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은 드디어 300만을 동원한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독소전쟁을 시작했다. 독일군은 초반에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 소련군은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결국 1941년 12월의 모스크바 공방전에서는 독일 육군은 제2차 세계대전 개전 이래 최초의 참패를 겪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진주만 공습으로 미군이 전쟁이 뛰어들면서, 나치 독일은 전략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12]

2.4. 나치 독일의 몰락


이듬해인 1942년 봄과 여름, 나치 독일은 다시 전세를 회복하여 소련의 남부를 공략하는 블라우 작전(청색 작전)에서 승리하고, 그 기세를 몰아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시작했으나, 소련군의 역포위에 걸려 수 십만의 인명 손실을 내었다. 이로써 동부전선의 균형추는 소련 쪽으로 기울어 버렸다. 그러는 동안 이탈리아를 구원하기 위해 북아프리카로 보낸 에르빈 롬멜군대영국군&미군 연합군에게 섬멸당해 버렸기 때문에 나치 독일은 점점 궁지에 몰리게 된다.

1943년 2월의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으로 잠시 소련군의 예봉을 꺾기도 했으나, 1943년 7월에 벌어진 소련군과의 최후의 대공세인 쿠르스크 전투에서 참패해 나치 독일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전세가 한 번 기울기 시작하자, 전황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서방연합국은 독일군이 쿠르스크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서 이탈리아에 상륙했고, 무솔리니 정권은 무너져 버렸다. 1944년 6월 6일에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서방연합군이 프랑스에 진출했고, 6월 22일 이번에는 동부에서 소련군이 바그라티온 작전을 펼쳐 독일 중부집단군을 분쇄해 버렸다. 결국 나치 독일의 영토는 독소전쟁 이전의 영토로 크기가 축소되어 버렸다.

이 와중에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루마니아핀란드는 연합국에 항복하고 총부리를 독일 쪽으로 돌렸다. (특히 루마니아는 독일의 유일한 석유공급원이었다.) 이를 잃게 되자, 독일 공군과 갑부대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에 히틀러는 동부전선의 정예부대를 빼내어 판돈으로 삼고, 1944년 12월 마지막 도박아르덴 대공세를 펼쳤으나, 이것은 참패로 끝나 버렸다. 오히려 이 때문에 동부전선에 구멍이 나 버렸고, 이에 소련군은 쉽게 독일 영내로 진입할 수 있었다.

결국 소련군은 1945년 5월 2일 베를린을 함락시켰고, 베를린 수비대의 항복을 받았다. 1945년 5월 8일에 되니츠가 수반으로 있는 플렌스부르크 정부는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했다.

2.5. 나치 독일의 멸망

히틀러의 죽음으로 나치 독일은 사실상 멸망했으나, 그 껍데기는 며칠 더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히틀러의 유언으로 얼떨결에 4월 30일에 나치 독일의 마지막 대통령에 오른 칼 되니츠는 자신의 사령부가 있는 덴마크 인근의 발트해 군항 플렌스부르크에서 정부를 구성했다. 다른 나치 고관들과 마찬가지로 되니츠는 서방과 단독강화를 맺고 소련군과는 계속 싸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미 연합국은 독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얄타 회담에서 다 결정해 버린 상태였기에, 이는 되니츠의 망상에 불과했다.

5월 4일 되니츠는 자신의 부하인 프리데부르크 제독을 랭스에 있는 아이젠하워 사령부로 보내 항복협상을 하도록 시켰다. 독일측은 협상을 질질 끌었고, 이는 소련군을 피해 서방연합국 포로가 되려는 동부전선의 독일군 장병이 도피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함이었다. 연합국 측에서는 이것을 용납할 수 없었고, 서방측으로 도망오는 독일군은 발포하겠다고 경고를 했다.

그리하여 5월 7일 랭스에서 독일의 요들 대장은 연합국에의 항복문서에 서명을 했다. 당시 아이젠하워 사령부에 파견나왔던 연락장교인 소련군 이반 수슬로파로프 대장은 당시 모스크바의 훈령이 없어[13] 사인할지 말아야할지 망설이다가, 끝내 사인했다.[14]

이것으로 공식적으로 항복 문서에 사인을 했으나, 뒤에 이를 안 스탈린이 "항복은 적국의 수도에서 해야하는 거 아닌감?"이라 고집을 부렸다. 결국 다음 날 다시 빌헬름 카이텔이 독일을 대표하고, 이번에는 주코프가 소련을 대표하여 주코프가 사령부를 둔 베를린에서 똑같은 항복 문서에 사인을 했다.

이 항복과정을 보면 스탈린과 소련 측이 강짜를 부렸나 볼 수도 있지만, 이 사안에는 소련측 행동에 상당한 정당성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어찌되었든 일개 군 장교, 그것도 지휘관도 아닌 연락장교가 본국의 지시 없이 교전 대상국의 항복을 인정한다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항복을 인정한다는 말은 곧 전쟁을 끝낸다는 뜻인데, 일개 장교가 본국의 지시도 없이 "뭐, 전쟁 끝내죠?"라고 결정하면(...)

이런 결과는 소련을 배제하고 서방연합국만을 상대로 항복협상을 진행하려던 독일측의 꼼수[15]에 소련측이 문제를 제기했고, 서방연합국 역시 독일 편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뭐, 복수심과 증오에 불타는 소련군의 상태를 생각하면 독일 측의 행동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전쟁을 처음 시작한 국가는 독일이었으니, 별로 동정할 여지는 없다.

플렌스부르크에는 서방 연합국이 들어왔고, 당시 서방측은 되니츠 정부를 정식정부로 인정해주었기 때문에, 적과의 동침한 동안은 SS대원이 미군 트럭의 교통정리를 하고, 독일군과 미군이 함께 정부청사의 경비를 서는 기묘한 광경이 10여일 남짓 계속되었다. 그러나 전쟁 때문에 2000만명이나 전사해서 전범들을 철저히 처벌하려고 이를 갈던 소련은 이런 행태를 못 참아, 서방연합국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후 서방연합국과 소련은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해산하기로 합의하고 5월 23일 각료들을 체포하였다.

이것으로, 나치 독일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3. 역사적 의의

실제로 있었던 국가와 조직을 통틀어 추축국과 함께 가장 악명 높은 만악의 근원이자 악의 조직. 국가사회주의와 제3 제국에게 인류라는 종 전체가 겪은 유무형의 피해는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수준이었기에 대부분의 사학자들은 나치 독일을 인류사 최악의 단체 중 하나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식민제국들의 예시를 들어 제3제국이 역대 최악의 국가인 것은 서방세계의 관점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으나, 나치 독일의 악행은 식민제국들과는 궤를 달리할 정도로 독보적이다. 게다가 이들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전 세계에 초래한 피해와, 동맹국이었던 일본 제국이 벌인 패악질과 묶어서 생각한다면 동양 식민지 국가들 입장에서도 결코 옹호할 가치가 없는 세력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서방세계의 관점 운운하며 여기 까지 요상한 진영 논리를 끌고 올려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점은, 나치가 가장 패악을 심하게 부리며 피를 많이 뿌린 대상은 제국주의와 연결 된 소위 그 '서방'도 아니라 바로 30년 전에만 해도 독일이 계속 두들겨 패던 폴란드,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 체코 등의 중동부 유럽이었다[16]. 역설적인 점은 이 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 제국, 제정 러시아가 분할하고 있었던 중동부 유럽은 실제로 중세 이후로 독일계 이주민들을 대거 받아 들이고, 지속적인 문화적, 경제적 교류를 따라 2차대전 이전만 하더라도 독일어가 인텔리 계층의 보편 언어로 대접 받을 정도로 독일의 문화적 영향력은 깊숙한 곳이었다! 그러나 2차대전의 시발점이 된 단치히만 하더라도 전후 재건 과정에서 일부로 '독일색'이 나는 건물들은 다 싸그리 밀어 버리고 죄다 '폴란드 민족 전통적'이라고 판단 된 디자인으로 구시가지를 다시 지었을 정도로 나치에 대한 원한이 사무친 중동부 유럽인들은 전후 자국의 사회적 재건 과정에서 독일의 영향력을 싸그리 청산해 버렸다. 원래 있었던 자국의 역사적 유산마저도 싹 지워버리게 만들 만큼 나치의 해악이 독일 자신과 주변 나라들에게 심했다 종교적인 면에서도 독자적인 종교개혁 역사를 갖고 있는 체코정도를 제외하면 개신교(특히 루터교)에 대한 인식이 별로 좋지 않은 편.[17] 이놈들 때문에 전후 독일인들은 심지어 나치와 전혀 관계 없는 수백년 전의 프로이센의 역사 마저도 군국주의의 색채가 짙으며, 민족주의를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로[18] 제대로 역사 교육을 시키는 걸 학교에서 주저할 만큼 철저하게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거세되어 버렸다.

나치 독일은 고대의 게르만족의 서진, 중세 독일 기사단의 동진 이래 독일 민족국가의 숙원이었던 "영토 확장 및 유럽의 패권 쟁취"를 내세우며 거대하게 판을 벌였으나, 끝내 거대하게 망해버렸다고 평가할 수 있다.

3.1. 독일인이 입은 손실

물론 독일인이 입은 손실은 그들의 자업자득인 측면이 상당히 많이 있으나, 나치와 같은 집단이 창궐하면 얼마나 나라에 해악을 가져오는가를 설명하기 위하여 독일의 관점에서 피해를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다른 나라들의 피해 못지 않게 독일도 거대한 손실을 입었다. 나라가 갈라짐은 물론이고, 근대 독일의 기원이라고 할 프로이센이나 포메른 지방, 그리고 쾨니히스베르크는 영구히 폴란드나 소련에 할양되어 버렸다. 인명 피해도 심각해서, 직접적인 인명피해만 수백만 명의 전사자를 내었으며, 패전 후 동유럽 각국에서 당해 쫓겨나거나 맞아 죽은 독일인만 해도 수백만이었다.

나치 독일의 패망으로, 독일은 중세와 근세에 걸쳐서 독일인들이 꾸준히 넓혀왔던 국토를 한 방에 다 날려먹었다. 자업자득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 1914년의 독일 제국의 영토와 지금 남아있는 독일의 영토를 비교해보자. 반 정도만 남은 상태다.(...) 식민지 더하면 5분의 1정도 빌헬름 1세가 보면 땅을 칠 정도.

겉으로 보이는 영토만 날아간 것이 아니다. 체코, 폴란드 등 외부 영토에 있던 독일계 주민들이 해당 영토에서 완전히 쫓겨나면서, 동유럽에 광범위하게 남아 있던 독일어권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수십개의 나라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유럽, 그중에서 중앙 부분에 위치한 독일이 주변의 독일어권을 잃은 건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손실이다. 광범위하게 퍼져있던 독일어 통용 지역이 중부유럽의 비좁은 독일계 국가들로'만' 축소되면서, 독일의 문화적 영향력 역시 크게 타격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독일이 전쟁 도발에 의존하기 시작한 1차 대전부터 시작된 일로서, 동유럽에 그친 것만이 아니라 서유럽미국에서도 반독일 감정이 강하게 일어났는데, 영국에서는 본래 독일계였던 윈저 왕조가 독일계 뿌리를 파내버리는 상황이 일어났으며, 미국에서는 많은 독일계 이민자들이 성씨를 영어식으로 바꾸면서 독일계 뿌리와의 관계를 단절해버렸다. 이민자들이 '독일인 조상','독일인 친척'을 뒀다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사회적으로도 "독일? 그 맨날 전쟁하고 학살하는 나쁜 나라?"라면서 지탄을 받으니 그 사실을 감추려 했던 것인데, 결과적으로 양차대전을 거치면서 동서유럽과 신대륙을 가리지 않고 전쟁 이전까지 독일 국외에 널리 퍼져 있었던 독일 문화가 깡그리 '말살'당해버린 것이다.

"독일인의 입장에서 보면 히틀러는 영웅이다!"란 주장도 있다. 물론 2차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베르사유 조약의 불합리한 조건들을 다소나마 만회한 것도 사실이고, 실제로 처칠조차 히틀러 집권 초기에는 국가안정능력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영토 야욕을 드러낸 순간부터 히틀러와 독일의 공멸은 예정된 수순이었으며 전쟁이 일어나고부터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그 대가로 얻은 손실은 어떻게 해도 덮을 수 없을 지경이라 독일에서 저런 주장을 했다간 바로 드잡이질이 날아온다.

일단 히틀러 개인의 망상을 실현하기 위해 벌어진 전쟁에서 전 인구의 약 10%에 달하는 독일인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나치당은 이념적 순수성과 정권 유지를 위해 타민족 출신의 독일인들은 물론 제국 내의 반체제인사들도 가차없이 숙청했다. 전술적으로는 동부전선 병력들에게 기동 방어를 금지하고 무조건 위치고수라는 말도 안되는 명령들을 내림으로써 피해를 가속화했다. 더군다나 침략전쟁을 위한 징병제를 실시했으며, 병역기피자들을 현장에서 총살했다.[19]

이런 형국이니 일반 군인들로서는 목숨걸고 조국에 반하여 싸우든가 아니면 울며 겨자먹기로 나치에 동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히틀러의 광기가 저지른 죄악이 전황이 역전됨에 따라 아무 잘못 없는 민간인들에게 돌아왔으니, 소련군과 현지인에 의한 무차별적인 보복 학살[20]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들은 목숨걸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건 이성을 잃고 히틀러와 비슷한 짓을 한 스탈린과 소련군에게 1차적인 책임이 있지만[21] 동유럽에서 히틀러와 나치가 조직적으로 전쟁범죄를 조장하지만 않았더라도 훗날 소련군이 그토록 잔혹하게까지 복수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어찌보면 인과응보인 셈이다.

뿐만 아니라 히틀러에 동조한 업보로 전국토가 잿더미가 되고 독일 민족의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파괴되었으며, 전후 독일의 정치적 위상은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지도자 한명 잘못 만난 죄로 끊임없이 전세계 방방곡곡에 사죄와 반성과 배상을 반복하고, 인류 문명을 파괴시키려 했다는 죄악의 댓가는 '독일'이라는 국가가 존재하는 한 영구히 역사적으로 비판 받아야 할 사실이다.

더군다나 히틀러에 동조한 죄업 때문에 45년동안 국토가 두쪽이 나는 바람에 국력도 상당히 손해를 봤다. 동서 분단 이외에도 독일의 영토는 크게 줄어들었으며, 현재 독일의 영토는 근대 독일 국가가 형성된 이래 가장 작다. 심지어 근대 독일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프로이센 지역까지 영구적으로 상실했다.[22] 영토적인 면 뿐만 아니라 2차대전이후 현재 독일 국경 밖에 살다가 추방된 실향민은 1200~1600만명에 달했다.

따라서 현재 독일인 입장에서 히틀러는 영웅도 뭣도 아닌 그냥 웬수 십새X다. 히틀러를 빠느니 차라리 독일을 직접 조졌던 맨 오브 스틸을 빨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3.2. 학문과 문화의 손실

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수준이었던 과학기술도 미국에 뒤쳐지게 되었다. 학문적으로도 큰 손실을 겪었는데, 전쟁 전에는 나치당의 억압적인 분위기와 유대인 탄압을 피해, 전쟁 후에는 안정적인 생활을 찾아 많은 독일 과학자들이 타국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여기에 가장 이득을 입은 국가가 미국으로 미국이 전후 과학계의 중심이 되는데는 독일계 과학자들의 공적도 컸다. 물론 부자는 망해도 삼년 간다는 속담처럼 독일도 완전히 밑천이 날아가지는 않아서 여전히 과학기술력이 뛰어난 국가이기는 하지만, 세계 과학계의 중심에서는 밀려나게 되었다.

물론 현재는 순수 과학분야의 스 플랑크 연구소와, 응용과학분야의 라운호퍼 연구소가 서로 경쟁하며 독일 과학의 발전을 이끌고 있다. 음악을 듣는데 사용하는 CD나 MP3등도 알고보면 독일의 기술이기도 하고. 말인 즉슨 옛날 명성이 무색해질 정도의 변방은 아니라는 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경제력을 기반으로 과학기술 분야에 막대한 투자를 퍼붓는 미국이 버티고 있는 한 옛날 명성을 되찾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항공 및 로켓기술 분야는 미국과 소련, 영국에 통째로 털리고, 각종 규제도 가해지면서 사실상 복구가 불가능해진 상황이다.

아인슈타인은 단지 유대인이란 이유만으로 박해받았으며 결국 를린 대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미국으로 망명했다.(히틀러가 핵물리학을 '유태인 물리학' 드립치면서 폄훼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회주의 학자의 본산이었던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도 멤버들이 유대계 출신이 많았고 마르크스주의를 전파한다는 이유로 나치의 탄압끝에 폐쇄되었다. 소장인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스위스로 도망쳤으며 다른 멤버들도 프랑스, 영국, 스위스등으로 피신했다. 이 멤버들 중에는 리히 프롬, 오도르 아도르노 같은 사회과학계의 거성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결국 미국으로 옮기게 되었다.

정신분석학의 대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도 단지 유대계라는 이유만으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자체가 유대인의 허접쓰레기 학문이라는 규정을 받았고 나치 집권이후 처음 열린 심리학 대회에서는 정신분석학 학자들의 참가가 금지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오스트리아가 합병된후 프로이트는 살해위협까지 받게되자[23] 프로이트는 결국 가족을 위해서 오스트리아를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문화계로 보면 나치당의 문화 탄압 때문에 독일의 문화계도 큰 타격을 받아서 후퇴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출판, 영화, 연극분야에 활동을 많이 하던 유대인들은 거의 예외없이 국외로 빠져나갔다. 특히 영화산업은 1920년대 유럽 전체에서 제작되는 영화 수보다 독일내에서 제작되는 영화가 더 많을 정도로 번성했고 미국의 할리우드에 이어 두번째로 번성했지만 나치 집권후 괴벨스가 영화산업을 통폐합하면서 거의 국영화시켜 몇 개 회사만 남겼고 정권 찬양적 홍보 영화나 반유대주의 영화만 찍어내게 된다.

연극계는 우익이나 민족주의 성향이 멀었기 때문에 역시 직격탄을 맞았고 문학계에서도 <서부전선 이상없다>로 국가공인 좌빨 선고를 받은 레마르크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토마스 만 등 유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선고 받은 작가들도 나치 독일을 떠났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테 콜비츠 등 좌파 예술인들이 탄압받다 망명했으며 유대인이었던 멘델스존의 음악도 당연히 금지당했다.[24] 2차대전 시기에는 러시아, 폴란드 작곡가의 연주도 금지당한다.

다른 예술분야에도 나치당의 잣대로 '유대적인 요소'가 들어갔다 선언하면 탄압을 면치 못했다. 히틀러는 자기가 이해하기 어렵다(?!)라는 이유로 현대 전공이였던예술을 매우 증오했으며 단지 유대인이란 이유만으로 많은 유대인 출신 예술가, 과학자들을 박해했다. 히틀러는 인체를 새롭게 재해석한 입체파 등의 새로운 예술 사조를 '인체공부를 게을리 한 화가가 그린 3류 작품'으로 깎아내리고 이것이 독일 국민의 정서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명목 하에 퇴폐미술로 분류하고 탄압한 반면, 누구나 이해하기 쉽지만 해석이나 창의력이 다소 제한된 신고전주의는 우대했다. 이에 나치는 또한 모더니즘 미술가들의 작품을 퇴폐미술로 낙인찍고 대대적인 박해를 가했다. 이에 견디지 못한 예술가들은 작품 활동을 포기하거나 해외 이주를 택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화가들이 추방당하거나 온갖 수모를 당했음은 물론이다. 퇴폐미술 할거야 안할거야! / 안하겠소, 닷-씨는 안하겠소! 게다가 히틀러가 게르마니아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독일의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깡그리 박살났다. 주요 문화재급 건축물들이 불도저에 아작이 났다.

터 그로피우스가 주도하던 바우하우스(Bauhaus 바이마르 공예학교)도 유대적 바우하우스 악질 문화라는 나치의 비난을 받으며 학교가 폐쇄되었고 함부르크의 바르부르크 예술사 연구소도 설립자가 유대계라는 이유만으로 박해를 우려해 나치가 집권하자마자 연구소를 영국으로 이전해버렸다.

나치의 탄압을 받은 과학자, 인문학자, 예술가들은 대부분 유럽을 거쳐 결국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미국은 비록 반유대주의적인 성향의 인물들이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이는걸 불쾌하게 여기긴 했어도 이들을 받아들이고 구해내서 제2의 터전이 되었다. 나치 집권후 수십만의 유대인이 국외로 이주하면서 대학교수급 석학들도 800명이나 빠져나갔는데 이중에 노벨상 수상자가 20명이었다고 한다.[25] 물론 그들이 미국의 과학발전에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세계 1차 대전 이전에 이미 미국은 경제력에서 유럽을 뛰어 넘은 세계 최강국의 위치에 서 있었다. 그저 고립주의 정책으로 외부에 그것이 표출되지 않았을 뿐. 실제로 이 당시 미국으로 옮겨간 수학자들의 활약으로 미국은 전세계 최고의 8개의 수학연구소 중 3개를 보유하고 있는 반면 독일에는 단 하나도 없다.

3.3. 전체주의에 대한 경각심 고취

굳이 좋은 일을 찾아보면 "누가 봐도 확실하게 최후까지 뻘짓하며 망한 덕분에 전후 독일인은 물론 전 세계인의 생각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었다." 정도다. 히틀러와 졸개들이 제2차 세계대전을 6년간이나 처절하게 한 끝에 독일 본토가 쑥밭이 되고,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누가 봐도 확실한 패전을 한 덕분에 독일 사람의 뇌리 속의 극우민족주의나 전체주의나 독일우월주의같은 나쁜 생각이 봉인된 것이다. 이거 하난 잘했다고 볼 수 있지만, 그걸 위해 치러야 했던 대가는(...)

물론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초창기에 영웅이었다는 이야기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시 독일은 '막대한 영토 손실 + 전후 복구 + 승전국의 지나친 배상청구'로 말 그대로 절망의 구렁텅이였다. 그런 상황에서 히틀러가 죽어가던 나라를 살린 것은 사실이며(결국 그걸 또 죽였지만. 비유하자면 죽어가는 환자를 살려놓고 강력범죄를 공모한 뒤 같이 사형당한 셈이다.), 재무장을 하고 라인란트 점령 등으로 프랑스에게 한방 먹인 것에 대해 독일 국민이 얼마나 열광하고 후련해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실제로 라인란트 점령 후 3주 뒤의 총선에서 독일 국민의 히틀러 지지율은 98.8%였다. 그 시점까지는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영웅이라 할 수 있다. 독일의 경제 회복과 합병 등에서 보여준 강한 모습은 다른 나라들에도 큰 충격을 줘서 유럽과 미국에서는 유일하게 혼돈이 멈추고 안정되어 보이는"듯한" 독일을 본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억압과 독선으로 이루어진 독재는 개인의 망상으로 인한 전쟁을 전세계로 확대시켰으며, 결과는 다들 아시다시피 수없는 사람들의 처참한 죽음이었다. 그것도 독일뿐 아니라 전세계의. '히틀러 비판은 전쟁 패배로 인한 결과론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럼 히틀러가 승리했더라면 인권 말살과 인종주의, 그리고 세계적 레벨의 민간인학살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승자 중의 승자인 진시황조차 분서갱유 등의 정책으로 인해 죽고 나서 끊임없이 본인이 소행 이상으로 부풀려져서 2000년 넘게 욕먹다 최근에야 겨우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는 말이 나온다.[26]

현재 독일 정치, 교육 시스템에서는 히틀러와 나치의 과오를 반성하며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학살과 세계적 전범이라는 원죄는 경제 정치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룬 지금도 독일 전체에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되었다. 독일의 대표 항공사 루프트한자가 군 출신 조종사를 채용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흔적이다. 이 항공사에서 전쟁 당시 조종사를 집중 육성하였던 것에 대한 자기 반성이다.

물론, 대한민국에 환빠가 있듯이 독일에도 네오 나치들이 있는데, 이놈들은 히틀러가 전성기를 열었다는 비정상적인 의견에 동조하기도 한다.틀렸어 이젠 꿈도 희망도 없어 근데 이런 자국 내에서도 이놈들에 대한 대우가 환빠와 다를 것이 없고, 한술 더 떠서 얘네들은 정말 대놓고 폭력범죄를 저지르기 때문에 그냥 잡혀간다.

인도에는 아돌프 루 히틀러 마락이라는 정치인도 있다. 부모가 히틀러를 존경해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사상적 다양성이 허용되는 사회이다 보니, 각종 독재자들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짓는 일도 많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관용의 국가인가. 아니면 적의 적은 친구라는 생각인가[27] 언젠간 북의 왕조들의 이름도 따서 지을지도 모르는데 그 나라랑 상관없는 다른 나라라면 그럴지도

제3세계의 국가들 중 독일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고 영국이나 프랑스의 지배와 착취에 심하게 시달렸던 국가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히틀러가 유럽을 전쟁에 말려들게 하고 영국과 프랑스를 공격한 덕분에 이게 이후의 독립에 도움이 된 측면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니까 적의 적은 친구요, 이나라들 입장에서 히틀러는 독립유공자일 수도 있다는 얘기 또는 이스라엘, 유대인을 증오하는 감정이 강한 곳에서도 히틀러를 좋게 보는 경우가 있다. 이스라엘, 유대인, 반유대주의 항목 참조.

그리고 아르헨티나 등 몇몇 중남미 국가들과 이슬라 문화권 특히 이슬람 극단주의 집단들은 히틀러가 제2차세계대전에서 승리하면 미국을 위시한 서방국가들의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이 약해져서 자신들에게 더 좋아질 거라는 기대도 했던 모양이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중동[28]이나 아프리카,[29]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중남미 또는 이슬람 문화권 같은 데서는 히틀러를 칭찬해도 아무 문제 없을지도, 아니 오히려 좋아할지도 모른다. 특히 중남미 같은 경우, 2차대전에서 패배한 나치 잔당들이 도망쳐 오기까지 했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하지만 '그놈이 그놈'으로 보는 시각도 만만치 않으니 무조건적인 일반화는 곤란하다. 마하트마 간디는 히틀러에게 전쟁하지마란 내용의 개인적인 편지를 써서 보냈었고, 호치민이나 자와할랄 네루처럼 일본이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것이란 논리에 회의적이거나 비판적인 사람들은 나치 독일 역시 더한 악으로 보았다. 게다가 독일제국 시절 식민지였던 나미비아탄자니아같은 몇몇 아프리카 국가들도 나치가 독일제국때의 만행을 그대로 계승해서 흑인-독일인 혼혈아들을 라인란트 사생아(Rheinlandbastard)라 부르며 박멸 대상으로 삼은데다 홀로코스트 문제와 달리 현재까지도 제대로 된 사과나 보상을 안하는 형편이라 이 나라들은 차라리 영국이나 프랑스가 더 나았다고 보는 편이다.

이 때문에 서독은 아예 국민성 자체를 포맷해 버렸으며, 유럽 재앙의 근본이던 민족주의적이며 권위주의적인 요소를 국민성에서 완전히 배제시키고, 이를 자유주의적이며 평화주의적으로 바꾸었다.[30] 그 결과 권위주의적이었던 동독체제는 자발적으로 서독에 흡수·합병되었다. 그리고 현재 독일은 전쟁 피해를 받은 국가들의 이의제기 없이, 유럽연합의 지도국의 위치에 올라섰다는 점에서 이런 변화는 매우 긍정적이고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나치 독일은 독일인의 흑역사이기도 했지만, 세계 전체의 반면교사로서 작용했다. 형식적으로나마 전 세계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UN도, 사실은 나치 독일 때문에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세계는 히틀러와 같은 망상광 독재자가 한 나라를 휘어잡는 것이 단지 한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가 고통을 받게 되는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전처럼 자국민에 대한 탄압을 '내정간섭'으로 보고 쉬쉬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방향으로 수정되었다. 사실 자국민을 탄압하고 학살하는 자들이 타국에 전쟁을 일으키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이후 UN 등 국제기구의 평화유지 활동의 1차 적인 목표는 제2의 나치 독일을 막는데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현재 전 세계에서 나치를 직접적으로 숭배 또는 계승하고자 하는 나라는 없다.(...) 물론 나치 이후로도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는 답없는 최고저놈 돼지의 사병들을 거느리고 나치의 아성에 도전하는 수준을 넘어, 심지어 나치와 비슷한 수준도 넘어 이제 나치를 뛰어넘으려 시도하는 윗동네라든지, 바로 자신들이 나치의 피해자이면서 나치를 반면교사로 삼긴 커녕 나치의 수법을 그대로 배워서 써먹는 유대인 깡패들이라든지, 그 유태인 깡패들과 피 터지게 싸운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벤치마킹하는것도 모자라 그를 뛰어넘어 자국 도시를 초토화사키거나 타 국가 정치에 뛰어들어 학살을 조장하거나[31] 나중엔 아예 자국민들을 주적으로 선포하는 미친 놈들,나치 이후 처음으로 전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테러를 자행하며, 샤리아의 이름 아래 여성들에게 할례를 강요하고, 소년들을 폭력적으로 납치하고 세뇌하여 소년병/인간 폭탄으로 써먹고, 0-9세 여아들을 성노예로 팔아먹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미친 무슬림 쓰레기들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은 사라졌지만 인종 청소나 학살 등 나치의 재림을 방불케 했던 동네도 있었다. 제발 여기서 더 늘어나지 않기를 빌자. 인류를 위해서.

4. 나치 독일의 정치

나치 독일은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의 엉망진창인 정치 이념으로 마개조당했고, 그 정치 체계는 모호함과 비논리, 혼란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4.1. 지도자 원리(Führerprinzip)

지도자 원리는 인간에게는 우열(優劣)의 차가 있다고 보는 사회진화론을 그 바탕으로 한다. 이는 다수결에 기반을 두는 민주주의와 의회 정치를 부정하여 오직 최고의 두뇌를 가진 한 사람의 지도자가 자기 민족을 지도해야 하며, 국민 대중은 이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자세한 것은 지도자 원리 문서 참조.

4.2. 일당 독재

나치는 독일을 일당 독재 국가로 만들었으며, 아무리 사소한 단체라도 나치당 이외의 정치 결사를 허용하지 않았다. 우선 독일 사민당, 일 공산당 등의 라이벌 정당들은 나치의 집권 즉시 해산되었다. 이는 우익 단체도 마찬가지였는데, 철모단 같이 나치와 비슷한 성향이고 공투도 했던 극우 정당, 툴레 협회와 같이 초창기 나치에 큰 도움을 주었던 우익 비밀 결사도 존속 하지 못했다. 기존의 모든 정당을 해산한 후에 나치당 이외의 새로운 정당을 만드는 것도 금지되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정작 나치당의 지위는 모호했다. 초기에는 나치당의 지위를 공법인으로 하여 법률적으로 국가 사상의 담당자로 정의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1942년 12월 12일 명령에 따라서 나치당의 지위를 정의한 모든 법률을 삭제했다. 당과 국가를 정의하려는 시도는 이후에도 종종 있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고, 최후까지 나치당은 모호한 상태로 남았다.

나치당의 세계관에서 당은 국가와 같이 지도자 원리를 구현하는 조직이었으나, 동시에 국가보다 우월한 존재로 여겼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관청과 관료 정치를 이용하여 나치당에 주어진 사명을 경감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 덕분에 전후에는 편하게도 나치당과 나치당의 휘하 단체들을 모조리 싸잡아서 단순한 범죄 단체로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법률에 근거한 올바른 정당도, 국가 기구도 아니면서, 무력과 폭력으로 국가를 지배하고 전쟁을 벌이는 단체이니 범죄 조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세계구 조폭

5. 대중 매체에서의 취급

빼도 박도 못할 천하의 개쌍놈들이었기 때문에, 나치 독일은 외계인, 악마, 좀비, 로봇과 함께 대중 매체의 주적을 도맡는 5대 트로이카로 활동한다. 아예 나치 좀비같이 두 막장요소를 섞어 놓은 때도 있다. 외계인, 악마, 로봇도 가끔 섞이곤 한다.
대부분 나치 독일을 최대한 부정적으로, 온 세계의 악이란 악은 죄다 모아둔 이미지로 묘사하고,[32] 위의 나머지 4대 악의 세력들이 그나마 몇 작품이나 잠시라도 주인공을 맡을 여력이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나치 독일은 절대 주인공이 못 된다. 나치 독일은 대체역사물을 빼면 어떤 작품에서든 절대 못 이기고, 그 대체역사물에서도 결국에는 어떻게든 패배하게 된다. 가끔 대체역사물이나 판타지 세계관에서 현재진행형인 강대한 세력으로 나오기도 하지만, 그 경우에도 '언젠가는 멸망시켜야할 악의 제국'으로 묘사되지 '정의의 우리편'으로는 결코 묘사되지 않는다. 가끔 나치 독일의 후예나 후신을 자처하는 존재(네오 나치라든가)도 나오는데 이 역시도 절대 좋은 대접을 못 받는다.

당사국인 독일에서 나치 독일 관련 매체는 엄청난 검열을 거쳐 출시된다. 애초에 독일의 매체 검열 기준이 빡쎄지만 나치 독일 관련 매체는 더 그렇다. 그렇게 해서 통과하는 것들은 나치 독일을 처럼 씹고 처럼 까는 매체가 대부분이다. 이마저도 은근히 나치 독일과 관련된 것들은 최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며, 아예 삭제해 버리거나 간접적으로 언급한다. 대표적인 예로는 하켄크로이츠를 평범한(?) 철십자로 바꾼다거나(...)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게임의 특성상 사실상 '주인공 국가'인 하트 오브 아이언에서도 독일어판은 나치 관련 인사들은 개명되었고, 사진은 삭제되었다.[33] 그나마 제작사인 패러독스 인터랙티브하켄크로이츠 대신 제2제국 국기를 쓰는 등 최대한 나치색을 빼려 노력했음에도 게임 배경이 배경인지라 어쩔 수 없다.

단,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2에서는 이상하게도 피해국인듯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덕분에 렐릭 엔터테인먼트가 나치가 아니냐는 말도 나올 정도. 자세한건 항목 참조.

동아시아에서는 나치가 그다지 피부에 닿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대신 그 포지션을 일본 제국이 완벽하게 차지했으며 여전히 그 때의 여파로 반일감정이 강력하게 잔존하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이나 대한민국의 창작물에서는 서구에서 나치가 맡을 역할을 일제가 대신 맡는다. 더불어, 그 탓에 욱일기 등 일제의 상징에 대해서는 법적 제재까지는 아니더라도 강력한 국민적 거부감을 표하는 반면 나치나 하켄크로이츠에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나치독일빠와 같은 위험한 사상을 갖는 사람들이 나오기도 한다. 물론 이쪽의 끝판왕은 둘 모두에 별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일본 극우.

6. 한국과의 관계

당연히 관계가 없었다. 나치 독일이 1933년에 수립되었을 때 그 당시 한국 아니 조선일본 제국령 조선(日本帝國領 朝鮮)으로 격하되었고 이미 일제로부터 외교권을 강탈당한 상태에다가 식민지로 있기 때문에 대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독일은 1905년 대한제국을사조약을 체결당하자 대한제국과 단교(斷交)한 상태였으며 그 이후 한일 강제병합 이후 및 해방 이전까지는 조선과 외교적인 관계를 수립하지 못하였다. 1945년 5월에 나치 독일이 멸망하였지만 조선을 지배하던 일제가 3개월 후인 8월 15일에 패망하게 되고 조선이 독립하게 되었지만 그 때 독일은 나치 정권이 패망하고 연합국의 지배하에 동서독으로 분단된 상태라 나치 정권과는 영원히 외교관계를 맺지 않았다.

나치 독일은 집권기간 중에 한반도를 침략했거나 한민족에게 온갖 해악이나 죄악 등을 끼쳤던 적은 역사적으로 없었지만 조선을 지배하고 있는 일제의 동맹국이었기 때문에 조선의 입장에서는 간접적인 적국 관계에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일제와 함께 나치 독일 역시 일제의 동맹국이자 추축국의 일원이기 때문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던 자격으로 사실상 나치 독일에 대해서도 선전포고를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의 패망으로 직접적인 선전포고는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어쨌든 임정이 연합국편에 섰던만큼 간접적으로는 나치 독일을 종식시킨 입장이 되었다.

7. 일본 제국과의 관계

말이 필요없는 콤비격의 동맹국이었다. 나치 독일과 인류 역사상 최악의 집단의 자리를 겨룰 수 있는 것은 일본 제국이 유일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아직까지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면에서 일본 제국이 더 최악일수도 있겠다. 일제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프랑스까지 침공한 것을 계기로 나치 독일, 이탈리아와 3국 군사 동맹을 맺으며 나치와 이탈리아가 유럽과 아프리카를 침략하는 사이에 이들의 적국인 미국의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하면서 나치의 동맹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분명 동맹국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한 몸처럼 행동하는 혈맹은 아니었다. 오히려 껄끄러운 동맹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나치 독일과 일본은 미국, 영국의 연합국 세력이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있기에 필요에 따라 협력을 한 것일 뿐이고 이념적으로 서로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나치 독일의 입장에서 일본인을 포함한 아시아인들은 인종적으로 슬라브인이나 남유럽인들보다 못한 열등한 족속이었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서 딱히 건드릴 필요가 없었기에 그냥 협력 관계로 둔 것이다. 일본 또한 아시아의 영국, 네덜란드 등의 식민지를 침략하면서 이들과 적대 중인 나치 독일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일 뿐이다. 이런 관계였기에 이름만 동맹이었을 뿐 협력은 거의 전무했다.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고도 할 수 있다. 독일은 소련과의 전쟁이 힘들어지면서 소련과 국경을 접한 일본이 소련의 뒤통수를 쳐서 양면전선을 만들어주기를 바랐으나 일본은 끝까지 소련을 공격하지 않았고 오히려 미국을 공격하면서 미군이 유럽전선에도 참전하게 하여 독일에게 양면전선을 만들어주는 빅엿을 먹인다. 독일 또한 일본에게 딱히 도움이 된 적이 없다. 독일은 오히려 일본의 주적인 중화민국과 상당히 오랜 기간 협력 관계였으며 일본의 항의에 철수시키긴 하나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을 군사고문으로 파견하기도 하고 중화민국군 중 일부 독일제 무기로 무장한 정예부대들은 일본군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힌다. 흔히 생각하는 동맹다운 협력은 찾아볼 수가 없었고 결국 이들은 1945년 5월과 8월에 차례로 최후를 맞는다.

8. 미국과의 관계

사실 1938년 오스트리아 및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강제 병합, 이듬해 폴란드 침공이나 프랑스를 침공하고 그 이후로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까지 나치가 장악하였던 와중에만 했어도 미국은 그 당시 중립을 고수하던 입장이라 나치와는 적대관계로 있지 않았다. 그 당시 미국은 뉴딜 정책과 대공황 등으로 경제와 사회가 혼란에 빠진 상황이라 이 때까지만 해도 2차 세계대전에 직접적으로 참전할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유럽 내부의 문제라는 이유 때문에 별다른 관심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1941년 나치의 동맹국인 일제가 하와이 진주만에 기습을 하게 되자 독일은 이제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하면 일본도 소련에게 선전포고를 해서 독소전을 도와줄 것이라 착각하고 미국에 같이 선전포고를 날려준다. 그러나 일본은 끝까지 소련에게 선전포고하지 않아서 독일만 헛짓을 한 게 된다. 물론 독일이 선전포고하지 않았어도 미국이 곧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날렸겠지만...

그렇게 미국이 영국과 연합국편에 참전하게 되면서 나치와는 이 때를 계기로 완전한 적대지간이 되었으며 1943년 나치의 동맹국인 이탈리아를 굴복시키고 2년 후인 1945년 5월 나치를 패망시킨다.

독일은 미국과 적대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일본의 뻘짓이 없었다면 좀 더 오랫동안 중립 상태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미 미국은 연합국을 경제적으로 어느정도 지원하고 있었고 나치 독일이 유럽을 장악한다면 미국 또한 위협받을 것이 분명했기에 미국은 언젠가는 나치 독일을 저지하려고 들었을 것이다. 물론 미국의 지원이 전혀 없고 일본과 독일이 함께 소련을 공격했더라도 당장 소련이 패배할 수는 있었겠지만 차별적이고 부도덕한 이념의 나치 독일은 이어지는 미국과의 냉전 관계에서 결국에 패배했을 것이다.

9. 영국과의 관계

영국은 처음에는 독일과의 전쟁을 두려워하여 독일의 오스트리아와 체코 합병을 묵인했으나 이어지는 폴란드침공에서는 결국 전쟁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네임 체임벌린 등의 온건파가 물러나고 강경한 윈스턴 처칠이 집권하게 되고 심지어 프랑스마저 점령되면서 영국과 독일의 평화협상 가능성은 완전히 물건너간다.

독일은 소련을 제외한 모든 유럽 국가들을 동맹을 맺거나 점령하거나 친 독일적인 중립으로 두게 되면서 사실상 영국은 유럽 내의 유일한 독일의 적수가 되었다. 그러나 독일의 빈약한 해군력과 영국 본토 항공전의 참패로 독일이 영국을 직접적으로 정복할 가능성은 사라졌고 독일과 가끔 폭격을 당하며 아프리카 전선에서만 붙는 소강 상태로 버티게 된다.

이후 독일이 소련에게 밀리고 전세가 뒤집어지자 미국과 함께 유럽 대륙에 상륙하여 1945년 나치 독일의 멸망에 일등공신 중 하나가 된다.

10. 프랑스와의 관계

과거 나폴레옹의 독일 정복과 더불어 프랑스는 나치와 히틀러에게 있어서는 눈엣가시였다. 처음부터 당장에 침공할 계획은 없었으나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 침공을 무시했어도 언젠가 독일과 프랑스의 싸움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독일과 싸워 절대 밀리지 않을 강한 전력이 있었지만 여러 차례의 이어지는 캐삽질과 이에 대비되는 독일의 뛰어난 참모진의 활약으로 침공 개시 6주만에 항복해버린다.

이후 페탱 원수의 귀국으로 비록 추축국은 아니지만 나치 독일의 간섭을 크게 받는 반-괴뢰국인 비시 정부가 수립되며 북프랑스는 독일에게 완전히 합병되고 남프랑스만을 영토로 보전한다. 이 때의 프랑스는 비록 독일을 탐탁지 못하게 여겼지만 독일에게 완전히 종속되어 있었기에 이런 저런 수탈을 당한다. 그나마 남아있던 남프랑스도 연합군의 침략이 임박하자 독일군의 아틸라 작전으로 왼전히 합병되어버리며 이후 1945년 다시 태어난 프랑스는 비시 정부가 아닌 저항 세력 자유 프랑스의 뒤를 잇는다.

11. 이탈리아와의 관계

같은 유럽 국가였고 원수인 무솔리니가 히틀러에 협조적인 성향이라 사실상 동맹관계를 맺게 되었다. 사실 애초에 히틀러 자체가 무솔리니 짝퉁이며 파시스트는 이쪽이 원조다. 일본이 이름만 동맹국이고 실질적인 협력은 없었던 데에 비해 이쪽은 진정한 동맹국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였다면 이탈리아는 알바니아를 침공하여 그리스를 넘보았으나 그리스의 반격으로 침공이 좌절되자 결국 나치와 히틀러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되고 이는 나치가 동진하여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장악하는 계기가 되고 결국는 독소 불가침 조약으로 나치와 서로 적대관계를 하지 않기로 했던 소련을 나치가 침공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진정한 동맹국이라지만 그 안습의 행보를 보면 통 도움이 된 적이 없으며 전쟁 내내 독일의 발목만 잡아왔다. 불필요하게 그리스를 침공해서 친 독일적인 중립국 그리스가 연합에 가담해버리고 혼자 밀어버리지도 못하고 독일에 손을 벌려 소련 침공에 올인하기도 모자랄 소중한 전력을 분산하게 된다. 아프리카 전선에서도 이탈리아가 영국에게 과도하게 털려버리자 전선 붕괴를 막기 위해 불필요하게 병력을 보내서 뛰어난 지휘관 에르빈 롬멜과 소중한 기갑전력이 아프리카에 발이 묶여버리게 된다.

정작 연합국이 이탈리아에 상륙하자 1943년 연합국에게 제대로 저항도 안 하고 항복하게 되었고 무솔리니는 실각한다. 이후 독일군이 무솔리니를 구출해 아직 독일의 영향력이 있는 북부에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무솔리니를 수반으로 하는 사실상의 괴뢰국을 세우나 이름뿐이었으며 1945년 이 또한 멸망한다.

12. 소련과의 관계

소련과는 어제의 동지 수준으로 독소 상호간 불가침 조약을 통해서 서로간의 무력침공을 하지 않기로 합의함에 따라 이 때까지는 적대관계를 맺지 않았었다.

하지만 유럽 전역을 영국 빼고 사실상 정리한 히틀러가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하면서 인류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전선인 독소전쟁이 시작된다. 초기에는 독일이 승승장구하며 소련은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스탈린그라드까지 밀리게 되어 몇 달 내에 항복할 것처럼 보였으나 독일군의 겨울에 대한 대비가 미미했던 점과 너무 멀어진 보급선으로 보금이 힘들어진 점, 미국의 지원으로 소련의 생산력이 막대하게 올라가버린 점, 점령지에 대한 탄압으로 저항군 활동이 심해진 점 등 여러가지 요인으로 독일은 세 도시 모두 점령에 실패하고 밀리게 된다. 이후 전선은 점점 밀려가며 심지어 미군과 영국군 상륙으로 서부전선까지 시작되어 결국 소련은 1945년 베를린을 점령하고 자신의 손으로 나치 독일을 멸망시킨다.

나치 독일이 비록 영국, 프랑스, 미국 등과도 적대관계였지만 소련과의 적대는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나치 독일은 소련의 점령지에서 인종 차별적인 나치 이념으로 인해 슬라브인들을 아주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학살했으며 이는 무려 2000만에 달하는 소련인 사망자의 수가 말해준다. 상대 인종 자체를 말살하려는 목적의 전쟁은 과거에는 종종 있었으나 근대 이후에는 사실상 독소전이 유일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 등은 고작 100만명도 죽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소련의 독일에 대한 적개심은 종전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있으며 당시에는 말할 필요도 없어 전세가 역전된 후 독일인들은 소련군에게 무참하게 보복당하고 이런 이유로 독일군들은소련군에게 항복하느니 철저 항전을 하며 서방 연합군에게항복하기위해 서쪽으로 퇴각하는 일도 있었다.


13. 관련 인물


13.1. 나치 전문 배우(?)


  • 토마스 크레취만: <스탈린그라드>, <몰락>, <피아니스트>, <작전명 발키리>에서 모두 나치 장교를 맡았다.
  • 리스티안 베르켈: <몰락>, <블랙북>, <안나 성당의 기적>, <작전명 발키리>에서 모두 나치 장교를 맡았다.
  • 티아스 하비히: <에너미 엣 더 게이트>, <몰락>에서 각각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원수와 히틀러의 주치의를 맡았다.
  • 막시밀리안 셸: <철십자 훈장>에서 무능하고 오만한 귀족 장교 슈트란스키 대위를, <머나먼 다리>에서 SS 기갑군단장 빌리 비트리히 SS 대장을 연기했다.
  • 발데마르 코부스: <슈타우펜베르크>, <블랙북>에서 나치 장교를, <작전명 발키리>에서 베를린 경찰청장 헬도르프 백작을 맡았다.
  • 볼프강 프라이스: <지상 최대의 작전>, <대열차 작전>,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안지오의 영웅들>, <머나먼 다리>에서 모두 나치 장교를 맡았다. <롬멜 습격 작전>에서는 에르빈 롬멜 원수를 연기했다.
  • 렉산드라 마리아 라라: <몰락>, <안나 성당의 기적>, <작전명 발키리> 등에서 히틀러의 속기사, 나치의 선전 아나운서, 나치 타자수를 맡았다.
  • 제바스티안 코흐: <블랙북>, <슈타우펜베르크>에서 나치 장교를, TV영화인 <슈페어와 >에서 알베르트 슈페어를 연기했다.
  • 제임스 메이슨: <사막의 여우 롬멜>에서 에르빈 롬멜 원수를, <철십자 훈장>에서 주인공 슈타이너 원사의 상관인 브란트 연대장을 연기했다.
  • 카를 오토 알베르티: <대탈주>에서 SS 장교, <벌지 대전투>에서 마틴 헤슬러 대령의 부하인 디펠 소령, <공군 대전략>에서 공군 참모총장 한스 예쇼넥 상급대장, <켈리의 영웅들>에서 SS 전차장을 연기했다. <롬멜 습격 작전>에서는 롬멜의 부하인 아프리카 군단의 대위 역을 맡았다.
  • 쿠르트 위르겐스: <상과 하>, <악마의 장군>, <지상 최대의 작전>에서 모두 나치 장교를 맡았고, <공군 대전략>에서는 나치 외교관 리히터 남작을 연기했다.
  • 한스 크리스티안 블레흐: <지상 최대의 작전>에서 독일군 제352보병사단 소속 베르너 플루스카트 소령을, <벌지 대전투>에서 마틴 헤슬러 대령의 당번 부사관인 콘라트 상사를 연기했다. <레마겐의 철교>에서는 마을 초등학교 교장 출신의 카를 슈미트 대위 역을 맡았다.

단, 위의 배우 대부분은 연극 및 TV드라마, 영화에서 왕성하게 활동하였거나 현재 활동 중이다. 나치 인물 배역은 이들의 필모그래피에서 일부에 지나지 않음을 유념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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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1939년 9월 3일 영국 국민들에게 한 말이다. 근데 얘네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게 만든 건 댁 아니었수?
  • [2] 제3제국에 대해 쉴드를 치는 사람들은 제3제국의 적이었던 연합국 국가들이 전세계의 식민지들을 착취하고 탄압한 식민제국이라는 점을 들어 식민지 입장에서는 이러한 식민제국과 전쟁을 벌인 제3제국이 흑역사가 아니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애초에 제3제국의 근간인 나치즘이란 것이 어떤 사상인지만 안다면 이러한 말이 얼마나 헛소리인지 알 수 있다. 제3제국이 연합군과의 전쟁을 이겼다면 오히려 연합국보다 더하면 더한 사상 최악의 식민제국이 탄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치의 남미 도주 항목을 보면 남아메리카를 비롯해서, 연합국의 식민지였거나 적대적이었던 국가들은 적의 적은 아군 논리로 나치를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들은 미국에 대항할 국가로써 추축국에 우호적이었던 것 뿐이다. 당장 독일군이 소련에 진군했을 당시 스탈린 치하에서 소련의 압제를 받았던 동유럽 소수민족들은 독일군을 해방자라고 환영했지만,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약탈과 학살 뿐이었다. 만약 제3제국이 승리했다면 그와 같은 장면이 전세계적으로 벌어졌을 것이다. 인류 최악의 흑역사라는 것은 괜히 붙은 수식어가 아니다.
  • [3] 히틀러는 국가사회주의 독일이라는 명칭도 쓰길 바랬다는데, 그렇게 따지면 나치독일이라는 명칭이 맞다!
  • [4] 패전의 결과로 독일 본토 전체와 오스트리아 또한 점령을 겪었다.
  • [5] 나치집권 과정을 직접 겪고 쓴 미국 저널리스트의 윌리엄 샤이러의 명서 "제3제국의 흥망"도 원제는 The rise and fall of the Third Reich이다.
  • [6] 오스트리아는 1955년 재출범 당시 조건이, 독일하고 절대로 통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세계대전을 독일과 2번이나 같이 치르고 2번 다 폭망했는데 헤어지고 싶을 만도 하지.
  • [7] 하지만 겉보기에는 정말 북 체제를 찬양할 목적으로 쓰이지만 않으면 단순 이용 정도는 허용할 듯하는 국가보안법을 정부가 자의적으로 해석해 악용하니 문제. 국보법의 악용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사례인 박정근 사건처럼, 북한을 마구 비웃고 깔 목적으로 북한의 선전자료를 써도 국가보안법은 찬양고무로 걸어 잡아갈 수 있으니(...) 그냥 안 써야 위험하지 않다. 나치 독일은 이미 멸망한 나라고, 북한은 아직도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시시탐탐 한국을 노리는 반국가단체이기 때문에 민감한 자료로 취급되므로 왠만해서는 쓰지 않는게 좋다는 결론이다.
  • [8] 리그베다 위키에서 등재가 금지된 이유는 일단 여기가 민간인이 만든 사설위키이며, 서버가 대한민국에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법의 적용을 우선적으로 받기 때문이다.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는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의 유튜브 주소가 올라와 있다.)
  • [9] 일본과 이탈리아가 군국주의를 선택한 것도 마찬가지다. 독일이나 일본의 침략주의는 윗대가리들의 문제가 아니라 내재되어 있는 폭력성이 이런 위기를 기화로 발현된 것 뿐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를 포함한 모든 나라도 어려웠으나, 결국 대외 침략주의로 나선 나라는 독일, 일본, 이탈리아 뿐이었다.
  • [10] 군비확장선언을 한 지 얼마 안 지나서, 당시 독일군의 무장은 형편없었다. 오죽하면 호전적인 독일군부도 프랑스군의 개입을 우려해 참패할까봐 이 도박을 말리려고 했으니(...)
  • [11] 사실 가짜 전쟁을 보면 히틀러의 예상이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 [12] 사실 이 경우는 '설상가상'이란 표현이 적합하지 않은것이, 3국 동맹의 협약에는 동맹국이 선제공격을 했을 경우에 대한 참전의 의무가 없었다. 따라서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시작했다고 해서 나치 독일이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할 '의무'가 없었으며, 일본 역시 독일이 연합국이나 소련과 싸우는 동안 이들 국가에게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의리'도 없었다. 가만 내버려두면 당분간 미국의 주의를 태평양으로 돌릴 수 있다는 측면에서 오히려 좋은 기회였던 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치독일이 자청해서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으니 이는 설상가상이 아니라 스스로 수렁에 뛰어든 셈이다. 물론 독일은 내심 일본이 미국이 아니라 소련의 뒤를 쳐줄것을 기대했는데 정작 일본은 미국을 공격했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설상가상'이라 할수도 있겠다.
  • [13] 현지 시각으로 오전 2:30분이었는데, 이 때 모스크바는 두 시간 빠른 4:30분이라서 모두 잠들었을 시각이다.
  • [14] 사인을 안 하면 공식적인 항복 문서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라 문제고, 스탈린의 허가 없이 사인하면 서방연합국 주도의 항복 조인식을 인정한 셈이니 둘 다 난처한 입장이었다. 이것으로 스탈린의 노여움을 사면 기본이 굴라그 행 이요, 재수 없으면 숙청(...). 다행히 모스크바에 있던 친구들이 잘 무마해 별 다른 일은 없었다.
  • [15] 항복을 통해 서방연합국과의 전쟁을 일단 끝내고, 동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하여 소련군을 밀어내거나,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를 추진하려던 듯하다.
  • [16] 네덜란드, 프랑스 등 서유럽이 나치에게 점령당하여 받은 피해 또한 극심하지만, 이들은 나치 독일의 정신나간 인종주의적 구분에 따라 그나마 인간 축에 들어서 최악의 파괴는 면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이 처음부터 레벤스라움의 중심지로 설정했던, 자신들의 궤변에 따르면 '독일 민족의 역사적 진출 방향'에 있었던 중동부 유럽이야 말로 본격적인 강제 추방, 집단 학살, 노예화 삼박자의 제노사이드 정책의 중심지가 되었다.
  • [17] 아일랜드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 [18] 실제로 이 점과 반공주의가 프로이센 군부와 나치당의 공통점이었다. 그러나 이걸 빼면 둘의 사이는 매우 나빴다.
  • [19] 단 이건 1차대전 기간까지만 해도 대다수 유럽 국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이었음은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침략을 위한 전쟁의 징병제 자체만으로도 비난받아 마땅하다.
  • [20] 독일의 잔혹행위에는 못미치지만 현재 독일 동부국경 동부(발칸 발트해 연안 도나우강변 폴란드 러시아등지)에 살던 독일계 주민 1300만 중 약 200만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니얼 퍼거슨 著 '증오의 세기'>
  • [21] 실제로 연합군은 소련의 만행에 대해 상세히 기록했고, 몇년 후 냉전이 본격화된 뒤 히틀러를 비난하는 것과는 별도로 소련을 까는데 아주 잘 써먹었다.
  • [22] 이 지역의 상당 부분은 소련이 폴란드에게 넘겨줬으며 여러가지 중대한 문제가 엮어 있어서 독일이 이 지역을 수복할 가능성은 없다.
  • [23] 노령의 프로이트 본인을 직접 건드리진 않았지만 프로이트의 딸인 안나가 체포되어 하룻동안 심문을 받은후 풀려난 일이 있었다.
  • [24] 동상철거에 반대한 라이프치히 시장 카를 괴를데러는 시장직에서 짤렸다가 후에 발키리 작전에 가담한후 발각, 처형당한다.
  • [25] 니얼 퍼거슨 著 <증오의 세기> 참조
  • [26] 진시황이 당대엔 승자였지만 역사의 승자는 아니었다는 의견도 있다. 그럴만도 한게 진시황이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나라는 멸망했고 그 이후 들어선 한나라에서는 당연히 진시황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 [27] 2차대전 당시의 인도의 관점에서 영국이 적이면 나치독일은 적의 적이었다. 근데 외교적 측면에서 보면 적의 적을 친구삼아 공공의 적을 견제하는 게 상식적으로 당연한 거고, 울 전쟁 당시의 핀란드도 적(소련)의 적(독일)과 손잡고 같이 소련을 공격하기도 했다.그리고 일본과 손잡고 인도를 독립시키려던 찬드라 보세만 해도 나치랑 손잡을 준비도 얼마든지 했다. 이들에게 나치나 히틀러는 나쁜 놈이라고 해봐야 우리에겐 영국이 나치이며 윈스턴 처칠이 히틀러와 같다고 하면 뭐라고 할 말도 없다. 처칠이 식민지에서 벌이던 짓거리를 보면 히틀러보단 덜하다고 해도 독가스로 무고한 민간인 학살이나 여러 모로 히틀러급이니까.
  • [28] 상당수 중동 아랍 국가들이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 편을 들었다는 얘기가 있다. 하지만 정작 나치에게 탄압받던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탄압했던 나치의 수법을 배워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써먹는 걸 감안하면 무턱대고 나치를 옹호하긴 힘들 수도 있다.
  • [29] 제3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바로 독립한 게 아니라, 아프리카의 경우 그러부터 15년이나 그 이상이 지난 1960년대가 되어서야 독립한 점을 보면 나치가 제3세계 독립에 도움이 되었다고는 해도 그렇게까지 크게 도움이 되었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근데 만약 나치가 초반에 바로 깨졌으면 60년대에도 독립한 나라들도 그 때 독립 못했을 수도 있는데, 어쨌든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 [30] 민족주의적이며 권위주의적인 요소를 없애버렸다기보다는 봉인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는 의견도있다.
  • [31] 사브라 샤틸라 학살.
  • [32] 물론 실제로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 [33] 예: 아돌프 히틀러 → 알베르트 힐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