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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

last modified: 2015-08-12 04:26:40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일생
3. 작품성향/특징
4. 영향력
5. 여담
5.1. 이름의 유래
5.2. 1,000엔

1. 개요


夏目漱石(なつめ そうせき)

일본의 문학가, 영문학자로 본명은 나쓰메 긴노스케(夏目金之助)이다. 영어 문장 'I love you'를 달이 아름답네요(月が綺麗ですね)라고 번역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1] 다만 이에 대해서는 단순한 도시전설이다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관련 링크 참고.
일본 최초의 근대 문학 작가로, 예전엔 1,000 지폐 도안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일본의 이름있는 문학 평론가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소세키론을 쓸만큼, 일본 현대 문학의 기초를 닦았다고 할 수 있는 작가. 언문일치를 주장한 후타바테이 시메이[2]와 함께 현대 일본 순수문학의 본령인 사소설이라는 체계를 최초로 대중들에게 선보였다.

대표작으로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그 후>, <도련님>, <풀베개>, <산시로>, <행인>, <마음>, <한눈팔기(道草)> 등이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작가지만 현대에 와서 읽어도 세련된 문장으로 널리 사랑받아왔다.

2. 일생

소세키는 현재 도쿄의 신주쿠 구 기쿠이 초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나쓰메 가문은 상당한 명문가였지만, 소세키가 태어날 당시에는 집안이 상당히 쇠락해져 있었다고 한다. 소세키는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자식들이 많아 거지꼴을 못 면한 듯 8남매 중 막내라, 소세키가 태어났을 때 부모님은 이미 연로하였다. 그리고 형제도 많은데다 집안도 넉넉치 못해, 2살때 시오바라 마사노스케의 양자로 들어갔다. 소세키의 생부는 지역 동장·이장 쯤 되는 '나누시(名主)'였고, 시오바라는 그의 동료 나누시였다고. 그러나 소세키가 소학교에 입학하고 몇 년 되지 않아 양부모가 이혼해서, 결국 다시 친부모에게 돌아갔다.

어렸을때 부터 똑똑했던 소세키는 동경제국대학의 등용문이라 여겨지는 대학 예비문(고등학교 해당)[3] 예과에 입학한다. 참고로 소세키는 중학교는 중퇴했다. 도쿄 부립 제1중학교를 다니다가 한문을 배우러 중학교를 퇴학하고 한문학 교육기관인 니쇼학사에 들어간 것. 그러나 '앞으로는 영어를 배워야 전망이 좋다'는 형의 권유에 따라 다시 영어를 가르치는 세이리쓰 학사에 가서 영어를 공부하고 대학예비문에 진학했다고.

대학예비문 예과 시절에 복막염을 앓아 낙제한 적도 있었지만 그 후 심기일전하여 결국 졸업때까지 수석이었다고 한다. 엄친아의 위엄 그 후 대학예비문 예과를 졸업하고 본과 영문과에 진학한다. 예비문 본과시절에 하이쿠 시인인 마사오카 시키와 교우하면서 '소세키'라는 아호를 쓰게되었다고 한다. 그의 영향을 받아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하이쿠에 심취했다. 첫 소설 연재도 하이쿠 잡지에서 했다. 그 후 '당연히' 동경제대 영문과에 진학했다.

1892년에는 분가와 동시에 본적홋카이도로 옮기고(병역기피 설이 유력)[4] 그해 5월 도쿄전문학교 강사로 출강했다.

1893년에 동경제대 영문과를 졸업했고 이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대학강사와 중고등학교 선생을 했으며, 이 때의 경험이 작품세계에 자주 나타난다.

1896년에 중매로 만난 귀족원 서기관장의 딸인 '교코'와 결혼했다.

1900년 문부성의 비 유학생 1호로 영국으로 2년간 유학을 가게 된다[5]. 원래는 임브리지 대학에 등록할 예정이었으나 포기하고 런던에 위치한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문학 강의를 청강했다. 그런데 유학비 부족과 고독감으로 신경쇠약위궤양으로 시달리게 된다[6]. 이후 영국 유학시절에 던탑을 관광하며 느낀 감정을 단편소설 <런던탑[7]>으로 풀어내기도 했다.

영국 유학기간 동안에는 다니던 학교도 휴직중이라서 연봉이 적게 나왔고, 이래저래해서 빚도 많이 졌으며[8] 양부와 유학시기 즈음에는 완전히 몰락해버린 처가까지 부양하는 처지였다. 결국 제1고등학교 강사,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 강사를 겸임했고, 메이지 대학에도 출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와중에 자신의 신경쇠약을 좀 다스리고 잔돈푼도 좀 벌어보겠다고 다른 것을 시작했는데,

문예지에 첫 작품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발표한 것이다. 처음에는 1화의 내용으로 단편으로 기획되었으나 반응이 좋아 계속 연재하게 된다. 처음 작품을 연재한 지면은 하이쿠 잡지인 <<호토토기스>>.[9]

이후 앞에서 언급한 <런던탑> 등 다수의 단편을 발표하고 1906년엔 단편집을 출판함과 동시에 2번째 장편 작품인 <도련님>을 <<호토토기스>>에 발표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7년에 드디어 교직을 전부 사직[10]하고 1년에 100회 가량 연재소설을 쓰는 조건으로 아사히 신문에 전속 작가가 된다.

1909년 대학시절 친구였던 남만주 철도 총재 나카무라 고레미키의 초대로 조선과 만주 일대를 여행하고 여행기인 <만한 여기저기(滿韓ところどころ)>를 아사히 신문에 연재하기도 했다.

1911년에는 문부성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를 통보받았으나 거부했다.

1916년에 지병 악화로 <명암>의 연재를 중단한다. 결국 그 해 12월 9일 위궤양 악화로 인한 내출혈로 사망했다.

3. 작품성향/특징

사실 소설의 대부분이 작가가 강하게 투영되어있는 경향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구샤미 선생이나 <도련님>의 화자는 작가와 동일인물이라고 봐도 무관할 정도로 작가의 삶과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 일단 둘다 화자나 중심인물이 선생이다. 다만, 도련님의 화자는 이과로, 수학선생이다. 그래서 그런지 수업장면이 별로 안나온다.(...) 참고로 <도련님>의 배경은 시코쿠[11].

초기 단편소설인 <런던탑>은 런던유학시절 작가 본인의 경험을 풀어낸 것이다. 자신의 경험을 쓴 것이라면 에세이라고 해야한다는 주장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 런던탑에서 작가 혼자 리처드 3세가 어린 왕 형제를 런던탑에 가둔 일이나 제인 그레이가 처형된 일 등 영국사를 바탕으로 신나게 공상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 런던탑이라는 작품 앞부분에 당시의 궁핍한 유학생활 실태가 묘사되어있다. 안습...그의 작품이 근대화에 비판적인 것도 사실은 이 때 근대화 1번지인 영국에서 개고생한 탓인 듯.

작품생활 전반기 작품과 후반기 작품의 분위기가 정말 크게 다르다. 초기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나 <도련님>처럼 풍자적이고 해학적이며 유머러스한 작품들이 많았다면 후반기엔 그의 대표작인 <마음>을 비롯하여 전부 인간의 내적 갈등을 다룬 무거운 분위기의 작품들이 다수이다. 그래서 초기 작품을 읽고 후기 작품을 읽던가 혹은 그 반대로 읽는다던가 하면 독자로썬 기분이 좀 이상해질 수 있다. 이러한 차이에 대해 학계에선 아무래도 그가 작품생활 초반기에는 이런저런 실험을 해본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있다.

후기작품에선 대체로 삼각관계를 바탕으로, 이 사이에서 내적갈등을 겪는 개인의 심리상태를 다루고 있다. 본격 아침드라마 연애소설 작가인가 싶겠지만, 사실 대놓고 연애하는 장면이 나오는건 아니고 끓어오른 연애 감정과 배덕감 등으로 고뇌하는 개인을 조망한다.

작품에서 대체로 인텔리, 지식인 출신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이는 당연히 그의 출신 탓이겠지만, 어쨌든 연구자들은 소세키를 통해 근대 지식인 유형을 연구하기도 한다.

1908년에 연재한 <산시로>, 1909년에 연재한 <그 후>, 1910년에 연재한 <문>의 세 작품들은 연재 순서 뿐만 아니라 내용, 작중배경이 어느정도 연속성이 있어서 소세키 연구자들 중엔 이 세 작품을 일종의 3연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제목을 밋밋하게 짓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 작품 제목이 장황하지 않고 간소하며, 작품 내용과도 그렇게까지 크게 관련이 없는 것을 제목으로 삼곤 한다. 심지어 이듬해 춘분까지 연재한다고 <춘분 무렵까지>라는 제목을 붙인 작품도 있다.(...)

제국주의 시대의 인물이지만 딱히 작품이나 글 등에서 제국주의나 인종주의 등에 대한 입장이 분명하게 나타나지는 않는 편. <만한 여기저기(滿韓ところどころ)>에서 중국인이나 조선인을 비하하는 발언들이 등장하지만 단편적인 내용들이라서 일본 제국주의를 적극적으로 찬양한다고 보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

4. 영향력

일본 근현대 문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우선 일어일문학과 학생들에게는 영문학과에서의 셰익스피어와 동급의 위치에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국내에 많이 알려진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이나 <소세키의 문학론> 등을 읽어보면 이 사람이 일본 문학에 있어서 어떤 위치에 서있는지 알 수 있다. 일본에서 이 작가의 입지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있는 재미있는 사례로는 나츠메의 소설을 연구한 자가 나츠메 소세키론을 쓰다가 시간이 흘러 몇십년이 지나가 그 나츠메 소세키를 연구한 사람을 연구한 사람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나츠메를 연구한 일대기를 연구하기도 한다.메타메타평론

5. 여담

5.1. 이름의 유래

소세키라는 말은 한자로는 돌로 입을 헹군다는 의미이다. 이는 진서에 나오는 고사를 인용한 것으로, 본래 안빈낙도의 생활을 의미하는, 돌을 베고 시냇물로 입을 헹군다는 의미의 말을 어떤 사람이 잘못 인용하여 시냇물을 베고 돌로 입을 헹군다고 한 것을 남들이 비웃자 시냇물을 베개로 삼는다는 것은 더러운 말을 귀에서 씻는다는 의미이고 돌로 입을 헹군다는 것은 속세의 일을 버린다는 비유라고 우겼다는 데서 나온 말로, 말장난을 하거나 무리하게 억지를 쓰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일종의 말장난을 아호로 삼은 것. 새끼가 아니다. 소세이세키도 아니다.

5.2. 1,000엔

일본은 패망 이후 1963년에 이토 히로부미1,000엔의 모델로 사용했으나 주변국들로부터 맹렬한 반발에 부딪혔다. 하지만 그런 반발을 무시하고 사용하다가 더 이상은 견디지 못했던 것인지, 1984년 1,000엔 지폐의 모델을 이토 히로부미에서 나쓰메 소세키로 변경 조치하였다. 그 이래 나쓰메 소세키는 2004년 말까지 1,000엔의 모델을 하였다. 2004년 11월부터는 1,000엔의 모델이 노구치 히데요로 변경되었다. 문학계에서는 5,000엔에 구치 이치요

1,000엔 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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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영어수업 도중에 학생이 '나는 너를 사랑한다'로 번역하자 저말로 정정해주었다는 설과 소설을 번역할때 직설적으로 할수 없으니 고민하다가 저말로 번역했다는 이야기. 그 시절의 일본에서 밤을 함께할 정도의 남녀 사이(연인)라면 이렇게 번역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비슷한 말로 후타바테이 시메이가 번역한 죽어도 좋아(死んでもいいわ)
  • [2] <뜬 구름>이라는 작품인데, 현대 일본어로 정리한 판본이 아니면 지금 읽기엔 다소 어색해서 읽는데 품이 조금 든다.
  • [3] 소세키가 수학하던 중 제1고등중학으로 개명되었다가 이후 제1고등학교가 된다.
  • [4] 당시 개척을 위해 홋카이도로 본적을 옮기면 징집이 유예되었다고 나와있지만 실제로는 징집면제를 내리는 것에 가까웠다. 당시 일본정부에서는 홋카이도 개척을 촉진하기 위해서 홋카이도 거주민에게 병역면제를 내렸는데 이 규정은 1898년에 폐지되었다.
  • [5] 소세키는 자신의 에세이 문학론에서 '영국유학은 관의 명령이었지 내 의지가 아니었음. 내 맘대로 할 수 있었음 절대로 안 갔지. 나 2년동안 졸라 고생했음.'이라고 적었다.
  • [6] 소세키는 영국 런던 유학중에 신경쇠약, 특히 감시공포증에 시달렸다. 이런 소세키와 만났던 독일 유학생 이케다 기쿠나에(MSG의 원료인 글루타민산을 발견한 화학자)는 일본 정부에 보낸 전보에서 이 상황을 딱 한 마디로 요약했다. "나쓰메 미쳤다." 이후 정부에서 귀국하라고 연락이 오지만, 일단 할 것은 다 마치고 귀국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시기에 얻은 신경쇠약 증상은 귀국후에도 굉장히 오래갔다. 소설 창작 자체가 이 신경쇠약에서의 도피라고도 한다.
  • [7] 당시 표기는 倫敦等. 프랑스-불란서와 같은 맥락. 페르소나 3의 시험 문제 답안으로 '론돈탑'이 나온 바 있다......만 사실 우리말로는 윤돈탑이라 읽는다.
  • [8] 소세키가 유학중에 100엔, 일본에서 머물던 사람들이 100엔, 귀국해서 100엔 정도의 빚이 있었다. 이 당시 목수의 하루 일당이 1엔, 임시 교사의 월급이 8엔이던 시절이다.
  • [9] 참고로 토토기스는 우리말로 '두견새'를 뜻한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해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이라며 성격을 비교한 일화에서 언급된 바로 그 노부나가에게 끔살당하는 새가 호토토기스이다.
  • [10] 소세키의 연봉은 1,500엔으로 당시 기준으로는 엄청난 수준이었다. 이걸 접고 작가로 뛰어든 것이다.
  • [11] 참고로 소세키는 마쓰야마와 구마모토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배경에도 도고 온천이 나오는데 이 온천은 지금도 있다. 그리고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지만 시코쿠마츠야마에는 이걸 가지고 "도련님 경단"이라는 군것질거리를 파는데 맛은 그냥 경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