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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식

last modified: 2015-11-21 23:10:05 Contributors


표정변화.jpg
[JPG image (Unknown)]

우천취소, 류현진, 오리고기를 좋아하고 클락과 추승우를 싫어한다[1]. 표정변화 짤이 매우 인상적인데, 무표정만 나오거나 거기에 가끔 한두개만 환한 표정을 보이는 과는 달리 이쪽은 우거지상도 포함되어 참신한 느낌(...)을 준다.

역대 감독 전적
연도 경기 정규리그 한국시리즈
1991 쌍방울 레이더스 126 52 71 3 6위 -
1992 126 41 84 1 8위 -
통산 252 93 155 4
연도 경기 정규리그 한국시리즈
1995 OB 베어스/두산 베어스 126 74 47 5 1위 우승
1996 126 47 73 6 8위 -
1997 126 57 64 5 5위 -
1998 126 61 62 3 4위 -
1999 132 76 51 5 1위[2] -
2000 133 76 57 0 2위[3] -
2001 133 65 63 5 3위 우승
2002 133 66 65 2 5위 -
2003 133 57 74 2 7위 -
통산 1168 579 556 33
연도 소속팀 경기 정규시즌 한국시리즈
2005 한화 이글스 126 64 61 1 4위 -
2006 126 67 57 2 2위 준우승
2007 126 67 57 2 3위 -
2008 126 64 62 0 5위 -
2009 133 46 84 3 8위 -
통산 637 308 321 8
총계 2057 980 1032 45

1995년 한국프로야구 우승 감독
이광환(LG 트윈스) 김인식(OB 베어스) 김응용(해태 타이거즈)
2001년 한국프로야구 우승 감독
김재박(현대 유니콘스) 김인식(두산 베어스) 김응용(삼성 라이온즈)

쌍방울 레이더스 역대 감독
팀 창단 김인식(1991~1992) 신용균 (1993)
OB 베어스/두산 베어스 역대 감독
윤동균 (1992~1994) 김인식(1995~2003) 김경문 (2004~2011)
한화 이글스 역대 감독
유승안 (2003~2004) 김인식(2005~2009) 한대화 (2010~2012)

제1회, 제2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감독
WBC 개최 김인식(2006,2009) 류중일(2013)

Contents

1. 소개
2. 선수 시절
3. 지도자 시절
3.1. 해태 타이거즈 수석 코치 시절
3.2.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시절
3.3. OB/두산 베어스 감독 시절
3.4. 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
4. 김인식에 대한 비판
5. 국가대표 야구팀 감독
6. 기타
7. 종합적인 평가
8. 향후 행보

1. 소개

대한민국의 야구인이다. 한자로는 金寅植이다.

1947년 5월 1일 서울에서 출생. 배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병대와 한일은행에서 에이스 투수로 활약했으나 어깨 부상으로 26세의 나이에 조기 은퇴했다. 동국대학교 야구부 감독을 거쳐 1986년 해태 타이거즈의 수석코치로 프로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쌍방울 레이더스(1991~1992)-OB 베어스/두산 베어스(1995~2003)-한화 이글스(2005~2009)의 감독을 역임했으며 2009년 이후 2선으로 물러나 KBO의 규칙위원장을 맡고 있다. 국민 감독킬인식이란 상반된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로 평가가 심히 엇갈리는 감독이다. 두산 시절에는 구단 역사상 희대의 흑역사를 극복하고 통산 3회 우승 중 2회 우승을 일궈낸 미라클 두산이란 팀컬러를 만든 명감독으로 요약되지만, 한화 시절에는 부임 초반은 믿음의 야구와 혜성같이 등장한 스타를 기반으로 좋은 성적을 올렸으나 장기적으로는 투수 혹사 및 지나친 노장 선호, 유망주 홀대, 군입대 선수 관리 미비 등 근시안적인 팀 운영으로 최악의 암흑기를 초래시킨 암흑군주로 평가된다. 프로야구 감독으로서의 통산 성적은 2009년까지 980승 45무 1032패 승률 .487.

2. 선수 시절

1965년 실업 야구 팀인 크라운맥주를 시작으로 1967년에서 1968년까지 해병대 야구부에서 군 복무를 마쳤다. 1969년부터 1971년까지는 한일은행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나 해병대 시절부터 악화되기 시작한 어깨 부상으로 인해 25세의 이른 나이에 은퇴했다. 이 당시만 해도 국내에 스포츠 의학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시피하던 시절이라 피칭 뒤에 아이싱은 커녕 반대로 뜨거운 사우나에서 땀을 흘리면서 피로를 풀었다고 한다. 안 그래도 찢어지고 해진 어깨의 모세혈관이 완전히 망가질 수밖에... 한일은행 당시 김영덕, 김응용 등 훗날 프로야구 1세대의 명감독들이 한 팀에서 뛰었으며 이 인연으로 훗날 김응용 감독이 이끄는 해태 타이거즈의 수석코치로 부임하게 된다.

3. 지도자 시절

은퇴 이후 모교인 배문고의 감독을 시작으로 지도자 인생을 시작하여 상문고(1978~1980), 동국대(1982~1985)등에서 감독을 역임했다. 동국대 시절부터 특유의 자율 훈련으로 유명했다. 부임하자마자 동국대 야구부의 악명높은 아침 산길 구보를 없애기도 했다. 이 때 장호연, 한대화, 송진우 등의 선수들을 길러냈다.

3.1. 해태 타이거즈 수석 코치 시절

1986년 한일은행 시절 선배인 김응용 감독의 부름을 받고 해태 타이거즈의 수석코치로 부임하면서 프로야구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 당시 사실상의 투수코치 역할을 겸하면서 전성기 해태의 막강 투수진을 완성했으며, 김응용과 김인식이 함께 일한 1986~1989년 사이에 해태는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이 당시 김인식 코치의 역할은 단순한 코치 이상의 조력자로서, 권위적인 김응용 감독과 선수단 사이에서 분위기를 조절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 OB 베어스에서 해태로 트레이드된 한대화가 은퇴를 결심하고 임의탈퇴 공시되어 산에 칩거하고 있을때 직접 찾아가 그를 설득해서 합류시킨 것도 김인식 수석코치였다.

코치에게도 육두문자를 수시로 내뱉던 괄괄한 성격의 김응용 감독이었지만 유독 김인식 코치만은 상당히 존중하고 때로는 어려워하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호텔 로비의 대형 TV 앞에서 혼자 리모콘을 들고 채널 선택권을 독점하던 김응용 감독 앞에서 태연하게 자기가 보고 싶은 채널로 돌려버리는 유일한 인물이었다고...그런데도 유독 김인식 코치 앞에선 좀처럼 싫은 소리를 못했던 김응용 감독도 미스테리지만. 한일은행 선후배 사이라는 돈독한 관계도 있지만, 자신에게 필요한 능력을 가진 인물에겐 상당한 관용을 베풀었던 김응용 감독의 대인배적인 기질도 작용했던것 같다. 아무튼 이 당시부터 차세대 감독 후보로 일치감치 주목받던 김인식은 1990년 전라북도를 연고로 한 제 8구단 쌍방울 레이더스의 초대 감독으로 낙점되어 감독으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한다.

3.2.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시절


1991년부터 쌍방울 레이더스가 1군 리그에 합류하면서 시즌 초에는 자타공인 꼴찌 전력으로 평가받았으나 첫 해부터 예상 외의 선전, 이 해 52승 71패 3무의 성적으로 LG 트윈스와 함께 공동 6위에 올랐다. 최하위는 2년 연속 꼴찌의 암흑기였던 OB 베어스. 9승 7패 27세이브 whip 0.90 ERA 1.64의 성적으로 신인왕을 차지한 특급 좌완 조규제가 뒷문을 잠갔으며 타격에서는 27홈런 92타점 타율 .262의 김기태가 대활약했다. 조규제의 경우 마무리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6회 이후를 책임지는 중무리로 뛰었으며, 김기태의 경우 시즌 초반 두달 동안 극도의 부진을 겪었으나 김인식 감독이 끝까지 3~4번에 고정시키고 스타팅 멤버에 출장시키면서 시즌 중반부터 포텐셜이 폭발했다. 이 때부터 김인식 감독의 불펜 혹사 성향믿음의 야구라는 장단점이 이미 눈에 띄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1992년에는 전년도 신인왕을 차지하면서 뒷문을 책임졌던 조규제가 혹사의 여파로 7승 7패 8세이브 ERA 3.17로 부진에 빠지면서 투타의 밸런스가 붕괴, 41승 1무 84패 승률 .329의 초라한 성적으로 꼴찌로 추락하고 말았다. 결국 이 해를 끝으로 쌍방울과 재계약에 실패하면서 야인으로 돌아간 김인식은 1994년까지 스포츠신문의 해설위원 등으로 일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엿보았다.

3.3. OB/두산 베어스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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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OB 베어스 항명파동으로 팀 분위기가 완전히 와해되어 버린 OB 베어스는 결국 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윤동균의 후임 감독으로 김인식을 선택한다. 애초에는 선수단 장악에 있어서 강성인 백인천 감독이 유력한 후보였으나 최종적으로 인화력이 있는 김인식으로 선회했다. 그리고 이 선택이 결과적으로 김인식 본인에게나 두산 베어스의 역사에서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니...

1995년 시즌 초반 전문가들의 OB에 대한 예상은 잘 해야 5~6위권 전력이라는 평가였으나, 시즌 초반부터 공격력이 대폭발하면서 수위로 치고 나간 OB는 예상을 깨고 13년만의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투수 쪽에서는 에이스 김상진3경기 연속 완봉승을 포함해 17승 7패 ERA 2.11의 커리어 하이 성적을 올렸고, 2선발 권명철이 15승 8패 ERA 2.47의 성적을 거두었다. 타선에서는 25홈런 101타점으로 최초의 잠실 홈런왕을 차지한 김상호의 활약과 하위타선에 붙박이로 배치된 2년차 고졸 신인 심정수의 21홈런, 그 외에도 14홈런을 친 공격형 신인포수 이도형이나 베테랑 김형석, 이명수 등이 강타선을 구축했다.

이 해 OB는 사실상 대어급의 전력 보강이 전무한 상황에서 팀 케미스트리가 완전히 무너진 팀을 추스르고, 8월 중순까지 무려 6게임이나 벌어져 있던 1위 LG 트윈스와의 승차를 최종전에서 불과 반 경기차이로 뒤집고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차지함으로서 미라클 두산[4]이라는 팀 컬러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이 당시 김인식 감독은 박철순, 김형석, 김상호, 장호연 등의 고참선수들을 적절히 활용함과 동시에 심정수, 정수근, 진필중 등의 신인급 선수들을 육성하여 붕괴 직전의 팀을 다음해 우승으로 이끄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96년에는 5년동안 평균 188.1이닝을 던진 에이스 김상진이 혹사의 여파로 부진에 빠지고 당시 방위 복무 중이었던 권명철장원진이 방위병 출전금지 조치를 받아 공익근무요원으로 남은 기간 동안 복무하게 되어 전력에서 이탈했다. 게다가 김형석박철순 등의 노장 선수들이 노쇠화하면서 급추락했다. 전년도 1위 팀이 꼴찌로 추락하는 유일한 사례를 남기고 말았다. 사실 전력상 꼴찌까지는 하지 않을 수도 있었으나 당시 초특급 신인이었던 고려대학교 포수 진갑용의 2차 1순위 지명권을 놓고 7위 LG 트윈스와 꼴찌 경쟁을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결국 1997년부터 서서히 팀의 세대교체에 들어간 김인식 감독은 10년 동안 3, 4번 타자로 활약한 김형석을 방출하고, 1998년 시즌 후에는 김상호도 류택현과 함께 현금 트레이드로 LG 트윈스에 내보냈다. 정수근, 홍성흔, 심정수, 김동주 등의 젊은 선수 중심으로 개편하면서 1998년부터 두산 베어스를 황금기로 이끌기 시작한다.

성공적인 리빌딩으로 젊어진 두산 베어스는 1998년 4위, 1999년엔 양대리그 승률 1위를 차지했으나 1999년에는 플레이오프에서 한화 이글스에게 4연패를 당하면서 우승을 놓치고 만다. 2000년에는 무려 99홈런 308타점을 합작한 우동수 트리오를 앞세워 드림리그 2위를 차지, 한국시리즈에서는 당시 최강 전력을 자랑하던 현대 유니콘스에게 3연패 뒤에 3연승하면서 한국시리즈 사상 초유의 역스윕을 달성할 뻔했으나 7차전에서 맹활약한 톰 퀸란의 활약으로 아깝게 준우승에 그친다. 2001년에는 전년도보다 떨어진 투수력으로 시즌 3위에 그쳤으나 준 플레이오프에서 한화 이글스를, 플레이오프에서는 현대 유니콘스를 차례로 꺾고 1위팀 삼성 라이온즈까지 한국시리즈에서 4승 2패로 꺾으면서 파란의 우승을 차지한다. 9회 우승에 빛나는 김응용 감독에게 한국시리즈 사상 첫 패배를 안기면서 자신의 두 번째 우승을 차지한 김인식 감독은 비로소 명장의 반열에 올랐으며 이 무렵이 김인식 감독의 야구인생에서도 황금기였다고 할 수 있다.


2001년 두산 베어스의 세 번째 우승이자 본인의 두 번째 우승을 거두고 헹가레를 받는 장면. 이 무렵이 김인식의 야구인생에서 절정기였다.

2002년에는 시즌 중반까지 2위로 순항했으나 월드컵 이후 팀 전반에 4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로 인한 피로감이 덮치면서 5위(승률 .503)포스트시즌 진출도 실패하고 말았다. 이 무렵부터 김인식 감독의 장기 집권에 따른 팀 분위기의 정체와 잇단 주전 선수의 트레이드, 2군 육성의 실패로 인한 팜 시스템의 붕괴 현상이 나타나면서 다음해인 2003년에는 초반부터 고전을 거듭한 끝에 .435의 승률로 7위에 그치면서 몰락하고 말았다. 한때 종신 감독 계약설까지 돌던 김인식은 결국 시즌이 끝난 뒤 두산이 LG, 삼성등과 함께 선동열 감독 영입 경쟁에 뛰어들면서 구단과 불편한 관계에 빠졌고 이 때 해태 시절의 제자인 선동열에게 스스로 자리를 양보하는 형태로 사임하면서 9년 간의 두산 감독직을 끝냈다. 그러나 후임은 당시로선 영 뜬금없는 선택이었던 배터리코치 김경문...

3.4. 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


2004년 한해동안 야구계를 떠나 있던 김인식은 2004년 11월에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계약하면서 다시 한번 현업에 복귀한다. 하지만 그 해 12월 돌연 뇌경색으로 쓰러지면서 입원, 현업 복귀가 물거품이 되는 듯 했으나 의외로 빠르게 회복하면서 예정대로 팀 훈련에 합류한다.
팀 레전드 출신 유승안 감독은 팬들의 환호 속에 부임했지만 비난 속에 경질당했고,(당시 정황을 모르는 '뉴비'팬들의 주장처럼 유승안 체제의 한화는 결코 아름답지 못했다.) 경질 당시인 2004년 한화의 엔트리는 막장 그 자체. 김태균, 이범호, 제이 데이비스가 있던 타선의 중심축은 확실히 살아 있었지만 나머진 아무것도 내세울게 없는 무주공산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투수력과 수비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팀이었다. 그냥 2004시즌 당시의 선수단 스탯만 들춰봐도 답이 나온다. 시즌 7위, 유일하게 밑에있던 8위팀은 전설의 꼴데 시절 롯데 자이언츠였다.

다음은 김인식 부임 당시 한화이글스의 문제점들을 나열한 것이다.

  • 병역비리 파동으로 이영우가 끌려간 이후 리드오프 부재&좌익수 부재로 골머리를 앓았다. 고졸거포 최진행은 변화구대처, 수비에 심각한 문제를 보이고 2군으로 추락한 상태.
  • 야심차게 영입했던 공격형 포수 이도형은 부상 및 부진으로, 두산에 현금을 보태서 보낸 강인권이 아까워 보일 정도의 미미한 활약을 보였다.
  • 2003년 말 마무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황금 독수리' 송지만을 내주고 얻은 권준헌은 부상으로 시즌아웃이 결정된 상황이었다.
  • 4승 15패의 문동환은 2004년 최악의 선발투수였으며, 7.67의 방어율을 기록한 정민철은 은퇴만이 남은 상황이었다. 이러한 한화 이글스 마운드에서 최고의 투수는 39세의 송진우와 루키 송창식밖에 없었다.
  • 그러나 전년도 신인왕 후보 송창식은 혹사에 이은 부상으로 시즌 아웃이 결정된 상황이었다.
  • 불펜투수라고 할 만한, 이렇다 내세울 선수가 없었다.(정말 없다.)그나마 좀 던져주던 마정길은 병역비리로 끌려간 상태였고 박정진도 군대로 갔다.(애초 이 팀이 제대로 된 불펜진을 가진 역사가 송진우 초반 몇 년, 그리고 구대성 밖에 없다.)
  • 이범호가 맡던 유격수, 원바운드 송구의 3루수 재호, 그리고 전설의 임과장 임수민이 버티던 2루, 한화의 내야진은 진정 답이 없었다.

김인식 감독은 이러한 문제점을 차근차근 개선해 나갔다. 놀라운 점은 약점인 투수력을 보강하기보단 강점인 공격력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을 택한 것, 당시 용병 투수를 뽑을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김인식의 선택은 용병타자 두명이었다.(제이 데이비스와 마크 스미스란 백인 외야수, 하지만 스미스의 부상 크리로 인해 틸슨 브리또로 교체.)

또한 특별한 트레이드 없이 팀 내의 한물간 투수를 여럿 재기 시키며 재활 공장장이란 별명을 얻었다. 다음은 그 사례들.

  • 송진우를 빼곤 믿을구석없던 선발진을 송진우-문동환-정민철-김해님-양훈으로 결정짓고 시즌을 시작, 중간에 양훈이 빠지고 최영필이 들어오기도 했지만 시즌 말미까지 로테이션을 유지시키는 뚝심을 보여준다. 선수들도 기대 이상의 성적으로 보답하였다.
  • 5월달이 되자 항명 사건을 일으켰던 젊은 불펜투수 영민을 SK에 넘기고 조원우를 받는 트레이드를 성사, 조원우는 당시 넘쳐나는 SK의 외야자원 때문에 철저히 소외된 상태였다. 조원우는 한화 이적 후 이영우의 빈자리(좌익-리드오프)를 말끔하게 메꾸며 소금같은 활약을 펼친다.
  • 촉망받던 1순위 선수로 입단 -> 은퇴 -> 다시 현역복귀 후 아무런 실적없이 2번째 은퇴를 앞뒀던 지연규에게 대뜸 마무리 보직을 맡기놓고 그게 성공한다.. 이유는 "걔가 공 제일 빨러~"(...) 철저한 1이닝 등판을 시켰으며 이 당시 한화가 구원 상황 자체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시즌 내내 불과 38이닝 20세이브를 기록, 그러나 이것은 구대성 이후 한화이글스 최다 세이브 기록이었다.
  • 불안한 수비의 유격수 이범호를 3루수로 컨버전시켰다. 사소해 보여도 이글스의 운명을 결정지은 일대 사건이었다. 전성기에 비해 확연히 줄어든 수비폭을 보여준 브리또 덕분에 이범호의 3루 수비는 일취월장했고(ㅡㅡ;;), 후에 영입된 김민재와 함께 최강의 3-유간 수비력을 보여줬다.
  • 신경현에 밀려 어정쩡해진 이도형을 지명타자로 고정, 이도형은 2할 중반과 22개의 홈런으로 타선에 적잖은 힘을 보탠다. 당시 한화 중심타선은 공포 그 자체, 3번 데이비스-4번 김태균-5번 이도형-6번 이범호였고, 나중엔 브리또까지 7번에 가세하여 포스트시즌 진출팀다운 위용을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부임 첫해인 2005년 한화가 6월 이후 총체적 부진에 빠진 롯데 자이언츠, LG 트윈스를 제치고 4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데 기여한다. 플레이오프에서 두산 베어스에 스윕패를 당하긴 했으나 이전의 준플레이오프에서 강팀이던 SK 와이번스를 3대 2로 꺾는 이변을 보여 주었다. 이후 한국으로 복귀한 구대성, 특급 신인 류현진의 가세로 2006년 준우승(시즌승률 3위)-2007년 3위의 호성적을 거두면서 한화에서 다시금 지도력을 확인받았으나 이 때부터 젊은 야구 팬들을 중심으로 김인식 감독의 팀 운영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2008년의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2009년의 최하위 추락으로 구단의 신임을 잃고 재계약에 실패하여 사실상 감독으로서의 커리어를 마감하게 된다. 후임 감독은 한대화 삼성 수석 코치.

한화 시절의 김인식은 초기 2~3년동안의 공에도 불구하고[5] 말년에 보여 준 문제점이 너무나 크게 드러났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현재의 젊은 야구팬들에게 그의 감독으로서의 이미지는 대체로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아무래도 인터넷 시대의 야구 붐을 주도하는 20대들에게는 그의 야구가 너무 낡은 것으로 비춰졌고, 결국 프로란 마지막까지 성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래 항목부터는 한화 시절의 감독 김인식에 대한 여러가지 비판 의견들.

4. 김인식에 대한 비판

김인식/비판 항목으로.

5. 국가대표 야구팀 감독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대표팀 감독을 맡아 금메달을 따낸 것을 시작으로, 2006년 제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을 맡아 일본을 두 차례나 격파하는 등 4강까지 오르는 호성적을 내 '국민감독'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2009년 2회 WBC에서 재차 대표팀을 맡아 준우승으로 이끌면서 다시한번 큰 경기에 강한 면모를 과시했다. 그러나 WBC 감독직을 수행한 2~3월이 프로야구의 전지훈련 시즌이었고 이때 한화구단의 훈련을 직접 관리하지 못하면서 2009시즌 한화가 최하위로 추락하는 원인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다만 이 부분은 반론이 있다. 2006년에도 상황은 2009년과 똑같았다. 그럼에도 그 해 한화는 준우승이란 성과를 냈다. 똑같은 상황이었는데도 2006년은 준우승, 2009년은 최하위, 이것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결국 골자는 2009년 WBC 대표팀을 맡느라 한화구단의 훈련을 직접 관리하지 못한게 최하위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2006년에 비해서 2009년은 위에서 지적한대로 WBC 후유증보다는 오히려 세대교체의 실패로 노쇠화가 상당히 진행된 점이 더 크다 할 수 있다. 단적으로 2006년에 현역으로 활약하던 노장 송진우, 구대성, 정민철은 은퇴 직전이던 2009년에도 현역이었고, 나머지 선수단도 그대로였다. [6]

어쨌든 프로팀 감독으로서의 커리어가 사실상 끝난 뒤에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종종 불려나가곤 했고, 2015년 '프리미어 12'에서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어 우여곡절 끝에 대표팀을 우승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6. 기타

모나지 않은 성품과 주변인들에 대한 배려가 좋아서 야구계에선 선후배를 막론하고 따르는 사람이 많으며 TV카메라 앞에서도 늘상 찌푸린 표정으로 앉아있다 선수들에게 잔소리를 늘어놓곤 하지만 뒤끝이 없는 성격이라 선수들이 부담스러워하는 지도자는 아니다. 오히려 두산 감독 시절의 팀 컬러에서 알수 있듯 국내 출신 감독 가운데는 선수들에게 가장 많은 자율을 부여하는 감독이며, 두산의 후임 감독인 김경문은 김인식 감독의 자유방임에 익숙한 팀컬러를 바꾸기 위해 상당한 내부진통을 겪기도 했다.

2004년에 발병한 뇌경색이 회복되는 과정에서 사진을 찍은 결과 뇌경색으로 죽은 세포가 흔적마저 사라지자 의학계에서는 기적이라며 학계에 보고하려 한다는 뜻을 본인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뇌경색 발병 이후 완치되어도 혈관이 막혀 죽은 뇌세포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종종 신문에서 야구 지면이 아닌 헬스&건강코너에서 인터뷰이로 등장하기도. 그래도 여전히 거동이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은 듯하다.

윗짤을 보면 알겠지만 오리고기를 상당히 좋아한다. 그래서 프로야구 매니저에서는 두산과 한화의 듀얼팀컬러 이름이 좋다! 오리고기다(...)[7]

7. 종합적인 평가

위의 장문의 비판에서 알수 있듯이 한화 이글스에서 보여준 여러가지 문제들로 여러모로 한화 팬들과는 좋은 인연으로 남지 못했다. 그러나 전체 커리어로 보면 결코 무능한 감독은 아니며 프로야구 사상 다섯 손가락안에 들어갈 유능한 감독.

해태 타이거즈수석 코치 시절에는 감독과 선수단 사이의 중재역이자 투수 육성의 역할을 맡아 해태왕조의 전성기를 만드는 데 공헌했으며, 감독 생활 초창기였던 1990년대 초중반에는 이광환, 김용희 등과 함께 자율훈련과 분업화로 대표되는 메이저리그식의 신사고(新思考) 야구를 주도했다. 또한 1980년대 박영길이 내세웠던 빅볼 노선[8]을 이어받아 세밀한 작전보다 타자의 장타력을 극대화하는 공격야구를 추구, 관리야구와 스몰볼 중심이었던 한국야구의 스타일 다양화에 공헌했다.

2012년 현재의 시점에서 볼땐 수년간 스몰볼과 작전야구가 대세로 흘러가다보니 김인식감독의 이른바 뻥야구가 마구마구 아니면 힘세고 강한 빠따, 만일 내게 물어본다면 나는 홈런 한국 현실에 안 맞는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김인식 감독은 베어스 시절의 트리오나 이글스의 데이비스-김태균-이범호(-김태완) 등 항상 중심타선 만큼은 파괴력있는 거포들을 키워왔으며, 그 공격력 때문에 대부분의 시즌 동안 평균 이상의 득점력과 장타력이 있는 타선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한국 야구에서 타선관리 능력은 손에 꼽히는 감독임을 알 수 있다.

투수 육성에도 상당한 노하우가 있어서 페넌트레이스 중반에 위기가 닥쳤을 때 이를 커버하는 즉시전력감의 불펜투수를 만들어내는 데 능하지만, 한편으로 키워낸 투수를 너무 과하게 소모시키는 경향이 있어서 이러한 강점을 스스로 깎아먹곤 한다. 투수 출신 감독 치고는 타자를 보는 안목도 좋은 편이나 급격한 세대교체보다는 한두 명 정도의 '찍은' 선수들에게만 집중적으로 기회를 주기 때문에 소위 리빌딩에 적합한 감독은 아니다.

사실 비슷한 연배나 레벨의 다른 감독에 비해 승률이 낮은 편인데(.487), 이건 김인식 감독이 맡았던 팀들이 대부분 재정과 인프라 지원 면에서 최하위권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특히 김인식 시절의 두산은 그룹 구조조정의 여파로 도무지 구단에 돈을 쓸 생각이 없어서 매년 주력 투수와 타자를 팔아 구단 운영비에 보태는 팀이었다. 심지어는 김동주까지 KIA 타이거즈에게 유동훈+현금 30억원으로 트레이드하려다 정보가 새나가서 포기했을 정도였다. 적어도 두산 시절의 김인식은 그런 최악의 조건 속에서 스스로 꾸려낸 팀으로 꾸준한 성적을 거두었다는 점에서라도 평가받아야 한다. 김경문 감독 취임 이후 빠르게 세대교체가 된 두산 팬덤에서는 골수팬이 아닌 이상 새로 팬덤에 가세한 팬들얼빠들이라든지, 꼬꼬마들이라든지 등등은 거의 이 시절을 기억하지 못 한다.

결국 주어진 중하위권 팀의 전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상위권으로 올려놓는 데는 일가견이 있으나 불펜진에 과부하를 주는 성향과 함께 다른 감독에 비해 한발 늦는 세대교체 타이밍[9]으로 인해 그가 맡는 팀은 3년 정도 상위권을 타다가 4~5년차에 급락하는 패턴을 반복하곤 한다. '단기전의 마술사'라는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2000년대 초까지는 오히려 단기전 성적이 상당히 나빴으며[10] 최근의 포스트시즌에서도 마지막 한 고비를 못 넘고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는 경우가 많다.

이건 단기전도 페넌트레이스에서 이어지는 경기기 때문이라고 봐야한다. 긴 페넌트레이스 치르면서 한두놈만 패는 불펜 운용으로 필승조들이 제 컨디션이 아닌 상황이라 전력 자체에서부터 밀리고 시작하기 떄문. 또한 한화에서 2005년엔 SK, 2006년엔 현대를 업셋하고 3년간 플옵에 진출해서 한번도 업셋을 당하지 않는 등[11] 그 나름의 단기전 실력은 보여줬다. 그리고 만들어준 전력을 가지고 치르는 3번의 국가 대표감독에서 단 한번도 실패가 없었다는 것만 봐도(2002 부산아시안게임, 2006, 2009 WBC) 단기전에서의 능력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그가 맡았던 팀들은 대체로 일정 이상의 성적을 보장했으나 1990년대 스타일의 낡은 투수 운용과 한발 늦은 세대교체로 인한 부작용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다만 분명히 할 것은 2003년까지의 김인식은 당대의 다른 감독들과 비교했을 때 투수혹사만으로는 그리 독보적인 존재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 한화-SK의 강병철, 삼성의 서정환, 쌍방울-LG의 김성근, 해태의 김응용이 불펜진을 운용한 기록을 확인해보면 더했으면 더했지 특별한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다만 김인식의 경우 투수 운용의 패러다임이 바뀌기 시작한 2005년 이후에도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12] 결국 안정과 성과만을 추구한 대가는 은 물론이고 본인에게도 말년에 안 좋은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렇듯 말년의 대삽질로 인해 한화 이글스 역대 감독 중 거의 흑역사. 결국 2012년까지도 한대화 감독이 재임기간 내내 리빌딩해야 하는 처지다. 그러나 그 리빌딩조차도 상당히 얇아진 선수층에 선수들 자체가 기본기가 부족한데다 그나마 유망주조차도 좀처럼 성장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 리빌딩이고 자시고 도대체 어디서부터 팀을 손봐야할지 난감할 지경이다.물론 리빌딩이랍시고 감독으로 부임한 한대화도 2012년까지 유망주 하나도 키우지 못한 데다[13] 처참한 경기력으로 인해 엄청나게 욕먹고 있다가 결국 8월에 경질당했다. 다만 한대화 감독은 유망주를 좀 키워놓으면 군대를 보내야 하는 막장 현실 때문에 임기내내 제대로 된 팀 구성을 할 수가 없었다.(신문기사에서도 현실을 토로했다.) 2012시즌 당시 한화 이글스 선수 중에 무려 22명이 군복무중이었다. 거기다가 송광민의 뜬금 시즌 중 입대 같은 프런트의 무능도 고려해야 한다. 킬끼리가 부임한 2013년에도 상황이 더 악화되면 악화되었지, 좋아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은 상황. 588689라는 끝도 안보이는 비밀번호를 찍고 있는 한화 이글스를 보면 그야말로 복장이 터질 지경이다. 김인식이 남긴 유산 이글스의 어두운 현실은 아직 진행중이다.

다른 감독에 비해서도 유난히 원한 맺힌 장문의 비판에서 알수 있듯 한화 이글스의 팬들에게는 지금까지도 많은 비난과 원망의 대상이다. '김인식' 항목을 읽는 야구팬들은 위의 장문의 비판이 주로 2000년대 중반 이후 인터넷 시대 한화 이글스 팬의 관점에서 쓰여졌다는 것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강력한 언더독의 이미지를 구축했던 두산 시절의 팬들과 말년의 몰락을 악몽으로 기억하는 한화 팬들의 평가가 상반되는 감독.

8. 향후 행보

2011년 8월 OBS의 '명불허전'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야구감독 복귀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통산 980승을 거둔 상태에서 불명예 은퇴를 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1000승을 채우고 싶은 바람이 있는 듯. 그러나 감독의 세대교체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작금 야구계에서 기존의 낡은 야구관을 벗어나지 못해 팀을 망쳤던 노감독이 새로운 자리를 찾기는 쉽지 않을 듯 하다. 게다가 한화 감독 이후 1~2년도 아니고 5년을 현장떠나서 쉬어버린터라 실전감각에 문제가 많을게 뻔하다.

전례가 꽤 많다. 2002까지 SK감독하다 3년쉬고 2006년 롯데 감독으로 돌아왔던 강병철은 실전감각에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며 과거의 승부사기질까지 완전히 사라진 모습을 보였고, 7년 쉬다온 김응용 감독은 한화 감독 첫해 어메이징한 투수운용으로 한화팬들의 복장을 뒤집어 놓았다. 김성근 감독이 SK에서 해임된후에 계속 프로팀 감독으로 물망에 오르는건 원체 빠가 많은 인사기도 하지만 독립야구단이긴 하나 현장에 계속 머무르며 감을 유지했다는 점도 크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1군이 아니면 감 떨어지는 건 마찬가지라는 것만 증명했다.

무엇보다 본인 건강 문제도 있고, 2015 시즌에는 초보 감독인 김태형 감독이 두산을 우승시키는 등 이제 더 이상 프로팀 감독에게 있어서 '연륜'이 중요한 덕목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어서 여러모로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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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다만 추승우를 직접 불러들인건 김인식 감독 본인이다, 덕 클락은 최근들어서 여러가지로 안좋은 소문이 사실로 밝혀진게 있으니 어느정도 이해가 간다.
  • [2] 드림리그
  • [3] 드림리그
  • [4] 당시에는 OB였지만
  • [5] 이게 없었으면 한화는 12년간 가을야구 못했다.(2002년~2004년 3시즌 연속 가을야구 실패, 그리고 2008년부터 잘 아시다시피(...)
  • [6] 류현진은 2006년 WBC 이후 정규시즌에서 혜성같이 등장한 케이스라 논외로 친다. 그리고 2009년에는 이미 리그 정상급 에이스로 군림한 상태였다.
  • [7] 이유는 다들 짐작하겠지만 김인식이 OB와 한화의 감독을 맡았기 때문.
  • [8] 박영길은 1991년 태평양 돌핀스 감독 당시 전임 김성근 감독이 선수들에게 주입시킨 컨택 위주의 끊어치는 타법을 전면적으로 뜯어고치려다 실패하고 감독직에서 은퇴했다.
  • [9] 사실 두산 시절 손시헌, 나주환, 이재영, 이재우 등은 김경문이 아니라 김인식 시절에 픽업된 선수들이다. 다만 김인식감독의 노장 선호 성향 상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부랴부랴 신인을 찾는 경향이 있긴 하다.
  • [10] 1998년 LG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2연패, 1999년 한화와의 플레이오프에서 4연패로 연이어 탈락.
  • [11] 물론 업셋은 아니었지만 두산에게 2번다 무기력하게 스윕당한 건 조금 문제가 있긴 하다.
  • [12] 두산 베어스의 경우에도 2003년에 7위로 급추락했으나 뒤이어 부임한 김경문의 과감한 세대교체 작업으로 2004년부터 2010년까지 다시 꾸준한 강팀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하면 한화 이글스는...
  • [13] 아주 못키운 것은 아니다. 최진행, 김혁민, 오선진 같은 경우는 분명히 그의 재임 시기에 성장한 선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전체적인 경기력은 부임 초나 말이나 전혀 달라진게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