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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last modified: 2019-12-10 01:35:38 Contributors


500만원을 25조로 만드는 기적을 행하고 포츈에도 대서특필 되는 등의 활약을 펼쳤으나...


분식회계라는 죄를 지어 17조라는 어마어마한 빚을 가지게 되었다.

대한축구협회 회장
이종환(44대) 김우중(45대~46대) 정몽준(47대~50대)

Contents

1. 개요
2. 에피소드

1. 개요


대우그룹 회장. 대구광역시 태생. 1999년 대우그룹 부도 및 해체 이후 베트남으로 도피했다가 2005년에 귀국하였다.

제주도 출신인 부친 김용하 씨가 대구사범학교(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교장을 하던 시절에 태어났다. 김용하 씨는 이후 경기공립사범학교(현 서울교육대학교) 초대 교장, 제4대 제주도지사를 지냈으며, 도지사에서 물러난 후 서울로 이사했다가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납북되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기고등학교[1]-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친척이 운영하는 무역회사의 바이어를 하다 1967년 독립해 대우실업이라는 회사를 차렸다. 창업 이후 유창한 영어 실력, 제2금융권으로부터 돈을 빌린 뒤 해외 회사에 오퍼를 내고, 계약이 성사되면 그 때 돈을 갚는 독특한 자금동원 능력,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맥[2]과 경기고 인맥 등을 잘 활용해 창업 5년만에 100만 달러 수출을 기록했다. 그러나 전두환, 손영길 등 하나회 소속 장교들과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1973년 윤필용 사건육군보안사령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이후 신군부의 비호를 받아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문(대우전자),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 등을 인수하면서 대우를 10대 재벌로까지 키운다. 기사1 기사2

이후 동유럽민주화 및 시장개방 바람 등에 편승해 세계 경영을 주창하며 구 공산권 국가에 진출해 전 세계로 사업을 확장했다. 대우의 수입차 생산 거점기지였던 폴란드는 지방 공무원의 관용차가 대우차 구종이었고, 수도 바르샤바에는 '세종대왕 고등학교'까지 있다고 한다.

재벌 회장중에서는 언론플레이를 잘하는 축이었고, 1989년 출간한 저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도 사실 언플의 일환이었다는 평가를 있다. [3] 그러나 그룹 이미지 개선을 위한 것으로 보기에는 이 책은 구라 투성이였다. 이 책에서는 자신이 소명의식으로 기업을 하며 대우는 비생산적인 서비스업은 절대로 손 안대고, 자기는 자녀들에게 절대로 재산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식으로 이야기 했다. 실제 김우중은 자신을 전문 경영인이라고 자처하고, 대우 사태 직후에도 2~3년 안에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없이 물러날 것을 채권단에 약속했다.# 이런 언플 외에도 기술은 사오면 된다며 자체적인 R&D를 등한시한 탓에[4] 대우그룹 제품의 경쟁력은 점점 뒤쳐졌고, 결국 1997년 터진 IMF 구제금융사태는 은행 차입을 통해 큰 판을 벌리는 경영 스타일에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쌍용자동차를 추가로 인수하고 팔리지 않는 제품을 해외 법인으로 밀어내어 수출 실적으로 잡는 등 구조조정에 소홀했다[5]. 그 결과 1999년 8월 26일, 어음 만기 사태를 이기지 못하고 대우그룹이 워크아웃을 신청하면서 시망.

그룹 해체 이후 분식회계를 통한 사기 대출 혐의로 수사가 진행되면서 베트남으로 장기 도피하여 잠적하였다가 2005년 귀국하게 되었는데 이 때 공항에 나온 노동자들과 대우 피해자들이 몰려와서 그를 손가락질하거나 비난하였다. 한때 노동계와 시민단체 등로부터 해외 도피자 명의로 공개수배를 받기도 하였다. 2006년 징역 8년 6개월, 벌금 1천만원, 추징금 17조9천253억원(!)의 형을 구형받았고 2007년 말 노무현 대통령의 특사로 사면되었다. 물론 사면은 사면이고, 추징금은 내야한다. 전두환의 추징금이 화제가 된 2013년에는 김우중 추징금을 어떻게 받아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일단 전두환부터 해결되고 난 이후에 본격적으로 진행될 듯하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재기하는거 아니냐? 라는 관측이 있었으나[6] 김 전 회장 본인이 그럴 생각은 없다고 일축했다.# 오히려 추징금 뜯길 판 사실 이런 관측이 나올만한 것이 경제 요직에 과거 대우맨 출신들이 포진하고 있는 것을 둘째 치더라도 김우중 전 대우회장은 전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박근혜 대통령 일가와 상당히 깊은 관계를 이어온 인물이기 때문이다. ### 참조. 또한 10.26 사건으로 박대통령이 사망하고 전두환 정권이 이후 무너진데다 박근혜 대통령의 남동생이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남인 박지만의 마약사건이 터지면서 당시 재벌층은 거리를 두기 시작했던 반면, 박지만의 재기 계기였던 삼양산업(현 EG의 전신)의 인수에 김우중 전 대우회장이 큰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즉 인맥적 상황으로 볼 때 충분히 나올만한 관측인 셈이다.

현재도 김우중 개인의 세금체납액이 상당하다고 한다. 아들이 유령회사를 통해 600억원대 해외 골프장을 소유하고 있다는 기사도 떴다.

2014년 8월 신장섭 가폴 대학 교수와의 대담 형식으로 회고록 '김우중과의 대화'를 출간하고 출판기념회에 잠깐 참석해 김대중 정부 경제관료들과의 악연이 대우를 해체한 주범이라고 주장했다[7]. 참고로 미국에서 김우중급의 [8][9] 분식회계를 지시한 엔론 전 회장 케네스 레이는 24년형을 받았으나, 복역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하지만 이 사람 입장에선 김대중 정부가 자기만 분식으로 넣었다고 억울하신듯.

2019년 12월 9일,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3세.

2. 에피소드

  • 극성 축빠였다. 사원 체육대회에서 축구 경기가 치뤄지면 선수로 몸소 출전해 풀타임을 뛰었다고 하고, 축구단 창단을 위해 당시 잘 나가던 여자 실업배구단까지 해체했다고 한다. 하여간 이렇게 해서 만든 부산 대우 로얄즈는 상당히 잘나갔다. 삼성이나 금성야구을 창단하자 우리도 야구단 창단하자는 간부를 병신 보듯이 바라보며 즉각 거부할 정도였다. 이런 축구 사랑으로 아낌없이 축구에 투자하니 대한축구협회 회장(정몽준 이전에 회장을 맡은 이가 바로 김우중이다)을 역임했다.[10] 안정환의 해외진출도 김우중이 힘을 실어줘서 가능했다. 안정환이 이탈리아에서 씁쓸히 물러났던 이유 중 하나도 대우그룹이 기울면서 스폰서가 끊겼기 때문이다.

  • 한류스타 이병헌의 양아버지이다. 1990년, 아들 선재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스물셋의 나이로 세상을 떴는데, 부인 정희자가 TV에서 이병헌을 보고서 "선재와 닮았다"고 하면서 호감을 느껴 이병헌과 친분을 맺었고, 노조의 반발로 접기는 했지만 이병헌을 위해 신형 세단 아카디아를 선물하려 했다고 한다.

  • 골프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11],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운동을 할 시간이 없을 때는 무협영화를 보면서 스트레스를 풀었고, 훗날 대우전자 내에 비디오사업부를 설치해[12] 20세기 폭스,워너브라더스 등의 작품을 수입하고, 1995년 케이블방송 사업자 선정 때 세간의 예상을 깨고 영화 채널 부문에 응모할 정도였다. 이것이 현 OCN의 모태가 되었다.[13]

  • 경기고 재학 당시 공부를 제대로 안 해서[14] 연세대학교에 진학했다고 한다.[15] 이후 동문회장을 역임했고, 상경대학 건물 신축시 기부금을 내고 (이 때문에 연세대 상경대학 본관의 명칭이 김우중 기념관(대우관)이다),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 부지를 기증하는 등 여러 모로 연세대를 도왔다고 한다.한때 강연을 하려 연세대에 가자 학생들이 몰려와서 악덕 기업주라고 시위를 벌이자 굳은 살이 박힌 자신의 손을 보여주면서 '나는 이렇게 굳은 살이 박힐 정도로 일해서 돈을 벌었다. 학생들 중에 나 정도로 고생한 사람이 있는가?'라고 말해서 학생들에게 강변했다고 한다. 아주대학교나 제대로 도와주지

  • 경영 스타일은 전형적인 독불장군형. 그룹의 모든 일을 자신이 챙겨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이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증언이 "구조조정본부장을 만나보니 그룹 실상조차 제대로 모르더라."(강봉균 당시 경제수석비서관). 심지어 협력사였던 GM에서도 디스를 할 정도였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이래라저래라 지시하는 것은 최악이다. 많은 이들이 과거 대우 회장이 그런 독재자였다고 고백했다. 그는 직원들이 자신에게 충성하는지만 신경쓰다가 회사를 말아먹었다고 한다.'[16]

  • 김대중을 지나치게 믿다가 [17]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 후 재계 총수들과의 첫번째 회의 자리. 내정간섭 수준의 각서까지 요구할 정도로 기세등등한 국제통화기금 하에서 1997년 경제 위기를 빨리 극복하기 위해 과감한 구조조정을 부탁하는 대통령의 말이 있었다. 이후 회의가 끝나고 김우중의 후배인 타 재벌의 총수가 김우중에게 "어떨 것 같습니까?"하고 묻자 김우중 왈 "뭐 별일 있겠어. 다 들어서고 나면 처음엔 저렇게 군기를 잡잖아. 이번에도 별 탈 없을거야."[18] 참고로 당시(1998년) 대우그룹의 모기업이었던 (주)대우 한 회사의 부채만 22조원(...).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 역시 김우중의 현실인식이 안이하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 우리나라에서는 IMF 이후로 이미지가 만신창이가 되어버렸지만 베트남에서의 평가는 현재까지도 매우 높다. 이는 대우가 베트남 진출할 때에 라이따이한에 대한 복지 지원, 현지인 대우 등에 많은 신경을 썼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베트남에서 존경하는 한국인을 꼽으면 김우중을 꼽는 경우가 많다. 베트남에서 한국 대기업의 선전도 사실 대우가 만들어놓은 이미지의 수혜를 받은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고 한다.그래서 베트남으로 도피한건가 실제 이런 방식은 다른 국적기업들도 본 받을 만한 것인데 많은 다국적 기업이 미성년자 노동, 개판인 직원복지, 고용인에 대한 비인간적인 대우 등으로 현지에서 욕을 먹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 1985년, 김우중과 형인 김관중(대창기업 회장), 김덕중(전 교육부장관) 등의 형제들이 모여, 아버지의 고향인 제주에 도서관을 짓고 이를 제주도에 기증했는데, 그 도서관이 아버지 우당 김용하의 호를 딴 우당 도서관이다.[19]

  • 아버지가 납북될 때 둘째 형도 납북되었는데 2003년 제8차 이산가족상봉 당시 둘째 형이 살아있음이 알려졌다. 당시에는 김우중도 도망다닐 때라 만날 순 없었지만.(...) 관련 기사1 관련 기사2

  • 베트남에서 청년사업가 양성 사업에 전념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베트남빠 조선일보 기사 한국경제 기사


헐레벌떡 장님 해외출국 하신다
  • 대우 경영 약 30년동안 해외에 있던 시간이 17년이라고 하며 총 이동한 거리가 954만 km로 지구 240바퀴를 돈 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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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동기생으로 배우 신구, 이종찬국가정보원장 등이 있다.
  • [2] 아버지가 교장일 당시 대구사범학교에는 재학하고 있었다.
  • [3] 다른 언플성 책으로는 도올 김용옥이 (대우측에서 모든 경비를 제공하여) 김우중의 출장에 동행하고 난 후 쓴 기행문인 "대화"가 있다. 이 저서에서 공짜여행을 한 김용옥은 상당히 김우중을 미화했는데, 당시 김우중은 다른 재벌 회장에 비하면 매우 이미지가 좋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지만.. 어쨌든 IMF 이후에 밝혀진 김우중의 비리를 보면 이 책은 김용옥의 흑역사가 되었다.
  • [4] 김우중의 "기술은 사오면 된다"는 개소리는 너무 유명해서 김우중을 까기 위한 레파토리로 자주 사용된다. 다만 자주 사용되는것과 달리 정확한 출처는 없는 편으로 월간 조선에서도 사용하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아들이 기술연구소에 재직했던 점을 감안하면 다소 모호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래봤자 경영학과 나와서 연구소에 떨어진 전형적인 문과 낙하산 인사
  • [5] 1998년 주요 재벌그룹들이 정부에 구조조정 계획을 제출하였는데, 삼성, 현대는 계획을 초과 달성했고 LG, SK도 90% 이상 달성한 반면 대우는 18.5%에 그쳤다고 한다. #
  • [6]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교사로 통하는 이한구 국회의원을 비롯해 안종범, 강석훈 의원 등 대우경제연구소 출신들이 국회 핵심에 있어 그의 재기설이 꾸준히 제기됐다.
  • [7] 다만 일부 극우세력이 제기하는 김우중 회장이 대북사업에 소극적이어서 DJ정부에서 피해를 봤다는 음모론에 대해서는, 자신이 김일성, 김정일을 수십번 만나서 독자적 커넥션을 구축하고 있었다고 밝혀 사실상 부정했다.
  • [8] 이 사람은 매출액만 터무니없이 부풀렸을 뿐 순이익을 부풀린 건 단 20%다. 아예 손해를 이익으로 부풀린 김우중보다는 낫다고 볼 수 있다.
  • [9] 김우중의 분식회계는 매출액이 터무니없이 높게 평가된 적은 없다. 다만 80년대 후반부터 10년간 길게 하다보니 많이 나왔고 게다가 중복오류등 실제 분식액은 10조 안팎이다.
  • [10] 다만 대한축구협회에서 물러난 계기가 좀 거시기한데, 김 회장이 축협에 자금줄을 대 주면 당시 실무진(허 모씨, 신 모씨, 김 모씨 등. 자세한 면면은 검색을 통해 알아보길 바란다.)이 다 떼먹고 일처리 제대로 한 건 하나도 없었다. 이걸 보고 분개한 김 회장이 "내가 두 번 다시 족쟁이들과 상종하면 인간이 아니라 축생이오"라는 명언을 남기고 축구협회 일선에서 손을 뗐다고 한다.
  • [11] 원래 일이 취미다라고 말할 만큼 일 중독자였다. 밥도 초스피드로 폭식 + 과식 스타일로 먹었는데도 소화불량에 걸린 적이 없다고 자랑했다나. 식사도 전투적
  • [12] 우일영상이 이때 만들어졌으며 훗날 '시네마트'라는 브랜드로 독립.
  • [13] 오리온그룹 계열 온미디어로 넘어가 버려서 이름이 OCN이 된건데, 오리온도 CJ에 사업을 다 처분해버려서 현재는 CJ E&M 산하에 있다.
  • [14] 확실한건 아니지만 반에서 거의 꼴찌였다는 얘기가 있다.
  • [15] 웃기겠지만 사실이다. 당시 대입상황은 서울대 전체 꼴찌가 고려대 수석을 차지하던 상황. 이게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위키러들을 위해 첨언하자면, 지금이야 서울대 하위와 고연대 상위가 배치표에서 겹치지만 예전에는 그런 거 없이 서울대 농대까지 다 돌고나서 고려대 법대나 연세대 상대가 다음에 오던 판국이다. 게다가 그 당시에는 서울대와 고연대 간의 대입 전형 방식이 그리 차이도 나지 않아서 지금처럼 내신 때문에 공부 잘하는 외고 출신이 서울대 입시에서 불이익을 입는 경우가 없었다. 따라서 2011학년도 입시에서처럼 연세대 경영대 떨어지고 서울대 경영대 붙는 현상이 애초에 일어날 여지조차 없었던 시절이다.
  • [16] 밥 루츠,빈카운터스,p.311
  • [17] 군사정권 시절 신문에 이름 좀 오르내린다는 기업들은 여당에 몰빵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는 여당 2, 야당 1의 비율로 정치자금을 제공했다고 한다. 그리고 경기고등학교 후배로 대우그룹 임원을 지냈던 박정훈이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국회의원이었다.
  • [18] 공병호, 대한민국 기업흥망사, 해냄, 2011
  • [19] 본적지가 애월읍 하귀리로 되어 있다. 애월읍 하귀리 마을회관도 지어줬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확인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