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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수

last modified: 2015-04-05 20:48:45 Contributors


소방수 시절


투수코치 시절 투수조련만 잘했으면

LG 트윈스 영구결번
No.41

LG 트윈스를 절대 지지않는 팀으로 만드는 것이 나의 할 일이다.
ㅡ 야구는 전설이다 LG 김용수 편中 [1]

이름 김용수(金龍洙)
생년월일 1960년 5월 2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서울특별시
신체 173cm, 72kg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출신학교 홍릉초 - 동대문중 - 동대문상고 - 중앙대
프로입단 1983년 MBC 청룡 1차 지명
소속팀 MBC 청룡(1985~1989)
LG 트윈스(1990~2000)

1990년 한국시리즈 MVP
박철우(해태 타이거즈) 김용수(LG 트윈스) 장채근(해태 타이거즈)
1994년 한국시리즈 MVP
이종범(해태 타이거즈) 김용수(LG 트윈스) 김민호(OB 베어스)

Contents

1. 선수 소개
2. 선수 경력
3. LG 트윈스 코치 1기 시절
4. 해설가 시절
5. LG 트윈스 코치 2기 시절
5.1. 투수코치로서의 논란
6. 중앙대학교 감독 시절
7. 그가 남긴 기록
8. 역대 성적

1. 선수 소개

MBC 청룡, LG 트윈스의 투수. LG 트윈스레전드. 자신을 아끼지 않으며 한결같이 한 팀을 지켜 온 모습에서 따 온 노송이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하다.

통산 100승-200세이브의 기록 보유자.[2] 20세기 KBO 최고의 마무리 투수.[3]

2. 선수 경력

동대문중 1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동대문상고, 중앙대학교를 졸업하고 실업 팀인 한일은행을 거쳐 1985년 계약금 2,300만원에 MBC 청룡에 입단했다. 1984년에는 이상군, 선동열, 류중일 등과 함께 LA 올림픽에 참가했다.

LG 최초의 영구 결번식을 가진 선수(41번)이며 한국프로야구에서 최초의 200세이브-100승을 거둔 선수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등번호 41번은 원래 원하던 번호인 14번을 당시 팀 선배인 광권이 달고 있어서 할 수 없이 뒤집은 것. 그런데 나중에 본인도 맘에 들었는지 이광권의 은퇴 이후에도 41번을 계속해서 달았다.

강속구보다 탄탄한 제구력을 바탕으로 한 선수라는 인상이 있지만, 데뷔 초기에는 직구와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구사하는 강속구 계열의 투수였다. 흑마구를 던지는 선수는 아니었다고 전해진다. 주무기는 데뷔초기에는 슬라이더. 이후 커리어 중반에 반포크볼이라고 불리는 스플릿 핑거 패스트볼을 구사.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이기에 별명은 "노송"이지만 이건 35세 이후에도 꾸준히 활약해서 붙은 별명. 데뷔 초기의 별명은 슬라이더가 날카롭다고 "면도날". LG가 잘나가던 시절에는 '제국의 파수꾼'이라는 별명도 잠시 있었다. 심지어 1998년에는 만 38세의 나이로 18승을 기록하면서 역대 최고령 다승왕에 등극했다.[4] 심지어는 은퇴 후에도 40대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 130km/h대의 공을 던진다는 소문이 있다.[5]

영구 결번식을 가진 선수이지만 은퇴식은 못 했다고 한다. 은퇴식을 하고 싶은데 본인과 구단이 원하지 않았고, 은퇴당시에는 선수생활 더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마지막 해에는 마무리 자리를 장문석에게 넘겨줘서 디시전 자체는 6승 4패 4세이브에 방어율이 5.24였지만, 무려 127이닝이나 던졌다. 구단이 등 떠밀듯이 은퇴만 시키지 않았으면 마무리로서는 아닐지라도 불펜투수로 몇 년 더 뛰었을 수도 있다.[6]


3. LG 트윈스 코치 1기 시절

2000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후 해외에서 코치 연수를 받고 2002년에 돌아와 2004년까지 LG의 2군 코치로 재임했다.

4. 해설가 시절

2005년부터 2006년 까지 KBS SKY 스포츠에서 해설위원으로 있었다. 하지만 해설로서는 좋지 못한 평을 받았고, 특히 2006년 7월 2일에 김동수안영명이 빈볼시비가 일어나자[7], "저건 고의성이 잇는 빈볼이다, 저래선 안된다."라는 말을 남기면서[8][9], 한화팬들에게 많은 욕을 먹었고, 한동안 김용수 위원은 해설을 하지 못했다. 결국 2007 시즌을 앞두고 LG에 코치로 복귀했다.

5. LG 트윈스 코치 2기 시절


김재박 감독의 취임과 동시에 2군 투수코치로 부임했다. 이 시절 사이버 투수 김유선의 투구를 보고 "내가 저 새끼 던지는거 보면 돌아버릴 지경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 뒤 양상문 1군 투수코치가 롯데 자이언츠 2군 감독으로 자리를 옮기자 2009년부터 1군 투수코치를 맡았다.

김용수 코치가 1군을 맡은 2009년에 주전포수인 조인성심수창이 경기중에 말 다툼하는 사건이 일어나게된다. 그런데 이 둘이 말다툼을 할 때도 강하게 말리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자, '얼마나 김용수 코치가 만만하게 보였으면 김용수 코치 보는 앞에서 저랬겠느냐'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외부적으로 이런 모습을 보이자 코치로서의 평가는 더 떨어지게 된다. 결국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겠지만, 시즌 끝나고 윤학길[10]로 1군 메인투수코치가 바뀌었고, 동시에 김용수 코치는 스카우트 팀으로 전보되었다.

5.1. 투수코치로서의 논란

LG 트윈스 팬들이 그토록 그리워하는 레전드이지만, 투수코치로써의 평가는 상당히 나쁘다. 굳이 말하자면 이상군보다 조금 나은 정도이고, 조계현 & 윤학길 등과 동급으로 취급될 정도로 실적이 없다.

프로에서 투수코치로써 꽤 오래 있었는데도 이렇다 할 투수 한 명 제대로 키워내질 못했고 현역 시절의 그 날카로운 변화구를 전수시키지도 못했다. 그 기간도 꽤 긴 편인데 그 시기가 바로 LG의 암흑기였다. 일단 기본적으로 사람 좋고 선수들 편하게 해주는 걸로는 높이 평가받지만 성격 자체가 너무 순하고 선수들을 강하게 채찍질하지 못한다는 게 문제다. 속사정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외부에서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 정도니...암흑기 시절 LG 선수들 노는 거 좋아하는 것도 크게 작용했지만 그리고 심수창,조인성의 말다툼 사건 이후로는 평가가 더 나빠졌고, 이는 해임으로 이어진다.

6. 중앙대학교 감독 시절

스카우트 일을 잠시 하다가 2010년, 모교인 중앙대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했다. 미우나 고우나 LG 트윈스의 레전드이고 대학 감독으로써 지도자로써의 역량을 확실히 레벨업하길 바라는 LG 팬들이 많다. 그러나 어느날 중앙대학교 투수들은 하나같이 월미도 바이킹 제구 를 선보이고... 제발 지도력 업그레이드 좀 좀!

중앙대학교 감독 시절 LG 트윈스에 포수 조윤준을 1차 지명자로 강력 추천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군 면제를 받은 포수라서 원래 고졸 투수나 야수를 지명하려던 LG 스카우터진이 낚여서 냅다 지명했는데, 실질적으로 포수 경력도 짧고 불량스런 태도로 빈축을 산 데다가 패대기 송구를 보였던 조시카 사건까지 터뜨림으로써 LG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김용수에 대한 마지막 정을 떼버린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거기에다가 심판에게 식사비조로 100만 원을 건넨 혐의가 드러나 대한야구협회로부터 3년 간 지도자 자격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2012년 11월, 정식에게 중앙대학교 야구부의 감독직을 넘긴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11]

2014년 12월 16일 롯데 자이언츠의 2군 투수코치로 계약했다는 기사가 나왔으나, 다음 날인 12월 17일에 위의 징계를 이유로 계약을 철회하였다.[12]

7. 그가 남긴 기록

은퇴일자는 2000년 11월 20일로 선수생활 동안 걸어온 발자취는 다음과 같다.

  1. 1985년 MBC 청룡 소속으로 데뷔.(6경기 1승 2패 2세이브) 경기 도중 타구에 무릎을 맞는 중상으로 시즌종료.
  2. 1986년 구원 1위 (35SP).
  3. 1987년 구원 1위 (33SP). 통산 100경기 출장(8.15 잠실 OB전).
  4. 1989년 구원 1위 (26SP).
  5. 1990년 선발 전향 성공(33경기 12승 5패 5세이브).
  6. 1991년 통산 100세이브(8.10 잠실 OB전).
  7. 1992년 부상(좌골신경통) 후유증으로 부진(14경기 5승 4패).
  8. 1993년 마무리 복귀(구원 2위, 32SP, 50경기 6승 2패 26세이브).
  9. 투수 최초 300경기 출장(5.26 잠실 OB전).
  10. 1994년 통산 150세이브(7.28 태평양전). 통산 200세이브 포인트(9.23 삼성전).
  11. 1995년 2년연속 30세이브 투수 최초 400경기출전(6.25 쌍방울전).
  12. 1996년 선발·마무리 겸직. 통산 250세이브 포인트(6.6 잠실 롯데전), 전구단 상대 승리(8.6 롯데전, 시즌 3번째).
  13. 1997년 프로투수 최초 투수 500경기 출전 및 97시즌 4호 전구단 상대 승리(잠실 해태전).
  14. 1998년 개인통산 100승 달성(4.22 잠실 쌍방울전 달성).
  15. 3년 연속 전구단 상대 승리(9.2 잠실 롯데전 달성).
  16. 1998년 역대 최고령 다승왕 기록 달성(18승, 당시 38세)
  17. 통산 1천탈삼진 달성(9.11 잠실 쌍방울전). 시즌 다승 및 승률 1위 (18승, 0.750).
  18. 1999년 통산 200세이브(4.15 인천 현대전). 통산 100승 200세이브는 국내 최초이자[13] 일본에도 기록이 없고 미국에서도 4명뿐인 진기록.
  19. 국내 최초 영구 결번식을 치룸(4.19 잠실 한화전).
  20. 2000년 투수 최초 통산 600경기 출장(7.15 잠실 한화전).
  21. 포스트시즌 통산 최다 경기 출장(28경기).
  22. 통산 613경기에 등판.
  23. 126승 89패 227세이브(방어율 2.98) 1146삼진 기록.

KBO 역사적으로 본다면 최초로 '1이닝 클로저'라는 보직을 확립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전에 마무리라는 개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김용수에 앞서 최초의 전문 마무리 역할을 한 권영호도 있었다. 하지만 권영호의 경우는 7회부터 구원등판하는 경우도 잦았으므로 어떻게 보면 불펜투수로서 보는 시각도 존재하기도 한다. 김용수도 이광환이 부임한 1992년 이전에는 2, 3이닝 이상도 던지는 고전적 의미의 마무리 역할이었다. 1이닝 클로저의 역할은 이광환이 LG의 투수 운용시스템에 중간계투에 역할을 부여하는 분업체계를 도입하면서 확립되었고[14] 1991년, 백골프백인천 말기 선발-중간-마무리를 가리지 않는 무리한 등판으로 지병이 되어버린 좌골 신경통을 얻은 그가 다시 마무리 투수로서 재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김용수 은퇴무렵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 자신의 투구이닝을 철저하게 관리해서 재기할 수 있게 해준 이광환 감독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 내용도 있다.

이러한 1이닝 클로저라는 역할의 확립으로 인해 LG는 흔히 말하는 리드를 빼앗기면 뒤집기 힘든 팀으로 거듭날 수 있었고, 이를 많은 팀들이 모방, 그 후로 선발-중간계투-마무리라는 체계가 다져지게 된다. 하지만 도입초기에는 2~3이닝을 책임지면서 시즌 규정투구이닝을 채우는 경우도 다반사였던 고전적 마무리에 익숙해 있던 한국의 야구팬들에게 매우 생소하 비쳤으며, 9회 1이닝만 던지고 세이브 숫자를 쌓아올리는 모습을 보면서 김용수의 임무를 아주 편안한 임무로 생각하기도 했다. 당시의 LG까들이 김용수를 깔 때 가장 많이 하던 말이 '김용수는 1이닝만 던지고 편하게 세이브를 챙긴다'였다.

하지만 이 역할이 얼마나 어려운 역할인지는 그 후의 세계 프로야구의 흐름을 보면 명약관화. 또 은퇴한 후 2012년까지, 즉 12년 동안이나 그가 보유한 통산 세이브의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그동안 수많은 후배들이, 때로는 1년에 40~50세이브씩 거두면서 5~6년안에 그의 기록을 넘어설 수 있을 것처럼 보였지만 한국에서 통산 200세이브를 거둔 투수는 2012년 시즌 후를 기준으로 그를 제외하면 구대성오승환, 임창용밖에 없다. 물론 구대성과 임창용은 중간에 5년간 해외리그에서 외도를 한 탓도 있지만, 김용수도 때로는 팀의 필요에 의해 선발로 전향할 수 밖에 없었던 시기(1990~1992년, 1997~1998년)도 있었던 것도 고려해야 할 듯.

그의 기록에 도전했던 수많은 도전자들이 3~4년 화려하게 불태우면서 기록에 접근하지만 그 뒤로는 부상과 부진 등으로 5년에 10세이브도 추가하지 못하면서 은퇴하게 되는 상황이 반복되고, FA 도입으로 선수들의 해외진출이 자유로워지면서 김용수의 저주라고 불리기도 하며 몇십년간은 깨지지 않을 기록으로 남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하지만 결국 오승환이 2012년 7월 1일자로 개인 통산 228세이브를 거둬 통산 세이브 기록을 갈아치우며 12년간 변하지 않던 통산 최다 세이브 기록은 다시 쓰여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통산 세이브 기록은 오승환에게 넘겨주고 2위로 내려앉았다.

허나 김용수의 100승 200세이브는 선발-중간-마무리로 분업된 현대 야구의 특성상 앞으로 나오기 힘든 대기록은 틀림없다.[15][16]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면서 선발로는 기본 10승 정도는 해줬으며, 마무리로는 최소 20세이브 이상을 꾸준히 해온 결과 그런 대기록을 만들 수 있었다. 선발투수의 덕목인 완급조절, 지구력, 경기운영과 마무리투수의 덕목인 배짱, 집중력을 두루 갖춘 흔치 않은 유형의 투수였던 것. 이것만 봐도 김용수가 얼마나 대단한 투수였는지 그대로 말해준다.

8. 역대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5 MBC 청룡 6 21⅔ 1 2 2 - 0.333 3.74 22 2 7 14 9 9 1.338
1986 60
(1위)
178 9 9 26
(1위)
- 0.500 1.67
(4위)
128 4 62 74 40 33 1.051
1987 52
(1위)
141 9 5 24
(1위)
- 0.643 1.98
(2위)
109 6 40 71 34 31 1.028
1988 34 98⅔ 3 5 11
(3위)
- 0.375 4.47 118 5 34 51 51 49 1.510
1989 47
(1위)
104⅓ 5 5 22
(1위)
- 0.500 3.19 107 2 32 51 43 37 1.304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0 LG 트윈스 33 149⅔ 12 5 5 - 0.706
(3위)
2.04
(3위)
122 4 41 119 40 34 1.069
1991 41 190 12 11 10
(5위)
- 0.522 2.79 172 5 70 129 71 59 1.232
1992 14 61 5 4 0 - 0.556 5.16 62 5 20 27 37 35 1.295
1993 50
(1위)
75⅔ 6 2 26
(2위)
- 0.750 1.55 53 3 22 60 16 13 0.965
1994 42
(5위)
63⅓ 5 5 30
(3위)
- 0.500 2.56 46 1 11 44 24 18 0.884
1995 48
(2위)
69 4 2 30
(2위)
- 0.667 1.43 59 1 11 44 12 11 1.000
1996 48 130⅔ 16
(3위)
7 9 - 0.696
(3위)
2.82 123 6 39 92 55 41 1.217
1997 28 177⅔
(4위)
12 8 0 - 0.600 3.70 163 16 51 121 82 73 1.159
1998 32 175 18
(1위)
6 2 - 0.750 3.45 176 11 52 116 74 67 1.263
1999 46 68⅔ 3 9 26
(3위)
- 0.250 2.88 70 5 16 48 23 22 1.209
2000 32 127 6 4 4 1 0.600 5.24 142 10 51 85 83 74 1.449
KBO 통산(16시즌) 613 1831⅓
(9위)
126
(6위)
89 227
(2위)
1 0.586 2.98
(8위)
1672 86 559 1146 694 606 1.185

역대수상
연도 수상내용
1990년 한국시리즈 MVP 수상
1994년 한국시리즈 MVP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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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http://pann.nate.com/video/213203091
  • [2] 이는 선발 투수마무리 투수 모든 보직에서 꾸준히 활약을 해줘야 얻을 수 있는 기록으로, 일본에는 존재하지도 않으며 메이저리그에서도 최초의 1이닝 마무리이자 명예의 전당 헌액자인 데니스 에커슬리 등 단 4명만이 달성한, 김용수를 포함해서 세계에 단 6명만이 달성한 대기록이다. 그나마 이 기록에 근접했던 선수로는 200승-190세이브의 에나츠 유타카, 200승-150세이브의 존 스몰츠 등이 있다. 임창용은 2015년 3월 31일 kt 위즈와의 경기에서 세이브를 기록, 김용수에 이어 100승-200세이브를 달성했다.
  • [3] 통산 세이브 227개로 1위였으나 2012년 7월 1일삼성 라이온즈오승환넥센 히어로즈전에서 228세이브를 달성하면서 통산 세이브 2위가 되었다.
  • [4] 시즌 막판에 16승 상태로 다승왕 경쟁을 하고있었는데 감독의 배려로 2일 연속 등판해서 모두 승리를 기록했다. 하지만 주어진 찬스를 놓치지 않고 모두 승리로 연결시킨 부분은 분명 선수의 능력이다.
  • [5] 49세였던 2008년 LG 러브 페스티벌에서 잠실야구장 전광판에 132km/h를 찍었다.
  • [6] 더군다나 후임감독이 이광은과는 정 반대로 베테랑 선수를 신뢰하는 김성근이었다는걸 생각해보면 최소한 2002년까지는 현역으로 뛸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 [7] 이 경기에서 김동수안영명에게 싸대기를 때리자, 송진우가 덕아웃에서 나와 김동수에게 니킥을 날렸다. 그렇긴 한데, 정작 송지만심광호가 맞았다. 안습.
  • [8] 진실은 본인만이 알겠지만, 현역시절 항상 같이 배터리를 짜던 김동수가 빈볼을 맞자 편파적으로 해설한게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 [9] 보통의 해설위원들은 이런 상황에서 눈치껏 "볼이 손에서 빠졌군요."라던가 "당사자들만이 알겠죠" 같이 유연하게 대처한다.
  • [10] 그 전 시즌에는 서울 히어로즈 2군 감독을 하고있었다.
  • [11]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463440
  • [12] 2015년 11월까지 징계가 유효한 상태지만, 한국야구위원회와 대한야구협회 간에는 징계 조항의 상호 규약이 없다. 따라서 아마추어 팀이라면 몰라도 롯데에서 활동해도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는 없었다. 문제는 법규보다 사람들 사이에서 크게 벌어질 논란이지만.
  • [13] 2015시즌에 임창용이 한국에서만 100승 200세이브를 올리면서, 국내에 100승 200세이브를 올린 선수는 역사상 단 2명이다.
  • [14] 사실 메이저리그도 선발-중간계투-1이닝클로저 일명 '라루사이즘'이 등장한 건 1980년대 말 토니 라루사 감독부터이다. 미국도 그전까지는 중무리 투수 운용이 만연했다.
  • [15] 우리 나라보다 야구 역사가 훨씬 오래된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100승 200세이브를 달성한 선수는 아예 없다. 흠좀무.
  • [16] 하지만 일본-미국을 거쳐 국내로 복귀한 임창용이 두 번째로 이 기록을 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