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HRSS

김영덕

last modified: 2015-03-29 11:06:20 Contributors

Contents

1. 프로필
2. 현역 시절
3. 실업야구 지도자 시절
4. OB 베어스 감독 시절
5.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6. 빙그레 이글스 감독 시절
7. 그 외



2013년. 정정하시다.

1. 프로필


이름 김영덕(金永德)[1]
생년월일 1936년 1월 2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교토[2]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출신학교 일본 즈시카이세이고교
선수경력 난카이 호크스 (1956 ~ 1963년)
대한해운공사 (1964년)
크라운맥주 (1965년)
한일은행 (1966년 ~ 1969년)
감독 한일은행 감독 (1969년 ~ 1971년)
장충고 감독 (1977년)
북일고 감독 (1977 ~ 1981년)
OB 베어스 감독 (1982 ∼1983년)
삼성 라이온즈 감독 (1984 ∼ 1986년)
빙그레 이글스 감독 (1988 ∼ 1993년)
엘지 트윈스 2군 감독 (1997년 ~ 1998년)
코치 LG 트윈스 투수 인스트럭터 (1996년)
국가대표 경력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코치 (1971년)
베네수엘라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감독 (1978년)
미국 오하이오 뉴어크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감독 (1981년)

역대 감독 전적
연도 경기
1982 OB 베어스 80 56 24 0
1983 100 44 55 1
통산 180 100 79 1
1984 삼성 라이온즈 100 55 45 0
1985 110 77 32 1
1986 108 70 37 1
통산 318 202 114 2
1988 빙그레 이글스 108 62 45 1
1989 120 71 46 3
1990 120 68 50 2
1991 126 72 49 5
1992 126 81 43 2
1993 126 61 61 4
통산 726 415 294 17
총계 1224 717 487 20



1982년 한국프로야구 우승 감독
프로야구 창단 김영덕(OB 베어스) 김응용(해태 타이거즈)
1985년 한국프로야구 우승 감독
강병철(롯데 자이언츠) 김영덕(삼성 라이온즈) 김응용(해태 타이거즈)

두산 베어스 역대 감독
팀 창단 김영덕 (1982~1983) 김성근 (1984~1988)
삼성 라이온즈 역대 감독
이충남 (1983) 김영덕(1984~1986) 박영길 (1987~1988)
빙그레/한화 이글스 역대 감독
배성서 (1986~1987) 김영덕(1988~1993) 강병철 (1994~1998)

2. 현역 시절

1936년 1월 2일생. 대한민국야구인이자 재일교포 출신이다.(일본명은 가네히코 나가노리이며 개명 후에는 가네히코 히데시게이다.) 현역 시절 별명은 변태(...) 아마 1번항목의 그 변태 맞을거다. 김성근의 야신이나 김응용코끼리 같은 별명과 다르게 좀 그렇다. 그냥 지어낸 것도 아니고 1980년도 초부터 김성근 OB 베어스 감독이 삼성으로 야반도주하듯이 떠난 김영덕 감독을 비하하려고 선수들에게 변태라고 붙였다는데 왜 이런 별명이 생겼는지는 당사자들만 알듯. 당사자한테 물어 봤다간 귀싸대기 실제로 삼성 감독 재임 시절 OB의 모 포수가 삼성 덕아웃을 향해 "변태, 변태"라고 외쳤다가 김영덕 감독의 불꽃싸대기를 맞았다고(...)

지도자로만 유명하지만 1960년대 대한민국 실업야구를 대표하는 투수이기도 했다.[3] 일본 교토 출생으로 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에서 8년간 선수 생활을 하면서 7승 9패 평균방어율 3.57의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차별에 불만을 가지고 28세에 대한민국으로 건너온 이후 그야말로 리그를 초토화시켰다. 실업 야구 데뷔 첫해인 1964년 33경기 255이닝 동안 9실점하여 방어율이 무려 0.32. 이후에도 1967년 54연속 이닝 무실점, 퍼펙트게임 1회, 노히트노런 2회 등 신화적 기록을 쌓았다. 실업 야구 최초의 퍼펙트 게임은 김영덕이 기록하기 이틀전에 순선이 먼저 했다고 한다. 김영덕은 2번째. 여기에 "한국야구사"에서는 슬라이더를 대한민국 야구에 도입한 최초의 인물로도 꼽혔으나 본인 인터뷰에 따르면 본인은 포크볼, 싱커를 최초로 던졌을꺼라고 하고, 슬라이더는 신용균[4]이 최초로 구사했을 꺼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5]

3. 실업야구 지도자 시절

1970년 한일은행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취임한 이후 지도자 생활에 들어가서 장충고, 천안북일고 감독 등을 지냈다. 그리고 1982년 한국프로야구가 개막하자 OB 베어스의 원년 감독으로 취임하여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개막시기 야구계에서 지도자로 명성이 높은 3명을 꼽으면 '빨간 장갑의 마술사'로 불리던 김동엽 원년 해태감독, 국가대표팀을 이끌던 김응용, 그리고 김영덕이 꼽혔다.

김성근 이전에 재일교포출신 야구인으로 본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실력에 있어서는 그닥 차별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이때 이광환, 김응용, 김인식과도 인연을 가지게 되었는데, 김응용과의 악연은 이 때부터 생겼다고 한다 당시 강대중 한일은행 감독의 후임으로 김응용이 낙점된 상황이었는데, 중간에 나이 서열상 선배인 김영덕을 먼저 감독에 앉힌다음, 김영덕의 후임으로 김응용을 앉힌다는 모양새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해가 생겨 김응용 입장에서는 자기 감독 자리를 김영덕이 갑툭튀해서 뺏었다고 생각했다고. 오랜 세월이 흘러 그때에 이야기에 대해 박동희가 김응용과 인터뷰했을 때는 그런 이야기는 잘 모르겠다고 했으나 진실은 저 너머에...

4. OB 베어스 감독 시절


1982년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을 때 두산그룹 회장인 박용곤 회장에게 OB 베어스감독을 제의받아 창단 감독에 부임하게 된다.

당시 창단 멤버 코치로는 타격코치로 이광환, 투수코치로 김성근이라는 ㅎㄷㄷ한 조합이었으며, 선수 구성도 원년도 22연승의 에이스 박철순, 실업야구 홈런왕 김우열, 학다리 신경식, 계형철, 김유동, 윤동균, 김경문등을 앞세워 시즌 첫 개막전 MBC 청룡박철순의 완투승으로 승리한 이래 5월 부터 10승 5패로 단독 선두를 유지하고, 28승 8패로 전기리그를 우승한 이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원년도 첫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이 당시 박철순의 선수 생명과 맞바꿔 얻은 우승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고, 실제로도 박철순은 24승 4패에 224 2/3이닝이라는 무지막지한 이닝과 함께[6]팀을 우승으로 일궈내고 곧바로 부상으로 쓰러졌지만, 정작 당사자인 박철순오히려 자기가 등판하겠다고 한 걸 김영덕 감독이 말렸다.고 한다."김영덕 감독이 혹사시켜 허리 망가졌다?… 완전 오해"

그러나 찬란했던 원년도 우승이후로 다음년도에는 그야말로 성적이 폭망하게 되는데 박철순, 우대영 등 주축 선수들의 부상과 원활하지 못한 신인수급[7]등의 복합적인 이유로 전기리그 6위, 후기리그 5위로 마친뒤 10월 14일 OB 베어스 감독에서 사임한다.

5.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변태영감.jpg
[JPG image (Unknown)]


저녁식샤.jpg
[JPG image (Unknown)]

승률 6할을 찍었으나 한국시리즈 우승을 못해 잘린 감독[8]

1983년 시즌 이후 OB 베어스에서 사임한 김영덕 감독은 원년 한국시리즈에서 자신이 꺾은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으로 부임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주옥같은 기록들이 참 많이도 나왔었다.

삼성 라이온즈에 부임하기까지 에피소드는 후배인 김성근이 삼성행 제의를 받고 상의했을때 곧바로 자기가 사임하고 그 자리를 먹튀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실제로는 당시 삼성의 노진호 단장[9]김영덕,김성근,김진영 세 명에게 제의를 했었다고 하고, 서로가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김성근이 삼성행 이야기를 꺼내자, 역시 삼성행 제의를 받았던 김영덕이 자기가 먼저 달려가 협상한 것. 삼성은 전격 발탁이라고 했으나, 사실은 이전부터 물밑작업을 해왔다고 하고, 두산그룹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기가 찰 일. 당시 두산그룹의 박용곤 회장은 김영덕을 감독으로 선임하기전에 관상까지 일일이따지면서 영입을 하고는 그야말로 극진히 대접했었다, 심지어 자진 사임 이후에는 지도자 유학까지 보내주겠다고 했으나...

어쨌거나, 삼성 감독에 부임한 김영덕은 3년간의 기간동안 각각 1984년 .550, 1985년 .700 1986년 .654 라는 승률로 1회 통합우승, 2회 준우승의 커리어를 올린다. 특히 이중에서도 1984년과 1985년의 이야기가 참 여러모로 화자되는데.

1984년의 경우 포스트시즌에서 롯데와 OB중 상대적으로 쉽다고 판단한 롯데를 골라 고의적인 져주기 게임을 한 것. 당시에는 롯데한테 2연패를 깔고 들어간다는 생각으로, 2진급을 내보냈었다고 직접 시인했다. 허나 일이 꼬여 오히려 2진급으로 리드를 해나가자 노골적인 실책플레이로 갖은 비난을 받았고, 그때에 일은 아직도 미안하다고 밝혔다. 허나 여기에서 그 유명한 말인 비난은 순간이고 기록은 영원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른 것은 다 인정해도 그것은 기자들이 지어낸 말이었다고... 그리고 그렇게 야유속에 올라간 1984년 한국시리즈는 다 아시다시피... 최동원에게 패배했다.

이후 절치부심한 1985년 시즌에서는 전무후무한 전+후기를 통틀어 통합우승으로 프로야구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한국시리즈 자체를 없애버리고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프로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2회 우승을 기록한 감독이 되나...

다음해인 1986년도 무난하게 순항중이었는데 시즌 중 요로결석으로 입원하게 되었다. 그래도 한국시리즈까지는 갔지만 해태 타이거즈에게 깨진 이후 사임하게 된다.
여담이지만 김영덕 이후에 부임한 감독이 롯데 자이언츠의 초대 감독 출신인 박영길로 팀 타율 3할을 달성한 사람이자 외야수 출신 감독 중 가장 성적이 좋은 감독이다. 그래도 우승은 못했지.

6. 빙그레 이글스 감독 시절

콩그레의전설.jpg
[JPG image (Unknown)]

삼성의 감독에서 물러난 후 1년 간 야인으로 지낸 김영덕은 1988년 빙그레 감독에 취임하였다. 당시 빙그레는 창단한지 3년째인 신생 팀으로 1986~1987년 각각 최하위(7위)-6위에 머물렀지만 전임 배성서 감독의 혹독한 훈련으로 키워낸 이상군, 한희민, 유승안, 장종훈 등등의 투타 자원들이 있었다. 여기에 김영덕 자신의 지도력을 더한 빙그레는 그 해 돌풍을 일으키며 정규 시즌 2위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비록 해태 타이거즈에 밀려 준우승에 그쳤지만 그때까진 좋았다...

이후 1989년, 1991~1992년 한국시리즈에 진출[10]하는 성과를 보였으나 그때마다 김응용 감독의 해태 타이거즈에 털렸고, 심지어 1992년 한국시리즈 에선 시즌 3위로 올라온 롯데 자이언츠[11]에게 예상을 뒤엎고 우승을 내주는 대참사를 일으켰다(...). 이때부터 김영덕은 OB 시절 원년 코시 우승의 경력에도 불구하고 콩라인의 이미지를 굳히게 되었다...

그 외 1990년 시즌 중반까지 순조롭게 리그 선두를 달리고 있었으나, 난데없이 터진 "김영덕 종신감독 계약설"로 인해 팀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면서 정규시즌 3위로 추락, 간신히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가 4위 삼성 라이온즈에 발렸고, 게다가 김영덕은 종신계약설로 인해 강병철 수석코치와 사이가 벌어지며 강병철이 이듬해 롯데 자이언츠 감독으로 이적하는 연쇄반응이 벌어지기도 했다.[12]
이 과정에서 김영덕은 이상군, 한용덕, 대영, 김상국 등의 북일파한테 보호막을 쳐 줬으며 강병철은 유승안, 한희민, 장종훈, 송진우 등이 속한 비북일파의 보스와 같은 역할을 해 줬는데 이런 현상은 1990년 준플레이오프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당시 주전 유격수였던 장종훈이 어깨부상으로 출전이 불투명해지자 1~2차전에서는 북일고 출신의 이종호가 스타팅 멤버로 출전했고 장종훈은 1차전에 대타로 나왔을 뿐이었으며 2차전에서는 1차전에서 대주자로 출전한 또다른 북일고 출신 조양근을 김성갑 대신 스타팅 2루수로 출전시킨 바 있었다.
게다가, 2차전에서는 4-2로 앞서던 7회말 선발 한용덕이 솔로홈런을 맞자 빙그레는 투수를 한희민으로 바꿨지만 9회말 연속 솔로홈런을 허용하여 패전투수가 되었는데 북일파 한용덕의 승리를 비북일파 한희민이 날려먹은 셈이 됐다.
그도 그럴 것이 1990년부터는 북일파 김상국을 주전포수로 등용했고 다음 해에는 또다른 북일파 포수 양용모까지 등용했다.
게다가, 1991년에는 그 해 주전 유격수였던 비북일파 황대연이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게임 전 연습 도중 부상을 당해 남은 시즌을 마감하자 한국시리즈까지는 북일파 선수들인 양근 이종호 화동 등을 써먹은 바 있었고 플레이오프 때는 비북일파 유승안을 기용하지 않았다.
그 후, 1993년 이정훈, 장종훈 등 주축 선수의 부상과 에이스 한희민과의 불화가 불거지면서 빙그레는 김영덕 감독 취임 이후 최악의 성적인 정규시즌 5위에 그쳤고, 결국 김영덕은 그 해를 끝으로 빙그레 유니폼을 벗었다. 그리고 빙그레는 한화 이글스로 팀명을 바꾸고 강병철을 신임 감독으로 영입하였다.

이후 김영덕은 1996~1998년 LG 트윈스의 투수 인스트럭터와 2군 감독을 역임하였고, 1998년 LG 트윈스의 2군 감독직을 끝으로 현장을 떠났다.

7. 그 외

위에서 보았듯 그는 분명 크보 역사상 역대급이라 불릴수 있을 만큼 실력 있는 감독이다.[13] 허나 그의 이미지로 기억되어 있는 것은 감독으로서의 역량보다는 바로 기록조작.

아래는 그의 문제의 기록 밀어주기 의혹들.

1. 이만수의 타격 기록을 위해 경쟁자였던 롯데 홍문종을 9연타석 고의사구로 내보냄(1984년). 그런데 사실은 10연타석 고의사구나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9연타석 고의사구 후 비난이 쏟아지자 다음 타석에선 포수가 일어나지는 않고 그냥 볼만 요리조리 보내서 볼넷으로 또 출루시켰다... 포수가 일어나서 손을 벌려야 고의사구니까...

2. 송진우의 다승왕 석권을 위해 한희민을 5회에 내리고 19승째를 만들어줌(1992년).[14]

3. 이정훈의 타격왕 석권을 위해 장효조를 볼넷으로 내보냄(1991년).

4. 유승안의 타점왕 석권을 위해 유승안의 전 타석이었던 대영이 안타를 칠때 당시 3루주자였던 대연에게 홈을 밟지 말라고 지시함(1989년).

이러한 스탯 만들어 주기에 대하여 김영덕 감독은 팀을 위해 엄청난 희생과 훈련을 따라온 선수를 위해 감독으로서 당연히 해줘야 하는것이라고 배웠고, 당연히 그렇게 하는게 맞다고 밝혔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거리낌 없이 이렇게 할꺼라고 한다. 스탯을 만들어 주는데 자신은 한점 부끄럼이 없다고...라오우?[15]


또한 항상 거론되는게 노골적인 져주기 게임.[16]

1984년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전기리그 1위로 한국시리즈에 직행한 상태에서[17], 후기리그 1위를 보다 만만해 보이는 롯데에게 밀어주기 위해서 시즌 막판 노골적인 져주기 게임을 했다.

당시 상황은 OB는 해태와 삼성은 롯데와 2연전을 남겨두고 있었다. 이 때 OB가 해태를 모두 잡고, 삼성이 롯데에게 1승이라도 거둬주면 OB가 후기리그 우승을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OB는 이미 의욕이 없던 해태를 잡고 2승을 먼저 거두었기 때문에 삼성의 선택에 따라서 롯데와 OB중에서 한국시리즈 상대를 고를 수 있었다. 그리고 삼성의 선택은 롯데였다. 문제는 롯데도 이런 분위기를 알아차리고는 최동원을 포함한 주력 선수들 빼고 거저 먹으려고 들었고, 지라고 내보낸 2군 선수들이 너무 잘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조작이 보다 노골적이 될 수 밖에 없었고, 마지막 2차전은 후기리그 우승팀을 결정하는 경기라고 전국에 생중계 되었기 때문에 전국 시청자들이 이 어처구니 없는 작태를 목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황은 더 커졌다.

결국 껄끄러웠던 OB 대신 비교적 약체인 롯데와 한국시리즈를 했지만 최동원한테 박살나면서 우승을 놓쳤다. 그런데 여기는 김영덕 감독의 전임 팀이었던 OB 베어스를 피하기위한 목적이 더해져 있었다. 결국 OB는 저격당해서 탈락. 이후 한국 시리즈 결정에 대한 룰에 또 변경되는 계기가 되었다. 문제는 정작 그래놓고 한국시리즈에선 져버렸다. 최동원 이 혼자 판을 엎은 거나 마찬가지긴 했지만...

명 감독이긴 하지만 위의 사례처럼 '스탯'에 지나치게 집착한 면이 있어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18] 강병철[19], 김성근[20]하고는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사이.

OB 베어스의 원년 우승 이후 1983년 전기 6위, 후기 5위, 종합승률 6위로 최하위로 추락한 성적에 책임을 지겠다며 OB 감독직에서 사임했으나, 물러난 후 불과 열흘만에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당시 삼성 라이온즈에서는 OB의 투수코치였던 김성근을 영입하고자 했으나, 김성근은 김영덕에게 상의했고 김영덕은 김성근의 삼성행을 만류해 실제로 김성근은 OB에 남았다. 그러나 도리어 후배의 기회를 가로채고 본인이 삼성으로 튄 것이다. 그러한 연유로 당시 OB의 선수들과 김영덕 감독 사이에는 악감정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이후 김영덕은 김성근이 전 감독인 김영덕에게 선수단이 인사를 하도록 지시해 삼성 덕아웃으로 찾아와 인사를 하려는 베어스 선수단을 쫓아 내는 등으로 감정의 골이 깊어진다.[21] 그래서 OB 베어스의 고참들이 뭘 모르는 신인 후배를 시켜 김영덕 감독의 별명을 부르며 야유하였고, 김영덕 감독은 이후 OB 덕아웃으로 찾아가 그 선수의 뺨을 때리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출처 : 두산 베어스 때문에 산다)

송진우, 이만수, 이정훈이 감독의 기록조작 때문에 개인 타이틀 하나를 잃는 피해를 봤다.(송진우와 이정훈은 골든글러브, 이만수는 MVP, 예외로 이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은 유승안 뿐.) 그 외에도 자신이 감독으로 재직한 적이 있는 북일고등학교 출신의 선수들을 특히 밀어주어 현재의 '천안북일고 성골'이라 불리는 인맥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이상군, 한용덕 등 일부 선수만을 두고 뭉뚱그려 해석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김영덕 감독의 빙그레에서는 북일 출신의 조양근, 대영보다 비 북일 출신의 김용선, 진상봉 등이 더 많은 기회를 얻은 바 있어 이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다만, 그 유명한 비난은 순간이고, 기록은 영원하다라는 망언을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정작 본인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당시 기자들의 소설인지 아니면 지금에와서 비난이 계속 되니까 말을 바꾼 건지가 의문이었는데, 근래 들어서는 기자의 소설인 것이 거의 확실해지고 있다.

원래 그렇게 활발한 성격이 아니였으며 위의 일들로 인한 비난 때문에 야구판에서 사라진 이후에는 대인기피증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도 2009년 정민철의 은퇴식 날 그의 싸인이 적힌 야구공이 등장하기는 했다. 감독 은퇴이후 공식석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나마 최근에 가끔 야구장에서 야구관람을 하는 모습만 포착될 뿐이었으나, 2012년 7월 21일 대전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올스타전에서 과거 이글스의 레전드들을 초대하는 자리에 등장, 올스타전 시구를 했다.

같은 재일교포 출신에 교토 고향 후배이기도 한 김성근과는 이상하게 사이가 좋지 않았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OB 창단 감독으로 취임할 때 조창수, 강병철 등을 코치로 데려오려 했지만 조창수김동엽의 부름을 받고 해태 타이거즈 코치로 갔고, 강병철은 감독으로 있던 동아대학교 와의 모종의 계약 관계 때문에 모두 불발되며 결국 구단 측의 천거로 영입한 코치는 투수코치 김성근과 타격코치 이광환이었다. 김영덕은 김성근에 대해 대놓고 거부감을 표시했으나 구단의 설득 끝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고 신일고 감독 사임 후 백수 생활 중이던 김성근에게 직접 "프로가 출범하는데 여기 저기 찔러보고 다녀야 일자리를 구할 것 아니냐. 난 너 싫다고 했는데 구단에서 뽑으라 해서 뽑았으니, OB로 오라"고 말할 정도였다(...). 둘은 감독과 투수코치로서 1982년 원년 코시 우승을 차지하는 소득을 올리긴 했지만 물밑에서는 보이지 않는 감정싸움을 지속했고, 1983년 말 삼성 라이온즈 감독 제의를 받은 김성근이 김영덕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상담을 청했는데 김영덕은 그 얘기를 듣고 "거기는 내가 가고 싶은데?" 라고 털어놓았다. 결국 삼성 감독은 김영덕으로 낙점되었고 이에 OB감독을 맡은 김성근과 OB 선수들의 감정이 크게 상하여 1984년 시즌 내내 OB와 삼성은 경기 중 난투극을 수 차례 벌일 정도로 앙숙지간이 되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22]

사실 기록조작과 큰 경기에서의 삽질(..) 때문에 이미지가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통산 승률은 0.596으로 이보다 높은 수치는 .606의 서영무(삼성 창단 감독)뿐이다. 그마저도 한시즌 성적이므로 실질적 페넌트레이스 역대 감독 승률 1위인 감독이다. 여기에 당시의 경기운영능력 등등 차근차근 뜯어보면 그에게는 감독으로서 단점보다는 확실히 장점이 많았던 것은 확실하다.

심지어 빙그레 감독 시절에는 투수 코치를 두 분[23]이나 둘 정도였다.(출처 야구오패)

참고로 빙그레와 삼성 시절의 많고 많은(..) 준우승 때문에 콩라인의 이미지가 많이 남아있다. 그러나 위에 언급되어 있듯이 그는 한국프로야구 원년 우승감독으로 콩라인 멤버는 아니다. 다만 빙그레 시절로 한정하면 콩라인 맞다.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따지면 OB, 삼성(이쪽은 한국시리즈 안열리고 통합우승)도 포함.

위에서 나열한 사례(기록 조작, 특정 출신고 파벌 조성 등)로 인해 실력에 비해 꽤나 저평가받고 있으며 몇몇 야구계의 원로 사이에도 영 좋지 않은 평판을 받는 인물이다. 하긴 자신이 자초한 면도 있으니 할 말은 없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초창기의 프로야구의 태동기를 이끌었던 장본인임은 틀림없으며 나아가 대한민국 야구에 결코 적지 않은 공로를 끼친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여담이지만 프로야구 매니저빙그레 이글스 구단이 업데이트되면서 추가된 감독카드이기도 한데 기존의 감독과는 궤를 달리하는 투수운용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김성근 감독이 불펜 혹사형, 선동열 감독이 중셋마, 김경문 감독이 셋마 야구를 구사한다면 김영덕 감독은 마무리 체력+5의 히든에 힘입어 7회부터 마무리가 올라와서 세이브를 따는 중무리(?) 야구를 한다.[24] 그 덕에 중계와 셋업이 구제불능인 1990년도 이전 덱의 구세주로 조명되고 있다.
----
  • [1] 한국 국적 완전 취득전 일본명 가네히코 나가노리(金彦永徳), 개명 후 가네히코 히데시게(金彦任重)) 김영덕의 말에 따르면 “내 일본명이 가네히코 히데시게(金彦任重)다. 원래 가네히코는 일본인 사이에서 ‘성’이 아닌 ‘이름’으로 쓰인다. 그런데도 아버지가 가네히코를 이름이 아닌 성으로 쓴 건 내가 ‘언양(彦陽) 김(金)씨’의 후손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언양 김씨들은 뿌리를 잊지 않으려고 ‘언양’의 뜻이 포함된 ‘가네히코’라는 이름으로 창씨 개명했다. 조선 이름으로 살았으면 좋았겠지만, 일본에 사는 교포들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바꿔야 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의 뿌리가 어딘지 절대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라고 한다.
  • [2] 김성근과 동향출신이다.
  • [3] 이와 유사한 경우는 같은 시대를 대표한 홈런왕 내야수 김응용이 있다. 그 코끼리 감독 맞다.
  • [4] 역시 재일교포 출신이다.
  • [5] 여하튼 김영덕, 신용근, 김성근 같은 재일교포 투수들이 속구와 커브밖에 없던 대한민국 야구계에 다양한 변화구를 선보이면서 일대 변화를 가져온건 사실이다.
  • [6] 원년도 OB 베어스가 56승을 했는데 그중 24승이 박철순 혼자 일궈낸 것이다. 게다가 당시에는 한 시즌에 80경기 시절. 매경기 3이닝 가까이 던져야 나올 수 있는 이닝이다.
  • [7] 이라지만 이 때 들어온 신인들이 박종훈, 한대화, 장호연등이었다. ㅎㄷㄷ
  • [8] 하지만 김은식이 쓴 '삼성 라이온즈 때문에 산다'에서는 "오랜 객지생활로 가정생활이 피폐해"져 김영덕이 재계약 포기를 선언했고 이후 희망대로 당시 집이었던 천안시와 가까운 곳에 연고를 둔 빙그레 이글스의 감독으로 취임했다는 말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 대목을 봤을 때는 감독직에서 잘린 것이 아니라 김영덕이 스스로 감독 자리를 포기했을 가능성도 있다.
  • [9] 훗날 빙그레 이글스 단장으로도 근무했다.
  • [10] 1989년, 1992년은 정규시즌 우승.
  • [11] 당시 롯데 감독이던 강병철은 평소 김영덕을 아버지 라 부를 정도로 서로 아끼는 사제지간 이었지만, 밑에 설명한 김영덕 종신계약설 때문에 사이가 서먹해졌다.
  • [12] 앞서 말했듯이 원래 강병철 감독은 김영덕 감독과 나름 사이가 좋은 편이었고 87년 10월 입단 당시 '차기감독'을 약속하고 강병철 감독을 데려온 김영덕 감독으로서는 자의든 타의든 자신이 감독을 계속할 경우 강코치와의 의리를 저버리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었는데 하필 재계약을 앞두고 이런저런 말이 나오자 구단 간부는 김영덕 강병철과 함께 회장실을 찾았다. 5명이 모인 자리에서 김승연 회장은 “감독 더 하시오”라고 했다. 이 말이 종신감독으로 둔갑했다.
  • [13] 특히 빙그레 팬들은 별 기대도 안하던 한국시리즈 진출/정규 리그 우승이라는 영광을 가져다준 김영덕을 굳이 깔 이유까지는 없다. 까면 한국시리즈 상대팀당시 그 팀 감독을 까지 다만 져주기 게임과 기록 밀어주기 때문에 이미지가 많이 안 좋은 관계로, 마냥 칭송하기는 좀 그런 면이 있어서 보통 왕년 리즈시절의 명감독 정도로 생각하는 분위기.
  • [14] 한희민이 선수협과 관련하여 구단의 미움을 받은 탓도 있다.
  • [15] 1번의 홍문종 고의사구와 3번의 장효조 볼넷은 자팀 선수의 기록을 위해 남의 팀 선수 기록을 망친거니까 그렇다 쳐도, 2번과 4번 사례는 어떻게 설명할 셈인가? 송진우, 유승안은 팀을 위해 희생한 이글스 선수고 한희민, 전대영은 아니란 말인가? 얼핏 그럴싸한 말 같지만, 따지고 보면 결국은 궤변에 불과한 셈. 어떻게 보면, 김영덕 감독이 업적에도 불구하고 저평가를 피할 수 없는 이유를 증명해주는 말이기도 하다.
  • [16] KBO 초창기의 명장이며, 한국 야구의 발전에 공헌한 바가 적지 않은 인물인 김영덕 감독이 팬덤에게 굉장히 박한 평가를 받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다.
  • [17] 당시는 전후기 리그로 나누어서 전기리그1위와 후기리그1위가 한국시리즈를 했다. 1985년 삼성처럼 한팀이 전후기 1위하면 한국시리즈 없이 바로 통합우승.
  • [18] 정확히 말하면 단순히 스탯과 승리에 집착했다고 까이는 것은 아니고, 승리지상주의에 더해 동시에 그것을 위해 노골적인 져주기 게임까지 감행했던 전적 때문에 박한 평가를 받는 것이다. 당장 김영덕과 비교했을때 승리지상주의적인 면에서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김성근김응용만 봐도 이래저래 많이 까이긴 하지만 최소한 김영덕 수준으로 단순히 업적을 폄훼하는 정도를 넘어서 아예 없는 사람으로 치는 수준의 무시를 당하지는 않는다. KBO 역대 원탑 포수 논란에서 이만수박경완으로 많이들 싸우지만, 약갑용은 아무도 언급하지 않고 그냥 없는 사람, 논외로 치는 구도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 [19] 앞서 말했던 종신계약설로 인해 불화가 생겨 결국 롯데 감독으로 돌아섰고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 김영덕을 이기자 구단프런트는 강병철 감독과 바둑을 두는 등 책상 빼버리기김영덕 감독에게 나가라는 압박을 줬다. 근데 강병철 감독은 한화에서 혹사까지 동원한 나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승은 고사하고 5년동안 가을야구를 2번밖에 못했다.....(3-6-4-7-7) 거기에 승률은 1할 가까이 폭락... 김영덕 감독 시절에 비한 이 초라한 전적에 빙그레-한화팬들은 충공깽에 빠졌고 강병철은 1998년 중간에 한화 이글스 감독에서 경질당했다.
  • [20] 김영덕 감독의 후임으로 OB감독으로 들어섰고, 1984년 OB저격으로 롯데 밀어주기 당시 OB감독이기도 하다.
  • [21] OB 선수단은 김성근 감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영덕 감독을 대놓고 무시했다.
  • [22] 이 와중에 OB감독으로 승진한 김성근과 수석코치 이광환도 야구관의 차이로 여러차례 충돌하였고, 결국 이광환은 수석코치직에서 물러나 일본미국을 오가며 3년 간 장기 연수를 떠났다. 이후 돌아와서 김성근을 밀어내고 OB감독을 차지한다. 1982년 원년우승을 이끌어낸 김영덕-김성근-이광환 3자가 서로간에 감정의 골이 생겨서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 것이다.
  • [23] 좌완, 우완 따로 두었다.
  • [24] 이전에 이것과 그나마 유사한 형태는 제리 로이스터 감독의 대타인 외국인 감독이었는데, 이 경우는 타격에 힘을 실어주기 때문에 선발은 자력으로 버텨야 했다. 그리고 이 경우는 선발이 셋업이 나올 때까지 버티는 거라서 선발 7이닝-셋업 1이닝-마무리 1이닝의 형태가 많았다. 즉 선발에 대한 부하가 굉장히 크고, 적어도 셋업은 갖춰줘야 밥값을 한다. 대신 장타가 강화되기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