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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연

last modified: 2015-02-05 15:00:56 Contributors


뚜쉬!


군산상고 3학년 김봉연 선수 2011년 군산상고 VS 경남고 30주년 기념 리매치 인터뷰에서.

김봉연(金奉淵, Bong-Yeoun Kim)
생년월일 1952년 1월 13일
출신지 전라북도 군산시
학력 군산상고-연세대
포지션 내야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2년 해태 타이거즈 창단멤버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1982~1988)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27번(1982~1988)
창단 멤버 김봉연(1982~1988) 이호성(1990~2001)

1983년 한국시리즈 MVP
김유동 (OB 베어스) 김봉연(해태 타이거즈) 유두열 (롯데 자이언츠)

1986년 한국프로야구 지명타자 골든글러브 수상자
김용희(롯데 자이언츠) 김봉연(해태 타이거즈) 유승안(빙그레 이글스)

1982년 한국프로야구 홈런왕
김봉연(해태 타이거즈) 이만수(삼성 라이온즈)
1986년 한국프로야구 홈런왕
이만수(삼성 라이온즈)
김성한(해태 타이거즈)
김봉연(해태 타이거즈) 김성래(삼성 라이온즈)

해태 타이거즈의 초대 레전드이자 프랜차이즈 스타

Contents

1. 소개
2. 유년기
3. 실업야구 시절
4. 해태에서의 활약
5. 은퇴후
6. 기타

1. 소개

해태 타이거즈의 선수, 코치. 현 극동대학교 홍보처장 겸 교수. 전설의 홈런왕! 그리고 한때 잘나가던 보해 소주 모델!!! 백넘버는 27번인데, 김봉연이 은퇴한 후 김봉연이 타격코치가 되어 키운 이호성이 27번을 썼다. 그런데 이호성의 흑역사 때문에 이 번호는...[1] 그래서 김봉연은 이호성 살인사건때 등번호를 물려줄 만큼 자기가 아끼던 후배가 그 지경이 된 걸 어이없고 속상하다고 표현했다.

2. 유년기

어린 시절 몸이 아파서 학교를 몇년 늦게 입학했다고 한다.[2] 중학교 2학년 때[3] 야구를 시작했지만, 타고난 운동신경[4]과 부단한 노력으로 군산상고연세대 야구부의 붙박이 4번타자로 활동했다.

3. 실업야구 시절

1970년대 실업야구에 뛰어든 그는 스타급 신인으로서 대단한 활약을 펼쳤고, 이후 내내 실업야구의 거포이자 스타플레이어로 실업야구를 대표했다.[5] 그래서 실업팀 상업은행 야구부에서 활동하다 한국화장품 야구단으로 옮겼고 1982년에 프로야구가 출범하자 31세의 나이로 고향팀인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한다.

당시 야구 선수들의 평균 은퇴 나이가 30대 초반임을 감안하면 거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프로계에 뛰어들었는데 해태에서의 활약은 한 마디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였다. 말할 필요 없는 레전드다.

4. 해태에서의 활약

프로야구 원년 해태 타선은 주로 (1번 김일권), 3번 김성한, 4번 김봉연, 5번 김준환, 6번 김종모가 출전했는데, 선수의 대부분이 김 씨라서 김씨왕조라고 불렸으며, 위의 김 씨들은 모두 일발 장타가 있었다. 당시 코칭스탭간의 불화와 모기업의 지원 부족, 그리고 총원 18명의 초미니 선수단 으로 해태는 4위에 그쳤지만, 해태의 3,4,5번은 공포의 클린업 트리오였다. [6]

김봉연은 4번 타자로서 22개의 홈런으로 원년 홈런왕에 등극했다. 원년 홈런왕 레이스에서 1위를 하고 있었으나 갑자기 부상당했고, 당시 백인천이 계속 이를 추격하자, 부상이 완쾌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타를 자청, 홈런을 쳐냈다. 이때 절룩거리면서 베이스를 돈 것은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1983년 MVP 수상장면.

30대 중반의 나이에도 떠오르는 신예 이만수와 최초의 통산 100개 홈런 경쟁을 벌이지만, 1983년 올스타 브레이크 기간에 여행을 다녀오다 큰 교통사고를 입어서 선수생활을 위협받는 부상을 입었다. 한 달 만에 병상에서 일어나 다시 홈런레이스에 뛰어들지만, 아무래도 교통사고 후유증 때문에 1986년 이만수가 먼저 100홈런에 다다른다. 김봉연은 이를 만회하기라도 하듯이, 그 해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한다. 이 교통사고로 인해 코 밑부분을 무려 300바늘 이상을 꿰매게 되자 상처를 가리기 위해 콧수염을 길렀다. 수염을 기른 운동선수가 생소하던 시절 그의 콧수염은 대단한 화제를 불러 일으켰고, 상처가 아문 후부터 면도를 하게 되어 오랫동안 볼 수는 없었지만 콧수염은 김봉연을 상징하는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안녕하세요. 배철수입니다.[7]

아이러니하게도 콧수염을 깎은 84시즌과 85시즌은 2할대 초중반의 타율로 공갈포로 전락했다. 삼손인가? 하지만 그 후 86년 생애 두 번째 홈런왕을 차지했다. 이 때 나이 35세. 당시로보면 평균 은퇴나이가 한창 지난시기였다. 1989년 시즌 후 은퇴하고 코칭스탭이 되었다.

5. 은퇴후

그 후 1990년부터 1994년, 1997년부터 2000년까지 해태의 타격코치로 일하다가[8] 코끼리 감독삼성 라이온즈로 옮기면서 차기 감독 0순위로 거명되었다. 이 당시 2군 감독이었던지라 어느정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프런트와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에[9] 후배 김성한이 감독직을 맡으면서 감독직은 물건너 갔다. 이후 야구계를 떠나 교육자로서 투신했고, 2001년부터 극동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

6. 기타

  • 야구선수 중에서 보기드문 석사.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하루에 100개씩 영어단어를 외우고 잠자리에 든다고 하고, 대학교 시절에는 교직과목을 이수하고 체육교사 자격증까지 땄다고 한다. 이 후 연세대 이우주 총장의 "석사과정도 밟으라"는 격려에 고무되어 석사 학위까지 따 냈다고. 특히 프로생활 중에도 경기가 없을땐 항상 수업에 참여했다니 흠좀무.

  • "아기공룡 둘리"에 '김몽연'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마운드에서부터 3시간이 걸려 날아오는 둘리의 초 슬로볼[10]을 기다리다 지쳐 포수, 심판과 함께 졸다가 원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하고 만다(...)

  • 2005년 경에는 MBC ESPN에서 프로야구 경기 해설을 하기도 했으며, 2013년부터 한화 이글스의 수석코치로 자리를 옮긴 김성한 전 KIA 감독을 대신하여 광주 KBS의 '베이스볼 매거진 야호'의 해설자로 발탁되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김봉연 교수는 한 주간 KIA 경기의 촌평과 함께 KIA 후배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주는 멘토의 역할을 해주기도 하는데, 2013년 5월 6일에 있었던 직속후배 김상현의 트레이드 소식에는 매우 안타까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직속후배였던만큼 더 많은 기회를 KIA에서 부여받길 원했었다고. 하지만 프로그램이 그 시즌에 나타난 타어강 덕분에 없어졌다.

  • 교직에 들어서면서 현장을 떠난지 15년째이지만, 여전히 야구에 관심이 많으신듯 하다. 인터뷰에 의하면 선동열의 후임감독이 되서 다시 타이거즈로 돌아가고 싶어 하시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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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타이거즈의 27번은 강철민, 호세 리마를 거친 뒤 2009년부터 김상현이, 그리고 2013년에 신승현이 쓰고 있었다. 2013 시즌 종료 후 신승현이 LG 트윈스로 이적하면서 현재 27번은 김태영이 다는중. 이호성부터 27번을 단 기아 선수들이 자살, 트레이드 이후 사이버투수, 돌연사, 트레이드, 트레이드 등의 부침을 겪으면서 27번 잔혹사라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
  • [2] 그렇다 보니 73학번으로 연세대학교에 입학, 55년생인 김준환과 군산상고 동기생
  • [3] 이 당시 나이가 17세.....
  • [4] 김재박과 함께 대학야구 도루 랭킹 1, 2위를 다퉜다고 한다.
  • [5] 당시 실업리그는 거의 프로야구의 리그처럼 운영되었으며, 한국 시리즈(당시 명칭으로는 코리안 시리즈)도 있었다.
  • [6] 그 다음 83년에는 2번 김종윤과 그 해에 합류한 재일교포 포수 7번 김무종까지 더하면 9명 라인업 중 7명이 김씨. 거기다 선발투수가 김용남이 나오면 10명 중 8명이 김씨(...) 그 당시 KKK타선이라고도 불렸다.
  • [7] 사고 시기는 배철수가 더 앞섰다. 배철수는 1983년 3월에 감전사고를, 김봉연은 프로야구 전기리그가 끝난 직후 올스타 브레이크인 7월에 각각 사고를 당했다.
  • [8] 등번호까지 물려주면서 공들여서 자신의 타석이였던 4번타자로 키운 이호성은 김봉연이 이 시기에 키운 선수였다. (이호성은 1990년에 해태 입단)
  • [9] 김봉연 본인은 인터뷰에서 구단주가 해태에서 기아로 바뀌면서 감독의 꿈이 좌절되었다고 밝혔다.
  • [10] 둘리는 김몽연의 팬이라는 설정이고, 바로 전 장면에서 둘리의 강속구에 야구장 벽이 뚫리는 것을 본 김몽연 선수가 원하는대로 초 슬로볼을 던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