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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로

last modified: 2015-03-30 00:55:40 Contributors


金炳魯
1887∼1964.


Contents

1. 소개
2. 일생
2.1. 구한말 ~ 일제강점기
2.2. 미군정 ~ 대한민국
3. 흑역사

1. 소개

한국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초대대법원장이자 정치가이다. 호는 가인(街人)이다.

2. 일생

2.1. 구한말 ~ 일제강점기

1887년 전라북도 순창군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집안의 가장이 되었으며, 조선 최후의 거유(巨儒)라 불리는 간재 전우 문하에서 전통적인 성리학 교육을 받다가 1906년 창평군[1]의 창흥학교에 입학했다. 1910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전문부 법학과와 메이지대학 야간부 법학과에 입학하여 동시에 두 학교를 다녔으나 폐결핵으로 귀국했다. 1912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3학년에 편입하여 이듬해 졸업하고, 1914년 주오대학 고등연구과를 마치고 귀국했다.

귀국한 뒤 경성전수학교보성법률상업학교의 강사로 형법과 소송법 강의를 맡았으며, 1919년경성지방법원 소속 변호사로서 개업했다. 변호사 시절 그는 수많은 독립운동 관련사건을 무료변론하였으며, 다채로운 사회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공헌했으며, 1927년 좌우합작 성격의 합법적인 단체였던 신간회에서도 적극 활동했다. 당시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조사하였다. 대표적인 민족변호사로서, 긍인 허헌, 과 더불어 '3인'(세 사람 모두 이름이나 호에 '인'이 들어갔으므로)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1932년부터는 경기도 양주군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면서 광복될 때까지 13년간을 은둔생활로 일관하였다. 따라서 창씨개명하지 않았고, 조선총독부의 배급도 받지 않았다.

2.2. 미군정 ~ 대한민국

8.15 광복 직후, 초창기에 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려 했으나 이내 곧 건준위 내부에서 급진화되어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자 이에 반대의사 밝히며 합류하지 않고 9월 초,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1946년 좌우합작운동 활동 당시 합작노선을 지지표명하며 한민당을 탈당했다. 이후 남조선 과도정부 사법부장을 지냈다. 1948년 초대 대법원장, 1953년 제2대 대법원장이 되어 1957년 70세로 정년퇴임하였다. 동지 허헌과는 달리 보수주의자로 6.25 전쟁 중 북한군에게 아내를 잃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공보다 인권을 우선시하였으며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1950년에는 골수암 치료 때문에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만 했다. 다리를 절단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전쟁이 터져서 불편한 몸으로 피난 생활을 겪었다.[2]이 때 아내를 친정인 담양으로 보냈다가 북한군에게 아내가 살해당하기도 했다.

제왕적 사고를 가지고 있던 이승만과는 사법부의 독립을 위해 대립하는 관계였으며 초대 대법원장 임기 중 반민특위 활동 적극지지하였고 반민족행위 처벌 재판 판사로 활동하여 이승만과 대립하기도 했다. 또한 전시중이던 1952년 이승만이 일으킨 부산 정치파동에도 반발하였다. 이승만이 법원의 판결을 비난하자 '억울하면 절차를 밟아 항소하면 될 일'이라고 받아친 것은 오늘날까지도 명언으로 꼽힌다. 그가 초대 대법원장으로서 소장 판사들을 보호한 덕에 사법부는 비교적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후임으로 친일 판사 백한성, 민복기, 김용철 등 그의 후임 대법원장들은 그만한 역량이 없거나 오히려 독재정권에 아부한 탓에 사법 파동, 10월 유신을 거치면서 사법부의 독립은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정년퇴임 후 변호사로 활동하였으며 1960년 총선 때 고향인 순창군에서 민의원 후보출마했으나 낙선했다. 5.16 군사정변 당시 박정희의 민정 참여와 군정의 지속을 반대하였다. 1963년 민정당 대표최고위원과 ‘국민의 당’의 창당에 참여하여 그 대표최고위원으로 윤보선, 허정과 함께 야당통합, 대통령 단일후보 조정작업 등 야당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인 1964년 별세하였다.

말년에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후손 중에는 손자 김종인이 있다.

3. 흑역사

  •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태영씨와 약간의 인연이 있다. 이태영이 여성 인권의 향상을 골자로 한 가족법 개정안을 제출하자 "천오백만 여성들이 불평 한 마디 없이 다 잘 살고 있는데, 법률줄이나 배웠다고 건방지게 법을 고치라고 나서다니!"[3]며 호되게 꾸짖었다고. 이것은 그가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은 보수주의자임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봐야할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점으로 이승만이 판사 임용을 거부할 당시 이태영을 임용할 것을 건의한 사람이 바로 김병로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판사 임용을 건의할 권한이 대법원장에게 있으니 이 또한 당연한 행동이지만..
  • 신간회 활동 당시, 지도부 위치에 올랐을때, 자치론자들과 제휴를 모색하는 등 타협적인 노선을 띄어 지방의 신간회 지회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타협적인 지도부의 등장은 이후 신간회 해소론의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고, 조직은 급격한 쇠퇴의 길로 빠져들게 만든 장본인으로 비판받는 시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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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1914년 담양군에 흡수되었다.
  • [2] 이때 한 말이 '앉아서 연구만 할 수 있으니 잘 됐네.' (..)
  • [3] 이렇듯 여성 인권에 대해서는 무심한 편이었다. 여자는 집에서 밥이나 하라고 할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