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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종

last modified: 2015-09-15 01:37:08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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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위 항목 : 주한미국대사 피습 사건
  • 원래 주한미국대사 피습 사건의 하위 문서였고 또한 정치적 성향이 뚜렷한 인물이라 당연히 작성금지였으나, 피의사실, 물증, 자백 등이 명확하고 주요 언론에 피의사실과 실명이 집중 보도된 자로서 살인미수 피의자 신분이라 구속영장 발부 시점 이후 작성금지를 해제합니다. 작성금지의 예외에서 "3.기타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인물 및 단체" 항목 참고.

김기종의 평소 활동사진 현장에서 제압당한 김기종
youtube(JbfWMfs0YEM, width=500)
1분 43초부터 자기소개(?)가 나온다.

Contents

1. 개요
2. 이력
3. 활동
4. 반미
5. 횡설수설
6. 관련 사건
6.1. 우리마당 피습사건
6.2. 주한일본대사 습격 사건
6.3. 박원순 시장 강연회 폭행 사건
6.4. EXO 공연행사 폭행 사건
6.5. 주한미국대사 피습 사건
7. 평가
7.1. 주변 지인
7.2. 언론
7.3. 북한


1. 개요


사람처럼 생겼지만 절대 사람이 아니다. 아니, 이 놈은 절대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국수주의자 + 관심병자 + 종북주의자 + 테러리스트 + 극단주의자 + 이중잣대 + 어그로 = 답이 없는 인간 쓰레기 궁극체 그리고 매국노.[1]
천하의 개쌍놈 인면수심써도 모자랄 판이다..
저 중에 두어 개만 있어도 답이 없는데 맙소사

1959년 출생의 자칭 사회운동가이자 주한미국대사 피습 사건 피의자.

네티즌들은 김기종이 운영하는 블로그인 우리마당독도지킴이에 들어가서 비판의 글을 남기고 있다.좌우 가릴 것 없이 까인다.

2. 이력

김기종은 1959년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태어나서 광주광역시에서 성장했다. 집안의 종손으로서 기대를 받으면서 자라났고, 1978년 광주 금호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를 목표로 하여 입시에 여러 차례 실패하여 재수를 거듭하다가 1980년에 성균관 대학교에 입학했다. 다음해에도 서울대학교 입시에 도전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기사

대학생활 중인 1982년에 재수생활에서 만난 아우들과 함께 ‘바회’모임을 결성했다. 이 모임은 1984년에 설립하게 되는 ‘우리마당’의 전신격인 모임이라고 한다.

1984년 성균관대학교 법률학과를 졸업하고 통일정책대학원에서 남한사회 통일문화운동의 과제로 석사논문을 썼다. 1982년 사법시험응시를 포기하고[2] 운동권에 가담했으며 주로 재야 문화 운동에 주력했다고 한다.

1980년대에 국악모임 ‘한가락’, 극회 ‘벽돌’ 등을 창립하며 문화계에서 활동했다. 1985년에는 도서출판 ‘우리마당’을 창간하기도 했다. 우리마당을 중심으로 연극 공연, 국악강좌, 탈춤·풍물교실, 문예심포지엄 등의 활동을 하면다. 우리마당은 1984년 서울대, 고려대 등 5개 대학 총학생회 집행부와 함께 민정당사를 점거하였고, 1985년 8월에는 회원 내부 조직을 결성, 미국 대사관의 성조기를 태우기도 했다.

우리마당 홈페이지에서는 "1986∼1987년 군사정권의 호헌에 맞서 직선제 개헌운동의 중심역할을 수행하며 소위 '6월 항쟁'의 참호가 됐다","박종철 열사의 49제, 100일제 등을 주관집행했다"고 자신들을 소개하고 있다. 1987년에는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을 집행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열사 장례식 집행은 과장일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우리마당 블로그에 김기종이 올린 다음과 같은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1987년 장례 행렬에 봉사하였던 당사자들의 만족과 대단했다는 시민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부여 못하고 엉뚱한 유명 인사 참가한 추모제를 지내는 방식들은 안타깝고 처량하기만 하다. 열사 팔아먹는 행위이다. 이한열열사 기일, 왜 6월9일 추모제 지내는 것일까? 열사는 6월9일 최류탄 부상으로 7월5일 돌아가셨다. 일반 노환의 기일, 즉 병환 후 운명하실 때 기일은?
1987년 이한열 열사의 장례를 우리마당은 집행했다. 당시 장례 의전에 획기적 방식들이 많이 도입되었다. 풍물패, 썽풀이춤, 만장 앞세운 상여꾼들이 농경사회 전래의 ‘노제’를 집행하며 소중하게 장례식 치루었다. 민주의 다짐 피어날수 있도록 판그림 상여를 만들어 열사 가시는 길의 백여만 인파가 함께 공감하였었다.
즉 시청앞 마중나온 시민과 연대감 형성하며 민주화 역사 새롭게 일구던 기억들 정말로 대단했을 뿐이다.
(중략)
열사의 뜻을 함께 계승하여 민주화운동 기여하고자 만장과 함께 150여명 풍물패 상여 행렬의 형성들은 당시 상계동 개발의 봉사활동경험 배가된 결과이다.
이처럼 우리마당은, 80년대 문화운동 경험 바탕으로 이한열열사 뿐 아니라 수많은 열사들의 장례 의전을 맡아 새로운 의식 만들면서 모란공원 조성하게 된다. 즉 전태일 열사가 계신 곳을 민주성역으로 만들었다.
이같은 역사를 창출하며 열사들 뜻을 기리는 공감대 형성해주며 조직된 추모, 기념사업회가 출범 정신과 달리, 감투 이력을 다투는 상황에 기가 막힐 뿐이다. 결국 아쉽게도 민주 팔아먹는 집단들 태어난 후에는 계산서들을 맞추는 탓인지, 봉사로 활동한 우리마당 같은 단체는, 몇 열사 기일과 추모제 연락 못받는다.
특히 90년대에 민예총 활동 공식화 되면서부터이다. 더 이상 우리마당 등의 봉사, 필요없는 利權 탓이다. 아무튼 보고하는 이한열 열사 뿐 아니라, 다른 열사 님들은 누구에 의해, 어떤 의전으로 운구된 것일까? 군사정권 때는, 장례의 기록도 못하는 형편이었으니 당시 사진 간직하고있는 가족들에게 확인하면 된다.참조

김기종의 글이 워낙 문법이 이상해서 이해하기 어려운데, 김기종의 글로 미루어보아서 "주관집행했다.","집행했다."고 말하는 활동의 실체는 장례식에서 풍물패 공연을 하는 "봉사활동"을 뜻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김기종의 주장을 최대한 수긍한다고 해도, 가서 조금 도와준 걸 가지고 자신의 활동을 과장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당시 기사에는 연세대학교 총학생회가 이한열 열사 장례식을 주관한 것으로 되어 있다.옜날기사 실제로 장례식의 경우, 고인의 인연에 따라서 여러 단체(종교단체, 동문회나, 해병대 등)에서 봉사를 오기도 하는데 봉사하러 도와준 사람들이 모두 '주관해서 집행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장이다. 즉, 봉사활동 해놓고 자기가 모든걸 다 한 것 마냥 자신의 업적(?)을 과장하는 론 플레이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김기종의 민주화 활동에 대한 공헌은 비판적으로 보아야 할 필요성이 높다.

1988년에는 올림픽 단독개최 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1988년 8월에는 괴한이 사무실에 들어와 폭행을 하고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기사

1997년부터 2007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의 외래교수를 지냈다. 김기종은 당시 ‘전통예술의 이해’라는 교양과목 1강좌를 강의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2001년 민주평화통일회의 자문위원으로 위촉했으며, 2002년 통일부 통일교육위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정부의 허가를 받고 2006년부터 2007년까지 북한을 6번 방북 했다.

2007년에 청와대 앞에서 우리마당 피습사건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이다 분신 자살을 시도했다. 이 때 전신 20%에 3도 화상을 입는 등 심하게 다쳤으며, 여러 차례 수술을 받으며 가까스로 소생했다고 알려졌다.

2007년 분신자살 시도 이후 여러 차례 돌출행동을 벌였다. 지인들에 따르면 이때부터 정신이 좀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왔다고 한다. 김기종은 분신자살 기도가 계기가 되어 성공회 대학교에서 맡고 있던 강좌가 폐강되었다. 기사

주변인의 증언에 따르면 이후 별다른 수익 없이 문화 활동을 지속하였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자산만 계속 소모하였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면서 다른 활동가들과도 단절이 심해졌다. 이러한 몰락 과정을 거쳐서 적어도 2014년 쯤에는 초수급대상자로 전락하여 집세나 사무실 임대료도 내기 어려운 처지가 된 것으로 보이며, 자신이 운영하던 단체도 이름만 걸어놓고 혼자서 활동하는 유령 단체 수준으로 몰락했다.참조기사.

2011년 12월 북한의 김정일이 죽었을 때 서울 도심에 김정일 분향소 설치를 시도하여 보수 단체와 충돌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레알 골수 종북. 이 놈은 매국노가 확실하다.


3. 활동

김기종은 반미 반일 민족주의 활동가로 통합진보당이 속해있던 '전쟁반대 평화실현 국민행동' 일원이라고 알려졌다.[3] 그는 키 리졸브 등의 한미 연합훈련을 '전쟁도발연습'으로 규정했는데 이는 북한이 한미연합훈련을 비난할 때 쓰는 전형적인 멘트다. 독도지킴이, 전작권 회수 운동, 한미연합훈련 반대 시위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김기종의 핵심 운동은 문화운동 단체인 '우리마당' 대표로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와 한미전쟁연습 규탄 등의 시위 활동을 해왔다. 김기종은 한미 키 리졸브 연습에 반대하며 "평양 점령 상정한 쌍용 훈련을 중단하라"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하기도 했다.


4. 반미

흥미로운 점은 반미를 시작한 이유가 한총련계 세력이 반미로 몰린 것과 유사점이있으나 더욱 두서가 없고 연관 또한 불분명하다.
본인의 언급으로는 서울대를 목표로 했으나 3번이나 떨어지게 된후 4수에서 성균관대[4]에 결국 진학했지만 서울대가 아니면 대접을 제대로 안 해주는 사회에 실망과 분노를 느끼고 뜬금없이 반미에 투신했다고 한다.[5] 한마디로 뭔가 대단한 이유가 아닌 그저 열폭이었던 셈. [6]

극도로 아웃사이더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보수정당 만이 아니라 소위 진보정당 계열과도 그리 사이가 좋지 않다.

자신을 지워냏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해찬, 유시민을 배은망덕하다고 공격하는가 하면(13대 총선 이해찬,유시민 배은망덕? - 우리마당 기념년력[11)], 노무현 정권 당시 386 정치인들을 "운동 팔아먹는 비리, 부조리 온상"이라고 공격하기도 했다.참조


5. 횡설수설

‘Independent Film’은 지구촌 영화史에서 우리가 만들어낸 영화 용어입니다.
우리마당의 '영화마당우리'는 작은영화워크샾과 함께 '독립영화'를 제창하고, 영화운동을 실천했다!

독립영화라는 용어를 자신들이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즉 일본의 주일한국대사관에서는 일본 사람들의 임의적 항의와 함께
마음대로 드나들고 있는데, 우리는 오히려 우리 사법 당국의 경계를-
외교기관 100m 집회금지 위헌 청구 '헌법지킴이'로도, '우리마당 김기종' 역할합니다!

참고로 일본에서도 일본 경찰이 외교공관을 경비한다. 물론 한국 대사관, 영사관도 마찬가지.

통일국호 'corea'에서 'c'가 갖는 뜻, 국호 채택과정에서 '우리마당' 역할 자랑스런 실천과 성과들 / 우리마당
통일국호 'corea'에서 'c'가 갖는 뜻, 국호 채택과정에서 '우리마당' 역할
김기종의 온갖 횡설수설 가운데서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운 글 가운데 하나다. 대략 요약하자면 corea에서 c는 '고리'라는 뜻이 있으며 남북을 잇는다는 의미가 있고, 통일국호로서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참고로 영화산업이 가장 발달한 헐리우드는 아직 영화제가 없다.
‘부산국제영화제’ 개막과 '우리마당'- 1995년 '광주영화제' 준비와 함께 탄생!

물론, 있다. Hollywood Film Festival이 1997년에 생겨낫다.

극도로 아웃사이더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보수정당 만이 아니라 소위 진보정당 계열과도 그리 사이가 좋지 않다.

자신을 지원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해찬, 유시민을 배은망덕하다고 공격하는가 하면(13대 총선 이해찬,유시민 배은망덕? - 우리마당 기념년력[11)], 노무현 정권 당시 386 정치인들을 "운동 팔아먹는 비리, 부조리 온상"이라고 공격하기도 했다.참조


6. 관련 사건

6.1. 우리마당 피습사건

1988년 8월 17일, 김기종이 설립한 문화운동단체 우리마당이 정체불명의 괴한에 의해 사무실에 있던 대학생 폭행, 강도 및 사무실에 있던 여회원을 성폭행하는 습격을 당했다. 당시에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반정부 인사에 대한 불법 사찰이나 오홍근 테러사건과 연관되어서 논란이 있었다.(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출처)

당시 야당이었던 평민당은 이 사건이 군 정보사령부에 의해 저질러진 정치테러라고 폭로했지만 경찰은 단순 강도 절도라고 발표했고, 범인은 체포되지 않고 흐지부지 되었다. 2004년에는 북파공작원 출신이라는 사람이 정보사령부 사주의 백색테러 습격이었다고 시사저널에 인터뷰를 한다.참조기사 이에 김기종은 2007년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분신자살을 기도했다. 88년 당시 우리마당 피습 사건의 변호사이자 국회의원은 2007년 당시의 대통령인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전 변호사가 대통령이 되어도 진상규명이 안되자 분신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이당시까지는 군사정권의 무분별한 탄압에 의한 희생자라고 생각해줄수있겠으나 이 이후 모든게 틀어진다.분신 당시 기사

6.2. 주한일본대사 습격 사건

2010년 7월 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시게이에 도시노리(重家俊範) 당시 주한 일본 대사 초청 강연회에서 시게이에 대사에게 콘크리트 덩어리 2개를 투척했다.

대사는 피해서 부상을 입지 않았지만, 통역관에게 부상을 입혔고, "외국사절폭행죄"로 유죄 선고를 받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기사 당시 재판은 인권변호사인 박찬종 변호사가 김씨는 항일민족운동가라며 무료변호를 자청했고, 반성없이 자신의 주장만을 반복하는 태도를 보였음에도, 벌금형 1회 이외의 별다른 전과가 없어 죄질에 비하여 가벼운 형을 받았다.기사

타국 대사를 공개적으로 습격한 중범죄임에도 당시에는 독도문제와 반일감정으로 '참애국자다', '이 시대의 독립투사다', '훌륭한 일을 했다'라는 반응(“독도사랑이 곧 민족통일운동")이 많았던데다가,(한겨레는 이전에는 주한일본대사를 공격한 사건을 비판하는 사설을 실었다.) 반성이 전혀 없는 모습에 비해서 형량이 너무 적어 김씨에게 잘못된 교훈을 줬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그의 과거 행적에 대한 기사에 "1988년 '우리마당 피습사건' 이후 트라우마 앓았던 듯..."이라는 부제를 달았고 이는 되지도 않는 여론몰이 내지는 실드라는 비난을 샀다. 아무리 개인의 과거가 불행했더라도 그것이 살인미수라는 계획적이고 비인도적 범행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그것도 그 대상이 다른 사람도 아닌 동맹국의 주재대사라면 더더욱.

김기종은 당시에는 "빨간약 바르면 되는데 엄살을 피운다", "김장훈이 독도 지킴이로서 내 영치금이라도 내줬으면 했는데 섭섭하다"등 황당한 언행개소리도 일삼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6.3. 박원순 시장 강연회 폭행 사건

박원순 시장님의 12일 일정
작성자 김기종 작성일 2013/05/09
저는 한겨레신문 준비에 가장 말없이 참가했던 '우리마당 김기종'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말해야겠습니다.
박시장님은 먼 발치에 계셔서 잘모르시겠지만, 한겨레신문 창간의 가장 큰 동인은 '이한열 열사'입니다. 당시에는 공간이 없엇기 때문에 '우리마당' 역할이 무척 소중했습니다. 장례식을 준비 진행하고, 따라서 옛 언론인들도 장례에 대한 보도와 행사 후 평가 과정에서 보다 긴밀해집니다. 못다한 얘기를 위한 방법이 모색되면서, 대치동사무실 이전까지 '조투' '동투'의 연합 모임이 '우리마당'에서 꾸려집니다. 결국 준비 소식지 배포 등의 홍보 활동에서 제호가 결정되는 설문조사 등의 역할, 심지어 양평동 사옥 열림고사도 맡았습니다.
그런데 당시 전혀 다른 일을 하시고 계셨던(심지어 군사정권 당시 검사) 박시장님께서 무슨 하실 말이 있을까요? '한겨레신문 25주년' 행사에 오시면(그건 유세입니다) 저에게 혼납니다.(시게이에도시노리 일본 대사보다 훨씬--) 따라서 12일의 일정은 취소하시기를 바랍니다.
저에게 지난 2012년부터, 특히 1월 초 사건 아직 사과못한 것 아시죠! 아직 아무런 사과도 없고, 그같은 분이 창간 축하한다면서 거짓말하는 것 도저히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궁금하신 분은 인터넷에서 '박원순 김기종' 검색해보면 2012년 6월부터의 글들이 있습니다.

박원순 시장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013년에는 박원순 시장에게 테러하겠다고 협박했다. 협박글을 보면 알지만 그래도 대학교수까지 지냈던 지식인의 글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논리의 극치다.

2014년 1월 서울시청 시민청 개청식 행사장에서 박원순 시장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고성을 질렀으며, ‘독도 관련 토론회에 시민청 공간 미대여 비판’ 등의 내용이 담긴 유인물을 배포하려다 제지당한 뒤에도 여러 차례 청사 진입을 시도하다 강제퇴거당했다.기사

결국 2014년에는 박원순 서울특별시장의 강연 때 신촌의 교통이 엉망이 되었다는 이유로 난동을 부리며 시민을 폭행하였다. 참조기사 참조기사

잘 보면 알지만 매번 협박하고 난동을 부릴 때마다 이유가 마구마구 바뀐다. 특정한 이유가 있어서 하는게 아니라 그냥 박원순 시장에게 집착하여 발광을 부리는 모습이다.

6.4. EXO 공연행사 폭행 사건

2015년 1월 30일 아이돌 그룹 EXO공연 행사에서도 난동을 부려 공무원을 폭행하기도 했다. 난동의 이유는 아이돌 팬들이 붙여놓은 포스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화를 내어 말리려고 달려온 공무원들을 상대로 폭력을 휘두른것.

공무원을 폭행한 뒤 갑자기 도로로 뛰어들어 시내버스를 막아섯다가 승객과도 싸움이 붙었다. 결국 공무집행방해와 업무방해 혐의로 기소되었다.참조기사

6.5. 주한미국대사 피습 사건

2015년 3월 5일에는 주한 미국 대사 마크 리퍼트 대사를 공격했다. 자세한건 해당 항목 참조.

범행동기는 반미감정과 종북 사상에 입각한 테러라고 볼 수 있다. 범행 직후 응급실에서 동기를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전쟁훈련 반대합니다. 이산가족이 못 만나는 이유가 전쟁훈련 때문이라 그랬습니다", "전쟁훈련 중단합시다, 키 리졸브" 등을 외친 점에서 알 수 있다. 김기종은 리퍼트 대사를 공격한 후 제압과정 입은 부상을 응급실에서 치료하면서 "작년 10월에 부임한 마흔 갓 넘은 또라이가 어떻게 우리나라 통일정책을 감당할지 안타까워서 그랬다"며 리퍼트 대사를 모독하고 "이번 키리졸브를 중단시키기 위해 내가 희생했다"고 주장했다.

이번 범행은 열흘 전부터 준비했다고 한다. 제압과정에서 입은 발 골절의 통증을 호소한 김기종은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범행이 벌어진 3월 5일 시점에서 범행에 대한 진술을 거부하며 범행을 저지르게 된 동기만 주장하고 있다. 범인이 범행에 대한 진술을 거부 중이므로 흉기로 리퍼트 대사의 목을 찌르려했다고 자백한 것은 아니고 경찰 측의 추측이다. 그러나 리퍼트가 입은 자상을 보면 충분히 생명을 해하려는 살의가 담겨 있던 것은 분명하다. 대사를 넘어뜨린뒤 여러차례 흉기를 휘둘렀다는 증언으로도 충분히 살해 의지가 담겨있다고 볼수 있다. 이래 놓고 한다는 소리가 "그냥 겁만주려 했다"이다. 이는 형량을 의식한 전형적인 물타기 발언이다.] 사건 초기에는 아주 당당하게 정의의 투사처럼 짖어대다가 막상 수사가 시작되고 변호인을 만난 이후부터는 겁만 주려 했다는 식으로 형량을 의식한 변명을 내놓은 것.

3월 6일 밤 10시가 조금 넘어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김기종 본인은 살해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충동적으로 흉기를 휘둘렀다'라며 '리퍼트 대사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게다가 변호사에게 '상징적으로 그은 것'이며 '일종의 퍼포먼스'였다고 진술하기까지 했다.] 그러고서는 최후진술에서는 '이번 일로 한·미 관계가 나빠지지 않았으면 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외국사절 폭행에 국가보안법 위반등의 중죄를 지은 데다 이미 여러 차례 다른 건으로 처벌을 받은 전력이 있으므로 중형을 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범행 3일뒤인 3월 8일, 경찰국가보안법을 적용하겠다는 사건송치 계획을 발표하였으며 송치 예정일은 3월 13일이다.

2015년 9월 15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살인미수와 외국사절 폭행 등의 혐의로 징역 12년 형을 선고받았다. 국가보안법은 무죄를 선고받았다.기사-중앙일보

7. 평가

7.1. 주변 지인

진보단체에서 만난 몇없는 지인들조차도 대놓고 "정신병 환자에 가까운 사람이다"라고 학을 뗄 정도면 말 다했다. 증언으로 종군위안부 수요집회에서도 깽판을 친듯하다. 민주동문회 등에서도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고함을 지르고 땅바닥에 드러누워서 모두 김기종을 싫어했다고 하며 심지어 혈육인 가족들조차도 이해할수 없다고 할 정도였다. 김기종의 지인들에 따르면 김기종은 모임이나 뒷풀이 등에서 늘 깽판어깃장을 치거나 다른 진보단체 사람들 내에서도 평이 좋지 않은 멀리 하는 사람으로 취급받았다고 한다. 그의 경력으로 나오는 우리마당이나 독도지킴이는 김기종 거의 혼자서 운영했다고.다른 의미의 독립 운동가 맞네..

어린 시절엔 머리가 좋아서 가족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대학에 진학하여 상경한 이후부터는 명절에 일가 친척이 모인 자리에서도 정치 이야기밖에 하지 않고 스스로를 큰 뜻을 품은 사람이라고 칭하여 가족들과도 사이가 틀어졌다고 한다. 이웃들도 김기종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을 정도로 철저히 혼자서만 생활했으며 지인들에겐 자신을 "국가의 이익을 위해 투신하는 독립운동가"라고 칭하기도 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분신사건 이후로 이상해졌다고 말하는 지인들도 많았을까.

자신이 벌인 테러 활동에 대해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그릇된 욕구관심병도 매우 강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내 생활을 내려놓고 시민운동에 몸을 바쳤는데 아무도 몰라준다'며 '언론에는 정치나 명예를 좇는 사람만 나오고 나처럼 순수하게 활동하는 사람은 관심을 못 받는다'고 섭섭함을 토로한 적도 있다고 한다. 심각한 자아도취에 빠져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2010년 일본 대사를 공격했을 당시 사회적으로 큰 주목을 받은 것을 오히려 기분 좋아하면서 '처벌을 받았지만 안중근 의사처럼 독립운동을 하듯이 국가를 위해 일한 것인 만큼 떳떳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태경 토지정의시민연대 사무총장은 김기종과 같이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그리고 평화운동과 노둥운동에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상처를 입고 경제적,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곤궁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많으며 이들을 '민주상이용사'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대우'해야 김기종과 같은 문제가 재발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기사

7.2. 언론

KBS에선 사건 다음날 시사진단에서 범인의 성향을 가지고 '타인과의 공감능력이 떨어지며 타인에 대한 이해보단 자신의 사상을 표출하고자 하는 성향'인 점을 들어 사이코패스일 것이란 의견을 내기도 했다. 사이코패스 항목보면 알겠지만 자극적인 언론들이 아무 흉악범에게나 막 갖다붙이는 지라 100% 확정할 순 없다.

사실 이번 사건은 충분히 예방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왜냐하면 이런 테러시도가 처음이 아니고 이미 일본대사 테러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유력인사들은 대상이 일본대사여서 그런지 맹목적인 혐일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국민적 분노를 표현한 뜨거운 열정 표현이라거나 탄원서에 김씨를 처벌한다면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유훈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둥 실드치는데 급급했으니(이부분은 김씨 본인이 쓴 책에 그리 적어놓은 것으로, 저자의 정신상태가 의심스러우니만큼 재확인 바람) 이것이 김기종에게 자신의 행위가 옳다는 신념을 더욱 공고히 하게 해줬을 가능성이 크다. 한겨레신문도 “독도사랑이 곧 민족통일운동”라는 기사를 2014년 실은 바 있다. 다만 주한일본대사를 공격한 사건을 비판하는 사설을 실어 과거 사건을 알면서 실었다는 점에서 앞뒤가 맞지 않다는 비판이 있다.

동아일보는 김기종은 맹목적으로 우리 것을 신봉하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자에 불과하며 배후세력이 존재한다고 정해놓고 수사해서는 안 된다는 내가 본 김기종이라는 제목의 논설위원 칼럼을 싣기도 했다.

7.3. 북한

공식 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에서 김기종을 안중근에, 마크 리퍼트이토 히로부미에 비유하는 개드립을 치며 김기종을 옹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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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참고로 김기종이 있던 민화협의 협회장이 새누리당 소속 국회의원이라고 김기종을 극우주의자라고 평가하는 자들도 있는데, 민화협은 보수/중도/진보층 모두가 돌아가며 협회장을 하니 꼭 보수단체라곤 할수 없다. 오히려 새민련 국회의원들과 스님분들, 진보층 인사들도 많다.
  • [2] 3수를 거쳐 대학에 입학했으며, 이 때문에 학부 2학년부터 사법고시 준비를 시작했다고 한다.
  • [3] 통진당과 유사한 노선을 신봉한 것은 맞으니 통진당 당원은 아니었다고 함
  • [4] 링크에는 언급이 안 나왔지만 다른 뉴스에서는 그가 성균관 법대 진학자라고 한다. 최소한 실력은 있었던 셈. 3수나 한 이유가 사실은 충분히 괜찮은 대학에 입학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서울대 하나에만 목을 매서란 소리도 있다.
  • [5] 사실 바로 반미가 아니라 그 직후 대학입학 후에도 서울대 입학을 재차 시도하면서도 대학가에서 알게된 지인들과 광주 민주화운동시 정부 잔혹진압의 진실 등을 얘기하다가 반미로 뛰어든 걸로 보이나, 역시 그것이 시발점이나 일종의 모티브가 되기에는 그의 갑작스럽고도 폭력적인 반미성향은 이해가 안되는 행동이었다.
  • [6]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5030901030621089001&w=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