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HRSS

김근태

last modified: 2017-02-13 21:50:09 Contributors

Contents

1.국회의원, 보건복지부 장관, 민주화 운동가
1.1. 민주화 운동
1.2. 정계 입문과 활동
1.2.1. 선거
1.3. 국회의원 퇴임 이후
1.4. 일화
1.4.1. 라이카 카메라 수증
1.4.2. 석호필 박사의 제자
1.4.3. 취미
1.5. 흑역사
1.6. 그를 소재로 한 작품들
2. 군인


1. 국회의원, 보건복지부 장관, 민주화 운동가


金槿泰




서울 도봉구 15, 16, 17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열린우리당 의장(2006년 6월 9일-2007년 2월 14일로 8개월 5일에 걸쳐 재임, 단명한 의장이 대부분이었던 열린우리당 의장 중에서는 가장 길게 재임했다[2]), 원내대표(2003년 10월 27일~2004년 5월 11일로 6개월 보름을 재임) 및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보건복지부 장관(2004년 7월 1일-2006년 2월 10일, 1년 7개월 5일)을 지냈다.

언론에서는 주로 그의 마지막 직책이었던 '고문' 으로 호칭되지만 민청련 의장과 열린우리당 의장을 지낸 사람인 만큼 운동권 출신 쪽에서는 전(前) 의장 등으로 표현되는 경우도 많다.[3] 장관은 확실히 흔하고 상임고문은 사실 큰 의미는 없는 직위라.

1.1. 민주화 운동

제4공화국제5공화국 당시 민주화 운동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65학번으로, 대학 초년생 시절부터 경기고 동문이기도 한 대학동기 조영래, 손학규[4]와 더불어 서울대 65학번 삼총사로 불리며 한일회담 반대, 삼성 사카린 밀수 규탄 등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 결과 1971년 서울대 내란음모 사건, 1974년 민청학련 사건, 긴급조치 9호 위반 등의 사건에 관여되어 고난의 청년기를 보냈다. 1983년 민청련(위 민청학련의 후신격) 초대 의장이 된 김근태는 이른바 깃발 사건이라 불리는 1985년 서울대 민추위 사건[5]으로 구속되어 풀려나는 도중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이근안에게 고문을 당했다. 이로 인해 받은 피해는 이근안 문서 참조. 그리고 이날 사건을 통해 소문만 무성하던 고문의 실체가 드러나며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고문 증언.

70년대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대학생들 모두 갖은 고초를 겪었지만 김근태는 그 중 가장 심하게 당했으며 그러면서도 며칠간을 계속 버텨냈던 인물이다. 그 유명한 안 재우기, 날개꺾기,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겪으면서 버티었다는 사실만 봐도 이 사람의 정신력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에 대한 진중권의 증언. 앞서 말했듯 이 과정에서 버틸 뿐만 아니라 고문의 실체까지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선 하기 힘든 일이다. 다만 끝까지 고문을 버티지 못하고 살려달라는 애원을 하며 저측이 원하는 조서를 써주었으며 이는 고문의 기억과 함께 고인의 가장 큰 트라우마가 되었다.

전기고문, 물고문 후유증으로 발병한 파킨슨병과 뇌정맥혈전증 등으로 건강에 큰 손상을 입었고 고문으로 생긴 PTSD 때문에 병원에도 제대로 가지 못했다. 전신 마취를 위해 눕거나 치과 치료용 드릴 돌아가는 소리만으로도[6] 고문에 대한 기억이 다시 살아날 정도로 지독하게 고문을 당했기 때문이다. 폐기종까지 걸릴 뻔했으니 볼 건 다 본 셈.[7] 고문당한 후에는 큰 소리로 연설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

1.2. 정계 입문과 활동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고 다음해인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2002년에는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중도 사퇴하였다.

참여정부에서는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입각하였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선거 공약중 하나였던 주택 분양 원가 공개를 거부한 데 대해 반대하며 "계급장 떼고 제대로 논쟁하자" 라고 요구하는 등 대통령 당선 후 신자유주의적으로 변한 노무현 대통령의 경제 정책에 가장 강하게 반대하였다. 또한 2007년 한미 FTA에 대해서도 FTA를 통과시키려거든 나를 밟고 가라라고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이 점 때문에 재야권 출신으로서 민주당에 들어가 몇 안 되게 자기 목소리를 낸 인물이라고 평가받는다.

사실 후일의 반응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재야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제도권 정치에 참여한 이후로는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정치적 업적을 쌓지는 못했다.

장관으로 재임하면서 국개론스러운 발언을 했다가 사과하는 등 말도 많았고 2006년 열린우리당이 쇠퇴 일로를 걷는 와중에 당 의장 직에 오르게 되어 당시 당정에 대한 여론의 뭇매를 집중적으로 받기도 했다. 다만 당 의장 중에는 제일 오래 재임했으며(당 의장들이 대부분 단명이긴 했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는 법들을 조율해서 통과시키기도 했다. 보건복지부 장관으로서 재임도 다른 장관들보다는 비교적 긴 편이었다.

1.2.1. 선거

3회에 걸쳐 국회의원을 지낸 다선의원이었지만 인생 마지막으로 도전한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한나라당 신지호 후보에게 1000여 표 차이로 석패했다.[8]

유세와 관련해서는 당의 지도부라는 중압감이 있어서인지 자신의 지역구보다는 다른 지역구에 지원 유세를 하러 가는 일이 더 많았다고 한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유세를 지원한 것은 2011년 서울특별시장 보궐선거.

1.3. 국회의원 퇴임 이후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구 열린우리당 출신들에 대한 전반적인 국민 인식이 나빴던 탓에 패배하였고 의원 퇴임 후에는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으로 활동하다 지병인 뇌정맥혈전증이 악화되어 종로구 연건동에 있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병원에 입원해 투병 생활을 했다. 그리고 딸의 결혼을 전해들은 후[9] 2011년 12월 30일 새벽 5시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끝내 별세했다. 그 전날인 29일에도 사망 보도가 나왔다가 나중에 오보라고 정정되기도 했다.

2011년 10월 18일, 자신의 블로그에 '2012년을 점령하라' 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는데 이것은 그의 마지막 논평으로 남게 되었다. # 자세한 것은 링크 참고.

말아톤의 정윤철 감독이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촬영한 영상은 그가 미디어에 등장한 마지막 모습이다. # 자세한 것은 링크 참고.


고인의 일대기를 압축한 영상.

2001년에 딴지일보가 했던 고인과의 인터뷰.

유족으로는 부인과 두 자녀가 있으며 이들 중 부인 인재근은 2012년 4월 11일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고인의 지역구였던 도봉갑을 물려받아 60%라는 높은 지지율로 당선되었다. 이때 방송 카메라를 통해 눈물바다가 된 인재근 후보 캠프가 전파를 타서 새삼 고인이 재조명되기도 했다.

1.4. 일화

1.4.1. 라이카 카메라 수증

복지부 장관 재직시 독일의 카메라 메이커인 라이카에서 우리나라 광복 60주년을 기념하여 안중근 의사의 손바닥 인장과 "大韓國人" 이 각인된 카메라를 딱 60대 한정 제작했는데 당시 1대의 가격이 1천만원 상당. 이 카메라의 1번을 김근태 장관에게 기증했다. #[10] 카메라랑 별 상관도 없어보이는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준 이유는 안중근 의사와 가장 이미지가 닮은 사람이라서. 다른 곳도 아닌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의 의견이다. 본인은 과찬이라며 이를 국가에 기증했다 오오.


1.4.2. 석호필 박사의 제자

석호필박사의 제자이기도 했다. 중학시절 가난한 학생이던 소년 김근태는 무료 영어강의 봉사를 하던 석호필 교수의 클래스에 수업을 듣게 되며 그의 제자가 되었다. 같이 공부를 한 정운찬 전 총리와는 동문.

1.4.3. 취미


생전에 축구를 굉장히 좋아했다. 어렸을 때부터 새끼끈을 뭉쳐 만든 공이나 돼지 방광을 부풀려 만든 공을 이용해 동네 친구들과 노는 것을 시작으로 장성한 이후에도 틈만 나면 조기축구를 즐겼다고 한다. 현역 의원이던 시절엔 국회의원들끼리 하던 축구 모임에서도 스트라이커로 이름을 날렸다.

파킨슨병 진단과 18대 총선에서 낙선한 이후에도 조기축구 등을 통해 축구를 꾸준히 즐겼다. 고문으로 몸이 매우 허약했지만 축구를 즐길 때는 건강한 모습을 보였기에 많은 사람들은 그가 병상에 누웠을 때 다시 금방 일어나서 공 차러 갈 것이라 생각했다고. 덧붙여 그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서 동문수학한 후배인 이준구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농구도 잘 했다는 모양으로 한마디로 구기종목 매니아.

하지만 말년에는 고문 후유증으로 그렇게 즐겨 마지 않았던 축구마저 못하게 된 것을 보면 고문이란 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 상흔을 주었는지 알게 해준다.

1.5. 흑역사

  • 2002년 당내 대통령 후보 경선 중에 당시 권노갑 의원에게 불법정치자금 2000만원을 제공받은 사실을 스스로 고백하며 경선 후보 자리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 # 물론 발뺌하다 걸린 것은 아니고 본인이 먼저 돈을 받은 사실을 자백했지만 어쨌든 범죄는 범죄인지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 2006년 당시 북한 핵실험에 따른 안보위기로 국내외적인 혼란 상황일 때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개성공단에 들어갔는데 여기서 북한 여종업원과 춤을 춘 일이 있다고 하여 논란이 되었다. #, #, # 본인의 해명에 따르면 북측이 권해서 마지못해 했다고는 하나 북측의 미사일 발사 실험 등 국가적으로 뒤숭숭한 때 북한에서 여종업원과 춤판을 벌였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던 것이 사실.

  •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 지지선언을 발표해 통일민주당 당원들이 분열되어 단일화가 무산되었다" 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김근태는 통일민주당 당원이 아닌 재야 민주화운동가였으며 무엇보다도 1985년부터 1988년 6월까지 그는 감옥에 있었다. 재야 민주화운동 진영이 김대중을 비판적으로 지지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1.6. 그를 소재로 한 작품들

정지영 감독이 연출, 박원상, 이경영이 주연을 맡은 남영동1985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되고 2012년 11월 22일 개봉했다. 다만 비슷한 시기 개봉한 26년 때문에 관객을 뺏겨 흥행에서는 전국 관객 30만(전산망 공식집계 기준)을 넘지 못하고 참패했다. 애초에 흥행성을 노린 영화기보다 사회고발 성격이 강한데다 독립영화로 구분되는 작품이라 어쩔수 없기는 했다.

시사만화가 박건웅이 2014년 6월 '짐승의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남영동 사건을 만화화 하였는데 5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다.

2. 군인

김근태
1952년 ~
복무 대한민국 육군
기간 1974년~2009년
임관 육사 30기
최종계급 대장
최종보직 제1야전군사령관

대한민국의 전직 군인, 현직 정치인.

1952년 12월 27일생. 충청남도 부여군 출생이다. 7군단장과 1군사령관을 지냈다.

육군사관학교 30기로 입학하여 1974년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으며 육군 11사단 사단장, 육군대학 총장을 거쳐 중장으로 진급한 이후 2004년 04월부터 2006년 6월까지 육군 제7기동군단의 군단장으로 재직했다. 그 이후 2006년부터 2008년 03월까지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 본부장을 역임하고 대장으로 진급한 이후 1야전군사령관을 역임하고 전역했다.

2012년 4월11일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충남 부여군-청양군 선거구에서 43.5%의 득표율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선거법 위반에 연루되어 1심에선 당선무효형인 벌금 200만으로 판결이 나왔고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나오면서 의원직 상실이 되었다.

김근태.jpeg
[JPEG image (Unknown)]


1번과는 1군사령관 시절 당시 국회의원이였던 1번과 서로 만난 적이 있다.
----
  • [1] 당시에는 부천군 오정면.
  • [2] 지방선거 직후 정동영 의장의 사퇴로 2등이었던 그가 최고위원의 자격으로 비대위 체제하에서 의장으로 추대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최장 재임에 유일하게 임기를 채우고 물러난 인물이 되었다. 원 임기는 1년이다.
  • [3] 여담으로 70~80년대 민주화 운동 시절 대학생이었던 386 인사들은 대개 김근태 선배라고 부른다. 빈소를 취재했던 한 젊은 기자는 빈소에 다녀간 사람들이 고인을 모두 선배로 부른다는 게 신기하다는 기사를 쓴 적도 있다. 물론 고인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예외이다.
  • [4] 조영래와 손학규는 경기중 시절부터의 동기동창이다. 김근태는 광신중학교를 나왔다.
  • [5] 참고로 이때 같이 구속된 인사 중 1명이 바로 아프리카TV로 유명한 나우콤 사장 문용식이다.
  • [6] 충치 치료를 위해서 치과에 찾아갔으나 치료용 의자에 앉아서 드릴 돌아가는 소리를 듣자마자 박차고 치과를 뛰쳐나왔다고 한다.
  • [7] 어느 정도로 두려워 했냐면 수술대 위에 눕는 것마저도 괴로워 할 정도였다. 수술대가 고문시 사람을 묶어놓는 일명 칠성판과 비슷하다고 한다. 이 정도로 고문을 한 이근안목사가 되어 "고문도 예술이다" 라는 망언을 날린 바 있다. 결과적으로는 고인도 고문의 압박을 견뎌내지 못해 원하는 조서를 쓰고 말았을 정도였으니.
  • [8] 전 항목에 참패했다고 돼있는데 당시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신지호 후보와의 격차는 불과 1000여 표에 불과했다. 더구나 경기동부 계열 민주노동당 후보가 출마해서 1000여 표를 차지했다는 걸 감안한다면 대단히 아까운 패배이다.
  • [9] 단, 실제로 가지는 못하고 메세지만 보낼 정도였다고 한다. 이 메세지를 전달받은 식장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 [10] 라이카 같은 메이커들은 이런 한정판 바디에 일렬번호를 붙이는데 그 1번이라면 가격은 둘째치고 평생 한 번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영광. 물론 가격은 몇십 억을 호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