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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last modified: 2019-10-29 02:42:51 Contributors

고려[1]/후 고구려 왕
신라 쇠퇴/태봉 건국[2] 궁예 고려 건국
초대 태조 왕건

궁예.jpg
[JPG image (Unknown)]

[3]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연호 무태(武泰), 성책(聖冊)[4]
수덕만세(水德萬歲), 정개(政開)[5]
김(金)[6] / 궁(弓)[7]
이름 궁예 / 예(裔)
법명 선종(善宗)
불명
생몰년도 음력 857년(?) 5월 5일 ~ 918년 6월 14일[8]
양력
재위기간 음력 901년 ~ 918년 6월 14일(18년)
양력 901년 ~918년 7월 24일

후삼국시대의 군웅, 후고구려.

세달사 출신의 떠돌이 에서 시작해서 점차 세력을 키워 한반도중부를 모두 장악했지만 왕건반란으로 축출되고 비참한 최후를 맞기까지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애꾸눈의 이미지와 미륵을 자칭한 종교적인 이미지 등 여러 가지가 겹쳐서 어딘지 중2병 수수께끼 같은 부분도 제법 보여주는 인물. 한국사에서 그 유형을 특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특이한 삶을 살다간 군주이기도 하다.

Contents

1. 출생과 성장
2. 미륵정토를 꿈꾸다
3. 몰락의 징후들
4. 최후
5. 평가와 후일담
6. 폭군이었나?
7. 창작물에서의 궁예
7.1. 영화
7.2. 태조 왕건
7.2.1. 패러디
7.3. 천년의 신화
7.4. 기타 소설

1. 출생과 성장

기록에 의하면, 그는 신라왕자 출신이다. 아버지는 47대 헌안왕이나 48대 경문왕이라고 한다. 태어난 날이 음력 5월 5일로 옛 사람이 흉일로 여기는 날짜였고[9] 태어날 때 집 위로 흰 빛이 하늘에 뻗치는 등 불길한 징조가 있어 높은 곳에서 던져 죽이려는 것을 유모가 가까스로 받아 구출했다고 한다. 또 이 때 실수로 유모가 눈을 찔러 가 되었다고 한다. 유모가 어린 궁예를 품에 안고 담을 넘다 넘어지면서 눈을 찔렀다는 전승도 있다.

궁예가 헌안왕이나 경문왕의 서자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도 많다. 일단 신무왕이나 문성왕아들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것은 순천 김씨, 광산 이씨의 족보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물론 족보라는 것은 조상에 대한 과장된 전승과 황당무계한 전설까지 그대로 싣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그 사료적 가치를 거의 인정하지 않긴 하지만, 고려시대 이후 일반적으로 악인으로 규정되었던 궁예를 일부러 자신들 가문의 조상으로 내세울 필요는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최소한 이들 가문이 궁예의 후손일 가능성은 상당히 클 것이라고 보아 궁예를 주로 연구한 여러 학자들 중 하나인 이재범 교수는 이 기록에 어느 정도의 신빙성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신라 왕실과의 직접적 혈연관계를 부인하는 주장들도 많다. 예를 들면 임용한은 아예 대놓고 궁예의 출생 이야기는 전형적인 술자리 허풍의 구조를 갖고 있다고 비하할 정도. 대표적으로 여자 한 명이 눈이 찔려서 마구 우는 아이를 데리고 몰래 도망치는게 가능했겠냐는 것. 뿐만 아니라. 당시 신라에는 그렇게 높은 건물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이고 있다.[10] 물론, 임용한도 궁예가 진골 방계나 어쩌면 진짜 신라 왕자일 가능성 자체는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지만, 궁예가 버려지는 과정은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궁예가 적어도 신라의 지배층 출신이라는 설은 부정하기 쉽지 않고, 궁예시대 당시부터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현대에서도 딱히 이를 부정할 근거는 많지 않고, 그저 아마추어인 역덕후나 그런 설을 제기할 뿐이다. 적어도 신라 말기에는 왕을 둘러싸고 바람 잘 날이 없었으므로, 왕자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왕이 될 수 있었던 신라 지배층 출신일 가능성이 많다. 가령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면서 신라의 왕자라고 굳이 사칭할 필요는 없었다. 신라 북부의 호족들이 대부분 고구려계였고, 이들은 신라가 흔들리자 가장 먼저 고구려 부흥의 기치를 내세웠는데, 이들을 아우르기 위해 사칭을 했다면 차라리 고구려 왕족의 유민이라고 사칭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11]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이미 먼 옛날인 고구려보다 생존해있는 신라 왕실의 권위가 더 컸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자신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신라 왕의 초상화를 로 베었다는 일화를 비롯해서 신라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았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궁예는 신라의 지배층에 상당한 악감정을 품고 있었다. 이는 궁예 자신이 신라지배층과 모종의 악연이 있으며, 신라지배층에서 밀려난데 대한 원한으로 해석될 수 있다.

게다가 궁예가 자기 출신을 사칭했다면 고려의 궁예 격하 과정에서 출신을 속였다는 언급이 있었을 텐데 그런 흔적도 없다. 궁예 말기를 보면 완전히 사이코패스 패륜아인데, 고려의 사서들은 변태적이고 엽기적인 궁예의 행각을 자세히 묘사하면서도, 정작 고대사회에서 중요시되는 출신을 가지고 궁예를 까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고대에서 혈통은 정통성의 상징이었으며, 가문이나 혈통적으로 문제가 있는 이들은 항상 정적들에 의해 공격받았다. 가령 고려사에서 고려왕조가 어긋났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우왕을 신돈의 아들이라고 조작해 기술하거나 혹은 사기에서 진시황을 여불위의 아들로 묘사, 그리고 조조를 비난하면서 조조가 내시의 후예라던지, 거지[12]의 아들이라고 조작하거나 폄하되고 있다. 만약 궁예가 신라 왕족을 사칭을 했다거나 혹은 그의 출신에 대한 의혹이 있었다면 고려의 사서에는 당연히 언급되었을 것이다.

허나 고려 왕조로서는 궁예가 신라 무슨 왕 아들이니 하는 말이 의심스럽다고 해도 굳이 부정할 필요까진 없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런 설은 궁예가 신라 왕자 출신으로 신라를 핍박한 불효불충한 인물이므로 벌을 받는 게 당연하다는 식으로 왕건역성혁명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삼국사기》의 대미를 장식하는 사론이 딱 그런 논지로 쓰여 있다.

현재의 학자들 중 많은 수는 궁예가 왕족의 후손이 아니라 권력 투쟁에서 몰락한 진골 귀족의 후손이 아닐까라고 추측한다. 만약 그렇다면 궁예가 신라에 대해서 증오심을 품은 이유도 그 때문으로 추측할 수 있다. 실제로 통일신라 말기에는 신라 왕족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는데 무열왕의 후손으로 원성왕과의 왕위 다툼에서 밀린 다음 명주로 밀려나 '명주군왕'을 칭했다는 김주원, 김주원의 아들로 '장안국'을 세웠다가 몰락한 헌창, 김헌창의 아들로 역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한 김범문 등의 사례가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궁예는 어릴 적에 성격이 괄괄하여 늘 말썽을 피우며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 유모가 출생의 비밀을 털어놓자 궁예가 뉘우치고 출가해 세달사(世達寺)[13]란 절에 들어가 이 되었다는 것. 궁예는 법명을 자칭[14] 선종(善宗)이라고 하고 장성할 때까지 세달사에서 지냈다.

궁예는 이곳에서도 신체를 단련하는데 힘을 썼다고 하며 특히 궁술에 능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삼국사기》에 없는 그냥 민간 설화 내지는 후대 작가의 창작이다. 물론 대하 드라마 태조왕건 등에서 세상이 워낙 흉흉한 시기라 산 속에 사는 스님들도 무술을 갈고 닦았다는 식으로 그리는 것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이기는 하다. 실제로 해인사 묘길상탑기에는 도적의 침입에 맞서다 많은 승려들이 죽었다는 언급이 있고, 고려 시대까지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이나 을 관리하는 사찰의 경우 아예 성벽을 둘러 요새화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곳이 김제 금산사주변의 성터.[15] '삼국사기'에 따르면 절에서 장성하자 '승려의 계율에 얾매이지 않고 기상이 활발하고 뱃심이 있었다.'고 전한다.

세달사에서 지내던 중에 하루는 까마귀가 바리대 안에 무언가를 떨어뜨리고 날아간 일이 있었다. 바리대에 까마귀가 떨어뜨리고 간 것은 점을 칠 때 쓰는 상아로 만든 산가지 였는데 거기에는 (王)자가 새겨져 있었고[16] 궁예는 자신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 될 것을 예감했다고 한다.

2. 미륵정토를 꿈꾸다

신라 말기에 각지에서 군벌이 일어나자 궁예는 세달사에서 나와 죽주(안성)에서 한창 세력을 날리던 기훤의 휘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기훤은 궁예의 재능과 인물됨을 잘 알아주지 않았고 궁예는 더이상 그의 휘하에 있어봤자 비젼이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후 궁예는 함께 기훤의 밑에서 활동하던 청길, 원회, 신훤 등과 기훤을 떠나 북원(지금의 강원도 원주시)에서 위세를 떨치던 양길에게 갔다. 사극 태조 왕건에서는 원회와 신훤이 의기투합하여 포악한 기훤을 처단하고 궁예를 새 우두머리로 추대하나 세력의 한계를 느끼고 자신의 세력을 양길에게 바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양길의 부하가 되어 여러 성을 정복한 궁예는 견훤후백제를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도 자립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하여 894년에 명주에 무혈 입성한다.

이후 궁예의 행적에 대해 삼국사기에 의하면 "사졸과 함께 고생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무사하였다."라고 하고 있다. 궁예가 어떻게 민심을 얻었는지를 짐작할수 있는 대목으로 귀족들의 수탈에 질려 있던 백성들에게 공평무사한 궁예의 행보는 당연히 환영을 받았을 것이다.

당시 명주의 성주는 김순식으로 태종 무열왕의 직계손이였다. 게다가 그는 태백산맥 동쪽, 오늘날로 치면 영동 지역에서 엄청난 세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나중에 왕건에게 항복했을때 왕건이 대광 벼슬을 주고 자신의 성씨까지 하사해서 왕순식이 된 것을 보면...아무리 궁예의 군대가 강했다고 해도 김순식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왜냐하면 신라가 쇠퇴기에 접어들기 시작했던 36대 혜공왕보다 겨우 2명 뒤의 임금으로 신라 38대 왕이 되는 원성왕(재위 기간: 785년 ~798년)서 패한 뒤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해 이곳 '명주'땅으로 내려와 지배하면서 '명주군왕'(溟州郡王)을 자처한 김주원이 선조로 그가 명주를 지배한 후 후손인 '김순식' 때까지 100년이 넘게 지배적인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그리고 김주원 이후 그의 아들 김헌창(金憲昌)이 '내전' 규모의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되었고, '김헌창'의 아들인 '김범문'도 반란을 일으키다가 실패했는데도 불구하고 김주원의 자손들은 '명주'를 100년이 넘게 통치하고 있었다. 아무리 나말의 신라 중앙정부가 내부의 극심한 권력다툼과 부패, 수탈로 엉망이었다고는 해도 김주원의 아들인 '김헌창'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다가 진압이 되고, 이후 김헌창의 아들인 '김범문'도 다시 반란을 일으켜 2대가 토벌이 될 정도여서 마냥 무능력하지만은 않은 신라중앙정부군에게 '명주'만은 끝내 멸망당하지 않았고, 100년이 훨씬 넘게 명주에서 사실상 임금 행세를 할 수 있었던 '김주원'과 그 후손들은 믿기 힘들 정도로 강한 저항력을 가졌다. 훗날 918년 왕건의 역성혁명으로 궁예가 몰락하고 고려가 건국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김순식은 무려 10년을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지 않고 버티다가 928년 1월에 가서야 완전히 투항을 하는, 믿기 힘들 정도의 초인적인 저항능력을 보여준 것을 감안하면 당시 궁예가 나라도 건국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렇게 막강한 '김순식'이 지배하는 명주를 함락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김순식이 기득권을 보장받는 대신 명주를 궁예에게 바쳤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실제로 김순식은 왕건의 역성혁명 이후에도 10년 넘게 왕건을 반대하며 항복하려들지 않았다는 점으로 미루어본다면 김순식과 궁예의 관계가 상당히 밀접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후 장군을 자칭하며 양길로부터 독립된 세력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나서 899년에는 본격적으로 양길과 대립하기 시작하더니 비뇌성 전투에서 양길군을 완전히 격파하고 소백산맥 이북의 영역을 거의 장악했다.

901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17]라 하고 지금의 개성시에 해당하는 송악을 수도로 삼았다. 궁예가 고려라는 국호를 쓴 것은 송악과 인근의 패서지역 고구려호족들의 지지를 얻으려는 측면이 강했던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고구려계 호족들의 수장이라고 할수있는 왕건은 이 시절 승승장구해 나갔다.

그런데 904년, 궁예는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라 고치고 겨울 추위가 굉장히 혹독한 바로 그 철원에 도읍을 삼았다. 후고구려가 망한 게 혹시 겨울 한파때문인가? 왜 궁예가 3년 만에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와 연호를 고쳤는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나 대체적으로는 왕건을 위시한 고구려계 호족들의 세력이 궁예의 왕권에 장애요소가 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마진이란 이름 자체가 불교용어 마하진단(摩荷震檀)[18]의 준말, 혹은 마한, 진한을 의미하는데, 어떤 뜻이 되든 고구려의 이미지만으로는 삼국통일이 어렵다는 시각 하에서 내려진 결정이란 것이다.

실제로 궁예는 901년에 보였던 친고구려적 성향을 철원에 천도하고 나서는 버렸다. 신라의 오소경중 하나인 청주 주민들을 철원으로 이주시키고 아지태를 위시한 백제계 호족인 청주 세력들을 적극 등용한 것 등은 궁예가 고구려계 호족들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행해진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출생 탓인지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부르며, 강렬한 적개심을 드러냈다고 하지만, 내심 속으론 신라계를 포함한 여러 계통의 세력들을 이용해 고구려계를 견제할 정도로 냉철한 정치적 계산을 하는 인물이었던 듯하다. 이 예가 홍유와 배현경으로 이 둘은 신라의 농민 출신 인사였다.

3. 몰락의 징후들

911년에는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고쳤다. 속설에 따르면 오행설에 근거한 것으로 금생수(金生水)의 원리로 금의 기운으로 일어난 신라의 금덕을 잇겠다는 의도에서였다. 914년에는 연호를 다시 정개(政開)로 고쳤다. 고려사에 의하면 집권 후반기에는 스스로를 미륵이라 자칭했으며, 사왕진안관심법(觀心法)으로 사람의 마음을 뚫어본다고 주장하고 법봉(法棒)을 사용하여 신하들을 패 죽이는 등 광기를 일으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역시 궁예가 자신을 부처에 비유하는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을 미륵으로 칭한 것은 신라후기 혼란한 시대에 백성들에게 널리 퍼져있던 미륵신앙을 활용해 자신을 민중들에게 구세주로 각인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관심법은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는 방책이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궁예의 왕권강화책은 지나친 나머지 부작용을 일으켰다. 미륵신앙을 활용해 자신의 왕권을 높이려는 생각은 미륵신앙의 본산이라 할 수 있던 법상종과 갈등을 일으켰다.[19] 결국 궁예의 미륵신앙 정치화에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법상종의 거두 석총을 처형하는 사태로 나타나고 만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궁예가 20권의 불경을 손수 집필했는데 이게 요망스러운 불쏘시개여서 이 강설을 듣던 석총이 이런 해괴한 이야기로는 남을 가르칠 수 없다고 말하자 그 자리에서 석총이가 마군이야 마군이가 쓰였어!!! 하며 대놓고 욕을먹고 철퇴를 맞고 끔살당했다고 한다. 궁예가 썼다는 경전의 내용은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그 내용이 어쨌건 대놓고 경전을 제멋대로 찬술한 것은 불교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행위이다.[20] 게다가 당대의 고승을 무참히 살해했으니, 당시 불교계에서는 승려와 신도를 불문하고 충격과 공포를 받았을 것임이 분명하고 미륵신앙을 마음대로 이용하려는 행태는 불교 교단의 반발을 샀을 것이다.

또한 궁예는 관심법을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한 듯하다. 궁예는 점점 정적들에게 무자비해졌으며 자신의 왕권강화책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던 왕비 강비를 잔인하게 죽이고 이를 말리던 아들 청광과 신광까지도 죽이고 만다. 고려사는 이를 궁예의 광기로 규정했지만 아마도 궁예는 패서 고구려계 호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던 강비가 자신의 아들들을 앞세워서 궁예를 무력화시키려는 시도를 할 것을 우려했던게 아닌가 싶다. 실제로 강비의 죽음에서 궁예가 노린 것은 왕건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실제 궁예가 왕건을 죽이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낮다.
강비의 죽음 이후 패서의 고구려계 호족들은 궁예가 자신들을 제거할까 두려워한 것 같다. 이들의 우려는 그간 왕건만은 건드리지 않았던 궁예가 왕건마저도 반역을 했다며 죽이려드는 사건을 통해 현실화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수도를 철원으로 정한 것은 그다지 좋지 않은 정책이었다.일단 너무 추워서 철원이 비록 풍요로운 평야 지대이지만 철원 자체의 생산력만으로 수도의 경제를 유지하는 것엔 한계가 있었고 마땅히 외부와의 교류를 통해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편리하게 이루어져야 하는데, 당시의 철원은 이러한 교통이 불편한 곳이었다. 내륙 깊숙한 곳에 있는데다 수운 교통이 발달한 당시, 한탄강을 이용한 수운이 원활하지 않은[21] 철원은 사람의 이동이나 물자 이동이나 꽝인 곳이었다. 이 때문에 수도의 쌀값은 크게 치솟았고 백성들의 반감은 계속 커지게 되었다.

4. 최후

정개 5년인 918년. 왕건을 옹립하려는 역성혁명이 일어났다. 이 '역성혁명'은 패서 고구려계 호족들이 궁예에게 당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고 볼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실제 고려사를 보면 왕건이 역성혁명을 성공시킨 후 논공행상을 베풀었을 때 상을 받은 사람들의 명단을 보면 의외로 패서 지역의 옛 고구려계 대호족들이 전혀 없고, 또 역성혁명에 가담한 사람들의 숫자도 너무나 터무니 없이 적은 점을 알 수 있다. 흔히 패서 지역의 옛 고구려계 대호족이라고 할 수 있는 박지윤, 황보제궁, 유천궁이나 왕건의 후삼국통일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후삼국시대 최대의 명장인 평주의 유금필도 보이지 않고, 궁예 정권에서 왕건의 목숨을 구한 왕건 시대의 가장 뛰어난 문신이였던 최응도, 고경참문 사건에서 왕건의 목숨을 구한 송함홍, 백탁, 허원 같은 궁예의 궁 내부의 왕건 지지 세력도 보이지 않고, 왕건의 명을 받아 훈요 10조를 받아적은 박술희도 보이지 않고, 왕건의 주요 세력 기반중 하나인 나주 지역도, 그리고 왕건의 처가댁 호족 세력들도 보이지 않는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왕건의 역성혁명에 대한 논공행상에서 1등 공신과 2등 공신으로 임명된 공신들의 명단은 1등 공신에 홍유, 신숭겸, 배현경, 복지겸이며 2등 공신에 견권, 능식, 염상, 김락, 연주, 마난이 보일 뿐이다.

오히려 하현강이나 정청주, 조인성 같은 궁예에 호의적인 학자들의 말대로 왕건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당연히 존재했지만, 패서 지역 호족들을 등에 업은 궁예의 황후 강씨의 사건이 진압된 이후 큰 충격을 받은 궁예는 이를 계기로 자신의 친위세력들을 잘 활용해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들을 지속적으로 철저하게 감시하고 숙청한 관계로 이들 패서 지역의 고구려계 호족들 뿐만이 아니라 기타 왕건을 지지하는 반궁예세력들이 왕건의 역성혁명때까지 제대로 결집할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 근거가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예는 장기간의 지나친 폭정으로 인해 민심과 군심, 그리고 신료들의 이반으로 인해 반궁예 세력들에 대한 지속적이고 철저한 감시와 숙청에도 불구하고 본래 궁예의 지지층이였던, 애초에 대호족들과는 거리가 먼, 복지겸을 제외하면 모두 농민 출신의 전문 군인들이였던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의 4기장과 염상, 김락 같은 인물들과 그리고 궁예의 가장 핵심 지지층이였던 청주 지역 출신의 환선길, 환향식, 견권, 김근겸, 김관준, 김언규 등의 청주 세력의 일부가 궁예에게 등을 돌리고 배신을 한데다가 수많은 전쟁으로 단련된 뛰어난 군사전략가이자 거듭된 전공과 시중으로 있을 당시 선정을 베풀어 민심과 군심의 지지를 얻은 왕건과 경서와 사서에 통달하고 관리로서의 실무에 밝고 익숙했던 태평 같은 인물을 막지 못하고 몰락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 의하면 궁예는 변장을 하고 부양 산골현으로 도망치다가 배가 고파 보리이삭을 날로 먹던 중, 백성에게 발각되어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보리이삭은 날로 먹을 수 없는데 이걸 먹을 정도였다는 건 상황이 어려워짐을 비유한다고 보면 된다.

궁예의 최후에 대해선 분분한데 <광산이씨소고>에 따르면 궁예왕은 측근 몇 사람을 거느리고 현 평강(平康)방면으로 도주 중 수풀속에 숨은 폭도들의 죽창에 찔려 삼방(三防)땅에 이르러 말 위에서 분사하였으나 생시처럼 꼿꼿히 앉아 있었다 한다. 왕건이 달려와 조문하나 유해는 움직이지 않으므로 모든 사람이 겁내어 부득이 직립한 채로 입관케하여 석축으로 수십 길이나 높다란 분묘를 만들어 왕후의 례에 따라 정중히 장례를 지냈다고 하며 오래도록 연 1회 향사를 올렸다고 전한다.

철원 일대 민간에 전해오는 전설에 따르면 궁예왕은 쫓기어 삼방골짜기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한 스님 만나 "혹시 용잠호장(龍潛虎藏)할 만한 곳이 없겠느냐?"고 물었으나, 스님이 말하기를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는 이런 협곡에 들어와 살아남겠다는 것이 어리석다"고 말하자 궁예는 "드디어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 높은 곳에서 의연하게 몸을 던져 자살했다고 한다. 그러나 '광산이씨소고'처럼 궁예의 최후에 대해 호의적인 민간전승들만 있는 것은 아니여서 또 다른 이야기로는 백성들이 물러나라고 난리치자 "한탄강가의 돌에 좀이 슬기 전까지는 물러날 수 없다!"라고 일갈했다. 그런데 다음날 득달 같이 한탄강 주변에 가 봤더니 진짜로 돌에 좀이 슬어 있었고, 이것을 궁예에게 보여주며 물러나라고 하자 궁예가 "내 운수가 다했구나"라며 탄식하며 성을 버리고 나갔다는 이야기이다.

고려사에는 궁예 세력이 간단히 붕괴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철원 지방에서는 궁예가 강을 건너 도망갈때 한탄했다고 해서 한탄강이란 이름이 붙었다거나, 궁예가 군대를 이끌고 왕건의 군대와 장기간 대결하거나 산에 은거해서 싸웠다는 민간전승들이 많이 있다.

실제로 궁예 사후 청주에서 잇달아 반왕건 반란이 일어났고, 열렬한 궁예 지지자였던 명주의 김순식은 4년이 넘도록 왕건에게 항복하지 않다가 왕건 즉위 11년후에야 완전히 귀부한 것으로 볼 때[22] 왕건의 역성혁명은 전체적인 지지를 받은게 아닌 것이 분명해 보인다. 다만 왕건의 집권 직후 일어난 반란들은 청주,공주,명주 등 모두 친궁예 지역이라는 한계는 분명히 있다.

그리고 한탄강의 뜻은 궁예와는 상관이 없고, 크다는 의미의 순우리말 한, 여울 탄(灘)의 '큰 여울이 있는 강'이라는 뜻이다.[23]천년 뒤에 러시아에서 환생했다고 카더라.

5. 평가와 후일담

물론 잘못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궁예는 상당히 능력있는 정치가였던 것만큼은 틀림이 없다. 또한 일개 떠돌이 이었던 신분에 출발해서 양길의 휘하에 들어갈 적에는 이미 그의 심복이 되어 장수로 이름을 떨쳤던 것을 보면 군사적인 재능과 통솔력, 카리스마 또한 남달랐던 것 같다. 대개 성공한 반란 이후에는, 으레 구지배체제에 대한 격하와 깍아내림이 뒤따르지만 왕건이 등극한 이후 10여년이 지나도록 궁예는 "대왕 전주(大王 前主)"라고 일컬어지며 선각사대사비에 기록되었는데 이는 궁예를 추종한 잔존세력의 비중이 왕건의 고려 정권 핵심부에서도 마냥 무시할 수 없을 크기였다는 의미.

궁예의 몰락은 너무 성급하게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것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왕건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회유책을 쓴 것과 대비된다. 하지만 그 회유책이 왕건 사후에 불러온 다툼을 생각한다면...하지만 임용한처럼 궁예의 능력과 그릇은 딱 도적 두목 수준밖에 되지 않았고 일국의 왕이 될 그릇은 아니라고 비판하는 학자들도 있다.

오늘날 휴전선 비무장지대 안에는 궁예가 건설한 철원성의 유적이 남아있다고 하지만 비무장지대인 탓에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요원한 상황이다. 철원성 유적은 하필 재수없게 휴전선이 정확하게 관통하고 있다. 그런데 통일이 된다고 해도 문제가 생기는데, 이번엔 경원선이 철원성을 완벽하게 관통한다.

하지만 현재 경원선은 단선에다가 선형이 약간 좋지 못한 관계로 통일 후에 철원성 유적을 보존하면서 주간선인 경원선을 복선 또는 복복선화시키면서 이설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경원선 백마고지역 연장공사는 선형문제로 선로를 약간 변경했다. 이 경우에는 오히려 유적이고 뭐고 무시한 일본이 삽질한 것일지도

재미있게도, 궁예의 시대에는 자칭 미륵이었던 것이 어느 새인가 진짜 미륵으로 둔갑하여 고려 시대부터 지금까지 마을신앙으로 자리잡았다.

현존하는 경기도 안성의 궁예미륵.*

또한 순천 김씨와 광산 이씨는 가문의 시조가 궁예의 후손이라고 족보에 기록하고 있다. 다만 순천 김씨에서는 궁예가 신라 왕실 족보를 끌어쓴게 와전되었을뿐 궁예와 순천 김씨와는 관계가 없다고 한다. 실제로 시조 김총과 궁예와의 관계에서 석연치 않은 부분이 몇군데 있기도 하고. 특히 순천 김씨는 그 유명한 김종서를 배출한 가문이다. 한 가지 더 아이러니한건 김종서와 광산 이씨의 이선제는 고려사 편찬에 일익을 담당한 사람들이다. 이게 사실이면 두 사람은 조상을 비하하는 사서 편찬에 관여한 셈. 이는 궁예가 어찌 되었든 신라의 왕족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신라 왕실과 집안의 혈통을 연관짓기 위함일 가능성도 있다.

철원 지방에는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을 처음 옮겼을 때 눈에 보이는 돌마다 구멍이 숭숭 나 있는 것을 보고 왕조의 몰락을 직감했다는 설화[24]가 있다. 현무암 지대인 철원의 자연지리적 특징과 태봉의 역사가 결합된 설화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해당 지역에서는 종종 "곰보돌"로 부르는 모양.

6. 폭군이었나?

당시 궁예의 폭정 증거는 아래와 같다.

1.부인 강비과 두 아들 살해
2.당시 불교 고승들을 살해하고 자체적 불경 제작
3.자신이 제작한 불경을 비판한 불교 세력 숙청
4.호족과 공신세력 숙청
5.사치와 낭비로 민심이반
6.신라계 차별
7.미륵신앙을 이용한 사이비 교주 등이다.

최근에는 기존 역사가 승자 입장에서 기록되었을 뿐 막연한 폭군은 아니라는 주장도 나온다. 궁예가 부인 강비과 그 두 아들을 살해한 것은 당시 호족 중에서 궁예의 중앙집권에 가장 반대하는 세력이 강비의 친정 세력이었고 이들은 궁예와 강비의 두 아들을 내세워 궁예의 왕권강화에 저항하였다는 역사학자들간의 주장이 있었고, 불교 고승들 숙청과 해괴망즉한 불경제작도 당시 귀족 중심의 불교에 익숙한 불교계에 민중 중심의 불교를 전파하려는 갈등으로 추정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어쨌든 불교계에서 금지되는 행위를 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가 없는 면이 많다. 민중을 위한 불교의 뜻은 좋으나 그것이 불교의 기본 교리 조작과 무고한 불교 고승 숙청까지 정당화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또 같은 승려라는 이유로 불교계에서 호감도 많이 있지만, 궁예의 호족과 공신 숙청은 다른 왕조들에서도 보는 왕권강화의 일환이었으며,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뒤 광종이 등극하여 개혁할 때까지 고려 황실과 조정이 호족과 외척,공신들로 인한 심각한 혼란에 종묘사직이 위협받을 정도로 강했던 호족과 공신 문제를 진정시키기 까지 많은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면 오히려 궁예의 공신숙청과 미륵불 자처 행동은 당시 옹호될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때는 전시이기 때문에. 전시라면 당연히 기득권자들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라 그들의 비위를 잘 맞추어야 할 판국인데 전시에 이렇게 기득권자와 척을 지는 것을 적국에 매우 큰 이득을 주는 행위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래서 '토사구팽'으로 유명한 한고조 유방과 고려 광종은 나라가 통일이 된 상태에서 기득권의 숙청작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궁예의 경우는 시기적으로 절대 적절하지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궁예에 대해서는 민간에서 전국적으로 신격화되어 숭배되었던 위인들인 단군, 고려강감찬, 공민왕, 최영, 조선단종, 남이, 김덕령 등과 달리 경기도 안성을 제외하면 전국적으로 좋은 민간전승을 찾기 어렵고, 오히려 궁예의 정치적 고향인 철원에서는 궁예가 죄없는 사람들을 무수히 죽였다든지 심지어는 많이, 혹은 날마다 인육을 먹었다는 등 삼국사기,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에도 없는 더한 악행이 소개되고 있어 백성들에게 좋았던 임금으로 보기 어려운 면이 많다. 또 입지상으로 매우 좋지 않고, 또 매우 화려하게 지은 철원 도성을 짓는데 백성들의 고초와 경제난이 컸다는 것은 궁예를 옹호하는 학자들도 동의하고 있다.

* 반대로 궁예가 매우 잘 생겼고, 눈이 번뜩였다는 식의 궁예의 외모가 뛰어났다고도 하고 궁예의 그 외모를 보고 왕건의 아버지 왕륭이 귀부했다는 이야기라던가, 왕건의 역성혁명 후 궁예가 바로 죽은 것이 아니라 왕건과 장기간의 치열한 혈전 끝에 세가 불리해져 자살을 했거나 아니면 세력을 모두 잃고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는 이야기들은 매우 많이 남아 있다.

물론 우리가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이 아닌 만큼 그 당시의 상황에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은 쉽지 많은 면이 있다. 그러나 궁예의 인성에 대해 민간 전승들이 대부분 부정적인 것을 보면 궁예에게 좋은 평가를 내리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7. 창작물에서의 궁예

7.1. 영화

워낙 옛날 일이라 잘 알려져있지는 않지만 궁예가 등장하는 영화는 종종 있었다. 궁예가 등장하는 최초의 영상물은 1959년에 제작된 영화 <왕자 미륵>으로, 신라 말기에 궁예가 어지러운 난세를 평정하고 태봉을 건국한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당대의 스타였던 방수일과 도금봉이 주연을 맡았다. 다만 작중에서는 궁예라는 이름 대신에 '미륵'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1970년작인 영화 <태조 왕건>에서도 등장하는데, 작중에서는 간신배 및 간신배와 간통을 하던 왕비의 꾀임에 놀아나다가 살해당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작중에서 주인공인 왕건은 궁예를 죽인 간신배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조정을 장악하고 고려를 건국한다.

7.2. 태조 왕건


김영철이 궁예였고, 궁예가 김영철이었다더라.

2000년, KBS의 전 드라마 <태조 왕건>을 통해 처음으로 궁예가 사극에서 조명되었다. 김영철의 열연 덕분에 강렬한 인상과 함께 수많은 명대사를 남겼으며 한 때 사람들에게서 관심법,'법봉'이라는 말들이 유행하기도 했고, 지금까지도 '궁예질'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화제가 된 캐릭터다. 참고로 김영철은 장기간 안대를 착용하는 바람에 후유증으로 김영철은 양쪽 눈의 시력이 달라져 부동시로 고생했다.

김영철은 이전에도 탄탄한 연기력의 중견 연기자였지만, 궁예 역 이후로 크게 인기가 폭발하여 2000년도에 KBS 연기대상을 수상했고, 이후 중년 연기자 중 본좌급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전이나 이후에도 다른 후삼국시대 배경 작품의 궁예 캐릭터도 김영철의 궁예 캐릭터를 못 따라갈 만큼 강렬한 연기를 보여줬다. 김영철이라는 배우 자체가 연기력과 발성이 출중하다 보니 어느 것 하나 버릴 부분이 없긴 하지만, 초반부와 전반부에 초강력 카리스마 연기를 선보여 국민들과 언론의 폭발적인 인기와 찬사를 받게 되었고, 이때 김영철의 카리스마에 대해 신문사들에서는 "궁예가 환생한 것 같다."라고 말하거나 같은 이환경 작가의 드라마였던 용의 눈물의 '태종 이방원' 역의 유동근과 더불어 "산도 움직일 것 같은 카리스마를 가졌다."고 이야기가 되었을 정도였다.

이환경 작가의 전작 '용의 눈물'과 마찬가지로 이 드라마도 당시 정치적인 관점에서 우리나라 국민들과 정치인들에게 큰 화제가 되었다. 특히 궁예와 아지태를 당시 현실의 주요 정치인들과 비교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고 이에 궁예와 아지태로 비교된 정치인들은 거세게 반발하는 사태도 생겨났다.

용의 눈물이방원야인시대시라소니와 더불어 이환경 작가의 전성기의 대표 개릭터인 태조 왕건의 궁예는 한국 사극에서 보기 드문 특이한 캐릭터다. 물론 광기어린 인물이 등장하는 거야 다른 사극에서도 종종 있지만, 이렇게 주인공급 인물이 미치광이인 경우는 굉장히 흔치 않기 때문. 때로는 강단 있고 영명한 군주인 듯하면서도, 어떤 때는 그야말로 피에 굶주린 광인과 같은 행동을 한다. 그래서 그의 모든 행동이 정치적이고 확고한 결심 아래 움직이는지, 아니면 완전히 광기에 물들었는지도 종잡을 수 없다. 기이한 카리스마를 느끼면서도 두려워할 수 밖에 없는 인물이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나약함도 표현된다. 역사서 상의 모습과 현대의 해석이 교차하는 수수께끼같은 궁예라는 인물을 광기와 제정신이 교차하는 식으로 표현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여러가지 요소가 더해졌기 때문에 한동안 인터넷상에서도 궁예의 관심법이나 그런 것을 관련으로 여러 합성 요소나 은어들이 탄생할 정도로, 당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 독보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으며 태조 왕건의 엄청난 고공행진을 이끌었던 최고의 공신이라 할 수 있다.

드라마 상에서는 초창기에 볼 때의 궁예는 호쾌하고 사사로운 것에 연연하지 않는 시원시원한 남자다운 성격이며, 헤아림도 깊고 지혜로워 창업 군주다운 면모가 있다. 기훤의 휘하에 있을 땐 기훤의 무관심에 방치된 다친 병사들을 치료해 주며 자신들에게 배급된 쌀도 내주는 배려심을 보여주었고 석남사에선 대장군인 양길의 사위이자 장수임에도 자신의 수하들을 이끌고 백성들과 함께 손수 밭을 갈고 일을 하였으며, 명주성을 공략하러 올 땐 군량미를 모조리 풀어 자신을 찾아 몰려들은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철원성 공략에는 투항을 권유하러 갔던 사자가 성 앞 진영의 장수의 활에 죽은 채 돌아오자, 진심으로 안타까워 하며 "수많은 희생을 막으려 했던 성스러운 죽음이다. 도솔천에 올라 영생불멸 할 것이다."라며 기도를 해 주었다.

황제가 된 이후에도 백성들은 굶주리고 있는데 송악에 궁궐을 짓는 게 마음에 걸린다 하고, 과거에 인연이 있긴 하지만 일개 신하가 된 왕륭이 죽자 친히 문상을 가기도 했다. 또 적이 되었다곤 하지만 양길의 부하로 있다가 양길을 배신한 양심의 가책과 양길과의 옛 정으로 양길과의 전투를 피하려 했고, 비뇌성 전투에서 양길이 패배하자 자신의 아내인 미향과 함께 조용히 살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권하기도 했었으며 이후 순행길에서 죽주의 태수가 화려한 식기와 기름진 음식을 내오자 "관리가 청렴해야 백성이 편하다."며 호통을 치며 상을 3찬까지만, 고기를 빼고 다시 차려올 것과 음식들을 구휼소의 병자들에게 줄 것을 지시한다. 특히 그 당시엔 고가의 사치품이었던 유리잔에 술을 담아서 준비해뒀는데, 궁예가 특별하게 유리잔을 지적해서 "황궁에서조차 이런 비싼 것은 쓰지 않아!"라며 집어든 다음에 깨버렸다. 항복한 호족들이 예물과 미인들을 바치자 정색하며 "백성들은 나의 수족이요 , 부모요, 자식이라 하였소. 지금부터라도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시오."라고 꾸짖고, 미인들은 궁에서 일을 하게 하고 예물은 군비에 충당하는 모습도 보여주어 그야말로 '미륵의 현신' 같은 모습을 보여 백성들에게 크게 지지를 받는 어진 성군이었다.
다만 양길과의 두 차례 전투후 종간의 지시로 원주에서 죽주에 이르는 양길의 근거 지역들의 백성들은 양길을 따랐다는 억지스럽기 그지없는 구실로 모조리 학살했는데도,[26] 궁예는 이를 방조했고,이것이 왕건이 궁예에게 받은 첫번째 충격이였다. 또 자신의 첫부인 미향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을 버리는 짓도 저질렀다. 이 2가지의 만행들만 제외하면 그래도 백성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인물이었고 어질고 현명한 성군이자 미륵불의 현생이라는 이야기를 들을만한 사람이였으나.........

하지만 아지태의 아첨을 가려듣지 못하고 자신이 진짜 미륵이라는 과대망상에 빠져가면서 백성과 신료들에게 옴 마니 반메 훔을 외게 하는 등 초심을 잃고 권력에 타락해가게 된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이전의 대범하고 호탕한 풍모는 잃지 않았다. 이미 석총이 이때 한번 궁예는 미륵이 아니라고 면전에 따졌으나 궁예는 관대히 넘어갔다. 이후 후백제의 첩자에게 영 좋지 않은 독화살을 맞고 여러날 사경을 해메다 깨어난 뒤로는 이로 인한 마음의 병과 가슴앓이 통증에 사로잡혀 완전히 폭군으로 돌변해 버린다. 그야말로 사이비 종교 교주가 다 되어서 관심법 운운하며 사람들을 쳐죽일 때는 엄청난 광기를 보인다. 자신의 불교 경전이 모두 거짓이고 궁예도 '거짓 미륵'이라고 신랄히 비판한 석총을 철퇴로 쳐죽이고, 또 자신의 관심법 시행 도중 한 신하가 기침을 하자 그 신하를 '마구니'로 부르며 철퇴로 쳐죽이고, 군훈련장에서 한 장교가 말에서 떨어졌을때 그 장면을 본 신료들의 부인 다수가 웃자 어디 이런 상황에서 음탕하게 웃을 수 있냐고 하면서 웃은 부인들을 모조리 철퇴로 쳐죽인 다음 목을 베어 효수하고, 또 순행중 궁예의 폭정에 분노한 일부 유민들이 궁예에게 돌을 던져 이에 머리를 맞고 피를 흘리게 된 궁예는 극도로 노해 그들을 잡으라고 지시했으나 모두 놓쳤다는 보고를 듣고 이 사건이 일어난 고을의 죄없는 주민들을 모조리 불태워 죽이고, 이 고을이 소속된 지역의 주민들도 모두 죽이는 '악마' 그 자체가 되었다. 이외에도 자신의 출생에 대한 한으로 신라귀순자들을 모조로 학살하고 그밖에도 다른 학살들을 수없이 저지른다.
보다 못한 종간이 '백두산 도인'을 모셔와 치료를 했지만 병만 나아졌을뿐 포악하고 과대망상적인 면은 전혀 고쳐지지 않았다. 궁예가 강비와 두 아들을 죽인 후 종간은 은부에게 병이 더 심해지셨고 실성을 하셨다고 한탄한다.

이런 인물이기 때문에 자기 부인과 아들을 이라 부르며 죽일 때, 그리고 왕건이 반역을 했다고 말하면서 미륵관심법을 쓴다면서 추궁할 때는 그야말로 긴장감이 상상을 초월한다. 정말로 미친 인간인지, 아니면 무슨 목적이 있어서 냉철한 감정으로 이성적 판단에 따라 이런 짓을 하는지 모를 행동을 한다.

아무래도 스토리가 궁예가 죽고 왕건이 고려를 세워야 하니까 원래는 금방 죽을 캐릭터였는데 그 인기 덕분에 비중있는 캐릭터로 변해서 궁예의 등장이 1기 / 견훤이 실질적인 주인공인 2기 하는 식으로 나뉘었다. 덕분에 태조 궁예,미륵 궁예라는 이명도 얻었다. 실제 방영 당시 궁예가 죽자 많은 시청자들이 드라마가 끝난 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죽음도 역사서와 다르게 <태조 왕건>에서는 비장하고 카리스마있게 영웅다운 최후로 각색했다. 죽기 직전에 왕건과 마지막으로 을 나누며 하는 대사나 모습은 정말 명장면 중의 명장면. 참고로 이 장면은 김영철의 제안으로 만든 장면이라고...

이 장면에서 작가의 입맛에 따라 자신이 미화하고 싶은 기록에 한해서만 '승자의 기록'을 들먹이면서 미화를 하려 했다는 비판도 있는데 작중 궁예의 죽는 장면이 나온 직후 창작이라는 나레이션을 넣어줘서 혼동하는 일이 없도록 조치했다. 사실 궁예란 인물의 기록이 워낙 적어 관점에 따라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릴 만한 인물이고[27] 삼국사기의 기록이 궁예의 곡해가 나올 수 있을 뿐더러, 각색은 했지만 드라마 내에서 사서에 기록한 궁예의 포악한 행동들도 그대로 묘사하니 일방적인 미화나 왜곡이라 하기는 어렵다.

강비와의 사이에서 아들 셋을 두었는데 그 중 '청광'과 '신광', 이 둘은 궁예가 때려죽였고 살아남은 갓난 막내 '순백'은 궁예 사후 한 궁녀가 몰래 궁에서 키우다가 우연히 아기 울음소리를 들은 왕건과 신료들에게 발각된다. 왕건은 신료들의 우려에도 자비를 베풀어 '순백'은 목숨을 건지고, 드라마의 나래이션에서 이 아이는 훗날 고려 조정에서 벼슬을 했다고 소개되었다. 또 양길의 강제적인 혼인 압박으로 혼인하게 된 첫번째 부인 '미향'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도 하나 있는데 궁예의 부하들에 의해서 죽은 것인지, 아니면 어디서 길러지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미향과 궁예가 죽어 '태조 왕건'에서는 더 이상 언급이 없다.

여담으로 극중 무력 최강자중 하나로 '태조 왕건'에서 수백근의 청동화로를 집어던지고, 말 두 마리에 연결된 통나무를 빼앗아 그것으로 왕건의 병사들을 쳐죽여 역시 극중 최강자중 하나인 견훤과의 1:1 대결에서 비길 정도였다. 이 결투 이전에 궁예와 종간을 포함한 왕건 일행이 '서라벌'로 향할 때 도적떼가 나타나 공격을 했을때 신들린 솜씨로, 돌지팡이인 석장 하나만으로 도적들을 가볍게 때려잡았고, 얼마후 '위홍'의 명을 받고 왕건 일행을 구하러 달려온 견훤은 궁예의 무예 실력을 보고 매우 놀라워 했으며, 궁예는 견훤의 무예를 매우 인상깊게 보았다. 이후 '위홍'의 집에서 일어난 시비로 둘이 싸우게 되었을때도 견훤은 그의 무예에 놀라워 했으며 궁예는 전과 마찬가지로 그의 실력을 매우 인상깊게 여겼다. 둘의 반응만 보면 궁예가 우위에 있다는 느낌도 들 정도.
다만 이것은 단지 궁예가 견훤보다 담력이 강한 탓일 수도 있고, 아니면 견훤은 군인이고, 궁예는 비록 무술수련을 장기간 했다고 하지만 어쨌든 승려가 이 정도로 무예솜씨를 가진 것에 놀란 것일 수도 있고, 또 아니면 궁예는 견훤에 비하면 희노애락이 잘 느껴지지 않는 냉정한 성격이이서 그럴 수도 있다. 또 극중에서나 실제 이름을 보아도 활의 명수라는 이야기와 추측이 있는데, 실제 극중 드라마에서는 활을 쏘는 모습이 1회인 '철원성 전투' 외에는 전혀 없어 이 점이 아이러니이다. 또 극중에서 거병 이전의 초창기와는 달리 이후로는 일체 무예신이 나오지 않아서 이 점이 아쉬운 부분이다.

이 작품에서의 연기 덕분에 김영철은 야인시대에서 장년 김두한 역할로 캐스팅되어 이환경 작가와의 인연을 한 번 더 이어가게 된다. 야인시대 마지막회에서 말년의 김두한의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불상 앞에서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절을 올리는데, 태조 왕건에서 궁예가 석가모니를 자신의 자리를 훔친 도둑이라 칭한 것을 생각나게 하는 묘한 장면이다.

7.2.1. 패러디

한창 이 드라마가 유행할 때, 신라 출신이라는 이유로 플래쉬로 패러디되었다. 궁예가 폐하라고 부르지 말라는데, 내군이 폐하라고 부르는 센스

위에 나온 '누가 기침소리를 내었는가?'를 니코니코니를 시전하는 신하를 죽이는 장면으로 패러디한 영상도 있다.

사실 모에속성을 가진 캐릭터이다 이...이이 음란한 짐승같으니라구!


7.3. 천년의 신화

일반적인 커스텀 플레이시 고려군. 고려 미션에서는 역사대로 왕건의 반란 뒤 죽는다.
미륵염화술이라는 사이오닉 스톰 비슷한 불기술을 날린다. 천년의 신화 항목 참고.

7.4. 기타 소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일목대왕[28]의 철퇴'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썼다고 한다. 여기서는 자주적인 일목대왕과 부패한 권신들간의 대립을 다루었다는데 보신 분 있으면 추가바람.

김정한소설 왕건에서는 천하의 개쌍놈으로 나온다. 여기서는 왕비 강씨를 그냥 죽이지 않고 달군 쇠로 강비의 음부를 찔러 입으로 나오게 한다. 하지만 이게 원래 궁예의 모습은 아니고, 궁예가 사냥을 하다 머리에 큰 부상을 입은 후 인간이 달라졌다는 식으로 묘사되며, 이는 태조 왕건에서 이 내용을 차용해 궁예가 머리를 다친 까닭을 후백제의 암살시도로 바꿨다.

머리를 다친 뒤에도 가끔 제정신이 돌아오면 사리에 맞게 판단한다. 머리를 다치기 전의 궁예는 성군이라 할 수는 없지만, 난세를 평정할 자질이 있는 군주의 모습은 충분히 보여준다. 참고로 여기에서 강비는 왕건의 어린 시절 첫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던 사이지만 정략결혼으로 궁예에게 간 것으로 나온다. 역시 태조 왕건에서도 보이는 장면. 다만 드라마상에서는 민간 전승에서 빌려온 설정이라고 나온다. 강비가 죽기 전에는 비록 사랑하는 이를 뺏은 사람일지언정 알고 그런 것도 아니고 난세를 헤칠 영웅이었기에 왕건이 궁예의 신하로서 충성을 다했지만, 강비의 죽음 뒤로 궁예에게 회의를 품고 끝내 역성혁명을 일으킨다.

춘원 이광수의 소설 마의태자[29]에서는 주인공으로 나온다. 기존의 인식과 달리 용감하고 정의로우며 카리스마 있는 영웅이지만, 자신과 시대의 한계를 못 이겨 몰락해가는 비운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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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아래에도 나오지만 궁예가 국호를 마진, 태봉으로 바꾸기전 최초로 사용한 국호가 고려다.
  • [2] 태봉 전에 사용한 고려,마진 이라는 국호도 사용했지만 최종적으로 사용한 국호는 태봉이기에 태봉으로 표기.
  • [3] 경기도 안성에 위치한 칠장사란 절에 그려진 궁예 벽화이다.
  • [4] 국호가 마진이었을 때 사용하였다.
  • [5] 국호가 태봉이었을 때 사용하였다.
  • [6] 신라 왕족 출신이 맞는 경우. 이 당시에 궁예에게 성과 이름을 붙여 김궁예로 불렸는지 그냥 궁예로 불렸는지는 불명. 그라나 김예로 불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 [7] 견훤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성씨 사용이 일반적이지 않음을 고려하여 이름이 그냥 궁예라고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 [8] 음력 6월 14일에 쿠데타가 일어난 뒤 도망가다 죽었다.
  • [9] 참고로 맹상군이 바로 이 5월 5일생이었다. 항목 참조.
  • [10] 이것은 임용한의 오류다. 룡사 9층탑을 비롯, 후기 신라에는 2층 이상의 고층 탑루들이 있었음이 여러 문헌 및 발굴자료에 나타나고 있다.
  • [11] 위서 환단고기에서는 고구려 왕족 출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연하지만 근거는 없다.
  • [12] 진림의 격문에서 조조의 아버지 조숭은 거지였다고 묘사된다.
  • [13] 흥교사의 다른 이름으로 흥교사는 지금의 강원도 영월에 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다른 설도 있고 사극 태조왕건에서는 개성 인근 설을 채택하였다.
  • [14] 누구한테 받은 게 아니다. 《삼국사기》 궁예전 원문에 自號善宗이라고 되어 있다.
  • [15] 삼국 시대 사찰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성벽으로, 현재는 성벽이 복원되었다.
  • [16] 산가지 4개를 떨어트려 그것이 王자를 그렸다거나, 왕 자가 씌어진 자갈을 떨어뜨렸다는 버전도 있다.
  • [17] 후고구려라는 명칭은 먼저의 고려김부식이 살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궁예가 살던 당시에는 쓰이지 않았다.
  • [18] 풀이하면 대동방국 혹은 마하를 큰나라로 진단을 동방으로 해석해 동방의 큰 나라라는 의미가 있다. 다만 태조 왕건에서 채택한 설이지만 정설은 아니다.
  • [19] 법상종이란 종파가 미륵불을 주불로 삼는 종파다. 그런데 자신이 미륵이라는 자가 그런 법상종과 갈라진다는 것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20] 일부 문학작품에서는 미륵불이 속임수를 사용한 석가불에 의해 밀려나 세상이 혼탁해졌다는 내용의 무가인 창세가를 궁예의 불경의 내용으로 넣기도 하나, 어디까지나 문학적 상상력일 뿐 근거는 없다.
  • [21] 한탄강은 현대에도 유속이 빨라서 래프팅 용으로 애용되지만, 그 만큼 사고위험이 높은 강이기도 하다. 위험한 강이니 수운으로는 그리 적합하지 않다.
  • [22] 무력충돌은 없었고, 귀순 후 왕씨 성을 하사받고 왕순식이 되었다. 928년에 완전히 귀부했고, 이후 일리천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 [23] 두산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 [24] 정확히는 백성들이 물러나라고 난리치자 "한탄강가의 돌에 좀이 슬기 전까지는 물러날 수 없다!"라고 일갈했다. 그런데 다음날 득달같이 한탄강 주변에 가 봤더니 진짜로 돌에 좀이 슬어 있었고, 이것을 궁예에게 보여주며 물러나라고 하자 궁예가 "내 운수가 다했구나"라며 탄식했다는 얘기.
  • [25] 처음 법봉을 제작한 후의 대사.
  • [26] 원주부터 죽주에 이르는 양길의 근거 지역들의 백성들은 양길에게 강제동원 되어 전장에 나섰을 뿐이였다.
  • [27] 시중에 나온 교양 역사서들만 살펴봐도 임용한의 전쟁과 역사에서처럼 도적떼 두목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단 평가에서부터 이재범의 슬픈 궁예에서처럼 나름대로 확고한 비전을 가진 군웅이라는 평가까지 천차만별이다.
  • [28] 말 그대로 외눈(一目)대왕.
  • [29] 제목과 달리 마의태자는 소설의 후반부에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얽혀 잠깐만 나오고, 실제 주인공은 궁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