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HRSS

군벌

last modified: 2015-03-21 18:41:31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중국의 군벌
2.1. 대표적 군벌들
2.1.1. 북양군벌(北洋軍閥)
2.1.2. 서북(西北)군벌(국민군벌)
2.1.3. 산서(山西)군벌
2.1.4. 상(湘, 샹)계 군벌
2.1.5. 사천(四川, 쓰촨)군벌
2.1.6. 광서 군벌. 계(桂, 구이)계 군벌
2.1.7. 광동 군벌
2.1.8. 운남(雲南)군벌
2.1.9. 신강군벌
2.1.10. 마가군벌
2.1.11. 국민혁명군, 황포계
3. 일본의 군벌
4. 한국의 군벌
4.1. 대한민국
5. 현대의 군벌
6. 창작물 속의 군벌



1. 개요

한자: 軍閥
영어: Warlord
일본어: ぐんばつ(군바츠)

사병 등의 자신이 가진 군사력을 이용해 특정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실권자 혹은 세력, 집단.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지역 토호나 호족과 비슷하다. 하지만 대부분 일반적인 토호나 호족과는 규모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토호나 호족이 지역에 근거를 두고 오랫동안 지역의 우두머리라는 정치적, 경제적 의미가 강한반면 군벌은 신흥 군사세력으로 군사력에 기반을 두는 의미가 강하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개인 군대를 보유한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인류 역사상의 수많은 반란집단, 특정 지방을 장악하고 할거하는 지방정권도 넓게 보면 군벌에 속하며 소말리아, 우간다, 앙골라아프리카 지역에서 투닥거리는 이들과 아프가니스탄자헤딘, 탈레반 등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따지면 일본 전국시대때 일본 전역에 날뛰던 다이묘들이나 중국 초한지, 삼국지에 나오는 유방, 항우, 동탁, 조조, 유비, 손권, 손책 등 웬만한 군웅들 모두 군벌이다. 동탁은 서량에서 알아주는 군벌이며 손권과 손책의 경우는 그 아버지인 손견이 이미 강남에서 알아주는 군벌이었다. 실제로 동탁 - 이각, 곽사 - 조조로 이어지는 한말의 정치를 군벌정치라고 하기도 한다.

한국사에서 군벌 세력이 대두된 시기는 삼국시대 초기나 후삼국 시대, 즉 국가 체제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시기이다. 특히 후삼국 시대는 각지의 군벌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군벌의 전성기(?)였다. 이후 고려가 건국되면서 군벌 세력은 중앙 문벌귀족이나 지방 토호로 바뀌면서 소멸한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1960~80년대에 큰 정치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군부 인사들(EX: 하나회)을 군벌로 지칭하기도 하나 성격이 다소 다르다. 무엇보다 특정 지역에 대한 통치력의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하나회 같은 군부 내 사조직들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군벌로 분류하기 애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군벌에 비유되곤 하는데, 이는 다름 아니라 그들 군부 내 사조직들의 행태가 밑에서 후술하는 일본 현대사에서의 군벌들의 행태와 유사했기 때문이다.

일본 현대사에서 군벌은 메이지 시대 이후 형성된 군부의 장교 집단을 가리킨다. 건군 초기에는 메이지 유신의 주도세력이었던 조슈 번(지금의 야마구치 현)과 사쓰마 번(지금의 가고시마 현) 출신 장교들이 각각 육군과 해군의 군벌을 이루었고 이후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처음엔 출신에 따라 나눴다. 그러다가 나중엔 육군은 전체주의 사상의 황도파와 그 반대 세력이 결집한 통제파, 해군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에 따라 조약파와 함대파로 갈렸다. 이 가운데 주로 정국을 주도한 세력은 육군의 통제파였다. 이러한 근현대 일본의 군벌은 특정 지역에 대한 통치력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의 군벌로 분류하기 애매하지만 일반적으로 군벌로 부른다. 근현대 일본의 군부 내에서의 군벌 간 대립의 역사가 초창기에는 일단 지역 간의 대립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일듯.

하나회를 시작으로 한 한국의 군부 내 사조직들이 종종 군벌로 불리는 것도, 위의 근현대 일본의 군벌에 빗댄 것이라 볼 수 있다. 물론 한국의 군벌이 근현대 일본의 군벌처럼 지역 간의 대립을 시초로 하는 건 아니지만 정치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군부의 장교 집단의 파벌이라는 점에선 일본과 비슷한 점이 있다.

2. 중국의 군벌

한국의 역사책 등의 자료에서 '군벌'이라는 단어가 가장 자주 나오는건 세계대전 무렵의 중국이다. 1911년 신해혁명 발생으로 이 붕괴되고, 중화민국이 성립된 당시 중국은 고대의 춘추전국시대가 20세기에 재현되었다 할 정도로 각지에 수많은 군벌이 난립하고 있었다.

1910~20년대까지 최전성기를 누렸던 중국의 군벌은 손문이 제1차 국공합작에 성공해 국민혁명군을 구성하고, 그 뒤를 이어 장개석북벌을 개시하여 차례차례 격파하면서 1928년 공식적으로 소멸하게 된다. 하지만 실제 군벌의 실력자였던 이들이 여전히 세력을 유지했다. 그래서 북벌이 끝난 후에 반장전쟁이라고 하는 내전의 탈을 쓴 대규모 국가간 전면전쟁이 터졌고, 반장전쟁 후에도 위세를 떨쳐서 중일전쟁이 종전될 때까지 군벌은 살아남았다.

군벌은 일반적으로 군사력이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마치 전국시대 국가들이 당시 인구로는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로 엄청난 양의 병력을 쥐어짠 것처럼 군벌들도 엄청난 양의 군대를 뽑아냈다. 군벌이 지배한 영역이 전국시대의 주요 국가의 영역을 능가한 경우가 많아서 당연한것일수도. 한 예로 제1차 봉직전쟁 당시 봉천군벌 장작림은 무려 22만명을 동원했고, 딱 2년만인 제2차 봉직전쟁 당시에는 17만, 직예군벌 측은 25만을 동원했다.


(1925년 당시 주요 군벌의 지도)

지도를 보면 중국의 주요 지역은 다 군벌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고, 광동성을 중심으로 한 남쪽의 푸른색 군벌이 국민당 군과 그 동맹 군벌이다.

청일전쟁시대부터 이미 군벌의 조짐이 보였기 때문에 당시 청군은 부대간의 유기적인 협동을 하지 못하고 서로 남보듯 하다가 일본에게 각개격파 당하는 등 추태를 보였고, 청의 멸망 이후로는 군벌로 따로 쪼개져 아예 다른 나라처럼 따로국밥으로 놀았기 때문에 일본군에게 각개격파 당하고 국토 여러군데를 점령당하는 치욕을 겪었다.[1] 이러한 오합지졸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현대의 중국은 군벌을 정말로 싫어한다.(...) 현재 중국 정부가 그토록 하나의 중국을 중요시하며 '중국의 일부'라고 여겨지는 세력이 독립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기만 해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강경진압하고 있는것에는 이런 이유도 있다.

2.1. 대표적 군벌들

2.1.1. 북양군벌(北洋軍閥)

옛 청나라의 북양군(北洋軍)에 기반을 둔 군벌세력.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홍장(李鴻章, 리훙장)까지 이르지만 실제적 시발점은 원세개(袁世凱, 위안스카이)로 본다. 원세개가 1916년 황제를 칭하다가 전국적인 반발에 밀려 퇴위하고 6월 6일 화병으로 숨진 뒤 3개의 파벌들로 갈라진다. 이 파벌들은 상호 충돌을 거듭하며 북벌이 끝날 때까지 베이징과 화베이를 장악, 실질적인 정치력을 행사했다.

  • 안휘(安徽, 안후이)파

원세개 사후 직예파와 함께 권력을 잡은 파벌. 주요 인물은 단기서(段棋瑞, 돤치루이), 서수쟁(徐樹錚, 쉬스징). 안휘파의 지도자격인 단기서는 일본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구성원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갈라질 가능성이 높아 조직력이 떨어졌고, 대부분이 군 실무직이 아닌 고위층에 위치한 탓에 실제적인 군권이 약했다.

총통 여원홍(黎元洪, 리위안훙)이 정치적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안휘도독 장훈(張勳, 장쉰)을 불러들였다가 왕정복고 쿠데타를 유발하여 완전히 힘을 잃은 뒤 정부를 장악했다. 손문(孫文, 쑨원)이 호법군 정부를 세워 북양군벌에 대항하자 대대적인 남정을 계획하지만 직예파와의 갈등으로 무산, 봉천파를 끌어들여 직예파를 압박해 다시 한번 남정을 준비하다 역시 직예파의 무시로 좌절했다. 독자적인 군사력 확보를 위해 끝내 일본의 차관으로 참전군(1차 대전 참전이 명분이었다.)을 조직하지만 전쟁 끝나고 만든 탓에 엄청난 항의를 들었다. 이에 불안을 느낀 직예파와의 대립으로 1920년 7월 14일 안직전쟁이 발발, 협조외교 노선을 지향하던 일본이 안휘파 대신 봉천파를 파트너로 고르자 사면초가에 빠져 전쟁에서 진 뒤 실권을 잃었다.

  • 직예(直隸, 즈리)파

안휘파와 권력을 잡은 파벌. 주요 인물은 풍국장(馮國璋, 펑궈장), 조곤(曹錕, 차오쿤), 오패부(吳佩孚, 우페이푸). 안휘파와 달리 조곤, 오패부 등이 강대한 군사력을 가진 이들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힘이 더 컸다. 안휘파와 달리 호법군 토벌에는 관심이 없었고, 호법군과 협상을 통해 북경정부의 정당성을 인정받는 쪽에 관심이 있어 안휘파와 마찰을 일으켰다. 끝내 양측은 직환전쟁이 발발, 일본의 지원을 받던 안휘파를 견제하는 영국미국의 지지를 얻었고, 끝내 승리를 거둬 봉천파와 함께 베이징을 장악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남부 진출을 노리던 봉천군벌 장작림과 갈등이 발생했고, 1922년 1차 봉직전쟁이 발발했으나 승리를 거두고 대세를 장악했다. 그러나 1924년 다시 힘을 기른 장작림의 반격으로 2차 봉직전쟁이 발발, 예상치 못한 풍옥상의 배반으로 북경을 내준다.

  • 봉천(奉天, 펑톈)파

만주를 기반으로 한 군벌. 다른 두 군벌과 달리 마적단에 기반해 출발했다. 북양군벌의 일파가 아니라 '봉천군벌'이라는 별개의 세력으로 보기도 한다. 주요 인물은 장작림(張作霖, 장쭤린), 장학량(張學良, 장쉐량). 안휘파에 이어 일본의 지원을 받았다. 본래 마적단 출신이었던 장작림은 신해혁명 당시 동북지역의 혁명군을 진압하고 지역군권을 장악해 원세개의 황제취임 당시 원세개를 위협해 봉천, 길림, 흑룡강 등 동3성 총독직을 얻었다. 그러나 장작림은 애초에 북경진출이 꿈이었던 사람이라 때에 따라 안휘와 직예 양쪽을 편들며 기회를 노렸고, 북경을 장악한 직예파와 2차례에 걸친 전쟁을 벌여 끝내 북경을 장악했다.

그러나 직예파를 배신하고 북경을 장악한 풍옥상(馮玉祥, 펑위샹)은 이 지역을 기반으로 장작림의 부하 곽송령(郭松齡, 궈쑹링)을 끌어들여 장작림에 대항했고, 봉천 남부에서 새로운 군벌 손전방(孫傳芳, 쑨촨팡)이 유력하게 떠올라 위기에 빠진다. 그러나 소련과 가까웠던 풍옥상을 염려한 일본의 개입으로 구사일생, 힘을 모아 반란을 진압하고 풍옥상 토벌에 나섰고, 장종창(張宗蒼, 장쭝창), 염석산(閻錫山, 옌시산) 등 다른 군벌들의 지지를 얻어 최종적으로 베이징을 장악했다.

북벌 당시 국민혁명군의 주적으로서 오패부, 손전방 등 다른 군벌들과 함께 국민당군에 맞섰으나 전세는 불리한 편이었다. 장작림은 지속적으로 국민당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무위로 돌아갔고, 지난(濟南)까지 진격한 국민당군을 일본군이 막아주는 사이 일본의 제안으로 장작림이 만주로 귀환하면서 북경지배를 포기한다. 그러나 1928년 6월 4일 장작림이 탄 열차에서 폭탄이 터져 장작림이 폭사하고, 그 뒤를 이은 장학량이 국민당과 협조하면서 국민당과의 전쟁을 끝낸다.

  • 동북(東北) 군벌

1928년, 장작림 사후 세력을 계승한 장학량이 국민당에게 투항하면서 동북변방군이라는 명칭으로 형성된 군벌. 사실상 과거 봉천파 군벌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주요 인물로는 장학량, 만복린(萬福麟), 우학충(于學忠), 왕수상(王樹常), 추작화(鄒作華), 이두(李杜), 마점산(馬占山) 등이 있다. 자신들의 고향 거점을 잃은 군벌이기에 점차 세력이 약해졌지만, 고향 만주를 탈환해야한다는 목표와 장학량의 지도력으로 결속력이 강한 군벌이었다. 만주와 하북성 접경 지대의 방위를 맡으며 일본의 침략을 견제했지만, 점차 국민당 정부의 친일적인 타협이 계속되자 불만을 표명했다. 장개석은 장학량과 휘하 군벌을 서안으로 이동시켜 자신의 목표인 공산당 토벌에 동원하였고, 서안 사건이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서안 사건 후 장개석은 보복의 의미로 조직을 해체하여 다른 지역으로 분산했으며, 결국 동북 군벌은 소멸하고 만다.

2.1.2. 서북(西北)군벌(국민군벌)

섬서성과 그 인근 내몽골 지역을 기반으로 한 군벌. 수장은 장개석에게 대적한 옥상이다. 주요 인물로는 풍옥상 외에 장지강(張之江), 녹종인(鹿钟麟), 부작의(傅作義), 송철원(宋哲元), 양호성(楊虎城), 한복구(韓復榘), 장자충(張自忠), 장방(張鈁), 손연중(孫連仲), 방병훈(龐炳勛), 석우삼(石友三) 등이 있다. 본래 서북군벌은 직예파 산하의 군벌이었는데, 풍옥상이 손문에게 협력하여 자신의 병력을 국민군이라 지칭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북경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선통제를 몰아내는 것이 바로 이들이다.

서북 군벌은 손문에 대한 호의가 강했지만, 장개석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의식이 강하였다. 그 결과 반장전쟁에서 풍옥상은 이종인과 함께 장개석에게 대항하였지만,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이 후 풍옥상은 군권에서 물러나며, 실제로 서북 군벌은 타 지역으로 분할되거나, 하나의 구심점이 없는 조직으로 흩어지게 된다. 서북 군벌은 다른 군벌들과는 달리 독특함을 풍기는 군벌이었는데, 타 군벌들이 지역 기반의 경향이 강한 반면, 서북군벌은 풍옥상 개인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풍옥상 본인은 글을 몰랐지만 부하들에게 글을 익혀야 한다며 학습을 훈련 과정에 넣기도 했으며, 풍옥상 본인의 종교가 기독교였기에, 부하들에게 설교하며, 소방호스로 세례를 주는 기행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타 군벌과는 달리 명암이 극으로 달리는 면모를 남기기도 했다. 부작의, 송철원, 장자충, 손연중, 방병훈의 경우 중일전쟁 시기에 활약한 명장들이었으며, 양호성의 경우 장학량과 함께 서안 사건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양호성은 서안 사건 중에 부하들의 약탈 행위가 있었으며, 한복구는 전투 중에 부하들을 버리고 도주한 죄로 처형되었으며, 석우삼, 방병훈은 일본군에게 항복하여 친일 활동을 하였다.

2.1.3. 산서(山西)군벌

산서성에 기반한 군벌...이라기 보다는 사실상 석산(閻錫山, 옌시산) 개인의 왕국이었다. 주요 인물로는 염석산 외에 서영창(徐永昌), 서원천(徐源泉), 상진(商震), 양애원(楊愛源) 등이 있지만 거의 염석산의 심복 같은 인물들이다. 염석산은 산서성에 근거지를 마련한 뒤 단 1차례도 실권을 놔본 적이 없으며, 통치 내내 공업 양성과 화폐개혁 등을 통해 성공적으로 산서성을 운영해 모범적인 통치자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중원대전 뒤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고,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첫번째 진격로였기 때문에 타이위안(太原)을 뺀 전 지역을 잃는다. 그럼에도 종전 때까지 이곳을 빼앗긴 바는 없고, 일본군 베이핑(北平)[2] 사령부와 협상을 벌여 띵까띵까 놀며 잘 살았다. 오히려 태원에는 빨갱이 퇴치, 국민당 스파이 색출 같은 포스터가 펄럭일 만큼 중앙정부와 대놓고 으르렁거렸다.

이 군벌은 특이하게 독자적인 각인을 새겨 생산해낸 짝퉁 총기들로 유명한데, 가장 유명한 것은 마우저사의 C96을 카피한 "산시 17식 권총(山西17式, Shanxi Type 17)". 그 밖에도 콜트 M1911톰슨 기관단총도 베껴 썼는데, 특이하게 모두 .45 ACP탄을 쓰게 개조한 데다 중국 불법복제판 중에서는 성능이 가장 좋아서 다른 곳에서도 평이 좋았다고. 군벌이라기보단 군수기업에 가까운 수준.

2.1.4. 상(湘, 샹)계 군벌

호남, 호북성에 기반한 군벌. 기원은 태평천국 운동을 진압한 증국번(曾國藩, 쩡궈판)의 향용인 상군에서 왔다. 주요 인물은 담연개(譚延闓, 탄옌카이), 조항척(趙恒惕, 자오헝티), 당생지(唐生智, 탕성즈), 정잠(程潜) 하건(何鍵), 유건서(劉建緒), 하요조(賀耀組) 등이 있다.

위치가 위치인지라 베이징 정부와 광동 지방정부 사이에 끼어서 휘둘리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군벌의 주요 인물들이 근거지가 아닌 다른 곳으로 배치되거나, 실권이 없는 군의 고위 직책에 앉는 등. 타이틀만 좋고 실권은 없는 경우가 많았다. 후베이성은 주로 직예파 군벌의 영향을 받았고, 후난은 국민당의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이유로 1920년대 초 유행하던 연성자치운동의 중심지였고, 덕분에 후난 출신인 담연개와 조항척이 이곳을 장악했을 때 지역민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담연개와 조항척의 알력다툼 끝에 담연개가 국민당에 투항하고, 후베이성에 직예파 군벌이 직접 주둔하면서 입지가 흔들렸다. 1926년 북벌을 개시했을 때 호남군 제4사단장 당생지가 국민당에 투항한 뒤 조항척 일파를 몰아내 북벌의 첫 탈환지였다. 여담으로 이 당생지가 중일전쟁 당시 난징 방어선 총사령관이었는데, 1937년 12월 12일 도시 방어를 포기하고 도망가는 추태를 부려 일본군의 난징 입성을 도왔다.

2.1.5. 사천(四川, 쓰촨)군벌

사천성에 기반한 군벌. 주요 인물은 웅극무(熊克武, 슝커우), 유상(劉湘, 류샹), 유문희(劉文輝), 양삼(楊森), 반문화(潘文華), 단무신(但懋辛), 왕찬서(王纘緖), 여초(吕超), 당식준(唐式遵), 왕능기(王陵基), 손진(孫震) 등. 다른 지역 군벌들의 경우 특정한 한두 명의 군벌이 주도권을 잡고 타 군벌을 축출하는 일이 많았으나 사천지역은 열악한 교통사정과 비교적 풍족한 경제적 환경으로 비슷한 세력을 가진 수많은 군벌들이 난립하여 끝까지 사천지역을 못 통일했다. 또한 주변의 운남, 귀주성에서 온 객군(客軍)까지 독자적으로 지역을 장악해 중국 그 어디에서도 유래를 못찾을 막장스런 판도를 그렸다. 중앙, 성 정부의 통제력이 무너진 상태에서 각 세력들은 자군이 주둔한 지역에서 마음대로 행정권을 휘둘렀고, 이렇게 나온 세력권을 방구(防區)라 불렀다. 이런 갈등을 그나마 안정시킨게 유상과 유문희[3]의 세력이었지만, 중일전쟁으로 인해 장개석이 중경으로 천도하면서 사천 지역은 중앙에서 직접적으로 관리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유상은 장개석과 가까워 진 것에 깊은 빡침을 느끼다가 1938년에 급사했으며, 사천은 장개석에 의해 장악되었다.

2.1.6. 광서 군벌. 계(桂, 구이)계 군벌

광서(광시)를 기반으로 한 군벌. 통칭 계군(桂軍)으로 불렸다. 주요 인물은 이종인(李宗仁), 백숭희(白崇禧), 황소횡(黄紹竑), 이품선(李品仙), 하위(夏威), 황욱초(黃旭初), 육영정(陸榮廷, 루잉팅) 등이 있다. 계계 군벌에 대한 지칭은 주로 광서 군벌을 말하였다. 북벌이 끝난 뒤에도 중앙정부에 굉장히 비협조적이라 1929년 편견(編遣)회의 문제로 1차례 국지전을 벌였고, 1930년 염석산, 풍옥상과 연합하여 중원대전을 일으켰으며, 1931년 광주 국민정부 선언 이후에는 거의 반독립 상태였다. 1937년 또다시 중앙정부와 국지전이 벌어질 뻔했으나 일본의 침입에 공동으로 맞서겠다는 장개석의 약조를 받은 뒤 이종인이 군을 물려 전쟁위기를 넘겼다. 중일 전쟁 시기에 광서 군벌은 1938년 태아장 전투에서 이종인의 지휘로 승리하였지만, 자신의 병력을 보존하기 위해 병력을 철수함으로써 반격의 기회를 상실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 광서 군벌은 장개석의 적극적인 견제 세력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지속하였으며, 국공 내전 시기에 이종인이 대리 총통이 되기도 했다.

2.1.7. 광동 군벌

광동(광둥)을 기반으로 한 군벌. 통칭 월군(粤軍)으로 불렸다. 주요 인물로는 진형명(陣炯明, 천중밍), 진제당(陳濟棠), 이제심(李濟深), 장발규(張發奎), 여한모(餘漢謀), 나탁영(羅卓英) 설악(薛岳), 채정개(蔡廷鍇) 등이 있다. 광서 군벌과 함께 손문, 장개석에 대한 통수, 안티로 유명한 세력이다. 국민혁명을 앞두고 진형명은 손문에게 협력을 내밀었다가 바로 1922년에 배신을 때리기까지 하였으며, 1933년에 이제심과 채정개가 복건성에서 반란을 일으켜 중화공화국을 만들었지만 실패한 적도 있고, 진제당은 1936년에 광서 군벌과 함께 장개석을 몰아내려다 발각되는 등...광서가 협력 안하겠다고 땡강 부리는 모습이라면, 광동은 협력을 하다가 뒤로 통수치는 경우가 많았다. 중일전쟁 후 실질적 수장이 된 이제심은 나중에 송경령과 함께 국민당 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장개석의 독재를 당 내부에서 반대하며 공산당에게 협력하였다.

2.1.8. 운남(雲南)군벌

윈난성에 기반한 군벌. 주요 인물은 당계요(唐繼堯, 탕지야오), 용운(龍雲, 룽윈), 노한(盧漢), 주배덕(朱培德). 지역적 특성 덕분에 운남지역 토착민 출신이 많았으며, 또한 적절하게 장개석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기에 중일전쟁이 끝나는 시점까지도 세력이 온전했던 희귀한 이들이다. 그러나 국공내전 시기에 지도자인 용운이 장개석의 압력으로 홍콩으로 피신하면서 조직이 와해했다.

2.1.9. 신강군벌

신강성(위구르)에 기반한 군벌. 사실상 성세재 일족의 왕국이었다. 그는 신강성을 철저히 그의 친인척들을 중심으로 다스렸다. '신강소비에트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으나 나중엔 소련을 배신하고 모택동의 동생인 모택민을 죽인다.(...) 특이하게도 신강성의 주민들의 다수는 위구르족이지만 통치자인 성세재는 한족이었다.

2.1.10. 마가군벌

감숙성 등 서북지방에 기반한 이슬람계 회족 군벌. 마가군(馬家軍)이란 명칭은 이 군벌의 핵심 인사들이 모두 마(馬)씨 집안 사람들인 점에서 유래하였다. 많은 회족들이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의 마에서 따온 마씨 성을 쓴다. 이와 비슷하게 만주족엔 진씨가 많다. 주요 인물은 마홍규(馬鴻逵, 마훙쿠이), 마보방(馬步芳, 마부팡), 마홍빈(馬鴻賓, 마훙빈) 등. 이 세 사람에서 유래한 서북삼마(西北三馬, 시베이싼마)라는 명칭으로도 유명하다. 마보방의 형인 마보청을 포함해서 서북사마, 또는 감숙성장 마중영까지 더해 서북오마라고도 하였다.

2.1.11. 국민혁명군, 황포계

장개석이 휘하에 두었던 직속 친위 파벌.


당시의 중국의 군벌들의 거점을 보여주는 지도. 시기는 1925년으로 국민혁명을 막 시작했을 시기이다.


3. 일본의 군벌

일본의 군벌은 초기에 육군의 상층부를 독점했던 조슈 번 출신과 다른 지역출신의 대립이 시초였으나, 본격적으로는 1920년대 이후 생긴 육군내의 파벌을 말한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 이후 경제위기가 닥치자 일본군 내에서는 "덴노의 눈과 귀를 가리는 썩어빠진 정계의 간신배들을 숙청하고 덴노 중심으로 청렴한 군이 직접 정치에 나서자!"는 식의 주장을 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이들을 황도파(皇道派, 고도하)라고 하며 이들과 대립하여 "군은 군인에게, 정치는 정치인에게"를 주장하는 통제파(通制派)가 생겨났다.

이렇게 이념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황도파와 통제파는 이념보다는 육군의 헤게모니를 잡는데 더 관심이 있었다. 황도파는 초조해서 쿠데타를 일으키는 병크를 범했고, 히로히토가 이를 반대하면서 무력하게 진압된 것을 기화로 통제파가 결국 승리하여 결국 군권을 장악하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침략전쟁으로 폭주했다는 점에서 대외적으로는 둘 모두 차이가 없었다. 통제파가 이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유명한 전범인 도조 히데키도 통제파의 대표적 인물인 것을 보면 황도파-통제파 할 것없이 일본 군부는 모두 미쳐돌아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한국의 군벌

4.1. 대한민국

국방을 대부분 미군의 전력에 의존했던 1960~70년대에는 한국도 관구 시스템을 채용하고 있었다. 군관구 시스템은 1980년대 초반 폐지된다.

하나회를 비롯한 군내 사조직도, 상술했다시피 20세기 초반 일본 정치체제에서 군부가 해댔던 것과 비슷한 짓거리를 일삼았다는 의미에서는 군벌로 볼 수 있다. 윤필용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군내에는 육사출신을 중심으로 하나회 뿐만 아니라 여러 경쟁 사조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윤필용 사건 이후 군내에서는 모조리 해체되었지만, 하나회는 박정희의 비호로 계속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결국 이들은 12.12 군사반란5.17 계엄확대라는 대한민국 군 역사상 희대의 흑역사를 만들어낸다.

참고로 북한조선로동당조선인민군은 대한민국 헌법상으로 한반도 북부를 무력으로 점거하고 있는 불법 군벌이다.


5. 현대의 군벌

아프가니스탄이나 아프리카 각지에서도 판치면서 골칫거리다. 천연자원 이권(피의 다이아몬드 참고)을 차지하면서 벌어진 각종 문제와 더불어 민간인들의 팔다리를 자르는 등의 학살과 학대, 시에라리온 및 여러 나라에서 자행된 무분별한 소년병 참전 등 문제거리가 넘치고 있다. 콩고같은 경우엔 자원 말고도 고릴라 멸종까지 군벌이 끼어든 게 많다. 자원이 가득한 곳에 사는 고릴라가 거슬린다고 보이는 대로 쏴죽이는 것. 밀렵꾼보다 더 악랄한 게 숫자나 장비면에서 압도적이고 밀렵꾼이라면 어찌 보호단체나 정부 요인이나 감시단체들이 개별적으로 어렵게나마 막거나 막고자 노력이라도 하는데 군벌이라면 군대급이니 도무지 손 쓸 방법이 없다.

게다가 군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현지인을 돕고자 보내는 구호물품까지 약탈하여 군벌 지도자 극소수만 배를 채우고 있다. 블랙 호크 다운에서 나온 실존인물인 군벌 두목 아이디드나 앙골라의 조나스 사빔비 등 군벌들이 이런 일을 자행했다.

6. 창작물 속의 군벌

----
  • [1] 중일전쟁 당시 중국군 총 전력을 보면 그렇게까지 일본군에게 맥없이 격파당할 수준이 절대 아니었다. 심지어 연합국으로부터 M4 셔먼 등을 지원받아 양질의 전차까지 보유하고 있었기에 장비의 절대 질에서는 오히려 일본군보다 절대적으로 우세한 수준이었다. 고작 전간기의 유물인 마틸다 한두대에게도 쩔쩔맨게 일본군인데 셔먼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렇게 처참하게 당한것은 여러 군벌로 쪼개져 노느라 서로 협동도 못하고 견제하다보니 병사들의 질도 향상시키지 못한것은 물론 장교들도 권력투쟁에만 관심있어서 정작 군인으로서의 자질이 대단히 형편없었던 탓이 크다.
  • [2] 신해혁명 뒤 혁명정부가 수도를 난징으로 삼으면서 베이징을 베이핑으로 고쳤다. 1949년 중국 수립 이후 베이징으로 다시 고쳤다.
  • [3] 유문희는 유상의 숙부였지만, 나이는 유상이 더 많았다.
  • [4] 정확히 언급하기로는 기술-종교 집단이다. 하지만 군인들이 모여서 결성된 BoS의 특성상 군벌로 취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