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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연맹

last modified: 2015-04-11 16:33:56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회원국
3. 역사
3.1. 창립
3.2. 가입국
3.3. 문제점
3.4. 짧은 평화
3.5. 균열
3.6. 폭풍 전야
3.7. 전쟁과 해체과정
4. 국제연맹의 교훈과 유산
5. 여담
5.1. 위임통치
5.2. 자유시
5.3. 한국과의 관계
5.4. 대중매체의 국제연맹

1. 개요

영어: League of Nations [1]
프랑스어: Société des Nations
스페인어: Sociedad de Naciones
일본어: 国際連盟(こくさいれんめい)
에스페란토: Ligo de Nacioj

舊 국제연맹 본부 건물
국제연합으로 조직이 계승되고 세계본부가 미국 뉴욕으로 옮겨진 뒤에는 유럽본부 사무국으로 쓰이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전쟁의 재발을 막기 위해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안하여 1919년 기획되어 1920년 설립되었으며, 초기 회원국은 42개국, 최대 60개국이 참여했던 국제 기구이다.

UN(국제연합)의 밑거름이 되었으나 사실 전쟁을 막는다는 원 목적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1946년 해체되고 국제연합에 그 자산과 국제법원(제사법재판소)와 국제노동기구 등 대부분의 하위 조직이 이전되었다. 본부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었다.

2. 회원국


지도를 보다시피 영국 본국과 일부 속령[2], 프랑스, 중국(중화민국), 폴란드, 그리스, 라이베리아, 에티오피아, 이집트, 네덜란드, 벨기에, 노르웨이, 스웨덴, 터키, 이란, 태국,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포르투갈, 아프가니스탄파나마, 아르헨티나, 멕시코, 쿠바, 우루과이, 볼리비아, 에콰도르 같은 중남미의 몆몆 국가들만 끝까지 회원국으로 잔류했다(남색,보라색,하늘색[3]으로 칠해진 곳). 그중에 프랑스와 폴란드,네덜란드,노르웨이,에티오피아,유고슬라비아,그리스등은 제2차 세계대전때 본국 영토가 축국에게 점령당하고 망명정부(자유 프랑스 등)등으로 회원국 지위를 유지하는 등 사실상 의미가 없었다. 또 중화민국의 경우는 가입했으나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일본은 상임이사국이었고, 필요하다면 국제연맹을 얼마든지 씹을 수 있었으니까......

일본 제국의 속령에 있는 조선과 대만은 정회원국 일본 제국 회원 명의의 속령지로 분류된 상황이며 둘 다 자치독립국이 아니기 때문에 국제연맹에는 가입할 수 없었다. 리비아와 소말리아 역시 이탈리아 속령지라 이탈리아 회원 명의의 속령지로 분류되어 있다.

3. 역사

3.1. 창립

우드로 윌슨은 '평화 원칙'을 내세우며 베르사유 조약 1조에 국제연맹을 설립한다는 항목을 넣는 데 성공했고, 42개국이 가입했다.

UN과 달리 최고기관이 이사회가 아닌 총회였는데, 초기 상임이사국영국, 프랑스, 일본 제국, 이탈리아(이탈리아 왕국)였다. 뒤에 보겠지만 이후 독일(1926년~1933년)과 소련(1934년~1939년)이 잠시 상임이사국을 맡았다.

3.2. 가입국

1919년에는 영국과 영연방(인도 제국 포함)의 여러 나라와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그 외 유럽중남미의 여러 독립국들 위주로 가입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등이 독립국으로서 새로 가입했다.

뒤이어 1920년에는 최초로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오스트리아와 구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불가리아, 알바니아, 1921년에는 발트 3국, 1922년에는 헝가리, 1923년에는 독립한 아일랜드에티오피아가 들어가면서 점점 국제연맹은 회원을 확대했다.

3.3. 문제점

이런 초기 상황에도 불구하고 국제연맹은 세 가지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1. 패전국인 독일, 터키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이 가입을 거부당했고,
2. 정작 본 제안국인 미국이 로 독트린을 이유로 공화당이 다수인 상원에서 부결되어 가입하지 못했다.[4]

말 그대로 떼고 뗀 상황이었다. 여기에 더해
3. 다수결이 아닌 만장일치였고, 군사적 제제 수단이 전무했으며, 상임이사국이 특별히 이권이 없었다.

이건 여러모로 막장이었다. 강대국의 입장에선 자신이 특별하게 대접을 받는 게 아닌 수십 개 나라 가운데 하나로만 취급되었기 때문에 국제연맹에 가입해 있다고 해서 특별히 이득을 볼 거리가 없었다. 반면 약소독립국들의 입장에선 강대국이 설친다고 해도 국제연맹이 항의와 경제봉쇄 외에는 뭔가를 할 수가 없었고, 숫자를 빌미로 단체 머릿수 과시에 나서지도 못하니 뭘 써먹을 수도 없었다.

결국 강대국도 약소국도 "수틀리면 탈퇴한다!"를 시전하게 된다.

다만 영국과 프랑스 중심 체계도 당시 미국의 국제적 영향력이 비교적 제한적이었고, 국력이 절정에 달한(것처럼 보이는) 대영제국과 프랑스 식민제국을 중심으로 세계 질서가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무렵에는 크게 결함있는 사항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미 가입한 국가와 그 식민지 만으로 전 세계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또한 미국은 전반적으로 정치권과 국민여론이 고립주의를 옹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윌슨의 정치력이 좀 더 뛰어나서 가입을 했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3.4. 짧은 평화

코스타리카가 가입한 지 5년만인 1925년 탈퇴하고, 다음 해인 1926년 6월에는 브라질이 상임이사국 진출에 실패하고 분노하여 탈퇴해버리면서 국제연합의 탈퇴행렬은 시작되었다.

그래도 당장은 모든 것이 무너진 게 아니었고, 무엇보다 같은 해 9월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이 가입해서 상임이사국이 되었다. 또한 군비축소위원회도 그럭저럭 돌아가고 있었고, 조금 이르게는 워런 하딩이 태평양 군축회의에서 영일동맹을 끊고 군비경쟁을 완화시켰다. 이런 상황이 되자, 국제연맹체제를 진두하던 영국과 프랑스는 이제 전쟁 이전의 상황으로 완벽하게 돌아왔다고 안도하게 되었다. 그렇게 열강만의 해피엔딩 해피엔딩!

...이 아니고, 1929년 대공황이 찾아오면서 국제연맹은 무너져내리게 된다.

3.5. 균열

세계대공황의 앞에서 국제연맹은 무력하게 영국과 프랑스의 블록화를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국제연맹은 빠르게 무너져내렸다. 물론 이 와중에 멕시코(1931년), 터키와 이라크(1932년)가 가입하긴 했지만, 나치파시스트가 등장하고 일제 역시 만주사변(1931년)을 일으키면서 제국주의, 군국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판치게 되었다.

게다가 이 와중에도 소련은 계속 거부되었고, 미국은 끝까지 가입하지 않았다(...).

그래도 국제연맹을 구성한 기존 열강들은 평화의 가능성을 신뢰하고 있었다. 일본에게는 경제제제를 경고하고 실제로 만주까지 조사단(그들이 쓴 보고서는 Lytton report)을 파견하고 만주국의 가입을 거부했다. 또 같은 회원국끼리의 전쟁인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1935년)과 스페인 내전(1936년)에도 훈수를 두고 다른 회원국의 참전을 막았다.[5]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일본과 이탈리아는 그런 말을 듣느니 탈퇴가 더 빨랐다. 독일 역시 아돌프 히틀러가 베르사유 체제의 폐기를 선언하면서 1933년에는 일본과 독일이, 뒤이은 1937년에는 이탈리아가 탈퇴했다.

3.6. 폭풍 전야

국제연맹은 그 직후 1934년 소련을 상임이사국으로 가입시키면서 뭔가 기대를 했지만, 소련은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상큼하게 국제연맹을 배신하고 1939년 탈퇴한다. 게다가 이 막장의 와중에 명색이 상임이사국이라는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 체코슬로바키아 합병을 '우리 시대의 평화'라며 허용하는 병크를 저지른다(뮌헨 협정). 국제연맹에서 탈퇴해도 편 들어주고 달래주고, 도리어 회원국들을 망하게 내버려두는 상황이 되었다......

한편 여전히 국제연맹을 탈퇴한 일본과 이탈리아는 말 그대로 중일전쟁(1937년)과 리비아, 북아프리카 침공으로 깽판을 치고 있었다.(...) 이렇게 되니 중미의 여러 나라들도 주르르 탈퇴해버리고, 스페인도 독자적 노선을 택한다.

1930년대 말기에 다다르면, 국제연맹을 탈퇴한 나라들은 이제 열강들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는 수준에 이르른다. 태평양에서 일본을 그나마 제어할 수 있는 나라는 회원국이 아닌 미국 밖에 없었고, 결국 미, 영, 중, 네덜란드는 ABCD 봉쇄를 통해 석유의 수출을 제한해버린다. 같은 이유로 독일의 야욕은 점차 심해지면서 뒤에 나오는 단치히 자유시를 빌미로 폴란드 을 주장하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번만큼은 극구 반대한다. 결국 폴란드 침공과 함께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전쟁을 막겠다던 국제연맹은 전쟁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3.7. 전쟁과 해체과정

눈 깜짝할 사이에 유럽은 독일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망명정부를 차린 폴란드, 자유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노르웨이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나라의 괴뢰정부는 국제연맹에 탈퇴를 선언한다. 더구나 이 망명정부를 차린 나라들도 국제연맹한테 일종의 뒷통수를 맞은 격이었고 전쟁 안 하자고 가입했잖아! 실권도 전혀 없어서 이름뿐이었다..

국제연맹은 졸지에 영국과 떨거지망명정부의 모임 수준으로 전락했다. 마지막 가입국인 이집트(1937년)나 터키도 비슷했다. 유명무실해진 국제연맹은 1945년 설립된 UN에게 자리를 내주게 된다. 회원국이나 업무 같은 것은 모두 UN에게 인수시켰으므로, 사실상 UN체계로 재창단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 후신으로 UPL과 UED가 있다던가......

4. 국제연맹의 교훈과 유산

국제연맹에서 교훈을 얻은 국제연합은 철저하게 탈퇴와 배제를 하지 않는다는 데 중점을 둔다. [6] 이러한 생각은 철저하게 열강에 유리하게 짜여진 상임이사국 제도에서 엿볼 수 있다. 안보리(UNSC)가 불공평한 건 사실이지만, 핵무기의 등장과 뒤이은 냉전으로 인류 공멸 가능성은 더더욱 높아진 상황에서 다른 답이 없었다.

만장일치제도 폐지하고, 다수결과 군사력(국제연합 평화유지군)을 바탕으로 한 직접적 개입과 여러 단체를 포괄하는 더욱 큰 조직을 만들게 된다. 그 대표적인 첫 개입이 바로 한국전쟁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한국전쟁과 같은 사례의 적극적인 개입은 국제연합에서도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았고, 각 나라의 입장 차이와 현실적 제약 때문에 화유지군은 그야말로 '제한적인 치안 유지 임무' 정도로만 한정되게 된다. 그래도 군사적으로 무력했던 국제연맹보다는 다소 발전한 것이지만.

이렇게 실패한 국제연맹에서 교훈을 얻은 국제연합이었기에 2차대전 종결 후의 국제사회가 대충 전반적으로는 인권의 신장과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해온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제1, 제2세계 이야기지만… 그래도 없는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5. 여담

위키 문헌에 국제연맹 헌장이 있다.#

5.1. 위임통치

신탁통치 제도 이전에 최초의 임통치가 있었던 곳이 국제연맹이다(맨 윗지도의 주황색으로 표시된 부분). 이는 전적으로 우드로 윌슨의 아이디어였는데, 패전국의 식민지를 강대국이 먹는 건 정당하지 못하다. 장기적으로 독립시켜야 한다라는 논리였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식민지 획득의 수혜자가 아닌 미국으로서는 괜히 영국, 프랑스가 크는 게 미덥지 않았다는 이유가 더 크다. 하지만 수임국을 둔다는 점에서 사실상 식민지와 다르지 않은 제도였기에, 영국, 프랑스, 일본 등도 동의하면서 이 제도가 성립하게 되었다. 수틀리면 독립 안 시키면 되지 그리고 실제로 독립이 이뤄진건 1960년대였다.

위임통치국은 독립 계획 속도에 따라 A, B, C로 나뉘었다.

가장 높은 등급인 A의 경우 영국에게는 메소포타미아(이라크)와 팔레스타인, 프랑스에게는 시리아가 돌아갔고, 조기 독립을 통해 국제연맹에 가입시킨다는 방침이었으나 이라크를 제외하고는 끝내 독립되지 못했고, 이라크도 사실상 영국의 꼭두각시 왕국이었다. B의 경우 벨기에의 르완다, 부룬디, 프랑스의 레바논과 영국 프랑스가 나눠먹은 카메룬, 토고가 있었다(영국령 토고는 후일 가나로 독립).

C의 경우는 미크로네시아와 서남아프리카(나미비아)로 섬을 제외한 리아나 제도, 롤라인 제도, 마셜 제도 본래 독일 제2제국의 것이었으나 일본이 위임했고(남양군도)[7], 나미비아[8]뉴기니[9], 나우루, 서사모아 등은 영국이 위임했다.[10]

후에 신탁통치로 계승된 이 제도는 점진적인 독립이란 성과를 결국엔 얻어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보듯이 열강들의 나눠먹기를 눈가리고 아웅한다는 단점 역시 가지고 있었다.

5.2. 자유시



국제연맹에는 특이한 도시국가인 자유시라는 것이 있었다. 나폴레옹 1세가 잠시 프로이센 견제용으로 세웠던 단치히 자유시가 다시 부활한 것. 국제연맹은 1920년 1월 10일 영구 중립의 도시국가로서 단치히를 독립시켰는데, 독자적 화폐깃발도 있었고 25만 명의 인구로 나름대로 번성했다. 하지만 발트해 유수의 항구였던 이곳의 전략적 이점을 노린 히틀러가 단치히 합병을 감행한다. 히틀러는 "다리" 역할을 하는 연결통로가 되는 단치히를 넘길 것을 폴란드에게 요구하나 이게 통하지 않자 곧바로 단치히를 침공하여 멸망시켰다. 가히 19년의 역사 동안 국제연맹과 운명을 함께 했다고나 할까.

5.3. 한국과의 관계

한마디로 전혀 쓸데없는 기관이었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심하게 말하면 국제연맹이 힘이 없어서 전쟁 난 것이 일본의 자멸을 야기했기에 오히려 이 점에 정말 고마워해야 할 지경이다. 한국, 아니 조선조선총독부는 국제연맹이 인정한 적법한 식민지였고, 자치권도 없어 영국의 식민지들과 달리 회원국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당시 조선은 일본 제국령 조선(日本帝國領 朝鮮)으로 격하되었던 편이라 국제적으로도 일본의 속령에 인정된 상황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경우는 이른바 외교독립론으로 차라리 한국을 위의 위임통치에 맡기려는 시도를 한다. 하지만 열강들 입장에서 그게 될 리도 없었고, 그저 일본의 한국을 다루는 태도를 비난하는 의도가 강했다. 애초에 3.1 운동 직후에 열렸던 파리 강화 회의에서도 조선의 독립 문제가 신나게 씹히던 상황이었는데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일본이 위임했을지도 모르지...
애초에 이승만 개인의 독립청원 노선은 대다수의 임정 요인들이 지지하던 자주독립 노선과 심하게 엇갈리던 개념이라는 점, 자신과 자신을 지지하는 일부 세력들만의 결정이었다는 점 때문에 임시정부의 분열을 유발한다. 이후 급진 노선을 걷는 신채호"이완용은 있는 조국을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조국을 미리부터 팔아먹는다."며 이승만을 강하게 비난하고 임시정부를 새롭게 다시 만들자는 주장을 내세우는 창조파의 대표가 된다. 결국 1923년에 국회격인 임시의정원에서 이승만 임시대통령 탄핵안을 제출하여 1925년에 이승만은 탄핵당했다.

이후 이승만과 임정의 관계는 완전히 끝난 것처럼 보였으나 다시 한 번 두 세력이 손을 잡는 사건이 발생한다. 1931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뒤이어 일본의 국제연맹 탈퇴 가능성이 높아지자, 국무령이었던 김구가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전달할 특명전권대사로 다시 한 번 이승만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1933년 1월 제네바에 도착한 이승만은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고자 『만주의 한인들』이라는 선전용 책자를 국제연맹에 제출하고 독립을 역설했으나 그의 발언력은 없다시피 했다. 이때 그가 국제연맹에 제출한 주요 의제는 '만주국에서의 조선인의 지위'로 이 지역의 조선인들을 중립국민의 자격으로 대우해달라는 것이었는데, 국제연맹에서 만주국이 합법정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보고 뭔가 기대를 한 모양이었지만, 국제연맹은 양쪽을 다 씹는 공평한 처사(...)로 이승만의 기대를 참혹하게 배신했다. 이미 이런 상황에서는 국제연맹이 한국의 독립과 만주국 조선인들의 중립국화를 승인하든 자시든 의미가 없기도 했다. 이후 일본은 중국과 한국에서 저지른 만행들이 뭉쳐져서 자국에 대한 비난으로 돌아오자 국제연맹을 탈퇴한다.

결국 외교독립 노선 역시 국제연맹의 무력함과 함께 예정된 실패로 끝났다. 당연히 대한민국에서 국제연맹에 관한 평가는 최악 그 자체. 애초에 근대사 자체가 '제국주의에 의한 핍박으로 점철된 암흑시대'라고 까이는 한국[11] 에서 그 제국주의의 첨병 역할을 하던 국제연맹이 좋은 평가를 받는 게 더 이상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후신격 단체와는 정반대로 아주 한반도를 대놓고 괴롭혔던 국제기구(...)라고 볼 수 있다.

5.4. 대중매체의 국제연맹

복거일대체역사소설비명을 찾아서에서는 미국과 일본이 1940년에 국제연맹에 가입하고 2차대전 기간에도 유지되어 배경이 되는 1987년까지 국제연맹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고,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일본이 상임이사국이 되어 사실상의 국제연합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는 여전히 독립하지 못하고 있으며, 베트남, 케냐에서 무장독립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마셜 군도 등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지 않으면서 그대로 일본의 위임통치령으로 남아 있고, 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이 국공내전 당시 일본의 개입으로 황허 강을 경계로 휴전하여 단치히 자유시 대신에 중국이 분단되어 영토분쟁 상태가 된 상해, 즉 상하이 자유시가 존재하며, 이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약에라는 대체역사소설 에세이집 2권에서는 존 루카치는 시어도어 루즈벨트1912년 대통령이 되었다는 가정을 한다. 여기서 루즈벨트는 닥치고 내 말 들어라막가파무대뽀 정신으로 일단 전쟁을 종결시키고 만국평화회의를 연 뒤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를 강제로 가입시키는 쾌거를 보이지만, 결국 전쟁은 또 일어나고 만다는 암시를 준다.
이것은 1차대전이 온건하게 끝났다고 해도 2차대전의 발발이 어느 정도는 필연이었다는 시각을 반영한다. 심지어 러시아 혁명을 차단했다는 가정 하에서도. 바로 앞의 앨리스테어 혼이 쓴 "엠스 전보 사건보불전쟁 발발의 가능성이 나폴레옹 3세의 침착한 태도 덕에 사라지면서 양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는 가정과는 상충되는 점. 바로 뒤의 로버트 L. 오코넬의 가정에서는 독일이 승리하지만 독일 혁명으로 전쟁은 대충 정리되고 윌슨의 계획은 한방에 씹힌다. 이래저래 국제연맹은 안습한 위치.

TRPG 게임 겁스 무한세계 속의 평행우주 중 하나인 건스백에서는 국제연맹이 '세계과학위원회'의 버프를 받아 원자폭탄을 비밀리에 개발하고 있던 이오시프 스탈린의 소련을 박살내는 등 국제연합 못지않은 믿음직스러운 국제 기구로 거듭나게 된다. 소련과의 세계대전 이후에는 상비군인 "연맹평화유지군"도 두고 있다.
물론 이 세계의 국제연맹은 서구 열강의 입장에서만 평화의 수호자로 여겨지지, 식민지인들에게는 원수나 다름없다. 정말로. 인도와 아프리카에서 반(反)연맹 반란이라고 쓰고 독립투쟁이라고 읽는 것연맹평화유지군으로 진압했다. 또한 아직도 건스백에서는 인종차별성차별이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 세계에서도 당연히 한국은 일본 제국의 지배하에 있다. 사실상 연맹은 세계과학위원회의 지시를 받고 있는 꼭두각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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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줄여서 LoN이라고 하기도 한다
  • [2] 국제연맹 창설 당시 영국의 자치령(dominion)이었던 캐나다, 남아프리카 연방(현 남아공),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와 최대 식민지였던 영국령 인도 제국은 영국과 별도로 회원 자격을 지닌 채 출범했다. 그때 이들은 아직 영국 본국과 대등한 독립국이 아니었기 때문에(단, 자치령들은 1931년에야 스트민스터 헌장이 발효되면서 영국 본국과 대등해짐) 영국은 사실상 국제연맹 내에서 여러 표를 행사할 수 있었던 셈이다. 대영제국의 위엄 영국에서는 이후 아일랜드 독립 전쟁이 일어났는데 이 영국과 아일랜드 독립 세력 내 온건파의 타협으로 마무리돼 아일랜드 자유국이란 자치령이 탄생하였다. 이 아일랜드 자유국 또한 국제연맹에 가입하여 회원국이 된다(1937년 국호를 그냥 아일랜드 또는 에이레(아일랜드어)라고 고침). 그런데 국제연맹이 있던 시절에 뉴펀들랜드(현 펀들랜드 래브라도 주)는 캐나다의 일부가 아닌 별도의 자치령이었는데, 다른 영국 자치령들과 달리 국제연맹에 끝까지 가입하지 못했다. 특히 1930년대에는 세계 대공황의 직격탄을 맞아서 뉴펀들랜드 정부가 스스로 국정 운영을 못할 지경이 돼 영국에 스스로의 권한을 반납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2차대전 이후까지 뉴펀들랜드는 영국이 직접 관할하는 지역으로 되돌아갔으니 국제연맹에 가입할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국제연맹이 국제연합으로 대체된 뒤인 1949년에는 뉴펀들랜드가 주민투표를 거쳐 캐나다의 일부가 되었다. 따라서 뉴펀들랜드가 따로 UN에 가입할 수도 없고, 가입할 필요도 없었다.
  • [3] 아르헨티나와 유고슬라비아는 중간에 탈퇴했다 국제연맹이 제2차 세계대전과 파시즘의 대두로 망해갈때 즈음에 다시 재가입했다.하늘색으로 칠해진 곳은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다시 회원국으로 재가입했던 나라들인것.
  • [4] 먼로 독트린도 독트린이지만, 회원국의 1/3에 달하는 남미 17개국과 대등한 상황이란 것도 맘에 안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윌슨도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 윌슨은 결국 이 죽도 밥도 안되는 상황에서 반신불수로 쓰러져 아내이 사실상 직을 대행했고, 정권도 공화당에 빼앗겼으며, 4년 후 사망했다.
  • [5] 근데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깡패 놈이 약한 놈 패는데, 동네 싸움 날까봐 그냥 싸움 냅두고 다른 애들 보고 끼어들지 말라고 내버려둔 격이다. 더구나 소련이랑 나치는 회원국이 아니어서 잘만 후원했다.
  • [6] 물론 팔레스타인이라든지, 타이완이라든지 하는 예외적인 케이스가 있고, 대한민국북한도 수십년간 이런 케이스였다.
  • [7] 산둥반도의 칭다오와 자오저우(교주)만도 독일 것을 일본이 얻어낸 것이지만, 1922년 중-일 양국 협정에 의해 중국에 반환되었다. 다만 현지의 철도나 광산 등의 경제적 권익은 일본이 계속 장악하였고 중일전쟁 당시 '재'점령되기도 하였다. 이보다 앞서 중국 최초의 근대적 시민운동으로 평가되는 1919년 5.4 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산둥의 권익을 노리던 일본에 저항하려던 것이었다.
  • [8] 정확히 말하면 나미비아 등은 남아프리카(뒷날의 남아공)가, 태평양의 섬들은 뉴질랜드가 위임했다.
  • [9] 기니 섬 북동부로 남동부는 "파푸아"라고 불렀다. 파푸아뉴기니는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웃기는건 정작 파푸아는 영국령 호주의 외부영토라는 을의 을 관계로 대표자를 파견할 수 없었는데, 북부의 뉴기니는 위임통치령이란 성격 때문에 대표 파견이 가능했다(...) 뭐, 지금은 한나라가 되었으니 상관이 없지만.
  • [10] 오늘날에는 팔라우, 미크로네시아 연방(케롤라인 제도)이 독립하고 나머지는 미국령 북마리아나 제도로 되어있다. 뉴기니 섬은 조각이 났고, 나우루와 서사모아는 독립했다.
  • [11] 때문에 한국사학계에서 현대의 시작은 1910년대라는 서양사적 관점을 절대 인정하지 않고 있다.(사학계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현대'라고 하면 최소한 한국전쟁이 끝난 1950년대 이후(뒤의 시기로 상정하는 드문 경우도 있긴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아예 없다.)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