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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학교

last modified: 2015-03-30 10:50:43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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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도 아득한 배움의 바다
파도와 싸우며 배들을 저어
평화의 항구를 바라다 보고
바쁘게 바쁘게 나가는 우리
우리는 새로운 민주의 나라
사공을 기르는 국민대학교

이병기 작사, 이홍렬 곡
국민대학교 교가 #[1]


Contents

1. 개요
2. 역사
2.1. 국민대학설립기성회의 발족과 건학운동
2.2. 초창기의 국민대학
2.3. 성곡의 학원인수와 정릉동 시대
2.4. 중형대학을 넘어 대형대학으로
2.5. 현재
3. 학과
3.1. 학과 목록
4. 캠퍼스
4.1. 북악캠퍼스
4.2. 교외시설
5. 총학생회
5.1. 2009년
5.2. 2010년
5.3. 2011년
5.4. 2012년
5.5. 2013년
5.6. 2014년
5.7. 2015년
6. 교내 언론
6.1. 국민대신문
6.2. 국민리뷰(The Kookmin Review)
6.3. 북악방송국(BBS; Bukak Broadcasting Service)
6.4. 국민저널(The Kookmin Journal)
7. 기타
8. 커뮤니티
8.1. 국민학생들
8.2. 국민인닷컴 kmuin.com
8.3. 디시인사이드 국민대 갤러리
8.4. 학교 관련 페이스북 계정
8.4.1. 여러분들의 게시판
9. 사건/사고
9.1. 국민대학교 단톡방 성추행 사건
9.2. 인사예절똥군기 사건
9.3. 피자 도난 사건
10. 출신인물
10.1. 정치,관계
10.2. 언론계
10.3. 법조계
10.4. 재계
10.5. 디자인
10.6. 연예계
11. 유명교수
12. 참고항목


1. 개요


대한민국 최초의 사립대학교. 해방 후 귀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에 따라 당시 임시정부 내무부장이었던 해공 신익희 선생의 주도로 1946년 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하였다. 학교의 상징은 용두리(쌍용)이며, 교훈은 "이교위가(以校爲家),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2. 역사



2.1. 국민대학설립기성회의 발족과 건학운동

돌아보건대 본 대학은 내가 일생을 통하여 과거 40년 동안 우리 국민 전체가 일제의 압박 아래 신음한 것은 우리 국민이 몰지각한데서 비롯한 결과임을 통감하고 이 나라의 중견 국민을 양성해야겠다고 일구 월심으로 생각한 그 큰 이상을 갖고 세운 것입니다. 목숨이 붙어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이 정도나마, 고매한 학식을 갖춘 교수 여러분과 구지욕에 불타는 총명 호학의 생도 여러분과 국민대학 첫 입학생을 맞아 개강식을 갖게 되니 여러분들과 같이 일편 감개 무량하고 일편 감축해 마지 않는 바입니다.
해공의 창학연설 中

해방 이후 1945년 12월 1일에 환국한 해공 신익희는 건국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목표로, 이에 뜻을 같이하는 임시정부 인사와 국민대학의 설립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1946년 1월, 백범 김구의 숙소인 경교장에서 대학설립문제가 논의되었고, 이때 건학의 목표를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하여 독립국가건설에 필요한 인재의 육성으로 정하였고 3월 3일, '국민대학설립기성회' 를 발족시켰다. 기성회 고문에는 김구김규식이, 명예회장과 회장에는 조소앙과 신익희가 각기 선임됐다. 또 백낙준 등 교육계 인사들이 대거 이사진에 합류해 대학 설립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1946년 5월 18일자 동아일보
1946년 5월, 동아일보는 ‘국립대학 설립 준비’ 제목의 기사로 국민대학을 소개했다. '국립대학'이라는 표현은 임시정부 요인들이 세운 대학이라는 것을 배경에 둔 것. 그러나 이 당시 미군정에서는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을 추진하고 있었고[3] 임시정부파에서 세우는 대학이 '국립'이라 칭해지는 것은 미군정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에 대한 쿠데타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불쾌한 상황. 실제로 불과 3달 후인 1946년 8월, 신익희는 미군정에 대한 쿠데타를 감행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물론 실패했지만. 흠좀무

1946년 9월 1일 국민대학관이라는 이름으로 국립 서울대학교와 동시에 개교했지만 결국 이러한 미군정과 임시정부파의 갈등 때문에 미군정에서는 국민대학교를 정식으로 인가를 내 주지 않았다. 미 군정청은 개교한지 4개월여가 지난 12월 18일이 돼서야 국민대학관의 설립 인가를 허가했다.

이런 역사 때문에 학교에서는 임시정부가 세운 대학, 해방 이후 최초의 사립대학이라고 광고한다.

국민대학교는 민족의 대학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안고 설립되었지만, 재단을 확보하지 못하여 건학 초기부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 중에서도 교사(校舍)를 마련하지 못해 겪는 어려움이 가장 컸다. 설립준비위원회가 발족되고, 신학기에 맞추어 학생모집 광고를 냈지만 교사는커녕 원서를 접수할 사무실도 마련하지 못한 처지였다. 궁여지책으로 종로구 필운동 소재 한옥집 대문칸을 임시로 빌려 헌 책상 한 개를 놓고 흰 종이에 ‘국민대학교 신입생 입학원서 접수처’라고 써 붙이고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어렵사리 입학원서를 마감한 후에는 종로구 내수동에 있던 보인상업고등학교의 교실을 빌려 입학시험을 치르는 웃지 못할 광경이 연출되었다. 그러나 해공 신익희 선생의 명망 덕분에 국민대에 지원하려는 학생들의 열기는 뜨거워 당시 입학시험 경쟁률은 7대 1에 달할 정도로 높았다.

2.2. 초창기의 국민대학

1946년 9월 1일 개교를 앞두고서야 어렵게 보인상업학교 별관 2층 건물을 빌릴 수 있었다. 이것이 국민대의 첫 교사였다. 1층에는 학장실과 사무실, 강의실 하나를, 2층에는 넓은 강의실 2개를 마련하였다.

개교식 기념사진 (1947.2.18)

야간대학으로 출발한 초창기 국민대 학생들의 개교 당시 1회 학부생들의 나이는 20세에서 50세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 중에는 다른 대학에 다니다가 입학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일본의 교토대를 졸업하거나, 서울대에 재학하던 학생들이 편입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1회 졸업생인 남덕우(전 총리)·김성기(전 국민대 교수)·남광우(전 인하대 교수) 등이 그러한 경우였다.

교사가 없는 상태에서 출발한 국민대학교가 정규대학으로 승격되기 위해서는 재단의 유치가 필요하였다. 보인상업학교 건물의 일부를 야간에 빌려 사용하는 안습한 상황 때문에(...) 설립 주체들은 재단 유치에 관심을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당시 조선불교 중앙총무원 총무부장이며 해인사 주지인 최범술이 재단을 구성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해인사의 사찰 재산을 기부하겠다는 것이었다. 교직원 및 학생들은 크게 환영하였고, 1947년 10월 16일 신익희 선생을 이사장으로 하는 이사진은 사임하였고, 최범술을 이사장으로 하는 새로운 이사진이 구성되었다.

초창기 교사로 사용했던 남산의 구 동본원사[4]

1947년 10월 3일 서울 중구 남산동에 있는 구 동본원사(현 남산초등학교 뒤) 건물을 교사로 쓰도록 미군정 관재처로부터 허가를 얻어냈고 10월 5일에는 동본원사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러나 한달도 못간 10월 30일에 미군정은 동본원사에서 철수하라 통보했고(...) 이때부터 4달간 학교당국과 학생들은 미군정에 반발하며 교사를 사수하였고, 결국 남덕우를 비롯한 학생 대표들이 미군정청 사령관 존 리드 하지 중장과 담판을 벌여 서울 종로구 창성동에 있는 옛 체신요원양성소 건물을 얻어내는 성과를 거뒀다.

문교부는 1948년 8월 10일자로, 재단법인 국민대학(이사장 최범술)의 허가와 국민대학(학장 신익희)을 인가하였다. 이로써 국민대학교는 각종학교에서 정규대학으로 승격했다. 최범술 재단의 허가로 국민대학교는 정규대학이 되었으나, 재정적 뒷받침은 바라던 바와 같지 않았다. 기부하겠다던 해인사 재산은 최범술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던 것. 게다가 신익희가 학장에서 물러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최범술 이사장이 자금 출자자를 새 학장으로 선임하면서 생긴 일인 것이다. 신익희 선생의 명망을 보고 입학한 학생들은 당연히 이 상황에 반발했고 재정적 어려움과 학생들의 반발이라는 악재가 겹친 결국 최범술 재단은 쫒겨나게 된다. 그 이후부터 재단의 분규가 시작되면서 재정난은 더더욱 심해지게 된다(...).

창성동 신축교사 낙성식 기념 (1949.9.5)

옛 체신요원양성소 건물은 비가 오면 물이 새는 등 총체적으로 부실한 상태였지만 재단과 학생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재단의 지원은 기대하기 어려웠고 그 결과 1948년 10월 학생건축위원회가 결성되어 학생들이 자치적으로 교사를 신축하기로 결의하였다. 재단 측에서는 오히려 공사를 방해하는 등의 횡포뒤끝를 부렸지만 끝내 교사를 완성시키기에 이른다.

제1회 졸업증서 (1960.6.24)

최범술 재단이 쫓겨나고 다시 신익희가 학장으로 부임했지만 법적으로는 취임 승인을 받지 못했고 문교부는 신익희 학장 명의의 학위수여증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학생들은 이에 격렬히 반대했고 결국 1회 졸업식에 신익희 명의의 졸업장을 받게 된다. 한국전쟁 발발 후, 국민대는 6월 27일 휴교되었고 부산으로 피난하였다. 학교 당국은 1951년 4월 부산역 건너편 영주동에 있는 양재학원을 월세로 얻어 임시대학을 개강하였다. 2년여의 부산 피난 생활 중, 제2회·제3회·제4회 등 3차에 걸친 졸업식이 있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부산에서의 임시대학 운영을 마치고, 1953년 9월 1일 제2학기 개강을 다시 서울 창성동 교사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그 이후, 재단의 분규로 인한 재정난과 더불어 이승만 정권의 대항마로 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신익희 선생이 선거 유세 중 급사하는 바람에 구심점을 잃은 학교는 존폐 위기에 처했었다.

2.3. 성곡의 학원인수와 정릉동 시대

국민대학은 내 생애에 가장 보람을 느낄 수 있는 투자라고 생각한다. 이익을 내는 자본주의적 의미에서의 투자라는 말은 물론 아니다. 인재에의 투자, 국가에 필요한 지성들을 자유로운 분위기 안에서 길러내기 위한 투자라는 뜻이다. 국민대학교에 다니는 제군을 대할 때 나는 과거의 나를 대하는 것 같이 느끼곤 한다.
<<국민대학보>> 1968년 5월 20일자,「국민대학과 나」中

1959년 쌍용그룹의 창업주인 실업가 성곡 김성곤 회장이 해공 신익희 선생의 뜻을 이어받아 국민대학을 인수하면서 국민대학은 기적같이 명맥을 이어나가게 된다. 그러한 이유로 국민대학교에서는 신익희와 김성곤을 학교 역사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한다.

성곡이 국민학원을 인수한 뒤에 준공한 창성동 교사(1959)

1962년 군부가 집권하면서 대학 정비지침에 따라 학교가 폐교되거나 초급대학으로 격하당할 뻔 했으나 야간대학으로 간신히 살아남았고, 1964년에 다시 주간부가 부활하였다. 가끔 나이드신 어르신들이 '국민대학'내지 야간대학으로 기억하시는 이유가 이러한 이유 때문.

성곡이 국민대학을 인수한 후 신교사의 준공과 증축을 마친 결과 창성동 캠퍼스는 1,200여 평의 교지와 2,124평의 교사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규모로는 증가하는 학생 수에 비해 너무 협소한 것이었다. 더구나 창성동은 그 주변이 모두 주택가이고 바로 앞이 경복궁, 청와대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교지의 확장을 생각할 수 없는 곳이었다. 교사 이전의 필요성을 절감한 학교법인 국민학원은 새 캠퍼스 자리를 물색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정릉동으로 캠퍼스를 이전하기로 하였다.[5] 이 과정에서 학교본부와 초창기 졸업생들과 큰 마찰이 있었다.[6]

국민대학 제1호관(현 본부관) 기공식에서 연설하는 성곡(1969)

1965년부터 교지매입에 나선 국민학원은 총 44,100평의 교지 매입을 완료하고, 1968년 6월 정릉동 북악 캠퍼스 시대를 알리는 1호관(현 본부관) 교사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착공 후 2년 3개월만인 1971년 9월 준공식을 갖게 되었고 그 날 바로 2호관(현 북악관)을 기공했다.

국민대학 전경(1975)

1971년 9월 초순 현재의 정릉동 북악 캠퍼스로 이전하였으며, 새로운 교육환경을 바탕으로 1973년에는 종합대학 승격을 위한 장기발전계획을 수립하고 1976년에는 문교부의 실업대학인가를 받게 됐다. 실험대학인가는 문교부의 대학교육개혁 사업의 일환으로 엄격한 기준을 통과했어야했고 이를 통과했다는 것은 국민대학이 명실상부한 종합대학으로의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정부의 서울인구억제 정책에 의하여 한동안 단과대학체제를 그대로 유지해야했다. 결국 1980년 9월 29일에 가서야 문교부는 국민대학의 종합대학 승격을 허가했고 1981년 한국외국어대학교와 함께 종합대학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2.4. 중형대학을 넘어 대형대학으로

종합대학승격을 축하하는 교문의 문구(1980)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국민대학교는 여러가지 변화를 시도하였다. 우수한 신입생을 유치하기 위해 입시전형 방법을 종전의 후기에서 전기로 전환하였다. 또한 공학관 증축, 3호관(현 과학관) 준공, 강의실 개보수, 단과대학 시설 및 사무실 증축 등의 시설을 확충하였다.

1980년대에는 한국사회에 민주화의 열기가 크게 고조된 시기였고, 그 결과 국민대 내에서도 여러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1987년 11월 26일 교수협의회가 창립되었고 또한 이 해 12월 21일 국민대학교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1990년대에는 교육부가 수도권 대학에 대한 정원 증원 억제 정책을 풀기시작했고 그 영향으로 국민대학교는 중형대학에서 대형대학으로의 발전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에 따라 여러 학과를 신설하고 정원을 늘렸으며 전임교원 수가 대폭 증가하게 되었다. 이같은 학교 규모의 전면적인 확대는 필연적으로 교육, 연구용 건물의 수요를 획기적으로 증대시켰고, 그 결과 성곡도서관 신축(1993), 본부관 · 조형관 · 공학관 · 학생회관(현 법학관)의 증개축(1994), 공학관 별관 · 영빈관 신축(1998), 국재교육관(현 국제관, 경상관) 신축(1999)이 이뤄졌다. 이러한 학교의 양적, 질적 성장으로 인해 국민대학교는 대형대학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2.5. 현재

2000년대에 이르어 국민대학교는 그 동안 쓰던 교표를 교체하게 되었다.



과거에 쓰이던 교표 현재 쓰이는 교표

전통적인 교표는 세월이 흐르면서 약간씩 변화되긴 하였지만, '국민' 을 뜻하는 잎사귀가 대학이라는 글자를 받들고 있는 형상이었다. 국민대학교는 국민이 받들고 있는 대학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 성곡도서관의 오래된 책에는 이 교표가 붙어 있다.


1년여의 준비과정을 거쳐 3가지 안 중 가장 높은 득표를 기록한 3안을 새로운 교포로 선정하고 2001년 5월 UI 선포식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의 전통적 五方正色(청,백,적,황,흑)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영문 머릿글자 (KMU)는 동쪽을 가리키는 청색이며, 이는 탄생, 어짊, 나무를 의미한다. 흙에 해당하는 황색과 남쪽을 가리키는 적색은 조형 하단부에 위치시켜, 전체의 조화로운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중앙은 흰 여백으로 남겨 놓았다. 오행에서 흑색의 서기(瑞氣)를 상징하면, 자존(自尊)과 견인불발(堅忍不拔)의 마음을 나타낸다.
우리민족 至高의 美를 대학의 상징으로 승화시킨 조형으로서 전체적으로는 화합과 융화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다양한 개성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거대한 변화를 창조하는 과정을 시각화한 것으로서, 국민대학에서 배출한 인재들이 각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는 의미이다.
국민대학교 홈페이지

2000년 이후에도 조형관 증축을 시작으로 예술관, 생활관, 지하 대주자창, 7호관, 영빈관, 종합복지관, 국제교육관, 산학협력관을 신축하여 교사면적이 확대 되었다.

2008년 1월에는 국민대-파주시 제2캠퍼스 MOU 체결을 했으나 무산되었고[7] 그해 8월에는 로스쿨 유치에 실패하게 되었다. 지방할당때문에 탈락하게 된 것인데 자세한 내용은 로스쿨 항목 참고. 이 두가지를 이유로 등록금을 인상했으나 실패하여 학교는 망신만 사게 되었다.

인서울 대학교인데도 2012년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으로 선정되어 충격과 공포를 주고 있다. 이것이 화제에 오르자 학교측에서는 재빨리 사태를 덮기 위한 공지를 띄웠다. 하필이면 또 이 때 재학생들에게한 통화 5천원하는 ARS통화를 권하는 문자를 뿌렸고[8], 재학생들이나 졸업생들은 눈치가 그리도 없냐며 학교를 깠다.

취업률과 같은 지표가 문제[9]이지 재단이 돈이 없어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에 선정된 것은 아니다. 모기업인 쌍용그룹이 원래의 역할을 못한지 오래됐지만 국민대학교는 의외로 재정이 탄탄하다.2011년 대학적립금순위 물론 저게 예산은 과다 책정하고 결산은 적게 처리하면서 남긴 이월금이 십년 넘게 쌓인 결과물이다. 재단에 기업이 없는데 재정이 튼튼한 경우라면 거의 이런 경우가 대부분이다. 쉽게 말해서 저게 기부금이 아니라 죄다 학생들의 등록금. 그 쌓인 돈을 부실대의 오명을 벗기 위해 대대적으로 투입 중이다.진작에 좀 할 것이지...

2013년 발표한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에 선정된 이후로 학교에서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벌어졌고 그 결과 산학협력 선도대학(LINC) 육성사업 선정, 수도권대학 특성화 사업(CK-II) 최다 사업단 선정, 전자정보통신대학 컴퓨터공학부 SW 특성화 대학 선정 등의 좋은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문과대학, 사회과학대학 등의 정원·지원 축소와 평생교육원등 수익용 기관의 확대로 인한 학내 공간 재배치[10]와 같은 어두운 면이 있다. 교육부의 대학 구조조정이 다시 강화되는 추세에서 지금의 국민대학교는 대격변기를 맞이했고 이 상황에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느냐에 따라 국민대학교의 미래는 결정될 것이다.



3. 학과

3.1. 학과 목록

현재 14개의 단과대, 46개 학부(과)가 있다.
각 학부(과)별 FM 목록[11]

4.1. 북악캠퍼스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로 77에 위치한 국민대학교의 메인 캠퍼스.
북악캠퍼스에 대한 정보는 국민대학교/북악캠퍼스를 참조하자.

4.2. 교외시설

그 외 각종 교외시설들은 국민대학교/교외 시설을 참조하자.

5. 총학생회

해방의 함성으로 진군하는 국민대학교 총학생회
- 총학생회 현판

비권이 매우 강성인 학교다. 서울 시내 대학중 몇 안되는 '운동권 절멸 수준' 학교. 탄압이 심하고 아무리 지리멸렬이란 대학도 보통 문과대, 사회대, 정외과는 운동권이 잡기 마련이지만 국민대는 그런거 없다. 단 한 군데의 과에서도 운동권이 잡고 있지 못한 상황. 사실 과 단위에서 활동하는 운동권 자체가 없다[14]. 중앙동아리에 PD계열 단체 두어개가 있고, 지하에 숨어있는(?) NL이 일부 있지만 학생회를 수권할 만한 능력은 되지 않는 듯. 일부 NL은 쪽수는 많지만 수권 의지가 없다고 보는게 정확하다.

물론 과거에도 그랬던 건 아니다. 다른 학교에 비하면 약하지만 나름대로 학생운동도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캠퍼스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성곡도서관, 국제관/경상관은 학생들이 데모로 얻어낸 건물이다. 그러다 2003년 조현실 학생회장 이후로는 운동권의 계보가 끊겼다. 조현실은 한총련 대의원 소속으로 학생회장 당시 난소염으로 투병하는 바람에 제대로 학생회가 돌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로는 대개 비권들이 잡고 있는 듯.

2009년에 촛불집회를 나갔던 인원들이 주축이 된 '날개를 달아' 총학생회가 수권했지만 계속 계보를 잇진 못했다. 축제에 '조중동 밟기' '친소 체험' 행사를 넣어서 학생들에게 욕을 엄청나게 먹었지만, 전반적인 평가는 괜찮은 편. 학교 커뮤니티에 누가 운동권 까려고 2009년 총학을 깠다가 역관광을 당한 사례도 존재한다.

2009년을 제외하곤 비권 총학이 쭉 잡고 있는데, 평가가 좋은 총학은 거의 없다. 다른 학교처럼 운동권이나 제3의 세력이 견제하고 있는 게 아닌, 기존 총학라인이 쭉 이어나가는 형태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느슨하기 때문. 축제나 기본적인 행사 몇개 빼곤 하는 게 없다. 단적인 몇 가지 사례가 2008년 총학은 교내 진입 시내버스 노선이 없어지는 걸 보고만 있었어야 했고, 2011년 총학은 전산실 프린터 인쇄비가 올랐음에도 별 대책없이 있다가 학생들이 들고일어나서야[15] 학교와 협상을 시작했다.

이런 경험 탓에 학생들 사이에선 운동권 학생회를 바라는 목소리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고 # 득표수도 증가하고 있지만, 아직 전반적으로 수권하기엔 세력이 미약한 상태.

하지만 2012년, 정부재정지원대학 지정 이후, 운동권(다함께)의 지속적인 병크폭발과 비권 학생회의 예전과는 다른 유연한 움직임으로 인해 운동권 세는 다시 줄어드는 상태.

그러나 2012년 본부관점거를 통해 총장이 학생들 앞에 끌려나온 사건이나 2014년 단과대 학생회장들이 들고일어났던 사태를 생각하면 전투종족의 모습을 가끔 보여줄 때도 있다.

5.1.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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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집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주축이 된 '날개를 달아'와 기존 총학 라인인 '열정으로 그린'이 출마했지만, 결과는 날개를 달아 압승. '열정으로 그린'은 공대 학생회장이 정후보로 나왔는데.. 돈 관리를 개판으로 하던게 학교 게시판에 공개되고 기존 총학라인에 대한 거부감이 학생들에게 너무 컸던 터라 '날개를 달아'에 몰표가 갔다. 최대 선거구인 북악관에서 82:18로 '날개'가 이겼으니 말 다했다. 당시 총학생회나 단과대 관련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2008년 총학 라인이 얼마나 개판쳤는지 다 안다.

등록금 동결을 주 공약으로 삼았는데, 총학 취임 3일만에 학교에서 동결을 발표해버렸다. 총학입장에선 당황. 인하 투쟁으로 이어가려 했으나 당시는 동결만 해도 감지덕지인 분위기라 동력도 안실렸고 총학생회 차원에서도 실수가 많아서 결국 흐지부지.

축제에선 '조중동 신문 밟기', '미친소 체험'이란 일반 학우들 입장에선 어이 없는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기로 해서 엄청난 반발을 샀다. 이걸로 아직까지도 까이고 있는 모양. 다만 시작 직전에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해서 축제가 취소되는 바람에 실제로 행해지진 않았다. 그래도 임팩트는 영원하다

전반적으론 학생복지위원회를 분리시키고 운동권 스러운 총학치곤 복지사업을 무리없이 잘 추진한데다가 돈관리를 매우 깨끗하게 해서(처음으로 학생회 결산내역을 학생식당 앞에 게시했다) 평가는 나쁘지 않은 편. 최근 10년 간 총학중 2005년 '진짜 학생회' 다음 혹은 그와 버금가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16]

5.2.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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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권 성향의 '우리 사이' 선본이 당선됐다. 날개를 달아 라인에서도 후보가 나왔지만, 상대적으로 인물이나 여러 측면에서 밀렸다는게 평.

비권이 되면 등록금이 오를 것이라는 예측과는 달리 2010학년도 등록금도 동결됐다. 삭발까지 하겠다고 나서는 통에 학교측에서 걍 타협한 듯.

현재 셔틀버스 노선 확충에 나름대로 기여한 공로가 크다고 한다. 1112번 시내버스 없어진 이후 셔틀버스 확충 속도가 느렸는데, 많이 늘렸다고.

전반적으론 '크게 잘 한것도 없고 못한 것도 없는 학생회'란 평가다.

5.3.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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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단선이나 잘해봐야 2팀이었는데 간만에 3팀이상 나왔던 선거였다.
'플러스 알파'가 당선됐는데, 공청회 당시엔 제일 발언이 어눌했다고 하나, 상대편 후보 '호감'(2012년의 그 호감 맞다)의 정후보 병역문제가 예비역들의 표심을 움직이면서 당선.

2년동안 동결시켰던 등록금을 2.5%인상하기로 합의해서 시작부터 욕을 미친듯이 먹었다. 동결이 대세가 돼버린 상황에서, 별 얘기도 없다가 갑자기 덜컥 인상에 합의해 버리고 발표하는 바람에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더구나 학기 들어와서도 별 활동은 안하고 스폰만 줄창 받아서 광고부스만 늘리는 걸 보며 학생들이 불만 폭발. 게시판에서 심심하면 성토글이 올라왔다. 한번은 커뮤니티에 총학생회장을 취업 관련 수업에서 봤다는 학생글이 올라올라왔는데 엄청난 악플들이 달리는 일도 있었다고. 교수님들에게도 평가가 좋지 않았다. 올해 총학만큼 일 안하는 것도 첨봤다고 말씀하신 교수님도 계셨다고.

여름방학엔 단체로 놀러간 사이, 갑자기 전산실 프린터가 유료화된다는 공지가 떠서 또 까였다. 게다가 학교측에선 4월부터 총학과 협의했다고 발표했다. 결국 커뮤니티에서 6명정도가 총학생회와 중운위에 찾아가 진상해명을 요구했다. 총학생회의 해명은 '우리는 협의를 한게 아니라 계속 거부해왔다' 인듯. 실제로도 그런듯하지만 총학에 대한 학생들의 불신이 커서 불만이 잠재워 지진 않았다.

불길이 확산되자 중운위에서 부랴부랴 협상에 들어가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봄으로서 불만은 수그러들었지만 불신은 더욱 깊어졌다.

결국 마지막 총학생회 선거까지 파행으로 이어지며 끝까지 욕만 먹다가 물러났다.
그런데 부총학생회장 페북엔 '니들이 한번 해봐'란 류의 글을 올리는 패기를 보여주셨다는 소문이

그리고 총학생회장이었던 사람은 2014년에 학교 본부 정규직으로 취업했다.

5.4.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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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후반에 치뤄진 44대 총학생회 선거는 대파행. 선거 등록 4일만에 운동권 소속 선본이 경고 3번먹고 짤렸다(이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정파에 따라 해석이 워낙 다르다). 이에 항의해서 해당 선본은 삭발[17]후 선거 거부 운동. 이 운동의 여파인지 선거가 막장이었는지는 모르지만, 1차선거에선 예년보다 투표율이 10% 가까이 하락했다. 결과적으론 '선거 연명부엔 사인했지만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지 않은 인원'이 전체 투표인원의 3%가 넘어가서 재투표 조치. 2차선거에선 3개 선본(물론 짤린 선본은 포함안됨)중 2개선본이 결선 진출해서 그럭저럭 넘어가나 했지만, 3차 선거에서 무효표가 쏟아져 나와 결국 선거 자체가 무효 처리됐다.
무려 1달간 진행된 선거(보통은 2주다)와 그 동안 벌어진 중앙선관위/각선본 vs 짤린 운동권 선본 간의 다툼덕에 학생사회에서 서로의 골이 깊어져만 간 상황.

2012년 3월까지는 단과대 학생회장 연석회의 형식(44대 총학생회 협의체, 회장은 경영대학 학생회장)으로 운영되었고, 3월에 보궐선거를 통해 비운동권 성향의 '호감'이 당선됐다. '다함께'소속으로 불리는 '99%의 역습'선본은 모두가 꼴찌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4팀중에 2등을 해서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4월부터 '호감'이 활동중인데 나름 열심히 한다는 평가가 우세한 듯. 특히 위에 서술된 복지관 열람실 문제 해결을 위해 뛰는 모습이 학생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듯 하다.

6월엔 단식투쟁도 했는데, 학생자치권 보장, 등록금심의위원회/북악발전위원회 재개, 국민대장정 예산 보장을 요구했다고. 학교측에서 21시간만에 요구사안을 받아들여 단식을 풀었다. 고생한다는 의견이 다수지만, 한 편으론 '국민대장정 예산을 따내기 위한 쑈'라고 평가하는 쪽도 있음(사실 국민대장정 이외 다른 요구사항에 대해선 별 진전이 없지만 총학에선 따로 불만제기가 공식적으론 없는상황).

복지관 열람실 좌석시스템기를 설치하였다! 그동안 외부인의 잦은 출입과 일부 학생들의 자리 맡아놓기로 인해 문제가 많았는데 복지관 열람실을 이용하던 학생들의 오랜 염원을 해결한 것. 그러나 복지관 열람실은 2년 후에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병크도 존재하는데, 한 졸업생이 만든 시간표 프로그램을 총학생회 홍보국장이 자기가 다 만들었다는 식으로 얘기했다가 원 프로그램 제작자와 학우들에게 대차게 까였다.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선정시 발빠른 대응을 하지 못해 학우들에게 미친듯이 까였다. 이제까지 따놓은 점수를 단방에 잃었다는 느낌. 게다가 우연인지 뭔지는 몰라도 제한 대학 선정 발표시, 농활 사진을 대거 업로드 하는 바람에 학생들에게 더 까였다.

학생회에서는 토요일 입장 발표, 일요일 긴급 중앙운영위원회 소집, 화요일에는 북악발전위원회(대학본부와 총학생회의 대화채널)를 개최했으나, 학생들에게 만족스러운 대안을 내놓진 못하고 있다. 뚜렷한 입장 없이, 대책만 세우라고 몰아부치는 내용이 많아서 시원하지 못한듯.

게다가 이 상황에서 사물함 신청도 매끄럽게 처리되지 않아 더 까였다. 보통은 인터넷신청이었으나, 총학에서 총학생회실 방문신청으로 바꿔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그 수많은 사물함을 신청하러 엄청난 학생들이 몰려들었으나, 총학생회에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 컴퓨터 한대, 학생 한명으로 수많은 학생들을 응대했고, 학생회비 납부자 확인 등 복잡한 과정을 한군데서 하려니 부하가 걸리는 바람에 커뮤니티엔 총학 까는 글로 폭주했다. 거기다가 목격자 증언에 따르면 그 난리를 치는 와중에도 옆에서 총학 간부 몇명이 신경도 안썼다고 하여 학생들은 더 분노폭발.

결국 부실대학 사태때 총학의 대응은 용두사미로 그쳤다. 되려 일부 운동권 학생들이 단독으로 10월말에 본관을 점거했는데 이때 지대로 운빨이 맞아떨어지면서[18] 교원 확충에 대한 약속을 받아냈다.

총학생회 선거에서는 그야말로 찌질함의 극을 달렸는데 사건 경위는 다음과 같다. 선거 도중에 의견차이로 경영대 학생회장이 법대 학생회장을 폭행[19]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는데, 법대 학생회장이 당시 선거관리 문제(잡음이 많았다)와 이 문제를 두고 중앙선거관리위원장(총학생회장)의 사퇴를 요구했다. 이렇게 되자, 총학생회장과 일부 중운위원이 그 법대 학생회장을 모함하는 글을 공식 페이스북에 올려버렸다! 그 내용에 따르면 법대회장은 중운위 몇번 빠졌고.. 뭐 이러한 자잘한 신변잡기 내용들. 결국 법대 학생들을 중심[20]으로 여론이 대폭발해서 항의댓글만 300개가 넘게 달리는 대형 사태가 발생해버렸다. 결국 몇시간만에 글은 지워지고 개망신당하면서 깨갱.

5.5.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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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선거에선 비권 성향의 '오픈투게더'와 운동권인 '99%의 반격'(다함께), '희망설계사'(민대협-NL) 3개 선본이 나섰다. 부실대학 사태 등으로 운동권 선본들이 어느 때 보다 당선가능성이 높은 선거였으나, 본인들의 삽질로 결국 오픈투게더 선본이 무난하게 당선.

학교가 나름대로 위기였고, 그 이유가 운동권들이 지적하던 문제였기 때문에 적절한 복지공약만 들고 나왔어도 운동권들이 쉽게 이길선거였다. 하지만 운동권들은 정세파악을 잘못하고 오로지 학교와 싸우겠다는 공약만 들고 나오고 복지공약은 거의 전무했던 터라 중도층의 지지를 잃고 말았다. 게다가 '희망설계사' 선본은 현재 학교상황과 별 관계 없는 남북문제에 관한 공약을 다수 들고나와서 압도적인 표차로 꼴지 확정. 다함께 선본은 자신들 최다인 약 35% 지지를 받았을 정도이니, 만약 중도층을 잡을 수 있는 공약만 들고왔으면 충분히 이겼을 것이다.

오픈투게더는 1년 동안 나름대로 조용한 가운데, 큰 문제 없이 이끌어왔다. 등록금도 약 3% 내렸으며, 복지사업도 무난하게 했고, 공약이행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편. 총학생회 어플도 만들어져 배포 되었다.[21] 특히 축제의 경우 부총학생회장이 대중음악 작곡가라서 그런지 라인업이 꽤 괜찮았다. 축제 프로그램도 구성이 '역대급'이란 평이 많았다. 다만 축제기간에 비가 오는 바람에 똥망...

총학이 열심히 했다기 보단 학교가 알아서 정신차리고 일을 해서 나름대로 지표도 개선됐고 학내도 조용조용하게 1년이 지나갔다. 이때문에 상대적으로 학내 운동권 세력들은 상당히 악화. 최근 서울 주요 대학 비운동권 학생회 스타일이 운동권의 의제를 받아들이면서 급진적이 아닌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이 유행이기 때문에, 우리학교도 이를 받아들인 결과 조용하게 1년이 지나갔다.

다함께의 '수장'이었던 법대 모 학우가 학내 운동을 그만두고 다함께 중앙조직으로 옮겨가면서 한동안 총학생회 선거도 상당히 조용해질 줄 알았으나 역시나 선거는 파행. 실상은 이랬다. 원래 중앙선관위가 구성되면 위원은 원칙적으로 위원직을 사퇴하더라도 선거출마는 불가하다. 그런데, 중선관위 구성과 단대 학생회장이었던 한쪽 후보자들의 사퇴시점이 엉키면서 선거세칙을 위반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상대방 후보가 후보자격없음을 주장했지만, 중선관위에서 문제없다고 얘기하면서 선거는 속행. 그러자 법대 출신[22]이었던 상대방 후보는 법원에 '선거 후보자 자격 확인 소송'을 걸어버렸다. 하지만 이 심리 결과가 선거 끝나고 나오는 바람에 유야무야. 그 상대방 후보는 법원 판결을 믿었던지 선거운동도 거의 하지 않았으나 결과가 저렇게 나와버려서 낙동강 오리알 행.

5.6. 2014년


개념을 리필해야 할 필요가 있는 총학생회.
역대급 병크의 종결자.
내 사전에 '소통'이란 단어는 없다!
관련링크
병크가 얼마나 많은지 누군가 이렇게 정리도 해놨다

본래 총학의 활동에 별반 관심이 없는 국민대학교 학생들의 타고난 성품으로 인해 1분기 평판은 그냥저냥 괜찮은 편이었다.
그러나……

2014년 4월 중순경
학생예비군에게 제공 지원하던 버스지원제도를 철폐하려 시도하여 물의를 빚었다.국민대학교에는 3,906명의 학생예비군이 존재하는데, 이중 버스를 탑승하려는 예상 소요인원이 500~1000여 명 정도에 불과하여 전체 학생 수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더욱이 작년 대비 학생회비가 300만 원 정도 적게 걷혀 자금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논리 자체에는 그다지 큰 무리가 없으나, 전적으로 남성 학생들에 대한 차별로 비추어질 수 있는 일을 너무 가벼이 처리했다는 지적이 있다. 안 그래도 여성휴게실 문제에 대한 남학우들의 잠재적인 피해의식이 깔려 있는 상황에서 군대에서 개고생하고 돌아온 복학생들에 대한 복지를 삭감하려 하다니... 결국 이는 실질적 수혜자의 수와는 상관없이 남학생 전체에 대한 도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2014년 4월 말경
희대의 사태가 발생한다. 학생들에 대한 사전 동의절차 없이 단원고 학생들에게 학생회비 1000만 원을 기부해버리고 만 것. (정확히 말하자면 단원고의 사고자 유족이 아닌 단원고등학교에 기부를 하였다) 사실상 절차의 문제는 없었다. 총학생회가 독단적으로 한 것도 아니고, 전체학생대표자회의를 통해서 결정했던 사항이기 때문에 회칙 상으론 전혀 문제될게 없었다.[23] 다만 이번 사건으로 인해 학부/과 학생회가 제대로 의견수렴을 하지 않는다는 여론이 확실하게 퍼져버린다.

좋은 뜻에서 기부했다는 점은 참작할만 하나, 돈이 없다는 이유로 예비군 버스도 없애버리려고 한 총학의 행태를 비추어 보면 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는 의견이 다수. 이후 총학은 급히 관련 회계내역을 공개하고 여론을 수습하려 하였으나, 결국 실패했다.

2014년 7월 초경
총학이 죄다 농활 감독하러 빠져있을 때, 우리의 자랑스러운 국민대학교는 학생들의 학비를 바탕 삼아 콘서바토리 증강 계획을 실행할 꿈을 펼친다.
학교측이 종합복지관 열람실을 싹 걷어치워버리고 그 자리에 크고 아름다운 평생교육원 강의실을 만들기 시작한 것을 발견한 총학은 급히 회의를 소집하였으나, 리필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소통"의 부재로 학생들의 의구심과 불만은 계속 증폭되어가기만했다. 너무 두루뭉실한 대책방안을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이에 관한 학생들의 질문에는 제대로 대답하지도 않았기 때문. 심지어 한달간 대답을 못 받은 경우까지 등장했다.

이 와중에 계속되는 복지관 박해에 빡친 동아리연합회 부회장(권두지)이 총장과의 면담과 학교 측의 각성 및 결정사안 시정을 요구하며 밤새도록 1인 시위를 하는 사건이 발생했고,링크 거기다 관리처장, 학생처장, 교무처장을 비롯 총장이 직접 동아리연합회 부회장을 만나서 "앞으로 열람실을 비롯한 학생자치공간에 대해서는 학생자치기구와 사전 협의를 거치도록 하겠다"고 약조, 학생회는 한순간에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고, 동원훈련 중이던 동아리연합회 회장은 훈련도중 서울로 끌려와 사건을 수습하는 등 대혼란이 벌어졌다.

더욱이 종합복지관 열람실 철거는 학생들에게 본격적으로 소식이 알려지기 약 한 달전(6월) 학교 옴부즈 오피스 홈페이지에 "복지관 열람실 냉방 문제"에 대한 요구사항의 답변으로 최초로 알려졌으나 총학에선 당시 이를 인지하지 못하였고 결국 농활 중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는 변명과 함께 손 쓸 사이도 없이 일이 진행되고 말았다.
또한 위에서 기술한 동아리연합회 부회장과 학생처장과의 면담과정에서 성곡도서관 바로 옆에 똑같은 모양으로 찍어내고 있던 건물이 도서관이나 열람실이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될 것이라는 소식이 처음 알려지게 됐고 이 과정에서 총학은 다시 한 번 무능력함을 보여줬다.

2014년 8월 말경
학교측이 종합복지관 열람실을 폐쇄해 버리고, 전산실 인쇄비까지 올려버리는 사건이 발생.
그리고 총학은 부재중이었다!

알고 보니 총학은 그간 노고를 스스로 치하한다는 학교측의 포상을 받아서 말레이시아로 휴가를 떠났고, 그 사이에 학교측이 중요 사안들을 다 처리해 버린 것(!!).

총학이 간 말레이시아여행은 단순 포상이 아니라 우리학교와 말레이시아 학교 간에 국제교류프로그램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정식으로 공고를 내고 국제교류프로그램에 참가할 자격이 되는 학생들을 선발해서 해외로 보내줬어야한다. 그러나 학생지원팀은 공고를 내리고 학생을 선발하는 대신 총학을 말레이시아에 그냥 보내줌. 등록금으로. 총학은 이런 학생지원팀의 제안을 받아들임. 총학 집행부와 교직원 등이 말레이시아로 떠남. 2013년 총학생회 오투가 말레이시아 학교에서 찍은 사진으로 인해 끝까지 발뺌하다가 국민저널에 들킴.

총학생회가 포상 겸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건 아무래도 좋다. 그러나 학생들의 이익을 대변해 학교와의 교섭을 담당하는 총학생회가, 학교와의 싸움이 한창 진행 되어야 할 시점에 스스로의 노고를 치하한답시고 놀러간 것도 웃기는 일이고, 그걸로 모자라서 싸워야 할 학교측에게 돈을 받아서 갔기 때문에 더 까였다. 이에 총학은 귀국 하자마자 칼같이 사죄문을 공지했다.일단 읽어나 봐라.
보다시피 사퇴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학생들과의 약속을 지키겠다고 다시 한번 공약하였으나... 학생들은 이미 댁들은 임기 끝나가잖아요, 하면서 계속 깠다.

이 문제에 대해 국민저널은 2009년 총학생회 '날개를 달아' 관계자의 인터뷰를 통해 "총학의 교비지원 말레이시아 여행은 그동안 관행적으로 있어왔으며 학교와 대립각을 세우는 총학에겐 학교 학생처에서 관련된 지원이 없어 (09년 총학은) 여행을 가지 못했다"라는 주장을 실은 기사를 내기도 하였다. 관련링크

결국 이 시점에서 학생들의 불만은 정점에 달했고, 총학은 장소불문(국민인닷컴, 국민대갤러리, 총학페이스북) 레알 지구종말이 연상될정도로 까였다.

하필 등록금 시즌과 맞물려, 학생회비를 안내는 학생도 다수 발생. 낸 놈도 환불받겠다고 으름장 놓는 판이다.
학내 신문사들은 물론, 오마이뉴스에서도 이에 관한 기사를 썼다.

그제서야 여러가지 의미에서 위기를 느낀 학생회는 소통의 부재를 개선하겠다며 무려(웃음) 국민대 갤러리에 고닉을 파고 공지문을 올리셨다.관련링크

그리고 결국
2014년 11월, 새로운 총학생회를 뽑는 선거가 벌어졌고, 모든 후보의 공약엔 우린 말레이시아에 가지 않겠습니다!!(...)라는 문구가 등장하는 등 후임들에게까지 현재진행형으로 까이는 중.

5.7. 2015년


2014년 11월 말에 치뤄진 소통 vs 역전 대결에서 소통이 44.19%의 지지율로 35.56%의 역전을 이기고 총학생회로 당선.
앞으로 어떻게 이끌어 갈 지 잘 지켜보자.




6. 교내 언론

국민대 역시 어느 학교들처럼 대학 언론이 존재한다. 그러나 관심도는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학교 곳곳에 배포 스팟들이 존재해 쉽게 구할 수 있으니 읽고 학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도록 하자. 위키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국민대학교 항목부터가 이들 신문방송사에서 나온 자료를 근간으로 하는 것이 많다는 걸 생각해보자.

6.1. 국민대신문


《국민대신문》은 1948년 12월 18일에《국민대학보(國民大學報)》라는 이름으로 창간되었다. 3호까지 발간 후 정간했다가 1959년 7월에 《국민대학월보(國民大月報)》로 명칭을 바꾸어 복간, 29호까지 발간되었다. 그 후 1962년 5월에 국민대학보로 제호를 환원하여 2003년 1월까지 발행되었다. 이어 2003년 3월에 현재의 이름으로 제호를 바꾸었다. 2012년 1월 1일 신년호부터 국민대신문의 판형을 학내 구성원의 여론을 수렴하여 기존 대판에서 베를리너판으로 지면의 크기를 변경하고 제호 디자인도 현대 감각에 맞게 새로이 제작하였다. 한편 정기적인 신문 발간 이외에도 1976년에는 자체적인 문학상인 국민문학상을 제정하여 시상하기 시작, 1979년에 북악문화상으로 개칭 및 시상범위를 확대하여 매년 문학·학술 분야에 걸친 현상 공모를 하고 있다.

6.2. 국민리뷰(The Kookmin Review)


《국민리뷰(The Kookmin Review))》는 1975년 3월 15일 《국민타임스(The Kookmin Times)》를 제호로 창간된 영자신문을 모체로 한다. 1976년 9월호(제12호)부터 제호를 《국민타임스헤럴드(The Kookmin Times Herald)》로 변경하였고, 1980년 5월 19일 계엄 확대에 따른 휴교 조치에 즈음하여 제호를 《국민트리뷴(The Kookmin Tribune)》으로 변경하였다. 1987년부터는 신문의 판형을 기존의 타블로이드판에서 스탠더드판으로 바꾸면서 지면의 크기가 확대됐다. 그 후 1993년 8월부터 슈퍼 타블로이드판으로 판형을 바꿔 발행했다. 1995년 3월호(제145호)부터 발행을 월간에서 계간으로 바꾸고, 판형도 슈퍼 타블로이드판에서 32쪽 매거진판으로, 제호를 오늘날의 《국민리뷰(The Kookmin Review)》로 바꾸고 전체 36쪽의 잡지를 연간 4회, 호당 5천 부씩 2002년 6월(164호)까지 발간하였다. 2002년 10월(165호)부터는 판형을 슈퍼 타블로이드판으로 변경하여 한 학기에 3회 발행하고 있다.

6.3. 북악방송국(BBS; Bukak Broadcasting Service)


《북악방송국》은 1973년 4월에 발족하였으며 1976년 3월 방송국의 직제 개편으로 호출부호 《KUBS》를 《BBS(Bukak Broadcasting Service)》로 개칭하였다. 1975년 5월 방송국 출력을 300w, 1978년 9월 1kw로 증설하였다. 1984년 9월에는 대담용 고성능 기재 등을 도입 보강하였고 완전방음 스튜디오 및 네트워크를 신설하였다. 이어 1993년 6월 방송국 출력을 1.5kw로 늘리는 등의 기술적 개선을 이뤄냈다. 2002년에는 교내 네트워크 설비를 교체하고, 방송기기도 새로이 구입하여 교내 전역에 양질의 방송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2013년 3월 2일 현재 방송 시간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침 방송(오전 8시20분~8시50분), 낮 방송(오후 12시10분~12시50분), 저녁 방송(오후 4시40분~5시10분)으로 하루 세 차례에 걸쳐 100분간 교내 스피커를 통하여 정규방송을 하고 있다. 저녁 방송이 끝나고 나서는 국민대학교 교가를 틀어주니 교가가 뭔지 궁금한 사람들은 들어보도록 하자. 2014년, 학내 뉴스를 전하는 페이스북 계정 'KMU BBS news'를 신설하였다.

6.4. 국민저널(The Kookmin Journal)


《국민저널》은 국민대신문사와 북악방송국에서 해직 또는 면직된 기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2012년 9월 12일 창간한 학생 자치 언론이다. 학교 본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고 주간교수가 존재하는 신문방송사와 달리 학생들이 독자적으로 편집권을 행사하며, 재정 운용·기획·취재·기사 교정·인쇄 감독·배포·홍보 등 운영의 전 과정을 직접 담당한다. 초창기 타블로이드판 단색 8면으로 발행하다가 2013년 3월부터 타블로이드판 단색 16면 형태로 발행하고 있다. 온라인을 기반으로 하여 평시 사안별, 이슈별 기사를 생산하며 심층 보도 기사, 분석 기사를 추려 학기 중 매월 말(1년에 약 8회) 인쇄 신문을 발행한다. 2013년 6월 현재 《국민저널》제작위원회 휘하에 편집국과 운영국으로 나뉘어 총원 10명의 구성원이 활동하고 있다. 2013년 2월 5일 대학언론의 단결과 발전에 공헌한 노력을 인정받아 제4회 시사in 대학기자상 특별상 부문을, 2014년 1월에는 예술대 지 모 교수 비리 사건 연속 추적보도로 제5회 시사in 대학기자상 학내보도부문 본상을 수상한 바 있다.

7. 기타

  • KBS 주말드라마 오작교 형제들에서 극중 유이가 재학 중인 학교[24]라는 설정이다.

  • 웹툰 무한동력에서 주인공 '장선재'가 다니는 학교가 '민국대학교'인데 이는 국민대학교를 모티브로 삼은 것이다. 실제로 1화에 보면 장선재가 학교를 설명하는 컷에 국민대학교 사진을 그린 그림이 나온다. 동 작가의 웹툰 신과함께에서도 저승편과 이승편에서 민국대학교로 등장한다. 저승편에서는 김자홍의 출신대학[25]으로 나오고, 이승편에서는 학교 무한동력에서 사용한 학교 그림이 다시 나온다.

  • mbc 시트콤 논스톱5의 후속작인 레인보우 로망스의 촬영지였다. 다만 학기가 진행됨에 따라 시트콤 촬영때문에 어수선하고 면학분위기를 해친다는 학생들의 항의로 인해 시트콤 후반부는 부천대학에서 촬영. [26]

  • 대한민국 4년제대학교 중에서 자동차공학과를 가장 처음 만든 학교이기도하다. 기계자동차공학부가 개설되어 현재까지도 이 학교를 대표하는 학부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그 이후, 기계시스템공학부와 자동차공학과로 분리되었다.

  • 원래 국민대학교 설립에 재정을 지원하려던 사람은 단국대학교를 세운 장형과 조희재 여사였다. 김구이승만의 해방 후 정치적 이견차에 따라 김구 계열이었던 장형이 이승만계로 분류되던 신익희의 국민대학설립기성회에서 손을 떼고 이듬해 1947년 독자적으로 단국대학을 세웠다.

  • 개교기념일을 10월 18일로 기념하고 있는데, 맨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국민대학교의 개교일은 1946년 9월 1일이다. 그러나 미군정청이 국민대학관의 설립인가를 내주지 않고 1946년 12월 18일에 허가하는 바람에 학교측에서는 이에 12월 18일을 개교기념일로 지정하려고 했다. 그런데 방학기간이라(...) 날씨가 좋은 가을인 10월 18일을 개교기념일로 지정했다고 한다.

  • 경상남도 창원시(구 마산시) 소재 사립대학인 경남대학교와 창학 뿌리가 같다. 국민대학관이 정규대학으로 승격되기 위해서는 재단이 필요했고 조선불교 총무부장이었던 최범술이 해인사 사찰재산을 기부하겠다고 나서면서 1948년 최범술을 재단 이사장으로 선임했다. 그런데 최범술 재단이 국민대학의 설립자이자 초대 이사장, 초대 학장이었던 신익희를 임의로 해고하자,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반발하여 '학장 유임운동'을 벌여 재단을 축출한다. ㅎㄷㄷ 해공 신익희 학장의 국민대학에서 떨어져 나간 최범술 재단은 마포에 똑같이 '국민대학관' 간판을 달고 학교를 운영하다가 1952년 '해인대학'이라는 이름으로 변경, 현재의 경남대학교가 되었다. 관련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

  • 6.25 전쟁 당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당시 경복궁 옆 종로구 창성동에 있었던 국민대학의 현판을 인민대학으로 바꿔버린 흑역사가 있다.

  • 삼국대 항목에도 서술되어 있다. 1960년대 대학입시에 '전삼국대'와 '후삼국대'라는 명칭이 있었는데, '전삼국대'는 국(國)이 앞에 들어가는 국민대학, 국제대학, 국학대학 [27]을 지칭하는 말이었고, '후삼국대'는 국(國)이 뒤에 들어가는 건국대학교, 단국대학, 동국대학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 2010년 당시 이재오 특임장관의 이력서에 '국민대학교 농업경영학과 졸업'이라고 쓴 항목이 청문회때 논란이 되어 이재오 특임장관 후보자가 사과하는 일이 있었다. 졸업증명서에는 중앙농민학교로 기재되어 있었기 때문인데[28], 중앙농민학교와 국민대학교는 같은 재단이나 별개의 대학이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이후 정권을 잡은 군부가 대학정비령 및 통폐합을 나서는 바람에 1962년 당시 국민대학을 폐지하고 초급대학으로 격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다행히 초급대학으로 격하되지는 않았지만 주간부가 폐지되고 야간대학으로 전환되는 수모(...)를 겪었다. 안습 이런 일을 겪으면서 학교 시설이 남아버리자 재단에서는 자구책으로 '국민여자초급대학'을 설립하고, 중앙농민학교를 인수해서 국민산업학교[29]으로 전환한 일이 있었다. 1964년 폐지된 국민대학 주간부가 부활하면서, 국민여자초급대학은 1968년에, 국민산업학교는 1972년에 각각 폐지되었고 폐지 후의 학적관리 업무는 국민대학교로 이관되었다.

  • 그런데 2012년, 이길영 KBS 신임 이사장이 이력서에 '국민대학교 농경제학과 졸업'이라고 표시했는데 알고보니 중앙농민학교 졸업...이었고, 학위 허위기재 논란으로 또 사과하는 일이 벌어졌다. 어 이거 어디서 겪은거 같은데? 2010년 중앙농민학교 졸업기재 논란이 2012년에 똑같이 재현된 것. [30]

  • 학교 지리와 건물구조가 무척 복잡한데, 일단 다른 학교들에도 있는 몇층을 가던 지상(...)은 당연히 존재하며, 예술관과 경상관, 국제관이 연결되어 있다. 특히 예술관은 그 복잡함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데, 마치 미로처럼 연결된 통로와 곳곳에 숨겨진 방은 신입생으로 하여금 눈물을 뿜게 만든다. 이에 비하면 경상관은 양반.

  • 농구대잔치 대학부 창립 멤버 6개교(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 한양대학교, 경희대학교, 단국대학교, 국민대학교) 중 한 곳이었다. 한때는 강호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측의 엘리트체육 지양 방침에 따라 농구특기생 선발을 92년부터 중단하였고, 농구 특기자로 입학한 학생들이 졸업하는 해부터 대학2부리그로 편입될 운명에 처한다. 결국 95년 10월 30일, 연세대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대학농구 예선탈락으로 대학1부리그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연세대학교에 이기면 팀의 생명이 하루 이틀 더 연장되기에 국민대 농구부 학생들은 사력을 다했지만 109-57로 패배. 창단 2년만에 연세대학교와 추계대학농구연맹전에서 공동 우승을 하는 등 화려했던 국민대 농구부의 추억들은 22년의 역사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지금 국민대에 농구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 수강신청 때 인기강좌는 목요특강. 학점에 상관없이 들을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신청하면 용자라고 칭송받는다. 남자랑 여자랑 짝을 지을 수 있는 부모연습도 인기강좌. 단, 남자학생 수가 많아 남자끼리 커플을 지어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Ang? 그 외에 공연관람 수업인 '공연줍기' 등도 인기 강좌에 속한다. 반대로 안습한 강좌는 전인교육의 사서삼경의 이해와 주역의 현대적 이해가 꼽힌다.

  • 학교에 청설모랑 까치랑 까마귀, 비둘기가 옹기종기 모여사는데, 사람을 많이 무서워하지 않는다. 북한산이 옆에 있어서 그런지 학교공기가 맑다. 삼육대학교와 비슷하게 자연과 더불어서 사는 학교.

  • 시각디자인학과와 공업디자인학과가 유명하며, 홍익대학교와 비슷하다고 한다. 자동차공학과는 과거에 들어가면 바로 취직이었으나 쌍용자동차가 망하면서 주춤했다. 허나 자동차공학과를 필두로 공대 끝판왕이라는 현대자동차 입사자 수가(2012년 기준) 한양대, 고대에 이어 3위를 기록하면서 재조명되었다.[31]
  • 예술대학 연극영화과와 공과대학 건설시스템공학부가 유달리 '똥군기'가 세다. 연영과는 신입생이 초등학생처럼 이름표를 달아야하고 90도 인사. 목소리도 크다. 인사를 안하면 불이익이 센지[32] 긴가민가하면 다 인사하기 때문에, 타 단과대생들도 예술대 앞을 지나다보면 영문도 모르는 연영과 신입생에게 인사받기도 한다. 또한 예술대 내 극장에 신입생과 2학년을 모아놓고 기합도 심심치않게 주는 모양. 참고로 타 단과대 생들은 이걸 매우 싫어하는데, 한번은 답답했던 타 과생이 학교 커뮤니티에 이 문화를 대놓고 깠을 정도였다.

  • 건설시스템공학부도 연영과만큼은 아니다 뿐이지 답이 없는걸론 매한가지다. 가끔씩 지하세계 술집에 가보면 선배들이 후배들을 폭행하거나 뺨을 때리거나 심지어 대가리 박기도 시키기도 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십중팔구는 건설시스템공학부. 한번은 80년대 학번 선배들이 학교앞에 술마시러 왔다가 건설시스템공학부 고학번들이 술집에서 후배들에게 행패부리는 걸 보고 빡쳐서 훈계하려는걸 90년대 학번들이 기를 쓰고 말렸다는 일화도 있다. 약10학번이후부터는 똥군기 대물림을 철폐하자고 얼차려는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물론 아예 없어지진 않는다. 원래 토목쪽이 이런 성향이 있기도하고, 술마시는게 일상 다반사다보니...

  • 학교를 거닐다 보면 가끔 내가 중국에 유학을 온 것으로 착각이 들 정도로 중국인 유학생들이 많은 것을 거의 단번에 알 수 있다. 중국인 특유의 응집력으로 서로 뭉쳐다니며 큰소리로 얘기를 하기 때문에... 글로벌화를 하겠다는 취지로 많이 홍보해서 유학생들을 데려는 왔지만 사실 중국에만 치우쳐져 있고, 그 기준은 무엇인지 그들은 간단한 한국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해 특히 팀플이 중요시되는 교양과목에서는 거의 중국 학생들은 발을 빼며 한국 학생들에 피해를 주는 일이 허다하다. 한국어 잘 모르니 나몰라라하는 식으로 수업 참여도가 제로에 가깝고 또 잘 들으려는 열의도 없다. 이쯤 되니 학교 재정을 중국 유학생으로 충당하고 있다는 의심이 든다. 대학 글로벌화+머니의 일석이조 어찌됐든 타학교보단 사정이 괜찮은지 유학생 관리 부실 대학에 선정 되진 않았고, 2013년 '조선일보·QS 아시아 대학 평가'의 국제화 순위에서 44위라는 괜찮은 순위를 기록하였다.



사우디 유학생 유치에 꽤 적극적이다. 2010년 기준으로 한국에 유학온 사우디 학생의 25%가 국민대를 다니고 있을 정도. 김동억 전 수단 공화국 대사가 초빙교수로 있어 총장과 함께 몇차례 사우디를 다녀왔다. 사우디 교육부장관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하기도 했고 본부관 2층에는 사우디 학생 클럽이 있다.
2014년, 본부관 학술회의장에서 주한 사우디아라비아 문화원이 주최하는 제1회 아랍어권 외국인 한국어 말하기 대회를 개최했다. 이런 국민대의 사우디 사랑을 보고 국민인닷컴에서 '만수르 같은 사람이 재단을 인수해 맨체스터 시티처럼 국서연고 되는게 아니냐' 는 농담이 올라오기도 했다. 그럴리가 없어

  • 국민대 학생들조차 이런게 있는지 잘 모르지만 공식 학교 캐릭터가 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무려 3가지 버전이 있다(...). 그 중에서 그나마 가장 많이 쓰이는 건 위 그림의 '용룡이'. 2011년 EBS 인터넷수능 문제집 뒷면의 국민대 광고와 2013년 개정판 지성과 글 교재(우리 시대의 글쓰기), 국민대 정시 모집요강 팜플렛 등등에서 용룡이를 볼 수 있다.

  • 2014년 4월에 일어난 끔찍하고 안타까운 사고인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에서 목숨을 걸고 학생들을 탈출시키다 본인은 시신으로 발견된 안산 단원고등학교 교사 N씨가 영어영문학과 98학번 졸업생이다. 이 일로 복지관에서 분향소가 마련되었었다. 국민대 학생이라면 이런 분의 후배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자. 마찬가지로 동국대학교에서도 사망한 모교 출신 단원고 교사를 위해 분향소를 만들었었다.그리고 2015년 2월 말에 선배님의 이름을 딴 장학금을 신설하기로 결정했다.

8. 커뮤니티

8.1. 국민학생들

인터넷 포탈서비스 다음에 개설된 카페로 국민대학교 학생이니까 국민학생들이란다. 흠좀무

국민대학교 학생들의 대표적 커뮤니티로 유서가 깊었으나, 2010년 국민인닷컴이 개설되면서 운영을 잠정 중단하였고, 국민대 대표 커뮤니티의 기능은 현재 국민인닷컴이 대체하고 있다.

8.2. 국민인닷컴 kmuin.com


국민대의 대표 커뮤니티.

2010년 말부터 디시인사이드 국민대 갤러리 고정닉을 중심으로 커뮤니티 이야기가 나오더니, 전자과의 능력자와 몇몇 갤러리 고정닉 유저들이 만들었다.(현재 확인된 운영진 4명) 자유게시판, 사랑방, 강의평가, 장터 등이 있다. 과거 다음까페에 있던 '국민인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국민학생들'을 통폐합하여 규모도 꽤 되는편.(유저수가 약 1만명정도) 강의평가 게시판에서 강의정보를 미리 알아보고, 장터 게시판에 자주 올라오는 중고책 거래를 잘만 이용하면 아주 알찬 한학기를 보낼 수 있다.

정치적인 성향은 우파성향이 강하다. 다함께 등 학내운동권의 글들은 '비추'세례를 먹기도 하며, 중간에 아주아주 간혹 나름 합리적으로 보이는 문제제기도 도매금으로 욕먹는 경우가 있다.
총학생회 선거에선 많은 유저들이 극좌파 성향 '다함께'의 압도적인 꼴지를 예상했으나, 4팀중에 2등을 하는 파란(?)이 일어났다. 다함께 활동가들이 이 사건 이후, 학내커뮤니티 의견에 대한 우려를 덜 한다고 카더라
2013년 여름, 국정원 사건 시국선언 관련 이슈를 계기로 커뮤니티는 또 다시 혼돈의 카오스 상태로 들어섰으나, 우파 유저들이 몇몇 운동권들에게 썰리면서 다시 조용해진 상태.
그러나 이렇게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 떡밥일 떄를 제외하고 평상시에는 글이 하루에 5개 정도 밖에 안 올라오는 심각한 정전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그나마 조회수가 100은 기본으로 넘기는 것으로 보아 보는 사람은 어느정도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디시인사이드 국민대 갤러리 고정닉들이 국민인을 살려보자면서 글을 쓰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익명게시판에서 병크가 너무 터져서 한때 익명게시판이 폐쇄되기도 했다. 신상털이부터 시작해서 욕설, 특정 지역 비하 등 눈뜨고 봐주기 힘든 상황이 많이 연출됐다. 특히 토론게시판에선 특정 지역 비하 및 특정 정치세력의 확인되지 않은 유머등이 사실인양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8월 말에 다시 익명게시판인 '사랑방'이 개설됐다.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 선정 이후에 사랑방이 다시 폭주하자, '임시토론게시판'을 개설. 하지만 괜찮은 글들은 대부분 자유게시판에만 올라오고 익명게시판인 토론게시판엔 배설글이 많이 올라온다.

그래도 운영자분은 완전 개념이라 운영 자체는 문제가 없는 편. 시험기간에 학교나 주변 음식점과 연합해서 이벤트를 열기도 한다. 학교 곳곳에 치킨가게 쿠폰을 숨겨놓고 그것을 찾는 이벤트를 한 적 있는데, 상당히 호응이 좋았다.

사랑방이라는 곳이 지역이나 정치적으로 문제를 일으키자 중단시켰었는데... 결국 다시 살아났다.

국민대 학생이라면 한 번 가보는것도 나쁘진 않을듯.


8.3. 디시인사이드 국민대 갤러리

주소 : http://gall.dcinside.com/kookmin/
디시인사이드 대학 게시판 중 하나. 그냥 평범한 대학교 갤러리이다.

잉여로워보이는 국민대생들을 볼 수 있다. 국민인닷컴과 다르게 반말, 욕설 등이 허용되는 분위기여서 그런지 여성 이용자는 거의 없다. 그러나 찾아보면 있긴 있다.

형저오국가란 말이 타대 훌리들과 일부 국갤러들에 의해서 4년제 대학 갤러리와 국민대 갤러리에서 유행했었다. 뜻은 '형 저 오등급인데 국민대 가능한가요?'(...). 국민대의 입시성적이 비슷한 수준의 대학들보다 낮게 나온 것을 그러나 비슷한 수준의 대학도 빵구난 것을 찾아보면 거기서 거기라는게 함정 놀리는 말이다.

유독 타대학 훌리가 없다. 이는 갤러들이 훌리가 뜨면 그냥 무시(...)해버린다.
인풋 아웃풋이나 경영대의 CPA도 2014년 기준으로 훌리가 빠는 대학보다 높아져 버려 훌리건들의 명분이 사라져 버렸기도 하고.


2012년 런던 올림픽 선수단 환영행사인 KBS 국민대축제 때문에 갤이 털렸다.


'국민대축제' 때문에 갤이 털리고 나서 불과 며칠 후, 2012년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에 선정되면서 갤이 또 다시 털렸다.[33]

하여튼 부실대 선정 이후, 갤이 털리는 과정에서 고정닉들이 많이 사라졌으나 지금은 새로운 갤러들의 유입으로 다시 활성화 되고 있다. 현재는 정모도 가끔 이루어지고 있으며, 다른 디시인사이드 갤러리들에 비해 패드립, 섹드립들이 없는 등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친목질이 꽤 심한 대학 갤러리 중 하나이다.[34] 다만 뉴비나 비친목파에게 배타적인 분위기는 아니다. 학교 커뮤니티라는 특성상 친목질이 교내로 이동하기도 하고, 그로 인해 갤에 신상이 퍼지면 학교에서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긴다(...). 사실 국민대학교 자체가 별로 크지 않기 때문에 갤러들은 금세 서로의 신상을 확인할 수 있다.

2009년과 2014년에 갤러출신 학생회장을 배출해냈다. 2009년엔 부총학생회장, 2014년엔 동아리연합회 부회장.

참고로 베다위키 국민대 항목은 국갤 유저 몇명이 돌아가면서 편집하고 있다. 하지만 권두지는 아님

8.4. 학교 관련 페이스북 계정

2012년 2학기에 갑자기 학교 건물을 의인화한 계정이 만들어졌다. 타대에서 유행하던 것을 국민대 학생들이 만든 것. 거의 모든 지명이 등록되어 있었다.

처음엔 우후죽순처럼 늘다가 최근엔 민주광장 외에는 별 다른 활동을 하지 않는다. 민주광장은 '여러분들의 게시판'도 만들고 자신의 계정으로도 학교의 많은 소식을 알려주고 있다. 질문도 잘 받아주는 편.

국민대봇은 학교나 총학의 행태를 비꼬는 글을 자주 올리는데, '시원하다'는 평과 '별로 좋지 않게 보인다'는 의견이 양분. 몇몇 단대를 깠다가 학생회 임원들과 댓글논쟁을 벌인 후 2012년 초 잠적했다.

2014년, 국민대 대신 전해드립니다라는 계정이 등장했다. 보통 줄여서 국대전이라고 많이들 부른다. 익명으로 글을 올릴수 있다는 점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데 이 역시 타대에서 유행하던 것이 국민대에 생긴 것.

8.4.1. 여러분들의 게시판

페이스북 계정 '민주광장'이 개설한 페이스북 그룹. 국민대학교 학생들이 가입되어 있으며, 학내 이슈에 대해 의견을 나눌 수 있다. 회원수는 많지만, 올라오는 글은 적은 편. 경상대 동문인 박정혁씨가 취업멘토로서 많은 글들을 올려주고 있다. 박정혁씨는 한국은행 및 각종 연구기관에서 활약하신 분으로, 경영/경상대 학생들이 유용한 정보를 많이 올려주시니 해당 학생들은 참고바람. 총학생회 페이스북 계정도 여기에 글을 올리는 경우가 많다.

9. 사건/사고


9.1. 국민대학교 단톡방 성추행 사건


2014년말 모 과의 소모임 단톡방모 과의 소모임이라고는 하지만 어디인지 밑에 보면 다 나와 있다는 게 함정에서 여학우를 두고 성폭력 발언을 한 것이 국민저널에 공개되어 문제가 되었다. 학내에 이슈가 되었을 때는 가해자 측과 학교 측이 아무렇지도 않게 반응했다가 2015년 들어 언론에 보도가 되면서 사건이 굉장히 커져 버렸다.
이 곳에 들어가면 조금 더 자세한 사건의 정황을 알 수 있다.

9.2. 인사예절똥군기 사건



2015년 들어 국민대학교 연극영화과의 예절교육인사 관련 항목이 언론을 타기도 했다. 관련기사 처음에는 숭의여자대학교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본래 선배 기수들에서 없앴던 인사예절인데 누가 다시 부활시켰다고. 12기인가가 없앴던 걸로 알고 있는데 다시 부활...대체 선배 기수들이 없앤 것을 왜 또 살려서...

9.3. 피자 도난 사건

2015년 3월 11일에는 피자에땅 피자 배달부가 예술관 지하 3층으로 배달을 간 사이 잠시 1층 엘리베이터 앞에 두었던 피자를 누군가가 11판이나 훔쳐간 사건이 발생하여 경찰을 부르는 등 큰 난리가 났다. 해당 피자 매장은 15만원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이후 다 식은 피자가 다른 층에서 발견되어서 혹 알바가 실수한 것 아니냐는 제보가 국민대 대신 전해드립니다 페이스북을 통해 올라왔으나 상식적으로 콜라만 냅두고 피자만 사라졌기에 알바의 실수라고 볼 수 없었으며, 또한 이 페이스북 글 내용과 달리 해당 피자는 끝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국민대 측에서 피자 알바생에게 죄를 덮어씌우기 위한 수작이라는 주장이 떠올랐고, 결국 해당 페이스북 글은 삭제되었다.기사
이후 조사 결과 청소부 A씨가 집에 가져가 먹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피자가 발견되었다는 국민대 주장과는 충돌된다. 더욱 문제는 A씨가 저녁에 지하 1층 화장실 옆에 있던 피자11판을 보았으며, 밤이 되어도 아무도 안 가져가기에 들고갔다고 진술한 것. A씨의 진술과 배달부의 진술이 전부 진실이라면, 1층에 있는 피자를 지하 1층으로 가져간 진범은 따로 있다는 말이 된다. 상식적으로 배달부가 배송중인 피자를 화장실 옆에 둘 리는 없기 때문에 배달부의 실수일 확률은 더 낮아졌다.기사

어째 사건 사고가 2015년에 다 몰린 거 같은 건 기분 탓인가(...)




10. 출신인물

10.1. 정치,관계

  • 남덕우 (정치학) : 서강학파 창시자, 전 대한민국 장관&국무총리
  • 故 유상근(법): 명지학원 설립자, 전 명지대학교 총장
  • 故 박성상(경제): 前 한국은행 총재
  • 조용기(법학): 복음여의도교회 당의장
  • 박맹우(행정) : 前 울산광역시 3선 시장, 새누리당 울산 남구을 국회의원
  • 문희갑(법학) : 전 대구시장,경제기획원 차관,청와대 경제수석
  • 채일병(법학) : 전 부패방지위원회 사무처장,국회의원
  • 김옥전(법학) : 전 부산경찰청장(경찰 치안정감)
  • 이태복(법학) : 전 보건복지부 장관
  • 오세정(행정) : 전 민주평통자문회의 사무처장
  • 배기선(정외) : 전 국회의원,KBS사장
  • 서갑원(법학) : 전 국회의원
  • 이철성(행정) : 청와대 사회안전비서관(경찰 치안감)
  • 손건익(행정) : 전 보건복지부 차관
  • 김보현(법학) : 전 국가정보원 제3차장
  • 장다사로(행정): 전 대통령실 총무기획관
  • 시민석(행정) : 고용노동부 대변인
  • 송성각(시각디자인):한국콘텐츠진흥원장
  • 조충훈(행정): 순천시장
  • 장영달(행정): 前 국회의원
  • 김철주(행정):전 인천지방경찰청장

10.2. 언론계

  • 故 송인득(경제): 前 MBC 아나운서
  • 손석희(국어국문): JTBC 보도 담당 사장
  • 문철호(중문): 前 MBC 보도국장, 현 부산 MBC 사장
  • 신선철(경영): 경기일보 회장
  • 백화종(행정): 국민일보 부사장, 게임물등급위원회 위원장
  • 김형철(경영): 이데일리 대표이사
  • 박래부(행정): 한국일보 논설위원실장
  • 박태호(정치외교): KBS 예능국장
  • 배재성(경영): KBS 스포츠국장
  • 이명우(경영): SBS 드라마본부 PD
  • 임경진(무역): 전 mbc아나운서, 프리랜서 아나운서
  • 김세희(법학): SBS SPORTS 아나운서
  • 최인희(영문): KBS 아나운서
  • 황인성(임산생명):연합뉴스 아나운서
  • 고윤아(언론):HCN아나운서
  • 이재성(언정): KBS 아나운서

10.3. 법조계

  • 문종술(법학): 법무법인 MK 대표 변호사
  • 강수림(법학): 성심법무법인 대표 변호사
  • 홍순기(법학): 법무법인 한중 대표 변호사
  • 김진한(법학): 법무법인 아주 대표 변호사

10.4. 재계

  • 김혁수(국사) : 한국 야쿠르트 사장,대표이사
  • 배동현(경영): 아모레퍼시픽 대표이사
  • 박관호(경영) : 위메이드 CEO 의장
  • 한태근(무역) : 아시아나 자회사 에어부산 대표
  • 윤종웅(경제): 국민대 총동문회장, 진로 고문, 하이트 맥주 대표이사
  • 이택하(경영): 한맥투자증권 대표이사
  • 김용휘(경영) : 전 현대 유니콘스 사장
  • 배인식(금속공학): 곰플레이어 개발자, (주)그래텍 이사회 의장
  • 윤상규(경영): 전 네오위즈게임즈 대표이사, NS스튜디오 대표이사
  • 박청일(경제): 동양건설산업 대표이사 사장
  • 고재일(경제): 동일토건 대표이사 회장
  • 홍사승(경영): 대한시멘트 회장, 쌍용양회 회장
  • 정남기(경제): 현대모비스 부사장
  • 유재은(행정): 국제신탁 회장

10.5. 디자인

10.6. 연예계

  • 윤조(성악): 가수, 연예인(그룹 헬로비너스)
  • 이효리(연극영화): 가수, 연예인(그룹 핑클)
  • 탁재훈(연극영화): 가수, 연예인
  • 이세창(시각디자인): 탤런트
  • 표인봉(연극영화): 개그맨(틴틴파이브)
  • 정경미(연극영화): 개그맨
  • 윤아정(연극영화): 백년의 유산, 김주리 역
  • 서승만(연극영화): 개그맨, 연출가
  • 박혜나(연극영화): 뮤지컬배우
  • 김소향(연극영화): 뮤지컬배우
  • 박두식(연극영화): 배우
  • 김가은(연극영화): 배우
  • 승희(연극영화): 가수(그룹 파이브돌스)
  • 장현철(경제): 가수
  • 정성한(기계): 개그맨, 전 컬투 멤버
  • 엄태웅(연극영화): 배우, 연예인
  • 이완(체육): 배우, 연예인
  • 신소율(연극영화): 배우, 연예인
  • 임백천(건축): 방송인
  • 김한국(공업디자인): 방송인
  • 최정호(경영): 성우
  • 세븐(스포츠경영 대학원): 가수, 연예인

11. 유명교수

  • 안경봉(법학): 금융조세포럼 수석부회장
  • 한창희(법학): 한국보험학회 이사,한국손해사정사협회 회장
  • 고현숙(경영): 코칭경영원 대표코치
  • 백기복(경영): 한국윤리경영학회 회장, 조직관리
  • 김도현(경영): 국제인명센터(IBC) 등재
  • 류재우(경제): 前 한국노동경제학회장, 前 국회입법조사처 경제산업조사실 실장
  • 안드레이 란코프(교양): 북한 전문가
  • 이창현(언론): 서울연구원장
  • 서정우(경영): 前한국회계기준원장, 現세계 회계기준원 의원
  • 김도연(언론): 한국미디어경영학회장
  • 김병준(행정): 前 교육부총리
  • 목진휴(행정): 한국정책학회 회장
  • 홍성걸(행정): 국민대 행정대학원장
  • 김개천(실내디자인): 前 한국실내건축가협회(KOSID) 회장
  • 변추석(시각디자인): 국민대 조형대학장, 前 새누리당 선대위 홍보본부장

12. 참고항목

  • 미술대학 - 국민대 디자인학과는 홍익대학교, 서울대학교 미대와 함께 대한민국 디자인 대학의 선두를 다투는, 미대입시생의 유망 대학이다. 정확히는 국민대학교의 디자인계열 학과가 있는 조형대학이 유명하고, 순수미술, 음악, 공연예술(연극영화, 무용)등은 예술대학으로 따로 분류되어 있다. 조형대학, 예술대학 미대의 비실기전형은 SKY복수합격자가 다수 포함되어있어, 성적만으로 입학하는 것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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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국민대학교 교가는 언제 만들어졌는지 확인할 자료가 없다. 다만 그 작사자를 통해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교가를 작사하신 분은 시조 시인인 가람 이병기 선생. 이병기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마련하시고, 그 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셨다. 이러한 그가 국민대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48년. 당시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시면서 국민대로 출강하신 것이 계기였다고.
  • [2] 교표를 비롯해 KMU를 영문 약자로 활용하고 있으나 정작 웹사이트 주소는 kookmin을 쓰고 있다. KMU는 계명대 웹사이트 주소로 사용 중.
  • [3] 미군정이 경성제국대학을 국립 서울대학교로 전환한 국립종합대학안(국대안)을 7월 13일 공표하고 강행하자 민족세력을 중심으로 소위 '국대안 파동'이 일어났고 많은 반발이 있었던게 당시 상황이다. 서울대학교를 다니던 남덕우 전 국무총리, 김성기 전 국민대 교수, 남광우 전 인하대 교수 등은 미군정 주도의 국대안에 반발하여 학교를 자퇴, 국민대학에 편입하여 1회 졸업생이 되었다.
  • [4] 일본식 절
  • [5] 국민대학교/북악캠퍼스 참고
  • [6] 창성동 캠퍼스는 초기 재학생들이 수많은 노력을 통해 얻어낸 곳이기에 창성동을 버린다는 것은 졸업생들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 [7] 같이 파주에 캠퍼스를 설립하기로 한 서강대와 이화여대가 철회를 한 영향이 컸다
  • [8] 기사에 나와있는 이유가 황당 그 자체인데, 학교에 대한 애정을 가지도록 하고 학교에 대한 관심을 상기시키기 위해 이런 일을 한 거라고 한다.(...)
  • [9] 보통 대학들은 졸업생을 학사조교로 돌리는 등의 꼼수를 써서 취업률을 올리는데 국민대는 이 쪽 방면에 전혀 신경쓰지 않았고, 결국 이 사단을 겪은 뒤에 부랴부랴 신경을 쓰게 되었다.
  • [10] 2014년부터 시작된 복지관 열람실 축소, 신도서관으로 건립되던 건물이 국제교육관으로 변경, 경상대 이전 등의 학내문제가 이와 관련있다
  • [11] FM은 최근엔 잘 안쓰기 때문에 고학번들 조차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보통은 '자주북악'으로 시작하지만, 총학생회 현판은 '해방의 함성으로 진군하는' 이라고 붙어있다. 서울대학교 등 다른 학교의 예를 볼때는 전자는 NL계열이 만들고 후자는 PD계열이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보통은 '자주북악'을 쓰는 편이다.
  • [12] 야간
  • [13] 야간
  • [14] 그런데 2014년 가을 선거에서 사회학과에 운동권 학생회가 들어섰다! 그것도 강성계열에 속하는 변혁모임 소속
  • [15] 이때, 총학실에 쳐들어갔다!
  • [16] 학교 커뮤니티에서 누가 어느 학생회가 제일 나았냐고 물어봤는데, 대부분이 05년 진짜학생회와 09년 날개를 달아를 꼽았다
  • [17] 정부후보가 모두 여자였는데, 경상관 콘서트홀 앞에서 점심시간에 삭발했다. 사상 초유의 사태인데다가, 여성 2명이 삭발해서 당시 학우들은 대충격. 아직도 저 두사람은 "총학생회선거에서 삭발한 그사람?"이러면 11년도에 학교 다니던 사람은 다 안다
  • [18] 재단/본부와 총동문회 사이는 앙숙에 가까운데, 부실대학 사태로 인해 총동문회의 입김이 엄청나게 강해졌던때였다. 그런데 그 점거날이 하필이면 총동문회 정기총회 날이었다! 처음에는 점거학생들을 무시하던 학교였으나, 총동문회장 한마디에 학생처장이 운동권 학생들 앞으로 끌려나와서 협상에 임해야했다
  • [19] 병원에 입원을 했다! 경영대 학생회장의 리치가 길어서 거의 일방적으로 폭행당했다고.
  • [20] 법대 학생회장은 당시 학생회장들 중에 일을 잘해냈던 몇안되던 학생회장 중 한명이었다
  • [21] 안드로이드만 지원한다. iOS는?
  • [22] 2012년에 기록된 그 얻어터진 법대 학생회장이다!
  • [23] 위에서 서술된 부분은 총 투표를 의미하는 듯.
  • [24] 극중 한국대학교라는 명칭으로 나온다
  • [25] 1990년 민국대학교 경영학과 입학. 6화 참조
  • [26] 2011년 오작교 형제들의 촬영도 방학 기간을 이용해서 촬영했었다.
  • [27] 지금의 정릉 고려대 보건대학캠퍼스 부지가 옛 국학대학 부지였다
  • [28] 당시 기사인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3398674 참조
  • [29] 1965년에 재단법인 국민학원이 중앙농민학교를 인수하여 운영하다가 1969년에 전환
  • [30] 관련 기사는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85623
  • [31] 쌍용과 관련되었는데 IMF이후로 쌍용 쪽을 생각해보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하지만 현대자동차와 한국GM 등이 지원하는 몇 안되는 대학중 하나고, 취업률도 상당히 높은 편.
  • [32] 입학식 전에 신입생들을 불러다놓고 오리엔테이션을 하는데, 이 때 학과 선배들에게 무조건 인사를 하라고 가르친다. 얼굴을 몰라도 인사를 해야하기 때문에 신입생들은 일단 예대 근처에서 보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다 인사를 하게 된다. 인사를 하지 않으면 작든 크든 '집합'으로 연결된다. 후배는 선배의 얼굴을 몰라도 선배는 이름표가 달린 것을 보고 후배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점은 신입생들이 한 학기가 지나기 전까지도 예대 내부에 있는 매점을 잘 갈 수 없게 만드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 [33] 이때 숭실대 갤러들이 이 대열에 동참하여 숭실대갤과 사이가 안 좋아졌다. 그전까지는 국숭동맹이라 불리며 함께하던 숭실대였기에 국민대 갤러들의 배신감은 더욱 심했다. 그리고 불과 몇달 후, 644사태가 터지며 숭실대갤이 털리게 되는데...
  • [34] 서강대, 부산대, 인하대 갤러리가 친목이 활발하기로 유명하다.